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부상조의 향약정신을 지켜온 모범마을 -
대산면 갈마리백원철(문학박사, 고창문화연구회장)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갈마리는 대산면의 법정리이며 동시에 한마을로 된 행정리이기도 하다. 전라남도 영광군과 접경한, 고창군에서도 가장 남단에 위치하여 도로 및 냇물(와탄천) 하나를 두고 영광군과 구분되는 지역이다. 대산면 소재지에서 서남방향 국도
23호선을
따라 약
4km
거리에 있다.
莊子山面 에
갈마리는 조선시대 무장현의 장자산면( 1914년 3월 1일
)
속한 마을이었으며,
부군통폐합령에 의해 무장, 흥덕이 고창으로 병합될 때 대
大梯面 과 대사면 大寺面 의 대 大 자와 장자산면 莊子山面 의 산 山 자 를 따서 대산면 大山面 이 될 때에는 곧 대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제면(
)
(
(
)
(
)
(
)
)
(
)
.
또 이 마을의 명칭은, 마을의 지형이 ‘목마른 말이 목을 길게 하여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는 풍수설에 따라 갈마리(
渴馬里 라고 )
부르게 되었다 하
는데, 마을이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 길게 둘러쳐 있는 모습이기에 동갈
東渴 과 서갈 西渴 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이밖에도 읍지류에는 갈곡 葛 谷 갈마위리 葛馬爲里 갈천 曷千 등의 이름도 보인다 그림 갈마리 (
)
),
(
)
.
(
),
(
(
)
. <
1.
표지석> 2.
마을의 입향성씨와 그 내력
갈마리는 한때
100여
姓氏
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으며, 따라서 여러 성씨(
)
들이 들어와 수백 년씩 세거하여 각각 일정한 집성촌을 이루며 살게 되었
․ ․강릉유씨․광 산탁씨․김해김씨․고흥유씨․밀양박씨․영성정씨․울산김씨․인동장씨․ 함평이씨․신천강씨 등인데 현재는 나주오씨․김해김씨․영성정씨․경주 김씨․밀양박씨가 비교적 다수 거주하는 편이다 다. 비교적 오랜 기간 거주한 성씨는, 나주오씨 경주김씨 ,
.
1)
나주오씨(
羅州吳氏 의 입향과 세거 )
- 1 -
나주오씨의 갈마리 입향은 나주오씨 천강씨 인(
9세
오희량(
吳希亮 이 갈마리의 )
訒 의 사위가 되어 이곳에 거주하게 됨으로서 비롯되었다 )
.
신
그 계
보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世
2世
3世
4世
偃
李眞
穎達
愼中 (=子)
8世
9世
10世
彦麟 (1535~?) 묘:나주 증 공조참판
希哲 1559-1640 希亮 1560-1618 <고창입향> 묘:갈마리 希昉
以敬
15世
16世
相泰 (二子)
瓆煥 (三子)
6世
7世
自治 羅城君
世熱 羅原君
謜 庶尹
11世
12世
13世
14世
九錫
大瞻
時顯
聖源
17世
18世
19世
20世
21世
致圭
性善
敬洙 (1854 ~?)
海根 (1909~ 1986)
宇烈(1933~) 栢烈(1938~2 001) 振烈(1940~) 銀烈(1946~) 金烈(1955~)
以仁 以得
나주오씨의 고창입향은 9세 참의공 희량( 천강씨 강인(
5世
康認
, 1542 ~ ? )의
希亮
~
:1560
1618)이
갈마리의 신
무남독녀에게 장가들게 됨으로써 비롯되
었다. 곧 참의공이 만년에 처가에 이거하였고(대체로 그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게 되었는바, 따라서 약
1600년
400여년
전후가 된다), 세거한 것으로
「同知公 諱 參議公 末年 移居于葛谷也 兄弟偕往
파악된다(참의공의 갈마리 이거시기에 대하여 언급된 기록은
希哲行狀」이 유일한데 여기에서는 偕來 無一時相離之志矣 참의공은 만년에 갈곡에 이거하였어도 형제가 함께 ,
“
(
오고 감에 한때도 서로 떨어질 뜻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한편 공의 대손 성근(
成根
:1935~ )씨는
11
결혼 시점인 약관의 나이에 이거한 것으로 추
정된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참의공이 신천강씨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들었
- 2 -
기에, 결혼과 동시에 처가살이를 하였고, 그리하여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추 었기에 임진란(1592)과 정유재란(1597)에 의병과 군량미를 조달할 수 있었 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나주오씨의 갈마리 입향은 신천강씨와의 혼인에 의하여 이루 어졌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렇다면 신천강씨는 언제부터 갈마리에 거주하 고 있었을까? 다행히도 신천강씨 대동보에서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바, 그 계보를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14世
15世
16世
17世
18世
19世
康之淵 中始祖
富傳
遠
得和
生敬
旒(三子) 영광이주
20世
21世
22世
23世
允碩 감찰 (갈마곡이주)
邦佑(五子) (1476~1548)
應辰 (1518~1580 )
訒 水原白氏
女 吳希 亮
신천강씨 대동보에 의하면, 신천강씨는 황해도 신천군에서 대대로 세거해
之淵 이
왔으며, 중시조인 지연(
)
信城君 에 봉해 세 류 旒 가 벼슬을
고려 충렬왕조에서 신성군(
지면서 신천을 본관으로 삼았던바, 신성군의 5대손인
19
)
(
)
버리고 전라도 영광으로 이주함으로써 그 자손들이 남쪽에 분포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곧
19세
류는 문과 급제 후 사헌부 집의를 거쳐 제포(
薺浦
)
병마수군첨
사로서 단종2년(1454) 왜구를 무찔러 공을 세웠으며 시호는 충의공(
忠毅公
)
이다. 단종이 물러나자 벼슬을 버리고 남하하여 영광 고성리에 둔거하며 생육신 김시습 등과 교유하며 여생을 마쳤다 한다. 따라서 충의공이 남하 한 시기는
1455년임을
의공의 아들
20세
알 수 있으며, 다시 고창 갈마곡에 이주한 것은 충
윤석(
允碩 이라고 하는데 )
,
생몰연대를 알 수 없으므로 갈
마곡 이주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아들 대가
1476~1548년임을
감안하면, 갈마리 입향은
21세
1500년대
할 수 있겠다. 현재는 한 가구도 거주하고 있지 않다.
- 3 -
방우(
邦佑 의 생몰연 )
전후쯤으로 추정
2)
金海金氏 의 입향과 세거
김해김씨(
)
김해김씨는 가락국의 수로왕이 시조가 되고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중조
中祖 가 되는데 이후 수십대를 내려오며 분파를 거듭하였고 고려말에 이 르러 시중공 侍中公 탁 琢 이 또 한 파조 派祖 가 되는데 곧 이 시중공파 (
)
,
(
,
)
(
)
(
)
,
의 후손이 일찍 고창에 입향케 되는 바, 그 계통을 족보에 의거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世
6世
金琢 나주
世 兌 (1484~ 1549) 영광
7世
8世
9世
10世
11世
友成 (1543~ 1609) 갈마
珊瑚
大巖
順河
12世
奎
蘊
逈河 13世
鳳瑞
14世
善日
15世
16世
元浩
聖祚
元命
漢祚
17世
18世
鎭秀
必淳 生淳 甲淳
鎭兼 鎭範 鎭和 鎭伯 鎭信 鎭益
龍祚
- 4 -
昶淳 一淳 在淳 正淳 仁淳 軒淳 大淳
濂 19世
相撤 相允 相珉 東植 相鎬 相弼 相文 相均 相萬 東丘 東永 相鉉
東立
金琢 공은 여말에 문하시중으로서 목은 이색 ․포은 정몽 주 등과 교유하며 국사를 맡고 있었으나 조선 개국이 되자 불사이군 不事 二君 의 충절을 지키고자 남쪽으로 내려와 나주에 입향하게 되었다 그리 하여 그 후손들이 전라도 지역에 세거하게 되었는데 세손 세태 世兌 공은 위의 파조인 김탁(
)
(
)
)
(
,
(
)
.
