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와 읍성이 있는 마을 성내리 성내·내동 채주
1.
위치와 유래
1) 마을 위치 무장면 성내리는 지방도 796호를 이용, 고창읍에서 서남쪽으로 아산면을 거쳐 공 음면·법성포 방향으로 약 14Km를, 도로 표지판에 표기된 ‘무장현 관아와 읍성’ 을 보면서 가노라면 무장면 면소재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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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방도에 세워진 이정표
면소재지는 무장면사무소와 무장파출소 등이 있는 무장면 행정의 중심지이고 무장 현 관아와 읍성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사진 2> 무장면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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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장파출소
5일 시장이(매월 5와 0이 들어 있는 날: 한 달에 여섯 번) 서고 영선중·고 등학교, 무장초등학교, 무장우체국, 선운산농협(옛 무장농협) 등이 있는 교육과 경제, 산업활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2)
유래
성내리는 1417년경 무장리와 함께 형성되었다. 당초에는 산성리(山城里), 니동리 (泥洞里), 통정리(桶井里)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면사무소를 지나 버스정류장 고개를 ‘사창재’, 성밑 마을은 ‘성밑에’, 동쪽마을은 ‘동밖에’, 동네 너머에 있는 마 을은 ‘월촌’, 무장읍성 안에 있는 마을은 ‘성안에’ 마을 등으로 불렀다(고창의 마을 유래 - 고창문화원 2003).
2. 마을의 자연환경 무장면 성내리는 무장현의 변천사와 함께 자연환경 또한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고을이라 할 수 있다. 무장면은 삼한시대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고을 터이다. 백제시대에 무장현은 ‘송 미지현(松彌知縣)’이라 하였고(『삼국지리』·『고려사지리』·『동국여지승람』), 그 후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물리치고(696년) 경덕왕 16년(757년)에 무송현과 장사현이라는 한문식 이름으로 고쳤는데, 이 때부터 무령군(武靈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성종 14년(955년)에 전국을 10개 도로 나누고, 예종 원 년(1106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전라주도(全羅州道)라 하여 전주목(全州牧)과 나주목(羅州牧)이 형성되어 나주목의 관할 하에 있다가, 조선태종 17년(1417년)에 두 고을을 병합하여 무장현(茂長懸)이라 하고 진(鎭)을 설치하여 병마사(兵馬使)를 첨절제사(僉節制使)로 고치고 그 뒤 현감(縣監)을 두었다.
전라도는 조선 중엽에 좌도와 우도로 갈라져 인조 원년(1623년)에 전남도라 했다가 다시 전남우도로 또 광남도라 했다가 전남우도라 하였다. 또한 영조 4년 (1728년)에는 전광도로, 영조 13년(1737년)에 전라도로 불렸다. 그 뒤 고종 32년(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지방관제가 바뀌어, 조 선건국 후 태종 13년(1413년) 이래 482년 동안 내려오던 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 331군이 되어 군수가 배치되었다. 다음 해인 고종 33년(1896년) 8월 6일 칙령 제36호로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전국 을 13도로 나누어 비로소 전라북도에 속한 무장군이 되고, 군수가 행정을 맡았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무장군은 14개 면으로 나뉘었던 것으로 돼 있으나 이후 16개 면으로 나뉘었다. 1910년 일본의 조선총독부 압제 밑에서 전라북도 무장군으로 지내오다가 1941년 3월 1일에 부군폐합(府郡廢合)으로 고창군에 합하게 되어 일동면(一東面)과 이동면 (二東面)을 묶어 무장면이 되었다.
3.
