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군과 무장읍성 무장읍성은 무장면 성내리에 있고, 이곳이 무장면소재지이다. 성내리는 1417년경 무장리와 함께 형성되었다. 당초에는 산성리(山城里), 니동리(泥 洞里), 통정리(桶井里)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면사무소를 지나 버스정류장 고개를 ‘사창재’, 성밑 마을은 ‘성밑에’, 동쪽마을은 ‘동밖에’, 동네 너머에 있는 마을은 ‘월촌’, 무장읍성 안에 있는 마을은 ‘성안에’ 마을 등으로 불렀다. 무장면은 삼한시대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고을 터이다. 백제 시대에 무장현은 ‘송미지현(松彌知縣)’이라 하였고(『삼국지리』·『고려 사지리』·『동국여지승람』), 그 후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물리치고(696 년) 경덕왕 16년(757년)에 무송현과 장사현으로 개칭하고, 이때부터 무령군 (武靈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성종 14년(955년)에 나주목(羅州牧)의 관할 하에 있었다. 조선태종 17년(1417년)에 위의 두 고 을을 병합하여 무장현(茂長懸)이라 하고 진(鎭)을 설치하여 병마사(兵馬使) 를 첨절제사(僉節制使)로 고치고 그 뒤 현감(縣監)을 두었다. 고종 32년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지방관제가 바뀌어, 조선건국 후 태 종 13년(1413년) 이래 482년 동안 내려오던 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 331군이 되어 군수가 배치되었다. 다음 해인 고종 33년(1896년) 8월 6일 칙령 제36호로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전국을 13도로 나누어 비로소 전라북도에 속한 무장군이 되고, 군수가 행정 을 맡았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무장군은 14개 면으로 나뉘었던 것으로 돼 있으나 이후 16개 면으로 나뉘었다. 1910년 일본의 조선총독부 압제 밑에서 전라북도 무장군으로 지내오다가 1941년 3월 1일에 부군폐합 (府郡廢合)으로 고창군에 합하게 되어 일동면(一東面)과 이동면(二東面)을 묶어 무장면이 되었다. 무장면 성내리 149-1번지 일대에는 1417년에 축성한 무장읍성(사적346호) 이 있고,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는 원님이 집무하던 동헌[취백당(翠白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6호]과 무장고을의 궐패(闕牌)를 모셔둔 곳으로 왕 명을 받고 출장 나오는 관리들의 숙소였던 객사[송사지관(松沙之館), 전라 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그리고 무장읍성의 남문 진무루(鎭茂樓)와 동문
인 읍취루(挹翠樓)가 있다. 무장의 기맥은 무장면 성내리 무장읍성이 자리 잡고 있는 북쪽 성벽으로부
터 중앙부위를 향해 남쪽으로 쭉 뻗어오다 우뚝 멈춘 작은 구릉이 있는데 이곳을 사두봉(蛇頭峰)이라 한다.
<사진> 사두봉
<사진> 동헌
<사진> 객사
<사진> 진무루 무장읍성 조선 태종 17년(1417년) 무송현과 장사현을 합하여 무장진으로 삼고 그 해 2월부터 4개월여에 걸쳐 축소한 석성으로 장방형 평지성이다. 성의 둘레는 1,443m, 넓이는 144.948㎡이다(고창읍성 둘레 1,684m 넓이 165.858㎡에 비하면 약간 작은 규모). 객사(松沙之館)는 선조 14년(1581년)에 건립되었으며 궐패를 모셔두고 현 의 수령이 매달 삭망에 임금에게 예를 갖추는 정청과, 왕명으로 지방에 내 려오는 벼슬아치들의 숙소로 쓰이는 좌우 익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 대 관아건물의 대표적 양식인 동헌은 현감이 집무하던 곳이다. 명종20년 (1565년)에 세워진 목조건물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읍취루 무장객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건축물로서, 당시 현감 최검(崔儉)이 개 축하였으나 이후 철폐되었다가 2010년 5월 복원되어 웅장하고 단아한 모습 으로 시가지를 바라다보고 있다. 읍성 내 비석군 객사 앞에 세워진 비석군(사진9)에는 수령의 불망비(不忘 碑) 6기, 선정비(善政碑) 6기, 청백비(淸白碑) 1기, 저수지 축조에 관한 기 공비(紀功碑) 1기 등이 있어 지금까지 당시 수령의 선정 및 공덕을 기리고 있다.
