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월 경방의 고창오씨와 동학농민혁명 고창오씨는 고창의 토반세력으로 고려시대부터 고창에 세거한 명문세족이었 다. 이러한 고창오씨는 고창에 많은 자손을 낳아 번성하였고 많은 인물을 낳았다. 그런데 현재 고창오씨들은 고창에서 집성촌은 물론이고 사람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갑작스런 고창오씨의 몰락 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를 풀기 위해 고창의 원로이신 전고창문화원장 이기화(1935년 4월 고창 생)선생을 찾아 그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였다. 오씨의 연원은 중국(서기 222-252년) 오나라를 세운 태백이라는 사람이 강 소성 전면도 단면출생이다. 태백이 오나라를 세움으로써 오씨가 내려오고 있다. 오씨의 본관은 해주 ․ 동복 ․ 나주 ․ 보성 ․ 고창 등 20여 개가 있다. 중국의 오태백의 후예인 오첨은 지증왕 원년(500) 경남 함양 땅에 왔다가 잠시 정착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이 오첨이 바로 오씨의 시 조가 된다. 오학린이 오첨의 17세손이다. 고창오씨의 관향지가 중국의 복양이다. 중국 하남성 청풍현의 남쪽으로 이 땅은 고조선과 발해의 강역 속에 들어가 있는 순수한 조선의 땅이다. 고창오씨(高敞吳氏)는 고려 10대 정종조(靖宗朝) 한 림학사(翰林學士)와 행정관으로 많은 공(功)을 세워, 고창(高敞)을 식읍(食 邑) 으로 하사받은 오학린(吳學麟)이 시조이다. 시조 오학린은 1009년 목종 (穆宗) 12년에 탄생하여,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 선생의 문헌공도(文憲 公徒) 로 26歲가되던 정종(靖宗) 12년에 지공거전시(知貢擧典試)에 급제(及 第)하였다. 당시 학자들이 가장 선망하던 청요직(淸要職)인 한림학사에 등용 되었으며, 문교(文敎) 진흥에도 많은 공이 있었다. 그는 많은 시와 저술이 있었다고, 동인문집(東人文集) 삼한귀감(三澣龜鑑)등에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는 평양 대동강 선유(船遊)와 흥복사(興福寺) 분향행사(焚香行 事)에 왕(王)의 행행(幸行)을 수행하면서 읊었다는 중유흥복사시(重遊興福 寺詩)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상비묘(湘妃廟)를 보고 순임금의 아내 아황 (娥皇)과 여영(女英)의 고사를 회상하며 읊은 상비묘시(湘妃廟詩)가 있다. 거란(契丹)의 재침이 시작되어 국경인 압록강을 넘어왔기 때문에 국경은 거 의 피폐해졌다. 고려는 압록강 지역의 민심이 극도로 소란해지자, 오학린을
그 지방을 수습할 도병마사(都兵馬使)로 2차에 걸쳐 파견하였다. 그는 걸추 훼압강성궁구장(乞推毁鴨江城弓口狀)과 재걸추훼압강성궁구장(再乞推毁鴨江 城弓口狀)이라는 글을 두 번에 걸쳐 상감에게 충심을 보냈다. 그 상주문 압 강성궁구장(鴨江城弓口狀)은 왕의 명을 받고 도임한 도병마사 오학린이 정 세를 판단한 수습방안을, 치밀하고 절실하면서도 정중한 문장으로 거란 왕 을 나무라면서도 선처를 구하는 글을 지어 올린 것이다. 그것이 주효하여 거란(契丹)이 철수하므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고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게 된 것이다. 오학린은 출세하기 전까지 문헌공 최충의 14문도로 들어갔다. 고시 전 추천 으로 들어가 구재학당으로 오른 것이다. 1035년 형부상서 최충의 지공거전 시회에 급제하여 26세의 약관의 나이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한림학사의 선 발기준은 급제한 사람들 중 배수를 선발하여 예문관과 홍문관의 당상관들이 선발을 한다. 3차는 선발된 사람들을 삼정승들이 면접하여 선발하는 것이 다. 여기에 합격한 사람이 문헌공으로 12인 속에 들어갔다. 후에 추가로 2 명을 더 뽑아 14명이 되었다. 9재학당은 문도들이 많아서 1재부터 9재까지 반을 편성하여 교육을 시켰다. 그는 9재학당에서 상당기간을 후진양성에 주 력하였다. 사패지지는 고창현 산내면 경방동 즉 지금의 신월리다. 이곳에는 아직도 그 터가 남았다. 그는 고창에서 후진양성을 위한 교육에 종사를 하 였다. 모양군으로 봉군된 사람이 오학린의 6대손 오계유인데, 충숙왕 때 수충보절 좌리안사공신 삼증대광도첨의 찬성사의 직급에 오른다. 그는 모양군에 봉해 져 사패지지의 근간이 되었다. 종래의 기록에는 오학린의 아들이 질이고, 질의 아들이 오세공, 오세문, 오세재로 되어 있다. 한국금석문전서 제4권 금석문추보집이 있다. 일제시대 총독부에서 일본인 천지무태랑이라는 도굴꾼을 시켜 한국의 문화 유적을 도굴하게 하였다. 1939년 5월 9일 개성에 들어가 산에 올라 도굴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나온 것이 오인정의 묘지석이다. 묘지석을 찾은 것이 다. 그것은 총독부에서 30원을 주고 샀다고 한다. 묘지석의 연도가 시대금 (時大金) 정원(貞元)3년(乙亥年) 8월일자로 되어 있다. 그때가 1156년 의종 9년이다. 묘지석을 국립박물관 수장고에서 보고만 왔다. 그런데 오씨들이 어떻게 입 수를 했는지 사진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종래의 오학린 후손의 가계
