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살았던 천 년 고찰의 마을 은사리 은사, 신기마을 중 영· 이 명훈
1.
위치와 유래
고수면 소재지에서 군도 21번을 따라 올라오다가 조산저수지 중간에서 국가지원 지방도 49번이 나오면 이를 따라 조산저수지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은사 리다. 국가지원 지방도49번 도로는 은사리의 남서쪽 아래에서 올라와 은사리의 마을 들을 통과하여 수랑동을 넘어 횟기재(들독재)로 넘어간다. 이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가장 먼저 닿는 마을이 은사이고, 은사를 지나 다음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강당, 신기, 초지, 칠성, 수랑동 순으로 자연마을이 있다. 우측으로 가면 가협마을이 있고,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문수산이 있다. 최근 뚫린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를 타면, 가 협마을에서부터 장성군 서삼면 장삼리까지 약3,855m 4차선 고창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행정리로는 은사리와 신기리로 구분되고, 법정리의 명칭은 은사리이다. 은사리 의 자연마을은 은사, 가협, 강당이고, 신기리의 자연마을은 신기, 칠성, 수랑동 등이 다. 고수면은 1914년 고사면과 수곡면이 병합될 때 고수면(9개 리)이라 하고 1935년 이웃 오산면의 다섯 개 리를 편입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선시대에 고창현 은사리는 본래 고사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은사, 상림, 운봉, 가협, 신기, 지소, 칠성, 초치, 신성 등을 병합하여 중심마을인 은사의 이름을 따서 은사리라 하여 고수면에 편입되 었다. 조선조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산안씨 복복(福)과 지(祉)형제가 난 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입거하여 설기한 마을이다. 마을이름은, 숨어살기 위해 마을 을 이루었다는 뜻으로 ‘숨을 은(隱)’자와 ‘선비 사(士)’자를 합하여 지었다는 유래가 있다. 마을 앞산 중턱에 있는 취남초당(鷲南草堂)은 안씨 형제가 6년 간 여 묘(廬墓)하며 종신토록 부모를 추모하던 곳으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림 1> 고창향교 앞에 있는 안지선생 공적비
1)
마을 선생에 의하면, 수랑동은 원래 수랑등 또는 물냉이로 불렸다고 한다. 수랑
등이라는 이름은 죽산박씨들이 산중으로 피난을 오면서 무냉이를 수랑등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그전의 이름은 술항동(주막거리)이었으며, 술항동을 다른 말로 ‘술 주(酒)’자를 써서 주항동으로도 불렀다. 주항동은 흥덕과 성내에도 있다. 물냉이가 아니라 원래는 술항동이 맞다고 하는데, 이곳에 물이 부족하여 수원을 구하고자 임 진왜란 이후에 물냉이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수랑동은 수랑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한국전쟁 전 까지만 해도 수랑동은 죽산박씨들 집성촌으로 꽤나 잘 사는 동네였다고 한다. 지금 도 폐가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우람한 기둥이나 기왓장을 보면 수랑골이 얼마나 부 촌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복락을 누리며 살던 박씨 일가들도 흥 망성쇠의 거센 물결은 피해갈 수 없었던지 마르크스주의가 우리나라 지식층의 정신 을 좀먹어가던 한국전쟁 직전 박씨 일가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당시 고창고등학교 교사였던 박해진이 빨치산 전남북 사령관 박헌영에게 포섭되어 좌경사상에 물들게 되었고, 좌경사상의 독소는 수랑골 주민 전체를 빨간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자 반공을 국시로 정한 남한 정부가 군경토벌대를 투입한 것은 당연지사 였고 거세게 항거하던 빨치산들은 고창군과 장성군의 경계인 청량산에서 소탕되었다 한다. 그러나 박해진은 이 때 죽지 않고 몸을 숨긴 뒤 머슴살이 등으로 신분을 위장 하며 상당기간 떠돌이로 살다가 나중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수랑 골은 폐허로 변해 유족들은 수랑골을 떠나 전국 각지로 흩어져버렸고 마지막까지 수
지키고 살던 유옥순 할머니가 2008년 추석 무렵 타계함으로써 박씨 일가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지금은 고중영 씨가 혼자 거주하며 집필을 하고 있다.
<그림 2> 수랑동마을 전경
수랑골의 오른쪽 고개가 회독골이다. 회독골이란 이름은, 고창 월산 뒷산에서부터 이곳 뒤쪽의 산줄기가 석회암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어 백회의 재료가 되는 돌 회독 이 풍부해서 붙여진 것이다. 이곳 회독골에서 나는 석회암을 구워 백회를 만들었고 백회는 부유한 집안의 매장용 관으로 사용되었다. 칠성골의 윗등에 죽산박씨들이 살 았고, 칠성의 횟기재(들독재)라는 고갯마루를 넘으면 왼쪽이 고창 월산이고, 곧바로 가면 장성 금곡리 용화마을이 나온다. 횟기재에서 석회가 나와 횟기재로 불린 것인 데, 석회는 시멘트가 없던 때에 유용하게 쓰였다고 한다. 고수사람들은 물론이고 고 창읍내의 사람들까지도 석회를 파다가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횟기재 고갯마루는 원래 주막등성이었다. 고개 뒤쪽으로는 유명한 명당인 날학골 이라는 곳이 있는데, 학이 비상하는 형국의 혈인 그곳에 늘짝(널짝, 시신을 넣어 매 장하는 함)이 아홉 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느락골이라고도 한다는 설화가 전해온 다. 2) 칠성마을은 느락골에서 1km 못미처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다. 칠성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는 칠성혈과 일곱 개의 봉우리가 있어 그 산을 바라보고 삶의 둥지를 튼 마을이다.
