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면의 행정중심지, 하련리(下蓮里) -해리면 하련리이 병 렬(고창문화연구회)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해리면 동부의 하련리는 선운산지와 접해 있다. 하련리는 남쪽과 북쪽으로 높은 산지들로 둘러 싸여 있 고, 동쪽과 서쪽으로는 해리천이 만들어 놓은 충적지가 넓게 분포하여 이를 이용한 논농사가 발달해 있다. 하련 리는 동으로 평지리, 서로 안산리와 왕촌리, 남으로 송산리, 북으로는 심원면 도천리와 선운산도립공원 등이 인 접한다. 해리는 역사의 기록상으로는 삼한시대 모로비리국으로 추정되며, 백제시대 상로현(上老縣, 공음 두암 저수지), 당나라의 웅진도독부 좌로(佐魯-나주목 영광군), 남북국시대 장사현(長沙縣), 고려시대 장사현(長沙 縣), 조선시대 무장현(茂長縣)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림> 일제강점기인 1918년 해리면 하련리 일대 지도 그러나 해리와 심원 일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을 본다면, 이 지역은 이미 선 사시대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청룡산 아래 하련리·평지리와 심원 도천 리의 고인돌들로만 보아도 이 일대에 얼마나 선사문화가 발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하련리는 선사 시대에는 뱃길이 닿아 수산물이 풍부하였을 것이고, 고성천 주변은 이른 시기에 도작문화가 발달하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련은 궁산저수지 축조 후 해리면소재지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하련리는 행정구역상 구한말에는 무장군 청해면(靑海면)에 속한 리였다. 그러다 1914년 3월 1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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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통합령에 의해 청해면과 오리동면(五里洞面) 및 상리면(上里面)의 복구(伏拘), 상수(上水), 월곡(月 谷)이 통폐합하여 해리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하련리는 평장리를 병합하여 하련리라 해서 고창군 해리면에 편입되었다. 법정리인 하련리(下蓮)에는 행정리로 하련(下蓮), 남시(南市), 신대(新垈), 평장 (平章) 등이 있고, 자연취락으로는 하련, 신대(新垈), 계선동(係船洞), 성덕(聖德), 평장(平章) 등이 있 다. 하련리에는 해리면의 주요한 공공기관과 각종 시설들이 있다. 하련리의 마을들은 이상산 (198.8m)과 청룡산(314m) 사이에 하련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아래로 배맨바위로를 경계로 동쪽이 평장마을이고, 서쪽이 신대마을이다. 그리고 해리외곽도로인 해리청룡길의 남쪽이 청해마을이다. 하 련마을은 청룡마을과 바로 접하고 있으며, 하련마을의 남서쪽의 해리시장을 중심으로 남시마을이라 부르고, 남시마을의 서쪽이 동시마을이다. 하련리의 행정리는 구도로와 하련저수지의 수로를 따라 경계를 나누었는데, 하련리에 우회도로와 새 로운 도로들이 개설되면서 행정리의 분리조정이 필요하다.
<그림> 1830년대 조선후기 무장읍지로 청해면의 평지 옆에 시장이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다. 1) 하련(下蓮) : 하련은 해리면의 1790년경 안진머리장터(安子市)가 이곳으로 옮기면서 인구가 증가 하자 남시, 하련, 동시, 청해 등으로 행정구역을 분리하였다. 하련은 연꽃이 만발한 연못의 아래쪽의 마을이라 하여 불린다고 전하고 있다. 하련마을은 하련2길-해리중앙로-남시길-고습재길(서쪽의 하련 제 수로가 경계)-하련1길-청해2길-청해2길-동시길-하련2길로 연결되는 곳이다. 하련은 시장이 있는 남시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하련리의 중심지로 상업지구보다는 일반 주거지의 특징 이 잘 나타나는 곳이다. 하련마을에는 해리우체국, 효도한의원, 해리신협, 해리약국, 해리제재소, 성 심의원, 해리중앙교회, 현대의원 등의 주요기관이 있다. <그림> 해리중앙로 전경 2) 동시(東市) : 동시마을은 해리시장인 남시마을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위치는 서쪽인데, 마을이름은 동쪽의 시장이라는 뜻의 동시이다. 이는 아마도 서쪽은 지는 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아 의도적으로 동쪽을 의미하는 동시로 부른 것 같다. 동시마을은 남시마을에서 1991년에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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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는 하련리에서 가장 늦게 행정 분리가 된 마을로 하련리를 구획정리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동시 마을은 하련2길-해리중앙로-해리교-고성천-행산교-논소로길-하련2길로 연결되는 곳이다. 동시마을 에는 동시마을경로당을 비롯, 해리상노회, 해리파출소, 해리어린이집, 전주치과, 해리119구급대, 고 창새마을금고 해리지점 등의 기관과 의료시설이 있다. 3) 남시(南市) : 남시마을은 해리시장이 발달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마을의 경계는 해리지구대-남시 길-고습재길-남시길-남시길-해리중앙주차장-해리중앙로로 연결되는 곳이다. 마을은 해리시장이 들 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하였다. 마을의 규모가 커지자 1990년 서쪽 일부를 떼어내 행정리인 동시마을 이 되었다. 남시마을은 마을의 대부분을 해리시장이 차지하고 있어 상업지구에 해당한다. 남시마을 은 하천의 충적지에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에 식수는 하상의 높이와 동일하기 때문에 평장이나 신대 보다는 용수를 구하기가 쉬웠던 마을이다. 이렇게 용수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리시장이 입지할 수 있었다. 남시마을의 해리중앙로상에 하련리 마을당산이 있으며, 주요시설로는 해리농협, 해리시장, 해리농협 하나로마트, 남시마을경로당 등이 있다. 4) 청해(靑海) : 청해마을은 하련마을의 서북쪽에 있다. 청해마을은 하련의 북서쪽의 외곽에 넓게 분 포하는 지역이다. 최근 해리면의 주요 기관과 시설들이 청해마을지역으로 이전하고 있다. 청해마을 은 하련리의 변두리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나 하련리 우회도로와 같은 도로들이 마을 주위로 새로 개 설되면서 성장한 마을이다. 마을의 경계는 하련2길-동시길-청해2길-청해2길-하련1길-신대경계(평지 청룡길의 위)-해리중학교-해리종합복지관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마을의 주요시설로는 해리면사무소, 원불교 해리교당, 해리농협 사료판매장, 청해마을회관, 해리면복지회관, 해리 119지역대, 해리교회, 고창교육지원청 해리면교직원사택 등이 있다. 5) 신대(新垈) : 신대마을은 하련리의 북쪽에 있으며, 하련저수지 아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신 대마을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서쪽이 신대, 동쪽이 상암, 하련저수지 아래 마을이 계선동(지성동)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위 세 자연마을을 하나의 행정리로 묶어 신대리라 부른다. 신대마을에도 바우 독이라 불리는 언덕에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있었는데, 지금은 흙 속에 파묻어 버렸다고 한 다. 이러한 고인돌을 통해 하련리의 마을들 중 신대와 평장이 가장 이른 시기인 청동기시대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은 이상산 사면에 있으며, 주요마을시설로는 신대마을회관, 해 리고등학교, 신대마을회관, GS해리주유소 등이 있다. <그림> 신대마을 표지석 6) 평장(平章) : 평장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300m 거리에 있다. 