, 6
(
)
누차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기묘사화(1519년)에 영광 월광산 아래 농암촌에 은둔하여 여생을 마쳤다. 이후 후손들은 충주지역에 거주하
友成 공에 이르러 무장현 남갈마리에 이주하여 지
게 되었는데, 8세손 우성(
)
금까지 세거하고 있는바, 대략
400년이
경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김해김씨 시중공파의 후손 중 근세에 갈마리에 입향한 가구가 있 는 바,
16세
명조 또는
17세
진팔 대에 입향하였다면 대략
150여
년 세거
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16世
17世
18世
19世
20世
命祚 (1822~1877) 묘:영광
鎭八 (1842~1893) 묘:장자산
陽淳
相仁
喆寬 (1943~ )
相鉉(出)
吉寬 (1946~ ) 成寬 (1955~ ) 殷寬 (1960~ ) 正寬 (1957~ ) 鍾寬 (1958~ ) 才寬 (1961~ )
鎭道 (1845~1907)
文淳
- 5 -
相鉉
忠寬 (1973~ ) 한편 김해 김씨 중 부사공파는 시중공파보다 늦게 입향하게 되는 바, 그 계보는 다음과 같다. 1世
2世
10世
11世
12世
13世
瑾 부사공
忠仁 묘:영광
洪道 (二子)
宗悌 (二子)
載印
14世
15世
尙玉 (二子) 묘:무장 16世
17世
18世
平年
元旭
應文
庚鉉
浚煥 (1964~ )
永旭
應文 (出) 應玉
章鉉 (1929~19 49) 在鉉 (柱) (1940~ )
浚正 (1962~ ) 浚英 (1965~ )
위 부사공파 역시 선대는 영광에 거주하였는데, 분명치는 않으나 족보에 의해 추정하면
10세
상옥(
尙玉
, 1701~1758)에
이르러 무장현 장자산면(갈마
리)에 입향한 것으로 파악되는 바, 따라서 대략
300년
세거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3)
밀양박씨의 입향과 세거
박씨의 선조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이고, 그로부터
30대를
내려와 신라 말
彦忱 이 밀성대군에 봉해지면서 밀양박씨의 시조가 된다 다시 대 를 이어와 세인 언인 彦仁 이 고려조에 문하평장사 상서좌복야의 벼슬을 에 언침(
)
37
.
(
)
- 6 -
7
左僕射公派 의 파조가 되고 다시 손자인 세 정 晶 이 창증병부상서 倉烝兵部尙書 를 지내어 창증공파를 이루게 된다 지내어 좌복야공파(
)
(
,
39
)
(
)
.
고창에 입향하게 되는 밀양박씨는 곧 창증공파의 후손들인 바, 그 계통 을 파악하면 다음과 같다.
좌복야공
2世
3世
4世
14世
22世
26世
彦仁
直臣
晶 창증공파
良弼
영광勇卿대마
영광儉震홍농
장자면大鎭갈마치
27世
永奎
28世
29世
右根 義根 雲根 昊根
족보에 의하면
14세손
30世
31世
炯仁
東勻 陽勻(出) 陽均
炯學 (長子) 炯俊 (長子) 炯模 (長子)
相均 (〃) 南均 (〃) 大均 (〃)
鍾萬 鍾南 鍾珉 (〃) 鍾植 (〃) 鍾男 (〃)
炯裕
용경(
32世
鍾煥
吉淳 二淳 三淳 五淳 六淳 德淳 (〃)
勇卿 공은 세조 을유년
(1465)에
)
문과에 급제,
훈련원 첨정이 되었는데, 을축년(1505)에 군소배들의 참소를 당하자 벼슬을
乙丑
버리고 전라도 영광군 대마면으로 낙향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을축(
己丑 의 오자로 보인다
은 기축(
)
.
기축년은
1469년이다.)
)
따라서 이때로부터
후손들이 남쪽에 거주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리하여 묘소도 영광 대
․ ․
마 조서 홍송에 분포되고 있다가
26세
大鎭 공에 이르러 묘소가 장
대진(
)
자면 갈마치에 있고, 이어서 그 이후의 후손들의 경우는 무장지역(고창)에 다수 자리잡고 있다. 또한 문중에도
26세
대진공이 갈마리에 입향한 것으
로 전해오고 있는바, 이는 신빙성이 있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대진공의 생년이 영조 무진년(1748년) 임을 감안한다면, 공의 갈마리 입향은 중반이후가 될 것인바, 대략
250여년
18세기
전후가 될 것이다.
한편 밀양 박씨 중 위의 창증공파보다 뒤늦게 갈마리에 입향한 집안이
- 7 -
있는 바, 곧 사직공파(
淸齋公 諱 審問의 第三子 의 후손이다 )
.
그 계보를 파
악하면 다음과 같다. 1世
5世
8世
9世
10世
11世
元懿 사직공 김제이 주
賢慶 묘:영광
慶生
世榮 (三子)
相旭 (二子)
萬善
12世
13世
14世
15世
16世
禹範
益容
均鎬 (1878~?) 갈마리 입향
淵泰
大根 (1935~ ) 秀根 (1939~ )
淵奉
仁根 (1939~ ) 義根 (1947~ ) 鍾根 (1963~ )
사직공 원의(1세)는 점필제 문인으로서 무오사화(1498년)에 벼슬을 버리 고 김제로 남하하였다. 이후로 후손들이 다시 남하하여 영광지역에 분포 거주하였다. 전하는 말에 하는 바, 그렇다면 대략 4)
영성정씨(
14세
100여
균호(1878~?)공이 갈마리에 이주하였다고
년 전 임을 알 수 있다.
靈城丁氏 의 입향과 세거 )
갈마리에 거주하는 영성정씨는 미산공파(
(
派祖 가 되는 )
6세
예손(
薇山公派 의 )
후손들로서 파조
禮孫 공 이후로 대대로 영광지역에 거주하여 온 것 )
- 8 -
으로 파악된다. 집안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20세
필현(
弼鉉
, 1872 ~ ?)공
때에 이곳
갈마리에 이주하여 왔다고 하는 바, 그 세계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파조
7世
10世
11世
12世
16世
禮孫
惟祖 묘:홍농
台輔
悠
信達(五子)
最德
20世
21世
22世
永皓
基秀
永昕
昌秀 京秀 晟秀 奉秀 秉秀
17世
18世
烜(三子)
載苾
19世
錫亮
弼鉉 (1872~?) <갈마리 입향>
永斗 (1893~1966)
湳秀 東秀 官秀 俊秀
永文 永和 영성정씨의 경우, 집안의 구전대로 그 시기는 대략
19세기
․
20세
필현공 때에 입향한 것이라면
초 중반이 될 것이므로,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이 될 것이다.
5)
함평이씨의 입향과 세거
함평이씨는 백제시대에 함평(함풍)에 적을 둔 이언(
李彦 을 시조로 하는 )
성씨로서 그 유래가 퍽 길다고 하겠는데, 이곳 갈마리에 입향한 자손은 세 효우공 접(
摺 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바 )
,
면 다음과 같다.
- 9 -
11
그 계통을 도식으로 나타내
시조
11世
彦
摺 孝友公 묘:함평
14世
16世
汝白 묘:갈마리 汝右 (1476~1515)
東苾 學生公
23世
儒香
24世
25世
滿緖
敦仲 敦榮 敦弼
直緖
26世
敦植 敦伯
學憲 地憲 秉憲 官憲 京憲 容憲 永憲 昌憲 文憲
敦鎭 26世
27世
秉憲
啓燮
學憲
哲昇
啓述
28世
永範 禹範 桐範 彩範 吾範(出) 吾範
29世
載洪․載陽․載圓․載必 載郁․載杰․載植․載燁․載佑 載洙․載吉․載鎭 載千․載平․載璟․載玉
함평이씨는 본적지인 함평을 비롯 이웃인 영광에 주로 거주하였는데, 역 시 가까운 곳인 무장(고창)지역으로도 이주하여 왔던 바, 갈마리에는
汝白 이 처음으로 이주하였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인 여백(
(21세손
)
14세
彩範옹의
증언). 실제로 족보에서 보면 여백공의 묘소가 갈마리 청산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그 후손들의 묘소 역시 그렇다. 그런데 여백공의 생몰연대가 분명하지 않기에 그 이주(입향)시기에 대하 여도 확정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으나, 다행히 공의 아우인 여우( 생몰년이
1476~1515년
汝佑 공의
임을 감안한다면, 여백공의 입향시기 역시
)
16세기
전후임을 추정할 수 있겠다. 따라서 함평이씨는 약500년 전에 갈마리에 입 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28세손들은
대부분 고인이 되었고,
29세손
들 역시 도시로 많이 떠났기에 고향에 거주하는 가구는 매우 소수에 불과 한 형편이다.
