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십리의 마을(상하면 용정리 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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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

용정리 동촌마을

1. 마을 개관 1)

지명유래

창읍 소재지에서 733번 지방도로를 따라 서남쪽 34㎞ 거리에 위치한 상하면 용정리 동촌(東村)마을은, 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장호선도로(군도 3호선)를 따라 4㎞에 위치하고 있다. 이전에는 광포(光浦)라 불리다 1500년경 농・어업에 종사하던 주민 400여 세대가 점차 사방으로 흩어져 포구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서촌(西村)이라 하였다. 그 후 마 을이 점차 포구(현재의 신언 평야) 동쪽으로 형성되어 지금의 동촌으로 불리게 되 었다.

2) 연혁 고창읍에서 서남단에 위치한 상하면은,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 땅으로 모로비 리국(牟蘆卑離国)에 속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百済)의 땅으로 상노현(上老 県)이라 불렸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장사현(長沙県)으로 개칭하고, 행정 체제는 무령현(武霊県, 현 영광군) 영현(領県)에 속하였다가 후에 장사감무(長沙監 務)가 무송현(茂松県)을 다스렸다. 1417년 조선 태종 때 무송(茂松)과 장사(長沙) 두 현을 합병하여 무장현(茂長県)을 이루었고, 1723년 경종(景宗) 때 상용복(上龍 伏), 하용복(下龍伏) 2개 면을 두었다.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상용복은 상리면(上里面)으로 하용 복은 하리면(下里面)으로, 동촌마을은 상리면 장용리(壮龍里)에 속하였다. 그러다 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군면(郡面) 통폐합에 따라 상하면 지역은 고창군에 편입 되었는데 상리면과 하리면을 합하여 상하면(上下面)으로 개칭하여 현재 9개 법정 리의 행정구역으로 바뀌었으며 동촌마을은 용정리에 속한다.


3)

성씨와 현재 시조는 고려말 공민왕 때 정윤(正尹) 벼슬을 한 노석(魯晳)이다. 함

평노씨로는 임진왜란 때 권율(権慄) 장군 휘하에서 행주, 의령 싸움에 참전하였고, 학자로서 금계집(錦渓集)을 남긴 인(認)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상하면의 입향조 는 노희안(魯希顔, 成均生員)의 7대손 노논상(魯論尚)의 아들인 노공술(魯孔術, 司僕寺正)의 후손이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최억첨(崔億 瞻)과 함께 창의(倡義)하였으나, 조정에서의 강화소식을 접하고는 인조 15년 (1637)에 초야에 은둔하여 전남 함평에서 이곳 상하면 용정리 광촌에 입향하였으 며, 1740년경 이웃마을인 광촌에서 동촌마을로 분거함으로써 설기한 마을이다. 표씨 본관은 신창(新昌)으로 단본이다. 조선시대에 배출한 5명의 문과 급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표계(表継)의 아들 연말(沿沫)이다. 그는 김종직(金宗直) 의 문인으로 연산군 원년에 응교(応教, 조선시대 관직으로 정4품)로 있으면서 춘 추관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밖에 선조 때의 헌(憲)과 그의 아들 정로(廷老)는 당대의 명역관(名訳官), 명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인조 때의 무관 정준(廷俊)은 척화신(斥和臣)으로 청(清)나라에 잡혀가는 김상헌(金尚 憲)을 끝까지 수행하여 칭송을 들었다. 표씨는 현재 경남 의령, 거창, 함양, 합천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상하면의 입향조는 표인여(解官 表仁呂) 기후(祇侯)의 10 대손인 표도흥(表道興)으로, 자는 흥단(興瑞) 호는 영무(靈武, 贈嘉善大夫議政府賛 政)인데 효종 때인 1655년에 입향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연유는 세구연신 (歳久年深)하여 미상이다. 일설에 의하면 인조 때 난을 피하여 경상도 거창에서 상 하면 복구촌(伏亀村)에 은거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 후 복구마을에서 장호, 동촌마 을로 분거하여 살고 있다. 현재에는 전주이씨, 광산김씨, 청도김씨, 밀양손씨, 경주최씨, 창녕조씨, 밀양박 씨, 철원주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4) 인구 분포 1963년에 최대 인구를 기록하였는데, 57세대 285명이었다. 하지만 2009년 8월말 현재 51세대 116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자가 54명, 여자가 62명으로 여자가 8명이 많다. 연령별로는 10대 이하 6명, 20대 15명, 30대 2명, 30대 이상 83명이다.


