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집성촌 나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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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해리 라성리 이대건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해리면 라성리는 월봉(月峰)․매남(梅南)․나산(羅山) 등의 행정리를 합친 법정리다. 자연취락으 로는 나산(羅山)․대정동(大井洞)․매남(梅南)․성산(星山)․우봉(牛峰)․월봉(月峰)․유암(溜岩)․중구(中 九)가 있고, 기타 우봉(牛峰)․한시암 등이 있다. 법정리인 라성리는 1895년(고종 32년) 이전 에는 무장군 오리동면(五里洞面)의 속리였다. 1895년(고종 32년) 이후, 「구한국지방행정구 역 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 一覽)」에 의거하면 당시 라성리는 오리동면(吾里洞面) 나산리 (羅山里), 월봉리(月峰里), 중구리(中九里), 매남리(梅南里), 성산리(星山里)로 각기 있었다. 1914년 이후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에 의거하여 라성리(羅星里)는 무장군의 나산리(羅山里)․월봉리(月峰里)․성산리(星山里)․매남 리(梅南里)․중구리(中九里)․상리면(上里面) 복구리(伏狗里) 등 각 일부가 합쳐져 오늘날의 해 리면 라성리가 되었다.

2. 마을의 자연환경과 지명 1) 자연환경 라성리의 산계는 무장에서 서쪽으로 발달하여 뻗어 나온 산줄기가 장사산(269.6m)을 이루 고, 다시 북서쪽으로 발달하다가 봉백산(150m)과 장군산(170.6m)을 이루고 남서쪽으로 발 달하다가 고리포에서 멈춘다. 봉백산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발달하여 궁산저수지 서쪽의 조 지산을 이룬다. 봉백산이 북쪽으로 발달한 산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 다. 봉백산 북쪽 줄기를 따라 중구, 유암, 매남, 대정, 성산 마을이 있다. 성산마을의 서쪽으 로 월봉마을이 있다. 성산마을의 북쪽으로 나산과 월암 마을이 있다. 라성리는 1930년 간척 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와 천일제염이 이루어졌으며, 석호가 발달했던 곳이 다. 라성들 : 라성저수지 : 라성천 : 해리면 라성리에 있는 하천. 성산제 : 성산마을의 동쪽에 있는 저수지. 월봉제 : 월봉마을의 남쪽에 있는 저수지. 대정제 : 대정마을의 서쪽에 있는 저수지. 유암제 : 유암마을의 서쪽에 있는 저수지. 붓들 : 중구마을의 서쪽에 있는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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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성리의 자연취락의 유래와 위치 유암(留岩) : 조선 명종 초에 경주이씨 번(璠)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세워졌다. 번의 아들 4형제 중 3남이 유암에 머무르게 되어 유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매남(梅南) : 매남은 3남의 후손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매화를 많이 심어 봄철이면 매화꽃이 만발하여 매남이라 하였다고 한다.

중구(中九) : 중구마을은 뒷산이 장군봉으로 그 산의 맥이 아홉 번 구비쳐 내려오니 중구촌 (中九村)이라 하였다. 마을은 원래 수원최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월봉(月峰) : 조선 명종 초에 경주이씨 번(璠)의 4남이 월봉에 살면서 마을이 이루어지기 시 작하였다고 한다. 월봉은 마을 뒷산에 반달과 같은 큰 엄반(嚴盤)이 있어 가정의 평온(平穩) 와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도하던 곳으로 마을 이름을 반월(半月)로 부르다가 월봉(月峰)으 로 불러야 상서롭다는 풍수상의 속설 때문에 현재는 월봉으로 부르고 있다. 월봉은 경주이 씨 집성촌이다.

성산(星山) : 성산마을은 월봉 위쪽방향 마을로 함평이씨가 살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진 마을 이나 경주이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 함께 살고 있다.

