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지역의 보통학교 설립과 학생동맹 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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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지역의 보통학교 설립과 학생동맹 휴학 2010년 9월 18일(토) 09:30 – 11:00 이기화 일본교원의 폐첩운동이 고창에서의 학생동맹 휴학이다. 고창지역의 보통학교 설립연대가 가장 빠른 곳은 무장이 아니라 고창읍이다. 고창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보통학교가 사립양명보통학교다. 양명보통학교는 1907년에 영 능참봉을 지낸 은성채씨가 만들었다. 은성채씨는 은규선씨의 아버지다. 두 번째가 무장의 사립 동명보통학교다. 동명보통학교는 무장현 일동면 이동리에 사는 김배 현(광산김씨)씨가 설립하였다. 그는 1909년 대원군의 아들인 이재권이 학부대신을 할 당시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래서 개교를 1910년에 하였다. 1909년 학부대신에게 인가를 받을 정 도로 김배현씨의 인맥이 좋았다. 세 번째는 사립 무창학교다. 무창학교도 1909년에 설립인가를 받아 1901년에 개교를 하였 다. 사립 무창학교는 김상일(金商一)씨로 그는 상하면 검산리 하나대 출신으로 명당처를 찾 아 그곳에 살게 된 것이다. 그의 후손으로 김수학 상공부차관이 있다. 김상일씨는 청도김씨 로 그들의 후예를 교육시키고자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김수학씨는 무장에서 유일하게 일본 에 유학한 인물이다. 무창학교는 무장면 성내리에 학교를 세웠다. 성내리는 무장읍성 내에 학교를 세웠다. 현재의 무장초등학교자리가 사립 무창학교의 초기 설립 자리였다. 무창학교가 발전을 하면서 동명학교와 무창학교가 통합을 하여 사립 무장보통학교가 되었 다. 1911년 9월 사립 무장보통학교가 공립 무장보통학교로 변경하여 개교하였다. 무장사람들은 무장이 고창에서 가장 먼저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무장보다 고창읍에 사립 양명학교가 먼저 설립되어 있었기 때문 에 고창읍이 먼저 생겼다. 1912년 고창에 고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고창은 앞서 말한 사립 양명학교가 있었는데, 양명학교는 은성채씨가 설립을 하였다. 은규선씨가 그의 백부인 은성채씨에게 양자로 갔다. 그는 백부를 잘 만나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은성채씨 땅이 동산물에 많이 있었 다. 그는 1865년생이었다. 양명학교가 고창교육의 시원이다. 성송면이 흥덕보다 먼저 학교가 생겼다. 성내의 사립 암치보통학교다. 암치학교는 강대식씨 가 만들었다. 그는 배포가 있고 똑똑한 사람이며 웅변을 잘했다. 그는 도지사에게도 따지는 사람이었다. 그가 암치학교를 만들 때 전라북도 교육청 학무국장을 만났다. 그는 일본의 정 책을 가지고 따져 들어 암치학교의 인가를 받은 것이다. 만일 허가를 안 해주면 총독을 만 나 따지겠다고 하여 놀란 학무국장이 허가를 내 준 것이다. 암치학교의 설립은 동아일보 1923년 9월 28자에 나온다. 이 기사는 오동균 동아일보 고창지국장이 써서 보낸 것이다. 암치학교에 대한 증언은 오재균씨가 해주었다. 오재균씨는 목포에서 제헌국회의원에서 한민 당으로 출마를 하였다가 낙선을 하였다. 그는 부산으로 가서 부산에서 제일가는 골동품 수


집상이 되었다. 한국에서 벼루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보현집을 만든 사 람이다. 그는 금불상을 가지고 있었다. 손바닥 보다 조금 큰 것이었다. 그것을 부산시에서 1 억을 주고 사갔다. 20cm도 안 된다. 부산시가 부산에 박물관을 만들면서 사간 것이다. 이기 화원장이 부산까지 가서 직접 확인한 내용이다. 오재균씨도 암치학교에 들어갔다. 1923년 그가 5-6학년 때 80여 명이 동맹휴학을 했다. 당 시 준교원으로 구아바라(桑原)가 있었다. 그는 성질이 나쁘고 무위도식하면서 주정을 잘 부 렸다. 그는 아주 비신사적이며 비인격자였다. 강대식씨가 큰 학생들을 조정하여 5-6학년생 80여 명이 9월 5일 동맹휴학을 하였다. 수업을 거부한 것이다. 구아바라의 비인격적 태도를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어서 쫓아내었다. 당시 보통학교에서는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이

