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투사를 길러낸 마을(성내면 덕산리)

Page 1

길러낸 마을 -

덕산리

1. 덕산리 백련마을 1) 북쪽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가다가 흥덕에서 동북방향으로 국도 22 호선으로 바꾸어 타고 약 4.5㎞쯤 가다보면 성내면 소재지에 당도한다. 성내면 소재 지에서 서북방향으로 지방도 747호선을 따라 3.5㎞쯤 올라가면 덕산리(徳山里) 백 련(白蓮)마을에 당도하게 된다. 이 마을은 성내면 16개소의 법정리 중 하나인 덕산리에 속하는 행정분리로, 자연 부락으로 감동(甘洞)마을과 도덕(道徳)마을이 있다. 1970년대만 하여도 35가구에 110여 명(남48/여62)이 살았는데, 지금은 젊은이들이 다들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13가구에 25명(남12/여13)만이 살고 있다.

<

1> 연꽃이 새하얗게 피어나던 백련마을

옛날에는 마을 앞 연못에 흰연꽃(白蓮)이 많이 피어 있어서 백련마을이라고 불렸 다고 하는데, 지금은 연못이 있었던 자리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백련 또한 구경할 길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라 옛날에 있었다던 마을 공동우물터와 당산나무가 서있던 자리도 사라져 버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

2)

2> 백련마을 마을 전경

자연환경 서북방향 떵미등이라 부르는 언덕 아래에 위치한 덕산리 백련마을은, 도덕

리 뒷산에 있는 백암산 자락이 감동마을을 거쳐 내려와 마을 주위를 감싸고 있는데, 이 산을 마을 뒷산 혹은 고암산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비산비야지대로 1970년대에 야산을 개발하여 지금은 조경수를 재배하 고 밭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높은 산, 계곡, 시내도 없다. 농사와 축산이 주업인 이 마을에는 논농사를 위하여 위동제라는 작은 저수지가 있고, 그리 넓지 않은 들판이 지만 이 들판을 백련들이라고 부른다.

3) 마을의 인문환경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이오열(81세) 옹의 증언에 의 하면, 옛날 할아버지들께서 들려주시던 이야기로 백련마을에는 문경송씨(聞慶宋氏), 광산김씨(光山金氏), 전주이씨(全州李氏), 문화유씨(文化柳氏)가 터를 이루어 거주해 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문경 송경률(宋京律) 선생과 광산 김 선생(성명미상)은 전라도, 경상도는 물론 한양에까지 알려진 유명하신 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으며, 그 분들이 운영하던 서당은 각지에서 글을 배우기 위해 찾아드는 서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서당마저도 없어지고 송 선생이 운영하였다는 서당자리는 그의 손자가 살고 있는데, 초가지붕을 벗기고 기와와 슬레이트로 지붕을 개량하여 살고 있어 옛날 서당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

3> 송경률 선생의 옛날 서당

<사진 4> 증언하는 이오열 님 모습

이 마을의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모정은, 1900년경에 지어져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여름 한철에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 봄가을에는 산나물과 고 추를 말리는 건조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모정 인근에는 듸엄나무라고 부르 는 고목이 있어, 여름 한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준다. 그 옆에 20여 평 되는 마을 회관은 1996년 3월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었는데, 2005년 1월 마을총회에서 경로 당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여 지금은 백련마을 경로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4)

전통과 생활환경

본래 이 마을은 논 800여 두락(마지기)과 밭 300여 두락으로, 농사를 생업으로 살아왔는데, 지금은 농사는 부업이 되고 13가구 중에 4집은 한우를 110여 두나 기 르고 있으며 또 한 집은 관상수 재배로 농사보다 몇 배나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고 이재우 백련마을 이장님이 귀띔해 준다. 옛날에는 칠월 칠석날이 되면,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농 악을 치고 춤과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농악을 하시든 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없어서, 칠석날 음식을 준비하여 경로당에 모여 앉 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하루를 보내고 있으며, 농사가 끝난 겨울철 농한기에는 음 식을 준비하여 단체관광을 하는 것이 연중행사가 되어버렸다. 마을총회는 1년에 1번, 12월말이나 1월초에 진행하고, 2개월에 한 번씩 마을회의 를 개최하고 있다. 마을조직으로는 노인회(회장 이오열), 부녀회(회장 한경민), 청년


(회장 이충종) 등이 있고, 회원은 대략 20명 정도이다.