마을은 1800년경 인동장 씨가 설기하여 세거하였다. 이후 장수황씨, 상주주씨 등도 입거하여 세거 중이다. 성덕마을은 90년 전부터 청도김씨가 설기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이곳에는 서당이 두 곳이나 있어 글 장(章)을 썼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마을 곳곳에 고인돌이 있었으나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만이 남아 있다. 평장마을은 하련리의 행정구역상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청룡산 아래로 일제강점기의 동굴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배맨바우 밑의 골들 사이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곳에 그 흔적과 동굴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마을은 배맨바위 아래의 곡저(谷底)에 입지하였기 때문에 충적지인 선상지(扇狀地)가 발달하였다. 평 장마을의 곡저에는 밭농사가 발달하고, 평장마을의 선상지 끝부분인 하련마을 부근에는 논농사가 발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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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련리의 자연환경과 지명 하련리의 산계(山系)는 호남정맥(노령산맥)의 구황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북서쪽으로 발달하여 성송면 하고리의 삼태봉을 이루고, 다시 북서쪽으로 발달하여 무장면 신촌리에서 왕제산에서 멈추었 다. 이 산계는 다시 북쪽으로 발달하여 무장읍내 사두봉을 만들고, 계속 북쪽으로 발달하여 한제산· 비학산·청룡산·개이빨산·경수산을 이루고 곰소만에서 멈춘다. 하련리는 청룡산의 남서쪽에 입지한 마 을들이다. 위 산계가 하련리의 동쪽에서 낮은 구릉의 재를 만들어 서쪽으로 발달하다가 멈춘 산이 청룡산이다. 하련리는 북쪽이 높고, 서쪽과 남쪽은 넓은 들이 발달하였다. 동쪽으로는 평지리가 있는 데, 이곳은 산록완사면에는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골 사이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련리의 하계는 고성천이 한제산에서 발원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행산교 앞에서 임해천과 만난 다. 임해천은 무장 월림리에서 발원하여 남에서 북으로 흐르다가 궁산저수지에서 해리천에 합수된 다. 하련리 주위로 이러한 하천의 발달은 넓은 충적지를 만들었고, 충적지를 개간하여 일직부터 농 경이 발달하게 되었다. 마을의 고로들에 의하면, 하련은 일제강점기에 궁산저수지를 축조하면서 뱃 길이 끊어져 더 이상 조수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하련저수지 밑으로 산간의 곡저에 나타나는 충적지인 선상지가 평장과 신대 사이에 그 형태가 일부 남아 있다. 이러한 선상지성 지형에 입지한 마을들은 물을 구하기가 어려워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진다. 특히 지하수는 충적지 밑의 기반암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우물의 깊이가 깊다는 것이 특징이다. 계선동(係船洞) : 하련 서북쪽에 있는 마을. 옆 산의 바위에 배를 맺었다고 함. 그러나 이는 풍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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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해석해야 함. 하련리가 행주형(行舟形)의 풍수적 형국이기 때문에 배를 매정 놓아야 할 비보개 념의 지명이 필요함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됨. 고십재 : 해리면 하련과 심원면 도천리 경계의 고개. 계선암(繫船岩) : 배맨바우. 노구암(老嫗岩) : 배맨바우. 깐치네(까치네) : 현재 장원주유소 자리라고 함. 옛날에 도살장이 있었다고 함. 삼챙이(삼천) : 해리교회 바로 뒤의 일대의 지명. 두꺼비바우 : 하련 뒷산 밑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두꺼비와 흡사함. 배맨바우(계선암, 노구암) : 계선동 뒷산 위에 있는 큰 바위. 그 모양이 배를 매 놓은 것 같으므로 배맨바우라 하며, 또 그 모양이 늙은 할머니가 애기를 업은 것과 흡사하다 하여 노구암이라고도 함. 한편 이를 거북바우라고 부르기도 함. 진골 : 하련제의 위의 배맨바우 아래 첫 번째 골의 이름. 퇴앗골 : 하련제의 위의 배맨바우 아래 햇빛이 잘 들어간다고 해서 불렀다고 함. 진골 바로 옆의 골. 배맨골 : 배맨바우 밑의 세 번째 골. 도둑골 : 배맨바우 밑의 네 번째 골로 골이 매우 깊음. 골에 도둑들이 많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함. 남산편 : 하련리 평장마을 앞에서 하련까지의 넓은 들. 바우독 : 바우독은 원래 신대마을 뒤로 이곳에 고인돌이 몇 기가 있었기 때문에 바우독이라 불렀다 고 함. 해리면 하련리 546번지 일대. 지름박골 : 이상골의 서쪽에 있는 골. 이상골 : 하련리 신대마을 뒤에 있는 가장 깊은 골. 이곳에 예전에 샘이 있어 이 물을 먹고 살았다 고 함. 안장골 : 하련리 이상골의 동쪽에 있는 작은 골. 성덕(聖德) : 하련리 평장 동쪽에 있는 마을. 장평(長坪) : 하련리 평장 뒤에 있는 들. 쟁팽이골 : 해리 정수장 바로 위에 있는 골로 소나무가 많았다고 함. 고성천(古星川) : 왕제산에서 발원하여 해리면 하련리를 동에서 서로 흐르는 소하천으로 행산교에서 임해천과 합수함. 고성천은 하련리·평지리와 고성리의 경계를 이룸. 동냥치 : 고성저수지 아래의 논으로 땅이 메마르고 곡식도 안 되어 그렇게 불렀다고 함. 임해천(臨海川) : 무장면 월림리에서 발원하여 해리면 하련리의 서쪽으로 흐르는 소하천으로 궁산저 수지에서 해리천에 합수됨. 임해천은 안산리와 하련리의 자연경계임. 하련제(下蓮堤) : 해리면 하련리의 북쪽에 있는 못. <그림> 하련제 전경 해리교(海里橋) : 해리면 하련리 신대 남쪽에 있는 다리. 해리시장(안진머리장, 안자시, 안산장, 海里市場) : 해리면 하련리에 서는 시장. 전에는 안산리 ‘구장 터’에 있었으므로 그때의 이름을 따서 안진머리장 또는 안자시라고도 함. 4일과 9일에 장이 섬. <그림> 하련리 일대 항공사진(네이버지도)
3. 배맨바우를 통해 본 해리의 선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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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아산과 해리 간 지방도와 심원면 도천에는 규모와 양에서 결코 타 지역에 뒤지지 않는 많은 고인돌들이 있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어느 특정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분산되 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특히 왕촌리토성 동쪽 안산리의 이성산 기슭에는 약55기의 지석묘가 존재 하고 있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해리천과 담암천의 하계망을 중심으로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 은 해리면과 심원면 전부이다. 특히 해리면과 심원면은 대부분의 법정리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존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칠성어장이라 하여 과거로부터 서해안의 3대 조기어장으로 불릴 정도로 어업이 성하였고, 해리천과 담암천 주위의 충적지를 개간하여 농업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해리면 왕촌리에는 시대미상의 왕촌리토성이 있다. 이 성터는 왕촌리 조지산(225.4m) 정상에 있다. 