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비리국의 멸망과 백제 모양부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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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의 멸망과 백제 모양부리현(毛良夫里縣)의 출현 시기 고창역사의 기록상 최고의 오래된 명칭은 마한의 모로비리국이다. 모로비리국은 기원전(B․ C) 1세기부터 서기(A․D) 4세기경 한강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마한 의 54개국 중 하나의 정치집단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지역에 54개 소국(小國)의 명칭 이 열거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다고 한다. 마한 의 소국 기원은 백제처럼 북방의 부여족이 정착하여 형성된 부족집단일 수 도 있다. 그렇다면 고창의 모로비리국은 언제 백제에 합병이 되었을까? 이에 대한 실마리는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 3월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신라가 오랫동안 조공을 바치지 않자 아라타 와케(荒田別)와 카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삼고 백제인 구저(久氐) 등을 향도(鄕導)로 삼 아 신라를 공격하여 탁순(卓淳)에 이르렀다. 백제의 왕은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 沙奴跪) 등에게 명하여 정예로운 군사 수천 명을 더 보태어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의 왕이 화친을 청하였으나 장군이 들어주지 않고 드디어 신라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비자발(比自 㶱), 남가라(南加羅), 탁국(啄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등 7국 사 람들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돌려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서는 남만(南蠻)의 침미다례(忱彌 多禮)를 무찔러 백제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말머리를 돌려 탐라를 격파하여 제주도까지 백 제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이에 근초고왕과 왕자 귀수(貴須, 近仇首王)가 군사를 이끌고 가자 전라도의 비리(比利, 전주), 벽중(辟中, 김제), 포미지(布彌支, 미정), 반고(半古, 나주)의 4읍 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근초고왕과 귀수 부자, 아라타와케, 목라근자 등이 의류(주 류성으로 지금의 부안우금산성으로 추정)에서 만남을 가졌다. 얼마 후 왜장 치쿠마노 나가 히코(千熊長彦)와 근초고왕은 먼저 백제 땅이 된 벽지산(辟支山, 김제 성산)올라 맹세를 하 고, 또 고사성(古沙山, 고부 두승산)에 올라가 맹세하였다고 한다. 그때 근초고왕이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만일 풀을 깔고 앉으면, 불에 탈 위험이 있다. 또 나무를 잡고 앉으면, 물에 흘러갈 위험이 있다. 고로 반석 위에서 맹세를 하면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이다. 금후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무궁할 것이다. 항상 서번(西蕃)이라 칭하여, 춘추에 조공하리라”라고 하였다는 기록이다. 왜의 도움으로 백제가 마한의 남방을 점령한 기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고 일 본서기에만 나온다.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데, 일본서기의 기록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서기는 역사관과 연대기적으로는 많은 오류가 있다. 그러나 기록된 사건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이다. 근초 고왕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백제의 왕으로 등극한 해는 346년이고, 서거 한 날은 375년이다. 위의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 49년은 연대 상 269년이다. 위의 기사를 보더라도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은 분명 4세기 말의 인물로 백제의 전성기를 구가 하던 왕들이다.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두 사서에 있어 공통점은 근초고왕이나 구수는 실존인물이라는 것이며, 다른 점은 연대 기적으로 120년이 일본서기가 빠르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한․중․일의 사가들은 신공황후기 의 시기를 120년 올리는데 동의한다. 신공황후기를 120년 올리면,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사건과 연대는 거의 일치한다. 오히려 백제와 관련된 사건은 일본서기가 삼국사기와는 비교 가 안 되게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창을 비롯한 마한의 전지역을 복속하는데


결정적인 인물들 대부분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이다. 이들은 일본서기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을 분명 백제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목라근자는 왜와 백제를 오가며 국가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허구가 아니라 역사관이 거꾸로 된 것 뿐이다. 백 강전쟁으로 패한 백제는 일본열도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그래서 일 본이라는 국호는 백강전쟁이 끝난 670년 12월에 나오게 된 것이다. 일본 국호는 일본인들 자신의 나라가 '해 뜨는 곳'일 수가 없다.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일본의 서쪽 사람 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일본이란 국호는 왜로 건너간 백제인의 관점이었다. 결론적으로 말 하면, 고창에 존재하였던 마한의 모로비리국이 백제에 점령되어 합병된 것은 근초고왕 때이 다. 당시 근초고왕이나 태자인 구수는 늘 전장을 군사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고창에 있었던 마한 모로비리국은 369년 3월 이전까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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