도를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인정이 오질의 다음에 나와야 한다. 학린의 손자가 오인정이다. 오인정은 고려사와 인물대사전에 나온다. 그는 1100년 숙종 5년에 태어나 1155년 의 종 9년에 죽었다. 김부식문하에서 1123년 인종 2년에
예부시에 합격을 하
였다. 그는 원흥진(원산) 판관으로 초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정사에 유능 하다는 평을 들었고, 임기가 다 되자 개경에 돌아와 지조를 지켜 세속부침 (世俗浮沈)에 관계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 10년 동안 임관 받지 못하여 성동작동(城東鵲洞)에 살면서 몸소 농사를 지어 처자를 부양하였다. 많은 선비들이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과거의 지공거였던 김부식(金富軾)이 그의 지절(志節)을 높이 사 김부식이 추천하여 탁라도구당사(乇羅島勾當使) 에 임명되었다. 익양군(광주)의 녹사가 되었다. 그 뒤 진(鎭)의 판관을 역 임하던 중병을 얻어 개경에 돌아와 중병을 앓다가 55세에 죽었다. 고창오씨는 5대에 걸쳐 글 잘하는 집안이 되었다. 즉 고창오씨 문중에 오학 린-오질-오인정 등으로 이어지는 명문가가 된 것이다. 질은 한림학사로 취 임을 하였다. 정사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문장으로 많은 선을 쌓았다. 4 세 세공은 1153년 청주목에 장서기로 임명되었다. 1177년 경상도 안찰사를 지냈으나 무후로 손이 없다. 오세문은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이다. 1151년 의종 5년 승보시에 합격하고, 명종 때 낭중을 거쳐 동각시학(세자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문장에 능 해 고려의 역대가(歷代歌)를 지은 사람이다. 고려 때 역대가를 지은 사람이 바로 오세문이고, 그는 고려사와 동국이상국집에 나온다. 오세재는 명종 때의 대학자로 1133(인종 11)년에 태어났으나 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자는 덕전(德全)이며, 호가 복양 또는 통문이다. 명종 때 과거 에 급제하였다. 친구인 이인로(李仁老)가 세 번이나 추천하였으나 끝내 벼 슬에 오르지 못하였다. 성품이 단정하지 못하고 개성이 뚜렷했다. 그는 당 시 18세였던 이규보(李奎報)에게 53세의 나이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 하였고, 이른바 해좌칠현(海左七賢: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 등과 시주(詩酒)로 즐겼다. 중국에는 죽림7현이 있듯이 해동조선에도 강좌7현이 있다하여 그를 포함한 7명을 해좌칠현이라 하였다. 초두에 그가 나온다. 그 는 명종시대 문신수난기를 통하여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고 문학과 시주에 탐닉함으로써 자신의 고민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이규보는 나이를 떠난 진
정한 벗이었으며,〈오선생덕전애사 吳先生德全哀詞〉를 지어 추모하였다. 이규보는 그를 복양선생(濮陽先生)이라 부르고, 친구 아닌 문하생의 입장에 서 사사로이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시호하여 영전에 바쳤다. 오세재는 1500편에 이르는 시문이 있는데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동문선》에 오언 율시 2편, 칠언율시 1편이 있다. 그는 고려의 대문장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고려가 망하고 고창오씨들의 맥이 흐려졌다. 고성 김씨인 김빈길은 낙안사람으로 공이 있어 하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뒤 말년에 고창에 왔다. 그는 고창오씨의 사패지지를 차지하려고 왔다. 김 빈길이 태조에 고하여 고창의 사패지지를 달라고 하자 태조는 그에게 고창 을 주었다. 그 후손들이 고창오씨의 묘까지 파헤쳤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들은 고창오씨의 시조인 오학린의 묘비들을 방죽에 버렸다 고 한다. 또 다른 제보로 묘비가 율계에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창에서 우체국의 집배장을 하였던 사람이 제보를 전해주었다. 고창오씨의 묘비가 서동현씨의 장형집 부엌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고창오씨들과 함께 가서 그 집을 사서 찾아보자고 하였으나 고창오씨들이 하지를 못했다. 