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 장천공파의 집성촌 칠성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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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공파의 집성촌 칠성마을 신성리 칠성마을 병렬

1.

위치와 유래

칠성마을은 행정구역상 법정리인 성내면 신성리에 속하는 마을로, 여기에 속한 자 연취락으로는 칠성과 정각촌이 있다. 칠성리는 성내면소재지에서 북으로 약 800m의 거리에 있으며, 칠성리가 속해 있는 신성리는 동쪽에 조동리와 월성리, 서쪽에 동림 저수지와 흥덕면 석우리, 남쪽에 동산리, 북쪽에 덕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칠성 리의 남동쪽으로는 국도 22호선이 있는데, 칠성리 입구로는 국도 22호선에서 리도 (里道) 204호선을 따라 들어오다가 농도(農道) 301호를 따라 마을이 있다. 1308년(충선왕 원년) 칠성은 창덕현(昌德縣) 동면에 속해 있었다. 1389년 창왕 이 즉위하면서 고을 이름이 창덕에서 흥덕으로 바뀌었으나, 칠성은 흥덕현의 동면으 로 지명이 변경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조 세조 원년인 1455년 지방 방위 조직의 개편에 따라 동면은 일동면과 이동면으로 나뉘었는데, 이 때 칠성은 일동면 에 속하게 되었다. 한국을 강제로 점령한 일제는 1914년 3월 1일 부군통폐합령(府 郡統廢合令)으로 흥덕현과 무장현을 고창군으로 병합하면서 흥덕현에 속해 있던 일 동면과 이동면을 통합하여 성내면을 만들었다. 성내면이 생기면서 13개의 법정리를 두었는데, 칠성리는 신성리에 속한 마을이 되었다. 성내면이라는 명칭은 성동(지금의 칠성)과 내퇴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신성리는 1914년 행정구역통폐 합 때 장교촌, 당사촌, 칠성동, 장수동, 구동, 관동 일부와 이동면의 신평리를 병합하 면서 신평과 칠성에서 이름을 따서 신성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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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칠성동 입구

유래는 조선조 태조의 육대손 정략장군(定略將軍) 현(玹)이 당년 20 세에 흥덕지방 녹지(綠地)와 이숙(姨叔) 되는 송인(宋引)을 따라 사포에 낙향하여 거주하면서부터다. 장천군의 증손인 옥야군(沃野君)은 본래 서울의 북진장방에 소격 서동에 살았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 왕실 내에 불안요소가 있자 이를 피 해 장남 현(玹)을 비롯한 4형제를 데리고 전라도 흥덕현(흥덕면 사포)의 동서댁(同 壻宅)으로 피신해 내려왔다. 이런 연유로 해서 이현의 집안이 사포에서 60여 년간 3 대를 세거하였다. 칠성마을에 터를 잡은 사람은 현의 손자 뇌(磊)로, 그는 천문지리 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뇌는 1556년 칠성동 터를 잡기 위해 고암산(鼓岩山) 서쪽 구수동(龜壽洞)에 머무르다가 국지사(國地師) 이계현(李繼賢)의 지시에 따라 지금의 칠성동 터를 잡아 영구안착하게 되었다. 이때가 인조 11년(1633년)이었다. 칠성은 산세가 보검형(寶劍形)으로 칼자루에 칠성무늬가 있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 에 마을 이름을 칠성동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웃난간, 칠성골, 새터, 유목동, 앞서당, 소도동, 황서방골 등 일곱 개의 골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칠 성동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고, 삼한시대 마한의 소도리(蘇途里)에서 유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백제시대 흥덕의 옛 명칭인 상칠(上漆)에서 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상칠에서 파생되어 나온 흥덕 고을의 지명으로 보는 것이라 하겠다. 칠 성마을을 포함하여 성내에는 칠성굴과 칠성들 및 칠성제 등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마을의 유래를 추정하기도 한다.

2.

자연환경과 지명

칠성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취락입지인 남동향이다. 북동쪽으로는 고암산(해발 75.3m)과 뒷재(37.4m)가 있어 겨울철 북서쪽의 대륙성 고기압의 찬바람을 막아준 다. 동림저수지의 수면은 해발 10m 이하의 저지대에 있으며, 칠성리의 들판은 해발 10m~20m상에 위치해 있다. 마을은 들판보다 약간 높은 20m~30m상의 구릉에 자 리 잡고 있다. 칠성리의 산지는 방장산에서 두승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입암면 봉양에서 갈라 져 나와 산림리의 중앙저수지를 따라 북쪽으로 발달하여 판교동(45.4m, 점촌마을 뒷산)을 이룬다. 판교동에서 산맥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 갈래는 서쪽으로 내려 와 앞서당과 장수마을을 이루고, 더 발달하여 동림저수지의 코두베기까지 닿게 된다.


한 갈래는 북향하여 신성리의 밤나무단지를 가로지른 뒤 다시 두 갈래로 나뉘 는데, 한 갈래는 북쪽으로 발달하고, 다른 한 갈래는 서쪽방향으로 발달하다가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한 갈래는 남쪽으로 향하다 서쪽으로 줄기가 내려와 멈추는 데, 그 마을이 정각촌이다. 다른 한 갈래는 농협창고를 지나 고암산(75.3m)을 만든 다. 이 산은 다시 세 갈래로 분기되는데 한 갈래는 북쪽으로 발달하고, 한 갈래는 남 서쪽으로 발달하여 난간이, 안뜸, 아래뜸 등의 마을을 이룬 뒤 칠성들에서 멈춘다. 또 다른 한 갈래는 남서향으로 뻗어 유목동과 만각동까지 달려가다가 멈추어 마을을 이룬다. 입암 봉양에서 갈라져 나온 이 산지가 동림저수지의 코두베기-장수-판교동 (거무재, 점촌)-창고-유목동-만각동까지 역ᄃ자로 감싸고 돈다. 이 산지들 내부에 칠성리가 입지해 있다. 칠성리를 이루는 수계는 마을 주변의 산지를 따라 발달하였다. 대체로 마을을 통 과하는 하천은 보이지 않으나, 산계도에 의하면 수계도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고암산(75.3m)에서 갈라져 나와 발달한 산지를 따라 칠성리의 뒷골을 형성한 수계가 발달하고, 칠성과 정각마을을 형성하게 하였던 산지 사이로 수계를 형성하여 칠성리 앞 들판까지 흐르고 있다. 칠성 주변의 낮은 구릉의 산지를 따라 발달한 수 계는 마을 가장 서쪽으로 칠성제를 이루고, 칠성제에서 흐르는 수계와 정각과 칠성 사이의 수계가 만나 칠성들을, 다시 서쪽으로 흘러 유목동 앞의 뒷골에서 발달한 수 계와 합류하여 관동들을 형성한 뒤, 동림저수지로 흘러 들어간다. 대체로 칠성리는 북서쪽과 북동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으며, 서쪽은 평야지대를 이 루는 지형이다. 특히 북서쪽으로 두 개의 구릉성 산지가 마을을 보호하고 있고, 마을 앞산이 낮아 북서쪽의 찬 공기가 자연스럽게 통과할 수 있는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지형이다. 한편 마을의 서쪽은 낮으나 겹겹이 산지가 발달하여 겨울철 추위를 막아 주고 있으며, 산지의 발달로 마을 앞에 하천이 발달하게 됨으로써 충적지가 형성되 어 이를 개간하여 충분한 농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형을 볼 때, 칠성리는 우리나라 촌락입지의 전형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입지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입구 는 좁고 마을은 넓은 전착후광(前窄後廣)의 지형이기도 하다. 한편 칠성리의 풍수지 리 형국을 보검출갑형(寶劍出匣形)이라 하는데, 희대의 보검이라 해도 갑 속에 넣어 두고 사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 번 갑 속에서 나오면 간사 함을 진압하는 큰 이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형의 소응은 마치 날 카로운 칼로써 허공을 자르듯, 천하를 재단하는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는 명당이라는 뜻이다. 칠성리의 풍수형국이 이러한 의미이기 때문인지 인물의 고장인 고창에서도 특히 이곳 성내 칠성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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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칠성동 전경