<
3> 칠성마을
일곱 개 봉우리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이에 있는 고갯길이 장무치다. ‘치’ 는 높은 언덕이라는 뜻인데 장무치는 이곳 주민들이 걸어서 고창으로 나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로, 나뭇짐이나 농산물을 팔러갈 때 산을 넘느라 땀을 흘리며 오르내 렸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숲이 우거져 옛길은 흔적도 없이 사 라지고 없다. 그리고 재의 아래쪽으로 트인 길이 개재다. 개재 위에는 범혈이 있고, 재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이 문수산 뒤쪽의 영봉 청량산이다. 가협마을 방향에 있는 산이 축령산이고, 그 중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망대봉이다. 망대봉은 망을 보는 봉우 리라는 뜻이며, 풍수학적으로 범혈이라 한다. 양쪽의 범이 개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 거리는 형국이라 한다. 마을의 형국이 호랑이 형국이라면 호랑이의 먹이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개라 할 수 있다. 그 개의 형국을 의미하는 하는 것이 개재라는 재이므 로, 이는 마을의 허한 곳을 보호하는 비보풍수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비보적 인 성격의 개재라는 지명을 만들어 호랑이가 먹이를 두고 서로 싸우지 않게 순화하 려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재 바로 오른쪽 긴 산등성이가 ‘긴 잔등’이라 해서 진등이다. 진등이라는 말은 ‘길다-긴’의 전라도 지역 방언(질다-진)이다. 이기화 선생에 의하면 칠성동은 북두칠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칠성마을은 원래 지형 상 보검형인데, 칼자루에 북두칠성이 찍혀 있다고 해서 김해김씨들이 이곳을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마당바우를 거쳐 성내 칠성마을까지 뻗어간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농촌이 어디나 그렇듯이 이농현상으로 마을에 사람이 점점 줄어가고 있 다. 더욱이 30·40대의 청장년층은 찾아볼 수가 없고, 대부분이 70대를 넘은 고로 (古老)들로 그분들이 타계하고 나면 마을은 폐허가 될 가능성이 높다. 3)
1.6km 정도 내려가면 신기마을이 나온다. 신기는 칠성보다는 늦게 생겨났는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기라고 했다고 한다. 마을 위쪽에 있는 홍연 암이라는 절은 참으로 단아하다는 느낌을 준다. 신기계곡 아래쪽 개울가에는 외태비 자리가 있다. 외태비의 본말은 외탑이다. 이 탑은 문수사에서 세운 탑인데 ‘문수사 바깥에 있는 탑’이라서 외탑이다. 외탑은 풍수상 문수사와 신기마을의 허한 부분을 보충해주는 비보의 성격을 띤 탑이다. 신기마을의 취락은 산골짜기에 입지하여 전체 적으로 온화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을 뒤로는 문수산이 있고, 좌우로는 노령산 맥의 능선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주거지는 신기마을의 각 골에서 내려 오는 물들이 합수하여 좁은 골짜기를 따라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신기마을의 풍수 적인 형국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서로 지그재그로 만나기는 하지만 북서쪽의 차가운 기가 강하게 불어오는 곳이기 때문에 전면이 허한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즉, 전면의 득수의 조건은 수회(水回)와 수곡(水曲)하지만 북서쪽의 차가운 바람을 받아들이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합수가 되는 곳 앞 골짜기에 탑을 세워 마을과 사찰을 비보하였던 것이다. 허나 지금은 사라지고 탑을 세웠던 초석만 남아 있다. 이 곳에는 여섯 가구에 13명이 거주하고 있다. 4)
강당골
외태비에서 1km쯤 내려오다 보면 길 왼쪽에 가협이라는 마을이 있다. 가협은 ‘더할 가(加)’에 ‘골짜기 협(峽)’자이다. ‘가’자는 ‘석가모니 가’와 관련이 있다. ‘더할 가’자가 붙은 마을은 절과 관련된 마을이 많은데, 불당골이라는 산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가협이라는 마을의 본래 이름은 가섭이라 한다. 가섭이란 붓 다의 제자들 중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붓다가 득도할 때 두 가지 법을 얻었는 데 정법은 제자 가섭에게 주어 불교로 발전해왔고, 실법은 아들인 라훌라에게 주어 밀교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현재 여섯 가구, 12명이 살고 있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가섭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가협마을에서 개울을 건너면 서남쪽 산자락에 강당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은 예전에 글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어서 마을이름이 강당골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강당골은 현재 다섯 가구, 11명이 살고 있다. 5)은사마을 강당골을 벗어나서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제법 규모를 갖춘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이 은사마을이다. ‘은사’는 ‘숨을 은(隱)’자 ‘선비 사(士)’이다. 학문으로
은사공이라는 아호를 가진 안지 선생이 임진왜란(1592년) 때 앞산에 취남초 당이라는 초당을 짓고 피난을 와서 살았다. 선비가 피난을 와서 숨은 곳이라 해서 은사라 지었다는 유래가 있다. 전설은 아니고 실화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
4> 은사마을 전경
안택수 씨 문 앞에 가면,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이상 된 큰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안씨 족보에 ‘살필 성(省)’자 ‘쉴 휴(休)’자 ‘정자 정(亭)’자 ‘성 휴정(省休亭)’이라고 올라 있다. 안지 선생이 느티나무를 심어놓고 아버지 성묘를 다닐 때면 그 나무 밑에서 쉬었다 가곤 했다고 성휴정이라 했다 한다.