바로 암치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이었다. 암치학교가 설립되자마자 동맹휴학을 한 것이다. 그 는 싹수가 좋지 않아 7일간 그를 몰아내기 위한 동맹휴학을 한 것이다. 구아바라는 암치에서 쫓겨나 1924년 2월 고창보통학교로 부임하여 갔다. 부임하자마자 그 의 부정행위는 심각하였다. 술집이나 음식점에서 공짜로 먹고 돈을 떼어 먹기 일쑤였다. 1924년 고창청년회관에서 학교 몰래 학부형들의 총회가 있었다. 은규선씨 등이 구아바라에 대한 동맹휴학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2월 1일 2.3학년 학생들이 교실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난로에 불을 피워 불을 쬐 고 있었다. 구아바라가 이를 보고 학생들을 구타하자 학생들이 도망을 갔다. 도망을 가다가 한 학생의 고무신이 벗겨져 달아나자 구아바라가 그 신발을 난로에 태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는 흥덕으로 쫓겨 갔다. 그는 이미 암치와 고창보통학교에서의 일 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명해져 있었다. 그가 흥덕으로 와서도 별반 다름없이 비인격적인 언행과 비교육자적인 행위를 하는 교사에 게 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상급학생들이 파업을 하였다. 그리고 도교육청에 그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학무국장은 구하바라를 경상도로 쫓아 버렸다. 학무국장이 이렇게 일을 빨리 처리한 것은 강대식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이 거구였 으며, 배포가 있었기 때문에 학무국장이 벌벌 떨었다. 그를 건들면 큰일 날 것 같아 빠르게 처리를 한 것이다. 아산면 석곡은 원래 무장현 백석면에 속하였다. 백석은 다시 석곡면과 합쳐져 탁곡면이 되 었다. 오자환이라는 사람이 석교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고창고보를 설릴할 당시 이사 가 되었으며, 개척정신이 많아 전남 영광에 가서 간척지를 개간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많은 고창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처음에는 남흥학당(아산면 남산)을 설립하였다가 후에 사립 남흥 학교로 하였다. 다시 사립 석곡보통학교로 변경하였다. 석고보통학교를 바로 오자환씨가 후 언을 하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남흥학당 출신으로 수석 졸업한 사람이 바로 강석영씨다. 강석영씨가 송사문인으로 나이가 있었지만 선생이 고창고보에 가라고 해서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고수에는 야학이 있었다. 고수의 안세환씨의 아버지인 안병일씨가 주동이 되었다. 안병일씨 와 유봉석씨 등 고수출신 청장년들이 수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회관을 만들었다. 친목을 위한 축구회로 마당바우골을 만들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고수 수양회를 만들었으며, 회장으 로 안병일씨가 되었다. 그리고 각 문중에서 모범적인 식구를 추천하여 30여명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처음 수양회가 만든 것이 야학이다. 낮에는 수양회관으로 사용하고 밤에는 야학 을 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누구든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교육을 시켰다. 고수야학이 잘 되었다. 그리고 축구도 잘하였다. 축구 때문에 단합하고 친선을 도모할 수 있었다. 축구가 바로 이 단체의 핵심체가 된 것이다. 총 35명이 회비를 내 수양회관을 운영하였다. 밤에는 야학을 통해 운영하였는데, 이것이 고수보통학교 설립전의 일이다. 1935년 고수 야학에서도 동맹휴학을 하였다. 주재소 직원인 와타나베(渡辺) 순경이 난폭하 게 굴었으며, 식당이나 객주에서 공자로 술과 밥을 먹고 값을 지불하지도 않았다. 또한 취 해 주정을 하고 여성들을 희롱하였다. 거의 불량배행세를 하니 수양회관에서 야학을 할 수 없었다. 고수야학회원들은 오동균씨에게 연락을 해서 동아일보에 기사를 내버렸다. 그래서 와타나베가 쫓겨난 것이다. 저질 일본인 와타나베 배척운동이 바로 고수의 동맹휴학이다. 고수야학터는 고수면 황산리의 안병일씨 땅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창에서 이렇게 동맹휴학이 많았던 것은 개척정신이 강하고 의를 숭상하는 고창만의 정신 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창은 특히 모양성에서 읍내가 다 보이는 북치와 서북치가 그 중심에 있다. 6.10만세운동 등도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고창고보생들이 서북치를 차지 하고 고창보통학교생들이 북치를 점령하여 양쪽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박창현씨 아버지(이름을 모름)가 고수자기를 재현하기 위해 고수에서 살았다. 그의 집은 일 본식 집으로 짓고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해방 전까지 살면서 자기를 재현하는데 노력하였 다. 당시 일본인이 그의 뒤를 봐줘 자기를 재현하는데 노력한 것이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이 손을 떼었다. 박상현과 박사면 형제가 있었는데, 사면의 어머니가 일본에 살았다. 고수자 기를 재현하기 위해 일본의 골동품 하는 애호가들이 그의 뒤를 봐주었다. 그래서 고수자기 를 재현할 수 있었다. 그 후 유화상씨가 고수자기를 재현하였다. 함평국민학교에서 처음으로 고려자기 재현에 성 공을 하였다 그래서 고수자기의 맥을 잇게 된 것이다. 고수자기는 남한당씨와 유화상씨 이 끌었다. 자기는 유화상씨보다 형님이 더 잘했다. 그 형님이 한국전쟁 시 학살당했다. 유화상 씨와 남한당씨 아들들이 고창에서 그 맥을 잇고 있다. 고수자기는 남한당씨 아들이 하고 있 다. 그는 옛 고수면사무소를 불하 받아 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가마터를 버리고 온 것이다. 원래 위치가 바뀐 것이다. 고수자기 터는 고수면 와촌리 사기정이라는 마을이다. 이곳에 큰 은행나무가 있다. 고수자 기는 사기정에서 해야 맞다. 선운자기는 유화상씨 처남이 하고 있고, 그의 아들 유봉춘이 원래 사기정에서 하다가 무장 방면의 신상리의 큰 통나무집 뒤에서 소금단지를 만들고 있 다. 사기정은 원래 고창오씨들이 살았다. 사기정 가마터의 재현이 필요하다. 도자기는 땅이 좋 아야 한다. 지금은 고령에서 가지고 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호항공고등학교 자리에서 도 수레로 날라서 제작을 하였다. 그 후 이곳에 공동묘지가 되었다. 공동묘지로 조성하기 전 이곳에 두 군데의 백토자리가 있다. 고령토보다 더 좋다. 사기정자리가 지리적 명소이다. 고려시대부터 하던 곳이다. 고수자기 상품이 일본에서 팔리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관심이


있었다. 해방 후 관리가 안 되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유상화씨가 행방 후 겨우 정신을 차 리고 고수자기의 재현에 성공한 것이다. 박창현씨 일가가 학살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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