<사진> 객사 앞에 세워진 송덕·공덕비
1) 사두봉의 수난 설화
<사진> 사두봉의 고목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그 우뚝 솟은 봉우리 좌우 양측에 뱀의 눈과 같이 파란 물이 넘치는 용소(연못)가 있었는데, 오른쪽 눈은 지금 옛 무장초등학교 운동장 중앙이고 왼쪽 눈은 면사무소 동쪽 아래 우물이 있는 옆 자리이다.
<사진 12> 용소(연못) 이 뱀머리의 북쪽으로 크고 작은 성황당 능선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며 둥글게 옹위하고 있는 것은 마치 뱀이 몸을 둥글게 도사리고 머리를 높이 치켜든 듯한 지형이다. 옛날부터 무장 고을 터를 반사(도사리고 있는 뱀)형국이라 하였는데, 조석 으로 양쪽 용소에서 안개(뱀이 내뿜는 입김)가 솟아나와 고을 안을 뒤덮으 면 보이는 경치도 좋거니와 이 기운으로 고을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게 되고 또한 많은 인걸이 배출된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무장의 현세가 퍽 드셌다 고 한다. 그리고 동·서방으로는 학체(鶴体)를 이룬 한재산이 있고 이 큰 뱀의 지세 가 머리를 높이 쳐들어 적을 방어했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남산(현 영선중 학교 자리)이 개구리의 형국을 이루고 있어 뱀이 가까이에 먹이를 둔 셈이 어서 항상 기근이 없이 날로 번창해왔다고 한다. 옛날부터 ‘고창은 성 자랑’, ‘흥덕은 양반 자랑’, ‘무장은 드센 아전 자랑’ 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지만 무장에는 지방세가 강하여 항상 역량 이 풍부한 현감들이 부임해 왔다. 만약 현감이 사람은 좋으나 역량이 부족 하면 얼마 가지 못해서 교체되곤 하였다. 이와 같이 바닥이 까다롭고 배타 성이 강하다 보니 시장(市場)이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6Km나 떨 어져 있는 만장머리장(지금의 해리면 안산리 이상동)으로 장을 보러 다녔 다. 그런데 이 장터가 사두봉을 마주 보는 곳에 있었다. 장날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므로 뱀이 이곳을 넘보고 공격하는 사건이 생 겼다고 한다. 장날이면 젊은 청년이 한 사람씩 반드시 희생되곤 했다. 이 고을의 역대 현감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기에 갖은 노
력을 다 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온 스님이 사두봉 을 깎아내려 우뚝한 뱀의 머리를 수그려야 한다는 묘책을 알려주었다 한다. 현감은 이제야 무서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으로 고을사람들 을 동원하여 사두봉에서 만장머리장이 안 보이게 사두봉을 깎아내리고 뱀의 두 눈인 용소를 메우도록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끔찍한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고된 것도 무릅쓰고 몇 달을 작업한 끝에 마무리하였다. 이 같은 작업에 전력하다 보니 자연히 장에 갈 틈이 없게 되어 싸움하는 사람도 죽 은 사람도 없어진 것일 터인데, 마을사람들은 이제 바로 그 효험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부귀를 누리던 고을의 인물들 이 망해가고 시름시름 죽어가기 시작하는가 하면 남녀의 쌍초상이 계속 이 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어디에서 시작된 말인지 현감이 고을의 드센 기세를 꺾기위해 사두봉을 깎아 반사형국을 변형시켰기 때문에 인물들이 쇠퇴하고 새로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도사가 이 이 야기를 듣고 하는 말인 즉, 사두봉을 원래대로 되돌리기는 어려우나 앞날을 위해 사두봉에 나무를 심어 이 나무가 사두봉 높이만큼 자라게 되면 이 고 을은 다시 번창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남산 밑 지금의 하거리 연못을 파 고 개구리 못을 만들면 이 뱀의 바로 앞에 먹이가 생기게 되어 뱀이 멀리 가지 않게 되므로 불행을 면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다. 이 말을 전해들 은 고을 현감은 깎아내린 사두봉에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도 만들었 다. 그 뒤로는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남산 밑에 있는 개구리 연못 자리에 5일 시장도 생기게 되고 차차 인근의 장꾼들이 모여들게 되어 지금 은 꽤나 큰 5일장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그 당시 심은 느티나무들이 이제 9Cm만 더 자라면 사두봉 높이를 채우게 되어 벌써부터 굵직한 인물 배출에 주민들의 가슴이 부풀고 있다.