함평노씨, 신창표씨, 전주이씨, 창녕조씨, 광산김씨, 청도김씨, 경주최씨, 철 원주씨, 밀양박씨, 밀양손씨 등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성씨별 분포로는 함평노씨 29 명, 신창표씨 11명, 광산김씨 2명, 밀양박씨 2명, 철원주씨 2명, 전주이씨 1명, 청도 김씨 1명, 창녕조씨 1명, 밀양손씨 1명, 경주최씨 1명이다.

2. 1)

자연환경 형국

풍수로 본 마을 형국은 초승달 형태여서 월성국(月星局)이라 하고, 예로부터 섬포 산이 금당망월(金堂望月)이라 동촌 월성국을 향하여 명당이 된다는 말이 있다. 동촌 마을을 일러 광포라 부르기도 한다. 광포는 조선시대 때 목포, 법성포에 버금가는 조 곡을 납세하는 세금집합장소 가운데 하나로 500~600여 호에 가까운 집단촌이었다 고 한다. 그러나 그후 세금집합장소로서 역할을 상실하면서 광포는 동촌과 서촌으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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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촌마을 전경

2) 자연환경 상하면은 동쪽은 산지이고, 남쪽에 들판이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해안 모래밭이다.


산은 동쪽 송림산(295m)이 최고봉이며, 그 서편 장사산(270m)이 그 다음으로 동쪽 울타리가 되고 있다. 북쪽의 배산은 장군산(171m)과 봉백산(158m)이며, 돌팍 재로 내려 서쪽으로 2km 해안에는 해안사구가 발달해 있다. 구시포를 중심으로 북 쪽으로 용두까지 4km에 걸쳐 모래밭과 모래언덕이 형성되어 있다. 사구등을 따라 조성된 해당화와 곰솔밭은 방사림과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촌마을에는 곰솔 숲을 상징하는 불뜽(부등, 浮登) 안쪽으로 해안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상하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733호선(구시포선)을 따라 서쪽으로 1km지점에서 군도 3호선(장호선)과 연결되어 3km의 도로를 따라가면 동촌마을 표석이 있다. 마을 앞 해안평야는 옛날에는 포구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포구의 기능이 상 실되어 지금은 신언 평야가 되었으며, 마을 앞 넓은 농경지는 용정리(판정, 동촌, 광 촌, 용산, 서당, 섬포)주민들의 삶의 원천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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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언 평야 (들녘)

신언 평야를 가로질러 굴포(포강)가 있으며, 마을 뒤 명사십리 해안도로(군도1호 선)가 동호 해수욕장에서 구시포 해수욕장까지 연결되어 바다를 찾는 관광객에게 끝 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과 아름다운 낙조를 보여 준다. 명사십리 바닷가에는 사시사철 조개를 캘 수 있어 상하면을 비롯하여 정읍, 고창, 광주 등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조개를 캐며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군도3호선과 해안도로(군도1호선)경계로 장호마을과 인접하고 있으며, 소나무 방 풍림으로 둘러싸인 전원적인 농촌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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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촌마을 앞 굴포 (길이 1.9㎞, 넓이 20m, 깊이 3m, 구조 T형)

을 앞 신언 평야지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굴포(포강)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으며, 굴포는 포구로서 자격이 상실되면서 동촌마을 앞에서 섬포마을 뒤까지 1,300m가 만들어져 농업용수로 활용하였다. 신굴포 600m는 1967년 극심한 한해(旱害)를 극복하 기 위하여 사람의 노동력으로 굴착하여 지금의 굴포가 되었으며, 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 이 한해지역을 시찰하던 중 이곳에 들러 굴착작업을 지시하여 사업이 시작되었다. 여기 에 인력은 상하면 전 지역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특히 1966년부터 가뭄으로 인하 여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일한 대가로 보리쌀과 밀가루를 받아 허기를 해결하던 시 절에 만들어져 지금은 농작물 재배의 젖줄이 되고 있다.

3.

