고수자기의 맥과 연원 2010년 10월 8일 15:00 고수자기는 고사면 사정리(사기정)로 현 고수면 와촌리 사동마을이다. 고창현이 되기 전 백 제의 대량평 부곡촌이다. 넓은 들을 차지하는 부곡의 행정체계이다. 그 중심이 아산면 성틀 봉(태봉)이다. 태봉이 성틀봉이다. 서산 옆의 성틀봉은 원래 이름이 아니다. 도성부곡이 아산면 독곡이다. 이곳도 부곡촌이다. 고창이 특수지역이다. 동국여지승람에 在 縣北二十五里에 있다는 곳이 바로 독곡이다. 덕암소는 在縣北二十九里로 현재의 아산면 구 암이다. 갑향(아산면) 또는 개평이라고 하였다. 在顯西二十里에 있으며, 상갑이 아산면소재 지지역이고, 하갑이 독곡이다. 포내호리는 원래 하품을 구웠는데 점차 중품으로 올라섰고, 고수자기는 중품에서 하품으로 주저 앉고 말았다. 고수자기는 조선조에 떨어진 것이다. 조선 민중의 자기생산지가 되었다. 도기와 자기를 굽던 특수한 지역으로 전해진다. 일종의 수형소와 같은 곳이다.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도기와 자기 같은 그릇을 굽게 하였다. 특히 사동은 고수요라 하여 일본에서도 그 전통요지로서 인정해주고 있다. 조선조말까지 백토 등을 원료로 하여 1,300~1,500도의 고열 가마로 구워낸 도자기를 구웠 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2km를 더 가면 바당바우가 있다. 마당바우를 장암리로 일본인들이 바꾸었다. 근처에 도기소가 있던 옹기점을 장암리로 바꾸었다. 도기요지를 자기들 마음대로 장암으로 바꾼 것이다. 행정리를 바꾸어 본질을 흐렸다. 원래 이곳은 옹기점이다. 지명의 원 이름을 찾아야 한다. 계속하여 점촌으로 불렀다. 요새 근자에 장암으로 고쳐 불린 것이다. 역사가 얼마 안 된다. 10여년 남짓 되었을 것이다. 점촌이 전통이 있는 이름이다. 배남재가 생산판매하고 있다. 아버지가 하던 것을 그가 이어 받아 관리를 하고 있다. 조선 중기(명종조 이후) 이후인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조선자기는 백자와 사기가 있다. 사동 은 주로 사기를 생산한 사기정이다. 사기정은 원래 임난 직전까지는 백자를 생산하다가 후 에 순 사기를 생산하였다. 서민들이 써야 하기 때문에 안 깨지게 만들었다. 사기정이 바로 이런 사기를 굽던 일을 하던 곳이다. 고려시대는 청자 중 분청사기를, 조선에 와서는 백자로 그 맥을 잇다가 임난 이후 사기그릇 을 구웠다. 사동은 주원료가 되는 백도와 세사 등 규산질 토질이 있고, 장석질이 있다. 규산질과 장석 질이 있어야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 양질의 도토가 생산이 많았다. 또한 유 약에 찰기를 돋구는 천연수와 유약의 원료인 장석과 석회석 등이 있다. 이것들을 잘 갈아서 유약을 만들었다. 백상감과 분청사기가 있다. 백상감은 그릇 몸뚱이에 칼을 대 문양을 만들 어 낸다. 판 곳에 백토를 넣어서 만든 것이 백상감이다. 분청사기는 무나 나무 등에 문양을 만들어 그것을 자기의 몸통에 똑같이 찍어 내는 것이다. 분청사기는 흑상감이 이어야 만든 다. 이러한 원료가 사동 인근에 나왔다. 역사적으로 요업이 성행하게 된 이유다. 문양은 유길상이 일제 때 경기도 광주와 여주에서 명장인 최남성에게 배웠다. 유약을 바르 는 법과 문양 그리는 것을 사사받아 온 것이다. 아우인 유하상(호가 동곡)에게 가르쳤다. 형
재 간에 일제 때 먹고 살았다. 나한동의 아들이 나희술이다. 청자의 몸통을 만든 것을 나한 동이고, 문양을 그리고 유약을 바른 것은 유길상과 유하상 형제다. 청자를 굽는 것을 재현하였다. 이들은 일본인들이 돈을 주어 배운 것이다. 옛날 고수자기를 재현한 것이다. 유하상은 60년대 초에 전국과학전람회에 출전하기 위해 준비를 하였다. 함 평초등학교에서 도자기 재현사업을 지원하여 청자를 그곳에서 재현하는데 성공하였다. 전국 과학전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유화상이 코칭한 작품이 받은 것이다. 고창의 기능인으 로 인정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상당한 권한이 되었다. 사기정의 그릇은 하품이라 잘 안 팔렸다. 마침 1927년도에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야나기 무네요시)가 고수자기를 알리게 된 것이다. 