인문환경
1)
고적(古蹟) 유지(遺址)
성내리 149-1번지 일대에는 1417년에 축성한 무장읍성(사적346호)이 있고, 무 장현 관아와 읍성에는 원님이 집무하던 동헌[취백당(翠白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6호]과 무장고을의 궐패(闕牌)를 모셔둔 곳으로 왕명을 받고 출장 나오는 관리 들의 숙소였던 객사[송사지관(松沙之館),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그리고 무 장읍성의 남문 진무루(鎭茂樓)와 동문인 읍취루( 翠樓)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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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장현 관아와 읍성종합정비 계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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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헌
<사진 6> 객사
<사진 7> 진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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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읍취루-관광해설사의 활동모습
태종 17년(1417년) 무송현과 장사현을 합하여 무장진으로 삼고 그 해 2월부터 4개월여에 걸쳐 축소한 석성으로 장방형 평지성이다. 성의 둘레는 1,443m, 넓이는 144.948㎡이다(고창읍성 둘레 1,684m 넓이 165.858㎡에 비하면 약간 작은 규모). 객사 선조 14년(1581년)에 건립되었으며 궐패를 모셔두고 현의 수령이 매달 삭 망에 임금에게 예를 갖추는 정청과, 왕명으로 지방에 내려오는 벼슬아치들의 숙소로 쓰이는 좌우 익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헌 조선시대 관아건물의 대표적 양식인 동헌은 현감이 집무하던 곳이다. 명종20 년(1565년)에 세워진 목조건물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진무루 무장읍성의 남문 읍취루 무장객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건축물로서, 당시 현감 최검(崔儉)이 개 축하였으나 이후 철폐되었다가 2010년 5월 복원되어 웅장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시 가지를 바라다보고 있다. 읍성 내 비석군 객사 앞에 세워진 비석군(사진9)에는 수령의 불망비(不忘碑) 6기, 선정비(善政碑) 6기, 청백비(淸白碑) 1기, 저수지 축조에 관한 기공비(紀功碑) 1기 등이 있어 지금까지 당시 수령의 선정 및 공덕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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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9> 객사 앞에 세워진 송덕·공덕비
면과 관광지를 소개하는 해설사 (옛 무장현)은 아산면, 성송면, 대산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과 인접하면
서 이들 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의 요지라 하겠다. 그리고 주민들은 현감을 모시고 지냈던 고을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무장현 관아 와 읍성의 문화적 가치와 유산을 알려주는 해설사(사진8, 읍취루 밑에서 한충호 관 광 해설사의 모습)가 상근하면서 찾는 이들에게 편익을 제공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해마다 관광객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또 관광해설사의 구수한 입담으로, 아산면에 위 치한 도립공원 선운산과 선운사, 성송면과 대산면의 광활한 야산개발지에서 생산되 는 땅콩, 수박 등 농특산물, 공음면의 청보리밭 축제, 상하면의 구시포해수욕장, 해리 면의 동호해수욕장에 대한 해박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무장현의 또 하나의 자랑거 리라 할 수 있다.
4.
이야기
1) 사두봉의 수난 설화 무장면 성내리 무장읍성이 자리 잡고 있는 북쪽 성벽으로부터 중앙부위를 향해 남 쪽으로 쭉 뻗어오다 우뚝 멈춘 작은 구릉이 있는데 이곳을 사두봉(蛇頭峰)이라 일컫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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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두봉 옛 터
<사진 11> 사두봉의 고목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그 우뚝 솟은 봉우리 좌우 양측에 뱀의 눈과 같 이 파란 물이 넘치는 용소(연못)가 있었는데, 오른쪽 눈은 지금 옛 무장초등학교 운 동장 중앙이고 왼쪽 눈은 면사무소 동쪽 아래 우물이 있는 옆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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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용소(연못)
