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와 열부의 마을(해리면 사반리 사반)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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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의 마을 -

사반리 사반마을

1. 마을의 위치와 지명유래 전라북도 고창군 서부 서해안에 접해 있는 면이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馬韓) 54부족 국가 가운데 모로비리국(牟盧卑離国)의 땅으로 일컬어졌다. 삼국시대 에는 백제의 상노현(上老県)에 속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 지역 명칭이 장사현(長沙県)으로 변경되었다. 장사고을은 무령군(武霊君)의 영현(領県)이었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영광군(靈光郡)에 속하였다. 뒤에 장사감무(長沙監務)가 무송 현(茂松県)을 겸해서 다스렸다. 조선시대 1417년(태종 17년)에는 무송(茂松)과 장 사(長沙) 두 고을을 합하여 무장현(茂長県)으로 개칭되었다. 무장현에 진(鎮)을 두 어 병마사(兵馬使)로서 고을의 직무를 겸하도록 하다가 1423년(세종 5년)에 첨절제 사(僉節制使)로 고쳤다. 사반리는 고창읍에서 지방도 703호선을 따라 해리면을 거쳐 상하면 방향으로 진 행하다 사반분기점에서 우회전하여, 농어촌도로 사반선을 따라 2.5km쯤 가면 어룡마 을을 거쳐 사반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서쪽으로 2km쯤 가면 서해바다가 보이기 도 한다. 법정리 및 행정구획으로 보면, 법정분리로는 사반리이며, 행정분리는 사반마을이 고, 자연마을은 사반과 어룡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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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반마을 전경

사반마을은 본래 마을 일대가 바다였다고 한다. 사반은 사반과 어룡을 합한 행정 마을을 가리킨다. 풍수지리학상으로 사반은 지형이 뱀이 소반처럼 똬리 틀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사반(巳盤)이라고 불렀다. 어룡은 ‘붕어’ 물고기와 같다 하여 ‘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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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였다. 사반마을 앞 들에는 두 개의 개구리 섬이 있다. 하나의 섬은 천연(天然)의 섬으로

어룡 쪽에 있고 그 섬에는 소나무 여러 그루가 있다가 고사하였고, 현재는 세 그루 가 남아 있다. 다른 하나는 사반 주민들이 비보풍수(裨補風水)를 이용하여 서쪽 들 에 인공의 섬을 만들고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위치는 나성 저수지 상단 쪽에 있다. 현재 이 섬은 흙이 많이 사라지고 잡풀만 있는 늪지로 변모하고 있다.

2.

연혁과 인구현황

사반마을은 고려 28대 충혜왕 무렵 청주한씨(清州韓氏) 시조 란(蘭)의 18세손 한 흡(韓洽, 1570∼1609년)이 마을터를 마련하여 세거하였다. 1531년(중종 26년) 무렵 광주이씨(広州李氏) 이약수(李若水)의 아들 이부(李斧) 가 남하하여 아산면(雅山面) 남산(南山)으로 정착했고, 1600년경 그의 작은아들 이 사온(李士温)이 방축으로 입거(入居)한 후, 그의 6세손 이두칠(李斗七, 1677∼1740 년)이 입향(入郷)하여 광주이씨 집성촌으로 번창하였다. 본래 사반은 사동(巳洞)・사촌(巳村)・대한・반계(盤渓) 네 개의 마을로 구분되어 오다가 조선시대에는 무장현(茂長県) 오리동면(五里洞面)에 속하였으며, 근대의 행 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근 자연마을 어룡을 합하여 ‘사반’ 마을로 개칭되었다. 어룡(魚竜)마을은 1500년 말에 나주나씨(羅州羅氏)가 들어와 마을터를 잡고 세거 하면서 나씨촌을 이루었으나, 흥성하지 못하였다. 후에 함양박씨(咸陽朴氏) 박상연 (朴尚淵)이 반계에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떠나고 2가구만이 거 주하고 있다. 현재는 타성(他姓)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 1966년에는 68세대 340명이 거주하였다. 1980년 이후 농촌 경기의 침체로 많은 사람이 떠나고, 2009년 9월말 기준 43세대 78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녀 성별로는 남자 36명, 여자 42명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6명이 더 많다. 연령별 로는 10대 미만 1명, 10대가 5명, 20대가 2명, 30대가 2명, 40대가 7명, 50대가 10 명, 60대가 23명, 70대가 23명, 80대가 4명, 100세 이상도 1명이 거주하고 있다. 성씨별로는 광주이씨 54명, 함양박씨 3명, 기타 21명으로, 광주이씨 집성촌으로 구 성되어 있다.