(白甲山, 62.0m)

퇴(兎)미봉 또는 태산이라고도 불리는 산이다. 고암산에서 북동쪽으로 갈라져 나 와 솟아올라 만들어진 산이다. 이 산은 수원백씨의 것으로 독립운동가이신 근촌 백 관수 선생과 사회경제사학의 대부로, 학자이자 교육가이며 정치가로 근현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백남운가의 선산이다. 백갑산에는 갑산부사를 지낸 백현민(白賢 民)의 묘가 있다. (2) 고암산(鼓岩山, 75.3m) 칠성마을에는 둥둥바우 또는 둥둥산으로 불리는 고암산이 있다. 칠성리의 진산이 다. 신성리는 고암산을 분수령으로 조동리와 나누어진다. 이 산에서 갈라져 발달한 산지들이 칠성리의 산수계를 결정하고 있다. 고부천의 상류인 팔왕천(八旺川)에 동 림저수지의 둑을 축조할 때, 이 산의 바위들을 깨어 쌓았다고 한다. 돌을 나르기 위 해 탄광에서 쓰이는 레일이 깔렸고, 그 위에 채굴한 광석을 나르는 운반기를 설치하 여 채석한 돌들을 운반하였고 한다. 지금도 고암산에서 채굴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고암산의 서남쪽에서 채굴한 곳을 ‘묵은 독판’, 동남쪽의 채굴한 곳을 ‘새독판’ 으로 부르고 있다. (3) 각시샘 각시샘은 고암산 바로 아래 성내북초등학교(지금은 요양원) 바로 오른쪽에 있었다 고 한다. 줄포에서 수산물을 사서 정읍과 순창 등의 내륙에 등짐을 지고 물건을 팔 던 장사꾼들이 주로 이용하였던 샘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샘이 사라지고, 그 터 위에 집이 지어졌다.


(4) 고암산 아래 각시샘 아래 있는 골로, 현재 조동농협창고 앞의 골을 부르는 명칭이 다. (5) 비석골 비석골은 둥둥바우 뒷편에 있는 골을 말한다. 예전에는 비석골에 백련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 사라지고 없다. (6) 설악골 칠성들 앞 정각(붓등)을 따라 발달한 산지의 왼쪽을 따라 발달한 골로 대봉산 바 로 앞까지 깊숙이 발달한 골이다. (7) 뒷재(37.4m) 고암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는 난간이 마을 뒤에서 올라다가 다시 아래로 뻗어오다 가 다시 솟아 칠성과 뒷골마을로 나누어 주는데, 이 능선상의 산이 뒷재가 된다. (8) 대봉산(大峯山, 61.5m, 큰봉) 칠성저수지에서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 대봉산 또는 큰봉으로 불리는 구릉의 산이 다. (9) 칠성제(七星堤) 칠성들의 동쪽 끝에 있는 저수지로 1963년에 축조하였다. 칠성들과 관동들의 중 요한 농업용 저수지이다. (10) 칠성들 칠성저수지부터 칠성마을회관 앞을 지나 뒷골이 만나는 곳까지의 넓은 들판을 칠 성들이라 부른다. 그 서쪽으로는 관동들이라 부른다. (11) 뒷골 뒷골은 둥둥바우(75.3m)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개의 산지 사이로 발달한 골짜기로 칠성마을의 뒷재(37.4m) 너머에 있는 골짜기이다.


(12) 밤나무등은 뒷골마을의 오른쪽 끝(우백호에 해당)의 능선 가장자리이다. 이 능선 에 밤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밤나무등이라 불렸다. (13) 난갈이(난간이, 난갱이, 40.2m) 난갈이는 마을 뒤에 있는 구릉의 산과 마을을 부르는 지명이다. 칠성에 마을이 형 성되기 전 마을이었다고 전해진다. 전하는 말로는 큰 난리로 난갈이에 살던 주민들 이 피난을 갔을 때, 난간이 바로 아래의 칠성마을에 전주이씨 장천공파가 입향을 하 였다고 한다. (14) 구묘지 난간이 바로 옆의 대밭을 말한다. 장천공의 19대손인 이명종 씨(73세)에 이곳에 옛날에는 묘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도굴꾼을 불러 확인해본 결과 아주 옛날의 공 동묘지로 들었다고 한다. (15) 새터 조동리에 있는 구슬마을 앞을 부르는 말이다. 현재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공장이 있는데, 이곳이 새터라 부르던 곳이다. 예전에는 가옥이 대여섯 채가 있었는데 현재 는 폐촌이 되었다. (16) 앞서당(앞시랑) 원래는 제각이었으나, 이곳을 서당으로 꾸며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앞서당은 칠성 리의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지금은 폐허가 된 건물이 하나 있는데, 전주이씨의 제실로 이용되던 것이다. 특히 비가 와서 시제를 모실 수 없을 때에는 이곳에서 제를 올렸다. 장천군의 9대손 이강(李綱)의 네 아들인 명천(命天), 성천 (性天), 희천(希天), 석천(錫天)이 칠성에서 터를 잡고 살았는데, 이 제각은 둘째 아 들인 성천(性天)의 후손들 제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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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앞서당