인문환경

1)

특성

조선시대에는 서해바다 포구로 목포, 법성포와 함께 조곡을 납세하는 세금집합장 소여서 500~600여 호에 가까운 집단촌으로 호황을 이루었으며, 일제시대와 해방 후 에는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벼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마을이었다. 70년대 새마을사업 이 시작되어 진입로와 안길이 뚫리고, 지붕개량이 되면서 깨끗한 주거환경이 조성되 고, 소득이 향상되어 잘사는 마을로 탈바꿈하였다. 2000년 새천년을 맞이하여 벼농 사를 주로 하면서 원예작물과 고소득 경제작물을 재배하여 부자마을이 되기를 기대 하고 있다.


2)

수호신(당산) 당산이 있는데, 포구가 풍성할 당시에는 12당이었는데 풍파에 훼손

되고 땅 끝이 무너져 현재는 3개 당산과 4군데의 철륭을 함께 모시고 있다. 마을에 는 3개의 당산을 모시는데 총각 당산, 할미 당산, 영감 당산이 있다. 이전에는 당산 의 위치가 총각 당산은 용정리 산 12번지에, 영감 당산은 용정리 1122번지에 위치 하고 있었는데, 30여 년 전에 할미 당산이 위치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당산이 있는 곳은 마을 뒤쪽으로 한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농지와 접해 있는 모래밭이다. 당산은 3개가 함께 모셔져 있는데 왼쪽에서부터 할아 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총각 당산이 나란히 서 있으며 모두 바다쪽을 향하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과 총각 당산은 부지정리를 하던 중 모래밭에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 복원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당산은 원래 서쪽인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고, 총각 당산은 서촌마을에 있었던 것을 5년 전에 지금의 자리로 합쳐 놓았다. 할아버지 당 산에서 총각 당산까지의 거리는 1,000m 정도 되었다고 한다. 당산은 500년의 역사 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바닷가라 바람이 불면 당산이 모래에 묻힐 때가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다시 찾아 보존하였다. 현재 모시고 있는 할머니 당산은 높이가 사람보다 작다. 그리고 머리 형태로 조그 마한 돌이 몸 위에 불안하게 얹혀 있으며 돌 앞면에는 사람모습으로 이목구비를 그 려놓았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원래의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전쟁 무렵까지 할 머니 당산은 사람보다 훨씬 큰 10~11자 정도로 사람이 아니라 꽃봉오리 모양으로 할아버지 당산과 비슷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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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할아버지 할머니・총각 당산

<사진 6> 할머니 당산

<사진 5> 할아버지 당산

<사진 7> 총각 당산

1960년 무렵 당산제를 모시면서, 머리를 만들어 젊은 사람들이 눈코입을 그 려 넣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노인들은 그대로 놓아두면 점차 검어져 자연스러울 것 인데 억지로 그려 넣은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동촌마을에서 철륭이라 부르는 철륭은 동네 수호신으로 지혜를 철륭에서 얻는다고 인식한다. 철륭은 동촌의 소나무, 동촌의 샘, 서촌의 서너 군데를 말한다. 동촌마을에 서는 샘도 용으로 하여 철륭으로 모신다고 한다.

3) 동촌마을의 당산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 10시경에 지내는데, 격년제로 당산제 를 모신다. 그러나 줄다리기는 해마다 하며,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당산에 감아놓 는다. 예전에는 자정이 넘어서 당산제를 모셨으나, 지금은 젊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밀려 밤 10시에 제를 모시며, 새벽 1시에서 2시경에 제가 끝난다. 제의를 주관하는 사람은 ‘화주, 부화주’라 불리는데, 정월 초이렛날에 생기복덕한 사람으로 각각 1명씩 선출한다. 화주로 선정되면 그날부터 2년간 근신하는데, 더러 운 곳에 가는 것을 금하며 먹을 것도 가려서 먹는다. 제사모시기 전 화주와 부화주 는 우물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한편, 화주를 뽑는 마을회의에서 제사비용을 어떻게 걷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함께