2.

감동마을

1) 백련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200여m쯤 거리에 있는 이 마을은, 백련마을에 속하는 자 연부락으로 옛날에는 이 마을의 샘물이 달다고 하여 단 샘물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감 동(甘洞)골이라고 불러오다가, 강동으로도 불리웠으며 지금은 감동마을이라고 불린다.

<

5> 감동마을 전경

2) 마을의 자연환경 성내면 서북쪽 백련마을 뒤쪽 고암산 아래에 위치한 감동마을은, 도덕리 뒷산에 있는 백암산 자락이 도덕마을을 지나 마을 뒤에 떵미등 언덕을 이루고, 떵미등 맨 위쪽에 성내면 보건진료소가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비산비야지대로 높은 산, 계곡, 시내도 없다. 농사가 주업인 이 마을에 는 논농사를 위하여 마을 앞에 생근제라는 작은 저수지가 있고, 그리 넓지 않은 들 판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들판을 생근제 밑들이라고 부른다.

3) 마을의 인문환경 이 마을은 백련마을에 속하는 자연부락으로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은 백련마을 시설


사용하고, 마을행사나 단체관광 등 모든 단체행사를 백련마을과 함께하고 있다.

4)

전통과 생활환경

전주이씨가 거주하고 있는 이 마을 역시, 새마을사업 때 지붕개량을 해 옛날 모습 은 온데간데 없고,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 8가구에 주민 18명(남자 8명, 여자10명) 이 농사를 생업으로 살고 있다. 지금은 마을 앞 논밭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수박 농사로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백련마을에 속하는 자연부락이라, 마을행사 중 칠석날은 마을 전체가 백련마을에 가서 잔치를 같이하며, 농한기의 관광, 마을총회, 다른 행사 등도 백련마 을과 함께하고 있다.

<

3.

6> 감로수가 철철 넘치던 감동마을

도덕마을

1) 개관 백련마을에서 동북쪽으로 1㎞쯤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설 기하고 입주하면서 마을 이름을 도덕(道徳)마을이라고 칭(称)하였다고 한다.


<

2)

7> 항일독립투사를 길러낸 도덕마을 전경

자연환경 서북쪽 감동마을 맞은편에 위치한 이 마을은, 마을 뒤쪽에 백갑산이라는

낮은 산이 있고, 마을 앞에는 생근제라는 저수지가 있으며, 마을에서 서쪽으로 100m 쯤 떨어진 곳에 흥덕면 하남리에서 부안군 줄포만으로 흐르는 동림천이 흐른다. 농 사가 주업인 이 마을 앞에는 작은 들판인 생근들이 있고, 이 들판에서 7가구 11명이 먹을거리 농사를 짓고 있다.

3) 마을의 인문환경 근촌 백관수(芹村 白寛洙)가 5살 때에 이 마을로 이주하여 성장했다는 이 마을도,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현재는 7가구에 11명(남자 4명, 여자 7명)만이 남아 서 농사를 생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이 마을 한가운데에는 근촌 백관수 고택이 전라북도 기념물 제90호(97년 7 월 18일)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이 건물은 안채와 문간채, 곳간채 등으 로 구성되어 있으며 새마을사업 때 시멘트 기와로 지붕이 개량된 것을 문화재 지정 이후인 2002년도에 고증을 거쳐 다시 초가지붕으로 개량하였다.


<

8> 백관수 고택 전경

<사진 9> 백관수 고택 안채

입구에는 백관수 선생 고택임을 알리는 문화재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집은 항일 운동의 선구자인 백관수가 태어난 곳이다. 백관 수는 조선말의 유학자 전우(田愚, 1841~1922)에게 한학을 배운 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던 중 조선청년독립단을 구성하고 2・8독립선언문을 발표하다가 일본 경찰에 채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민 주당을 창당하고 제헌국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헌법을 제정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호는 근촌(芹村)이다.”

