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인 미당 서정주의 뒷이야기 2010년 9월 6일 14:00 ~ 16:40 서정주 시인의 선대가 여산에 살다가 고창 흥덕으로 이주하였다. 미당의 태생지는 전북 고 창군 부안면 질마재로 12대조인 서연(또는 경춘)이 입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의 8대 명당 중 하나인 고창의 반암으로 입향하여 살았다. 12대조는 흥덕 고을의 훈장으로 옮. 그 후 선대가 생업하기가 좋은 질마재 부근의 좌치나루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서 농사와 어업 및 소금을 판매 하였다. 미당의 아버지이신 서광한은 머리가 똑똑하고 예리한 사람으로 대과를 목표로 공부를 하였 으나 경술합방으로
어려워지자, 무장에서 향시를 봐 장원하였다. 당시 그는 20대에 장원을
하여 고창지역에서 유명해졌다. 이를 계기로 인촌선생과 연계가 되었다. 인촌선생의 집안은 사진포(현 사포)에서 태종초부터 구한말까지 살았다. 사진포는 당시 무역항으로 일본인들이 호남의 곡창지대를 욕심내어 사진포를 활용하였다. 일제는 호남지역을 세부적으로 측량하기 위해(1909년) 측량학회를 사진포에 만들었다. 이를 위해 한국의 수재들을 뽑았는데, 미당의 부친인 서광한이
응시하여 1등으로 뽑혔다. 당시
3인을 뽑았는데, 고부인 1명, 고창인인 서광한과 담양이씨인 이근채씨였다. 이를 계기로 서 광한씨는 세부측량사로 임명이 되어 무장현을 측량하였으며, 이근채씨는 흥덕을 측량하였 다. 당시 군수는 사이토총독과 친지로 막역했던 인물이었으며, 군수의 월급은 150원이었다. 서광한씨가 총명하였기 때문에 인촌가는 그를 농장의 마름일을 맡기면서 군수보도 월급이 더 많은 200원을 받았다. 김묘엽(인촌의 할아버지)씨의 큰 아들인 김기중(인촌의 백부)씨가 농장주였으며, 인촌은 그에게 양자로 갔다. 인촌의 생부는 김경중씨다. 인촌가가 거부가 된 이유는 흥덕에서 줄포를 가는 곳에 경복궁답이 있었다고 한다. 경복궁 답은 국고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명성황후가 정치자금으로 쓰려고 그녀의 사고로 갔다. 그런 데 명성황후가 시해가 되고 난 뒤 경복궁답에서 소출한 벼를 가지고 가지 않자 경복궁답의 마름인 진치삼의 종조 되는 분이 갑작스럽게 3만석 걸이의 대부자가 되었다. 이를 안 진치 삼이 종조에게 땅을 달라고 하여 1만석 걸이를 주었다. 지금 그들의 후손이 신림에 살고 있 다. 나머지 2만석걸이는 문중사람들이 가져갔다. 진씨 집안에 내분이 일어나자 김기중, 김경 중 형제가 이들의 땅을 싸게 사들여 인촌가는 3만석의 거부가 된 것이다. 고창과 고부일대 의 땅들을 사들인 후 인촌가는 삼양사 본사를 고창에서 줄포로 옮기게 된 것이다. 인촌가가 이렇게 땅을 사들이게 된 것은 인촌의 조부인 김묘엽씨의 처가가 남평군수의 외동 딸이었다. 남평군수 댁에서 매일 저녁 볏가마를 김묘엽씨 댁으로 보냈다. 군수댁의 쌀이 자 금이 되어 진씨 집안의 경복궁답을 싸게 사들여 거부가 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인촌가에 도깨비가 돈을 벌게 했다는 내용의 전설이 내려오게 된 동기다. 미당의 아버지는 인촌가에 서 마름생활을 했다. 당시 큰댁인 원파농장의 경영인이었던 것이다. 미당의 시 “애비는 종 이었다”라는 시도 자신의 아버지가 돈의 노예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미당이 당시 부를 비 아냥거린 것이다. 미당의 문둥이 이야기는 여자 때문에 쓰여 진 시이다. 미당의 아버지는 고창에서 부자가 되