2. 은사리의 동쪽은 노령산맥이 방장산을 만들고 계속 뻗어 오다가 검곡치에 이르는 곳이며, 검곡치에서 다시 서쪽으로 뻗다가 동남쪽으로 크게 활 모양의 원을 그리며 발달하다가 중간에 문수산(621.6m)을 만들고 서우치에 이른다. 은사리는 바로 노령 산맥이 크게 활 모양의 반원을 그린 곳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은사리 수랑동의 북 쪽은 고창읍 화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서우치 아래의 계곡을 따라 고수면 두 평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은 노령산맥의 준령을 따라 전라남도 서삼면, 북일 면과 접하고 있다. 은사리의 전체적인 지형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전형적인 동고서저(東高 西低)로,
입구는 좁으나 배후가 넓은 전착후광(前窄後廣)의 양택지역이다. 또한 앞
은 낮고 뒤가 높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입지이다. 그러나 마을의 방향이 서향으로 겨울철의 일조시수와 북서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기온이 고수면의 다른 지역보다 상
낮다. 은사리는 서쪽을 제외하면 주변이 모두 산이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능선의 골짜 기를 따라 물이 흘러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수원을 확보할 수 있다. 은사리를 통과 하는 하천은 은사천이며, 은사천의 상류 수계는 수랑동, 문수사, 가협, 서우치 등의 골짜기에서 각각 내려오는 물인데, 은사리 칠성마을 앞에서 합수한다. 은사천은 동쪽 으로 흘러 조산저수지에 흘러간 뒤 고수천을 따라가다가 고창 도산에서 고창천과 합 류하여 인천강을 따라 곰소만으로 빠져 나간다. 1)
고개와 산
(1) 문수산(621.6m) : 사찰 연기 설화에 의하면, 자장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는 길 에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문수산이 당나라에서 수행하였던 청량산과 같은 느낌을 주어서, 문수산 석굴에서 7일 동안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땅 속에 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나오는 꿈을 꾸고, 꿈에서 나온 장소를 파보니 문수석상이 나왔다. 자장은 문수석상이 나온 곳에 문수전을 건립하고 절 이름을 문수사라 하였 다. 사찰 이름을 따라 산의 이름도 문수산이 되었다. 한편 전라남도 장성군에서는 축 령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축령산은 잘 가꾸어 놓은 편백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2) 들독재 : 들독재는 일명 횟기재라 불리며, 고갯마루를 넘으면 왼쪽이 고창 월 산이고, 오른쪽이 장성 금곡리 용화마을이다. 시멘트가 없을 때에 이곳에서 구한말 때까지 석회를 파내어 사용을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석회가 나와 횟기재라 불렀 으며, 고갯마루는 원래는 주막등이었다고 한다. (3) 개재(계재) : 수랑동의 서쪽에 있는 고개로 수랑골과 중거리골의 골짜기를 이 어주는 고개. 주변의 풍수형국이 호랑이 두 마리가 개를 놓고 싸우는 형국이라 한다. 그 개의 형국을 의미하는 하는 것이 개재라는 재다. (4) 서우치 : 고수면 은사리와 전라남도 황룡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다. (5) 장문치 : 고수면 은사리와 상평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이곳을 넘어 조금 아 래로 가서 서쪽으로 가면 고수면 면소재지로 가고, 서북쪽으로 가면 고창읍 화산리 를 통해 고창읍으로 들어가는 옛 길이 나온다. 2) 마을의 골과 하천 (1) 맹맥이골 : 수랑동의 북서쪽에 있는 골의 이름. (2) 안골 : 수랑동에서 들독재로 넘어가기 전에 있는 골. (3) 해넘골 : 안골에서 북동쪽으로 있는 골의 이름.
(4)
: 수랑동의 남서쪽에 있는 골의 이름.
(5) 풋쟁이골 : 칠성마을의 북동쪽에 있는 골의 이름. (6) 너덕골 : 칠성교 동북쪽에 있는 골의 이름. (7) 수랑골 : 신기마을부터 수랑동 입구까지의 골짜기 이름. (8) 신답골 : 신기마을 남동쪽으로 있는 골로 문수사 입구의 골짜기를 말함. (9) 중거리골 : 신기마을과 칠성마을 중간의 북쪽 골짜기. (10) 새막골: 칠성교 아래 동남쪽 방향의 골. (11) 외탑골 : 신기마을 입구에 있는 골로 원래는 탑이 있었다고 함. (12) 각고나골 : 강남마을의 남동쪽 전면에 있는 골짜기 (13) 은사천 : 은사리를 관통하는 하천 (14) 강당골 : 가협마을에서 개울을 건너면 서남쪽 산자락 (15) 불당골 :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여 불린 골 (16) 퉁전골 : 너덕골 아래 동남쪽 방향의 골. (17) 느락골 : 명당터로 유명한 날학골이라 하는 곳이 있는데 학이 비상하는 형국 혈로 그곳에 늘짝(널짝)이 9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느락골이라고도 한다는 설화 가 전해지고 있음. 3)
들과 기타
(1) 사위전들 : 은사와 강남 사이에 있는 들 (2) 앞들 : 은사마을의 바로 앞인 남쪽의 들 (3) 갓점 : 은사마을의 서쪽에 있는 골에 있는 지명(갓을 만들던 곳)
3.
