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장산 정기 받은 “달실”의 터 월곡마을 신휘관 1. 마을의 개관 1) 마을의 위치 월곡마을은 고창읍의 명산 방장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고창읍사무소에서 훤히 트인 중앙로를 따라 약1㎞쯤 동쪽으로 가다보면 동서의 외곽도로가 나온다. 그 외곽도로와 마주치는 삼거리 교차로가 있는데 바로 앞에 보이는 동네가 월곡마을이다. 마을 뒤로는 노령산맥의 정기를 받아 갈재를 이어온 방장산(해발640m)이 우뚝 솟아 장엄한 위세로 마을을 품고 있으니 더욱 인상적이어서 눈에 들어오는 곳이 월곡마을이다. 마을 동쪽은 월암리와 석정리에 접하고 서,북 방향은 교촌리와 성두리, 그리고 신 림면 반룡리와 경계를 이루었는데 남쪽은 읍내리 및 양곡(暘谷)마을과 접하고 있다. 2) 마을의 구성 마을의 구성과정을 보면 ‘월곡“마을은 1개 법정리 이름으로 11개의 행정리로 나뉘어 있다. 즉 월곡 (月谷), 상월(上月), 하월(下月), 주공아파트 1, 2, 3, 4동과 제일 아파트1, 2, 3, 4동 등 11명의 이장이 선임되어 주민의 편의를 돕고 있다. 당초 아파트촌과 그 주변이 개발되기 전인 1990년대 말경까지도 지금의 월곡(아래, 뜸)을 하월로 명칭 했었다. 그러나 2003년 8월 아파트와 주택이 점차 증축됨으로 그때부터 주택단지를 하월(下月)로 부른다. 3) 마을의 명칭과 변천과정 먼저 월곡법정리의 연혁(沿革)에 앞서 고창현의 변천과정도 되돌아봐야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영조36년 1760년 편찬)에는 坊里面이 8개로 보이는데 즉 천북면(川北面), 천남면(川南面), 고사면(古 沙面) 수곡면(水谷面), 오서면(五西面), 오동면(五東面), 대아면(大雅面), 산내면(山內面)등이다. 다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년 발행)에는 월곡리는 천북면에 속해 있고 월곡리 안에는 9개의 리동(里洞)있었다. 즉 월곡리(月谷里), 신월리(新月里), 성덕리(成德里), 상월 리(上月里), 계명리(鷄鳴里), 북양리(北暘里), 화평리(華坪里), 예천동(醴泉洞,禮川洞), 산소동(山所洞)등 이다. 그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1970년대초 행정구역분구조정계획에 따라 예천동. 성덕리, 신월리, 계 명리는 월곡 행정리에 속했고, 산소동은 상월 행정리에 편입 지금까지 관리 되고 있다. 그러나 북양리는 지금이야 퇴락(頹落)하여 전답으로 변해 없어졌지만 양곡의 비탈너머에 있던 마을이 북양리로 추정된다. 전 계명리에 살았던 김영부(70세)는 자신이 어릴 때 조부(김문숙:풍수지리설에 능 함)께서 생존 시 각 마을에 대하여 말씀 중 비탈너머 마을을 북양리로 호칭하시면서 언젠가는 없어 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재언하므로 확실성이 있다. 그러나 화평리는 아는 사람이 없고 또 기록 에도 보이지 않아 찾을 길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청소년수련관 앞 “상원나들”마을이 화평리로 추정된다. 이는 고찰인 상원사 입구의 길목에 또 전남 장성. 월산. 월암 등지에서덕고개를 너머갈 때 많은 사람이 거쳐 가는 길목의 마을이지만 토착성씨 살지 않고 잠시 머물며 살다가는 마을 이어서 화평리라는 공식 마을명칭은 사용하지 않고 토속명칭인 상원나들로만 호칭했기에 묻혀져 버린 마을이어서 추상해보는 논리이다. 4) 지세에 아우르는 마을의 유래 방등산 일지맥은 절절히 기복하여 십리맥을 호위 한다라는 풍수의 옛 말에 맞추어 벽오봉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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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으로 뻗어 내린 중출맥이 유순하게 내려오다가 크고 작은 봉우리 이루면서 덕고개를 만들었다. 그 가닥이 월곡 앞뜰 바라보며 산소동에 이르니 노서하전(老鼠下田)길지에 석군이 모였다. 바로 류씨의 선조산을 말한다. 여기서부터 상월마을 끝자락까지 보듬은 형세 이루고 다시 벽오봉을 시작으로 한마 장을 더내려오다 보면 또 한가닥은 반월 형을 이루며 안골반대기산은 헤아리 니 예천동 능선끝의 동출서류 흐르는 물 은 계명리(닭우리) 뒷산을 멈추게 했다. 남서향을 바라보는 지세가 달월자 골곡자 의 지명이 타당하다는 유래 가 된다. 전래되는 속설로는 방장산에 둥실한 달이 솟아 오를듯 달덩이 같은 큰 인물이 나온다는 기대감에 마을이름 달실로 부르게 된 것이며 이후 류씨 의 집성촌으로 커지면서 많은 인재가 배 출됨으로 월곡으로 변천 오늘에 이른다. <그림1>고창읍 월곡리 항공사진(다음지도)
