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출한 마을 -
하고리 삼태마을
1. 지명유래와 풍수형국 전라북도 고창군 서남부에 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조정에 의하여 성동면(星洞面)과 원송면(元松面)을 합하고 성동면의 ‘성(星)’과 원송면의 ‘송(松)’을 따서 성송면으로 고쳐 12개 법정리가 되면서 고창군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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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태마을 입구 전경
성송면의 삼태는 고창읍에서 지방도 893번 도로(국도 23번)를 따라 성송면을 거 쳐 대산면 방면 서남쪽으로 4km로쯤 가면 자리하고 있다. 법정리 및 행정구획으로 보면, 법정분리로는 하고리이며, 행정분리는 삼태마을이고, 자연마을은 삼태와 고현 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표시하는 ‘삼태마을’ 비석이 있고 30m 걸어 들어가
왼쪽에 세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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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을 입석비
<사진 3> 마을 입구 비석
삼태는 삼태(三台)와 고현(古県)을 합한 자연마을을 가리킨다. 마을 뒷산이 천 문 별자리로 삼태성(三台星)과 같다 하여 산이름도 삼태봉(三台峯)이라 하고 마을 도 ‘삼태’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삼태성의 형국을 지닌 명당이라는 전설이 유래하 고 있다. 고려시대 무송(茂松)의 3정승인 윤(尹)・유(庾)・하(河)씨가 살았다 하여 삼태라 고 하고, 마을 뒷산 삼태봉은 3정승의 명기지(名基址)라 한다. 삼태마을은 풍수지리학상으로 떠 있는 배의 부선형국(浮船形局) 또는 행주형국 (行舟形局)이라 한다. 삼태천을 중심으로 삼태마을은 두 곳으로 나뉜다. 이는 주역 의 8괘(卦) 가운데 리괘(離卦
)에 해당한다. ‘리괘’는 배의 형국이다. 즉, 리괘의
초효가 삼태 마을, 이효는 삼태천, 상효는 고산쪽의 삼태마을을 말한다. 그리하여 삼태마을은 ‘배의 형국’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행주형국은 개인의 집터뿐만이 아니 라 읍이나 도읍지와도 관련이 깊다. 고현은 풍수지리학상으로 황새 또는 학(鶴)이라 한다. 이것은 삼태봉 바로 아래의 산이자 고현마을 뒷산을 초새봉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2.
연혁과 인구현황
통일신라시대 삼태봉을 배산으로 터를 잡은 무송현(茂松県)에서 남방으로 500m 지점에 위치한 행정분리 마을이다. 고려시대에는 윤씨(尹氏)・유씨(庾氏)・하 씨(河氏) 등이 입향하여, 윤씨와 유씨는 무송을 관향으로 삼았다. 유씨와 윤씨 집안 에서는 명인(名人)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씨는 자세하지 않다. 무송현이 위치한 고현 마을에는 남창지(南倉址)가 있다 한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는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현에 소속시켰다. 전남 영광에서 진주강씨(晉州姜氏)와 진주정씨(晉州鄭氏)들이 입향하였다. 진주강씨 는 영광으로 유배온 사평(司評) 강학손(姜鶴孫)의 현손 강계오(姜継呉)가 무송현 갈 산(葛山)으로 입향하였다. 강학손은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이다. 강 계오의 일족(一族)이 삼태마을로 입향, 번창하여 약 150가구가 거주하다가 남창으로 옮기고 다시 갈산마을로 옮겨갔다. 삼태천과 지방도 893번도를 건너서 형성된 삼태마을에는 기와막과 시묘청이 있었 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고 몇 가호만이 있다. 1980년 이후 농촌 경기의 침체로 많은 사람이 떠나고, 2009년 9월말 기준 39세대 72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녀 성별로는 남자 38명, 여자 34명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4명이 더 많다. 연령별 로는 10대 미만 4명, 10대가 6명, 20대가 9명, 30대가 2명, 40대가 11명, 50대가 5 명, 60대가 8명, 70대가 21명, 80대가 5명, 90세 이상도 1명이 거주하고 있다. 성씨별로는 진주정씨 10명 외 기타 성씨가 모여 살고 있어, 집성촌이라는 말은 옛 말이 되었다.
3.
