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 농경문화의 중심지 성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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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문화의 중심지 성내 고부에 있었다는 마한 고비리국(古卑離國)의 영역은 어디까지였을까? 성내의 고 대 유적과 유물의 분포를 보면,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유적은 용교천의 상류에 주로 나타나고, 삼한시대의 유물은 용교천의 중류인 양계리와 동림저수지의 상 류인 옥제리와 월산리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또한 동림저수지의 동쪽인 신성 리에서 조동리까지 이르는 구릉지의 배후에 삼한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 다. 얼마 전 성내면 신대리에서 대형옹관묘 3기와 소형 1기가 발견되었다. 대 형옹관묘는 옹관의 제작과정상의 어려움으로 신분을 나타내주는 상징이다. 이 러한 삼한시대의 유적분포현황을 통해 볼 때, 동림저수지 아래의 고부천의 본 격적인 개발은 시기적으로 삼국시대 이후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것은 눌제의 축조시기를 『정읍군사(井邑郡史)』에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유적의 분포상 황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즉 눌제는 염해를 방지하고 배후의 넓은 농토에 용수를 공급해주어야 했다. 현재 백제 사비시대의 행정구역인 고사부리(古沙夫 里)의 중방으로 알려진 곳은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이다. 은선리는 백제의 중방인 고사부리 은선리의 천태산의 횡혈식석실분들은 웅진시기 묘제의 구조·석재·수법 등이 비 슷해 축조연대가 6세기 전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한 은선리에는 부여 능산리 형식의 고분들도 나타나는데, 그 연대가 7세기 전반기에 해당한다. 따 라서 눌제의 축조를 통해서 고부천 중류인 영원면 은선리 일대의 개발 시기를 삼국시대로 추정해볼 수 있다. 또한 은선리를 중심으로 서쪽인 고부천과 동쪽 의 신태인과 이평 인근은 일제강점기까지도 바닷물이 들어온 곳으로, 당시 농 경지는 동진강의 상류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농업진흥청의 토양도에 기초해 복원한 구해안선지도1)에도 정읍시의 고부천과 동진강은 거의 대부분이 해수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한의 54개 소국들 중 이 인근에만 2-3개 (정우, 태인, 이평)나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기 때문에 고비리국의 영역을 너무 넓게 설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고부천의 중류지역인 백제의 중방이었던 은선 리는 더욱 마한의 고비리국의 중심지로 설정할 수 없다. 독립적 고인돌 밀집지 직경은 직경 4~7km 고인돌의 축조는 긴 시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인구부 양력이 아니었어도 가능했다. 그러나 고인돌이 거대해지고 채석하고 운반하는 1) 1971년 농촌진흥청의 식물환경연구소에서 발행한 구 해안선


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짐에 따라 정착생 활과 안정적인 식량 확보가 가장 중요한 경제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고인돌사회는 도작문화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집단의례의 발달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시대 전라도 서남부지역에 국가체제를 이룰만한 세력은 미약했을 것이다. 따라서 구릉을 중심으로 조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산간의 충적지를 중심으로 각각의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살 았다. 고인돌의 소밀도지역은 대개 직경 1~2km가 대부분이지만, 독립적인 분포양 상을 보이는 곳은 직경 4~7km정도이다(이 영문, 2002).

성내면의 고인돌은 영역표시 고창북부의 고인돌은 이들의 고유한 영역표시의 기능으로 추정되면, 이는 구릉 성 산지 주변의 충적지를 중심으로 소규모 정치체제의 영역이다. 이들 소규모 의 집단들은 해수면의 상승으로 농경지는 좁고 인구가 불어나 더욱 경쟁이 심 화되었을 것이다. 특히 철기시대에 접어들면서 강력한 철제무기를 가진 집단이 소규모의 고인돌사회를 통합해 나아갔을 것이다. 홀로세 초기 서해안의 해수면 은 청동기시대인 3,500~2,800년, 삼국시대인 1,500년부터 고려시대 중기인 700년 전후가 현재보다 약 1~1.5m 높았다고 한다. 한편 최근 연구 성과에 의 하면, 영산강 유역의 A·D 300년 전후는 해수면이 최고조였다고 한다. 이 시기 는 삼한시대(원삼국시대)이자 백제한성시대이다. 이 시기 해수면이 최고였다면 당연히 고부천은 강이라기보다는 내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었을 것이 다. 고부 두승산 인근까지 조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고부 일대의 농경문화 발달은 고창 성내에 비해 늦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부 에 있었다는 삼한의 고비리국의 중심은 지금의 고부 일대가 될 수가 없다. 청동기시대 논경문화의 중심지 성내 백제의 적극적인 전라도 개발은 고구려에게 한강을 잃고 고마나루(웅진, 지금 의 공부)로 천도한 이후이다. 마한의 고비리국은 최소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


하기 전까지 백제의 지방제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 후 적극적으로 전라도를 개발하기 위해 옛 마한의 재지 세력들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었고, 그곳에 중앙정부의 관료를 파견했던 것이 다. 그래서 백제는 마한의 고비리국의 옛 중심지에서 영원면 은선리로 옮겨 새 로운 지방행정과 군사 체계를 정비하였을 것이다. 그 후 백제는 고부천 주변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근초고왕이 전라도 지역을 점령할 당시 에는 고부천 일대 대부분은 염해피해를 받는 지역이었다. 고창 성내 고로들에 의하면, 성내면 양계리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즉 지금의 고부면 일대는 바다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농경문화가 중심은 당연히 염해를 피하는 지역인 성내면이 될 수밖에 없다. 초기 고비리국의 중심지는 성내저수지 부근으로 추정 초기 고비리국의 중심지는 고창 성내의 용교천 중상류로 추정된다. 이는 최근 성내면 신대리에서 발굴된 대형옹관묘가 말해주고 있다. 또한 한반도 청동기시 대의 유적인 고인돌의 성내면 분포양상은 성내저수지 위쪽이 집중적으로 분포 하고 있으며, 성내저수지 아래로 양계리의 시기까지만 고인돌이 나타나고 있 다. 성내면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은 대체로 청동기인들의 영역을 나타내주는 영역표시로 추정한다면, 성내지수지를 중심으로 한 성내면과 정읍시 소성면 일 대가 고비리국의 초기 중심지는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앞서 언급했던 흥덕에 신소도국설과 연관하여 볼 때, 흥덕 동북부의 성내면은 신소도국과 고비리국의 경계로 추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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