었다. 그래서 미당을 고창고보에 가르치기 위해 돈을 썼다. 당시 e미당은 4년제인 줄포초등 학교을 마치고, 인촌을 따라 만12세 때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1929년)했다. 중앙고보 2학 년 때 월등하게 우수하였다. 1931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가 그도 가담하여 종로경찰서에 수감이 되었으나,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나왔다. 미당의 부친은 그를 고창읍 대양동(노동입구)에 데리고 왔다. 그 서광한씨는 미당을 위해 월곡리 하월마을 대밭 (유씨집)에 초당을 짓고, 넓은 집을 사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 머물 렀다. 그의 대부분의 생활과 활동을 한 곳이 바로 고창읍이었다. 미당은 아버지의 노력으로 고창고보에 편입하였다. 그때 국어교사였던 홍순복씨를 만났다. 홍순복씨는 당시 이화여전의 학장이었던 이헌구씨와 보성중 동창이었다. 홍순복씨가 고창에 온 것은 홍종철씨가 고창고보로 그를 초빙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홍순복씨는 미당이 시를 잘 지었기 때문에 그를 이헌구씨(당시 심사위원)에게 소개를 하였고, 1935년 미당은 신춘문 예에 “벽”으로 등단하게 된 것이다. 미당이 등단한 1936년은 낭만주의와 사회주의가 들어 오는 시기로 정신적 사상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미당은 정신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낭만주 의 영향으로 시대의 이단자가 되어 마포구 도화동(홍등가)에서 넝마주의로 들어갔다. 인생 의 체험기에 방황하기도 하였지만 친구인 미사가 있어 미당을 늘 도와주었다고 한다. 미사 는 전라도 사람으로 미당과 함께 넝마주의 생활을 했으며, 미당을 사회적으로 소개를 하였 다. 개암사 개암동에 박헌영스님은 이런 미당을 불러 공부를 시키고자 하여 그를 신석정씨 와 함께 불교전문학교에 보냈다. 신석정씨는 미당을 무시하였고, 미당이 신석정씨에 대들기 도 하였다고 한다. 벽으로 등단한 후 그는 박헌영씨의 양해 하에 불교전문학교를 휴학하였다. 그는 늘 자신은 방정이 없어서 모두 중퇴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 미당은 청계천 밑에서 진짜로 넝마주의에 들어갔다. 이 당시 미사는 정읍출신의 나영 근씨 집안의 아가씨로 서울에서 소학교 교사로 있는 여성을 미치도록 짝사랑하여 편지를 자 주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미당을 상대로 해주지 않았으며, 이것이 동기가 되어 미당은 “문둥이”이라는 작품을 쓰게 된 것이다. 미사는 가야금 꾼으로 미당을 음성적으로 도와주는 친구였다. 미당은 오장환, 김동리와 함께 “시인부락”을 만들었는데, 이기화씨가 부락이라는 말에 대해 말하자 미당은 “너나 잘해 임마!”라고 하였다고 한다. 미당이 고창 월곡에 있을 때, 고창 무장사람인 김방수씨가 그를 찾아 왔다. 그는 미당을 쫒 은 의혈청년으로 경방단(소방단) 회원으로 미당의 집으로 모여서 매일 파티를 열었다고 한 다. 이기화씨는 1944년 형님인 이기정씨를 따라 처음으로 이들과 미당을 만났다고 한다. 미 당은 고창경찰서의 권고로 고창고보를 자퇴하였다. 고창고보가 당시 주목받고 있는 학교였 기 때문에 미당같은 인물이 있으면 위험했기 때문이란다. 고창경찰서에는 이하라(井原)라는 경찰이 있었는데, 미당을 너무 좋아한 문학청년이었다. 그는 경찰서에서 미당을 만나고 그 후 전북도경으로 발령을 받아 떠났다. 광주학생운동 2차독서회 사건과 고창에서의 연극공연 에 미당이 관련되자 이하라는 미당을 측은하게 생각하여 대구의 고등사상범을 수용하는 형 무소와 교섭하여 6개월 만에 그를 빼온다. 고창에는 의협심이 많은 김방수, 박영기, 김판순, 박영순, 김용환 등이 민족사상 고취를 위