자연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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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태마을 전경
(三台)는 성송면 서남부에 위치한 자연마을 삼태와 고현을 합한 마을이다. 삼 태는 하삼태와 중삼태로 구분되기도 하고, 고현은 상고와 하고로 구분되기도 한다. 산세를 보면, 동쪽에는 구황산이 있고, 남쪽에는 고산이 있고, 북쪽에는 삼태봉(三 台峯)과 골짜기 고무송(古茂松)이 있다. 삼태봉은 구황산의 한 지맥이 흐른 것이다. 삼태봉의 첫봉우리 189m 매봉산 정상에 서면 23번 국도 추산봉, 고산을 비롯하여 경수지맥의 모태산인 구황산의 조망이 뛰어나다. 삼태봉과 매봉산 사이 연치재는 하 고리와 판정리를 오가던 고갯길로, 방언으로 ‘저브랑재’라 한다. 현재 나무들이 무성해서 왕래하기 힘들지만 고갯길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삼태마을 바로 입구의 오른쪽 야산은 안산(安山)이다. 하천은 삼태마을을 감고 도는 삼태천이 있다. 교량은 삼태천을 가로지는 삼태1교 삼태2교가 있으며, 목교도 있다. 삼태천 둑에는 수백년 된 왕버들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
<사진 5> 삼태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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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삼태교에서 바라본 삼태천 모습
동쪽의 들을 관들이라 하는데 옛날 무송현의 관청에 딸렸기 때문이다. 관들 위쪽에 고현제가 있다. 삼태마을과 고현마을 중간의 땅은 삼태터이다. 하고현에는 ‘고욤독’이라는 고인돌이 있다. 마을 앞에 입석 당산(堂山) 1기가 있다. 삼태마을에 는 3정승인 윤(尹)・유(庾)・하(河)씨 등의 옛 유지(遺趾)와 무송유씨(茂松庾氏) 시 조묘가 있다. 삼태와 고현에 인접한 자연마을은 서쪽으로 남창이 있고 동쪽으로 내원과 외원이 있으며, 서쪽으로 중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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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7> 고현마을
인물과 행의(行誼)
1) (1) 유녹숭(庾祿崇) : ? ∼ 1114년 (예종 9년) 유녹숭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귀수(龜寿)이다. 고려 문종 때 학행(学行)으로 천거되어 벼슬을 역임하면서, 강직한 성품으로 한 번도 몸 을 굽혀 남을 따르는 일이 없었다. 벼슬자리에 있어 부귀하고 현달하였지만 의복과 가택(家宅)이 벼슬하지 않은 때와 같았다. 1099년(숙종 4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
), 1102년(숙종 7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서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 使)를 지내고 바로 은청광녹대부추밀원부사(銀青光祿大夫枢密院副使) 겸 검교태자소 보(検校太子少保)가 되었다. 태자소보에 재직시 평주(平州)에서 무송부원군(茂松府 院君)으로 이봉(移封)하여 자손이 무송현에 살았다. 1103년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参知政事)에 올랐다. 숙종 때 남경(南京: 지금의 서 울)으로 천도하고자 할 때 반대하였다. 예종 때 참지정사로 치사(致仕)하니, 나라에 서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한다. 시호는 안정(安貞)이다. 유녹숭의 묘가 무송 삼태마을 동막산(東幕山) 답동(塔洞)에 있으니 후인이 유정승동(庾政丞洞)이라 칭하 였다. 2)
인물
(1) 유응규(庾應圭) : 1131년(인종 9년)∼1175년(명종 5년) 유응규는 1131년에 태어났다.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무송, 초명은 원규(元 規), 자는 빈옥(賓玉)이다. 판이부사(判吏部事) 필(弼)의 아들이다. 타고난 재주가 총명하고 풍채가 아름다워 사람들이 옥인(玉人)이라 하였다고 한다. 글을 매우 잘 지었으나 두 번 과거에 낙방하여 음보(蔭補)로 내시가 된 뒤 참관(參官=參上官)이 되었다. 뒷날 지방관으로 남경(南京)으로 나가 청렴하게 정사를 다스려 합문지후(閤 門祗候)가 되었다가,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년) 정중부(鄭仲夫)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왕 으로 옹립하자, 내시로 기용되었다가 공부낭중(工部郎中)이 되었다. 그는 그 표문(表 文)을 받들고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선위(禅位)의 사실을 알리자 금나라가 묵 묵부답이었다. 이에 7일을 입정불식(立庭不食)하여 회조(回詔)를 받아 돌아왔다. 그 공훈으로 군기감 겸 태자중사인(太子中舎人)이 되었다. 금나라에 보여준 그의 고매 한 인격은 뒷날 금나라의 사신들이 모두 안부를 묻게 하였다 한다.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当)이 1173년(명종 3년)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다가 잡 혀 죽을 때, “모든 문신과 함께 도모하였다”라고 무고하였다. 이 때 화를 입을 뻔하 였으나, 무고한 사람을 죽이면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설득하여 무사하였다. 다 음해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자, 왕명으로 서경의 여러 성 (城)을 선유(宣諭)하며 점차로 귀순케 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郎)이 되었다. 1175년(명종 5년) 전중감으로서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와 함께 왕명으로
가서 조위총을 군신의 대의로 설유하여 그로 하여금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 을 청하도록 하였다.
(2)
(庾資諒) : 1150년(의종 4년)∼1229년(고종 16년)
유자량은 1150년에 태어났다.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무송, 자는 담연(湛 然)이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필(弼)의 손자이며, 공부시랑 응규(応圭) 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장중하고 말이 없었다고 한다. 16세 때부터 유가(儒家)의 자제 들과 교우하였으나 무인(武人)들과도 교제를 하여,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화를 면 하였다. 그와 교우하던 유가의 자제들도 모두 화를 면하였다. 음보(蔭補)로 수궁서승(守宮署丞)이 되고, 이어 대악서승(大樂署丞)을 거쳐 용강 현령(竜岡県令)이 되었다. 정사를 분명하게 처리하여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213년(강종 2년)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를 지내다가 치사(致仕)하였다. 치사 후 에는 은퇴한 재상들과 기로회(耆老会)를 만들어 술을 즐기며 우유양성(優遊養性)하 면서도 부처를 독실히 신봉하였다. 70세 때 하루는 문득 팔계문(八戒文)을 읽고 밤 에 목욕재계한 뒤에 시간을 묻고는 바로 취침에 들어 졸하였다.