(16) 칠성마을은 안뜸과 아래뜸으로도 불렸다. 덕천군수를 지낸 성천의 후손이 거주하 는 곳의 북동쪽을 안뜸이라 불렀다. (17) 아래뜸 이정근 가옥의 남서쪽을 아래뜸이라 불렀다. (18) 배정골(주정골) 배가 닿았다는 곳이다. 고부천(또는 눌제천)을 따라 서해에서 이곳까지 배가 왕래 하며 정박하였다 하여 배정골 또는 주정골이라 부른다. 배정골은 칠성제 위의 동쪽 을 말한다. (19) 창고 창고는 칠성제의 북동쪽의 날근점을 지나 지도상 대봉산의 능선 아래를 말한다. 창고는 일제 강점기 때 천석꾼이었던 이휴열의 쌀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창고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수십 년 전까지 이곳에 창고의 흔적이 있었으며, 창고 앞과 뒤에는 창고에서 일하는 창고지기가 살고 있던 집 두 채가 있었다고 한다. 창 고라는 곳은 현재 조경업을 하는 사람이 새로 집을 짓고 살고 있다. (20) 날근점 칠성제의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토기를 만들었던 곳이라 하여 날근점으로 불 렸다. 후에 토기를 만들던 곳은 부근의 월성리 점촌(새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21) 현재 반석만세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는 지역으로, 이곳에 황씨들이 살고 있어서 황서방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야산을 개발할 때 큰 참나무가 많이 있었고, 기와의 파 편이 많았다고 한다. (22) 소도동 칠성마을의 유래에 나오는 명칭이다. 그러나 현재 소도동에 대한 유래나 지명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삼한에서는 매년 1∼2차에 걸쳐 각 읍별로 제주(祭主)인 천군(天君)을 선발하여, 특별한 장소에서 제사를 지내 질병 과 재앙이 없기를 빌었다. 이 때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소도’라 하는데, 그 명칭 은 거기에 세우는 ‘솟대[立木]’의 음역이라는 설이 일반적이고, 높은터[高墟]의 음역인 ‘솟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소도에 영고(鈴鼓)를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제사 지내던 당시의 주술적인 민속신앙은 오늘날에도 유습을 찾아볼 수 있는 데, 솟대가 그것이다. 따라서 소도의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솟대배기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23) 칠성굴 칠성리는 야산개발 이전에는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산중이었다. 만각동에서 고 암산, 대봉산을 지나 앞서당, 황서방골(만세반석교회)까지를 일러 칠성골이라 한다. (24) 북성동 북소리가 났다고 하여 북성동이라 전한다고 한다. 둥둥바우의 능선이 동림저수지 방향으로 두 갈래가 내려오는데, 그 중 한 갈래가 유목동과 만각동으로 내달리고 있 는 그 중간에 재(39.2m)가 하나 있다. 이 재가 북성동이라 전하는 곳이다. 북성동이 라고는 하나 처음부터 마을은 없었다고 한다. (25) 솟대배기 솟대를 세워두었던 곳으로 일명 소죽거리라 불렀다. 칠성마을회관에서 제각으로 가는 길 왼쪽에 마을의 식수를 공급하는 모터실이 있다. 그 모터실 앞의 길 건너, 지 금은 논이 되어버린 곳이 솟대배기라 한다. 이 마을에는 한말 대원군이 하사한 큰 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기에는 용이 그려져 있었는데, 마을에 살던 혹쟁이(청주한 씨)라는 사람이 추울 때 집에서 이불 대신으로 덮어버리면서 낡고 더러워져 버렸다


한다. 솟대배기를 세워두었던 돌은 이경종(작고) 씨가 보관을 했다고 한다. (26) 붓등(정각등) 정각촌으로 내려온 산으로, 그 풍수형국이 붓처럼 생겼다 하여 붓등이라 부른다. 붓등의 끝부분인 모를 형상화하여 대나무를 없애지 않고 기른다고 한다. 영모제 뒤 의 대나무 밭이 붓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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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모제와 붓등

(27) 구시개 난갈이 북서쪽의 고개를 말한다. 지금은 포장된 도로가 통과하고 있는 곳이다. 소 여물을 주는 구시(구유)라 하여 구시개 또는 구시재라 부르는 곳이다. (28) 와우등(臥牛嶝) 각골 뒤에 있는 등성이로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다. (29) 사장등(射場嶝, 46.8m) 난갈이 북서쪽의 낮은 구릉성 산을 말한다. 장천군 10대손 희천이 활을 쏘며 맞혔 던 판이 있던 곳으로 전하며, 마을 청년들이 명절 때에 모여 활쏘기를 했다는 곳이 다.

3. 1)

인문환경 특성

(1) 일제시대 일제강점기에 칠성리는 고창군의 어느 곳보다도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석열(李錫烈)과 이 마을의 천석지기 부자인 이휴열(李休烈), 그리


그의 아들 이재남 등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휴열은 일제치하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2년제인 성내보통학교 를 설립하였다. 이어 그는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에 추대되어 고창교육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기미독립운동 당시에는 독립감독부 전라북도 재무로 군자금을 모아 상 해임시정부에 보냈다. 그의 아들인 이재남도 고창고보 시절 학생들을 선동하여 조선 독립만세를 주도적으로 이끌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 전북감독 부 고문을 맡은 이석열은 독립운동군 자금을 모아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높이 사 1983년 건국훈장 애족상을 추서 하였다. 이와 같이 칠성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하여 민족독립에 많은 기 여를 한 곳이다. 이들 부자의 이러한 영향으로 칠성리는 일찍부터 일제하에서 한국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로 자리를 잡았다. 한편으로는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병 시 이 마을 사람 중 일부는 가장 먼저 참여하여 일제의 아시아 침략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2) 한국전쟁 해방 후 한국사회는 극심한 좌익과 우익의 사상싸움을 하였다. 이러한 사상투쟁은 칠성리 마을사람들을 비켜가지 않았다. 특히 칠성리는 사회주의운동과 빨치산으로 활동해 온 사람들이 많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을 주도적 으로 해 온 인사들이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이곳 칠성이 고창의 사회주의운 동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이 마을에서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한 인물이 많이 나왔 던 까닭은, 이곳의 부자였던 이휴열의 아들 이재남이 당시 사회주의 정치가인 백남 운(아산면 반암리 참조)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운동과 사상을 실천함으로써 그의 밑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기 때문이라 한다. 특히 이재남은 그를 따르 는 많은 사람들에게 밤마다 사상교육을 시켜 사회주의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하였다. 또한 빨치산 고창군 사령관으로 이 마을 출신 이동현 씨가 있다. 그는 빨치 산 활동을 하다가 자수하여 고창에서 경찰관으로 복무를 하기도 하였으며, 후에는 지사(地師)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위와 같은 연유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비검속 (豫備檢束)에 걸려 고창경찰서로 끌려가서 정읍경찰서로 이송되었다. 많은 칠성주민 들이 사회주의와 빨치산 활동으로 학살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군산형무소로 이송된 사람 중 돌아온 사람은 없으며, 대구형무소로도 두 명이나 갔다고 한다. 해방 후 사 회주의자들의 대남투쟁은 한국전쟁 전에는 지하공작대라 하여 반란군으로 활동을 하


, 전쟁 후에는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칠성리에서도 이와 같이 활동을 하였다. 성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경제권은 인근 부안군 줄포와 정읍이었다. 줄포는 수산 물이 풍부하여 5일 시장이 성행하였는데, 정읍이나 순창의 장사꾼까지 이곳에서 물 건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 줄포와 전북 내륙지역으로 출입하기 위해선 ‘양민증’·‘국민증’·‘도민증’ 같은 것을 발급받아 통행을 하였다. 이 신분증 들은 반정부군, 즉 빨치산ᆞ사회주의운동가들과 일반인을 가르기 위한 형사적 또는 군사적 용도의 고안물이었다. 이 증명서가 없으면 통행할 수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도 없었고 좌익이나 통비 분자로 의심받았다. 출입을 위해서는 반드시 양민증이 있어야 하고 이를 제출해야 했는데, 칠성마을 사람들은 칠성이라 말하지 못하고 숨겼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칠성마 을은 타 지역에 비해 특히 사회주의운동가와 빨치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대 한민국정부는 예비검속을 통해 좌익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확인해 두었다가 불시에 잡아들였다. 이렇게 예비검속을 통해 잡은 사람들을 고창경찰서로 이송한 뒤 다시 정읍경찰서로 옮겨 그들을 성내면 석전 앞 석전등(또는 뒷박골)에 땅을 파서 총살시 켰다. 칠성주민 대부분이 시신을 찾지 못했으나 시신을 찾은 사람(이재삼)도 있었다 고 한다.