- 10 -
6)
인동장씨의 입향과 세거
인동장씨의 갈마리 입향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편이니, 곧 함평파 손인 달철(
達喆
, 1822~1876)공이
29세
갈마리 거주 밀양박씨에게 출가한 누님을
따라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25世
26世
世興
29世
達喆 (1822~1876)
志鳳
30世
泰玖 (1849~1922)
27世
軫明
31世
仁植
泰順 泰瑞 29세
元復
32世
大煥 東煥
義植 禮植 (1899~1975)
현재로서는 위의
28世
斗煥 泰燮 (1935~ ) 東燮 (1941~ )
29世
達喆
33世
鶴奎(1934~ 鍾奎(1944~ 在準(1969~ 在奎(1974~ 順奎(1963~ 棟基(1963~
) ) ) ) ) )
鎬圭(1973~ ) 哲圭(1977~ )
달철공의 갈마리 이주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
나, 만약 공이 성년이 된 뒤에 이주하여 왔다면, 대략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 11 -
170~190년
전쯤으로
7)
경주이씨의 갈마리 거주
경주이씨의 갈마리 거주는 익제공파
․
이
6
25
29세손인
이상본(
李相本
, 1936~
)
사변 이후 대산면 대장리에서 이곳 갈마리로 이주한데서 비롯되
었다. 참고로 경주이씨의 고창입향에 대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7世
22世
27世
31世
37世
38世
39世
齊賢
在仁 (현감공) 묘:장성
錫男 묘:무장
準
鍾龜
山雨
相本
족보에 의하면 세종 때에 장수현감을 지낸
22세
재인은 점필제 김종직
과 교유하여 왔었는데, 무오년(1498) 사화에 점필제의 문생들이 화를 당할 때 장조카인
24세
원(
黿
)
역시 예조좌랑으로서 나주에 유배 당하고, 뒤에
갑자사화에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현감공은 남쪽으로 화를 피하여
․ ․
영광으로 내려와 은거하였으므로 그 후손들이 영광 장성 함평 등지에 거주하게 되었다. 뒤에
27세
석남(1553~1617)공이 임진난에 왜적을 피하여
무장현 장자산면 송촌(현 고창군 대산면 대장리)에 이주하였다고 하는 바, 따라서 익제공파 후손 현감공파의 고창 입향은
400년이
조금 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마을의 인물과 행적
1)
오희량(
나주오씨
(
吳希亮
: 1560~1618)
9세조로
彦麟 의 次男이다 )
.
공신인 오자치(
吳自治 의 현손이며 )
,
증 공조참판 언린
무장현 장자산면 갈곡리(현 고창군 대산면 갈마리) 신
천강씨 가문에 장가들어, 만년에 처가에 이주하여 살았다. 어려서부터 뜻 이 출중하고 기개가 있어서 주위에서 호방한 선비로 일컬어졌다.
- 12 -
高敬命
임진왜란에 의병을 모아 고경명(
의병장과 서로 호응하여 거사키
)
로 하였으나, 금산전투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사를 해산 시켰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군량미를 바쳤다. 조정에 서 호군(
護軍 의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고
, 59세에
)
을 뜨자 조정에서 병조참의를 추증하였다.
<그림 2.
세상
오희량 충의비>
吳淵
오연(
2)
, 1657~1738)
나주오씨 증 병조참의공 희량의 증손이며, 무장 선촌리에서 태어났다. 계유년(1693)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거보기를 그만두고 선운산 기슭에
雲谷 이라는 강실을 짓고 수많은 생도를 교육하였다 근심하여 야언기략 野言記略 권과 운벌원파 韻閥源派 운곡(
)
.
(
데 현재는 야언기략 략은 며
1권(권지초)의
2권은
) 12
1권과 2권
경우 광해군
인조1년(1623)
) 1권을
(
등
2책만이
세상의 혼탁함을 저술하였는
전하고 있다. 남아있는 야언기
11년(1619) ~ 15년(1623)간의
~ 16년(1628)년간의
역사기록이
역사기록이다. 야사의 일종으
로서 당시의 시대상과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 어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또한 운벌원파는 자세히 알 수
詩文 으로 추정된다 사람들의 년 수직 壽職 으로 당상 堂上 의
는 없으나 대체로 당시 인물들을 평한 시문( 천달로 복호(
復戶 의 은사를 받았으며 )
)
1737
.
(
)
(
)
품계를 받았다. 오상풍(1786
3)
~ ? )
啓源 이다 고종 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당시 세도정치와 사학토치 邪學討治 등으 정국이 어수선하고 과거시험의 기강도 엄정하지 못하자 대과 大科 를
나주오씨 참의공(오희량)의 (1864)
로
6대손이며
父는
부(
)
계원(
)
,
.
1
(
)
,
(
)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 첨지중추부사의 수직을 받았다. 오영환(
4)
吳英煥
, 1781 ~ 1871)
나주오씨 참의공(오희량)의
7대손이며,
德和 이며 호는 국사 菊沙 이다
화(
)
(
)
.
부는 상익(
경오년(순조
- 13 -
相益 이다 )
15, 1810)
.
字는 덕
자(
)
진사시에 합격하
壽職 으로 호군 護軍 이 되었고 통정의 품계에 올랐다
였으며, 수직( 5)
오희수(
)
(
)
.
吳喜洙
, 1873 ~ 1941)
나주오씨 참의공의
10대손이다.
평소 청렴하고 검약하였으며 친족간에도
돈목하고 위선사업에 성취함이 많았다. 특히 효성이 극진하여 모친상을 당 하여는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유림의 천거를 받아 여러 고을에서 효행통문
鄕誌 에
을 발하였고, 이에 향지(
실리게 되었다.
<그림 3.
매헌오공희수효
갈마리에서 출생하였고,
1944년에
대전공과학원을
)
행비> 6)
오정열(
吳正烈
, 1925 ~
나주오씨로서
1925년
)
졸업한 뒤 수리조합 연합회 전남지부에서 근무하였다. 광복후 교직에 투신 하여 영광서초등교, 대마교, 장자교, 대산교 등에서 1991년에
퇴임하였다.
1950년대
40여년
간 봉직하고
마을 자성회 설립위원으로서 마을의 경제
․박채균․김동영․박천수씨등과
적 자립과 재건에 노력하였고, 이채범 심하여
10년간
야학에 힘써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1993년
합
마을주민과 협동
하여 갈마정을 건립하였고, 논 천평을 마을에 희사하여 복지회를 설립케 하는 등 애향운동에 헌신하였으므로, 주민들이 ‘갈암 오정열 애향비(
吾正烈 愛鄕碑 를 갈마정 앞에 세웠다
. <그림 4.
)’
葛菴
갈암오정열 애향비>
卓宰玉 본관은 광산 光山 이며 년 갈마리에서 출생하였다 고조는 탁신 卓 愼 이며 부는 탁승환 卓承煥 이다 년 ․ 사변 시에는 경찰관으로 7)
탁재옥(
, 1924 ~
(
)
,
)
)
1924
(
)
.
. 1950
6
(
25
서 구국의 선봉에서 공을 세웠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치안이 회복되지 않 은 혼란한 와중에서 주민들을 구명하여 희생을 당하지 않도록 힘썼다. 뒤 에 영광으로 이주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영광읍 대의원에 출되었으며 지역과 주민들을 위한 봉사에 힘썼다.
1993년
2대에
갈마리 주민들은
그의 고희를 맞는 해에 공을 기리는 기공비(일송탁공재옥기공비
宰玉 紀功碑 를 동구에 세웠다 )
. <그림 5.
- 14 -
걸쳐 선
일송탁공재옥기공비>
逸松卓公
8)
박태술(
朴泰述
, 1909 ~
)
본관은 밀양이며, 충정공 휘 심문(
審問
)
의
16대손으로,
화평리에서 출생하여 소년기에 갈마리로 이주하였다.
영광군 대마면
․
1950년 6
전쟁을
25
겪은 뒤 마을 주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마을의 유지들과 협의 하여
1954년에
․
갈마리 협동조합을 창설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영농
․
․
․환경미화사업
개선 성인교육 부녀자계몽 보건후생
등을 주도하였으며
뒤에 자성회로 바꾸어 상부상조의 미풍을 이어나가게 하였다.
1993년에
마
永泉朴
을주민들이 공의 애향정신과 공적을 기리고자 영천박공태술공적비(
公泰述功績碑 를 동구에 세웠다
. <그림 6.
)
9)
김대암(
영천박공태술공적비>
金大巖
, 1586~1654)
김해김씨 시중공파 갈마리 입향조인 우성( (1636)에 50의
준룡(
나이로 장자인 순하(
友成 의 )
손이다. 병자호란
順河 와 함께 의병을 모아 전라병사 김 )
金俊龍 의 막하에 들어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
.
용인의 광교산
에 이르러 적군과 접전하여 용전분투하다가 중상을 입고 귀향하였다. 조정 에서 훈련원판관 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을 제수하였다.
<그림 7.
부호군김
해김공대암충의기적비> 10)
김순하(
金順河
, 1614~1672)
위 대암공의 장자로서 부친과 함께 호란에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에 달 려가 공을 세웠으므로 병조좌랑을 제수받았다. 화의가 성립되자 통곡하며 귀향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기며 효도를 다하였다. 4.
