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 성남리는 마한 일리국의 중심지로 비정
고창의 대산면과 공음면도 모로비리국의 강역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천관우선생에 의하면, 영광은 마한(馬韓) 54개(個) 소국중(小國中) 일리국에 속 하였고, 그 중심이 영광읍이라 하였다. 아직까지 일리국의 강역이나 중심지 등 은 기록이 전무하여 알 길이 없다. 영광의 일리국설은 아직까지 학설이지만, 이를 고증해보고 알리는 것은 지역향토사가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다행스 럽게도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어 선사시대와 역사시 대의 전환기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고 있다. 고창남부와 영광북부의 고인돌은 대산의 상금리을 중심으로 지석리와 영광군 대마면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은 주로 구릉성 산지에 많이 있고, 특히 고산과 고성산의 서사면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이는 채석장이 가까워 운반이 편리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의 원인은 조수가 대산과 대마까지 밀고 들어와 염 해의 피해를 입기 때문에 농경이 어려웠다. 이러한 자연환경의 불리로 선사인 들은 염해의 피해가 적은 하천의 상류에 많이 거주하였다. 영광군지에 의하면, 옛날에는 군남(郡南), 군서(郡西), 대마(大馬)에도 바닷물이 드나들었고 그 뿐 아니라 영광읍(靈光邑)에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으므로 배들 이 출입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를 실증하는 좋은 예가 물무산의 존재이다. 수퇴산(水退山)이라도 하는 이산은 영광읍 교촌리(校村里)의 남동방(南東方)에 위치한 山으로서 山名이 예시하듯이 물을 매어 놓은 곳이다. 다시 말해 물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끝지은 산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강 상류에 집단적으로 거주한 인간들은 곳곳에 거석들을 세워 천제단이나 사 자의 묘 등 신성한 영역임을 알렸다. 근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토대로 馬韓 小國의 위치비정을 새롭게 시도한 이영문(李榮文)교수의 연구방법론은 주목할 만하다. 이교수는 『전남지방 馬韓小國 비정지(比定地)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의 논문에서 “고인돌 밀집지와 마한소국의 위치 비정지 17개국 중 13개 정도 가 일치하고 있다”고 하며, “적어도 마한소국들은 고인돌사회를 계승·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마한의 소국들은 대체로 고인돌이 많 은 곳의 주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교수의 논리는 고고학적 연구성 과로 얻은 결론이지만, 당연히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동원이
가능한 곳이어야 한다. 고인돌은 신석기 때부터 축조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 지만,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축조하였을 것이다. 앞의 영광군지에서 언급되었듯이 삼한시대 고창과 영광 경계지역은 거의 바닷 물에 의해 침수되어 염해의 피해를 입어 농경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삼 한시대 이전의 청동기인들은 고산 아래 조수의 피해가 없는 인근에 거주하면 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고고학적으로도 대산천 상류의 대산의 성남리·광대리·춘산리·연동리·덕천리와 공음 신대리·예전리·덕암리·군유리 등 광범위하게 삼한시대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진에는 성곽이 있고, 진한에는 성책이 있으나, 마한에는 성곽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뒤의 기사에는 “국가나 관가에 무슨 큰일이 있을 때에는 성곽을 쌓게 하고.....”라고 하여 마한에 성곽이 이었 음을 비치고 있다. 삼한시대를 한국사에는 성읍국가(城邑國家)로 부르는데, 군 사방어시설인 성곽과 성책이 국읍 취락을 중심으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 서 영광에 있었다는 막로국의 중심지가 되기 위해서는 삼한시대의 성곽이나 토성이 있어야 된다. 그러나 영광읍 인근에는 아직까지 고대산성이 학계에 보 고되지 않았으나 인근의 대산 성남리에는 삼한시대의 토성으로 추정되는 성책 이 있다. 또한 인근에는 삼한시대의 유물과 주거유적 및 주구묘들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 대산의 성남리 인근에는 많은 고인돌군이 있어 청동기시대부터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금이나 검 계열의 지명은 신 성한 지모신인 태음신의 공간을 의미하는데, 상금이나 중금과 같이 고성산성 아래에는 고인돌과 더불어 신앙유적의 성격의 용어가 아직도 남아 있다. 성남 리는 마을의 향이 동향으로 겨울철 추위를 피할 수 있으며, 인근의 와탄천의 상류까지 조수가 들어왔기 때문에 수산물도 풍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고창지역의 마한사 연구는 거의 전무하나 유물과 유적이 조금씩 발굴되어 새 로운 해석이 가능해지고 있다. 고창의 고대사 연구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