인문환경
1) 인구 은사리의 최대인구는 1952년도를 기준으로 60여 호 이상 300여 명이었으나 1960년대부터 사람들이 객지로 나가기 시작하여 인구가 줄기 시작하여 2010년 9월 말 기준 28세대 47명이 거주하고 있다. 인구 성별로는 남자가 27명, 여자 20명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7명이 더 많다. 신기리의 최대인구는 1950년대를 기준으로 50여 호 이상 200여 명이었다.그러나 한국전쟁 때 빨치산이 접근 못하게 하려고 국군이 동네에 불을 질러 마을사람들이 객지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그 수는 현저하게 줄었다.
2010
9월 말 기준 27세대 48명이 거주하고 있다. 성별로는 남자 23명 여자 25
명이며 남자보다 여자가 2명 더 많다. <
1> 마을별 호구현황(2010. 9월 현재) 인구(명)
세 대 수
계
은사리
3
27
47 27 20
신기리
3
27
48 23 25
2)
남
비 고
연령별(명)
반 수
여 20세 미만
30세 미만
40세 미만
50세 미만
60세 미만
60세 이상
10
0
3
1
4
28
0
2
2
1
1
42
성씨 분포현황
은사리와 신기리에는 다양한 성씨들이 살고 있다. 은사리에는 죽산안씨, 진주정 씨, 함평노씨, 고흥류씨, 광산김씨들이 살고 있으며 신기리에는 광산이씨, 신안주씨, 연안이씨 등이 살고 있다. 3) 마을의 문화유적 (1) 당산나무 : 은사리의 당산은 상당히 오래된 벚나무였는데, 비바람에 넘어져 없어졌다. 하지만 1953년도까지 이 벚나무와 모정 앞에 팽나무, 안택수 씨 집 앞에 느티나무, 이렇게 세 군데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림 5> 은사마을 당산나무
<그림 6> 은사마을 보호수지정
<그림 7> 은사마을 당산나무2
가장 큰 당산이고 팽나무가 두 번째 작은 당산이고 벚나무가 세 번째 당산이었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낼 때에는 축을 쓰고 과실 사고 떡 하는데 마을에서 제일로 깨끗하고 정갈한 사람을을 선정해서 3일 동안은 화장실도 안 가게끔 청결하 게 하고, 목욕하고 해서 음식을 장만을 해서 정월 열나흗날 자시 넘어서 세 군데 다 지냈다고 한다. 제 지낼 때마다 황토를 퍼다가 당산 밑에다가 뿌리고, 왼새끼를 꼬은 데에 자른 백지를 끼워서 당산나무에 두르고 마을 양쪽에다가 금줄을 쳤다. 금줄은 궂은 사람이 그 밑으로 못 들어가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농악 있을 때는 굿도 쳤다
하는데, 김옥식 씨가 마을 일을 좌지우지 했다고 한다. 지금은 시대에 따라서 미 신이라고 지내지 말자고 해서 끝나버렸다고 하는데, 6·25지나고 3년 후부터는 지 내지 않았다고 한다. 신기리의 당산은 신기마을에 있던 몇 백 년 된 느티나무였는데, 7~8년 전에 고사 하고 30년 전에 당산나무 옆에 어린 느티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당산을 대신하 고 있다. 칠성마을의 당산은 3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당산제는 따로 지내고 않 고 굿만 쳤다고 한다.
<그림 8> 칠성마을 당산나무
(2) 공동샘 : 은사마을에는 공동샘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예전에는 물이 참 좋았 다고 한다. 지금도 네 가구가 샘을 사용한다고 한다. 지하수 파기 전에는 은사마을 모든 가구가 공동샘에서 물지게로 물을 져 날랐다고 한다.
<그림 9> 은사마을 공동샘
(3)
(永慕齋) : 강당마을 뒤에 있는, 창녕조씨 청간(淸澗) 조서(曺庶)의 현
손인 침(琛)의 재실.
<그림 10> 영모제 전경
<그림 11> 영모제 현판
(4) 화수헌(花樹軒) : 죽산안씨인 참판 안초(安招)의 증손인 참봉세경(世卿)의 재 실.
<그림 12> 화수헌 전경
<그림 13> 화수원 현판
(5)
(현모재) : 청주김씨의 재실.
<그림 14> 현모제 전경
<그림 15> 현모제 현판
(6)
(文山齋) : 죽산안씨 덕릉참봉(德陵參奉) 안세균(安世均)의 재실.
<그림 16> 문산제 전경
<그림 17> 문산제 현판
(7) 영산재(靈山齋) : 창녕조씨인 증형조참판(贈刑曹參判) 조한명(曺漢明)의 재실
<그림 18> 영산제 전경
<그림 19> 영산제 현판
(8)
지석묘1 : 고수면 은사리 218번지에 있다. 조산저수지를 지나 장성으
로 가는 면도 21호선을 따라가다 보면 선산정미소가 나오고 그 북동쪽에는 은사천 과 주변으로 계단식 논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지석묘 1기가 확인되었다. 지석 묘의 크기는 530×220×120㎝로 상석의 평면형태는 장방형, 단면형태는 장타원형 을 하고 있다. 지석은 5개가 확인되었으며 장축은 북동~남서 방향이다. 이외에도 원 위치를 이탈한, 상석들로 추정되는 것들이 주변 논두렁과 은사천변에 산재하고 있으 나 지석묘로 판단할 지석의 유무나 특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림 20> 은사마을 앞 논 고인돌
<그림 21> 가협마을 고인돌
<그림 22> 김태훈씨 집 마당 고인돌
(9)
지석묘군2 : 고수면 은사리 975번지에 있는데, 은사마을 남쪽으로 지
석묘 7기가 확인되었다. 남쪽으로는 은사천이 흐르고 주변은 야산이 둘러싸고 있다.