대정동(大井洞) : 대정동은 성산의 동남방향에 위치하였고 함평노씨의 집성촌으로 마을 앞 에 있는 식수천(食水泉)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대정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산(羅山) : 나산은 1700여년경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청주한씨가 들어와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라 한다. 그러나 이들이 떠나고 지금은 경주이씨가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1930년대에 사반리에서 나주최씨가 마을로 들어왔다.

3. 마을의 인문환경과 산업 1) 라성리의 토지이용변화 라성리는 1930년 부안면 봉암리의 이형승(李馨承)의 간척사업이 있기 전부터 간척이 이루어 졌으며, 아직 미개간지인 간석지와 면한 작은 마을들이었다. 특히 장호리의 동쪽인 월봉마 을 앞의 들은 간척이 되기 전까지 자염업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1872년 무장현지도에는 동호리 해안선에 潮進則水沈一丈潮退則沙場與鹽場處라며, 주기는 밀물 때의 수심과 썰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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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모래사장과 염장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즉 라성의 토지이용은 이미 백제시대로 거슬 러 올라가야 한다. 심원 검당의 전설에 의하면, 선운사의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인근의 도적 들을 개과천선시키고 천일염 제조법을 가르쳐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 국이 치열하게 전쟁을 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도적이 된 이들에게 검단선사는 소금 생산하 는 일을 알려줌으로써 생계를 이어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즉 검당포 뿐만 아니라 라성리는 사주와 사구로 막힌 내해의 석호라 더 없이 천일제염 생산에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춘 곳이 다. 이러한 자염생산은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을 것이고, 점점 간석지를 개간하여 농지로 만 들어 나갔을 것이다.

(그림 ?) 참조.

라성리 앞의 장호리는 간척을 하기 전까지 천일염을 생산하였으나, 1910년대 지형도를 확 인해도 라성리 쪽은 논으로 개간하여 논농사가 행해졌다. 즉 명사십리의 해안사구의 배후는 다른 곳에 비해 수량이 풍부하여 논농사가 발달하였다. 사구는 물 저장과 정수 능력이 탁월 하다. 이유는 두꺼운 모래층이 해수와 담수를 밀도 차에 따라 분리하면서 모래에 의해 정화 된 깨끗한 물을 지하수로 저장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1926년 1월 26일 이형승은 라성 리 앞의 해안사구 배후지의 간석지와 천일제염생산지역의 간척사업의 승인 을 받고, 1930년 9월 20일에 완료하 였다. 이형승이 개간한 라성지구(해리 사반, 나성, 상하 장호)의 간척지 계획면

적은 49.67정보였으나, 개답은 35.07 정보였다. 라성리 앞의 용두리 일대는 해안의 사주와 사구가 발달하고 육지 쪽으로 넓은 간석지가 발달한 자연적 인 해안이었다. 라성리와 면해있는 용 두리의 간석지는 1996년 거대한 양어 장이 생겨나고 간척에 의해 내부는 농경지로 완전히 변하였다. 라성리 앞의 석호는 일제강 점기에 대부분 간척에 의해 충적지로 변해버렸고, 사구의 발달로 좁아진 만 출입구에 유수 의 출입을 조절하는 용두리 수문을 세움으로써 완전하게 지형이 변모하여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고창군 해안경관변화 p.21 그림 넣을 것) 2) 마을의 인구와 성씨 : 인구, 호구, 성씨, 다문화가정,