이 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분자료에 “土城延長約二百間”이라고 기록되 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이 토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토성의 흔적을 쉽게 확인할 수 없다. 왕촌리토성에는 유물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시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왕촌리토성 아래 와 주위에 많은 고인돌이 남아 있어 이른 시기에 인간이 거주하였고, 이곳이 아주 중요한 산이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토성은 시대적으로 백제시대 이전의 토성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지방통치 개념은 산성이 기본이고, 산성 아래 현 치소를 두기 때문이다. 왕촌리토성은 백제가 이 지역을 관리하기 위하여 장 자산에 상로현을 설치하고 장사산성을 축성하였기 때문에, 바로 인근에 성을 축성하지는 않기 때문 이다. 조선시대 초기는 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서남해안의 읍성의 축성이었고, 각 읍성의 축 성에 대한 기록을 남기었는데 왕촌리토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왜구가 창궐한 고려후기의 성으 로는 그 가능성이 있다. 왕촌리토성은 이 일대가 모로비리국에 흡수되기 전부터 어업과 소금생산이 활발하여 많은 경제적 이 득을 보호하고 해안을 통해 침입하는 적을 방비하기 위한 토성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주변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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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 바다였지만 해안습지와 해안사구의 발달로 어로활동과 소금생산이 많았다. 많은 수산물과 소금 은 산 넘어 모로비리국으로 활발하게 유통이 되었을 것이다. 이 지역의 경제권이 모로비리국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로비리국에 흡수되어, 읍락으로 모로비리국의 부족연맹체였을 것이다. 모로비리국은 주진천을 따라 아산의 구암을 넘어 원평 부근까지 배로 침입이 가능하나 수로가 좁고 산으로 둘러싸여 결코 침입이 쉽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서해안은 배를 타고 해리 하련까지 입항하 여 약 8km 정도 가면 바로 모로비리국의 중심지이다. 모로비리국에 있어 해리지역의 해안방어는 1 차 방어선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이 뚫리면 바로 아산 학천을 넘어 태봉으로 가는 직선교통로 이기 때문이다. 해안은 주민들의 안정된 취락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왜구가 내 륙 깊숙한 곳까지 창궐한 것만 보아도 해안의 방어는 매우 중요하였다. 조지산은 정상에서 북쪽 궁산저수지 너머로 줄포만이, 동쪽은 선운산과 해리, 그리고 신앙유적인 거북바위가 보인다. 조지산의 서쪽에는 봉수대가 있던 봉화산이 있다. 조지산은 당시 서해안을 한 눈에 조망해볼 수 있으며, 모로비리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조지산 정상은 근래에도 군부대가 주둔하여 서해안의 해안경비초소가 있었다. 물론 상업적으로도 농수산 물이 집중할 수밖에 없는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 조지산 바로 뒤의 안산리 이상동에는 조선후기까 지 안진머리시장이 존재하였던 것만 보아도 이곳이 상업적으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선사인들의 신앙유적지로 추정되는 배맨바위가 해리면 하련리 뒤에 있다. 이 바위는 「계선암 배맨바위」로 불리며, 배를 정박하여 밧줄로 묶은 바위라는 암석 유래담이 전한다. 이 바위는 높이 20m, 둘레 100m 정도의 퇴적암 무더기로 민둥한 산등성이에 위치하여 멀리서도 쉽게 시야에 들어 온다. 지금은 이곳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서해와 해안선이 접해 있으나 예년에는 이 산 정상까지 바닷 물이 들어와서 배를 이 바위에 매어 달았다고 하는 데서 ‘배맨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다는 것은 주변 산의 계곡에서 가끔 조개껍질이 발견되고 바위가 모두 퇴적암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 그동안 지각의 변화가 수억 년을 변화했다는 일면을 보여주는 증거의 바 위이기도 하다. 해리사람들은 이 바위를 거북바위라고 불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인들의 신앙 대 상이라 할 수 있다. 거북신앙의 유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공주석장리 구석기유적지에서 나온 돌거북 이다. 석장리구석기유적지는 돌거북 외에는 다른 동물의 조각품이 발굴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이미 2만 년 전부터 구석기인들의 신앙물로 추측하고 있다. 거북은 풍수지리에서 북현무(北玄武: 龜象)로 불리는 실재하는 동물로 오랜 역사를 통하여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동물로 여겼다. 옛사람들은 거북 이 주술적(呪術的)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껍질을 불에 구워 트는 모양을 보고 미래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다른 동물보다 수명이 긴데 기인하여 영년불가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물론 백제시대에는 반드시 산성이나 중요한 곳에 바위신앙유적을 배치시켰다. 특히 바위신앙은 거북 바위가 가장 많으며 방위로는 북쪽에 두었다. 이는 북현무를 거북이라 하여 수호신으로 여겼던 것이 다. 이 지역의 해리면과 심원면 어느 곳이나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은 그 규모와 수가 결코 적지 않 으며, 고대 산성이 존재한다. 또한 하련리에는 신앙유적으로 추정되는 배맨바위가 있다. 해리와 심원 지역의 농경지는 그리 넓지 않다. 그러나 연안에서 잡히는 수산물과 생산한 소금을 모로비리국과 교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 자연스럽게 모로비리국의 읍락이 되었을 것이다. 모로비리국을 합병한 백제는 모로비리국의 공동체 의식과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해안 경제권의 중심인 해리·심원 지역과 상하·공음의 일리국 일부 를 떼어 두 지역의 중간지점이자 뱃길이 닿는 장자산 아래에 상로현(上老縣)을 건치하였다. <그림> 배맨바우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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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을의 인물과 행적 김정문(金鉦文, 1867~1932) : 그의 자는 경수[敬(暻)洙] 호는 남곡(南谷)으로 고종 4년 무장현 청해 면 신대리(현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신대마을)에서 김해김씨 시중공파 15세손인 삼만의 차남으로 태 어나 백부 이만에게 출계하여 그 계대를 이었다. 27세 되던 1894년 3월에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봉기가 무장땅 동음치면 당산골 구수내에서 일어날 때 인근의 사미동 출신으로 청해면의 선군장이던 조성원의 휘하에 들어가 종횡으로 활동하던 중 5 월 말에 전주성의 서문 밖 용머리고개 근처에서 관군들과 10여 일 동안 격돌하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어 귀향하였다.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폐퇴하여 역적의 누명을 쓰게 됨에 그는 고향을 버리고 사위(徐判岩) 가 세거하고 있는 사돈지가에 숨어들어 은신하고 있다가 경술합방 이후에 사돈가의 주선으로 고창읍 신월리에 거처를 마련하여 옮겨 살다가 1932년에 한 맺힌 생을 마감하였다.(고창군지) 최창묵(1955~현재) : 최창묵 명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계수리 분야 명장이다. 1955년 전북 고창군 해리면에서 태어났고 열다섯 살에 상경해 서울 남창동 한미시계학원 에서 시계수리를 처음 배웠다. 기술을 배운 지 3년 만인 1973년 경인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이듬해 에는 전국기능경기대회 시계 부문에서 금메달을 딸 만큼 일찍이 실력을 인정받았다. 1975년에는 아 시아인 최초로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시계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1984~1995년과 2001년 전국 기능경기대회 심사장을 지냈다. 1992년 한국시계기술협회장 등을 지낸 뒤 2009년 명장이 됐다. 지 난달
