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중 도솔암 마애불에서 비결서를 찾다 고창읍에서 서쪽으로 지방도 796호선을 따라 약 7km쯤 가다보면 아산면 면소재 지에 당도하게 된다. 면소재지에서 선운사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북쪽으로 약 12km쯤 더 가면 삼인(三仁)마을이 나온다. 삼인리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 구 본사인 선운사가 있어 선운사 창건 당시(577년) 이전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 루고 살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 24년(577), 선운사 창건 당시에 모여든 사람들이 마 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석상, 중촌, 삼인 세 마을을 삼인(三仁)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선운사 앞 들녘 농토가 비록 절 땅이기는 하나 소작농으로 땅을 벌고 한편으로는 닥나무를 재배하여 종이를 만들어서 팔 고 마포와 모시 베를 생산하여 나름대 로 끼니를 잇고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 은 뒷산인 경수산 자락을 따라 인이골 을 뒤로 하고 마을 전면에는 구황봉이 높게 솟아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또한 도솔천에서 사철 흐르는 선운계곡 냇물 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어 옛날에는 풍 천장어가 노닐던 천혜의 고장이기도 하 였다.
<그림 1> 삼인마을 전경
선운산과 선운사(禪雲寺)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는 선운산은 1979년에 선운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도립공원 안에는 천년고찰인 선운사와 부속암자인 도솔암, 참당암, 동운암, 석상 암이 현존하고 있다. 선운산과 경수산 도처에는 기암괴석이 경관을 이루고 수림이 울창하여 절경을 이룬 가운데 천마봉, 낙조대, 만월대, 선학암, 봉두암, 사자암, 용 문굴, 진흥굴, 삼천굴, 천왕봉, 여래봉, 인경봉, 구황봉, 노적봉 등 명소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또한 동백나무 숲과 장사송, 송악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봄이면 동백, 여름에는 선운계곡의 시원한 물줄기와 그늘이 있고 가을이면 도솔계 곡의 꽃무릇과 단풍이 있어 계곡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겨울이면 설경이 너무나 도 아름다워 선운산 도솔계곡 일원이 명승지(제54호)로 지정되었다.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는 선운사는 변산반도와 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경수 산과 소요봉 사이를 흐르는 주진천 어구에서 약 2km쯤 올라가면 도달하게 된다. 보물과 천연기념물 등 20여 점에 달하는 많은 문화재와 관광자원이 풍부한 선운 사에는 진흥굴, 용문굴을 비롯하여 천마봉, 낙조대, 사자암, 도솔계곡 등 비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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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고 창건설화도 많이 있다. 어느 날 죽도포에 돌로 만들어진 배 한 척이 떠다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배 를 끌어 올리려고 했으나 배는 꿈쩍도 하지 않고 바다 쪽으로 자꾸만 떠내려간다 고 했다. 이 소문을 듣고 검단선사가 달려가 보니 배가 저절로 다가오기에 배 위 로 올라가보았다. 배 안에는 금옷 입은 사람이 옥으로 만든 부처와 삼존불상을 품 에 안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품에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케 하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본래 연못이었던 지금의 절터를 메워서 절을 짓게 되었는데 이때 진흥왕 이 재물을 내리고 장정 100명을 보내 절 짓는 일을 돕게 했다. 진흥왕과 선운사에 관련된 설화는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진흥 굴과도 연결된다. 진흥왕은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이 동굴 에서 수도하였는데 어느 날 그의 꿈에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타났다고 해서 이굴을 열석굴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운사에는 조선 숙종 39년(1713)에 소요대사의 후학인 호월자(현익대사) 가 기술한『대참사 사적기(大懺寺 事蹟記)』1책과, 조선 정조 18년(1794)에 임우 상이 기술한『대참사 법당기』2책 등, 사적기 3권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사적기에는 선운사 창수 승적기를 머리로 한 선운사내의 모든 불보(佛寶)와 불 기, 전각, 요사(寮舍) 등과 산내 암자에 대한 창건과 수리 등 선운사의 연혁과 현 상이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를 보면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의운국사가 신라 진흥왕의 시 주를 받아 창건하였고 고려 충숙왕 16년(1329)에 중수하였으나 조선 선조 30년 (1597)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진되고 어실(御室)만 남아 있던 것을 광해군 5년 (1613) 봄에 당시 무장현 태수 송석조가 행호선사와 원준대덕 두 대사로 하여금 전각을 다시 세우도록 하여 5년에 걸친 대 역사 끝에 지어진 건물들이 지금에 이 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운사는 창건 당시 암자가 89채, 요사 189채, 24개의 굴에서 3천여 승려가 참 선하며 수도하던 대가람(大伽藍)이었으며 수많은 선승과 각자(覺者)를 배출한 명 찰이었으나 한때 억불정책과 정유재란을 맞으면서 웅장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선운사 본당과 동운암, 석상암, 도솔암, 참당암 등이 남아 있다. 