한 연극을 하고자 미당에게 사나리오를 부탁하자 그가 시나리오를 써 주었으며, 그들은 고 창을 순회하면서 공연을 하다가 성송 공연에서 경찰의 급습으로 모두 붙잡히게 되어 군산형 무소에서 해방이 될 때 까지 수감이 되었다. 미당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하라의 도 움으로 6개월 만에 출소하였다. 당시 연극은 농촌계몽적 성격과 김순한이라는 당시 한국 최초의 연극배우로 “육혈포의 청 년” 주동자이자 주인공을 들 수 있다. 그는 공연에서 일본인을 상대로 권총을 쏘는 역을 하 여 고창으로 쫓겨 온 것이다. 그는 이기화씨 댁에서 방 하나를 얻어 15년을 살았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경성방송 극작가인 이서구씨가 “신극사이야기”에 나온다. 미당이 26세 때 서울로 가려고 아버지가 준 여비를 받았다. 미당은 워낙 술을 좋아해 선운 사 입구의 주막집에서 40대 초반의 주모에 반해 두견주를 이틀 동안 한 동을 먹었다고 한 다. 주모는 전라도 육자배기를 잘 불렀다고 한다. 그곳에서 미당은 여비를 축내었다고 한다. 1964년 미당을 초빙하여 고창에서 문학강의를 모양성에서 하였는데, 강의 후 신상호 고창 군수 지프차를 타고 선운사의 주모집을 갔으나 철거되고 없었다고 한다. 미당의 주소는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578번지 1940년 서광한씨는 미당에게 공무원이라도 하게 시험을 보라고 해서 고창군청 내무과 서무 계에 합격을 했다. 당시 초봉이 30원을 받았다. 그러나 군수와 싸움을 하고 사직서를 냈다. 이유는 군청 앞에 늘 사람들이 장을 서 기다리고 있어, 그 이유를 물은 즉 미당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양복과 이상한 안경(한쪽은 파 란색, 다른 한 쪽은 빨갛고 반쪽은 노란 그런 안경이었음)을 쓰고, 벚나무로 만든 지팡이, 뒤로는 명주 수건이 3m나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는 것을 군수가 알게 되어 나무랐다. 미당 이 군수에게 사회흐름을 모른다는 둥 대들어 반년이나 다니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미당이 이하라의 도움으로 총독부의 촉탁기자가 되어(30대 후반) 일본군의 무용담이나 활동 및 시설을 취재하는 활동을 할 때였다. 미당은 전주의 중앙여중에 근무하는 친일파 지인이 있었는데, 김제 황산의 일본군 시설을 취재하러 국방색의 세단차를 몰고 왔다가 학교 정문 까지 가서 그를 기다렸다.
선배 앞에 뻐기고 경망스럽게 행동하여 그 선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남겼다고 한다. 그 후 그 선배가 일기를 책으로 나왔는데, 미당에 대한 기록을 남겼 다고 한다. 그 책은 현재 문화원의 서고에 있다고 한다. 미당의 시비를 고창의 선운사에 세울 때이다. 시비에는 미당의 “선운사 동구”로 하기로 하 였다. 귀촉도는 서울의 시비에 쓰기로 하고, 이곳에 맞는 선운사 동구는 미당의 친필이라 한다. 미당의 집에는 늘 목탁소리가 들린다. 그 이유는 미당의 건강을 생각하는 방여사님의 생각 과 행동에서 나왔다고 한다. 미당은 술을 좋아하는데, 손님이 오면 술을 한 잔 하고자 하면 목탁을 친다고 한다. 10여분 목탁을 치면 방여사가 술상을 봐온다. 술상은 백주 한 병과 개 다리 소반에 배추 끄렁이, 콩을 볶아 내는 정도였다. 술을 더 먹고 싶으면 미당은 또 목탁 을 두드린다. 그러면 방여사는 그때 또 한 병의 맥주를 을 인생이 아닌가? 라며 말씀하시곤 하였다.