자랑스러운 공동체 마을의 조성 갈마리는 여러 성씨들이 비교적 오래전에 입향하여 터를 닦은 마을이며,
또한 규모가 큰 한 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점이 남다르다. 예전에는 호에 200여
5~6백의
인구가 거주하는 큰 마을이었으며,
1990년대까지만
100여
하여도
명의 인구가 되었던 마을이었다. 이와 같이 많은 인구와 여러 성씨
- 15 -
들이 거주하면서도 마을 주민 간에 화합하며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풍속을 지녀오게 된 데는 주민들의 각별한 노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옛적 향약
相扶相助 와
에서 추구하였던 상부상조(
덕업상권(
)
德業相勸 하는 )
정신을 되
살려 주민들이 협동하는 공동체 마을을 조성코자 하였기 때문이다. 1)
고당산회(
高堂山會 와 자성회 自成會 )
(
)
갈마리는 일찍부터 향악의 덕목을 실천하는 마을자치 조직인 고당산회 를 두어, 마을의 기강을 바로잡고 생업의 기반을 다지도록 뒷받침하였으 며, 추수 후와 정월에는 농악을 울려 남녀노소를 화합하도록 하였다. 특히 마을의 애경사에는 모두가 합심하여 정을 베풀어, 다른 마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었다. 이와 같은 마을의 전통은 큰 힘이 되었다. 곧
1955년
․
6
25
전란 이후 곤궁한 생활난을 극복하는데
박태술(
朴泰述 씨의 발의에 마을에서 호응하여 )
기금조성이 시작되었고, 고당산회를 발전적으로 전환하여 마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자구노력은 더욱 확산되어 마을 주민 전원이 회비 를 내는 회원체가 조직되었으니 바로
「자성회」였다
.
본 자성회는 마을 주민이 주체가 되어, 문맹퇴치 교육을 실시하고 영농 기술 교육으로 소득증대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마을 안길을 확포장하고 마 을 앞 와탄천의 제방을 쌓았으며 마을회관을 신축하는 등 마을의 자치기 반을 다졌다. 갈마리의 이러한 자치조직에 의한 자구노력과 성과는 세상에 널리 알려 졌고, 이로써 전라북도 도지사의 표창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와 같 은 과정을 거치면서 마을 주민들은 한결 더 화합하고 협동하는 전통을 지 켜오게 되었고, 마을에 대한 애향심과 갈마리 마을출신이라는 자긍심을 소 유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마을에서는 후속 사업들도 순조롭게 이루어졌으 니, 갈마정의 건립과 이건 중수 등의 사업이 그 예가 된다.
- 16 -
<그림 8.
자성회 기념비>
■ 자성회 기념비문
천신(天神)이 말을 몰아 노령(蘆嶺)을 南쪽으로 이끌다가 이곳 와탄천(瓦灘川)에 잠 깐 머물러 목마른 말에 물을 먹이게 하듯 그 갈마봉 아래 平和롭게 자리잡은 마을이 있으니 여기가 곧 先人들이 갈앙(渴仰)했던 渴馬里民의 보금자리이다. 멀리 장자산(莊子山)을 주축(主軸)으로 高山 高城 월랑(月郞) 태청(太淸) 등 수려(秀 麗)한 영봉(靈峯)들을 병풍(屛風) 삼아 비옥(肥沃)한 農土에 뿌리를 두고 自古로 人心 좋고 情이 넘친 마을로 그 이름이 높았던 것은 先代로부터 道義를 숭상(崇尙)하고 근 면자자(勤勉孜孜)하여 얻은 스스로의 열매가 아니었던가. 저 朝鮮 중엽(中葉) 以來 우리나라 鄕里의 自治體를 만들어 낸 고장이다. 秋收 後 正月이 오면 온 마을이 農樂으로 和合하여 男女老少가 한 자리에서 같이 즐겼고 애경 (哀慶)에는 또한 일의대수(一衣帶水)의 情을 쏟아 온 고을이 이를 선망(羨望)해 왔다. 特히 國運이 기울어 두 차례의 전란(戰亂)으로 洞民生活이 도탄(塗炭)에 빠진 一九 五五年 十月 박태술(朴泰述)씨의 發議에 金圭哲 吳在根 吳正烈 제씨(諸氏)가 호응(呼 應)하고 三年 뒤 十一月 다시 이계섭(李啓燮) 金圭仁 김규채(金圭采) 崔東允 丁湳秀 丁 西秀 金相文氏 等이 會同 기금 조성(基金 造成)에 앞장서 高堂山會를 發展的으로 재조직(再組織)하여 渴馬里 協同組合을 설립(設立)하고 자구(自救)의 努力을 강화(强 化)해 오다가 數年 後에는 마을 全戶가 會員이 되어 스스로 會費를 내는 渴馬里 自成 會로 이끌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同會는 먼저 成人敎育을 實施하여 문맹(文盲)을 퇴치(退治)하고 영농(營農) 의 기술개선(技術改善)으로 소득증대(所得增大)에 이바지했으며 婦女子의 계도(啓導)에 힘써 生活改善을 도모(圖謀)하였고 또한 洞中事業으로 회관(會館)을 新築하는 한편 里 所有畓 貳阡坪을 매입(買入)하여 자치기반(自治基盤)을 공고(鞏固)하게 하였다. 이로써 瓦灘川의 마을 앞 제방(堤坊) 二千米 工事費를 전담(全擔)하고 동네 안길을 확장포장 (擴張鋪裝) 했으며 里 광장(廣場)을 조성(造成)한 外에 每年 支出되는 洞 運營費까지를 감당(勘當)하게 되었다. 이토록 빛나는 마을 自治成果가 세상에 알려지자 일찍이 道伯으로부터 表彰狀과 副 賞으로 黃牛 一頭 및 金一封을 받은바 있고 또 道議會에서는 議長賞으로 괘종(卦鐘)이 傳達되기도 했다. 이에 全 里民의 뜻이 모여 이 所重한 故鄕을 永世토록 보존(保存)하고 後進들의 보 다 높은 분발(奮發)을 촉진(促進)시키기 위하여 마을 앞에 記念碑를 세우기로 하고 멀 리 나를 찾아와 碑記를 請하였다. - 17 -
모두가 이 마을의 오늘이 있게 한 主役들이시기에 내 마음으로부터 경모감동(敬慕 感動)하여 감(敢)히 이 글을 다듬었다. 一九九○년 四月 곡우절(穀雨節) 天冠 魏 民 煥 記 邊山 金 允 吉 書 建立推進 委員長 李 三 本 總 務金在柱 財 務朴千洙
■ 자성회 기념비 건립 헌성자 朴一洙 김상문 金相文 오성근 吳成根 오세근 吳世根 오통열 吳通烈 오경열 吳璟烈 김상백 金相栢 오순열 吳舜烈 오삼연 吳三烈 오교상 吳敎相 오종근 吳宗根 최성윤 崔成允 오세열 吳世烈 오동열 吳東烈 박헌익 朴憲益 김춘엽 金椿燁 박종복 朴鍾福 정병이 丁炳珥 김동규 金東圭 김종현 金鍾鉉 김은환 金銀煥 박일수(
) 30만원
(
) 20만원
(
) 20만원
(
) 20만원
(
) 20만원
(
) 20만원
(
) 20만원
(
) 1석
(
) 1석
(
) 3석
(
)
오만원
(
)
오만원
(
)
오만원
(
)
오만원
(
)
오만원
(
)
오만원
(
)
오만원
(
)
오만원
(
)
오만원
(
)
오만원
(
)
오만원
金東碩 오정열 吾正烈 정남수 丁湳洙 김상필 金相弼 오맹열 吳孟烈 정병철 丁炳喆 김동두 金東頭 오관열 吳寬烈 오영열 吳榮烈 박채균 朴采均 박대수 朴大洙 장석환 張石煥 이삼본 李三本 김상만 金相萬 장종근 張宗根 박천수 朴千洙 김재주 金在柱 김동입 金東立 김종식 金鍾植 장동섭 張東燮 김종채 金鍾彩 김동석(
) 2만원
石
(
) 4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2만원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18 -
)
金星彩 김영철 金永喆 김상호 金相鎬 정병환 丁炳煥 오금열 吳金烈 김중현 金重鉉 박규섭 朴圭燮 이두형 李斗衡 이동범 李東範 박재균 朴在均 최완수 崔完洙 김상균 金相均
吳陽敎 두 斗 유종하 劉鍾河 두 오백열 吳栢烈 두 정기수 丁基洙 두 오수열 吳壽烈 두 김동구 金東丘 만원 김순봉 金順奉 만원 김장환 金長煥 만원 오광열 吳光烈 두 오광열 吳鑛烈 두 최석조 崔錫祚 만원 부인회 婦人會 석 時價 석 만 천원
김성채(
) 1석
오양교(
) 5
(
) 1석
(
) 5
(
) 1석
(
) 5
(
) 1석
(
) 5
(
) 1석
(
) 5
(
) 5두
(
) 5
(
) 5만원
(
) 5
(
) 5두
(
) 5
(
) 5만원
(
) 5
(
) 5두
(
) 5
(
) 5만원
(
) 3
(
) 5두
(
) 1
(
2)
갈마정(
1
:8
5
(
)
)
渴馬亭 의 건립 )
갈마리 주민들이 화합과 협동으로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마을공동체 정 신을 이루어 나가는데에 있어서 그 공간적 중심체 역할을 하는 곳은 바로 갈마정이다. 마을 앞 와탄천변 길가에 자리 잡은 갈마정은 당초에는 년 봄에 건립되었는데,
2010년
1993
와탄천의 개수공사에 부지가 편입되었으므
로, 서북쪽으로 옮겨 현 위치에 이건하게 되었다. 1993년
처음 갈마정을 건립할 때에는 온 마을이 대동단결하여 건설비를
마련하였던 바, 이러한 행사를 통하여 마을은 더욱 화합의 기풍을 다져갔 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9.