강당마을 앞 논두렁에 2기가, 이곳에서 남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야산 말단부(고흥류씨 묘 1기 분포) 평탄한 대지상에서 5기가 확인되었다. 그 중 대표적 인 지석묘의 크기는 360×300×134㎝, 상석의 평면과 단면은 장타원형이다. 장축 은 남북방향이며 판석을 이용한 51㎝ 높이의 석관형 지석이다. 현재 공사 현장과 가 까워서 유실될 가능성이 있다. (10) 은사리 지석묘군3 : 고수면 은사리 347-2번지에 있다. 조산저수지를 지나 장성으로 가는 면도 21호선을 따라가다 은사마을에서 문수사로 가는 도로를 따라 500mn정도 가면 도로하단부의 계단식 논에 천을 따라 4기의 지석묘가 일직선으로 나열되어 있다. 도로 양쪽으로 높은 야산이 지나며 은사천이 흐르고 있다. 그 중 대 표적인 지석묘의 크기는 620×360×120㎝로 상석의 평면과 단면형태는 장타원형이 며 장축은 동서방향이다. 지석은 두 개가 확인되는데 높이가 낮은 쪽에 받쳐놓은 것 으로 보인다. (11) 문수사 대웅전 : 고수면 은사리에 있는 문수사 대웅전은 1974년 9월27일에 지방유형문화재로 제51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정면 3칸에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되 어 있다. 고수면 면소재지에서 동쪽방면으로 약 6㎞, 남쪽에는 전남 장성군과 경계 를 이루는 문수산을 등지고 있다. 문수사는 문수산 중복(해발 320m)에 자리하고 있 으며 그 위 해발 420m의 골짜기에는 내원암이 자리하고 있는데 6·25동란으로 불 탄 자리에 재건한 것이다. 문수사는 만세루, 대웅전, 명부전, 문수전, 한산전 등 원형 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에는 주불인 석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한산전은 요 사로 사용되고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1653년에 성오대사와 상유비구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1764년에 신화, 쾌영 두 화상이 선운사로부터 이주해 와서 중창했으나 바로 퇴폐된 것을 1835년에 우홍주지가 세운 것이다. 신화화상은 문수사를 세우기 에 앞서 1740년에 먼저 선진암을 창건하고서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그림 23> 문수사 일주문
<그림 24> 문수사 대웅전
<그림 25> 문수사현판
<그림 26> 문수보살
(12)
문수전 : 문수사 문수전은 문수사의 동쪽에 자리 잡고서 서쪽을 바라
보고 있는데 1974년 9월 27일 지방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됐다. 규모는 정면 3 칸의 맞배지붕의 다포계건물이다. 이곳은 산의 이름이 문수산, 청량산으로 불교와 관 련이 깊은데, 특히 건물명에서 보듯 한산전, 문수전 등 문수보살과 인연이 깊어서 오 히려 문수전이 주전이 되는 셈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의 명승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건너가서 청량산에 들어가 삼칠기도를 거듭한 끝에 문수보살의 계를 깨달 았다고 한다. 그 뒤 돌아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산세, 수세가 모두 당국의 청량 산과 흡사하여 지금 대웅전 위에 있는 굴속 에 들어앉아 7일 기도를 하자 역시 문수 보살이 나타나서 이곳에 문수도장을 열었다는 것이다. 문수전 내에는 석조승상이 봉 안되어 있는데 이것은 문수보살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사상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상은 조각수법으로 보아 려말선초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13) 홍연암(紅蓮庵) : 1993년 윤석봉 주지가 창건하였다. 현재 스님 한 분이 있 다.
그림 27 홍연암
<그림 27> 홍연암
(14) 약사암 : 약사암은 20여 년 전에 지어진 암자로 칠성마을 안쪽에 있다. 약사 암은 법당과 요사채가 병립한 작은 암자로 두 분의 스님과 한 분의 보살이 살림을 꾸려나가는 작은 절이다.
<그림 28> 약사암
(15)
효자각 : 신기마을로 내려가다 보면 길가에 백원문이라는 작은 사당
이 있는데 이 사당은 김해김씨 효자각이라 한다. 고창향교의 전교를 지낸 김옥식 씨 가 모친상을 당하여 전교를 사퇴하고 시묘살이를 다하였는데, 아래의 이야기는 고인 이 된 김옥식 씨가 이기화 선생에게 증언한 내용이다. 김옥식 씨는 김봉수 씨와 같 은 문중이다. 원래 국가에서 지정하는 정려는 지방의 관아에서 세워준다. 1910년 봄 예조에 상신되어 승인을 받아 정려를 세우고자 했지만1910년 강제합병으로 정려를 세울 수가 없었다. 국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관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봉수는 돈이 없어서 도저히 정려를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장성 화룡장과 영산포장 등을 내왕하 며 모시와 삼베 등 포목을 팔아 돈을 벌자 정려를 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수주 재소에서 반대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많은 술을 사 주어 양해를 구하고 정려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하다. 이 효자각이 고창의 마지막 정려다. 이후는 일제치하이기 때문에 승인되지 않았다.