내놓는다. 미당은 어차피 비려 먹
원래 미당은 유가의 후생이다. 그런데 홍순복씨가 그에게 거사를 붙여주었다. 거사와 처사 의 차이점이라면 처사는 유가의 우주관과 사상을 내면으로 체득한 분이고, 거사는 불교의 사상과 인생관에 따라 체득한 것이라 한다. 미당이 불교의 사상을 간직해서 거사라 하였다. 미당이 처사와 거사의 한계를 구별해 주었다. 미당의 작품세계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을 바탕으로 순천정신 즉 하늘에 순종하며 복종 하는 정신세계를 담고 있다. 또한 노장사상의 색즉시공의 선과 후, 연기관계의 불교적 힘을 믿는 풍토에서 시를 썼다고 한다. 친일문필가로 미당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미당을 가장 친일적 인물로 만든 것은 전두 환을 긍정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인 박경순은 전두환대통령후보의 홍보분과위 원장이었다. 한편 그는 호남의 인물 중 한 명을 천거하였는데, 그가 바로 미당이었다. 박경 순은 미당의 제자로 미당은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의 체면을 살리고자 후보찬조연설을 하 게 되었고, 그것이 함정이 된 것이다. 미당의 제자들은 극구 말렸으나 미당이 들어주지 않 았다. 결국 제자의 얼굴을 사려주고자 하였으나 광주에서 난리를 일으키게 된 원인이 되었 으며, 친일로 연계하여 몰아 붙였다 한다. 이추림이라는 서라벌예술대한 교수가 있다, 미당의 진짜 제자라면 바로 이추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고창 심원 하전출생으로 미당이 문예진흥원장으로 취임할 때 이기화씨와 함께 인수위원회를 맡았다. 이기화원장은 3일간 그곳에서 인수작업을 하다가 전두환대통령이 갑 자기 미당을 세계시인협회 고문으로 모심으로써 그만두게 된 것이다. 전대통령은 미당을 세 계시인협회장으로 세워 세계를 일주하면서 한국출신의 문인들을 모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자 하였다. 미당은 이추림에게 문학정신을 출판하게 하고 그는 세계의 산을 머리 속에 담아 산시를 썼다. 세계의 산 문학을 정립하고자 하였으며, 말년에는 코카사스지방에서 살고자 하였다. 미당은 한국전쟁 후 전주 수복 후 전주북중에서 국어강사를 하였다. 조선대의 박철웅씨가 그를 모셔다가 국문과 강사를 모셔다가 그곳에서 10년을 강사생활하였다. 이후 전두환 사건 으로 광주에서 활동을 접어야 했다. 당시 미당은 늘 배고픔에 허덕여 이기화 원장이 한 달 에 한번씩 쌀을 가져다주었다. 광주를 떠나 미당은 서대문구 공덕동에서 살면서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있으면서는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 미당이 정읍 원불교에서 여동생의 아들(생질) 주례를 서기 전날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다음 날 주례 설 때 비틀거렸다. 그리고 마이크를 치우고 신랑에게 “너 그거 할 줄 알아?” 신부 에게도 같은 말로 물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가 고개를 들지 못했으며, 결혼식장에 온 하 객들도 성능 좋은 마이크 덕분에 다 들어 난리가 났다고 한다. 1975년 선운사에 미당의 시비를 세우려 할 때, 당시 권승규군수가 이기화원장 곁에 와서 “미당이 살았데요? 죽었데요?”라고 묻자 이원장이 “바로 제 옆에 있는 분이 미당선생입니 다”라고 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김병하 기자가 “저 무식한 놈이 군수라니”하여 분위기 험악
해졌다. 또한 문인들도 군수를 혼내주려고 하였다. 선운사 동백여관에 원광대 국문과 여학생들이 미당시비 제막식에 참여하였다. 이기화원장이 학생들에게 “미당을 봐봤냐?”묻자 “아니요. 그래서 미당선생님을 뵙고자 왔습니다”라 하였 다. 여학생들을 미당선생 앞으로 데려가 인사를 드렸더니, 학생들이 “미남이 할아버지가 되 셨네”하자, 미당이 “미당 서정주가 나 같으면 시를 쓰겠다. 아주 멋쟁이셨지”하며 웃으며, “미당이 나같이 생기면 시가 나오겠냐”며 웃고 말았다. 선운사 주모의 행적에 대한 추후 논의 필요(한국전쟁시 주모가 빨치산을 도와 죽었다는 기 록과 주모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증언) 전두환대통령에 대한 추모연설이 친일로 연계한 동기가 된 것에 대한 부분. 하월의 미당 집과 초당의 복원과 고증이 필요. 선운사 주막터의 고증과 미당 이야기 안내판 설치 필요. 김방수, 박영기, 김판순, 박영순, 김용환 이들에 대한 독립유공자 지정 월간 문학21, 1999. 5, pp. 318~323, 서울 월간 문학21, 1999. 6, pp. 308~316, 서울 월간 문학21, 1999. 5, pp. 254~262,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