4. 1)

인물 (李磊, 1588~1647년)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낭여(廊如)이고, 장천군 보생의 후손이다. 그는 진문의 아 들로 처가인 문경송씨를 따라 이곳 칠성마을에 입향하였다. 광해군 당시 집의와 배 랑 벼슬을 지냈고, 계축 후에 칠성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이괄의 난 때 전라 도의 선비들과 더불어 창의해서 곡식을 모아 나라에 바쳤으며, 적을 대파한 공로로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2) 이국형(李國馨, 1614~1677년)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덕원(德遠)이고, 장천군 보생의 후손이다. 그는 통정대부 (通政大夫)1)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2)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냈다. 1) 조선시대의 관계(官階)로 정3품의 상계(上階)이다. 1865년(고종 2녀)부터는 문관 뿐만 아니라 종친(宗親)·의빈(儀賓)의 품계로도 함께 사용하였다. 통정대부는 국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서 공로가 인정되어 승정원 경연찬관을 지냈다. 3)

(李濟, 1614~1677년)

본관은 전주이니 장천군 보생의 후손이며, 참봉(參奉) 기문(起文)의 5대손이다. 그 는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베어 주혈하여 회생시켰다. 그의 아 들 응하(應厦)도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주혈했고, 응하의 딸 이 시집가기 전에 응하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베어 주혈하였다. 이와 같이 일가 3대 가 효행으로 이름이 나자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1758년(영조 34년)에 3세가 복 호(復戶)되고, 명정(命旌)되었으며, 그 정려가 칠성마을에 있다. 4) 이명천(李命天, 1652~1726년) 자는 성여(聖與)이고, 호는 덕성(德星) 또는 만회당(晩悔堂)이며, 본관은 전주이 다. 그는 장천군 보생의 후손인 집의(執義) 뇌의 증손이다. 1652년(효종 3년)에 성 내면에서 출생하여 1726년(영조 2년)에 졸하였다. 그는 나이 겨우 열네 살 때 부친 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 소생시켰고 연달아 다섯 번의 상을 당함에 죽 만 먹고 예법대로 거행하였다. 1713년(숙종 39년)에 순무사(巡撫使) 권상유(權尙 遊)가 나라에 천거하여 복호(復戶)되고 명정(命旌)되었다. 그의 정려가 조동마을 대 봉산에 있다. 5) 이석천(李錫天, 1664~1750년) 본관은 전주, 자는 성수(聖受), 호는 반죽당(伴竹堂), 본관은 전주, 장천군 보생의 후손이다. 그는 가선대부(嘉善大夫)3)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4)를 지냈다.

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근무일수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 라 가자(加資) 또는 가계(加階)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봉조하(奉朝賀) 가 되어 녹봉(祿俸)을 받는 등의 특권을 누렸다. 2) 조선시대 승정원에 두었던 정3품 관직. 3) 조선시대의 종2품 아래의 관계(官階). 초기에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 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관계로도 사용하였다. 4) 조선시대 중추부의 종2품 관직. 중추부는 조선시대 일정한 직무가 없는 당상관 (堂上官)들을 우대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다. 본래 나라의 군사관계, 즉 출납·병 기·군정·경비·차섭(差攝) 등의 일을 맡은 관청이던 중추원(中樞院)을 1466년(세조 12년)에 중추부로 고쳤다. 그 직무는 병조에 넘기고 맡은 일거리가 없는 벼슬아 치들을 우대하기 위한 관청으로만 보존해 오다가 고종(高宗) 때 다시 중추원으로 고쳐 의정부에 소속시켰다.


6)

(李性天, 1656~1710년) 전주, 자는 낙천(樂天), 덕천군수를 지냈다. 그는 현재의 터에 가옥을 건축

하고, 이 터에서 12대손까지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후손이 살고 있지 않다. 집 뒤에 원모당이 남아 있다. 그가 잡은 가옥의 터는 명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7) 이문형(李文衡, 1724~1775년) 자가 사평(士平)이고, 호는 모호(茅湖) 또는 이요재(二樂齋)이며, 본관은 전주, 장 천군 보생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한 번 배우면 잊지 않았는데, 경사(經 史)를 두루 섭렵하여 학문이 깊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31세 때 도곡(陶谷) 이양원(李養源)의 문하에 나아가 『대학』으로부터 경서를 다시 시작하 여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특히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주자서 (朱子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성현의 심법에 뜻을 두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 았다. 영조 51년(1775)에 모호제에서 졸하니 향년 52세이고, 저서로 『모호집유고 (茅湖集遺稿)』5권 2책이 있다. 8) 이문언(李文彦, 1724~ 793년)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사박(士博)이고 호는 성음(星陰)으로 장천군 보생의 후손 이다. 성음은 수촌 백시덕과 진사 백시명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그는 학행(學行)으 로 여러 번 천거(薦擧)되었다가, 영조 35년(1759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영조 49 년(1773년) 50세 때 동당시(東堂試)에서 「지여암근지(至如 近之)」라는 부(賦) 를 지어 장원하였다. 정조 17년(1793년)에 졸하니 향년 70이고, 저서로 『성음유고 (星陰遺稿)』1권1책이 있다. 9) 이인호(李寅顥, 1774~1860년)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성순(聖淳), 호는 성파제(星파제)로 장천군 보생의 후손이 다. 그는 순조 3년인 1803년에 성균생원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정순황후의 수렴청 정으로 신유박해, 토역교문(討逆敎文) 등 어지러운 정사를 피해 고향에 내려와 조용 히 은둔생활을 했다. 그 후 그의 4대가 두문불사하여 묻혀 살았다. 10) 이가백(李可白, 1782~1861년)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청일(靑一), 호는 묵제(黙齊)로 장천군 보생의 후손이다. 그는 철종 10년인 1859년에 의(疑)5)로 진사에 합격하였다. 저서로는『저어당세(著


)』가 있다. 11)

(李秉光, 1843~1902년)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정근(正近)이고, 장천군 보생의 후손이다. 그는 생균생원인 가백의 손자로 고종 10년인 1873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12) 이재승(李載昇, 1899~1950년) 장천군 보생의 진사 병광의 아들로 호는 두암(斗菴)이다. 일찍 상업에 눈을 떠 국 외에서 학문을 닦고 공장을 국내에 설립하여 운영하여 방적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 다. 그후 성내면장에 선임되어 많은 치적이 있다. 전 고창군수와 국회의원을 지낸 이 호종이 그의 아들이다. 13) 이병근(李秉瑾, 1870~1916년)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경원(卿元), 호는 파은(피은)이며, 장천군 보생의 후손이다. 승훈랑(承訓郞)6) 후릉(厚陵)7) 참봉(參奉)8)을 지냈다. 14) 이순열(李舜烈, 1879~1949년) 본관 전주, 1887년생, 호는 거산당(巨山堂)이다. 장천군 보생후(普生后) 진사 병 광(秉光)의 자로 거대한 체구에 이마의 눈썹 풍채가 좋고 의기가 당당하였으며, 언 론에도 능했다고 한다. 그는 일제시대 성내면장을 지냈으며, 농촌진흥회에서 돈을 융 자받을 수 있도록 주민들에게 알선해 줌으로써 소작농들이 땅을 갖게 하였다. 또한 독립운동기금을 모금하는 일과 육영사업에 눈 떠 초대 사립 성내보통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병 1기로 큰 손자(이홍종, 1921~1945년) 를 보내 친일의 흔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손자는 대동아전쟁 중 사망하였다. 15) 이재형(李載炯, 1917~2007년) 5) 과거(科擧) 문제의 하나로 경서(經書)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킬 만한 것의 뜻을 설명. 6) 조선시대 정6품 하(下)의 동반관계(東班官階). 동반은 양반 중 비군사직 관원을 말한다. 7) 후릉은 조선 2대 정종과 안정왕후의 쌍릉으로, 개성시 판문군 영정리에 있다. 8) 조선시대 있었던 종9품 벼슬. 조선시대의 원(園), 능전(陵殿) 및 사옹원(司饔院), 내의원(內醫院), 예빈시(禮賓寺), 군기시(軍器寺), 군자감(軍資監), 소격서(昭格署) 등 많은 관서에 속해 있었던 관직이다. 최말단직의 품관이다.