3.

자연환경 해리면 서남부에 위치한 자연마을 사반과 어룡을 합한 마을이다. 산세를

보면, 동쪽으로는 조시산(造矢山)이 있고, 서쪽으로는 배암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원당산(元堂山)이 있다. 그리고 사반마을을 병풍처럼 싸고 있는 북쪽에는 천룡산(天 竜山)이 있으며 샘뫼도 있다. 들녘을 보면 앞 들녘과 서쪽 들녘이 있다. 사반 서쪽의 들녘에는 사반제가 있다. 사반제에서 북쪽 야산을 보면 배암산이 사반리 쪽으로 뻗 어 천룡산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천은 방축에서 사반마을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인 사반천이 있고, 그 사반천을 가로지르는 사반교가 있다. 사반천의 물은 나 성 저수지로 유입된다. 이 저수지는 사반과 미산(米山)마을 사이에 있는데, 나성리 (羅星里) 나산(羅山) 뒤쪽에 있기 때문에 나성 저수지라 한다. 어룡은 사반에서 용반마을로 넘어가는 남서쪽에 위치한다. 마을 앞에는 바로 들녘 이 있고 그 바로 앞산이 원당산이다. 마을 뒤에는 도로가 있고 도로 너머로 산밭이 있다. 어룡마을 앞 들에 어룡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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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성 저수지

4. 마을의 인물과 행의(行誼) 1) (1) 청주한씨(淸州韓氏) 사반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온 청주한씨는 한흡(韓洽, 1570∼1609년, 선조 3년∼광 해군 1년)이다. 그는 청주한씨 시조 란(蘭)의 18세손이다. (2) 나주나씨(羅州羅氏) 나주나씨는 1500년경에 어룡마을에 입향하였다. 금호(錦浩) 사침(士沈, 1526∼ 1596년, 중종 21∼선조 29년)의 아들 충열공(忠烈公)의 5세손 응천(応天)이 반남 (潘南)에서 사반으로 입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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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州李氏) 인근 마을에 처음 입향한 광주이씨는 이사온(李思温)이다. 이사온은 해리

면 방축리로 이거하고, 그의 6세손 이두칠(李斗七, 1677∼1740년, 숙종 3년∼영조 16년)이 사반으로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의 자는 경백(経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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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주이씨 세거비

(4) 함양박씨(咸陽朴氏) 어룡마을에 입향한 함양박씨는 박상연(朴尚淵, 1631∼1696년, 인조 9년∼숙종 22년) 이다. 그의 자는 여우(汝愚)이고 호는 금곡(金谷)이며 벼슬은 초계현감(草渓県監)을 지냈다. 그는 함양박씨 중시조 선(善)의 20세 손이고, 구당(九堂) 박세영(朴世栄)의 5대손으로 안성 양성면(陽城面) 금곡(金谷)에서 출생하였다. 남인(南人)에 속하여 숙종 5년(1679) 서인(西人)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하고 이어 시폐십조(時弊十条)를 들어 극간하는 소를 올렸다. 다음해(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 각하여 허적(許積)과 윤휴(尹鑴)가 죽음을 당하고 송시열이 등용되자, 박상연은 아 우 박상환(朴尚煥, 자는 仲愚, 호는 退辞亭, 벼슬은 副護軍)과 함께 남하하다가, 자신 은 해리면 어룡리 반계(盤渓)에 터를 잡았다. 아우 박상환은 영광군 백수면 대신리 에 은거하였다.