<사진> 사두봉 높이만큼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
2) 통샘[通井]의 전설 무장면 성내리 동남로(무장게이트볼 경기장 앞길)에서 약 30m쯤 읍내 쪽으 로 올라가면 원형 40m 정도의 우물형 방죽이 있었고, 외곽도로 바로 옆에 도축장이 있었는데, 그 방죽에서 나오는 생수가 넉넉한지라 도축장의 용수 로 썼다. 그리고 읍내 아낙네들이 이 방죽을 빨래터로도 사용하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읍내에 사는 젊은 과부가 수절하며 이곳에 자주 와서 몸을 씻기도 하였는데 이후 좋지 않은 풍문에 못 이겨 물에 투신자살 하였다 한다. 그 후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치는 궂은 날에는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 리가 인근 마을까지 들렸다고 한다. 이에 불안해진 마을사람들은 집단 진정 을 내어 이 우메워버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농경지로 변했다. 큰 뱀의 지세로 인한 통샘이 이곳 외에 여러 곳에 있었던 것 같다. 3) 무장현 객사 별관 남극관(南極館) 태종 17년(1417년) 무장현의 읍성을 축성하고 진(鎭)을 설치하여 병마사가 겸임하다가 첨절제사로 고치고 그 후 현감이 정무를 맡아 왔다. 서해안 지 역의 막중한 정사(政事)들로 객관이 협소하게 되자 객사의 남쪽에 별관을 신축하였으니 그 건물이 남극관 노인당이다.
지금부터 약 400여 년 전 조선조 40년 정미년(1607년) 초 전라도 주부군현 의 서해안 전략요새지로서 중앙의 경아전(京衙前)과 지방의 외아전(外衙前) 등 향리들의 정사와 숙소로 활용코자 약 30평의 목조 6칸 4짝의 평아전을 건립하여 현재까지 보존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노인당에 보존된 「기로안 (耆老案-사진17)」 계서에 ‘도유작악(屠維作噩) 원월망일(元月望日)’이라 기록되어 있으니 ‘도유’는 10간(干)의 기(己)요,‘작악’은 12지(支)의 유(酉)를 뜻해 ‘도유작악’은 기유년(己酉年)이 된다. ‘원월망일(元月望 日)까지 살피면 곧, 1729년 1월 15일이 되니, 약 280년 이전에 기로안이 작 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부임하는 고을 수령들이 노후안식처로 남극관을 찾아와서 현안인 민정·군사·교육 분야 등 다양하게 자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1915년 발행 「松沙誌 」및 1729년에 발행된 「耆老案」등) 이렇듯 무장현 축성 이후 전력을 합산하면 500여 년의 역사를 지녔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후 1910년경 사립 무장학교 개교 당시 교실로도 사용하였고, 1919년 기 미년 3·1 독립운동 군중 만세를 외치고 남극관 앞으로 남문을 지나 읍성으 로 올라가서 무장주재소를 점령했다는 증언도 있으며 1940년경 일본군의 서 해안 경비 사단으로 군기대(軍旗隊)가 일시 주둔했던 영광과 치욕의 역사관 이기도 하다. 