전주이고 거산 순열의 아들이다. 재능과 성품이 좋았으며 영민하였다. 또한 생각이 깊고 침착하였다. 그는 고창고보와 전주사범학교(강습과)를 졸업하고 무장초 등학교 교사와 성내면장을 하였다. 1949년에는 국가고시를 합격하여 전주시청과 전 북도청에 근무하였다. 16)

(李錫烈, 1884~1923년)

본관은 전주이고, 호는 소암(素庵), 자는 자윤(子允)이다.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 로 국권이 침탈되자 성내에서 사재를 털어 장학계를 조직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참여를 했다. 같은 해 11월 상해임 시정부 연통제(聯通制) 전북감독부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의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3년 3월에는 전북감독부 감독인 노진룡(魯鎭龍), 이종택(李鐘澤) 등과 함께 면사무소의 등사기를 집에 가져 다 놓고 독립정신을 앙양하는 선언문을 인쇄하여 전라도 일대와 충청도 지방에 살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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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석열 불망비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83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500석 걸이의 부자로 소작인들에게 관대하고 베풀어 주는 사람들이었기에 소작인들 이 돈을 거둬 그의 불망비를 세웠다. 불망비는 성내농협 앞에 있다. 17) 이휴열(李休烈, 1889~1950년) 본관은 전주이고, 1887년생, 자는 녹현(祿賢), 호는 근우(槿愚)이다. 장천군 보생 후 참봉 병근(秉瑾)의 자로 지모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으며 견문이 넓었다. 일찍 육 영에 뜻을 두고 자금을 내어 2년제인 성내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1918년 마


씨가 세워 정식으로 인가받은 사립오산학교가 총독의 압력과 운영난에 봉착 하자 다른 고창의 유지들은 거의 외면할 때 먼저 1만원의 거금을 출연하여 유지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기미독립운동에도 활약을 하여 독립감독부 전라북도 재무로 군 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는 매년 성내초등학교에 쌀 백석을 장학금으 로 내놓았다. 아들로는 재남과 재복, 재득이 있는데, 재복(載馥)은 월북하였다고 전 한다. 또한 재득(載得)의 자녀 둘이 월북하였는데, 확인된 이는 이정호(李正鎬)뿐이 다. 18)

(李載南, 1913~1949년)

본관은 전주, 호는 창당(昌堂)이며, 1913년에 이휴열의 아들로 태어나 고창고등보 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 6월 10일, 고창고보 1학년 재학중 모양성에 올라 6·10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학년 때인 1928년 전국적인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고창고보에 독서회를 조직하여 광주학생운동의 항일투쟁의식을 승계하여 비밀결사활 동을 하였다. 1930년 2월 12일 전주형무소에 구치된 후 형 집행정지를 받아 가출옥 된다. 그후 중앙고보에 다니다가 비밀결사단체인 반제동맹의 조직에 참여하다가 서 대문형무소에 복역, 1934년 6월 10일 만기 출옥하였다. 일제의 요시사찰인물이 되 어 동아일보에 1940년까지 근무하다가 세상이 어수선하자 종적을 감추었다. 해방 후 그는 당당히 종로로 나와 옛 동지들을 만나 교류를 하였다. 1946년 11월 24일 남한노동당 결당식을 거행하고 중앙위원회를 구성할 때 남로당 중앙위원 선전부장을 맡았다. 또한 남로당의 특수공작부 국회담당책이 되어 1949년 3월, 남로당국회프락 치사건을 일으킨다. 즉 남로당은 이재남에게 국회의원인 노일환을 포섭하라는 지시 를 하고, 그를 포섭한다. 이재남과 노일환은 일제시대부터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섭이 어느 정도 성공하자 그의 후임자 하사복(가명 이삼혁)에게 노일환을 인계한 다. 당시 제헌국회 내에서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은 민족자결주의의 이름 아래 외국군 대철수안(김구안)·남북통일협상안 등 공산당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을 편다. 김약수 등 13명은 1949년 4월 말∼8월 중순까지 3차에 걸쳐 검거됐다. 수사결과 관련 의원들은 남로당 특수공작원인 이삼혁ᆞ이재남ᆞ김사필ᆞ정재한, 남로당 중앙 간부 박시현 등과 접선을 하고 있었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로는 정재한이 월북한 박 헌영에게 보내는 보고서인 국회 내 남로당의원의 프락치 비밀공작보고가 담긴 암호 문서였다. 같은 해 6월 19일부터는 헌병사령부에 국회프락치사건 특별수사본부가 설 치되었고, 1950년 2월 10일, 13명 전원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 최고 징역 12년형


최하 2년형까지 선고하였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은 좌익조직으로 되어 버린 반민특위를 습격하였고, 동년 9월 22일, 반민특위의 폐기법안으로 완전히 폐지되었 다. 한국전쟁 때 감옥에서 사형을 당한 것인지 그때 그의 행방이 묘연하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그의 장인인 김시중은 장성인으로 부모가 만석꾼이라 불리는 거 부였으며, 한민당 전남도당위원장이었다. 그는 한학자이었으며 일제 때는 신간회에 관여한 민족사상이 투철한 인사로 자신의 고향에 월평보통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 에 힘썼으며, 사회주의사상에도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재남의 큰 아들 광호(匡 鎬)와 큰 딸은 한국전쟁 당시 월북을 하였다고 전한다. 19)

(李昊鍾, 1929~현재)

국회의원과 고창군수를 역임하였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를 마쳤다. 1995년 7월부터 2002년 6월 말까지 고창군수를 역임하였다. 20) 이정근(李政根, 1957~2002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는 전주지방법원 군산 지원판사를 시작으로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에 근무하였다. 그의 아내인 윤영미도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으로 일찍 사망하였다.

5.