뱀머리의 북쪽으로 크고 작은 성황당 능선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며 둥글게 옹위하고 있는 것은 마치 뱀이 몸을 둥글게 도사리고 머리를 높이 치켜든 듯한 지형 이다. 옛날부터 무장 고을 터를 반사(도사리고 있는 뱀)형국이라 하였는데, 조석으로 양 쪽 용소에서 안개(뱀이 내뿜는 입김)가 솟아나와 고을 안을 뒤덮으면 보이는 경치도 좋거니와 이 기운으로 고을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게 되고 또한 많은 인걸이 배출된 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무장의 현세가 퍽 드셌다고 한다. 그리고 동·서방으로는 학체(鶴 )를 이룬 한재산이 있고 이 큰 뱀의 지세가 머리 를 높이 쳐들어 적을 방어했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남산(현 영선중학교 자리)이 개 구리의 형국을 이루고 있어 뱀이 가까이에 먹이를 둔 셈이어서 항상 기근이 없이 날 로 번창해왔다고 한다. 옛날부터 ‘고창은 성 자랑’, ‘흥덕은 양반 자랑’, ‘무장은 드센 아전 자랑’ 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지만 무장에는 지방세가 강하여 항상 역량이 풍부한 현감들 이 부임해 왔다. 만약 현감이 사람은 좋으나 역량이 부족하면 얼마 가지 못해서 교 체되곤 하였다. 이와 같이 바닥이 까다롭고 배타성이 강하다 보니 시장(市場)이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6Km나 떨어져 있는 만장머리장(지금의 해리면 안산 리 이상동)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이 장터가 사두봉을 마주 보는 곳에 있었 다. 장날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므로 뱀이 이곳을 넘보고 공격 하는 사건이 생겼다고 한다. 장날이면 젊은 청년이 한 사람씩 반드시 희생되곤 했다. 이 고을의 역대 현감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기에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주를 받으러 온 스님이 사두봉을 깎아내려 우뚝한 뱀의 머리를 수그려야 한다는 묘책을 알려주었다 한다. 현감은 이제야 무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으로 고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사두봉에서 만장 머리장이 안 보이게 사두봉을 깎아내리고 뱀의 두 눈인 용소를 메우도록 하였다. 마 을사람들은 끔찍한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고된 것도 무릅쓰고 몇 달을 작업 한 끝에 마무리하였다. 이 같은 작업에 전력하다 보니 자연히 장에 갈 틈이 없게 되 어 싸움하는 사람도 죽은 사람도 없어진 것일 터인데, 마을사람들은 이제 바로 그 효험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부귀를 누리던 고을의 인물들이 망해가고 시름시름 죽어가기 시작하는가 하면 남녀의 쌍초상이 계속 이어 지기도 했다. 그런데 어디에서 시작된 말인지 현감이 고을의 드센 기세를 꺾기위해 사두봉을 깎아 반사형국을 변형시켰기 때문에 인물들이 쇠퇴하고 새로운 인물이 나 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도사가 이 이야기를 듣고 하는 말인 즉, 사두봉을 원래대로 되돌리기는 어려우나 앞날을 위해 사두봉에 나무를 심어 이 나무 가 사두봉 높이만큼 자라게 되면 이 고을은 다시 번창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남산 밑 지금의 하거리 연못을 파고 개구리 못을 만들면 이 뱀의 바로 앞에 먹이가 생기 게 되어 뱀이 멀리 가지 않게 되므로 불행을 면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다. 이 말 을 전해들은 고을 현감은 깎아내린 사두봉에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도 만들었 다. 그 뒤로는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남산 밑에 있는 개구리 연못 자리에 5 일 시장도 생기게 되고 차차 인근의 장꾼들이 모여들게 되어 지금은 꽤나 큰 5일장 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그 당시 심은 느티나무들이 이제 9Cm만 더 자라면 사두봉 높이를 채우게 되어 벌써부터 굵직한 인물 배출에 주민들의 가슴이 부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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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두봉 높이만큼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
현재 본면 출신 고등고시(행정․사법․외무) 합격자는 고 진의종 국무총리를 비롯하
23명에 이르고 있다. <표1 참고>
2)
[通井]의 전설
무장면 성내리 동남로(무장게이트볼 경기장 앞길)에서 약 30m쯤 읍내 쪽으로 올 라가면 원형 40m 정도의 우물형 방죽이 있었고, 외곽도로 바로 옆에 도축장이 있었 는데, 그 방죽에서 나오는 생수가 넉넉한지라 도축장의 용수로 썼다. 그리고 읍내 아 낙네들이 이 방죽을 빨래터로도 사용하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읍내에 사는 젊은 과부가 수절하며 이곳에 자주 와서 몸 을 씻기도 하였는데 이후 좋지 않은 풍문에 못 이겨 물에 투신자살하였다 한다. 그 후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치는 궂은 날에는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인 근 마을까지 들렸다고 한다. 이에 불안해진 마을사람들은 집단 진정을 내어 이 우메 워버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농경지로 변했다. 큰 뱀의 지세로 인한 통샘 이 이곳 외에 여러 곳에 있었던 것 같다.