<사진 10> 백관수 고택 안내판


<

11> 구 덕산사 사진

이 마을 동북쪽에는 독립투사인 갑운 백인수(甲雲 白麟洙)선생의 위패를 모 시던 사우(祠宇)가 있는데, 6・25전쟁으로 설향(設享)을 못하다가 1995년에 흥덕면 유림들이 뜻을 모아 국가보조금과 자비 등을 마련하여 마을 입구 쪽에 사당을 다시 건립하였다. 이곳에 갑운 선생과 구파 백정기 선생, 근촌 백관수 선생 등 세 분 항일 독립투사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9월 15일에 향사(亨祀)를 하여 오던 중, 2003 년 5월 30일에 덕산사로 가고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사진 12> 백관수 사당 덕산사 사우


<

13> 근촌 백관수 사당인 덕산사

<사진 14> 덕산사 안내판

선생의 자(字)는 사순(泗淳), 호(号)는 갑운(甲雲)이며 철종7년(1856년)에 이 마을에서 출생하여 벼슬은 중추원의관(中枢院議官)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철회(撤回)의 소(疏)를 올렸으나 받아들 여지지 않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경술국치(庚戌国恥)의 소식을 듣고 단식 끝에 순절하였다. 운명할 당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고 무지개가 3일간이나 옥상을 덮었다고 한다. 광복 후 건국훈장 애족장(建国勳章 愛族章)이 추서되었다. 백관수 선생의 호(号)는 근촌(芹村)이며 고종 26년(1889년)에 고창군 성내면 덕 산리 생근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김성수, 송진우와 더불


일본에 건너가 명치대학 법과에 입학하고 1919년 2월 동경에서 조선청년독립단 (朝鮮青年独立団)을 조직하여 2・8독립선언문을 선포하다가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927년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회 주최 제2차 태평양회의와 1929년 교 토(京都)에서 열린 제3차 태평양회의에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동아일보 사장 재임 시 독립사상(独立思想)을 고취하다가 강압(強圧)으로 폐간(廃刊)되고 구금(拘禁)당 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韓国民主党)을 창당하고 초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입법의 원, 제헌국회의원, 법사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백정기 선생의 자는 용선(溶善), 호는 구파(鴎波)이며 건양(建陽) 1년(1896년) 부 안군 동진면 하장리에서 태어나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에서 성장하였다. 경술국치 후 척왜(斥倭)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염출하다가 누설(漏泄)되어 봉 천(奉天)으로 피신한 후 국내로 잠입 활동하다가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1922년에 동경으로 건너가 일황(日皇)암살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 시 천진(天津)으로 들어가 일군수송선(日軍輸送船)을 폭파하고, 일군병영(日軍兵営) 및 일총영사관(日総領事館)에 투탄(投弾)하고 주중(駐中) 일대사(日大使)를 살해하 려다가 체포되어 나가사끼 형무소(長崎務所)에서 사형을 언도(言渡)받고 순국하였 다. 1963년 건국훈장독립장(建国勳章独立章)이 추서되었다.

4)

생활환경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에는 1987년에 건립하였다는 모정이 있고, 여름 한철 이 모 정에서 농사에 지친 몸을 쉬고, 농사일이 없는 날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이웃끼리 나 누어 먹고 덕담을 주고받는 마을의 쉼터라고 한다.


<

15> 마을모정과 당산나무

마을은 백련마을에 속하는 자연부락으로, 마을행사 중 칠석날은 마을 전체가 백련마을에 가서 잔치를 같이하며, 농한기의 관광, 마을총회, 다른 행사 등도 백련마 을과 함께하고 있다. 마을총회도 1년에 1번 백련마을과 함께하고, 노인회나 부녀회 같은 조직도 이 마을에는 사람이 11명밖에 살지 않아 역시 백련마을과 함께하고 있다.

4.

생근마을

1) 백련마을에서 북쪽으로 300여m쯤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1980년까지만 해도 57 가구에 남녀 100여 명이 농사를 생업으로 삼고 살았는데, 지금은 24가구 31명(남자 7명, 여자 24명)만이 남아 논 230여 두락과 밭 250여 두락을 경작하고 있다. 그나 마 남자는 7명에 불과하여 주로 60살이 넘은 여자들이 힘든 농사일을 하며 살고 있 으며 그중에 3가구는 한우 150여 두를 길러 농가소득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한다.