문화유산

칠성마을의 문화유산은 전주이씨 장천군파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칠 성마을은 장천군파의 집성촌으로 장천군 보생의 부조묘와 묘, 그리고 그를 모신 사 당인 영모제와 그의 후손인 이문규를 모신 원모제가 있다. 중요한 가옥으로는 이휴 열과 이정근의 집이 남아 있다. 1) 전주이씨 장천군(長川君, 1403~1465년) 시호는 공소(恭昭), 본관은 전주이씨다. 정종(定宗)의 13남으로 이름은 이보생(李 普生)이며, 어머니는 숙의윤씨(淑儀尹氏)이다. 조선을 건국하고 맨 먼저 양위한 상왕 을 받들어 충효를 다하다가 3월 15일 별세하였다. 아들로는 부림군(缶林君) 이형(李 炯), 악양부정(岳陽副正) 이혼(李 ), 진안부정(眞安副正) 이요(李燿), 삼양부정(三 陽副正) 이석동(李石童)이 있다. 1444년(세종 26년) 명선대부 장천도정(長川都正) 이 되고, 1872년(고종 9년) 정종의 왕자 중에서 군으로 봉해지지 않은 이들을 봉군


때 장천도정(長川都正)에서 장천군(長川君)으로 봉군되었다. 영종정경부사를 추 증받았다. 배위 신부인화순최씨(愼夫人和順崔氏)는 도사(都事) 최자해(崔自海)의 딸 로 산양군부인(山陽郡夫人)에 봉해지고 부조묘의 은명(恩命)을 받았다. 2)

장천군 부조묘(不 廟)

부조묘는 신성칠성길 74-14의 건물을 말한다. 부조묘는 불천위9)(不遷位)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다. 예로부터 종갓집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위로 4대에 해당하는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제사를 모시던 자가 죽은 경우인데, 죽은 후 그 후손은 뒤를 이어 제사를 모실 때 죽은 이 를 포함하여 선조 3대를 모시게 된다. 이때 기존에 모시던 가장 위의 선대의 제사는 지내지 않게 되고, 이 경우 그 선조의 신위를 사당에서 꺼내 땅에 묻는 것이 예의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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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부조묘

<그림7> 장천군의 신위 9) 불천지위(不遷之位) 큰 공훈(功勳)으로 영원(永遠)히 사당(祠堂)에 모시기를 나라 에서 하락(下落)한 신위(神位)


특별한 경우 왕의 허락 아래 신위와 제사를 모시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을 부조묘라 한다. 주로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이나,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왕들은 나라에 큰 공훈을 세 운 인물이라 여겨지면 신위를 옮기지 않도록 허락하였다. 이렇게 ‘불천지위(不遷之 位)’가 된 대상들은 4대 봉사가 끝난 후에도 신주를 땅에 묻지 않으며 계속적으로 후손들에게 기제사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장천군의 부조묘가 이곳 칠성마을 묘역 아래에 있다. 1906년(고종 10년) 활민당사건으로 인하여 효실되었다가 1939년 중 건하기 시작하여 상량은 1940년에 완성되었다. 이석열의 부인인 전주최씨는 이곳에 불이나자 계묘(밤나무로 만듦)를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몇 해 후 최씨는 연 기로 질식되어 사망하였다고 한다. 3)

(李普生)의 묘

이보생의 묘는 서울시 도봉구 삼양동에 있었는데, 도시계획에 편입되어 1973년에 후손들의 거주지인 칠성으로 이봉하였다. 묘 주위에는 신도비와 묘비 및 석상 망주 석 등의 석의가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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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천군 이보생의 묘

4) 영모제(永慕齊) 영모제는 신성칠성길 74-12에 건립된 제각이다. 1872년 나라의 특전으로 장천군 보생의 부조 봉사손(奉祀孫)에게 사판을 추서하고 기와 5칸을 지었었다. 1966년 후 손들이 협력하여 현대식 양옥으로 건립하고, 다시 2005년도에는 현재의 철골 콘크 리트로 재건축하였다. 영모제에서는 매년 정초, 추석, 동지에 제사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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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9> 영모제

(神道碑) 참소공(參昭公) 이보생은 선원(璿源)인 정종대왕 13남으로 사직(社稷)에

공이 있었다. 그의 묘소가 서울시 도봉구 삼양동에 있었는데, 도시계획으로 인하여 칠성동 부조묘 오른쪽에 면봉(緬奉)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비문은 봉사손 재득(載 得)이 짓고, 안동(安東) 김충두(金忠頭)는 서(書)했다. 신도비는 1974년 4월에 세 웠다.

<그림10> 장천군의 신도비

6) 이휴열의 가옥 천석지기였던 이휴열의 가옥이다. 7칸 겹집의 기와집이었으나, 철판으로 만든 기와 로 바꾸었다. 대문에는 집안의 집사나 집을 지켜주는 사람이 거처하던 곳인 행랑채 가 있으며, 대문의 지붕은 예전의 기와를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바꾸었다. 대문 안쪽 앞에는 손님들을 맞이했던 사랑채가 있다. 본채의 서쪽에는 우물이 있고, 동쪽에는 임금님이 하사한 회화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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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1> 이휴열의 가옥

가옥 장천군 휘(諱)10) 보생의 구세손인 이성천은 덕천군수를 지내고 성내면

신성리 269번지에 정착하였다. 그는 1711년(숙종)에 가옥을 건축하여 12대손까지 계승 거주하여 자손이 번성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이정근의 가옥을 명기 (名基, 이름난 터)라 불렀다. 마을에 전하는 말로는 이정근의 가옥에는 새가 절대로 앉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12> 이정근의 가옥

8) 원모제(遠慕齊) 원모제는 이정근 가옥 뒤에 있는 제각을 말한다. 장천군 보생의 후손인 이문규를 위하여 1890년 2월 18일 후손들이 협력하여 기와로 3칸을 지었다. 매년 춘삼월 제 사를 드렸다고 한다. 원모제 안에는 이 집안으로 시집왔을 때 타고 온 꽃가마가 있 다. 현재 건물은 3칸 홑집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기와를 걷어내 양철로 바꾸었 10) 죽은 사람의 이름이나 높은 사람의 이름 앞에 쓰는 말.


. 숭정(崇禎)11)기원후사무오(紀元後四戊午)라는 상량문이 있다.

<

6.

13> 이정근 가옥의 원모제

풍수이야기

칠성리에는 둥둥바우와 비석등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칠성은 마을 형성 당시부터 풍수지리개념을 도입하여 입지를 선정하였기 때문에 풍수이야기가 많이 전 해오고 있다. 칠성들에 있는 우물터와 각시샘이 있는 각시앙골, 붓등과 칠성들의 연 수물, 뒷골의 치미형국, 모정 뒤의 숫돌, 와우형의 풍수 등 많은 풍수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1)

전설

칠성리에서 가장 높은 산은 고암산으로 일명 둥둥바우 또는 둥둥산이라 한다. 아 주 옛날 고암산이 크려고 둥둥 뜨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고암산 바로 아래 샘에서 목욕을 하던 아낙네가 산이 둥둥 뜨는 모습을 보고 놀라 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에 놀란 산이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부터 둥둥바우라 불렸다고 전 한다. 이 산 바로 아래에는 목욕하던 아낙네가 둥둥 뜨는 바우의 모습을 보았다는 각시샘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샘을 없애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다른 설에 의하면 이 지역에 사는 아가씨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가마를 타고 가는데, 산이 둥둥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에 놀란 새색시가 소리를 쳐 놀란 산이 주저앉았기 때문에 이를 둥둥바우라 했다는 설이 있 다. 11)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1628~1644)로 명나라가 망 한 뒤에도 조선은 청나라 연호를 쓰는 것을 꺼려 이 연호를 사용하였다.