2) 역사적 인물과 행의(行誼) (1) 이기윤(李基潤) : 1762년(영조 27년)∼1823년(순조 3년) 이기윤은 1762년 사반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덕여(徳汝), 호는 사촌거사(沙村居士)이다. 재예가 뛰어나 약관(弱冠) 전후에 경사자집(経史子集)을 섭렵하고, 행배(行輩)들을 다스려 문호(門戸)를 만들고 공령(功令)에 일삼을 것을 도모하여 향시에 자주 합격시켰다. 뒷날 귀향하여 후학을 교수하다가, 부모의 상을 당하자 오로지 죽만 먹었고 시묘살이에 애훼(哀毀)하며 송종(送終)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1800년 정조대왕 승하시에 북망 통곡하고 매월 초하루에 분향을 하였으며, 순조 11년(1811년) 토적(土賊) 홍경래(洪景来)가 무리를 모아 난(亂)을 일으키자 스스로 참여하여 난을 토벌하고 향리로 무사히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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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秉奎 ): 1819년(순조 19년)∼1892년(고종 29년) 1819년 사반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자는 춘명(春明), 호는 연

사(蓮沙)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鎮, 1798∼1879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 다. 천품이 온후하고 재예가 남달라 행의가 고상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사우들이 추 중하였다. 1888년(고종 25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내다 가, 벼슬을 버리고 향촌으로 돌아와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3) 박영석(朴英錫) : 1832년(순조 32년)∼1878년(고종 15년) 박영석은 1832년 어룡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 자는 여화(汝華), 호는 우 당(愚堂)이다. 농와(農窩) 박재덕(朴載徳)의 아들이다. 백부 만휴정(晩休亭) 박재희 (朴載煕)에게 학문을 닦았다. 성품이 순후(純厚)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양지양체(養 志養体)하였고 경학(経学)에 잠심하여 문명(文名)을 얻었다. 선조의 업을 소술(紹 述)하여 후손을 복되게 하였다.

3) 효행 및 열부 (1) 이필래(李弼來) : 1832년(순조 32년)∼1886년(고종 23년) 이필래는 1832년 사반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자는 도원(道元), 호는 요아당 (蓼莪堂)이다. 어려서 어버이를 지효(至孝)로 섬기고 지체(志体)를 아울러 봉양하였 으며, 혼정신성(昏定晨省)의 도리를 다하였다. 모친이 갑자기 기질(奇疾)을 얻자 후 원에 단(壇)을 세우고 정화수(井華水)를 올리고 북두성에 기원하기를 5년을 하루같 이 하였다. 병이 위급하자 단지(断指)하여 연명하도록 하였으나 상(喪)을 당함에 송 종(送終)의 예를 지극히 하고 선운산(禅雲山)에 장사를 지냈다. 집과 거리가 멀고 팔순 노구의 부친이 있기에 시묘살이를 할 수 없자, 매월 삭망(朔望)에 제수를 준비 하여 통곡하니 그 소리가 온 산을 움직였다. 산 밖의 사람이 그의 고등(孤灯)이 높 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이효자(李孝子)가 왔다고 하였다. 묘 옆에는 호표(虎豹)의 굴만 있고 근처에는 척개(滌漑)의 물이 하나도 없었다. 호표가 스스로 멀리 떠나자 그곳에서 영천(靈泉)이 솟아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면서 이것은 지극한 효도가 하늘과 신을 감동시켜 이러한 일이 있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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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필래 효자비

<사진 5> 이용관 효자비

(李容官) : 1859년(철종 10년)∼1941년 1859년 사반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 자는 치삼(致三), 호는 술암(述

菴)이다. 난와(蘭窩) 김이수(金以洙)에게 학문을 닦았다. 어려서 어버이를 섬길 적에 항상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하고 혼정신성(昏定晨省)하여 사람들의 칭송이 자 자하였다. 아버지가 병을 얻어 오랫동안 시탕(侍湯)하고 수년 동안 하늘에 빌고 정 성을 다했는데, 위급하자 지혈(指血)로 수일을 연명하도록 하였다. 아버지의 거상(居 喪)에 정문(情文)을 갖추었고, 모상에도 부상과 같이 슬픔이 지나쳐 몸이 몹시 야위 어 보는 이가 감복하여 이효자(李孝子)라 칭송하였다.