마을명

김 해

경주

청 주

나 주

전 주

김씨

이씨

한씨

최씨

이씨

다 문 화 가 정

유암 매남 중구 월봉 성산 대정동 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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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화유산 : 문화재, 비석, 인물의 묘, 제각, 신도비, 가옥, 길, 보호수 등 라성리 유물산포지1 : 해리면 라성리 산14번지에서 발굴된 유물분포지이다. 이 지역은 월암 마을 동측의 돌출된 구릉이다. 구릉은 남북방향으로 저평하며 대부분 밭으로 이용되고 있 다. 정상부에는 민묘가 10여기 있으며, 수습된 유물은 경질토기구연부편, 경질토기편, 연질 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시대상으로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라성리 유물산포지2 : 해리면 라성리 644번지에서 수습된 유물분포지이다. 나산마을에서 사 반으로 가는 진입로의 동측에 위치한다. 해발 107.8m의 동측야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의 말 단부이다. 이곳에서 경질토기편, 자기편, 기와편 등의 유물이 수습되어 건물지가 부존할 가 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라성리 유물산포지3 : 해리면 라성리 1745번지의 유적지로 중구마을 남측 구릉에 위치한 다. 수습된 유물은 경질토기편,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이다. 유물의 시대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다양하다. 경주이씨 효열각 : 해리면 라성리 매남 라성신협터 : 제실 : 라성리 매남

4) 전설과 풍수이야기 : 풍수, 마을이야기, 전설, 설화 등 (1) 풀 안 나는 구례산 능선 고창에서 서남쪽으로 지방도로를 따라 약 26km쯤 들어가면 해리면 라성리 구례물이란 마 을이 보인다. 앞은 서해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뒤에는 해발 약 20m 정도의 구례산이라 불리우는 야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 산 능선에는 지금도 풀이 나지 않고 검붉은 황토 에 소나무 몇 그루만이 서 있을 뿐이다. 이 산에 풀이 나지 않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때는 후삼국시대 신라의 국운이 기울고 궁예가 배반하여 후고구려를 세워 서로 세력을 잡고 국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을 무렵이다. 이 마을 구례물에서 남쪽으로 약 2km쯤 떨 어진 곳에 해발 약 100m 정도의 장군산이라 불리우는 산이 우뚝 서 있다. 하루는 뇌성벼락 이 천지를 진동하며 천지개벽이 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흐렸던 날씨가 갬과 동시에 키가 10 여 척, 몸통의 둘레가 10여 척 되는 거인이 10여 척 장검을 들고 안개가 쌓인 장군산 봉우 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 후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장군은 사방을 둘러보고 서쪽 능선을 따라 서서히 산을 내려오는데 난데없이 백토마 한 마리가 국구촌이라는 곳에서 뛰어나와 장군 앞에 우뚝 서더니 천지가 진동하게 울어대는 것이었다. 장군은 빙긋이 웃고 그 사나운 백토마를 타고 말타기, 활쏘기, 창, 칼쓰기 등 무술연습을 하 는데 하늘에는 무지개가 비치고 땅은 백토마의 말굽에 채여 뇌성이 일어나 먼지가 사방 몇 십 리까지 덮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수일을 연습하더니 하루는 온데간데없이 떠나버렸는데 그 후부터 구례산 능선에는 지금껏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장 군은 후백제의 견훤 휘하에서 무주 대접전과 나주 대접전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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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간신앙과 민속 : 동제, 두레, 산신제, 장승제, 풍어제 등

6) 마을의 인물 : 인물, 마을사람들, 기록할 만한 사람 등

7) 마을의 기관과 시설 : 학교, 보육시설, 요양원, 교회, 절, 모정, 회관 월봉마을회관 : 어린이책마을 : 월봉공동창고 : 라성교회 : 해리면 라성리 유암교회 : 해리면 라성리 유암 유암새마을회관 :

8) 소독작물(농사이야기, 농산물 작목의 변천과정, 축산, 과수, 복분자 등)

4. 마을조직과 행사

도움을 주신 분 이기화 (72세, 전고창문화원장) 참고문헌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 1971. 『전라도무장현지도』1872.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한글학회, 1981. 『전라북도 연해지역의 간척과 경관변화』홍금수, 국립민속박물관, 2008. 『고창군 해안지역의 지형과 토지이용 변화』유승상,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9.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8권』진실화해위원회 제9차보고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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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현지역조사보고서』전북역사문화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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