<그림 29> 백원문
(15) 자장율사비(慈藏律師碑,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산190-1) : 자장은
떠난 지 7년 만에 귀국, 우연히 고창의 문수사를 지나다가 산세와 수세가 중 국의 청량산과 너무도 흡사하여 기이하게 여겨 문수산 기슭의 암굴을 찾아 7일 기도 를 올렸다. 그때 문수보살이 땅 속에서 솟아나는 꿈을 꾸게 되어 그 곳을 파 보니 화강석의 장대한 문수보살 입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산190-1번지에 절을 세우고 문수사라 이름 하고, 취령산을 문수산 혹은 청량산으로 불렀다. 문수사에 자장율사의 비가 세워져 있다. (16) 은사리 단풍나무숲 : 문수사의 단풍은 2005년 9월 9일에 천연기념물 제463 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은 문수사 주위의 120,065㎡다. 단풍나무로는 우리나라에 서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등록된 곳이다. 이 단풍나무숲은, 문수산 입구에서부터 산 중턱에 자리한 문수사 입구까지의 진입도로 약 80m 좌우측 일대를 가리킨다. 이 숲 에 수령 100년에서 400년으로 추정되는 단풍나무 5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단 풍나무들은 직경 30~80㎝, 수고 10~15m 정도이며, 특히 흉고둘레 2m 이상, 2.96m에 이르는 단풍나무 노거수가 여러 그루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 곳 단풍 나무숲은 백제 의자왕 4년(644년)에 지은 문수사의 사찰림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단풍나무숲으로 천연기념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문수산 의 산세와 잘 어우러져 가을철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경관적인 가치 또한 뛰어 나다.
4. 1)
풍습과 설화 풍습
단오풍습은 없었고 정월대보름날 줄을 잡아당기는 풍속은 있었다. 줄다리기는 편 을 갈라서 치열하게 했다고 한다. 줄다리기를 한 다음 줄은 큰 당산에 감았다. 유두 풍습은 없고, 칠석풍습은 있었는데 요즘에는 칠석을 쇠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칠석날 에는 떡도 하고 절에 불공도 드리러 가고, 여름 명절이라 하여 동네에서 집집마다 막걸리도 내고 닭도 잡고 쉬기도 하였다는데, 20년 전부터 이런 풍습이 없어졌다. 농악은 1959년도에 아산면 운곡댐 부근 조씨 제실에 수호인으로 왔던 심일동, 심옥 동, 심금동 3형제가 몇 년 동안 농악을 억세게 했다고 한다. 심금동은 농악에 소질 이 없었고 심일동 씨는 장구를 아주 잘 쳤고 심옥동 씨는 상쇠였는데 가락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두레 할 때 주인네 집에 가서 닭 한 마리 잡아서 죽 쑤어 먹고 농 악도 쳐주면서 놀았다고 한다. 마을사람들 가운데 소질 있는 사람들과 함께 소고놀 이, 장구놀이 등 굿을 억세게 쳤다고 한다. 이 3형제는 72년도에 마을을 떠났다고
. 2)
밀고자 이야기
신기마을은 구한말과 일제시대 당시 독립의병들의 활동이 많았던 곳이다. 의병들 이 깊은 산중인 이곳을 오가며 전라남북도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은사리 신기마을 에 자주 의병들이 출몰하니 일제가 한국인 밀대(밀고자)를 세워 이들을 잡고자 자주 마을로 들어가 활동을 하게 하였다. 이 마을에 전하는 밀고자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 고창에서 일본의 밀고자(밀대)로 활동한 대표적인 사람이 은 모 씨와 이 모 씨다. 이들은 고수 신기마을에 몰래 숨어 있다가 의병들을 신고하였다. 이들은 일 본인들의 밀고자 선발기준에 부합되어 선발된 고창의 밀대였다. 실제로 이들이 고창 의 한국인 밀고자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이들 밑에 하부조직(수비대 보조원)의 밀대 를 고창의 지역별로 세웠다. 안 모 씨의 아버지는 작고하였는데, 그가 지금까지 살았다면 120살은 먹었을 것이 다. 그는 구한말인 1910년대에 큰 머슴을 따라 은사로 들어왔다. 신기의 안 모 씨의 아버지가 은 모 씨와 이 모 씨의 하부조직 밀대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밀대의 신고 로 집힌 사람이 의병장인 김공삼과 박도경(朴道京 )이다. 밀대들은 이들을 잡기 위 해 신기마을의 문수사에서 잠복하고 있었다. 위의 밀고자들은 고창의 아전출신의 집 안들이었다. 해방이 되자 안 모 씨는 은사리의 김봉수 씨에게 친일행적이 밝혀져 지푸라기(볏 짚) 주저리를 머리에 쓰고 묶여 있었다. 은사리의 사람들이 죽인다고 소리치고 겁을 주니 안 모 씨가 황산으로 달려와 죽산안씨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황산의 안씨들 과 같은 종친이라 문중사람들 20여 명이 달려가 그를 구해주었다고 한다. 이들에 의 해 잡힌 의병 김공삼은 현재 전북 고창군 아산면 주진리 산-16 아산면 공설묘지에 있으며, 1991년 애국장을 받았다. 김공삼은 1907년 8월 의병장 기삼연의 휘하 중 군장(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변산에서 일군기병과 교전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1910년 1월 27일 순국하였다. 박도경(박경래, 朴慶來)이 포사대장(砲士隊長)이고 기삼연이 의병장이었는데, 1908년 기삼연 대장이 피체된 후 박도경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포사
대장으로 박포대가 천보총(千步銃, 千步統)을 들고 뛰면 밭고랑 다섯 도랑을 건너뛰 었다고 한다. 3) 마을의 소리
소리를 많이 하는데 소리 멕이는 사람은 이억원 씨라고 굉장히 잘 했다. 상여소리, 지경다지기 소리 등을 특히 잘 했다. 이 일대에서는 아주 유명했다. 1900년도 생이므로 살아있으면, 120살 정도이겠고, 택호는 금곡양반이다. 타고난 소리꾼이었다.