(3) 윤택(尹澤) : 1289년(충렬왕 15년)~1370년(공민왕 19년) 윤택은 1289년에 태어났다.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중덕 (仲徳), 호는 율정(栗亭)이다. 국학대사성 문한사학을 역임한 해(諧)의 손자로,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고모부 윤선좌(尹宣佐)와 익재(益斎) 이제현(斉賢)의 문하에서 수 학하여 경서에 두루 통하였다. 특히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伝)에 능통했다. 충선왕 4 년(1317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録) 교감(校勘), 검열(検閲) 서 경참군(西京参軍), 권응교(権応教), 서경부윤(西京府尹), 우부대언(右副代言) 등을 역임했다. 충목왕 즉위 초에 나주목사가 되었고, 연경에 머물던 충숙왕(忠粛王)의 신 임이 두터워 그로부터 강릉대군을 후계자로 추대하라는 부탁을 받고, 이승로(李承 老)와 함께 중서성에 글을 올려 강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였다. 충 정왕이 즉위하자 광양감무로 좌천되었다. 공민왕(恭愍王) 때는 밀직제학(密直提学)을 역임하고 개성부윤(開城府尹)으로 치 사하였다. 왕에게 서경(書経)의 무일편(無逸篇)과 진덕수(真徳秀)의 대학연의(大
) 등을 강설(講説)하는 한편, 최승로(崔承老)의 상서문(上書文)을 강의하여 유학을 고취시켰다. 공민왕이 1357년(공민왕 6년) 중 보우(普愚)의 건의대로 한양 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이제현(李斉賢)에게 궁궐 터를 축조하도록 명했으나, 직 언(直言)을 통해 이를 저지시켰다. 1361년 정당문학(政堂文学), 1363년 첨의찬성사 (僉議賛成事)를 지냈다. 윤택은 효성이 지극하고 항상 정직하며 검소하여, 공민왕이 손수 그의 초상을 그 리고 ‘율정(栗亭)’이란 호 두 글자를 크게 써서 하사하였다. 관직을 치사하고 만년에 는 선영이 있는 금산(錦山)에 우거하다가 공민왕 19년(1370년)에 졸하니 향년 82세 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저서로 율정집(栗亭集)이 있다.
(4)
(尹紹宗) : 1345년(충목왕 1년)~1393년(태조 2년)
윤소종은 고려 말기 1345년 무송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헌숙 (憲叔), 호는 동정(桐亭)이다. 찬성사 택(沢)의 손자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 다. 일찍이 가학(家学)을 계승하였지만, 목은(牧隠)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20세 전에 시문에 능하였다. 그는 경사(経史)에 해박하였고, 성리학(性理学)에 도 조예가 깊었다. 익재(益斎) 이제현(李斉賢)은 그의 재주를 특이하다고 하였다. 1360년(공민왕 9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1365년(공민왕 14년) 예부시 을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춘추관수찬(春秋館修撰)을 제수받았다. 좌정언(左正 言), 전교시승(典校寺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芸), 전교령(典校令), 우사의대부(右司 議大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좌상시(左尚侍), 1390년(공양왕 2년) 정월 경연이 부활되자 경연강독관(経筵講読官)이 되었다. 진독수(真独秀)의 대학연의(大 学衍義)를 강론하여 제왕의 치도를 밝힐 것을 건의하였다. 특히 군주수신론(君主修 身論)을 전개하여 군주의 덕을 손상시키는 것을 멀리하도록 하였다. 변안열(邊安烈) 이 우왕을 임금으로 맞이하려고 하자 그 역모죄를 극론해 살해하고, 공양왕이 승려 찬영(粲英)을 왕사로 맞이하려는 계획을 직언(直言)하여 중지시켰다. 그는 가학(家学)을 이어받아 청백(清白)하였으므로 집이 몹시 가난하여 지신사(知 申事) 이존성(李存性)이 우왕에게 말하여 쌀 10석을 나라에서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는 또 중용(中庸)과 대학(大学), 논어(論語), 주역(周易) 등의 구절을 인 용하여 시사(時事)에 대한 「만언소(万言疏)」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였고 모친의 상을 당하여 금산(錦山)에 머무는 동안 많은 지방 학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려의 부패정치를 청산하려고 정도전 등과 역성혁명을 도모하려다 실패하여 유배되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성공하여 조선이 개창되면서 병조전서(兵曹典書), 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学) 등을 역임하면서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하였다. 원종공신(原従功臣) 3등에 올랐으며 1393년(태조 2년)에 졸하니 향년 49세이다. 저 서로는 동정집(桐亭集)이 있다.
(5)
(鄭冕奎) : 1804년(순조 4년)~1868년(고종 5년)
정면규는 1804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가헌(可軒), 호는 무남(茂 南)・노포(老圃)이다. 진양군(晋陽君) 정황(鄭璜)의 후손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 正鎮)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닦아 학행이 뛰어났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서울에 대보단(大報壇)을 짓고 만동묘를 헐어 부수자 그 부당 함을 상소하고, 영조 때 상주의 이만부(李万敷) 등이 만동묘의 훼철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그 설치의 의의와 과정 그리고 제향(祭享)의 의미를 담은 성토의 상소문을 올렸다. 저서로 노포유고(老圃遺稿)(4권 1책)가 있다.
(6) 정영원(鄭榮源) : 1853년(철종 4년)∼1940년 정영원은 1853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서(大舒), 호는 태호(台湖)이다. 충장공(忠荘公) 정황(鄭璜)의 후예이다. 일찍이 가훈을 이었고, 노 사(蘆沙) 기정진(奇正鎮)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万)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경 전에 해박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유릉참봉(裕陵参奉)을 지냈다. 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기고 봉선(奉先)에 성경(誠敬)으로 받들었으며 모현(慕賢)에 공경을 다하 였다. 만년에는 선인(先人)을 이어 자손 이업(肄業)에 진력하고, 또한 태호정(台湖 亭)을 세워 후학 양성하는 일로 소임을 다하였다. 저서로는 태호유고(台湖遺稿)가 있다. (7) 정휴탁(鄭休鐸) : 1872년(고종 9년)∼1915년 정휴탁은 1872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자경(子警), 호는 농산(農 山)이다. 충장공(忠荘公) 정황(鄭璜)의 후예이자, 유릉참봉(裕陵参奉)을 역임한 정영 원(鄭栄源)의 아들이다. 모친의 태몽에 대호(大虎)를 보았는데 태어나자 기골이 헌 헌(軒軒)하고 목 줄기에서 등까지 호문(虎紋)이 있었다. 자라면서 담력이 있고 심히 강직하고 몸가짐이 검약하여 사람을 압도하는 기상이 있었으나, 언소(言笑)에는 화
(和気靄靄)하였다. 1903년 주사(主事)로 서임(敍任)되어 중추원의관(中枢院議 官)을 거쳐 정 3품에 올라 1905년 장수현감을 지냈다. 성품이 본래 청렴결백하여 권귀(権貴)를 가까이 하지 않고 서책을 애독하여 식견이 해박하였으며 베풀기를 좋 아해 궁족(窮族)을 돕고 향인(郷隣)을 구제하는 데 노력하였다. 위선(為先)에 성의 를 다하여 선조의 석의(石儀)를 갖추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였다. 저서로는 농산유 고(農山遺稿)가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万)의 묘갈명이 있다.