갈마정 전경>
- 19 -
■ 갈마정 기문 渴馬亭 記文 (
)
蘆嶺山은 海東의 名山으로 창공(蒼空)에 높이 솟아 그 혈맥(血脈)의 장지(長枝)는 西 走南向으로 뻗어내려 莊子山을 기봉(起峯)하고 峯下에 精氣는 흘렀으며 左右로 高山․ 吉城․月朗의 靈峯은 수려(秀麗)하여 그림처럼 둘렀으니 그 名勝 땅을 찾는다면 이 渴 馬村이었다. 이 마을은 목마른 준마(駿馬)가 물을 마신 形局으로 瓦灘川의 淸流水는 村 前에 돌아든다. 이 村民들은 多姓集會에 百有餘 戶를 이룩하여 勤農 生活에 세거번영 (世居繁榮) 하였으니 손꼽아 五百年 터전이었다. 대로는 時事를 討論하고 詩酒로 상영 (觴咏)하는데 檀紀 四三二六年 癸酉春에 이 亭子를 얽었으니 유유(悠悠)한 엄곡(嚴谷) 과 창창(蒼蒼)한 秀林은 天然으로 심어진 氣像이며 그 경관(景觀)의 장려(壯麗)함은 비 길데 없으며 當日 淸談은 晋代의 千載風流와 견줄만하다. 예부터 村民들은 그 先祖가 自治體의 향약을 만들어 남긴 큰 業績의 흐름을 이어받 아 規約을 實踐하고 紀綱을 遵行하여 農業에 基盤을 튼튼이 하고 洞中事業을 확장(擴 張)하였고 營農技術과 生活改善에 힘썼으며 또한 敎育의 文化發展에 寄與하여 自進 會 員으로 自成會를 組織하였고 이어서 記念碑를 세웠으니 더욱 거룩한 유적(遺績)을 자 랑하였다. 아, 壯하도다 村中의 事蹟이여 뉘가 첨모(瞻慕)치 않을까. 염원(念願)컨대 將來의 各自孫들은 一心團合하고 조모(朝暮)에 등림(登臨)하여 이 亭子에 世世로 주인이 되어 永遠히 보존동락(保存同樂)하리라. 村中의 有志 數三人이 千里의 먼길 漢陽에 찾아와 請文하니 나는 외람(猥濫)되이 삼가 글을 짓고 덧붙이노니 六角은 半空에 휘날린 듯 一代의 웅장(雄壯)한 모습이여. 山높은 精氣이며 물맑은 흐름이네. 先祖의 遺風은 이어지고 子孫의 복록(福祿)은 진진 (振振)하다. 이 亭子 千秋의 이름은 길이길이 不滅하리라. 癸酉初夏 高興 柳泰錫 謹記 並書 (1993년 초여름 고흥 유태석은 삼가 짓고 쓰다) <그림 10. 1993년
갈마정에서의 시회>
《갈마정 건립 기금 헌성록》 (1)
입향 성씨 종중별 헌성금
自治 현손 참의공 희량 希亮 종중 강능유씨 술제공 덕문 德文 대손 승인 昇仁 종중 석 광산탁씨 죽정공 신 愼 대손 제한 齊漢 종중 석 김해김씨 시중공 탁 琢 대손 우성 友成 종중 석 나주오씨 나성군 자치( (
(
) 20
(
) 8
)
(
) 4
(
(
(
- 20 -
)
)
)
)
5
5
5
10석(
石
)
汚 대손 기상 奇相 종중 석 김해김씨 부사공 근 謹 대손 상옥 商玉 종중 석 밀양박씨 복야공 언인 彦仁 대손 대진 大鎭 종중 석 영성정씨 영성군 찬 贊 대손 필현 弼鉉 종중 석 울산김씨 주부공 홍원 弘遠 대손 요출 堯出 종중 석 인동장씨 참찬공 백림 百林 대손 달철 達喆 종중 석 함평이씨 효우공 여백 汝白 대손 동필 東必 종중 석 고흥유씨 통덕랑공 오( (
) 14
) 9
(
(
(
(2)
4
)
) 25
) 17
)
3
(
(
)
)
3
3
(
) 10
(
)
3
(
) 22
(
)
3
(
) 13
(
)
3
會 ․계 契 의 헌성금 석石
갈마리 각 회(
고당산회
(
3
(
)
(
)
)
자 성 회 3석 부 인 회 3석 노 인 계 2석 상 조 계 2석 양 마 계 4석 (3)
개인별 헌성금
卓宰玉 오회근 吳晦根 오성근 吳成根 오세근 吳世根 오정열 吳正烈 정병환 丁炳煥 오금열 吳金烈 김창수 金昌洙 정남수 丁湳秀 이현익 李鉉益 오순열 吳舜烈 오삼열 吳三烈 탁재옥(
) 100석
(
) 20석
(
) 10석
(
) 10석
(
) 10석
(
) 10석
(
) 7석
(
) 7석
(
) 5석
(
) 5석
(
) 5석
(
) 5석
吳根生 김상필 金相弼 김동현 金東鉉 유영종 劉榮鍾 정균환 鄭均煥 박판균 朴判均 유양길 柳良吉 박재균 朴在均 최완수 崔完秀 김상현 金相鉉 오양교 吳陽敎 박채균 朴采均 오근생(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21 -
吳敎相 오경열 吳璟烈 김상백 金相栢 이동범 李桐範 김중현 金重鉉 정병철 丁炳喆 탁봉규 卓奉圭 오맹열 吳孟烈 김상문 金相文 오관열 吳寬烈 김상옥 金相玉 이삼본 李三本 박천수 朴千洙 박일수 朴一洙 김재주 金在柱 장동섭 張東燮 김상호 金相鎬 오교만 吳敎滿 김영희 金永熙 봉정수 奉正秀 오교율 吳敎律 박규섭 朴圭燮 김동흔 金東忻 최봉희 崔鳳熙 오주열 吳儔烈 김인수 金仁洙 김동필 金東必 김성채 金星彩 김영철 金永喆
吳榮烈 박대균 朴大均 장태섭 張泰燮 박대수 朴大洙 장석환 張石煥 김상만 金相萬 김동영 金東永 정기수 丁基秀 김상환 金相煥 오백열 吳栢烈 장종근 張鍾根 박종환 朴鍾煥 박양균 朴良均 김종식 金鍾植 이재평 李載平 최충옥 崔忠玉 김희철 金熙哲 최석용 崔錫龍 김준환 金浚煥 김준영 金浚英 박헌모 朴憲模 오종석 吳鍾奭 김동석 金東碩 이두형 李斗衡 김정수 金正洙 김상균 金相均 정창수 丁昌秀 유종하 劉鍾河 유종팔 劉鍾八
오교상(
) 5석
오영열(
) 1석
(
) 3석
(
) 1석
(
) 3석
(
) 1석
(
) 2.5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2석
(
) 1.5석
(
) 1.5석
(
) 1.5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22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吳佑烈 오세열 吳世烈 김종채 金鍾彩 김동구 金東丘 기철호 奇哲鎬 오종근 吳宗根 김순봉 金順奉 김동규 金東圭 김재명 金在明 오동열 吳桐烈 정병수 丁秉秀 박종현 朴鍾現 오명열 吳明烈 오광열 吳光烈 박헌장 朴憲長 이천희 李千熙 김춘엽 金春燁 박헌익 朴憲益 박헌철 朴憲哲 오교을 吳敎乙 오은환 吳銀煥 김용희 金鏞熙
丁文秀 김동립 金東立 정봉수 丁奉秀 경명식 庚明植 오광열 吳鑛烈 오덕열 吳德烈 오웅열 吳雄烈 오응열 吳應烈 오봉열 吳鳳烈 오태열 吳泰烈 조환성 趙煥盛
오우열(
) 1석
정문수(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
) 1석
계
299.5석
時價 一石
(
- 23 -
10만원)
갈마정 건립추진위원회
吳正烈 총무 이삼본 李三本 위원 박대수 朴大洙 김상호 金相鎬 오금열 吳金烈 전서 前書 이학용 李學庸 후서 後書 박년재 朴年在 석공 石工 임용운 林龍雲
위원장 오정열(
)
(
)
(
)
(
)
(
)
(
)
(
)
(
)
(
)
(
)
(
)
단기 (사진)
4326년(서기 1993),
추석일 세움
갈마정 주련시
■ 갈마정 주련시 내용 渴馬亭成名勝地 渴馬의 亭子 名勝땅을 이루었고 翼然六角半空浮 六角은 날른 듯 半空에 솟았네 山高蘆嶺千秋色 蘆嶺山은 높아 千秋에 빛나고 川抱瓦灘萬古流 瓦灘川은 둘러 萬古에 흐름이다 敬祖後孫無忝德 祖上을 공경한 후손 光德을 이어받아 保存世世太平游 世世로 保存한 平和로움이여 癸酉年 의 여름에 石溪 柳泰錫 짓고 쓰다 .
