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여학교를 세운 일우 김승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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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여학교를 세운 일우 김승옥 2010년 10월 1일 10:00-11:40 천장욱군수는 1913년 무장군수로 부임을 한 1년 뒤 3군이 통합되어 고창군수가 되었다. 천 군수는 마스도미를 만나 고창군민들이 열망을 하는 고창고보를 고창으로 옮기라고 종용을 하였다. 즉 기득권이 있는 오산고보를 폐교하지 말고 고창군민에게 무상으로 달라는 안을 제시하여 마스도미씨가 그렇게 한 것이다. 마스도미씨가 미안하니까 200명의 오산고보 학 생들의 장학금으로 내 놓은 것이다. 천군수는 고창군수를 마치고 자기 고향인 충남 논산 은 진으로 갔다. 김상호군수가 고창군수로 부임하여 이휴열 등 부자들을 30여 분을 만나 오산고보를 인수하 자고 제안을 하였다. 부자들이 1인당 1만원씩만 모아도 충분히 고창고보를 설립할 수 있다 고 했다. 부자들과 이러한 교섭을 김상호군수가 하였다. 김상호군수가 고창고보 인수인계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김군수가 고창부자들을 설득하여 고창고보 설립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 다. 재단기금이 30만원이고, 신축비용이 5만원이었다. 마스도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돈 을 내 놓은 것이다. 김군수가 부자들을 설득하여 돈을 내자 마스도미가 장학금으로 13만 5 천원을 내놓았다. 신축비의 5만원은 외부에서 들여왔다. 1925년 김상호군수가 김제로 영전 을 가게 되었다. 그러니 그동안 돈을 내놓겠다던 부자들이 돈을 내지 않았다. 김상호가 들 녘군수로 가자 은규선과 김승옥이 찾아가 끝을 내라고 설득하였다. 당시 군수월급이 100원 이면 고창에서는 150원을 줄터이니 일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김상호군수가 고창고 보 전무이사로 오게 된 것이다. 김상호군수가 사퇴를 하고 고창고보설립추진위원회 전무이 사로 오게 된 것이다. 김수학씨(교토대)와 은규선씨는 내외종간이라 그를 통해 동경유학파가 고창에 지원을 한 것 이다. 유학파를 통해 당시 국제정세를 알게 된 것이다. 은규선의 처남이 김영환이 있다. 그는 무장의 3.1만세운동을 주동한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열사가 있는데 그가 영환의 형인 김영휘다. 영휘씨는 1882년생으로 은규선의 1년 손위처남이다. 김영휘는 한강에서 자결을 한 사람이다. 김영휘의 독립운동에 대한 부분은 잘 모른다. 그는 독립운동결사체에 가담하여 활동을 하였다. 1938년 한강인도교로 쫓겨 서 울시내와 영등포 양쪽에서 모니 인도교 철교에서 협공을 당하니 체포의 위협을 느꼈다. 그 의 몸에는 비밀문서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비밀문서를 지키려고 한강에 투신자 살한 것이다. 김영환씨 가족사에 넣어야 한다.

비밀결사의 탄로를 막기 위해 자결을 한 것

이다. 1941년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조선사람들을 강제징병과 노무동원령을 내렸다. 그 때 은규선은 노무동원령의 나이였다. 그래서 그가 숨은 곳이 정읍 장명리였다. 정읍에 은신 처를 마련하고 숨어 지내다가 42년 12월 21일 마당에서 졸도하여 사망을 하였다. 1916년 3인방 혈맹혈서동맹 후 은규선과 김승옥, 오진탁 등이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6년 상해임시정부가 생기기전 위 세사람은 상해로 건너갔다. 망명형식으로 떠난 것이다. 상해에 서 독립운동가와 접선을 하였다. 이를 눈치를 챈 일경들에 의해 들통이 나서 할 수 없이 국 내로 들어오게 된다. 오진탁은 장사꾼으로 가장해서 김제 월천으로 들어왔다. 은규선과 김