23일
대한민국명장회
정기총회에서
임기
2년의
제11대
회장으로
뽑혔다.(한국경제
2013-03-03) 황기환(1935~현재) : 황기환은 해리일대가 농사철이면 매년 용수가 부족하여 마을주민들 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자 하련저수지의 제방보강을 수차례 국회의원과 군청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많은 건설비용에 따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1996년 유종근 전북도지사가 고창을 방문하였을 때 갑자 기 도지사에게 질문하여 현장시찰을 유도한 후 제방보강의 긍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유종근도지사는 도청직원에게 실태를 파악하도록 하여 지원 약속을 받았다. 그는 이 사업의 추진위 원장이 되어 땅과 도로개설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제방을 높이는 과정에서 일부의 땅이 수몰되기 때문에 당을 매입해야 하는데, 서울에 사는 땅 주인이 땅을 내 놓지 않았다. 그는 땅 주인을 겨우 설득하여 땅을 매입하려 했으나 군이 지원하여 매입하려는 가격과 소유주의 가격차로 매입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사제 삼천만원을 내어 군비와 합쳐 토지를 겨우 매입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지금은 해리주민들 간 물 때문에 싸움을 하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4. 마을의 문화유적과 이야기 하련리는 고성천과 임해천이 만나는 곳에 발달한 면행정중심지이다. 이러한 지형은 근세에 들어서야 도시발달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전통적인 인간거주의 공간은 주로 산과 들이 만나는 점이지대이다. 뒤에는 산이 있어 북서계절풍을 막아 주고, 마을 앞에는 물이 있어 식수와 농업용수가 부족하지 않 은 곳이다. 하련리의 경우 청룡산과 이상산 아래의 평장과 신대 마을만이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고 하련·동시·남시·청해는 근세에 형성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리면의 각종 기관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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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있는 위 네 개 마을은 선사시대의 유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1) 하련리 지석묘군1 :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산43-1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이 지석묘 군은 하련제 하단부 밭 가운데 2기가 50m 간격으로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은 고창서부지 역의 국궁장이다. 이들 고인돌은 몇 기는 산 아래로 밀쳐져 있으며, 한 기는 땅에 거의 묻혀 있다. 대표적인 지석묘의 크기는 370×255×120cm로 장축은 남-북 방향이며, 상석의 평면·단면 형태는 방 형이다. 지석은 묻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림> 하련리 지석묘1 2) 하련리 지석묘군2 :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평장마을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지석묘는 평 장마을 내의 김금례씨 집에 2기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집의 바로 뒷집 마당에 1기, 담장 밑에 1기 가 있다. 또한 장영환씨 집 앞마당에 2기가 자리한다. 지석묘의 형식은 대부분이 개석식으로 보이나 김금례씨 집의 지석묘는 상석이 장타원형의 판석이며, 주형지석을 세워 상석의 양쪽에 받쳐 놓은 형 태로 보아 바둑판식일 가능성이 높다. <그림> 하련리 지석묘2
<그림> 하련리 지석묘2-1 <그림> 하련리 지석묘2-2
3) 하련리 지석묘군3 :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청해마을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청해마을에 서 하련저수지 방향으로 이어진 마을길을 따라 200m 가량 가다보면 서쪽에 7가구 내외의 민가가 모여 있다. 지석묘는 이 마을의 김도태씨 집 마당에 8기, 담장너머에 1기 등 모두 9기가 자리하고 있다. 지석묘의 형식은 옮겨진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기반식이다. <그림> 하련리 지석묘3 4) 하련리 지석묘군4 :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신대마을 동쪽 하련저수지 아래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이 지석묘는 펌프장 바로 옆에 2기가 있으나 아직 보고되지 않은 개석식 지석묘이다. <그림> 하련리 지석묘4 5) 남시마을 당산나무(하련보호수) :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674-6번지의 남시마을회관 앞에 있는 노 거수이다. 이 노거수는 해리면소재지 파출소 맞은편에 위치하며, 1999년 9월 15일 보호수로 지정되 어 보호되고 있다. 수종은 느티나무이며 수령은 350년이고, 수고는 15m, 나무둘레는 3.6m이다. 상 태는 양호하며 주변으로 시멘트로 보호대를 설치하였다. 남시마을의 당산제는 원래 해리의 4개 마을이 따로 지냈으나 지금은 동시와 남시 마을, 청해와 하련 마을이 하나 되어 매년 번갈아 가면 지내고 있다. 당산제는 음력 2월 초하루에 지낸다. 원래 당산은 두 군데 있었으나 한 군데는 죽고, 현재 남시의 당산나무만 살아 있다. <그림> 남시마을 당산나무 6) 신대와 계선동 당산 : 신대마을 당산은 마을입구에 평지청룡길 116번지의 도로변에 있다. 현재는 당산은 지내지는 않고 있으며, 느티나무이다. 또한 신대리의 자연마을인 계선동(지성동)에도 마을 당 산이 한 주 있으나 이 또한 당산은 지내고 있지 않는다. <그림> 신대마을 당산나무 <그림>계선동 당산나무 7) 철륭제와 철륭집 철륭을 모시는 집은 님시길 9-17(하련리 173-1)번지의 집이다. 철륭은 원래 지신(地神)의 성격을 포 함한다. 흔히 철륭하면 집 뒤꼍을 이르는데, 대체로 산 밑에 집터를 잡은 집이나 마을에서 철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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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신다. 마을터가 세면 그 기운을 이기고 살아야 하는데, 이기지 못하면 마을에 우환이 생긴다고 믿 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 좋은 날을 받아 지신굿을 하여 집터의 센 기운을 없애고 집을 짓 기도 한다. 간혹 철륭을 모시는 집에서는 ‘철륭단지’, ‘제수독’이라 하여 쌀이나 나락을 담은 단지를 집 뒤꼍의 땅에 묻어놓고 모시기도 했다. 그래서 철륭단지는 매년 새 나락이 나오면 깨끗한 날을 받아 찧어서 갈아 넣으며, 그 전의 쌀은 밥 을 해서 먹는다. 그리고 명절이 되면 철륭단지 앞에 간단히 음식을 차려놓고 비손하기도 하였다. 단 지를 놓은 곳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하지 않으며, 철륭을 향해 침을 뱉지 않는다. 하련의 철륭은 먼저 남시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나면 마을주민들이 다시 우물에서 철륭제를 지낸다. 우물에서 지낸 후 다시 철륭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하련의 마을주민들은 정성스런 곡식 을 준비하고 철륭제를 지내는 우물의 물로 쌀을 씻고 그것으로 밥을 해서 제를 지낸다. 마을의 철륭 샘은 2012년 덮어버려 그 흔적만 남아 있고, 마을고로들은 철륭우물을 덮은 것에 너무 마음 아파했 다. <그림> 철륭집 전경
