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전기 교통과 체신遞信·운수1)와 고창 가) 역참(驛站)과 고창 조선시대 육상교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참이다. 이 역참은 전국에 걸친 육운 계 통을 형성하는 도로망인데, 이는 사회경제적인 기능보다는 군사행정적인 기능을 지닌 것이 었다. 조선시대 역참조직의 윤곽이 확실해지는 것은 경국대전이 성립될 무렵의 일이다. 역은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에 대략 30리마다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마필과 역정(役丁)을 두어 공문을 전달하고 공무로 여행하는 자에게 마필의 제공과 숙식을 알선하 였으며 진상관물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이 역로를 이용하는 것은 공용에 한하는 것이 원칙 이었으나 공물에 준하는 사용(私用)에도 이를 허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국의 각 역에는 찰방(察訪)․역승(驛丞)의 관장 아래 역장․역사․역졸 등을 두어 역정의 관리와 공역을 맡게 하였다. 그 중 역장은 역사 중에서 근면하고 신의가 있고 문장을 해득하는 자로서 임명하였다. 각 역의 역마를 사용하는 데는 마패라는 증명이 필요하였는데 이것은 사용자의 관등품위에 따라 각 역에서 제공하는 마필 수에 차이가 있어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수대로 새겨 넣은 동제(銅製)의 원패(圓牌)가 마패이다. 이는 한 면에다 품위 수에 따라 다르게 사용 마필의 수를 새겨놓고 다른 면에는 연호․연월과 상서원(尙瑞院)이란 각자를 새긴 것이다. 이의 발 급은 중앙에서는 병조가 출장관원의 관등품위에 따라 마문(馬文)을 발급하면 상서원에서 그에 따라 마패를 내주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절도사가 발마패를 받아 가지고 있다가 계문(啓 聞) 또는 진상 등 필요할 때 이것으로 발마(發馬)케 하고, 회환문(廻環文)이 있으면 귀로에도 마필 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 표는 경국대전에 보이는 전라도의 역이다. 역 벽사도( 오수도 경양도 제원도
도
碧沙道
청암도 전라우도 삼례도
)
가신, 창활, 덕기, 소천, 단암,
파청, 동도, 가림, 달계, 수신,
양강, 응령, 인물, 단령, 선암,
속 낙계, 인월, 검부, 옥포 신안,
역(屬驛) 진원, 통로, 녹산, 별진, 남리 누수,지신, 양책,낙수, 덕양,익신,섬거 창신, 대부 녹사, 가리, 영보, 경신, 광리, 조림,
청송(청송역은 무장현소속으로 현에서 동쪽으로
25리
거리이다) 반석, 조원, 갈담, 소안, 재곡, 양재,형곡, 거산, 천원, 영원,부흥,내촌
나) 원(院)과 고창 역과 함께 도로교통 기능 가운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원이다. 각 주현에는 관 리의 숙소를 해결해 주는 관이 있어 관리의 편리를 도모해 주었고 전국의 요로에는 원이 있어서 역시 그들의 출장 중 숙박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었다. 조선 세종대에 고려 때부터 설치되어 운용되어 오던 원을 대폭 정비하여 원의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을 뽑아 원주로 삼고 관리하도록 하였다.
1) 고창군지
다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창군내의 원이다. 무장현 : 사신(四信)원 -현에서 북으로 18리 청계(靑溪)원 - 현에서 남으로 25리 요광(要光)원 - 현에서 서로 18리 동(東) 원 - 현에서 동으로 5리 고창현 : 반룡(盤龍)원 - 현에서 서로 2리 인계(仁戒)원 - 현에서 서로 20리 (태천(苔川)원이라고도 한다) 흥덕(興德)현 : 해천(蟹川)원 - 현에서 남으로 10리 구을(仇乙)원 - 현에서 서로 10리 갑향(甲鄕)원 - 현에서 남으로 15리 다) 봉수(烽燧)와 고창 봉수는 횃불(烽)이나 연기로서 중앙이나 변경에 긴급한 사항을 알리는 방법으로 주로 군사 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이것을 법으로 정하여 실시한 것은 1149년(고려 의종 3)의 일이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세종 때 정식으로 봉수제를 마련하였는데 평시 에는 횃불을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국경을 넘어오면 4개, 접전을 하면 5개를 올리되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을 할 수 없을 때는 봉졸들 이 차례로 달려 보고하였다. 봉수의 주요선은 직봉(直烽)이라 하여 동북은 경흥, 동남은 순천의 5개 지점을 기점으로 하고 서울의 목멱산(남산)을 종점으로 했다. 이 밖에도 간봉이라는 보조선이 있는데, 그 가 운데에는 본봉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락하는 장거리의 것도 있고 또 특히 국경방면으로부터 본진 또는 본읍에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도 있다. 고창지역 봉수는 다음과 같다. 무장현 : 고리포-현에서 서로 20리(남쪽은 영광군 흥농산에 응하고, 북쪽은 소응포에 응함 소응(所應)포-현에서 북으로 20리(남쪽은 고리포에 응하고, 북쪽은 부안현의 월고리산에 응 함) 라) 조운(漕運)과 고창 조운이란 조세로 징수한 미곡 포백(布帛) 등을 해상 운송하는 제도를 말하며, 조운 혹은 조전(漕轉)이라고도 하였다. 교통기관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로서는 육운보다는 수운에 주력 하고 세미(歲米)운송은 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있어서 조운이 지 니는 사회경제적인 의의는 매우 큰 것이었다. 국가에서는 조세미의 수송을 위하여 군현의 관할 창고에 조세미를 모으고 선박을 창고에 상비시켜 매년 일정 기간의 기한을 정하여 중 앙의 경창에 수송하였는데 수로 연변에다 설치한 창고 중 해상수송을 맡은 것을 해운창, 강상수송을 맡은 것을 수운창이라 하였다. 즉 조운에는 출발 지점과 기항 지점 및 도착 지 점이 있는데 이 3개의 지점에 맺어진 선이 조운선로이며, 출발지점과 도착 지점에 있는 창 고가 조창 또는 수참(水站)이다. 그리고 각 지방의 해안 또는 하천 요지에 있는 창고를 기
점으로 하여 중앙 경창과 연결된 선이 통상선로 즉 관선이 항해하는 정기수송로이며, 그 밖에는 임시수송로인데 관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벽지에는 민선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조운은 이미 고려 초부터 제도화되었으나 여말에 왜구의 발호로 인하여 거의 폐지되다시피 하였다. 그리하여 세미의 대부분을 육로에 의하여 수송하였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연해지방에 있는 창고의 회복은 용이하지 않았으나 사회의 안정과 더불어 여러 제도도 차차 정비되어 갔다. 여기에 정부는 창고의 보수와 증설을 함으로써 조운은 빠른 시일 내에 정상화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국초에는 서해안의 조창은 예성강구로부터 섬진강구 에 이르는 여러 곳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남해안에는 영조 때에 이르러 조창의 설치를 보게 되 었다. 전라도의 조운과 조창은 덕성창과 법성포창이 중심지였는데, 덕성창에는 함열, 용안, 전주, 임피, 김제, 금구, 익산, 만경, 여산, 금산, 진산, 태인, 옥구, 고산, 용담 지역에서 거둬들 인 세곡을 저장하였고, 법성포창에는 영광, 흥덕, 부안, 함평, 무장, 장성, 정읍, 고부, 고 창, 옥과, 담양, 곡성, 창평, 순창 등지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저장하였다. 덕성포에서 출발한 조운선과 법성포에서 출발한 조운선은 제각기 다른 경로를 거쳐 북상하 나 군산에서부터는 같은 경로를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