하지만 수 많은 고승과 선사를 배출한 명찰답게 천사백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 인근 정읍의 내장사와 부안군의 내소사, 개암사를 비롯하여 고 창, 부안, 정읍, 임실, 순창, 군산과 서울·경기 일원에 5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호남의 거찰이다. <그림> 선운사 전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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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 마애불(磨崖佛)과 복장감실(服藏監室) 선운사에서 서남쪽으로 약 2.5km 가다보면 도솔암에 당도하게 되는데 도솔암에 서 용문굴로 가는 길가에는 칠송대(七松臺)라 부르는 거대한 암벽이 있고 암벽 남 쪽 중앙 면에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18번지 에 소재한 이 마애불상은 1969년 5월에 처음으로 일반에게 알려졌다. 그 후 1973년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 “선운사 동불암 마애불상”으로 지정되었 다가 1994년도에 보물 제 1200호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로 명칭을 바꾸어 도지 정 문화재에서 국가지정 문화재로 격상되었다. 국내 최대의 이 마애불은 단애부의 높이가 약 37.7m이며 마애불상은 중앙에 15.7m의 높이로 지표면 위에 새겨져 있다. 선운사 사적기에 의하면 도솔암에는 상도솔과 하도솔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상도솔은 지장보살좌상을 안치하고 있는 지금의 내원궁을 가리키고, 하도 솔은 동불암을 일컫는 것이라 전해오고 있어서 1995년에 고창군에서는 동불암 터와 마애불 복장유물(服藏遺物)로 알려진 ‘비결록’을 확인하기 위하여 “동불암지 발 및 마애불실측조사”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마애불의 복장은 지정문화재의 훼손 우려 등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개봉 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마애불 전면에서 건물지(建物址) 유적 일부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자기편과 청자기와편 등이 수습되었고 이 건물지는 고려시대의 건물 지로 추정된다는 보고서가 출간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554∼597)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을 조각하고 동불암(東佛庵)이라는 닫집[天蓋]을 짓고 명치 끝에 감실을 만들어 비결 록(秘訣錄)을 넣었다고 하는데 인조 26년(1648)에 큰바람이 불어 닫집이 무너져 부서진 조각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몇 십 리나 떨어진 곳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이 전설을 뒷받침하듯 마애불의 바위 면에는 보호누각에 사용된 것으로 보여 지 는 부러진 동목재(棟木材)와 쇠못이 지금도 박혀 있다. 사람들은 이 불상이 미륵 불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의 입소문을 타고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미륵신앙은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여 현실의 모순과 괴로움을 타파하 고 이상세계를 구현하리라는 구원론적 신앙으로서 당시 억압받고 있는 하층민들 에게 널리 수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운동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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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불상의 배꼽 속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는데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 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비결을 넣을 때 벼락 살도 함께 넣어 서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고 하였다. 1820년 춘산채지가(春山菜芝歌)라는 예언서를 쓴 이서구(李書九)가 1787년에 전 라감사로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이 불상의 배꼽 속에 비결이 들어 있다는 소문 을 듣고 호기심에 이끌려 복장 속에 있는 한권의 책을 꺼내고 말았다. 첫 장을 펼 치자마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내려치는 바람에 다시 복장에 넣고 봉하였는데 ‘전라 감사 이서구가 억지로 열다(全羅監司李西九開辨瑞)’라는 비기의 첫 머리 문구만을 얼핏 보았다고 한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892년 8월 어느 날, 동학접주 손화중이 이 소문 을 듣고 지금이야말로 비결을 꺼내 민중을 구원할 이상세계를 만들 때라고 생각 하고 동학도 300여 명과 함께 도솔암(兜率庵)으로 올라가 반항하는 수십 명의 중 을 결박하고 청죽을 엮어 발판을 만들어 불상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비결을 꺼내 가져갔다고 한다. 그 뒤 보고를 받은 무장현감은 각지의 동학군 을 모조리 잡아들여 갖은 고문을 가하면서 비결 책을 가져간 손화중과 두령이 있 는 곳을 대라고 10여 일 동안 형벌을 가하였으나 끝내 밝혀내지 못하고 전라감사 에게 보고되어 주모자 3인은 사형에 처하고 남은 100여 명은 엄장(嚴杖)을 때리 고 방송하였다. 가슴 아픈 얘기지만 망해가는 나라의 쇠운과 일어서는 민중의 힘과 의지가 서려 있는 얘기라고 생각된다. 그 비결 책은 무엇이었을까? 있었다면 불경이나 불상조 성에 관한 내역이 고작이었을 텐데, 왜 이렇게 역적죄에까지 연루되는 사건으로 비화되었을까? 마애불의 배꼽에서 실제로 무엇이 나왔는지는 제쳐놓더라도 이 사 건이 썩어빠진 세상이 망하고 새 세상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미륵신앙과 동학이라는 사상적, 실천적 합류는 민중들이 오랫동안 희구해온 혁세(革世)의 불씨였을 것이라고 도솔암 주스님이 설명해 주었 다.
도솔암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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