5. 마을의 현황과 생활상 1) 세대수와 호구(인구) 하련리의 각 행정리별 2002부터 2013년 12월 현재까지의 마을별 인구변화는 다음과 같다. 마을 년도
세 대
남시마을 인 계 남
구 여
세 대
동시마을 인 계 남
구 여
세 대
하련마을 인 계 남
구 여
2002
54
174
80
94
61
167
78
89
89
276
128
148
2003
54
171
79
92
59
155
72
83
93
288
138
150
2004
54
157
73
84
48
135
65
70
83
252
120
132
2005
50
144
68
76
51
142
71
71
84
250
120
130
2006
50
134
66
68
46
120
61
59
80
233
109
124
2007
53
143
73
70
43
107
56
51
81
221
103
118
2008
51
143
71
72
48
113
59
54
84
227
107
120
2009
51
134
66
68
49
111
54
57
80
199
96
103
2010
67
153
79
74
52
113
54
59
74
187
95
92
2011
51
125
63
62
51
119
60
59
79
190
90
100
2012
50
125
65
60
52
114
56
58
72
168
80
88
2013
51
120
61
59
44
99
52
47
74
161
76
85
계
636
1,723
844
879
604
1,495
738
757
973
2,652
1,26 2
1,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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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년도
청해마을 인
세
신대마을 구
대
계
남
여
2002
55
145
67
78
2003
57
156
70
2004
61
157
2005
62
2006
인
세 대
평장마을 구
계
남
여
45
116
54
62
86
45
114
54
71
86
44
114
153
68
85
46
68
166
78
88
2007
69
166
70
2008
69
152
2009
71
2010
세 대
인
구
계
남
여
32
81
40
41
60
32
79
39
40
51
63
35
75
38
37
111
51
60
34
76
38
38
45
101
45
56
37
75
39
36
96
44
103
44
59
36
74
38
36
63
89
44
105
46
59
35
72
37
35
145
64
81
48
113
52
61
38
70
35
35
108
184
72
112
46
109
47
62
37
72
38
34
2011
106
176
68
108
44
106
50
56
36
69
37
32
2012
114
191
81
110
45
105
50
55
35
65
36
29
2013
111
193
79
114
43
100
47
53
34
61
33
28
계
951
1,984
851
1,133
539
1,297
591
706
421
869
448
421
2) 하련리의 주요기관 및 시설 (1) 해리고등학교 : 해리고등학교(공립,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570번지)는 지난 1972년 개교하여 신 의, 근면, 창조라는 교훈을 바탕으로 학생은 배움에, 교사는 정열과 사랑으로 교사와 학생이 모두 하나가 되어 참다운 인간상 정립과 창의성 있는 교육을 내실 있게 추진하고 있다. 교훈은 신의, 근 면 창조,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동백이다. 느티나무는 풍요로운 소양과 창조적 전통으로 이상을 개척하려는 믿음직스러운 힘을, 동백은 외유내강의 정신과 미래지향의 실천 의지로 삶을 개척하려는 용기와 품위를 상징하고 있다. 1972년 1월 14일 해리종합고등학교 설립 인가 3월 8일 개교, 초대 김대기 교장 취임 1974년 3월 1일 해리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7월 10일 해리중학교에서 현 위치로 이전 2013년 2월 14일 제39회 졸업식(졸업생 총 4천4백3명) <그림> 해리고등학교 전경 (2) 해리중학교 : 해리중학교(공립, 고창군해리면 하련리 245번지)는 해풍(海風)을 견디어 더욱 붉게 타오르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 가까이에 자리한 한적하고 아담한 학교다. ‘성실(誠實), 협동(協 洞), 자립(自立)’을 생활 목표로, ‘지식 기반 사회의 창의적 인재 육성’을 위해 전 교직원이 노력하고 있다. 학생들을 자녀처럼 사랑하며, 교직에 대한 자긍심을 바탕으로 ‘질 높은 수업’을 위해 연구하는 교사, 심신(心身)이 건강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꿈을 키우는 학생, 교사와 학생이 서로 신 뢰하고 행복한 교육의 요람을 기치로, 참교육의 길을 향하여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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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9월 5일 해리고등국민학교 개교 1955년 10월 13일 초대 고갑술 교장 취임 1978년 12월 5일 학급증설 인가(21 학급) 1986년 3월 1일 특수학급 인가(1 학급) 2013년 2월 15일 제59회 졸업식 (졸업생 총 9천4백7명) <그림> 해리중학교 전경 (3) 해리면사무소 : 해리면의 행정사무를 맡아보는 해리면사무소는 12개의 법정리, 46개의 행정리, 102개의 반을 관할하고 있다. 해리면사무소는 1914년 청해면과 오리동을 통합하면서 해리면으로 개 칭하여 면사무소를 개설하였다. 당시 면사무소는 이상동에 있다가 안자시가 성장하면서 면사무소를 지금의 하련리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2013년 12월 현재 면사무소의 공무원수는 18명이다. 면사 무소는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222(청해2길 38)번지에 있다. <그림> 해리면사무소 전경 (4) 해리지구대 : 해리면 해리중앙로 49번지(하련리 93-1) 있는 공공기관으로, 시민의 생명·신체·재 산의 보호, 범죄의 예방과 수사 및 범인 체포 등과 같은 사법 경찰 사무의 담당을 통하여 지역 사회 의 공공질서와 안녕을 보장하고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 하는 특수 행정 업무를 수행한다. 해리 지구대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5일 주재소가 설치되었고, 1994년 12월 27일 현 위치에 개축하 였다. <그림> 해리지구대 전경 (5) 해리우체국 : 미래창조과학부에 딸린 공공기관으로 우편, 우편환, 우편 대체, 체신 예금, 체신 보 험, 전신 전화 수탁 업무 따위를 맡아본다. 해리우체국은 해리면 해리중앙로 96-1(하련리 261번지) 에 있으며, 1953년 5월 1일 개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림> 해리우체국 전경 (6) 해리농협 : 농협은 농업인의 자주적인 협동조직을 통하여 농업생활력의 증진과 농민의 경제적·사 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해리농협은 1969년 11월 19일 설립되어 초대 조합장으 로 김승곤이 취임하였다. 