(8)
(鄭泰煥): 1900∼?
정태환은 1900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문명(文明), 호는 석재(石 斎)이다. 충장공(忠荘公) 정황(鄭璜)의 후예이다. 경암(敬菴) 김한희(金漢禧)에게 학 문을 닦았다. 학문은 넓고 필법이 활달하였다. 극기극가(克己克家)에 법도가 있었고, 또한 행동거지에도 절도가 있었다. 어버이를 지성(至誠)으로 섬기고 선조 받들기를 지경(至敬)으로 하였다. 경재(経財)에도 베풀기를 좋아하여 고창고보(高敞高普) 설 립에 거금을 희사하고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많은 기민(饑民)을 구휼(救恤)하였다. 향인이 그 덕을 송모(頌慕)하여 삼태마을 삼태교 앞에 진휼비(賑恤碑)를 세웠다.
3) 충효 및 열부 (1) 윤구생(尹龜生) 윤구생은 고려 후기에 태어났다. 찬성사 택(沢)의 아들이고 개혁론자인 윤소종(尹 紹宗)의 아버지이다. 생몰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고려사의 효우열전(孝友列伝)에 의하면 여러 벼슬을 거쳐 고려 말에 판 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이르고 만년에 부친 의 별장이 있는 금주(錦州=錦山)로 내려가 우거하였다. 그는 사묘(祀廟)를 세워 삭 망(朔望)과 사중(四仲=仲春 2월, 仲夏 4월, 仲秋 8월, 仲冬 11월), 그리고 풍속의 명절인 속절(俗節)에는 삼대(三代=父・祖・曾)를 제사지냈다. 조상의 비석에 기일 (忌日)을 새겨 후손들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였다. 당시 나라에서 사대부(士大夫)들 은 가묘(家廟)를 세우라는 명을 내렸으나 시행되지 않던 시기에 주자가례(朱子家 礼)에 따라 동지에는 시조에게, 입춘에는 선조에게 제사하였다. 주자가례에 따라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절차가 여러 사람의 모범이 된다 하여, 1391년(공양왕 3년)에 전라도관감찰사 노숭(盧嵩)이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旌閭)를 내리고 효자 비를 세웠다. 특히 그 집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2)
(鄭時海) : 1874년(고종 11년)∼1906년 1874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조선 말기의 의병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낙
언(樂彦), 호는 일광(一狂)이다. 아버지는 정종택(鄭鍾沢)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 (居昌慎氏)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万)과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 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자호기(自号記)에서 “눈보라 속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동 분서주하는 자신의 행색이 흡사 미친 사람 같기도 하려니와 나라를 잃은 신하가 되 었으니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가 없다. 나 역시 미친 사람이기에 일광(一狂)이라 자 호한다”고 술회하였다. 1893년(고종 30년) 20세 때 부친의 명으로 보성에 유배된 영재(甯斎) 이건창(李 建昌)을 찾아뵈었다. 1894년(고종 31년) 21세 때 동학란이 일어나자 부친을 모시고 부안(扶安)의 구개(旧浦)로 이사했다가 고종 33년(1896년) 23세 때 다시 고향집에 돌아왔다. 정시해는 학문적으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鎮)의 성리학을 계승하여 당 시 논쟁되었던 사단칠정에 대하여 정확한 논지를 전개하였고, 기정진의 성리설이 율 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문에 어긋난다고 피력한 권봉희(権鳳煕)와 최동민(崔東敏) 의 설을 재비판하였다. 1901년 28세, 10월 최익현의 명을 받고 기우만을 방문한 습재(習斎) 최재학崔在 学)을 만나 노성(魯城) 궐리사 강회에 참석했다. 1904년, 31세 때부터 다음해까지 고산서실(高山書室)에서 지내면서 단을 만들어 놓고 대명(大明)과 선고를 위하여 6 년을 삭망으로 분향하며 시묘하였다. 이 무렵 「후대명문(後大明文)」, 「심학도설(心学 図説)」, 「삼현앙모기(三賢仰慕記)」를 지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접하고 국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을 개탄하고서 최익현을 찾아 갔다. 당시 최익현은 토적소(討賊疏)를 올리며 의병봉기를 준비하였다. 최익현이 영 남의 민심 동향과 지사들을 규합하라고 하명하자 정시해는 영남의 지사들에게 최익 현의 뜻을 전하고 격문을 배포하여 의병창의를 호소하고 돌아왔다. 영호남의 의병이 동시에 봉기할 것을 통고하기 위해 재차 영남으로 떠났다가 19일만에 임무를 마치 고 돌아왔다. 이듬해 대명단(大明壇)에 고하고 4월 11일 태인으로 최익현을 찾아가 무성서원(茂城書院) 강회에 참석하고 또 바로 담양 용추사(龍湫寺)의 집회에서 최익 현을 모시고 참석하여 기우만을 만났다. 13일 최익현은 무성서원에서 창의하여 일본 을 성토하자, 지사와 포수(砲手)가 대거 참여하고 또 날로 늘어나 지방 관아의 무기
접수하고 군량을 확보해 의병대의 병력은 800여 명에 이르렀다. 4월 5일 최익현 의병대의 소모장(召募将) 겸 중군장(中軍将)으로 태인을 출발하여 정읍을 거처 순창 으로 향하여, 4월 6일에는 순창 구암사(亀巌寺)에 진을 치고, 이튿날 순창성 밖에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전열을 정비한 다음, 4월 8일에는 곡성으로 옮겼다. 4월 19일 순창으로 회군해 진을 치다가, 4월 20일 일본군과 합세한 전주와 남원의 진위 대(鎮衛隊)에게 포위당하자, 정시해는 최익현을 보호하다가 왜경의 총탄을 맞았다. 정시해는 절명하면서 최익현에게 “시해(時海)가 왜적 한 놈도 죽이지 못하고 죽게 되니 분해서 눈을 감지 못하겠나이다. 마땅히 사나운 여귀(厲鬼)가 되어 선생을 도 와 적을 섬멸하겠습니다”라며 숨을 거두었다. 최익현은 그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 하니, 군중도 모두 비분하며 통곡하였다. 최익현은 그의 관 위에 ‘대한의사정시해지 구(大韓義士鄭時海之柩)’라 썼다. 정시해는 짧은 생애에도 학문에 전념하여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고, 경전을 통해 충효사상을 배양하여 실천을 중시했으며 망국에 즈음하여 민족혼이 투철한 살신성인 의 거룩하고 의로운 선비였다. 저서로 일광집(一狂集) 4권 1책이 있다. 1945년 광 복 후, 1963년 대통령표창, 그리고 무장에 오장환, 유경구, 김재화 등과 함께 ‘사의사 비(四義士碑)’가 건립되고 1977년 정부에서 건국포장(建国襃章)을 추서했고, 1990년 에는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鄭休碩) : 1893년(고종 30년)∼?