. 예전에는 굿(농악)치고 마을을 돌면서 걸립(乞粒, 돈이나 곡식을 구하는 일)하였으나, 지금은 걸립할 때도 있고 하지 않을 때도 있으며, 주로 돈으로 할당하 는 데 ‘인구전’이라 한다. 열나흗날 화주와 부화주가 함께 장에 가서 제물을 마련한다, 대체로 가까운 상하 장을 보러가는데 상하장은 1일, 6일에 열린다. 장을 보러갈 때 화주가 부화주 아닌 마을 사람 가운데 깨끗한 사람과 함께 가는 경우가 있다. 이때 깨끗한 사람은 심부 름만 하며 제물이나 다른 것에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제물이나 제기를 살 때 절대 깎는 법이 없다. 그리고 장을 보고 오다가 사람을 만나면 외면한다. 제물을 사면서 제기도 새로 장만한다. 제수는 열나흗날부터 할머니 당산 앞에 천막을 쳐놓고 장만한다. 물은 철륭샘에서 길어다 쓰거나 화주집의 물을 길어다 놓는다. 제수를 장만하면서 화주와 부화주는 마스크를 착용하는데, 이는 침이 음식에 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맛을 절 대 보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음식장만하면서 간을 보면, 음식을 입에 대는 순간 입이 부어오른다고 한다. 그리고 제수를 만들 때 아무 곳에서나 나무를 주워 불을 때지 않는다. 나무 값을 주더라도 화주집에서 나무를 가져와서 불을 땐다. 술은 직접 만드는데 시중에 파는 술이 그만큼 성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리용 장도 ‘제 장’이라 하여 제의 때 쓰는 장을 따로 담았다가 쓴다. 금줄은 왼새끼에 한지를 꽂는 것으로 열나흗날 새벽에 동서남북 마을 들어오는 입 구에 모두 친다. 화주집, 부화주집, 3개 당산과 4군데 철륭에도 금줄을 친다. 또한 황토를 ‘금토’라 부르는데 화주집 앞에 조금씩 뿌린다. 제의를 모시기 전에 마을 사람 가운데 어린애를 낳거나 부정한 일이 생기면 당산 제는 이월 초하룻날로 미룬다. 마을 사람 가운데, 제 모시는 날인 열나흗날 갑자기 산기가 있으면 어린애를 낳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간다. 이는 마을에서 어린애를 출산 하면, 준비한 제물을 출산하는 사람이 물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를 모시는 순서는 동촌의 철륭에서 제일 먼저 모신다. 철륭 위치는 동촌마을 뒤 에 자리하며 큰 소나무 아래에서 모신다. 제물로는 흰 시루떡, 나물, 과실, 쇠고기, 제주(조래술)를 준비한다. 쇠고기를 대신하여 돼지고기를 올리는 법은 없다고 하며, 쇠고기를 살 형편이 못되면 명태를 대신 올리기도 한다. 제는 단배→ 축문→소지→ 헌식 순서로 하며, 축문은 소지와 함께 태워버린다. 철륭에서 제가 끝나면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총각 당산 순으로 제를 모신다. 제를 모시는 동안 여자는 제의에


못한다. 총각 당산에서 제가 끝나면 서촌 철륭으로 가서 제를 모신다, 서촌 철륭에서 제가 끝나면 그 다음으로 서촌샘에 가서 제를 모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촌샘으로 가서 제를 모신다. 마지막 동촌샘에서 제를 모실 때는 남은 제물을 모두 차려놓고 모신다. 제가 끝나면 제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화주집으로 가서 장만한 음식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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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용줄 만들기

<사진 9> 용줄 감기

4) 동촌마을은 당산제를 한 해 걸러 모시지만 줄다리기는 해마다 한다. 줄다리기를 ‘줄들인다’ 라고 한다. 당산제를 모신 그 다음날인 보름날 아침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짚을 들고 마을회관으로 모인다. 예전에는 농사를 많이 짓는 집의 경우, 짚을 열에서 열다섯 묶음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즉, 농사를 많이 짓는 집일수록 짚을 많이 들고 나온다. 암줄과 숫줄의 구별은 외형상으로 구분하지 않고 북쪽에 있는 것이 암줄이요, 남 쪽에 있는 것이 숫줄이 된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줄은 ‘성(聖)줄’, ‘용줄’이라 하여 땅에 닿지 않고 귀하게 다루었다. 줄다리기는 마을 앞길이 난 곳에서 하는데, 밖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쪽에 남 자들이 서고, 그 아래쪽 길로 여자들이 선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 모두 참여하여 줄을 당기는데, 총각은 여자 편으로 선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묶여 있는 암줄과 숫줄을 풀어서 어깨에 멘다. 그리고 농악을 치면서 자기영역을 표시하듯 오방(五方) 마을을 한바퀴 돈다. 그러나 지금은 줄을 멜 사람이 부족하여 마을을 돌지 못한다.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만 감는다. 이를 ‘당산 옷 입힌다’고 한다. 총 각 당산에는 감지 않는데, 이는 총각이기 때문에 옷을 입히지 않는다고 한다. 할아버 지 당산에는 숫줄을, 할머니 당산에는 암줄을 감는다. 줄을 감을 때는 꼬리부터 감으 며 머리는 맨 위로 가게 한다. 감을 때 화주가 꼬리를 당산에 대주고 있다. 작년에 감은 줄이 그대로 썩어 있는데, 그 위에 화주가 줄을 대면 그때부터 사람 들은 줄을 잡고 돈다. 이때 사람들은 넘어지기도 하고 줄에 걸리기도 하는 등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한다. 이를 ‘줄쌈’이라 한다. 예전에는 남자들만 메고 다니므로 지금처 럼 장난을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여자들도 참여하므로 장난이 심해졌다고 한다. 줄을 모두 감고 나면 마을회관에 다시 모여 잔치를 벌이는데 그 자리에서 당산제 에 대한 결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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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줄다리기 모습