(3) 박동환(朴東煥) : 1880년(고종 17년)∼1940년 박동환은 1880년 어룡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 자는 경찬(敬賛), 호는 반 계(磻渓)이다. 남당(南堂) 박용순(朴龍淳)의 아들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편


성경(誠敬)으로 받들었다.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로 이거했다가 17 세 때 모친의 상(喪)을 당하여 복(服)을 마치고 돌아왔다. 조실부모한 것을 통한으 로 여겨 추복삼년(追服三年)을 하고 수진(晬辰)을 당하여 수연(寿宴)을 허락하지 아 니하고 종일토록 애통하니 주위의 사람이 감루(感涙)하자 향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 의 효를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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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平李氏)

이계온(李啓温)의 딸이다. 함양박씨 박동환(朴東煥)의 처로, 품성이 정숙하여 친가 에서 효녀의 칭송이 있었다. 16세에 시집오니 마침 시아버지의 기일이 5일 앞인지 라, 시어머니 돌아가신 이후 남편이 어리어 숙부가 대신 제사를 행하였다. 유인(孺 人)이 들어와 제사를 정성으로 받들고 친족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교자(教子)에 엄 하여 아들 기용이 전교(典校)를 하자 유인이 경계하여 정심(正心)하고 결신(潔身)하 여 위로 선성(先聖)에 누를 끼치지 아니하도록 하고, 아래로 향당(郷党)에 죄를 짓 지 말 것을 신칙하도록 하니 향리에서 여사로 칭송했다.

(5)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영순(金永純)의 딸이다. 함양박씨 박용순(朴龍純)의 처이다. 19세에 시집와서 시 부모에게 지효(至孝)로 봉양하고 남편을 공대(恭待)하였다. 남편이 병들어 자리에 누우니 부인이 의원을 맞아 약을 쓰고 하늘에 항상 빌어 대신하기를 원하였다. 남편 이 위급하자 작지(斫指)하여 여러 날을 회생하도록 하였다. 남편이 임종에 부인에게 유촉하여 노친을 지효로 받들고 복중아(腹中児)가 행여 남아이면 잘 무육(撫育)하여 봉선(奉先)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운명하였다. 시부모를 효로 섬기고, 다행히 남아를 얻어 의방(義方)으로 가르쳐 문호가 창대(昌大)하니 향리에서 효열부로 칭했다. (6)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춘명(李春明)의 딸로 1905년에 태어났다. 광주이씨 이재영(李縡泳)의 처이다. 품성이 단숙(端淑)하여 여사의 행의가 있었다. 시부모를 지효(至孝)로 섬기고 남편 을 공대(恭待)하다가, 남편이 갑자기 기질(奇疾)을 얻자 백방으로 구호(救護)하였다.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 하다가 시부모가 계시고 어린 아이들이 있기에 차마 죽지 못하고 상장(喪葬)을 예(禮)로 다하였다. 시부모에게 성경(誠敬)을 다하며 자제들을 의방(義方)으로 가르쳐 문호를 수립하니 향촌 사림(士林)이 유인(孺人)의 열행(烈


)을 주군(州郡)에 천양(薦揚)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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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陽朴氏)

박후림(朴厚林)의 딸이다. 광주이씨 이용귀(李容貴)의 처이다. 20세 때 성혼(成婚) 하여 시부모에게 효성을 하고 남편을 공대하였다. 남편이 갑자기 기질(奇疾)을 얻자 할고(割股)를 하고 백방으로 구호(救護)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매일 새벽마다 정화수 (井華水)를 길러다가 하늘에 빌었으나 하늘의 명임을 어찌하겠는가? 마침내 남편의 상(喪)을 당하여 통곡하며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부모의 읍유(泣喩)로 그 마음을 돌이켜 초종범절(初終凡節)을 예에 따라 하였으며 길쌈으로 가산을 일으키고 두 자 식을 무육(撫育)하여 문호를 부식(扶植)하니 대성문학원(大成文学院)의 천양(薦揚) 이 있었다.

(8) 함양오씨(咸陽吳氏) 오한익(呉漢翊)의 딸이다. 광주이씨 이병식(李秉植)의 처이다. 시부모를 지효(至 孝)로 섬기고 유색완용(愉色婉容)으로 뜻을 승순(承順)하였다. 갑자기 남편이 병을 얻자, 구료(求療)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그만 상을 당하였다. 시부모에게 슬픈 얼굴을 띄지 않고 송종(送終)을 예제(禮制)에 따라 마치고, 삼우(三虞) 날에 밀실에 들어가 남편의 허리띠로 목을 매고 남편을 따라 죽으니 부인의 나이 21세였다. 문의(門議) 로 조카를 후사(後嗣)로 삼고, 열읍(列邑)에 천양(薦揚)하였다.