정휴석은 1893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윤집(尹集), 호는 오천(鰲 川)이다. 정시해(鄭時海)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삼태마을 동쪽의 고산(孤山) 중턱에 서 시묘를 하자, 6세 때부터 식량과 반찬을 나르면서도 한번도 빠지지 않고 6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아버지 정시해가 스승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따라 창의(倡義)하여 항일운동 (抗日運動)을 전개하자, 어머니를 지성(至誠)으로 섬겼다. 어머니가 갑자기 병환을 얻자 5년 동안 주야로 시측(侍側)하고 거상(居喪)에 정(情)과 문(文)으로 다하고 종 신토록 유모(孺慕)하니, 사우들이 세효(世孝)라 하였다.
(4) 정휴선(鄭休璿) : 1906년∼? 정휴선은 1906년 삼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자는 현경(賢卿), 호는 송은(松
)이다. 충장공(忠荘公)의 정황(鄭璜)의 후예이자, 유릉참봉(裕陵参奉)을 역임한 정 영원(鄭栄源)의 아들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万)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특 히 문(文)에 능하였으나 행의도 남달랐다. 형제 11인 중에서 둘째로 형 정휴탁(鄭休 鐸)이 출사로 인해 오래 동안 집에 있지 않아, 이가(理家)에 힘썼다. 부모를 섬김에 지체(志体)의 봉양을 다하였다. 모환(母患)에 도천열지(祷天裂指)하고 거상(居喪)에 조석으로 묘(墓)에 나아가 곡하였다. 분가할 적에 옥토를 형과 아우에게 사양하였다. 치가(治家)에 여력이 있어 궁한 사람을 돕는 데 주급(周急)하였으며 교자(教子)에는 의방(義方)으로 훈도하였다. 학문과 행의가 훌륭하여 사우(師友)들이 추중(推重)하 고, 향도천(郷道薦)이 있어 사림이 효행비를 건립했다.
(5)
(晉州鄭氏)
정봉묵(鄭鋒黙)의 딸이다. 무송유씨(茂松庾氏) 유동훈(庾東焄)의 처이다. 남편이 갑자기 기질(奇疾)로 앓자, 의약(医薬)을 백방으로 구하고 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불 행하게도 상을 당하자 곡벽(哭擗)하며 따라 죽으려 하다가 갑자기 마음에 깨달음이 있어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기며 자제를 잘 보살피고 길쌈에 힘써 근검치가(勤 倹治家)하니 향인의 칭송이 자자하여 천장(薦章)이 있다.
5.
종교시설
1) 정휴탁(鄭休鐸)의 고택 및 노포당(老圃堂) 정휴탁의 고택은 성송면 하고리 삼태마을 453-1에 소재하고 있다. 정휴탁은 관직에서 물러나 치가(治家)하여 부(富)를 이루었고, 정영원은 대대로 내려오는 선조의 집을 중건 하였으니 현 고택이 그 자리이다. 정영원은 만석꾼으로 불릴 만큼 큰 부자였다 한다. 고 택은 왕버들나무숲이 삼태천을 따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삼태천 오른쪽에 있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주추는 자연석을 이용한 범벙주추 이고, 기둥은 두리기둥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안채의 왼쪽에 있는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기본양식은 안채와 비슷하다. 전선원무장읍지(全 鮮元茂長邑誌)에 의하면, 노포당은 조부 정면규(鄭冕奎)의 아호를 딴 것으로 고택
정문 위에 편액(編額)한 것이라고 하였다. 본래 ‘노포(老圃)’ 두 글자는 논어 에서 따온 것이다. 논어 「자로(子路)」편에 공자의 제자 번지(樊遅)가 스승에게 ‘채 마밭’ 가꾸는 것을 묻자, 공자는 “오불여노포(吾不如老圃 : 나는 경험이 많은 노련한 농사일 하는 사람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정면규는 이 논어 구절에서 ‘노포’ 두 글자를 당호로 삼았으니, 출사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채마밭을 가꾼다는 겸손의 뜻 을 표현한 것이다. 편액의 서체는 행서인데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낙관에 ‘남(南)’ 글자만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 정면규가 자신의 또다른 호 무남(茂南)에서 ‘남’ 글자만을 낙관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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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휴탁의 고택 편액
<사진 9> 정휴탁의 노포당 전경
2)
(麗松齋) 성송면 하고리 고현마을 탑동(搭洞)에 있는 무송유씨(茂松庾氏) 중시조
인 안정공(安貞公) 녹숭(祿崇)의 재실이다. 탑동이란 옛 갈산사(葛山寺)에 탑이 있 었기에 부르는 말이고, 현재 이곳에는 기와 파편이 발견되곤 한다. 1972년에 중건하 여 ‘여송재’라 편액하니, 여송은 고려(高麗)의 ‘여(麗)’와 무송군(茂松君)의 ‘송(松)’ 글자를 따서 이름한 것이다. 고려 예종 때 태자소보(太子少保) 참지정사(参知政事) 를 지내고 무송에 봉해져 이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그의 많은 자손들은 이 곳에 대 대로 살며 집성촌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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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송재 전경
<사진 11> 여송재 전경2
여송재 글씨는 고창 출신 명필 보정(普亭) 김정회(金正会, 1903~1970년)가 썼고, 문 앞에는 고려은청광록대부무송군유공신도비(高麗銀青光禄大夫茂松君庾公神道碑)가
. 신도비는 이범석(李範錫)이 찬하고 김황진(金璜鎮)이 글을 썼다. 여송재 주춧 돌은 석탑의 재료였다고 한다. 6칸 겹집에 5칸 문루가 소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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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송재 편액
<사진 13> 여송재 주춧돌
<사진 14> 여송재 비석
3)
(鄭休璿孝行碑)