5) 1972년부터 불어닥친 새마을운동으로 마을 진입로 700m와 마을 안길 3,700m를 개설하였으며, 60여 채에 달하는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하였다. 농사에 서 생산된 부산물은 부족한 연료로 대체하고, 마을회관과 창고를 마련하여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흙담을 헐고 블럭으로 담장을 쌓고 부엌 등을 개량하였다. 주택은 적 벽돌 슬래브 5동, 일반주택 38동을 개량하고, 회관 1동(28평), 모정 1동(6평)을 건 립하여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4.

인물

1) 노병민(魯秉敏) : 1857년(철종 9년) ~ ?


1857년 동촌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본(本)은 함평노씨이고, 자(字)는 순 명(順明)이며 호(号)는 사은(沙隠)이다. 무열공(武烈公) 신후(慎后)의 22세손 승지 공(承旨公 )익수(翼洙)의 자(子)로서 성품이 온순하고 청렴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총 명하고 영특하여 책읽기를 좋아하여 노상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버이께서 병 환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생명이 위급해지자 지혈주구(指血注口)하여 연명토록 하였 으며, 엄동설한에 마을 앞 방죽에서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보양하여 천수(天寿) 다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무장향교에서 천장(薦狀)과 삼강록(三綱録) 간소(刊所)의 천장(薦狀)을 보유하고 하고 있다.

2)

(魯淵業) : 1935년 ~ 1991년

노연업은 1935년 동촌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함평노씨 시조(始祖) 목(穆)의 25 대손으로 향토예비군 창설 예비군 중대장과 통일주체 대의원 1~2대를 역임하였으 며, 상하농협조합장을 역임하여 농업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영광원자력발전소 핵폐기물 설치반대 고창군 위원장으로 반핵에 앞장섰다.

5.

현재

1) 산업 마을의 경지면적은 전 1.7ha, 답 6.7ha이며 임야는 2.1ha이고, 주요 경제작물로는 벼와 보리, 고추, 복분자, 오디 등이 있다. 농산물 작목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동촌 마을은 포구에서 간척지로 바뀌면서 벼농사 위주로 재배하였으며, 벼를 베고난 후에 는 이모작으로 보리와 콩을 갈아 소득을 올렸다. 점차적으로 밭에는 특작으로 고추, 땅콩 등을 재배하였으며, 지금에 이르러 복분자, 오디 등 건강식품을 재배하여 고소 득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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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동촌마을 표석

<사진 14> 마을회관

<사진 13> 동촌마을 진입로

<사진 15> 마을 모정

2) 매년 2회 마을총회를 개최(정월 대보름, 당산제 준비)하여 정월 대보름(음력 1월15일) 준비 총회 때 예산 및 결산을 하며, 당산제 개최시기는 일정 하지 않다. 현재 이장 표덕종, 부녀회장 홍성금과 회원 16명이 있다. 3) 마을행사 마을의 세시풍속으로는 백중인 음력 7월 15일이 마을 쉬는 날이며, 부녀회는 매년 1회, 노인회는 2년마다 1회씩 단체관광을 한다.


○ 도움 주신 분

(함평노씨, 81세)

표재춘 (신창표씨, 67세)

표덕종 (신창표씨, 50세,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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