5. 1)
(朴慶來, 1874.3.23~1910.2.8)
한말의사(韓末義士). 박경래의 본관은 밀양이고 도경(道京)은 아명이다. 고수면 은 사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조부 때 호서(충청도)에서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에 이거 하였다. 아버지 박준식과 어머니 조씨의 아들로 한미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평시 에 언변과 기개가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늘 말하기를 “장부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방 안에서 죽는다면 그 위인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 결되고 성재 기삼연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 하고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하였다. 당시 모양현의 무기고에 좋은 포가 많이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성재에게 알려 당시 문수사에 주둔하고 있던 의진을 이끌고 모양현을 내습하였다. 이때 박경래는 현내의 동지들과 내응하여 창고의 무기를 모두 꺼냈다. 적과의 접전에서 왜적 수명을 살상하였으나 의진의 희생은 34명이나 되었다. 훈련되 지 않은 의진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박경래는 그 뒤를 따라 무기를 거두어 감추어두었다가 군사가 모이는 날에 비밀히 기별하여 운반해 가게 하였다. 당시 박경래는 상재 의진에서 김익중, 서석구, 전수용, 김치곤, 박영건, 정원숙, 성 철수 등과 더불어 종사로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통령에 김용구, 참모에 김엽중, 김수 봉이 임명되었다. 박경래는 이들과 함께 전남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 를 올렸다. 특히 성재 의진은 무장, 법성포, 고창, 장성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 1907년 9월 영광에서는 포대로서 활약하였다. 그 후 몸소 천자포를 휴대하고 대원 들을 지휘하여 광주, 담양, 순창 등지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의병장 기 삼연이 광주에서 순국한 뒤 박경래는 격문을 돌리고 김공삼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규합하여 본진을 세우고 스스로는 포사장이 되고 김공삼은 선봉, 김일문을 포장으로 임명하고 의진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성재의 의진은 주요 의장들에 의하여 나뉘어 지휘되었기 때문에 의진의 의기가 다소 감소되는 듯하였다. 이에 김공삼과 의논하여 여러진을 합하여 강대한 세력을 구성할 계획을 세웠다. 제일 먼저 김영엽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합진하기를 청하였다. 이들은 광주를 습격하여 성재의 원수를 갚고자
. 그러던 중에 김영엽이 유종여 등에게 피살되었다. 박경래는 군사를 거느리고 손룡산으로 들어가 하수인 2인을 잡아서 죽일 수 있었으나 유종여는 놓쳐버렸다. 군 사를 이끌고 다시 장성으로 돌아와 군사를 교련하면서 그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 였다. 그동안 성재 의진에서 함께 활약하던 김준 등이 광주 무등산에서 순국하는 등 점차 형세가 어려워져 갔다. 1909년에 가서 그의 의진의 규모는 다소 확대된 듯하 였다. 1909년 2월에 부하 박이일이 체포된 후 공술한 바에 의하면 “부하는 110명 이고 선봉장 이도운, 중군장 손도연, 도십장 구연역과 좌·우익장 및 참모를 거느렸 다”라 한다. 무기는 총 139정, 칼 24본 등으로 의진 중에서 비교적 무력이 강력한 편에 속하 였다. 1909년에는 상당수의 의진이 해체되었으므로 형세가 외로워졌기 때문에 전해 산 의진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체로 남포, 부안등 해안가에 의지하여 활약하였다. 4월 20일에 부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부안 상서면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였다. 점차 적의 포위망이 좁혀져 의병활동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의진을 해 산하고 방장산 산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의 은신처마저 적에게 노출되자 “내가 여기에 있으니 마음대로 잡아가라” 하였다. 체포되어 구금된 중에도 적을 꾸짖는 말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옥중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그는 끝내 의연하여 의 로운 사람이라고 칭송받았다. 1909년 12월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 받아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어머니가 면회를 하자 마주보고는 “어머니 저는 살 아서 돌아가지 못합니다. 왜놈들에게 죽을 바에야 차라리 내 손으로 죽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독약을 넣어 보내주기를 청함으로 어머니 역시 눈짓으로 그렇 게 될 것으로 알고 있겠다 하고 후일 옷깃에 극약을 넣어 보내자 그날로 자결을 하 였다. 그 때가 1910년 2월 8일, 향년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의 의로운 죽음 을 기리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대구의 유생들이 돈을 추렴하여 초상을 치루었 다. 그리고 마침 약령시가 열렸으므로 많은 북도의 상인들이 모였는데 이들이 수백 냥을 모아 고향으로 반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영남의 선비들이 제전을 올렸다. 그의 어머니는 미천한 신분으로 사대부의 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휘관이 당시 고창향교 전교로 있을 때의 일이다. 시대의 변 천에 따라 묘소 주변은 도시개발 지역으로 변질되고, 또 사유지여서 장기적으로 그 대로 둘 수 없음을 노심초사하던 중 2009년 2월 26일 고창군청 정병도 담당자가 유족에게 “그 유택을 현충원으로 옮겨야 한다”라고 끈기 있게 설득, 권고에 권고 를 거듭한 결과 실현이 되어 현충원으로 옮겨졌고 그 추모비는 고창읍 새마을 공원
옮겨 세울 계획이다. 현재 의병 박도경 비는 단군성전에 세워져 있다.