이 비석은 송은정공휘휴선효행비(松隠鄭公諱休璿孝行碑)로, 성송면 하고리 472-1 삼태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정휴선은 1906년 삼태에서 태어나 부모를 섬김에 지체(志 体)의 봉양을 다하였다.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하자 하늘에 기도하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모친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거상(居喪)에는 조석으로 묘(墓)에 나아가 곡하였다. 향도(郷道)의 천(薦)이 있어 사림(士林)이 효행비를 건립했다. 비는 호패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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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5> 정휴선 효행비
(鄭榮源施恩碑) 비석은 황년시혜비(荒年施恵碑)라고도 하는데, 성송면 하고리 472-1 삼태마을
에 소재하고 있다. 정영원은 진주정씨로 가학을 계승하여 후학을 양성하며 빈농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주민들이 그의 덕을 추모하여 이 비석을 세웠는데, 본래 단독 으로 세워져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삼태마을로 들어가는 입 구, 삼태교 앞에 있는 3기의 비석 가운데 하나이다. 비는 호패형으로, 전면에는 ‘전 참봉정공영원유년시은비(前参奉鄭公栄源流年施恩碑)’라는 비명이 있다. 건립연대는 ‘을축년(乙丑年)’이라 새겨져 있는 바, 이를 환산하면 1865년이다. 비 의 크기는 155×40×17cm이다. 5) 정시해충효비(鄭時海忠孝碑) 이 비석은 성송면 하고리 486-3 삼태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바, 대산으로 가는 23 번 국도 남동측에 위치하고 있다. 정시해(鄭時海)는 정태항(鄭泰恒)의 6대손으로 가 학을 계승하여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국난에 절의를 다 바치는 충성이 극진하였다.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부친에게 수혈하여 3년간을 연명케 하였 다. 양친 부모상에 6년간의 시묘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뺏기 위해
1905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이에 통분하여 스승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함
께 의거하여 의병중군장으로 활동하다가 순창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정시해 는 충(忠)과 효(孝)를 몸소 실천하며 살아갔다. 정시해는 “충신은 효도하는 집안에서 난다”는 진리를 심어 주었다. 때문에 현대인은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다”라는 격언에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비석은 옥개형(屋蓋形)의 비수(碑首)를 가지고 있으며 비신(碑身)은 흑요석재이다. 비석 전면에는 ‘의사정시해공충효비(義士鄭時海公忠孝碑)’라는 비명(碑銘)이 있다. 건립연대는 ‘계묘사월십일(癸卯四月十日)’이라 새겨져 있는 바, 이를 환산하면 1963 년 4월 10일이다. 비석의 크기는 240×57×28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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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6> 정시해 충효비
(鄭泰煥施惠紀念碑)
이 비석은 시혜기념비(施恵紀念碑)라고도 하는데, 성송면 하고리 472-1 삼태마을 에 소재하고 있다. 정태환은 선대의 정신을 이어, 고창고보(高敞高普) 설립에 거금을 희사하는가 하면,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많은 기민을 구휼하였다. 향인들이 그의 덕 을 추모하기 위해 진휼비를 세웠다. 당초에는 판정리(板井里) 국도변에 세웠다가 1970년 삼태마을 앞으로 옮겨 보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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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7> 정태환시혜기념비
(侍墓塚) 삼태마을 앞 산에 있는 묘소로서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어 행인들이 발길
을 멈추고 눈여겨보는 곳이다. 본 시묘총은 삼태마을에 거주하는 진주정씨(晉州鄭 氏) 가문의 대대로 이어온 시묘가풍의 표본으로 고창읍 교촌리에 거주하는 정상열 씨의 8대 조모 진주강씨의 묘소이다. 삼태마을의 진주정씨 가문은 대대로 시묘의 가 풍이 있었다. 현재 정상열 씨의 8대 조부 정태항(鄭泰恒) 씨도 부친상에 3년 동안 신혼(晨昏)으로 곡묘(哭墓)하였다. 진주강씨는 남편이 3년 시묘를 하는 동안 충실한 내조를 한 분이다. 정태항의 처 진주강씨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큰 아들은 갑 신(甲臣), 둘째 아들은 용관(龍観), 셋째 아들은 양신(暘臣), 넷째 아들은 경신(景 臣)이라고 불렀다. 진주강씨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네 분의 아들 가운데 세 아들 이 시묘를 하였다. 시묘한 아들은 큰 아들 갑신, 셋째 아들 창신, 넷째 아들 경신이 다. 둘째 아들 용관은 시묘하고자 하였으나, 형제가 모두 시묘하였을 경우 가사를 돌 보는 데 매우 어려움이 뒤따르기에, 둘째 아들 용관은 그 책임을 모두 도맡았다. 이 러한 연유로 형과 두 동생은 가사를 걱정하지 않고 시묘하였으니, 뒷날 3형제의 이 름이 거론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장자 갑신은 부모 병에 4년 동안 의약(医薬)에 정성을 다하고 메추리와 자라를 비 시지절(非時之節)에 얻어 봉양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세 분의 시묘하는 정성이 어찌 나 지극하였는지 범이 와서 보호하기도 하고 또 매월 삭망일 아침이면 수꿩 한 마리 가 묘 앞에 와서 죽어 있었는데, 생활이 어려운 처지인지라 그 꿩고기로 삭망일 제