남극관(南極館)은 사마제와 양사제를 두어 선비를 길러냈던 바 등과한 분 이나 선비들이 노년에는 진사구락부(進士俱樂部)에 모여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남극관 노인당은 1987년 보사부로부터 모범경로당으로 지정된 바 있으며 2009년 4월 대한 노인회 중앙회장의 지정을 받아 군내에서 유일하게 무장 남극관 노인대학을 시범 운영 중에 있다. 남극관의 역사성에 대하여는 「송사지(松沙誌)」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로서 살아 숨 쉬는 충과 효의 고을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잠깐 남극관의 명칭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남극성(南極星)은 매년 2월경에 남쪽 지평선에 잠시 보이는 별로써 중국 고대 천문설(天文說) 에서 남성들의 수명을 알아보는 별이라 하여 이 별을 바라보면 오래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 본 남극관에는 누정문학(樓亭文學)이라 할 수 있는 현액 20 여 점(사진22)이 강당 벽에 걸려 있으며 현재 보관중인 「기로안서문(耆老 案序文)」은 승정원 종5품(옥당)의 만취헌 교리(敎理) 이재달(李濟達)이 쓴
글이다. 무장현의 장들 무장장은 시끄러웠고, 위치는 읍성의 동쪽 성안에 있었다. 즉 고창방면으로 시장이 있었고, 기록에 재성동성내라 하였다. 1973년 무장읍지에 비천장(飛 川場, 날내장)이라는 장이 기록되어 있다. 공읍과 대산 경계로 흘러내리는 하천가에 있었다. 시장은 물이 있어야 하는데 비천은 물이 자주 말랐다. 물 을 뜨려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비천장은 늘 늦게 섰기 때문에 늘 락 지장이라 했다. 안자산장(해리)을 안진머리장이라고도 했다. 무장읍에서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이 시장도 계축읍지에 나오는데, 지금의 해리면 안산리에 있었다. 안 자(安子)시는 4일과 9일장이다. 개갑은 1793년에 기록이 나온다. 개갑은 재현서 십오리라는 기록이다. 갑천 이라는 곳에 장이 섰기 때문에 개갑장이라 하였다. 1904년 갑진지에 개갑장 이 나온다. 처음에는 낄개(介)자였다가 이후 열개(開)로 바뀌었다. 남창장은 재현남삼십리에 있다. 대산면 칠거리에서 성송 쪽으로 와서 성송 의 남창과 칠거리 사이에 있었다. 계축읍지에 처음 등장한다. 후에 대산면 사거리장이 생겼다. 대산면 면소재지인 매산에 장이 섰다. 사거리장은 2일 과 7일에 장이 섰다. 조선후기까지 무장에는 5군데의 장이 있었으나 무장소재지에는 장이 없었 다. 이것은 무장사람들이 억센 것도 있지만 무장의 풍수학적인 문제가 있었 다고 한다. 즉 무장은 풍수적으로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형국으로 이를 사 뫼등이라 한다. 뱀이 똬리를 트는 형국은 장사꾼들이 돈을 빼 올 수가 없기 때문에 장이 안 되었다고 한다. 사뫼등은 사람은 살기 좋은데 돈을 못 가져 간다는 루머 때문이다. 그러나 해리의 안진머리장이 바다도 가까워 잘 되었 다. 한국전쟁 후에야 무장에 장이 섰다. 무장장은 무장 사람들만 했기 때문에 장이 잘 안되었다. 오히려 상하장이 무장장보다 훨씬 활기가 있었다. 그래 서 지금도 상하장이 무장장보다 더 낫다고 한다. 해방 후 60년대 말 생긴 상하장이 70년대 초에 정식으로 시장의 허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