5.

종교시설

1) 인산사(仁山祠) 인산사는 고창군 해리면 사반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이 사우는 광주이씨의 사우로, 숙종조(粛宗朝)에 예산(禮山) 대흥(大興)의 이약수(李若水)의 묘하(墓下)에 사우(祠 宇)를 세우고 춘추향사(春秋享祀)하다가 대원군 때 훼철(毀撤)되었다. 후손이 1950년 이 곳으로 모셔와 본 건물을 세우고 이약수(李若水)를 향사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축문은 “지윤학안(志尹学顔) 성인취의(成仁取義) 일소대절(一疏大節) 유광백세(遺 光百世)”이다. 건물 구조는 사당 3간이고, 강당은 3간이며, 내외삼문은 각 3간이다. 향사일은 음력 3월 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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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산사 전경

- 이약수(李若水) : 1486년(성종 17년)∼1531년(중종 26년) 광주군(広州郡) 귀천면(龜川面) 암사리(巌寺里)에서 출생하였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광주(広州), 자는 지원(止源), 호는 우천(牛泉)이다. 아버지는 현감 자(滋)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広州安氏)로 사간(司諫) 팽명(彭命)의 딸이다. 천품이 정직하고 의리가 고명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후, 청송(聴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년)・화담 (花潭) 서경덕(徐敬徳, 1489∼1546년) 등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그는 학문에 독실하고 효우가 지극했다. 1510년(중종 5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1518년 성수침・서경덕 등과 현량과(賢良科)에 별천(別薦)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성균관에서 학업에 전념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소두(疏頭)로서 성균관의 유생 150여명과 함께 궁궐에 나아가 항소하였다. 그가 조광조의 무죄를 호소하여 대궐 밖 에서 호곡(号哭)하니 천지가 진동하는지라 임금이 진노하여 “유생들이 부궐호곡(赴 闕号哭)하는 것은 천고에 없는 일이다” 하고 하옥을 명하니 이약수가 “옛적에 양진 이 투옥되자 태학생 3천 명이 궁궐에 나아가 호곡한 일은 있으나 전하의 오늘의 일 은 천고에 없는 일이로소이다” 하고 옥에 나아가니 유생들이 앞을 다투어 옥에 들어 가 조야(朝野)가 경동하였다. 임금은 윤언직(尹彦直)・홍순복(洪舜福) 등도 함께 투 옥하도록 명하였다. 1521년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10년만인 1531년에 예산으로 이배, 같은 해 8 월 유배지 대흥(大興)에서 죽었다. 1605년(선조 38)에 설원(雪寃)되었다. 1708년 (숙종 34년) 대흥현(大興県) 우정사(牛井祠)에 봉향되고, 고창군 해리면 사반 인산 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천유고(牛泉遺稿) 1책이 있다.

2) 함양박씨삼강문(咸陽朴氏三綱門) 함양박씨삼강문은 어룡마을에 있다. 이 삼강문은 함양박씨의 일가족의 충(忠)・효 (孝)・열(烈)을 기려 세웠다. 함양박씨 구당(九堂) 박세영(朴世栄)의 증손 박유정 (朴由精)이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순절하고, 그의 아들 박효형(朴孝亨)은 ‘효’가 지 극하였다. 박효영의 9세손 박동일(朴東鎰)의 처 창령성씨(昌寧成氏)는 절개가 뛰어


‘열’로 정려(旌閭)되었다. 그리하여 이 세 사람의 ‘충・효・열’의 정신을 기려 “삼 강문(三綱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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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강문 전경

- 박유정(朴由精) : 1569년(선조 2년)∼1592년(선조 25년)

박유정은 1569년에 태어났다. 자는 집중(執中), 호는 절재(節斎)이다. 지기가 탁월 하고 문한이 정예하여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 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의주목사 김여 물(金汝岉: 1548∼1592)과 더불어 방략을 주획하다가 달천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충’이 뛰어나 뒷날 증 병조참의로 추서되었다.