2)

전설 뒤에는 둥둥바우와 백갑산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 말발자국이 있었다

고 전한다. 하늘을 나는 말이 있어 둥둥바우에서 백갑산까지 날아갔다가, 그곳에 발 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비석등은 고인돌로 그 위에 북두칠성의 별자리가 있다고 한 다. 성내가 북두칠성의 형국이고, 칠성의 비석등이 그 시작하는 별자리였다고 한다. 비석등이 있는 이 고인돌이 바로 신앙유적지라 할 수 있다. 충북대학교 이융조 교수 가 확인을 하고 갔다고 한다. 현 윤도장을 이끄는 명인의 아버지는 나침반의 자력이 약해지면 비석등 위에 자침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러면 자침에 자력이 생겨 나침 반의 수명이 길어졌다고 한다. 3) 붓등과 연수물 형국 대봉산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 아래 영모제의 정각과, 장천군의 부조묘와 묘가 있 다. 이 능선의 풍수형국은 붓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붓등이라 부르고 있다. 붓 은 글씨를 쓰는 도구이기 때문에, 붓 끝이 무뎌지면 안 되기 때문에 대나무와 같이 가늘고 질긴 나무를 심어 붓의 모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이곳 에 집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붓등을 뭉개면 글쟁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믿 음 때문이었다. 집을 짓지 못하도록 해도 마을사람들이 억지로 집을 지으니 어쩔 수 없이 몇 채의 집이 지어진 것이라 한다. 또한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물이 있어야 한다. 그 먹물에 해당하는 샘이 정각 바로 앞 칠성들에 있는 연수물이다. 현재 이 샘은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 무리 큰 가뭄이 들더라도 마르지 않고 차고 넘친다고 한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 우물을 온 마을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와 각 가 정마다 지하수를 파면서 이 샘은 사용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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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붓등의 연수물


4)

옹녀유통의 혈 한 지관이 각시샘 아래에는 있는 산에 옹녀유통(옹녀의 젖가슴)의 혈이 있

다고 하여 마을사람에게 묘를 잡아 주었다고 한다. 5) 뒷골의 치미형국 뒷골마을을 감싸고 있는 능선이 치(키)와 같다고 하여 풍수형국으로 치 또는 키 형국이라 한다. 뒷골마을의 풍수형국이 치이기 때문에 지하수나 우물을 파지 않았다 고 한다. 키에 구멍을 뚫으면 키질을 제대로 할 수 없을뿐더러 곡식이 새어나가기 때문이라 한다. 뒷골에는 일곱 가구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한 가구도 살지 않아 폐촌 이 되었다. 6) 보검압출형의 숫돌 칠성의 형국이 검으로, 검을 가는 숫돌이 모정 뒤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숫돌의 흔적도 찾을 수 없으며, 마을사람들도 숫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 이 아무도 없었다. 단 추측되는 것은 땅을 개간하고 집을 헐면서 땅에 묻었을 것이 라고 전한다. 7) 와우동과 구시개 와우동(30m)은 덕산리 감동의 남쪽에 있는 구릉이다. 이곳은 소가 누워 있는 형 국으로 소가 먹을 여물이 필요하고 여물을 담기 위한 구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명명된 고개가 구시개이다. 이는 비보풍수적인 성격이 강한 내용이다.

7.

현황

1) 마을의 인구 2010년 4월 30일 현재 칠성리의 세대수는 55세대이며, 인구는 105명으로 남자 는 52명, 여자는 53명으로 여자가 1명 더 많다.


년도 2002 2004 2006 2008 2010(4월 30일 현재)

2)

세대수 46 47 53 53 55

인구수 119 112 113 103 105

남자 58 58 59 53 52

여자 61 54 54 50 53

성씨 분포현황(2010년 9월 현재) 성씨는 문중의 성을 따라 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 된 독거여성노인인

경우는 사망한 남편의 성씨나 자녀들의 성씨를 중심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조사 대상자는 2009년 흥덕면․부안면․신림면․성내면의 전화번호부를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따라서 성내면사무소의 인구현황과 실제 거주자와는 차이가 있음을 밝혀둔다. 전화 번호부상에도 부부가 함께 나온 경우 남편 쪽 본관만을 기록하였다. 칠성마을의 성씨 분포를 보면 절대적으로 전주이씨가 많음을 알 수 있는데, 전체 적으로 조사대상 가구의 70%였다. 다음으로 진주강씨가 3가구, 김해김씨와 울산김 씨가 각각 2가구였다. 옥천조씨, 하동정씨, 연안이씨, 평산신씨 등은 각각 1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명 합계 칠성

43

전주 진주 울산 김해 옥천 하동 연안 평산 고흥 김씨 이씨 강씨 김씨 김씨 조씨 정씨 이씨 신씨 유씨 30

3

2

2

1

1

1

1

1

1

3) 마을의 길과 보호수 (1) 신작로 산림을 개간하기 전 칠성리는 야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산중이었다. 근대 야산을 개발하여 밭으로 개간하면서 칠성리의 야산들이 농경지로 바뀌게 되었다. 칠성리의 성내북초등학교가 개교하기 전 초등학교의 앞에 신작로가 있었다. 이 신작로는 줄포 의 수산물들을 내륙의 정읍과 순창으로 운반하던 중요한 교통로였다. 신작로는 현 요양원 앞에서 관동사거리와 동림저수지를 지나 줄포로 가는 길을 말 한다. 곰소만에 접하고 있는 줄포 장에서 소금과 젓갈 및 수산물 등을 사가지고 등 짐을 지고 이곳을 통과하여 정읍과 순창에 내다팔았다. 무거운 등짐을 가지고 이고 가던 장사꾼들이 이곳 고암산을 지날 때면 종종 어두워져 이곳 각시샘 부근에서 야 영을 하거나 밥을 해먹고 갔다고 한다. 줄포와 정읍 및 순창으로 통했던 이 길은 성


개교하면서 새로운 길이 생겨 폐쇄되거나 일부가 도로에 편입되었 다. (2) 마을 앞길 칠성에서 칠성들을 지나 만세반석교회 앞으로 통과하는 길을 말한다. 이 길이 생 기기 전 칠성에서 성내면소재지로 가는 길은 칠성마을회관 앞에서 모정을 지나 유목 동을 거쳐 장수리로 가서 성내로 가는 길이었다. 면소재지를 가려면 빙빙 돌았던 칠 성마을 주민들에게 이 길을 만들어 준 사람이 이순열, 당시 성내면장으로 일제의 강 제징병에 장손을 보내면서 만든 길이다. 그가 징병 1기로 손자를 전쟁터에 보낸 것 은 일제에 솔선수범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3) 회화나무 칠성마을의 천석지기였던 이휴열의 가옥 안에 있는 노거수이다. 280년 전 전주이 씨의 선조가 심었는데, 높이가 12m, 둘레가 3m로 고창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회화 나무는 우리 선조들이 최고의 길상목이라고 여겼던 나무이다. 이 나무를 집안에 심 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인물이 난다고 하였으며, 이 나무에는 잡귀신이 감 히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이 나무를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회화나무는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 대궐 같은 곳에만 심을 수가 있었고,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에게 임금이 상으로 내리는 나무였다. 이휴열의 가옥 안에 있는 이 노거수가 바로 임금이 하사한 나무다. (4) 소나무 성내면 신성리 산 56번지에 있는 소나무이다. 1995년 8월 27일 고창군의 보호수 로 지정되었다. 고유번호는 9-14-12-1이다. 수령은 265년(2006년 7월 기준)으 로 추정된다. 높이는 1,500cm이고, 둘레는 390cm에 이른다. 이외에도 칠성리 정각 촌의 장천군묘 주위에는 수령이 100년 이상 되는 노송들 백여 주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를 심게 된 유래는 장천군의 10대손의 네 아들들이 모두 똑같이 아들을 둘 씩 두었다. 4형제의 8종항간 계를 하여 그들이 매년 몇 그루씩 심었다고 한다. 그래 서 지금의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되었다고 전한다. (5) 당산나무