(1993)
3)
복지회의 창설과 운영
갈마리 복지회는 주민의 한 사람인 오정열씨가 주민복지를 위해 논
600평을
2003년에
마을에 기증하자, 마을에서는 곧 갈마리 복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리하여 기증된 복지답의 임대료를 기금화하여, 마을건강관리실에 식량을 일부 지원하고, 어려운 사정에 처한 이웃을 위해 부조하는 등으로 운영을 하였다.
- 24 -
그 뒤
2005년에
다시 논
400평을
추가로 기증하여, 현재는 논
복지회의 자산으로 삼고, 임대 경작료를 수입금으로 하여 매년
1,000평을
① 마을 건
② 주민관광 또는 온천 입욕 ③ 장기 입원환자 등
강관리실에 식량 지원,
,
어려운 처지의 주민 부조 등의 사업을 하여 주민화합과 복지를 위해 기여 하고 있다. 4)
갈마정의 이건( 처음
1993년에
移建 과 기념비의 이건 )
세운 갈마정은
2010년
와탄천 개수 공사시에 그 부지가
공사구간에 포함되어 경내가 협소해지자, 북서쪽으로 약
10m
거리인 현위
치로 옮겨세우게 되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경비는 전라북도에서 모두 만원을 지원받았고, 부지 확충에는 마을 자체자금으로 농지
6천
㎡를 매입
260
하여 확보하였다. 이때 중장비를 이용하여 원형 그대로 옮겼는데, 다만 목 주를 석주로 바꾸고 또한 토와를 현대식 강판활석기와로 교체하여 내구성 강한 자재로 보완하였다. 갈마정 주위에 세워진 자성회 기념비, 갈마정 헌 성비, 마을공로인사 이다. 5.
<그림 11.
3인비도
갈마정 이건 공사 시에 동시에 옮겨 세운 것
갈마정 이건 기념식 모습>
갈마리의 지명 유래와 전설
․ 상갈 마을회관 북쪽 웃뜸마을 ․ 동갈 마을회관 동쪽 마을 ․ 서갈 마을회관 서쪽 할머니 당산 마을 ․ 중갈 마을회관 주변마을 ․ 안뜸 마을회관 앞 쪽 마을 ․ 용신 동갈 쪽에 있는 샘 용신샘 ․ 초분골 동갈 동쪽 지역 아동 사망 : : : : : :
,
:
․ ․
,
후 항아리에 넣거나 나무에
매달아 놓았던 곳 지촌
:
池氏 와
지씨(
)
천씨(
千氏 가 )
살던 지역, 그릇을 구워 생계를
이어감. 영광으로 이주하여 지금도 그릇을 굽고 있음. 청산골
:
상갈 등성이 넘어 북쪽에 있었던 큰 마을이었으나, 그곳
- 25 -
에 살면 역적이 나온다는 말이 있어서 지금은 폐촌이
․
되었음. 박씨와 구씨가 거주하였음. 점등(즘동)
꿩 방 부근 지역. 주씨(
:
周氏 가 )
거주하던 곳. 전하는
말에, 갈마리 사랑방에서 소를 잡고 머리만 주씨에 게 보내고서 소 값을 부담시키자 고통을 못 이겨 장
․ 질마재 ․ 꿩방
성으로 이주하였다 함. 꿩방 북쪽의 재. 말이 무거운 짐을 벗어버렸다 해서 생긴 이름.
:
마을 뒤편 편편한 지역. 나무꾼들이 나무를 깎아 만든 공
:
을 지게 작대기로 쳐서 문에 넣는 놀이를 하던 곳.
․ 안산 상갈 옆산 마을의 안산이 되는 곳 안산 나무갓이라고도 함 ․ 쭉다말 안산 나무갓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 상갈 뒷산 ․ 장두들 서갈 뒷 들 ․ 시초밭 시초 바다 바닷물 들어 왔던 곳 고분 발굴시 확인됨 ․ 귀내 서갈 앞 냇가 ․ 영성뫼 영성산 나주 오씨 선산 ․ 감나무재 감나무 잔등 상갈 앞 쪽에 큰 감나무 있었으며 기우 :
.
,
:
.
.
:
.
.
:
.
:
(
)
.
:
,
.
:
,
,
제를 지내던 곳.
․ 할머니 당산거리
:
서갈 할머니 당산나무 있던 곳.
<그림 12.
고당산과
모정>
․ 솔대거리 밭 ․ 흰 바위등 (
․
) : :
나주 오씨가 진사 급제 후 솟대를 세웠던 상갈 앞 쪽 거리 동갈 뒷산에 있는 네모반듯하고 흰 빛이 도는 바위, 고인돌로 추정됨
벼락바위
:
원보를 쌓을 때 딸을 팔고 가던 거지가 댓가로 받은 엽전을 세다가 벼락을 맞았다는 바위. 동갈 옆길 논에 놓여있으며 엽전 모양의 자국이 있고 또 바위를 잘라 낸 구멍이 남아 있다. 따라서 흰 바위등(고인돌?)을 잘 라내었던 원 바위로 추정됨.
<그림 13.
벼락바위를 설명
하고 있는 김재주님>
․
도치샘골
:
동갈 북쪽에 있는 샘이 도끼가 뜰 정도로 힘차게 물이
- 26 -
․
샘 솟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 옛적 지천마을 터. 써는들
․ 죽드리 ․ 웃사터 ․ 원보
동갈 동쪽의 들로서 벼농사와 관련되는 이름으로 추정
:
(써레질하는 : ‘말이
들?)
죽을 들이키는 들’의 뜻을 가진 말과 관련된 말로 추정.
윗 새터, 동갈 위쪽 모래땅.
:
동갈 앞 쪽 냇가에 쌓은 보. 옛적 원님이 냇물을 건너다가
:
보를 쌓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주민들이 보를 쌓았으나 자 주 무너졌는데 지나던 중이 처녀를 넣어서 쌓으면 무너지 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거지모녀가 있어서 그 딸을 사서 매장하여 보를 쌓았다. 그 뒤로 동남풍이 불 면
“음”이라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딸의 원망에 찬
울음소리라고 한다. 그리하여 게 되었다 한다.
<그림 14.
‘원보’
또는
‘음보’라고
부르
원보전경>
․ 말코샘 말눈샘으로도 부르며 벼락바위 부근에 있던 개의 샘을 가리킴 ․ 청산골 저수지 상갈 뒤쪽 갈마재 부근의 저수지 ․ 가등보 농업용수용 보로서 청산골 저수지 아랫편에 있었음 ․ 시추보 농업용수용 보로서 가등보 아래쪽에 있었음 ․ 조산보 농업용수용 보로서 가등보 아래쪽에 있었음 ․ 죽드리보 농업용수용 보로서 신산마을 쪽에 있던 보 ․ 벼락바위 보 벼락바위 밑에 있던 보 ․ 동갈보 동갈 앞 냇물을 막았던 보 ․ 소잿다리 효자다리 효자교 당산나무 아래쪽에 있던 다리 옛날 :
,
2
:
:
,
:
,
.
:
,
.
:
.
,
.
:
.
:
.
:
․ 열두당산
(
),
.
신천강씨가 시묘하면서 건너던 다리라고 전해옴.
·
·
·
동갈할아버지 당산 서갈할머니 당산 철용제 당산 쭉다말 당
:
·
·
·
·
산 조산 앞 당산 안뜸뒤 당산 용신뒤 당산 초분골 뒤 당산
․
·
·
안산당산 감나무재 당산 흰바위등 당산 옛식수원
:
·
·
·
·
·
초분골의 황샘 동갈의 용신샘 중길의 안뜸샘 상갈의 상갈
샘 서갈의 서갈샘
- 27 -
6.
갈마리의 풍속과 유적 1)
갈마리의 당산제와 농악
갈마리의 당산제는 할아버지 당산(나무와 석장승)과 할머니 당산(나무)에 제를 지내기 위한 것으로, 매년 정월 초 삼일에 마을회관으로 사용하던 신 천 강씨의 제실에 모여 화주와 소임을 선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화 주는 생기복덕이 있는 사람으로서
1인을
선정하고, 소임은
2인을
선정한
다. 정월 초 칠일에 각 당산나무에 금줄을 두르고, 외곽에 황토를 뿌려 잡 귀를 물리치고 접근을 막는다. 정월
14일
오후
4시와 6시에
양 당산나무를 한 바퀴 돌고 닭 울기 전
축시에 제물을 차려 당산제를 지내는데, 유교식으로 축관이 독축을 하고
3
배를 올렸다. 이때 제물 일부는 당산나무 밑에 묻었다. 보름날에는 전 주 민의 화합을 위해서 농악을 치며
五方 돌기를
5방(
)
하며, 집집마다 길굿을
치게 되는데, 이때 가구주들은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며, 농악대의 걸립(
立 에 동참하여 각각 형편대로 곡식을 바치며 )
,
乞
이때 갹출한 것은 마을기금
으로 삼았다. 밤에는 판굿을 치며 마을 주민들이 흥겹게 어울리게 되는데, 새벽까지 이어지며, 닭죽을 쑤어 모두가 나누어 먹었다. 대게 이러한 농악굿은
18일
까지 이어졌으며, 이후는 마을 총회를 열어 행사 전반에 대하여 결산하는 모임을 열었다. 구전에 의하면 예전에는 며,
1967년
12당산(나무)에
굿을 하였다고 하
제방사업과 와탄천 확장공사때 부지에 편입되어 나무도 모두
베어졌고, 이때 할아버지 당산과 석장승도 없어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당산제가 없어졌다가,
1980년대에
복원하여 이어갔으나, 인구
가 줄고 젊은 층이 마을을 떠나 외지로 나갔기 때문에 인력이 부족하여 2007년에
상태다.