음식을 만들어 올렸다 한다. 3년 동안 모은 꿩목털로 큰 방석을 만들어 가보(家 宝)로 전해 내려오던 중 갑오동학란에 불타버렸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나이 많으신 마을 어른들은 방석의 실물(実物)을 보았다 한다. 시묘총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고 그 지방 그 시대상을 나타내는 표본이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충과 효의 도량이 될 수 있도록 가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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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8> 시묘총
안디옥교회
1988년 8월 15일 하고리 삼태 145번지에 삼태교회를 설립, 1994년 삼태 480번지 로 옮겨 가건물을 지어 선교활동을 하다가, 2000년 3월 18일 현 건물을 완공한 다 음 교회명도 안디옥교회로 바꿔 활발한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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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삼태 안디옥교회
9) 전북도기념물 117호로, 성송면 하고리 삼태마을 앞 삼태천 양옆 둑에 줄지어 서 있다. 오래된 나무의 수령은 2~3백년이 됨직하다. 이 숲은 버드나무 뿐 아니라 귀목나무와 은행나무, 소나무, 벚나무 등 12종에 90여 그루의 나무가 숲 을 이루고 있다. 이 나무들은 삼태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과도 같다. 삼태마을은 배의 형국이기에 주민들은 우물을 파지 않고 삼태천을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기르며 잠시 쉬기도 하고, 여름 농사철에는 우거진 나무숲에서 쉬기도 하는 등 마을공동체 의 구심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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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 왕버들나무숲
삼태 논바닥의 느티나무 있는 느티나무와 삼태 논바닥에 있는 느티나무는 무더운 여름날 농부
에게 쉼터가 되고, 평소에는 외로이 서서 마을을 수호하듯 하여 예사롭지 않은 분위 기를 자아낸다. 고현의 느티나무는 성송면 하고리 752번지에 있다. 이 나무는 고현의 초새봉 아래 자락에 자리한 유종관(柳鍾琯) 씨의 집 앞에 있다. 수령이 300년에서 400년으로 추 정되는 나무이다. 이 느티나무는 직경 80~100㎝, 높이 15m 이상이며, 특히 흉고둘 레 1.5m 이상에 이른다. 고유번호 9-14-43는 2001년 6월 22일자에 지정되었다. 이 느티나무 위쪽에 고현 샘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물을 기르며 잠시 쉬기도 하고, 여름 농사철에는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등 마을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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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느티나무
<사진 22> 고현 샘
삼태에서 남창으로 가는 길목 왼쪽 논에 또 하나의 거목 느티나무가 있지 만, 애석하게도 그 나무에 대한 푯말 하나 없다. 이 예사롭지 않은 나무는 수령이 300년 남짓되어 보이는데도 전혀 관리를 하지 않는 듯하다. 현재 이 나무는 벼락을 맞아 큰 가지가 부러져 있어 지나는 객의 마음이 그저 허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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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3> 느티나무
편의시설
1) 안길 약 1.5km를 확포장하고, 1000m의 담장을 개량하였으며, 60동의 지붕을 개량하였다. 또 하수구 100m를 정비하였다. 2) 모정 현 모정은 하고리 삼태 111-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2003년도 현 모정을 신축하 여, 마을 주민들이 모여 앞 삼태천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한편, 농사일에 더위를 피하며 담소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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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4> 모정
: 삼태회관과 경로당 경로당은 2003년 하고리 111-1번지에 30평 규모로 신축하였다. 삼태
회관은 마을 주민들의 회의장 및 사랑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경로당은 노인들이 담소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25> 회관
4) 도로 삼태마을은 국도 23번(지방도 893번) 도로가 일찍이 개통되어 교통이 불편하지 않았다. 현재 삼태와 고현의 농어촌도로도 확포장되었다.
7.
숨은 이야기
1) 마을 야화
의하면, 삼태마을의 형국은 부주(浮舟) 또는 행주(行舟)처럼 생겼다는 것 이다. 아주 옛날 대산천에는 배가 다녔는데, 이 배가 삼태마을까지 들어와 정박하였 다. 정박한 배가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배를 매둘 요량으로 나무들을 심었 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우물이 없는데도 착정(鑿井)하지 않았다. 이 마 을이 바다로 저어나가는 배의 형국인데, 만약 착정하였을 경우 배가 가라앉아 마을 의 운세가 다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물을 파지 않고 흐르는 삼태천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였다 한다.