신성리 칠성의 영모제와 장천군보생의 부조묘 사이에 있는 팽나무를 말한 다. 마을의 당산나무로 불리고 있다. 노거수이지만 아직 고창군의 보호수로는 지정되 지 않았다. 장성 부동에서 시집온 이소순(봉산이씨) 씨가 친정에 갔을 때 가지고 온 나무라 한다. 당시 가마를 메고 가던 하인들에게 시켜 세 그루를 가져와 함께 심어 놓았다고 한다. 이소순 씨가 시집온 후이니 이 나무도 1915년에 심은 것으로 추측 된다. 세 그루의 나무들이 서로 엉겨붙어 결국 이렇게 한 나무처럼 되었다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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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회화나무

<그림16> 소나무


<

4)

17> 당산나무

기관과 시설

(1) 성내면 신성리 산 49-1번지에 있었다. 본교는 1963년 3월 1일 성내초등학교 부 덕분교(3학급 인가, 2학급 편성)로 인가되어 동년 11월 15일 2개 교실 신축교사를 준공하여 개교하였다. 1968년 3월 1일 성내북초등학교로 승격되었다. 당시 학급편 성은 1-4학년 8학급이었다. 본교는 그 동안 29회 졸업생 1,592명(남 834명, 여 758명)을 배출하였다. 본교의 학구는 부덕리, 덕산리, 신성리 일부, 조동리 일부로 되어 있었다. 농촌인구의 감소로 30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재학생 12명만 남게 되 어 1998년 9월 1일 인근 양계리에 위치한 성내초등학교와 통폐합되면서 폐교가 되 었다. 본교의 역대 교장은 김우근, 양남근, 정충모, 정세현, 최익환, 김정태, 이용세, 김용환, 이원구, 유경목이었다. 교감은 은희철, 황호갑, 김문규, 김우석, 김한영, 김명 철, 오연홍, 소병도, 김정규, 진남일이었다. (2) 메디케어요양병원 2004년 10월 29일 성내면 신성리 5번지에 개원한 요양병원이다. 대표자는 김미 순과 김병기이다. 메디케어요양병원은 폐교된 성내북초등학교를 그대로 리모델링해 마련된 만성질환 노인병원이다. 김병기 원장은 현재 순천향대 외과 전문의로, 아버지 의 고향인 이곳에 노인병원을 설립하였다.


<

18> 메디케어요양병원

(3) 성내면 신성리 91-5번지에 있다. 1993년 5월 순복음교회로 출발하였으나, 2005 년 10월 23일 현 문종대 목사가 취임한 후 대한예수교 장로교 만세반석교회로 명칭 을 변경하였다.

<그림19> 만세반석교회

(4) 모정 모정은 칠성의 풍수형국인 보검갑출형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는 모정 뒤 에 칼을 가는 형국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모정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이다. 지붕의 재료는 슬레이트로 정부의 지원 없이 마을 자체적으로 지었다고 한다. 모정 은 1967년 4월 5일 가뭄이 심할 때 만들어졌다가 1998년 5월 30일 중수하였다. 모정 부근에는 힘자랑을 하던 들독과 집터를 다질 때 쓰던 직영돌이 있다.


<

(5)

20> 마을 모정

(念修亭)

일명 염수정이라 부르는 모정이다. 염수정은 영모제 바로 옆에 있는데, 1966년 6 월 6일에 세워졌다. 현재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염수정은 원래 이휴열 씨의 큰집 사당으로 쓰던 것을 뜯어다 만든 것이라 한다.

<그림21> 염수정

(6) 회관 칠성마을 초입에 자리하고 있으며, 1998년 8월 14일에 신성칠성길 53에 30평 규 모로 건축되었다. 현재 칠성마을의 고령화로 경로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호종 씨가 군수로 있을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칠성마을회관은 이호종 씨의 고향이기 때문에 고창군에서 가장 늦게 만들었다고 한다.


<

22> 마을회관

5) 해방 전까지는 이휴열 집안이 이 근처의 모든 땅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농사나 소유주가 따로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농업은 당시 주변 야산 을 개간하지 않았기 때문에 칠성들과 관동들을 중심으로 한 논농사가 주였다. 그러 다 해방 후 소작민들에 대한 농지상환으로 토지가 분배되었다. 이때까지도 논농사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칠성마을에 밭농사는 야산을 개발하기 시작하는 70년 대 이후부터로, 현재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논농사와 조금씩이나마 밭농사로 짓는 복분자가 있다. 그리고 조경업이 여섯 가구, 축산업에 세 가구가 종사하고 있었다. 밭농사로는 비닐하우스를 이용해 수박, 메론, 호박, 채소 등을 재배하고 있었다. 6) 마을조직과 행사 (1) 장천군파종회 마을주민들의 총회나 행사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전주이씨 장천군파 종친회의가 매년 2월 중에 있다고 한다. 이 회의에는 외부에 있는 자손들도 참여하여 진행된다. (2) 영모계 장천군 보생의 이하 자손들이 통틀어 하는 계가 있다. 3월 보름 전날인 시제 전날 부조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모시고 난 다음날 시제를 모시는데 그날 계 도 함께 한다. 3월 보름이면 전국 각지의 후손들이 관광차를 대절하여 칠성을 방문 하여 계를 한다. 회비는 따로 걷지 않고 종회의 재산으로 진행을 한다. (3) 8종계 이 계는 거의 3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장천군 9대손의 네 아들(명천, 석천, 성천, 희천)들이 모두 2명의 아들들을 가졌다. 이들 8명의 사촌들이 계를 만들


매년 소나무를 심고 모임을 가진 것이 유래다. 이들의 계는 현재까지 지속되는데, 후손들이 선영들의 묘역을 관리·유지하는 모임으로 발전을 하게 된 것이다.

주신 분

이기화(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전고창문화원장. 이명종(전주이씨 장천군파 19대손, 남 73세), 토박이. 이재술(전주이씨 장천군파 18대손, 남 72세), 토박이. 남대희(의령남씨, 남 82세) 토박이.

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고창문화』,고창문화원, 2005 『고창충의사』, 고창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2001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 민음사, 1993 『모양성의 얼』고창군, 1982 『약이 되는 우리 풀 꽃 나무』최진규, 한문화, 2001 『전주이씨정종왕자장천군파보』, 장천군파, 2000 『한국의 풍수』명문당, 村山智順저, 정현우역, 1996 『향토지』, 성내면, 1991 『학교연혁지』, 성내초등학교 『흥성지』, 흥덕향교, 2004 http://people.aks.ac.kr http://jeju.grandculture.net http://enc.daum.net/dic100 http://yoyang.hyo123.com http://koreaschool.com/new/jonbuk http://gongju.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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