(2) 배향인물 - 박효형(朴孝亨) : 1593년(선조 26년)∼1642년(인조 20년) 박효형은 1593년에 태어났다. 자는 행원(行源), 호는 모재(慕斎)이다. 박유정의 아 들로 유복자로 태어나, 6세에 어머니에게 물어 아버지의 전몰하심을 알고 초혼(招 魂)하여 장사를 지내고 3년을 추상하였다. 8세 때 모친병환을 당하여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다가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읍혈(泣血)하였다. 장사랑(将仕郎)을 지내고 동몽 교관(童蒙教官)에 증하였다. (3) 배향인물 - 창녕성씨 : 1884년(고종 19년)∼1959년 박효형의 9세손 박동일(朴東鎰)의 처로 1884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온량(温良)하 고 정숙하여 시부모를 정성으로 모셨으며, 성혼한 후 남편이 갑자기 병환을 얻자 단 (壇)을 세워 항상 하늘에 기도하며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상(喪)을 당함에 상례대로 상을 치루고 조카를 양자로 입양하여 가도(家道)를 수립하였다. 고을에서 서로 추천 하니 정려가 내려졌다. <사진 8> 삼강문 현판

3) 관덕재(觀德齋) 관덕재는 묘각(墓閣)으로 해리면 사반마을 선영 아래에 있다. 이 재실은 방축마을 에 터를 잡은 광주이씨 파조(派祖) 이사온(李士温)의 재각이다. 본 재실은 5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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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이다. 동쪽에는 오실(奥室)이 있다. 2003년 종친들이 성금을 모아 중수

(重修)하고 마을 입구에 세거비(世居碑)를 세웠다. <

9> 관덕재 모습

4) 1965년 원당산 자락에 개척교회를 설립, 1989년 사반리 204번지 현 위치로 이전 활발한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10> 사반교회 전경

6.

미풍양속

1) 당산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마을주민 전체가 참여하여 줄을 만들어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줄을 돌리고 당산제를 지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당산이 철거되고, 미신타파 정책으로 중단되어 당산제는 거행되지 않고 있다. 현재 당산은 마을 앞에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사진 11> 사반리 당산

2) 세시풍속 유두(음 6월 15일)와 칠석(음 7월 7일)은 연례행사로 마을 주민들이 음식과 술을 장만하여 농악을 치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풍년농사를 기원하면서 하루를 즐 겼으나 농사가 기계화되면서 사라지고 없다. 다만 촌중계(村中契) 조직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마을의 애경사를 담당하고 있다.


7.

편의시설

1) 약 700m를 확・포장하고, 1,200m의 담장을 개량하였으며, 65동의 지 붕을 개량하였다. 하수구 450m를 정비하였다. 2) 모정 - 초인정(招仁亭) 현 모정은 사반리 212-1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 모정은 옛날에는 정각(亭閣) 터 자리라 한다. 2003년도 새로이 신축하여, 마을 주민들이 모여 늦은 봄부터 가을 까지 농사일에 더위를 피하고 담소의 장소로 긴요하게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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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모정 전경

<사진 13> 마을회관 전경

3) 사반회관 사반 마을회관은 1980년 새마을사업으로 사반리 226-1번지에 20평 규모로 건축 하여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사용하여 왔으나, 건물이 낡고 비좁아 1983년 본 건 물을 철거하고 25평으로 신축하였다. 현재는 농촌인구 고령화로 경로당으로 사용하 고 있다.

4) 사반 보건진료소 사반 보건진료소는 1981년 사반리 229-3번지에 30평 규모로 개소하였으나, 진 료환자의 증가로 2008년에 사반리 1214-1번지에 45평 규모로 신축하여 나성 리・방축리・사반・미산・각동・용반 등의 마을주민을 진료하여, 주민 건강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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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4> 사반 보건진료소 전경

및 마을유통

사반마을은 1995년까지는 오지마을로 도로가 발달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로 불편 하였으나, 농어촌도로 103호선(왕촌~용두)과 군도 7호선(금평~자룡)의 확・포장 공사로 사반마을 앞을 지나고 있어, 현재는 교통의 요지로 변하고 있다.

8.