2)
이야기
삼태마을은 배의 형국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학(鶴)의 형국이라고도 한다. 진주 정씨 정영원(鄭栄源)은 많은 부를 이루고 고택을 중건하고 마을 오른쪽 안산에 태호 정(台湖亭)을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의 사후, 어느 도인이 그의 집을 지나 며 이 집터는 학의 형국에 자리하였고, 학의 날개에 태호정을 세웠으니 학이 날아가 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정씨 일가는 노포당 당집도 팔고, 그리고 당집 일 부 건물과 태호정을 보천교(普天教) 신도들에게 주었다. 그 신도들은 당집 일부 건 물과 태호정을 해체, 가져다가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3) 왕버들과 버드나무 이야기 마을 앞의 삼태천 양 둑의 나무들은 예사롭지 않다. 본래 삼태천은 대산천(大山 川)으로 흐르는데, 제방이 무너질 위험이 많았다. 그리하여 조상들은 그 둑이 무너지 지 않도록 삼태천 양 둑에 수령 2~3백년 정도 되는 괴목나무와 은행나무, 왕버들 나무 및 소나무, 벚나무 등을 심은 것이라고 한다. 또는 이러한 나무들이 배의 형국 인 삼태를 보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심었다고 한다. 영혼의 샘터에서는 버드나무의 지혜와 용이 변신한 버드나무를 소개한다. 버드 나무의 지혜가 드러나는 이야기를 옮겨본다.
버드나무와 참나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참나무가 버드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버 드나무야 너는 왜 그렇게 약하니? 약한 바람에도 가지가 휘어지고 쓰러질 것 같으니 그런 몸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니?” 그러자 버드나무가 대답했습니다. “힘 이란 자랑하는 것이 아니야. 뽐내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 조상들은 가
왔단다.” 마침 거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버드나무는 바람따라 이리저리 휘어지면서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나무는 버드나무를 비웃으며 보란 듯이 뻣 뻣하게 몸을 세웠습니다. “버드나무야 나를 보아라!” 그때였습니다. 세찬 바람이 불 어와서 꼿꼿한 참나무를 두 동강 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모진 바람에 도 순종하면서 잘 견디었습니다.
용이 변신한 버드나무 이야기는 수달이 죽은 후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스님이 된 소년이야기로 유명하다. 신라 혜통(恵通) 스님은 당나라 고종의 딸이 용의 형상을 가진 귀신에 혼을 빼앗겼을 때 당나라로 건너가 용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준다. 그 후 혜통스님은 당나라에 남아 있었는데 혜통스님이 쫓아낸 용은 몹시 화가 나서 혜 통의 고향인 신라에 들어와 사람을 해치기 시작한다. 정공이라는 사신에 의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된 혜통스님이 신라에 들어와 용을 쫓아 버리자 화가 난 용은 복수를 결심하고 사신인 정공의 집 앞 버드나무로 환생한다. 이러한 사실도 모른 채 정공은 버드나무를 애지중지한다. 세월이 흘러 신문왕이 죽자 효소왕이 다음 왕이 되어 장 례를 지낸다. 장례행열이 정공의 집 앞에 이를 무렵 버드나무 가지가 “천안삼거리 흥 축 늘어졌구나. 흥--”하며 장례행렬을 막았다. 효소왕이 화가 나서 버드나무를 베려하자 정공이 버드나무를 벨 바에 자신을 죽이라고 한다. 이에 화가 난 효소왕은 정공을 죽이게 된다. 용이 버드나무로 환생하여 복수를 한 것이다. 복수에 성공한 용 은 의기양양하여 백성을 다시 괴롭힌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혜통스님은 용을 쫓아 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용을 찾아가 용의 마음을 진심으로 달래고 불가 에 귀의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에서 버드나무를 복수의 화신이라 한다.
8.
및 소득산업
1)
전답
농가는 30호이고 비농가는 9호이다. 전(田)은 25ha이고, 답(畓)은 45ha이다. 임야 는 18ha이다.
2) 농사이야기 1950년대 삼태마을 주민들은 보릿고개가 되면 식량이 매우 부족하여 청맥죽으로 겨우 연명하였다. 1960년 후반기에 들어 줄모내기 실시하였지만 여전히 농가소득은
. 1970년도에 들어 줄모내기와 통일벼 재배를 통해 수확량이 나아졌지만 농가소득을 더 올리기 위하여 담배나 고추 등의 밭농사를 시작하기도 하였다. 1990 년 기계농업이 실시되어 논밭농사의 수확량이 급격히 높아졌고, 또한 수박재배를 통 해 농가소득을 올렸다. 특히 기계농업은 매우 부족한 농촌의 인력을 대체하여 많은 수확량을 가능하게 한다.
3)
변천과 축산
1960년 이전에는 쌀과 보리, 콩을 재배하였다. 1961년 이후에는 잎담배, 1983년 이후에는 비닐을 이용한 고추재배가 실시되었고, 1990년 이후에 수박재배가 실시되 어 경제력이 매우 성장하였다. 2003년 이후에는 복분자 재배를 통해 농가소득을 올 리고 있다. 축산은 한 농가만이 한우를 사육하고 있다.
9. 1) 총회 및 역대 이장 마을총회는 매년 양력 정월 14일이다. 역대 이장은 정원도(1980∼1982), 유종관 (1983∼1984), 정재원(1985∼1986), 유종관(1986∼1996), 정병환(1997∼2000) 등이다. 현재는 김재창(2000∼)이다. 1980년 이전 역대 이장에 대한 기록은 없기에 명시하지 않았다.
2) 남녀지도자 및 부녀회 새마을 지도자는 정준태이고, 부녀회장은 김순옥이다. 부녀회 회원수는 30명이다.
○ 도움 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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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相烈, 진주정씨, 남, 85세)
• 정재은(鄭載銀, 진주정씨, 남, 78세) • 유종관(柳鍾琯, 고흥유씨, 남, 65세) • 김재창(울산김씨, 남, 56세, 이장)
○ 참고문헌 • 한국지명총람 전북편(상・하), 한글학회, 1981 • 高敞三郷誌 호남문화사 1991 •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 茂長郷校誌 호남문화사, 2004 • 고창군지 고창군, 2008 • 모양성의 얼 고창군, 2009 • 우리나라 나무 이야기 박영하, 이비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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