당산제와 농악이 중단되었다. 현재는 할머니 당산만 남아 있는 마을에는 당산제 복원한 시점인
1984년부터
의 제반 행사경비 출납부가 비치되어 있는바, 참고로 현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984년도
당산제 및 농악대 운영에 따른 경비 내역
- 28 -
중단한
1984년의
2007년까지
수입, 지출
수입
현금
지출
한편
벼
9가마
식료품
31,500
농악대금
249,080
잡비
14,960
계
295,540원
2007년을
2010년에
420, 350원
끝으로 당산제 및 농악굿 놀이가 중단되자 마을에서는
그때까지 잔금으로 보관하고 있던
308,000원을
모두 사용하여 마
을잔치를 벌였다. 이때는 고창군수, 대산면장, 군의원을 초빙하고 마을주민 모두가 참여하였으며, 이 잔치를 마지막으로 하여 농악단체도 해산하였다. <그림 15.
2)
九錫 捂下居士羅州吳氏九錫孝行碑
나주 오씨
<사진 16.
3)
갈마리 주민들이 농악하는 모습>
김계성(
11세
구석(
, 1639~1689)의
효행비
>
金繼成
)
마을 뒤편(산
묘비
13번지)에
위치한다. 묘는
3기이며,
묘비는 화강암인데 기관
부에 비신을 끼워 넣은 형태로 상륜부는 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전면
前面 에는 嘉善大夫金公諱繼成之墓 가 새겨져 있고 측면에는 崇禎紀元 後 更子十月 년 에 건립되어 있다고 새겨져 있다 그림 가선대부 (
)
“
”
(1900
,
)”
“
. <
17.
김공휘계성지묘> 3)
영성재(
처음 순조
永成齋
) :
영성뫼에 있는 나주오씨 재실
8년(1808)에
참의공 휘 희량(
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고, 4)
유인연일정씨열행비(
나주 오씨 상협(
1989년
希亮 의 묘전에 창건하였으며 )
, 1906
확장 중건하였다.
<그림 18.
영성재>
孺人延日鄭氏烈行碑
)
相恊 의 처 연일정시는 남편이 )
- 29 -
23세로
병사하자 장례를 치
른 후 목을 매어 자결하였는데,
29세였으며,
영조 갑신년(1764)이었다. 무장
향교를 비롯한 여러 고을 향교와 성균관의 추천이 있었으며, 들이 갈마리에 세웠다. 신천강씨재실모와재(
5)
<그림 19.
慕窩齋
)
允碩 공을 향사하는 재실이다
. 1950년대
)
다.
<그림 20.
영광정씨 필현( <그림 21.
7.
世
20세(
)
사헌부 감찰 윤석
문맹퇴치교육의 장소로 사용되었
신천강씨재실>
후천정공필현효행비(
6)
후손
유인연일정씨열행비>
무장 갈마곡(갈마리)에 최초 입향한 신천 양씨 (
1992년
弼鉉
後泉丁公弼鉉孝行碑
)
, 1872~1940년대)의
효행비
후천정공필현효행비>
갈마리의 역대 봉사자
1)
역대 갈마리의 이장, 서기, 참사 이장
:
김규선, 장유옥, 이영범, 오재근, 김상필, 김규채, 김태현, 김상균, 김동현, 박대수, 김상현, 이채범, 이상본, 김상만, 박천수, 김상호, 김영철, 오금열, 장연기, 정병환
2)
서기
:
오맹열
참사
:
김동영, 박천수
역대 새마을 지도자 박대수, 박천수, 김재주, 김영희, 김동립, 김상호
3)
역대 부녀회장 이영자, 오순녀, 손명순, 서순자, 김정희, 신영자
4)
역대 자성회장 박태술, 오재근, 오맹열, 박대수, 이삼본, 김재주, 김상호
5)
역대 복지회장 김재주, 김상호
- 30 -
6)
역대 노인회장 김수보, 정남수, 정명철, 김상필
7)
역대 법정노인회장 오정열, 박대수
8)
갈마리 노인회(2012년 갈마리 노인회는
에는
“본
12월
1972년
현재) 창립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는바, 회칙
노인회는 회원 상호간의 융화친목을 도모함은 물론, 미풍양속
을 되살리며 공익사업 정신의 자체시범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현 재의 회원은 다음과 같다.(
丁炳喆 김상필 金相弼 박재균 朴載均 최완수 崔完秀 오정열 吳正烈 유양길 柳良吉 오맹열 吳孟烈 오관열 吳寬烈 김정수 金正洙 김상균 金相均 박채균 朴采均
9)
)는
생년이다.
朴大洙 김상만 金相萬 이삼본 李三本 정기수 丁基洙 김재주 金在柱 장동섭 張東燮 김종식 金鍾植 박천수 朴千洙 이은진 李殷鎭 김동립 金東立
정병철(
, 22년생)
박대수(
, 35년생)
(
, 23년생)
(
, 36년생)
(
, 31년생)
(
, 36년생)
(
, 31년생)
(
, 37년생)
(
, 25년생)
(
, 40년생)
(
, 31년생)
(
, 41년생)
(
, 28년생)
(
, 41년생)
(
, 32년생)
(
, 39년생)
(
, 33년생)
(
, 39년생)
(
, 33년생)
(
, 41년생)
(
, 34년생)
갈마리의 봉사자(2012. 이
12월
장
박천수(74세)
개발위원장
오금열(58세)
현재)
새마을지도자 정병환(59세) 부녀회장
김명자(57세)
노인회장
박대수(77세)
자성회장
박천수(74세)
복지회장
김상호(66세)
- 31 -
8.
갈마리 거주자 및 출향인사
1)
갈마리 전경>
갈마리 거주자(가구주) 명단
․본관․출생년도
(성명
2)
<그림 22.
, 2012년 12월
최완수(수성,
1943년),
장동섭(인동,
42년),
박채균(밀양,
34년),
김종례(경주,
36년)
김종식(경주,
34년),
김상만(김해,
36년),
김동순(경주,
36년)
오성열(나주,
51년),
정기수(영성,
38년),
김옥영(금영,
36년)
박천수(밀양,
39년),
김순봉(김해,
47년),
박대수(밀양,
35년)
김동립(김해,
43년),
김종채(경주,
44년),
김영철(김해,
43년)
정창수(영성,
35년),
김상균(김해,
33년),
이삼본(경주,
38년)
김정희(경주,
51년),
김정수(광산,
32년),
김동구(김해,
45년)
오정열(나주,
26년),
박재균(밀양,
31년),
정병철(영성,
20년)
오관열(나주,
34년),
오웅열(나누,
60년),
오종남(나주,
41년)
정성례(영성,
46년),
김상호(김해,
47년),
장연기(인동,
55년)
이상만(전주,
72년),
이옥심(전주,
30년),
오금열(나주,
55년)
오현열(나주,
65년),
오맹열(나주,
26년),
오교환(나주,
75년)
오삼열(나주,
74년),
정병환(영성,
56년),
정규열(경주,
57년)
이종주(함평,
53년),
임양임(나주,
30년),
이은진(전주,
37년)
김상필(김해,
25년),
김정영(영광,
69년),
오오순(해주,
23년)
유영창(강릉,
57년),
김재주(김해,
40년)
갈마리의 출향인사( (성명,
유양길(고흥,
현재)
出鄕人士
나이, 거주지, 직업).