승옥은 별수 없이 슬그머니 고창으로 환국하여 청년운동을 하였다(1919년). 한 2년간 청년 들을 규합하여 양명학교에 넣어 고창청년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김승옥은 1879년생으로 호가 일우이며, 김해김씨앋. 그는 고창읍 읍내리 481번지에서 태어 났다. 김승옥씨의 증조부가 호조참판을 지낸 김준희 장손이다. 1907년(18세) 그때 한문수학 하여 강직하고 고절한 성품을 기른다. 김승옥, 은규선, 신기업 등 셋이서 혈서결맹을 한다. 1916년 김승옥, 오진탁, 은규선은 상해로 갔다 돌아왔다. 오진탁은 오상진의 장형이다. 1918년 4월 18일 김승옥과 은규선은 고창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청년조직을 만든다. 이들에 게 영향을 준 것은 여준이라는 분이다. 여준은 만주의 군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사 람이다. 이중열이 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면, 여준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 다. 이들이 이렇게 활동하고 있으니 잠자지 말고 깨워라. 김승옥씨는 고창면사무소로 위장 취업을 하였다. 백관수에게 연락이 왔다. 김승옥씨에게 전 주 천도교 김진옥재무부장을 만나라는 것이었다. 고창지역의 연결고리가 김승옥이 된 것이 다. 김승옥은 은규선에게 나서지 말고 뒷조종을 해라고 하였다. 그때가 김승옥 31세, 김창 균 27세, 오동균 24세였다. 김창균과 오동균 등의 행동대장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 다. 백관수를 통해 동경유학생들 활동을 알게 되었다. 김승옥이 김진옥을 만나 고창 3.1운 동의 계획을 짰다. 1919년 3월19일 날(음 고창장날 3.8일) 고창시장에 맞춰 고창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찍었다. 그런데 면사무소직원이 주재소에 신고를 하자 자 진하여 자수를 해버렸다. 포기하고 이틀 후 21일 내용을 연기하엿다. 모양성 광장에 모며 독립선언을 낭독하였다. 북치와 서북치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열변을 통해 군중 들의 피를 끓게 하여 시가지 행진을 하였다. 시가행진은 모양성을 나와 동산물을 돌아가서 당시 시장의 끝부분의 골목에서 천변도로를 돌아 서부리로 군청을 돌아 고창교와 반룡교를 에워싸 이곳에서 만세 3창을 하였다. 이곳에 고창의 만세운동의 루트이다. 1947년 이봉춘씨의 사진을 입수하여 가지고 있다. 고창고보운동장에서 한 최후의 시위사진 이다. 김승옥은 시위후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면서 끝까지 단독범행이라 하였다. 그러나 고문이 끝 까지 하자 별수 없이 오동균과 김창규를 불어 김승옥은 1년 6개월, 오동균과 김창규는 6개 월의 대구형무소로 가서 만기를 채우고 나왔다. 출옥을 하자 고창사람들이 열렬히 그를 환영해주었다. 그때 조선일보에서 고창지국장을 맡 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신문사일을 하였다. 그래서 더 열심히 활동할 수 있었다. 1918년 과정에서 고창청년회의 초대회장으로 홍종철씨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가 고사를 하 자 은무성씨를 세우고 은규선씨가 조종을 하였다. 은무성씨가 헌병의 밀대이니 포장하기가 좋았다. 1923년 김승옥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은무성씨가 조선일보 고창지국장인 김승옥 이 해야 한다며 김승옥을 내세웠다. 1925년 김승옥은 고창노동회의 회장으로 취임을 하였 다.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승옥과 은규선은 1926년 상경하여 노민사라는 잡 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김승옥이 조선노동회의 부회장까지 한 것이다. 김승옥은 임정의 고창지역 재정연락담당을 맡았다. 1925년 고창노동회, 김승옥은 고창고보의 재원후원회장을 맡았다. 그는 평의원으로 양태승 과 함께 민족사학을 육성하였다. 1927년 제2대 노민사회장을 맡았다. 허헌과 여운홍과 연계가 되었다. 이들과 연계가 되어


어절 수 없이 고창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신문사지국장만 오래도록 하였다. 1933년 중앙일보의 여운형사장의 권유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지국을 운영하였다. 오동균씨는 그 사이에 동아일보지국장을 맡아 운영을 하였다. 오희균씨와는 재종간으로 희 균씨가 형님이다. 그는 보험회사도 하였다. 보험증서가 있다. 보험회사를 하니 문전성시를 이뤘다. 오동균씨의 재산이 불었다. 그는 돈벌이에 관심이 많 았다. 신문사집이라면 당시에 보통사람들이 근접을 못했다. 오동균씨가 숨을 곳이 없어서 원장댁에서 덕석몰이로 숨겨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가 좌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8.15해방이 되자 김승옥씨는 두 신문사 맡아 이름으로 한 몫을 했다. 김생원으로 고창사람 들이 존경을 하였다. 신문대는 추수를 한 봄과 가을에 냈다. 오동균씨의 부인이 인심이 사 나웠다. 1936년 동아일보과 각 신문사들이 폐간되었다. 그래서 오동균씨는 보험회사에 전력 을 다했다. 김승옥씨는 다시 신문이 복간되자 동아일보를 맡게 되었다. 해방 후 이원장이 김승옥씨를 찾아가 동아일보 배달을 시켜달라고 하자 학생이 공부를 해야한다며 거절을 당한 적이 있다 고 한다. 1945년 10월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추진위원회 고창위원장으로 세웠다. 김승옥 은 조선독립촉성회 고창군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고창여학교를 앞장서서 설립추진위원장을 맡고 박교관의 아들인 박동차를 초대 교장으 로 세웠다. 45년 12월 16일 여학교의 설립인가를 허가 밭아 46녀부터 정식으로 수업을 하 였다. 재단법인 고창여학교 설립추진위원장을 하였다. 그리고 이재민(만주, 일본, 중국)구호 후생협회장을 하면서 후생복리에 헌신하였다. 46년 1월 정치에 관여하여 신탁통치문제 고창군위원장을 맡았다. 좌우익의 찬반토론을 진 행하면서 고창의 정치발전에 헌신하였다. 이때는 좌우익이 갈라지기 직전이었다. 48년 고창갑구 선거관리위원장으로 건국에 초석을 다지는데 기여하여 애국지사의 본분을 다하였다. 고창여학교 재단이사장으로 조용히 지냈다. 1962년 5.16혁명 후 74세의 일기로 서거를 하 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를 고창고보 모퉁이에 모셨다. 고창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후에 대전국립현충원으로 갔다.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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