이후 2006년 7월 18일 상하농협과 통합하고 김재찬이 통합조합장으로 선 출되었다. 2007년 4월 2일에는 심원농협과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리농협은 본점이 하ㅓ 련에 있고, 심원과 상하에 지점이 있으며, 천일염산지종합처리장이 해리면 동호리에 있다. <그림> 해리농협 전경 (7) 고창신협 해리지점 : 신용협동조합은 지역·직업·종교 등 상호유대를 가진 개인이나 단체 간의 협 동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자금의 조성과 이용을 도모하는 비영리 금융기관이다. 고창신협 해리지점은 해리신용협동조합으로 출발하였다. 해리신협은 1977년 8월 31일 자연설립하고, 1977년 12월 27일 설립인가를 받았다. 1998년 9월 11일에 해리면 라성리에 있던 라성신용협동조합과 합병하여 운영되 다가 이것마저 2001년 3월 16일에 파산하였다. 이후 다시 고창신협에 새로 개설하였다. <그림> 고창신협 해리지점 (8) 고창군농업기술센터 해리면농업인상담소 : 해리면 청해1길 13(하련리 627-1번지)에 있는 농업인 상담, 우량품종보급, 현지순회 및 작물기술지도, 면학습단체, 품목별연구모임 육성 등이 업무를 하고 있다. 농업인상담소는 농촌에서 농민과 가장 긴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공공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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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해리면농업인상담소 (9) 해리면복지회관 : 해리면복지회관은 해리면 청해1길 23(하련리 162번지)에 있는 지역사회보호사 업과 자활사업 등을 하는 공공기관이다. 해리면종합복지관은 가족복지사업, 노인복지사업, 아동복지 사업 등 여러 부류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1년 10월 27일 개관한 해리면복지회관은 부지면적 2169㎡에 건축면적 396㎡ 규모이고, 지붕은 전통적인 건축물 모습에 가깝도록 기와구조로 되어있다. 이번 복지회관 건설은 2010년에 농촌환경 개발정비사업 선정으로 국비(70%) 및 군비(30%)를 확보하여 총사업비 5억8700만원을 투입, 건립 부 지 매입 후 작년 9월에 착공 금년 5월에 준공했다. 복지회관은 면민들의 공동체 의식 함양과 건강 한 지역사회 육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문화, 복지, 건강분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림> 해리면복지회관 (10) 해리시장 : 해리시장은 해리면 하련리 162번지에 있는 정기시장이다. 시장은 4일과 9일의 5일 시장이다. 해리시장의 전신인 안자(安子)장을 안진머리장이라고도 했으며, 무장에서 북쪽으로 20리에 있으며, 4일과 9일 장이었다. 이 시장은 조선후기 굴이 많이 나와 굴죽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1790 년 해리 하련으로 시장을 옮기면서 안자시장은 폐쇄되었다(全鮮茂長邑誌, 茂長市 鞍子市 在海里面). 안진머리시장은 해리면 안산에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물가상승 등 경제의 혼란이 발생하자 정부의 주요 소비재에 대한 통제정책으로 인하여 이들 시장이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러 한 상황은 6·25이후까지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956년 11월 30일에 해리시장이 가장 먼저 다시 개설되었다. 해리장은 한국전쟁 이후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한때는 우시장으로 번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70년대 교통이 발달하면서 우시장은 급속하게 쇠퇴되었고, 이와 함께 점점 해리장은 쇠퇴하 여 지금은 해리시장 점포의 3분의 1일 닫혀 있다고 한다. 해리장은 돼지국밥으로 유명하였다. <그림> 해리시장 (11) 원불교 해리교당 : 해리교당은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221-1(청해2길 44)번지에 있는 원불교 교 당이다. 1967년 당시 고창군 해리면의 윤심월명 교도의 주선으로 원불교 고창교당 최유권 교무가 직접 해리에서 보게 된 법회가 계기가 되어, 같은 해 7월 26일 원불교 해리교당이 설립되었다. 초대 교무는 1969년 5월 16일에 온 김화경 교무이다. 2013년 현재 교역자는 이안성 교무이며 교도 조직 으로 봉공회, 여성회, 어린이법회 등이 있다. 교도는 200여 명에 이르며, 매주 일요일에 정기 법회 가 열리고 매월 기도와 매일 마음공부를 위해 자선 및 기도가 열린다. <그림> 원불교 해리교당 (12) 해리교회 : 해리교회는 해리면 하련리 289번지에 있는 기독교 대한예수교장회 소속이다. 현재 담임목사는 서종완목사이며 연락처는 063-563-7646이다. 해리교회는 2005년부터 매년 어려운 이웃 과 시설을 위해 써달라며 총 1,800만원 상당의 물품 기탁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림> 해리교회 (13) 해리중앙교회 : 해리중앙교회는 해리면 하련리 199번지에 있는 기독교 대한예수교장회 소속이 다. 현재 담임목사는 최정규목사이며, 연락처는 063-563-6143이다. <그림> 해리중앙교회 (14) 해리어린이집 : 어린이집은 6세 미만의 어린이를 돌보고 기르는 시설이다. 어린이의 보호자가 근로, 질병, 기타의 사유로 돌볼 수 없을 때 국공립 단체나 민간단체 또는 직장 따위에서 보호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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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탁을 받아 보육하는 시설이다. 해리어린이집은 고창군 해리면 해리중앙로 67(하련리 115-11)번지 에 있으며, 연락처는 063-561-5558이다. <그림> 해리어린이집 (15) 고창새마을금고 해리지점 :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108-1에 있는 은행이다. 새마을금고는 우리 나라 고유의 주민협동수단인 두레, 품앗이, 향약, 계 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주민협동조직, 주민생 활은행, 주민평생교육의 3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연락처는 063-562-1183이다. <그림> 고창새마을금고 해리지점
3) 하련리 마을시설 (1) 하련여자경로당 : 고창군 해리면 하련1길 7(하련리 196번지)번지 해리중앙교회 앞에 있는 하련 마을 여자경로당이다. 하련여자경로당은 해리면소재지에 있는 유일한 여자경로당이다. <그림>하련여자경로당 (2) 남시마을회관 : 고창군 해리면 해리중앙로 58(하련리 674-4번지)에 있는 남시마을의 모정이다. 남시마을 모정은 해리장터가 있는 곳의 바로 옆에 있어 해리당산제의 중심적 공간이기도 하였다. 그 러나 지금은 해리장이 쇠퇴하면서 경로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림> 남시마을회관 (3) 동시마을회관 :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동시길 18번지에 있는 동시마을회관이다. 동시마을회관은 2010년에 건립되었으며, 부지는 해리양조장 안주인이었던 윤석례씨가 기증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 해 마을주민들이 마을회관 앞에 비석을 세웠다. <그림> 동시마을회관 (4) 청해마을회관 : 고창군 해리면 청해2길 16(하련리 278-1번지)에 있는 청해마을회관이다. 마을회 관은 고창교육지원청 해리면교직원사옥 옆에 있다. <그림> 청해마을회관 (5) 평장마을회관 : 고창군 해리면 평장길 21-4(하련리 426-2번지)에 있는 평장마을회관이다. 평장 마을회관 뒤로 배맨바우와 해리궁도장이 있다. <그림> 평장마을회관 (6) 신대마을회관 : 고창군 해리면 하련신대길 33(하련리 311-4번지)에 있는 신대마을의 마을회관이 다. 신대마을회관은 세 곳의 자연취락 중간에 건립되었다. 마을회관 앞에는 신대마을 모정이 있다. <그림> 신대마을회관 (7) 해리정 : 해리면 하련리에 있는 육각형의 정자이다. 이 정자는 과거 해리파출소가 있었던 자리에 세웠다. 파출소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자 이곳에 있던 느티나무를 그대로 두고 그 옆에