김빈길의 후손들이 유야무야 한 사이에 이천서씨들이 오학린의 묘 바로 옆 에 선조묘를 조성하였다. 고창오씨들이 제각각으로 갈라졌다. 분파가 너무 많다. 오세문의 본파인 동각공파가 사정공파, 의령공파, 봉사공장파, 봉사 공이파, 봉사공삼파, 봉사공사파로 나누었다. 오세재의 파인 현정공파도 진 의공파, 진시공파, 감정공파로 갈라졌다. 단결을 못한다. 그러니 자신의 시 조묘를 찾아도 제각하나 못 만든다. 하여간 오학린의 경방동에는 현재 그 집터가 남아 있다. 그 밖의 고창오씨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 약하였던 운(澐)은 정유재란 때도 커다란 공을 세워 통정대부에 올라 첨지 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 로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앞장 선 화영 (華英)이 가문을 빛냈는데, 특히 그는 목사로서 신앙부흥운동과 민족정신함 양에 노력하였으며 조선민족당 당수와 한중협회장 등을 지냈다. 고창의 경방동은 고려 때 한림학사였던 오학린이 이곳으로 낙향을 해서 말 년에 이곳에 후손들을 위해 서당을 만들었다. 그래서 아직도 서당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오한림공이 제일 먼저 정착한 마을이름이 경방이다. 오 한림공이 서울에서 내려와 사패지를 받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오한림공이 경방이라 한 것이 이 부근의 마을 사람들도 경방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오
한림공의 묘소는 경방 바로 뒤인 경방과 율계 사이에 있다. 오한림공의 묘 소는 장검산 아래에 있다. 장검봉의 원줄기는 이당산(尼堂山)이라 한다. 이(尼)는 공자의 이름이다. 이 당산의 형국은 여승이 고깔을 쓰고 춤을 추는 그런 형국이다. 이당산 형 국의 지맥이 장검봉이다. 그 여승이 바로 장검봉에서 춤을 추고 목탁을 두 드리며 풍악을 울리는 형국이라 명당터라 한다. 이 형국이 바로 경방의 오 한림공의 묘소로 해서 흘러들어온다. 오한림공이 고창의 경방에서 오랫동안 세거하였는데, 후손들이 고창에 거의 살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 이들이 왜 고창을 떠났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
는 찾을 수 없다. 단지 고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후손들이 동학농민혁 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즉 고창오씨들이 고창을 떠나게 된 계기가 1894년의 고창동학농민혁명 때 고창오씨들이 혁명의 주동자로 많이 참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1894년 3월 20일 1차 동학농민혁명봉기 당시 고창 에서는 오하영, 오시영, 임천서, 임형노 등이 영솔 하여 약1,500명의 동학 군이 가담을 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오하영, 오시영 등이 바로 고창오씨들 이라 생각된다. 이들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고창오씨들이 경 상도로 충청도로 싹 도망 가버렸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이러한 난이 일어나 면 그 일가친척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다 도망해버린다. 분명 총독부자료에도 일제초기까지 고창에 고창오씨들이 살았는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아마 동학혁명 이후 모두 역적으로 몰리니까 여기서 살지 못하고 떠나버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도 변성(變性)을 해서 다른 관 향으로 다 돌렸다. 아마도 고창오씨들은 해주오씨나 동복오씨 등으로 돌려 살다보니 지금까지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동학사를 지은 오지영씨도 속설에는 고창오씨 후손이라고 한다. 위에서 언 급한 오하영, 오시영 등이 바로 고창오씨로 이들을 중심으로 많은 고창오씨 들이 가담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모두 고창을 떠나게 된 것이다. 옛날 오지영씨의 딸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봤는데, 그 할머니는 친정일이라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오지영씨가 어떻게 해주오씨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 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