그는 백제계 일본인으로 일본 고미술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20년대 전라도를 기행하면서 선운사를 들렸다. 그는 고려공민왕 때 만들어진 선운사의 만세루를 합장하면서 세 바퀴를 돌았다. 그는 불교미술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27년 10월에 장성을 내려올 일이 있었다. 장성에서 목로주점을 찾아 왔다. 그가 주점을 찾는 이유는 조선백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장성의 목로주점에서 고수자기의 자환을 보 고 그 투박하고 순수한 서민들의 술잔을 보고 반했다. 그는 민족성이 잘 드러난 그릇을 좋 아했다. 그는 술잔을 사서 자환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일본으로 가서 그 는 일본 고미술계에 고수자기를 소개하였다. 질박하고 투박하면서 순수한 조선백자의 술잔이라고 소개를 하였다. 고수요에서 나온 자기 의 자연의 미를 칭찬한 것이다. 동경에서 고미술가들이 1929년에 방문단이 고수자기를 보 러오기 위해 방문하였다. 일본의 고미술가들은 자기를 재현할 수 있냐고 하자 유길상이 만 들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선백자로 알고 있는 것은 막걸리집의 잔이었는데, 이를 찻잔으로 알고 주문한 것이다. 두 번째 일화로는 1929년 양태승교장에게 고수사람들이 사이토총독과 마스도미가 친한 것 을 알고 양태승교장에게 사이토총독의 붓글씨 한구절을 부탁하도록 요정한 것이다. 고수사람들은 일본의 하이꾸(俳句)라는 한 구절의 글씨를 써 달라고 하였다. 사이토총독이 쓴 글씨를 고수자기에 써서 일본에 내 놓았는데, 유명해져서 비싸게 팔렸다. 고수자기가 일 본에서 유명해졌다. 연원은 사이토총독이 써 준 글씨를 떠서 만든 것이 명품화 되어 비싸게 팔렸다. 고수자기를 백자 다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고미술가의 애호를 받았다. 1930대 고창산업조합 이사회에서 고수자기를 살려서 일본으로 도자기를 수출하고 싶어 했 다. 그러나 이를 재현하기 위한 돈이 없었다. 일본 동경유학생들을 동원하여 고미술가들에 게 투자를 설득하도록 하였다. 이들의 설득으로 지원단이 구성되어 고수자기의 자금유치에 성공을 하였다. 동경의 고미술가들이 고수자기를 1만개 주문하였다. 이래서 일본에서 온 사 람이 기요미즈였다. 그는 창씨개명한 박창현의 아버지로 서울에서 데려왔다. 일본인과 유대하면서 도자기 산업을 육성한 사람이다. 만개를 만들터이니 관리 감독하여 팔 아달라고 하였다. 지금의 박창현의 아버지가 지은 1930년대 중반에 일본식 가옥이 사기정 에 있다. 박사면의 아버지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관리를 하고 고창산업조합에서 만드는데 성공하여 만개를 완납하였다. 일본에 고수요로 많이 남아 있다. 별 것은 아닌데, 투박해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다완이었 다. 해방 후 민간자본이 끊어져 없어졌다. 산업조합은 현 교육청자리였다. 제3공화국 때 일본인들이 1,000 ~ 2,000개를 주문해 가기도 하였다.
유하상의 아들 유봉춘(동곡자기)과 그의 처남 김종환(선운자기)씨가 그 맥을 잇고 있다. 나 희술이 평촌의 가마터를 모두 부셔버렸다. 무식한 놈이다. 고수자기의 맥은 김종환이 잇고 있다. 고수 사동마을의 유적을 나희술이 부셔버린 것이다. 나쁜 놈이다. 고수요에서 사이토총독의 글씨를 세기기 위해 일부러 하이꾸를 받은 것이다. 일본에 팔 것 을 염두 해 두고 넣은 것이다. 고창산업조합원들이 머리를 쓴 것이다. 고창금융조합장(농협 의 전신)을 박하서(박동차의 아버지)가 초대 조합장을 하였다. 강호상고에 백토구덩이가 두 개 있었다. 사동의 백토가 떨어지자 강호상고에서 파갔다. 이 백토 구덩이에서 한국전쟁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장두리 길가로 영광으로 가는 도로의 왼쪽에 토탄이 많이 나온다. 구루마로 퍼온 적이 잇 다. 바닥에 토탄층이 있다. 해방 후 방장산에 흑연광산이 있어 광구가 있었다.
추후논의 사항 장암리의 원 이름을 찾아야 하는 문제 화포청의 건물이 무장의 김은수씨댁에 있다. 이 건물을 복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