해리정을
지은 것이다. 해리정 옆에는 해리면연혁비와 해리면연혁와비가 있다. 글은 이기화전고창문화원장이 지었다. <그림> 해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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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신대모정 : 해리면 하련리 신대 번지에 있는 모정으로, 4325년(壬申, 1992)에 새로 건립된 석양 의 모정이다. 모정은 마을 앞의 건는들의 용교천 변에 있다. 모정은 앞면과 측면 각 2칸의 팔작지붕 의 건축물이다. 모정의 북동쪽에는 입암산성(가매산)이 보인다. <그림> 신대모정 (11) 하련우물 : 하련우물은 하련1길 18-6번지 앞에 있으며, 철륭제를 지내는 신성한 우물이었다. 2011년 전까지 우물이 있다가 2012년에 콘크리트로 막아 버렸다. 우물을 막아버리자 일부 주민은 철륭제를 지내는 신성한 우물을 막아버렸다며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만큼 하련우물은 지역주민의 식수원으로 가장 친숙한 공동체 삶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림> 하련우물터를 알려주고 계시는 주민 (12) 신대우물 : 신대우물은 두 개소가 있었다. 한 곳은 신대마을 입구에 있는데, 그 우물의 깊이가 깊어 지금은 철제뚜껑으로 덮어 놓았다. 다른 하나는 하련신대길 26-3번지의 마당에 있는데, 지금은 농업용수로만 사용되고 있다. <그림> 신대우물 (13) 평장우물 : 평장우물은 물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평장우물도 수도가 집집마다 들어오면 서 없애버려 그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14) 해리면 노성사(老成社) : 해리면 노성사는 해리면 하련리 해리중앙로 53-4번지에 있는 노인단 체이다. 노성사 안에는 2003년에 건립된 2층의 벽돌건축물인 노성사 본관이 있다. 본관의 1층은 양 안재(養安齋)이고, 2층은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노성사의 마당에는 단기 4343년(서기 2010년) 12월 2일에 건립된 육각형의 경노정(敬老亭)이 있다. 경노정 옆에는 송은청도김공요철공덕비(松隱靑 道金公堯鐵功德碑)와 노성사중건비(老成社重建碑)가 있다. <그림> 노성사 전경 (15) 해리게이트볼장 : 해리게이트볼장은 해리면 하련리 317-1번지에 있다. 게이트볼장은 기상에 영 향을 받지 않은 실내건축물이다. <그림> 해리게이트볼장 (16) 해리건강목욕탕 : 해리건강목욕탕은 2013년 9월 해리면 하련리 옛 해리면종합복지관 건물을 리 모델링해서 만든 작은 목욕탕이다. 해리작은목욕탕은 170㎡(약 50평) 내외 규모로 온탕, 냉탕, 사우 나실, 탈의실, 화장실, 별도 샤워장 등 최적의 목욕시설을 갖췄다. 특히, 운영비 절감을 위해 남탕ㆍ 여탕 구분 없이 하나의 탕을 남녀격일제로 운영하고, 경유보일러 대신 에너지 절감형 보일러를 설치 했으며, 해당 면의 자활근로자 인력을 배치해 인건비를 대폭 절감하고 있다. <그림> 해리건강목욕탕 (17) 고창교육지원청 해리면교직원사택 : 이 시설은 고창군 해리면 청해1길 42(하련리 278-2)번지에 있으며, 2007년 11월에 건립된 고창교육지원청의 교직원 사택이다. 이 사택은 고창 서부지역 학교 에 근무하는 교직원들을 위한 것으로 지상 3층 규모로 지어졌다. 이 사택에는 고창읍에서 멀리 떨어 진 상하, 해리면 등 고창 서부지역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40여명이 입주해 있다. <그림> 고창교육지원청 해리면교직원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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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국궁장 초파정(超波亭) : 이 시설은 원래 고창군 해리면 해리면 사반리 각동 808에 있었으나 현재는 해리면 하련리 448번지 일대로 이전하였다. 초파정은 1983년 1월 15일 고 박종남 초대 사 두를 비롯한 8명의 사원이 모여 사반리 각동에 과녁 1개를 설치하고 습시를 시작하면서 창립되었다. 이후 86년, 인근 각동 산34번지로 이전하였고 89년에 각동 해변가로 옮겼으며, 사원은 18명이 되었 다. 91년에 다시 해리면 사반리 각동 1008번지에 자리하였다가 현재의 하련리 하련제 아래에 자리 하게 되었다. <그림> 초파정 전경
4) 하련리의 의료기관 (1) 현대의원 : 고창군 해리면 남시길5(하련리 170) 에 있는 의원. 063-563-6035 (2) 전주치과 : 고창군 해리면 하련2길 38(하련리 212-4)번지에 있는 치과의원. 063-564-1881 (3) 성심의원 : 고창군 해리면 해리중앙로 88-1(하련리 194-1)에 있는 의원. 063-561-0795 (4) 효도한의원 : 고창군 해리면 해리중앙로 94 (하련리 206-1)에 있는 한의원. 063-561-1075 (5) 해리약국 :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209-1에 있는 약국. 063-561-5885 (6) 우리약국 :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해리중앙로 74번지에 있는 약국. 063-561-6665 (7) 소망약국 : 고창군 해리면 하련리 하련1길 10-12번지에 있는 약국. 063-562-2882
5) 하련리의 전설과 설화 (1) 도둑골과 활빈당 하련저수지 위의 도둑골에는 많은 도둑들이 근거지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도둑들은 자신을 보통 의 도둑이 아닌 활빈당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부자의 가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도둑골의 도둑들은 그 부잣집의 대문에 크게 돈을 몇 월 며칠까지 가져다 놓지 않으면 묘를 파헤쳐 시신을 거둔다는 글을 써 놓았다고 한다. 그러면 부자는 하는 수 없이 도둑들이 원하는 날짜에 돈을 가지고 도둑골에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도둑들은 매봉재에서 부자가 가져오는 돈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고 한다. 부 자가 가져온 돈을 도둑들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은 자칭 활빈당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2) 깐치네와 도깨비불 깐치네는 지금 평장마을 아래 주유소가 있는 곳으로 원래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이곳에 는 비가 오거나 밤이 깊으면 도깨비불이 항상 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안산양반(이경 춘)이 한 번은 해리에서 술을 잔뜩 먹고 취해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데, 도깨비가 안산양반을 끌고 다녔다고 한다. 안산양반은 안되겠다 싶어 도깨비를 줄로 소나무에 꽁꽁 묶어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 한다. 다음날 날이 새어 그 자리에 가보았더니 그곳에는 빗자루만 묶어 있었다고 한다. 평장주민들에 의하면, 이곳에 도깨비가 많은 것은 많은 아이들이 병에 죽었다고 한다. 그러면 주민 들은 죽은 아이를 보자기로 감싸 밧줄로 깐치네 소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이렇게 소나무에 매달아 묶어두면서 다른 동네 아이들이 다시는 죽지 말게 해달라는 기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 도개 비불이 늘 많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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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쟁팽이와 꺼적이 쟁팽이에는 소나무가 많았고, 이곳은 아이들이 죽으면, 아이를 보자기로 감싸 묶어 소나무에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황기환씨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집을 지을 때 석가래 보다 작은 처마를 만드는 꺼적 이를 이곳의 소나무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소나무를 쓰고 얼마 후 갑자기 병이 들었다. 