3) 무장현 객사 별관 남극관(南極館) 태종 17년(1417년) 무장현의 읍성을 축성하고 진(鎭)을 설치하여 병마사가 겸임 하다가 첨절제사로 고치고 그 후 현감이 정무를 맡아 왔다. 서해안 지역의 막중한 정사(政事)들로 객관이 협소하게 되자 객사의 남쪽에 별관을 신축하였으니 그 건물 이 남극관 노인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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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남극관 노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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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남극관 편액
<사진 16> 새로 지은 노인당
약 400여 년 전 조선조 40년 정미년(1607년) 초 전라도 주부군현의 서 해안 전략요새지로서 중앙의 경아전(京衙前)과 지방의 외아전(外衙前) 등 향리들의 정사와 숙소로 활용코자 약 30평의 목조 6칸 4짝의 평아전을 건립하여 현재까지 보 존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노인당에 보존된 「기로안(耆老案-사진17)」 계서에 ‘도유작악(屠維作 ) 원월망일(元月望日)’이라 기록되어 있으니 ‘도유’는 10간 (干)의 기(己)요,‘작악’은 12지(支)의 유(酉)를 뜻해 ‘도유작악’은 기유년(己酉 年)이 된다. ‘원월망일(元月望日)까지 살피면 곧, 1729년 1월 15일이 되니, 약 280년 이전에 기로안이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부임하는 고을 수령들이 노후안 식처로 남극관을 찾아와서 현안인 민정·군사·교육 분야 등 다양하게 자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1915년 발행 「松沙誌 」및 1729년에 발행된 「耆老案」등) 이렇듯 무장현 축성 이후 전력을 합산하면 500여 년의 역사를 지녔음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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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로안과 송사지를 펼쳐보이면서 설명하는 김종수 자문위원
후 1910년경 사립 무장학교 개교 당시 교실로도 사용하였고, 1919년 기미년 3·1 독립운동 군중 만세를 외치고 남극관 앞으로 남문을 지나 읍성으로 올라가서 무장주재소를 점령했다는 증언도 있으며 1940년경 일본군의 서해안 경비 사단으로 군기대(軍旗隊)가 일시 주둔했던 영광과 치욕의 역사관이기도 하다. 남극관(南極館)은 사마제와 양사제를 두어 선비를 길러냈던 바 등과한 분이나 선 비들이 노년에는 진사구락부(進士俱樂部)에 모여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남극관 노인당은 1987년 보사부로부터 모범경로당으로 지정된 바 있으며 2009년 4월 대한 노인회 중앙회장의 지정을 받아 군내에서 유일하게 무장 남극관 노인대학을 시범 운 영 중에 있다.
<사진 18> 모범경로당 지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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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노인대학의 교재
역사성에 대하여는 「송사지(松沙誌)」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학농 민혁명의 기포지로서 살아 숨 쉬는 충과 효의 고을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진 20> 「송사지」 서문<사진 21>
「송사지」에 등재된 비서승등 명단
여기서 잠깐 남극관의 명칭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남극성(南極星)은 매년 2 월경에 남쪽 지평선에 잠시 보이는 별로써 중국 고대 천문설(天文說)에서 남성들의 수명을 알아보는 별이라 하여 이 별을 바라보면 오래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 본 남 극관에는 누정문학(樓亭文學)이라 할 수 있는 현액 20여 점(사진22)이 강당 벽에
있으며 현재 보관중인 「기로안서문(耆老案序文)」은 승정원 종5품(옥당)의 만 취헌 교리(敎理) 이재달(李濟達)이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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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2> 남극관 내의 현액
설화와 민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듯 이 고을에는 설화와 민요 또한 어느 지역 못지않 게 많이 전해져오는 바, 여기에서 낱낱이 기술하기가 어렵고 고창군이 발행한 (1995) 『고창군 구비문학 대계(高敞郡口碑文學大系)』에서 「무장면 설화와 민 요」 편을 참고하였으면 한다. 거기에는 1990년 성내리의 김토래(여, 당시 72세) 씨가 구술한 설화로 ‘구렁덩덩 신선부’, ‘지네와 두꺼비의 싸움’, ‘임금에게 뽑 힌 연꽃 미인’, ‘호랭이가 데려간 큰 애기’, ‘도깨비가 무서워하는 말 피’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민요로는 역시 김토래 씨가 증언한 ‘꿩타령’, ‘시집살이 노래’, ‘콩밭노래’ 등이 실려 있다.
<사진 23> 구비문학 중 설화
<
5.
24> 구비문학 중 민요
행사
1)
(2009년 말, 단위:명)
마을별 성내 내동
계 54 15 9
10세
연 20세 30세
령 40세
50세
별 60세
70세
70세
이하 2
이하 9
이하 3
이하 9
이하 10
이하 8
이하 6
이상 7
16
25
4
23
26
25
17
23
2) 성씨별 분포현황(무순)(2009년 말, 단위:세대) 마을별
계
성내 내동
26 63
광산
금녕
김해
밀양
전주
경주
진주
김씨 2 2
김씨 3 2
김씨 2 3
박씨
이씨 1 6
최씨
강씨
2
3
4
기타 18 41
3) 직업별 분포(단위:세대) 마을별 성내 내동
4) 마을조직
계 26 63
농업 20 55
상업 3 3
기타 3 5
조 이장 송 근 김충연
성내 내동
직 새마을지도자 김도철 강남환
체 부녀회장 오남례 조천덕
5) 동학농민운동
행사명 개회시기 개회장소 참석범위
6.