<그림 30> 단군성전 앞에 있는 박도경 추모비
2)
(1866년~1910년)
고수면 은사 사람으로, 이명은 봉규이다. 정읍에서 출생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은 사리에 거주한 것만은 사실이다. 김공삼은 박도경의 참모 역할을 하였다. 박도경은 덩치가 커 장군처럼 거구였지만 못 배워서 글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김공삼 씨가 좀 배워가지고 박도경을 보좌 했다고 한다. 1907년 음력 8월 말 의병장 기삼연의 휘하에서 중군장으로 있으면서 전북 고창, 무장, 부안과 전남의 담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동년 음력 9월경 고창주재소를 습 격하여 읍내에서 교전하였으며 또 동년 11월에는 추월산에서 일군 수비대와 접전하 였다. 그 후 1908년 음력 1월 기삼연이 피체된 후에는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부하 20~200여 명을 지휘하여 동년 음력 2월 25일경 전남 장성군 송치산에서 일군 4명 을 저격하여 사살하고 동년 3월 6일에는 장성군 월반 장터에서 접전을 벌여 일인 순사 3명과 한인순사 3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5월 18일 전북 무장군에서 일군 기병 7명을 사살하는 등의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09년 2월 25일에는 고창 군과 부안군의 접경인 변산에서 일본군의 기병과 교전하였고 동년 6월 20일에는 고 창군에서 부하 의병을 해산시키고 재기하려 계획하던 중 동년 9월 20일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 후 동년 12월 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내란죄로 교수형을 언도 받아 공소하였으나 1910년 1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교수, 순 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 다. 김공삼 씨 묘가 은사리 앞산에 있었는데 손이 없다고 묘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1992년도에 이돈우 군의회 의장이 어머니 묘와 함께 아산에 있는 유공자 묘지 에 옮겼다고 한다.
6.
시설과 산업
1) 은사리에서는 1972년부터 새마을운동으로 마을 가꾸기 바람을 타고 정부에서 융 자받아 초가 지붕개량사업, 마을 안길 조성, 울력으로 농로를 만들기 등을 시작, 10 년 동안 지속되었다. 안택수 씨는 1977년도에 새마을지도자로 선출되어 새마을사업 을 주도하였다. 울력으로 농로를 내는 데 16일이 걸렸다고 한다. 2) 마을회관과 모정 은사리에 정자는 은사마을에만 있다. 1946년도에 ‘은사 시정’이라 지었다가 2002년에 재건하고 현판을 하면서 고운 안병홍 씨가 ‘은선정’이라 지었다. 마을 회관은 은사마을에 있다.
<그림 31> 신기리 마을회관
<그림 32> 은사모정
<그림 33> 은선정 현판
<그림 34> 은사마을 모정 건립 기록현판
마을회관은 수랑동, 칠성, 신기 세 마을이 함께 쓰고 있고, 신기마을에는 정자가 있다.
<그림 35> 은사마을 회관
<그림 36> 은사마을회관건립추진위원 및 후원금 명단
3) : 은사리와 신기리는 임야가 대부분이고 전답의 규모가 작다. 벼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그 규모는 작다. 밭에서는 고추, 땅콩, 콩, 팥 등을 짓는 다. 최근에는 복분자 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 은사리의 축산농가는 넷이 있으며 과수 농가는 셋이 있는데, 밤나무 등을 키운다. 신기리는 소농규모의 논농사와 밭농사가 주를 이루며 과수농가 1가구, 축산농가는 없다. <
2> 마을별 생업현황(2010년 9월 현재)
주 소득원(가구)
비고
계
논농사
밭농사
과수
축산
기타
은사리
24
3
9
3
4
5
신기리
17
8
8
1
0
4) 총회는 마을총회와 노인회총회가 있다. 마을총회는 매년 12월 말에 한 번씩 한다. 예전에는 필요에 의해 2~3회 했었다. 노인회 정기총회는 매년 1월 초에 한 번 한다. 노인회 운영은 1년에 군으로부터 180만원을 받아서 운영한다. 신기마을 의 총회는 연말에 하며 때때로 필요에 의해 회의를 소집하기도 한다. 5) 마을행사 (1)세시풍속 예전에는 단오, 유두, 칠석 등이 풍속으로 있었으나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다. 대 신에 따로 날을 받아서 회관이나 모정에 모여 음식을 장만해서 놀고먹으면서 농사일 을 하루 쉰다. 2003년도에 <6시내고향>에 가협마을의 양봉과 은사마을의 도라지가 소개되었다. 공기 좋고 산도 좋고, 조산저수지를 배경으로 살기 좋은 마을로 소개된 걸 자랑스럽 게 여기고 있었다. 전국에서 문의전화가 많이 왔으며 직접 마을로 찾아오는 사람들 도 있었다고 한다. 2006년도에 향우회에서 주최하여 마을잔치를 하였다. (2) 마을단체관광 은사리는 이장과 노인회장이 주최해서 마을총회를 거쳐 단체관광을 한다. 2년 전 에 태안반도로 관광을 다녀왔다. 신기리는 2~3년에 한 번씩 관광을 한다.
<그림 37> 2006년 은사마을 향우회 주최 마을 잔치후 단체사진
<그림 38> 안택수
<그림 39> 주일수
주신 분 (1939년생, 남, 노인회장)
안우선(1953년생, 남, 전 마을이장) 노희봉(1954년생, 남, 현 마을이장) 주일수(1939년생, 남, 신기리 마을이장) 이기화(1935년생, 남, 전 문화원장) 신휘관(1938년생, 남, 전 고창향교 전교)
참고문헌 『고창군지』고창군, 2009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문화역사지리』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제15권 제1호,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고창군편, 원광대학교.백제문화연구소, 2005 『모양성의 얼』 고창학술문화연구회, 2009 『고창충의사』고창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2001 『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 민음사, 1993 『호남의 인물지』 김봉문 http://gochang.grandculture.net http://academ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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