<

2)

16> 당산나무의 전설이 전해오는 생근마을

자연환경 서북쪽에 위치한 덕산리 생근마을은 도덕리 뒷산에 있는 백암산 자락이 등

선을 타고 내려와 떵미등의 잔등이 마을 앞에 길게 늘어져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등성이를 앞산이라고 부른다. 서쪽으로는 흥덕면 하남리에서 부안군 줄포만으로 흐르는 동림천이 지나고 있다. 이 마을은 비산비야지대로 농사와 축산이 주업이며, 논농사를 위하여 마을 동쪽에 생근제라는 저수지가 있고, 줄포만 쪽으로 확 트인 드 넓은 들판을 생근들이라고 부른다.

<사진 17> 생근마을 전경

3) 마을의 인문환경 이 마을은 항일독립투사와 제헌국회의원이던 근촌 백관수가 태어난 마을로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백관수가 이곳에서 태어나 5세가 되던 해에 인근 도덕마을로


갔다고 하며 지금은 이재옥 씨가 살고 있으며 3년 전 쯤에 초가를 강판 기와 로 지붕을 개량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

18> 근촌 백관수 생가

이 마을에는 7~8년 전까지만 해도 정월 대보름날 당산제, 칠석날에는 동네 어른 들이 농악을 치고 노래를 하며 음식을 장만하여 나누어 먹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이런 풍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4)

전통과 생활환경

이 마을 역시 새마을사업의 여파로 옛날의 흔적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으나 마을 서북편에 수령 500여 년은 됨직한 당산나무 두 그루가 남아 있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당산(堂山)은 신역(神域)에 설치한 마을의 수호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기에 제 사를 올려 부락의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과 복을 비는 동제신앙유적(洞祭信仰遺跡)이다.


<

19> 당산나무

당산은 이정표와 경계표시 몫까지 하고 있었으며 성역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마한시대에도 당산이 있어 죄지은 자가 이곳에 들어가면 잡지 못했다는 기록이나, 선사주거지에서 출토된 청동제기에 당산과 솟대의 그림이 있는 것은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니까 당산의 역사는 자그마치 2천 5백 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20> 당산나무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정월달에 겨울 한철 농한기에 쉬었던 이완된 생활을 걷어 젖히고 이제 입춘(立春)이 머지않았으니 한해의 농사를 시작한다는 결심의 뜻으로, 또 한편으로는 마을의 질병과 재앙이 없으라고, 그리고 의병으로 전사한 남정네의 영혼을 위로하고 자손을 점지해 달라는 염원까지도 곁들여 제를 올렸다. 그리고 줄


후 당산에 줄을 감아올려 그날의 축제와 기원을 일년 내내 기억하였다. 민속(民俗)이란, 끊임없이 계승된다는 점에 그 힘과 뜻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러나 민속의 또 다른 특징은 변한다는 데 있다. 전승되지만 그대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변하면서 전승된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토템(Totem)의 형식으로서 당산은 고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불교에, 나중에는 유교에 자리 를 양보하고 한낱 민속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어느 때 이 당산나무가 심어 졌는지 기록은 찾을 길이 없지만, 500여 년의 세월을 지켜온 이 고목은 우리나라 향 촌사회에 뿌리 깊게 내려오는 동제복합문화(洞祭複合文化)의 한 이정표가 되는 기념 비적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마을행사 중 칠석날에는 마을 전체가 잔치를 하며 쉬는 날이고, 겨울철 농한기에 는 마을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단체관광을 가기도 한다. 마을총회는 1년에 한번 연말 이나 연초에 하고 있으며, 마을의 조직으로는 생근노인회(회장 이정범)와 생근부녀 회(회장 조현주) 등이 있고, 회원은 대략 30명 정도이다.


○ 도움 주신 분 •

(81세)

• 백남수(59세) • 유상기(64세)

○ 참고문헌 •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 牟陽城의 얼 고창군, 1982 •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 고창삼향지(高敞三郷誌) • 흥성지(興城誌) • 고창원우지(高敞院宇誌) • 근촌 백관수(芹村 白寛洙)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