그래 서 마을의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더니, 그 무당이 지붕에서 꺼적이를 쓱 뽑더라는 것이었다. 그 꺼 적이를 뽑은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무당은 꺼적이에 사람의 영혼이 있어 그 영혼이 아버지를 병들게 하였다고 말하였으며, 고인의 자녀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4) 배맨바우와 영광사람 배맨바우는 영광의 북문에서도 보이는데, 이 배맨바우가 영광에서 보면 꼭 상에가 나가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영광사람들이 이것이 보기 싫다고 해리 배맨바우에 와서 이 바위에 구멍 을 뚫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영광사람들이 배맨바우에 구멍을 뚫자 그곳에서 피가 나오자 겁을 먹 고 도망간 후에는 절대로 파괴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5) 퇴앗골과 일제강점기의 굴 일제강점기 일본군인들이 이곳 해리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인들은 배맨바우 아래의 골짜 기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일제가 패망할 무렵 이들은 이곳 청룡산 인근에 많 은 굴들을 팠다고 한다. 이는 미군이 이곳에 상륙장전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것이 라 한다. 공음과 해리 일대 산 곳곳에 일제가 파 놓은 굴들이 많다고 하는데, 이곳 평장마을 뒷산에 도 아직도 많은 굴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6) 배반바위 이야기 배맨바우 밑에는 두꺼비바우와 애기바우가 있다. 해리의 청룡산 인근의 바위들은 대부분 남쪽을 바 라고 있다. 옛날 고창읍성을 축성할 때 일이다. 많은 돌들이 필요한 축성에서 축지법은 필수였다고 한다. 축지법을 써서 많은 인부들이 이곳 청룡산에서 많은 돌들을 날랐다. 사람들은 모든 바위들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애기바우와 두꺼비바우만 북쪽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이 바위 를 배반한다는 뜻에서 배반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인근에서 묘를 쓸 때는 이 두 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묘를 쓴다고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묘들이 이 바위를 바라보지 않는다. (7) 전국 최고로 고소한 평장기름 평장마을에는 전국에서 유명한 고소한 기름을 짜는 집이 있었다. 그 집에서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짜 려면 하루씩은 묵어 가야했다고 한다. 평장기름집은 먼저 기름을 볶은 다음, 이를 디딜방아로 찧는 다. 찧은 깨를 어마어마하게 끈 괴목(느티나무)으로 눌러 짰다고 한다. 이때 짠 기름이 얼마나 고소 하고 향이 좋았던지 인근에서 이곳으로 기름을 짜려고 몰려 왔다는 것이다. 이 기름집에는 사람들이 묵어 갈 수 있도록 사랑방을 숙소로 꾸몄다고 한다. 평장기름은 기름을 짜 는 신기계가 들어오자 그만두고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평장기름집은 40년 전인 1970년대까 지 있었다고 한다. (8) 하련의 배형국과 배맨바우 하련리는 풍수적으로 배 형국으로 짐이 많이 실려 있으면 배가 전복된다는 속설이다. 이러한 속설 때문에 돈이 벌리면 하련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설이 있다. 하련리 자체의 지형이 남북으로 높은 산 들이 발달함에 따라 수계는 동서로 발달하게 되었다. 하련리는 동서로 발달한 고성천의 수계가 만든 퇴적지형에 입지한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은 풍수적으로 수계가 짧아 물이 적을 때는 행주형(行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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形)의 풍수적 형국으로 불리기도 하고, 골이 깊어 하상계수(河狀係數)가 크거나(유량변동) 하천의 유 로가 자주 바뀌는 곳을 파주형(波舟形)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성천의 주위의 지형이 배의 형국이기 때문에 이러한 속설이 있는 듯하다. 배맨바위는 배 모양의 하련리가 어떠한 홍수와 풍랑에도 표류하 지 않게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도록 정박해두는 관념상의 개념이다. 6) 하련리 역대 이장 남시 성명
동시 제직기간 72.1.1~ 73.6.1 73.6.1~ 88.4.10 88.4.11~ 88.5.31 88.6.1~ 96.9.30 96.10.1~ 01.3.9 01.3.9~ 09.12.31 10.1.2~ 현재
김영복 김용팔 배승진 김용팔 황동삼 허상규 이효원
성명
최희달 최희달 이창수 고오순 이창수 이정애
제직기간 90.1.1~ 03.6.30 03.6.30~ 현재
주용채 김윤혁
성명 정재춘 정길태
배동월 황말례 문영섭 황말례
신대 제직기간 ?~ 90.12.31 91.1.9~ 00.2.3 00.2.3~ 03.12.31 04.1.19~ 05.12.31 06.1.1~ 09.12.31 10.1.2~ 현재
제직기간 72.1.1~ 74.11.30 74.11.30 88.4.4 88.4.4~ 89.1.31 89.2.1~ 00.2.1 00.2.2~ 07.12.31 08.1.2~ 13.5.15 13.5.27~ 현재
최희달
청해 성명
하련
성명 주용훈 주용훈 김태수 주재봉 이강숙 주용훈 박용수 김양수 김현기 김윤현 김선오 최화수
평장 제직기간 ?~ 75.6.9 75.6.13~ 79.9.1 79.9.1~ 80.8.1 80.8.1~ 88.6.1 88.6.1~ 88.12.30 89.1.1~ 89.5.24 89.5.25~ 93.1.8 93.1.20~ 97.3.6 97.3.13~ 98.7.31 98.8.8~ 07.12.31 08.1.2~ 11.12.31 12.1.3~ 현재
▣ 자료조사에 도움주신 분 김성재(고창군청 민원봉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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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경용 김재천 주용문 황기환 정팔봉 황기환 정팔봉 장성복
제직기간 72.1.1~ ? ?~ 73.11.1 73.11.1~ 75.4.24 75.4.24~ 03.2.7 03.2.7~ 03.12.31 04.1.6~ 09.12.31 10.1.2~ 11.12.31 12.1.3~ 현재
오성동(고창군농업기술센터) 황기환(1935년 생, 평장) 이복안(1929년 생, 신대) 장봉심(1952년 생, 평장) 정팔봉(75세, 평장) 주용술(1938년 생, 동시) 김지연(해리파출소)
▣ 참고문헌 『고창군의 지석묘高敞郡의 支石墓』, 군산대학교, 2009. 『고창군지高敞郡誌』,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군문화유적분포도高敞郡文化遺蹟分布圖』, 원광대학교, 2005. 『모양성牟陽城의 얼』, 고창군, 2009.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바위로 배우는 우리문화』, 노승대, 무한, 1999. 『한성백제의 도성 체제 연구』, 오순제, 학연문화사, 2005.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 민음사, 1993 『전북의 정려․충효열비』전라북도, 전북향토문화연구회, 2000. 한국경제 2013-03-03 http://db.itkc.or.kr/itkcdb http://gochang.grandculture.net/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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