)
32년),
문용임(남평,
58년)
명단
2012년 12월
현재
강명식(61, 광명시, 운전기사)
강문식(59, 서울, 운전기사)
강충식(50, 대산, 양계업)
강인식(70, 논산, 축산업)
고종규(68, 서울, 자영업)
기철호(68, 의정부, 운수업)
김양익(34, 평택, 회사원)
김양진(32, 인천, 회사원)
김상백(70, 서울, 자영업)
김동천(65, 서울, 건설업)
김영희(59, 서울, 자영업)
김균엽(51, 대산, 자영업)
- 32 -
김천석(45, 대산,
)
김동이(61, 서울, 자영업)
김재기(52, 안양, 건축업)
김준표(48, 전주, 회사과장)
김성학(40, 안양, 회사원)
김시용(45, 서울, 회사과장)
김시옥(43, 고창, 회사원)
김사익(38, 서울, 자영업)
김대진(38, 인천, 자영업)
김인엽(58, 익산, 회사원)
김정엽(55, 익산, 공사소장)
김성희(52, 익산, 회사원)
김기열(50, 익산, 은행원)
김창엽(50, 안양, 자영업)
김태완(47, 청주, 자영업)
김청엽(42, 전주, 회사부장)
김동규(65, 대마, 자영업)
김해수(58, 서울, 자영업)
김동간(56, 서울, 건축업)
김영길(67, 광주, 자영업)
김영인(58, 서울, 자영업)
김은환(54, 서울, 자영업)
김윤환(57, 서울, 자영업)
김종환(56, 대마, 농업)
김재환(53, 부천, 회사원)
김충환(41, 서울, 수원시립교향악단)
김동필(69, 대마, 전 대마농협)
김상용(65, 서울, 자영업)
김상하(61, 광주, 자영업)
김창수(76, 서울, 자영업)
김인수(72, 서울, 자영업)
김상현(82, 안양, 건축업)
김길수(51, 안양, 대리점장)
김재수(50, 인천, 자영업)
김영표(40, 안양, 자영업)
김동주(69, 전주, 자영업)
김동일(67, 영광, 과수원)
김옥준(60, 인천, 자영업)
김춘엽(54, 인천, 자영업)
김태엽(52, 고창, 치과기공소)
김한엽(50, 전주, 컴퓨터학원장)
김성엽(48, 전주, 자영업)
김준환(51, 서울, 자영업)
김희철(51, 광주, 보건대학강사)
김준영(48, 과천, 회사대표)
김준식(36, 인천, 자영업)
김준태(34, 안산, 회사원)
김동석(36, 광주, 회사과장)
김갑환(46, 전주, 회사원)
김영환(43, 서울, 자영업)
김기섭(41, 서울, 회사원)
김기환(38, 익산, 학원장)
김종철(66, 의정부, 자영업)
김종진(53, 서울, 자영업)
김덕수(37, 서울, 회사원)
김양현(45, 경기, 회사원)
김양준(43, 서울, 경찰관)
김덕관(51, 서울, 회사원)
- 33 -
김덕철(39, 서울, 자영업)
김영엽(54, 신태인, 운수업)
김종엽(49, 신태인, 건축업)
김완제(45, 신태인, 건축업)
김준엽(41, 서울, 공무원)
박헌장(56, 광주, 서기관)
박헌철(53, 광명, 회사대표)
박헌중(49, 부산, 경찰관)
박헌모(46, 부산, 건설사소장)
박동석(44, 군포, 회사원)
박헌익(53, 광주, 회사원)
박헌종(37, 광양, 회사원)
박일수(74, 당진, 자영업)
박헌호(53, 서울, 자영업)
박헌승(47, 미국, 이민)
박이수(작고, 서울, 전 공무원)
박성호(38, 서울, 회사과장)
박정호(34, 인천, 의사)
박종수(50, 중국, 이민)
박종기(55, 서울, 자영업)
박종국(53, 서울, 자영업)
박종순(45, 안산, 자영업)
박인철(27, 순천, 회사원)
박종제(43, 영광, 자영업)
박종대(46, 서울, 자영업)
박종일(52, 서울, 자영업)
박종갑(39, 서울, 대위예편)
박종삼(42, 광주, 회사원)
박종기(51, 당진, 교육원교수)
박흥균(65, 대전, 회사원)
박종영(38, 대전, 회사원)
박종석(46, 당진, 회사과장)
박승철(42, 서울, 자영업)
박종인(36, 대전, 자영업)
박영균(80, 서울, 원예업)
박종환(75, 서울, 운전기사)
박종은(72, 진주, 자영업)
박종판(57, 인천, 자영업)
박종현(59, 광주, 농협)
박종인(54, 광주, 자영업)
박종현(
광주, 원호청)
박종문(56, 광주, 자영업)
봉정수(59, 영광, 자영업)
봉남수(54, 수원, 자영업)
서용인(58, 서울, 건설업)
서용석(52, 광주, 자영업)
이천희(54, 안산, 자영업)
이상태(63, 전주, 대학직원)
이철형(37, 전주, 의원장)
이광희(46, 전주, 회사원)
이재진(50, 서울, 농협과장)
이재수(56, 서울, 공무원서기관)
이채범(80, 영광, 농협)
이재진(46, 안산, 자영업)
이재평(52, 대산, 낙농업)
이재천(53, 안산, 자영업)
이재옥(47, 서울, 자영업)
이재경(49, 광주, 설계사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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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열(55, 서울, 자영업)
오진열(73, 호주, 이민영사관)
오행열(42, 서울, 자영업)
오국열(44, 서울, 운수회사원)
오세근(74, 서울, 구의원)
오성근(79, 전주, 향토연구회고문)
오삼열(66, 서울, 회사부장)
오순열(74, 서울, 전회사과장)
오덕열(54, 서울, 회사과장)
오명열(58, 대산, 자영업)
오교장(49, 서울, 회사과장)
오학열(52, 서울, 회사부장)
오현상(45, 서울, 회사차장)
오현석(48, 서울, 공인회계사)
오교진(57, 제주, 검사소장)
오교성(61, 전주, 대학교수)
오주열(62, 대산, 자영업)
오통열(65, 대산, 자영업)
오천근(63, 창원, 건축업)
오종근(68, 대산, 소방대장)
오교만(59, 고창, 회사대표)
오교준(65, 광주, 공군준위예편)
오교정(50, 서울, 경찰청)
오교철(53, 광주, 회사부장)
오영훈(50, 전주, 건설업)
오교창(47, 고창, 자영업)
오동훈(38, 미국, 회사원)
오재훈(47, 서울, 캐나다자영업)
오동열(60, 서울, 자영업)
오세열(70, 서울, 전공무원)
오교봉(49, 서울, 회사원)
오광열(57, 서울, 교직원)
오교윤(40, 서울, 회사원)
오교복(41, 부천, 회사원)
오교갑(55, 서울, 회사원)
오경환(34, 서울, 회사원)
오교정(48, 서울, 회사부장)
오교을(54, 서울, 회사실장)
오종필(35, 전주, 회사원)
오종석(38, 전주, 회사원)
오교천(54, 용인, 자영업)
오교일(57, 서울, 회사실장)
오정준(31, 목포, 공무원)
유규담(48, 부산, 운수업)
유규호(46, 파주, 교사)
유택규(43, 분당, 회사지점장)
유태종(87, 서울, 전경찰관)
유영직(44, 영광, 공무원)
유길성(41, 광주, 건축업)
유창화(39, 영광, 건축업)
장호규(41, 군산, 회사원)
장년기(58, 정읍, 교회장로)
장성규(51, 경기, 회사원)
장학규(79, 장보, 농업)
장종근(75, 양양, 정미업)
장경열(51, 양양, 요식업)
장경복(39, 양양, 자영업)
장경철(36, 양양, 축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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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규(37, 익산, 회사과장)
정준수(84, 의정부,
정병의(65, 백수, 동물병원장)
정찬일(32, 영광, 자영업)
정성웅(30, 광주, 학원강사)
정 섭(55, 군산, 자영업)
정병동(55, 영광, 자영업)
정병민(52, 서울, 자영업)
정병은(46, 영광, 자영업)
정병옥(57, 서울, 회사원)
정병근(55, 서울, 자영업)
정병문(53, 서울, 건축업)
정병일(51, 서울, 자영업)
정병우(47, 서울, 자영업)
조환성(43, 서울, 자영업)
조수영(41, 오산, 자영업)
채충옥(51, 서울, 자영업)
최동환(59, 광주, 회사원)
최병용(55, 고창, 자영업)
최병석(50, 고창, 자영업)
최병기(48, 의정부, 자영업)
최석윤(66, 대전, 자영업)
최석길(56, 대전, 해외근무)
최석용(51, 영광, 회사원)
최봉희(51, 영광, 자영업)
최봉인(45, 서울, 회사팀장)
탁봉규(87, 부산, 전경찰관) 도움 주신분
<그림 23.
갈마리 주민들 마을 내력 조언>
김재주(1940, 갈마리) 김상만(1936, 갈마리) 박대수(1935, 갈마리) 오맹렬(1926, 갈마리) 김상균(1933, 갈마리) 오정렬(1925, 갈마리) 이채범(1934, 영광읍) 오성근(1935, 전주시) 참고문헌 『『광산김씨 고창세거와 문헌․유적』, 고창문화연구회, 2012.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군문화유적분포도』, 원광대학교, 2005.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 고창농악보존회, 나무한그루, 2010.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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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牟陽城의 얼』, 고창군, 2009. 『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 민음사, 1993.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나주오씨 참판공 파보. 김해김씨 대동보 밀양박씨 대동보 영성정씨 대동보 함평이씨 대동보 인동장씨 대동보 경주이씨 대동보 나주오씨 연원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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