숨은 이야기

1) 마을 야화 옛날 사반리에는 정각(亭閣)이 있었는데, 그 정각에서는 팔재사(八才士)가 모여 학문을 탐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솔안터에 있는 이희언(李希彦, 1695~1740년) 의 묘를 남모르게 파묘(破墓)하여 버렸다. 이 일이 있는 이후로 정각에서 공부하던 팔재사는 하나 둘 죽어가고, 그 가운데 한 분이신 이병규(李秉奎)만이 살아 진사에 합격하였다 한다. 2) 숨은 이야기 사반과 어룡의 지형적 형세로 인해, 두 마을은 자주 송사(訟事)가 있었다. 송사가 있을 때마다 사반마을은 송사를 이길 수 없었다 한다. 그것은 사반의 지형이 뱀이 소반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형국이고, 어룡은 큰 물고기 형세이다. 그런데 사반 앞의 야산 원당산은 황새의 형국이다. 이 황새가 큰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항상 뱀만을 노리고 있었다. 때문에 송사가 있을 때마다 그 송사를 이길 수 없었다 한다. 마을 주 민들은 비보풍수(裨補風水)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사반의 자연적 형국(形局)의 결처(欠処)를 인위적인 길국(吉 局)으로 만들기 위하여 사반마을 앞에는 천연의 개구리 섬이 있기는 하지만 마을 옆 에 인공의 섬을 만들어, 황새가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잡아 먹으려는 것을 피하도 록 하였다.


비보풍수는 어룡과 송사가 있으면 사반이 매번 이기지 못하였기에 인공의 섬을 만들어 황새를 유인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두 마을의 송사는 일어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은 각각의 마을 터를 유지하면서 서로 유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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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

15> 개구리 섬 모습

및 소득산업 전답

농가는 30호이고 비농가는 13호이다. 전(田)은 30ha이고, 답(畓)은 55ha이다. 임 야는 20ha이다.

2) 농사이야기 1960년 이전에는 벼농사가 농가의 주소득원으로 1965년도 이전까지는 흐트림 모 내기를 하여 평당 주수확보가 되지 않아 수확량이 극히 저조하였다. 관(官)에서 줄 모내기를 강압적으로 실시하도록 지도하여 벼농사의 수확량을 높여 왔다. 1970년 초 부터 미질(米質)은 떨어지지만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 재배를 권장하여 이때부터 농촌 에 보릿고개가 해소되었다. 1980년 대에 들어 트랙터 경운과 기계이앙을 통한 모내 기를 실시하여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대체하는 계기가 되어 농촌 소득이 높아졌다.

3) 소득작목의 변천과 축산 1960년 이전에는 주로 보리・밀・콩 등을 재배하였다. 1961년 이후에는 잎담배 경작으로 획기적으로 소득이 증대하였다. 1983년 이후에는 비닐을 이용한 고추재배 기술향상으로 밭농사의 65%가 고추재배로 확대되며, 농촌경제의 성장기가 되었다. 2003년 이후에는 밭 3ha에 복분자를 재배하여 농가소득이 향상되었다. 축산은 한 농가가 한우를 사육하고, 다른 한 농가가 사슴을 사육하고 있다.

<사진 16> 복분자 재배 모습


10. 1)

및 역대 이장 매년 음력 정월 14일이다. 역대 이장은 이봉재, 박한용, 이권용, 이종

해, 이종수, 이종만, 이방택, 이종욱(1965∼1971), 이길수(1974∼1975), 이대영 (1976), 이길원(1977∼1979), 이주찬(1980), 이대영(1981∼1984), 이종식(1985∼ 1988), 이성수(1989∼1990), 이동영(1991), 이종주(1992∼1994), 이공수(1995), 이기수(1996∼1999), 이은영(2000∼2002), 이주만(2003∼2007) 등이다. 현재는 이주찬이다.

2) 남녀지도자 및 부녀회 새마을 지도자는 이길원이고, 부녀회장은 이희선이다. 부녀회원수는 28명이다.

○ 도움 주신 분 • 이대영(李大泳, 광주이씨, 남, 69세) • 이주찬(광주이씨, 남, 59세 ,이장)

○ 참고문헌 • 한국지명총람 전북편(상・하), 한글학회, 1981. • 高敞三郷誌 호남문화사, 1991. •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 茂長郷校誌 호남문화사, 2004. • 고창군지 고창군, 2008. • 모양성의 얼 고창군, 198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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