무장기포기념제 4월 25일 읍성 군민
읍성축제
면민체육대회
면민노래자랑
4월 25일 읍성 면민
11월 11일 무장초등학교 면민
추석 전 읍성 면민
관향지로 하는 성씨
1)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성씨 : 尹, 庾 무송망성 : 車, 全(車를 申으로 全을 金으로도 했다) 장사존성 : 兪, 史, 丁, 玄 속성(續姓) : 盧(末大興縣), 張(末泰仁縣), 朴(靈岩郡), 李(慶州府), 安, 文(河東 縣), 張(丹州郡), 朱(態川縣), 張(黃澗縣) (이상 모두 人吏姓)
2) 『여지도서』에 실린 성씨 尹(무송), 庾(무송), 車(무송), 金(무송), 兪(장사), 史(장사), 玄(장사), 丁(장사), 金(장사)
3) 『호남읍지』에 실린 성씨 尹(무송), 庾(무송), 金(광산), 朴(밀양), 姜(진주), 鄭(진주), 蘇(진주), 宋(죽산), 申(평산), 權(안동), 崔(낭주), 兪(장사), 丁(장사), 具(능성), 高(제주), 張(인동), 南宮(함열), 余(의령), 玄(장사)
4) 무장현을 관향지로 하는 성씨 (20개 姓) 茂松金氏, 茂長金氏, 茂松尹氏, 茂松庾氏, 茂松崔氏, 茂長申氏, 茂長沈氏, 茂長張氏,
, 茂松李氏, 長沙丁氏, 茂長嚴氏, 長沙玄氏, 茂長廉氏, 茂長方氏, 茂長林氏, 茂松車氏, 茂松全氏, 長沙史氏, 茂長扈氏
7.
무장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반봉건·반침략주의의 기치 아래 민족의 자주의식과 인 권, 자유의 존엄성을 일깨우고자 고창읍 죽림리 63번지에서 태어난 전봉준 장군이 주동하여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갑오년(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한 역 사적 농민혁명운동이다. 동학농민운동에 관하여는 여러 학자의 저술과 연구, 논문 등이 많기 때문에 지면 상 일일이 서술하기가 어렵고 그 양 또한 많기 때문에 기술을 생략키로 하고 자세한 내용에 관하여는 고창군에서 발행한(2009년) 『고창군지 下권』의 「동학농민운동 과 고창과의 관계」 편을 참고하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사)고창동학농민혁 명기념사업회와 고창동학농민혁명 연구소(소장 진윤식)에 문의하였으면 한다. 이 단 체 등에서 매년 학술대회와 유적지 탐방 등을 시행하고 있으므로 이런 행사에 참석 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8. 기미년 독립만세운동과 무장 무장은 원래 무장군으로 일제강점기(1914년) 읍내(지금의 성내리 무장리)를 중심 으로 한 일부 지역이 고창군으로 편입되었으나 무장읍내에는 지식층과 유지들도 많 았다. 그 중에도 김영완(金永玩)은 고종황제의 국장을 앞두고 인산(因山, 왕이나 왕비의 장례)에 참여차 상경하였다가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곧 고향 (무장)으로 내려와서 유지 이용욱(李用郁), 김용표(金容杓), 김상수(金相洙), 이준구 (李準求), 김지호(金辰鎬), 박흥선(朴興先), 오태근(吳泰根), 박흥수(朴興洙), 김용우 (金容佑), 김두남(金斗南), 김영해(金永海)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 정하고 3월 15일 무장 장날에 거사를 일으켰다. 장꾼들이 많이 모이기를 기다려 이 용욱, 김용표 등은 미리 등사하였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김영완은 군중 앞에서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큰소리로 외치니 군중들이 모두 환호성을 올리며 따라나섰다. 이용욱, 김용우 등은 다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들 지휘하며 시
시작하였다. 독립만세 물결은 남문을 지나 면사무소와 주재소로 기세도 드 높게 행진하였다. 이 때 일본인 무장경찰대의 폭력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김영완, 김 용우, 김두남, 김영해 등은 바로 검속당하였으며 무장읍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인 김 영완과 김용표는 1년 반의 징역형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 중 옥사하였다. 이 후 친조카인 김천수 씨가 살아 있었으나 사망하였으며,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의사 김영완 묘비를 건립하였으며 그 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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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김영완 묘비 전면
<사진 26> 김영완 묘비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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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김영완 친척?
주신 분 (대한노인회 분회장, 무장 남극관 경노당 노인대학장)
김충연 (내동마을 이장) 송 근 (성내마을 이장)
참고문헌 고창군지 (1992, 2009, 고창군지편찬위원회) 모양성의 얼 (2009, 고창학술문화연구회) 전라도 무장현 지역학술연구 (2009, 전북역사문화학회) 고창의 마을유래 (2003, 고창문화원) 고창군 구비 문학 대계 (1995, 고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