2. 마을의 자연환경과 지명 1) 자연환경 ① 산 : 한반도에서 등마루 역할을 하고 있는 산맥이 태백산맥이라면 호서(湖西)와 호남으로 갈려 나온 산맥들이 많다. 그중 소백산맥은 충청. 전라. 경상도와 분계를 이루고 한 가닥은 덕유산과 지리산 으로 내려가는데, 산 이름이 많아 모두 생략 한다 우선 금남호남 정맥의 주산인 장안산을 시작하여 산 줄기는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馬耳山, 熊峙, 白雲山, 雲住山, 屈峙로 향하는 이 줄기를 금남정
맥이라 한다. 다시 굴치를 시작하여 七寶山. 屯月峙. 渴峙. 를 거쳐 내장산에 이르는 맥을 호남 정맥 이라하는데, 입암산을 거쳐 蘆嶺을 지나 당도한 산이 방장산이다. 방장산은 新增東國輿地勝覽 성종 12 년(1481년)이전부터 高敞縣誌 고종36년(1899년)이후까지 계속 반등산(半登山)으로 불렸다. 일명 방등 산(方等山)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바로 월곡마을을 보듬고 있는 산이다. ② 골 - 상원사골 : 월곡마을에 큰 골짜기는 상원사 골이 있다. 상원사의 샘(식수)에서 발원하여 약 1km가량 상원나들 도랑까지의 연이은 계곡을 상원사 골로 부른다. 그러나 지금은 소개(疏開)령에 따 라 없어진 동구마을터(정자나무. 휴게소)에서 다시 서쪽방향은 사자골 동쪽으로 약치골로 부르며 골짜 기마다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김영부님) - 산적골 : 월곡마을 중앙에서 방장산을 바라보면 깊은 계곡이 보인다. “산작골”로 새를 명시하는 사 람도 있지만 이 골짜기를 바로 산적골이라 부른다. 고창군 고읍지(古邑誌)에는 반등산을 명시하여 신라 말 도적떼가 은거하며 부녀자 피략 운운하는 기록이 불명예스럽게 보이고 있어 혹여 이계곡 과 연관이 된 것인지 의문스럽다.(류상섭님) - 면서골 : 방장산 8부 능선에서 실개천이 시작 점차 큰 계곡이 형성된다. 내려오면서 상월마을 웃 뜸까지 약 600여m를 면서골 이라 부른다. 그런데 면서골에 대하여 더 관심이 끌리는 것은 발원지에 서 약 300여m를 내려오면 웅덩이가 있다. 속칭 물맞이샘이라고 하여 옛날엔 그 물로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낳아 많은 옴환자들이 즐겨 찾던 전설적 계곡이라고 한다. 다시 6부 능선 계곡 주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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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면 지대가 펑퍼짐한 곳이 있다. 옛날부터 농사를 짓고 또 염소를 키웠기에 염소골이라 전래 되기 도 한다. 그러나 계곡의 명칭이 재미있다. 풍수(風水) 명칭은 골짜기의 지세가 쥐가 잠을 자기 위해 졸 고 있는 형국이어서 졸면(眠)자에 쥐서(鼠)자를 사용하는 것이 바른 명칭인데 그 어원이 퇴색해져 맴 소골 - 맨소골 - 면소골 - 면석골 등으로 발음 나오는 대로 부른다고 한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현재 도 권오태(50세가량)가 아버지(권영달) 사망 이후 그곳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이천수님) - 초분골 : 월곡마을 뒷산 골짜기를 초빈골(草殯 : 묘를 당장 설치 못할 경우 시신을 적당장소에 안 치하고 볏짚으로 덮은 후 시신이 육탈되었을 때 매장)로 활용하던 계곡이다. 1960년대 후반까지도 성 행 했는데 초빈을 초분으로 발음하며 그 외에 월곡리 주변에는 물만골(계곡에서 물맞이 한다는 뜻 으로 부르는 계곡이름)이 있고 또 뒷골이 있는데 바로 면서골 부근 뒤쪽 골짜기를 말하며 벽산사 옆 골짜기는 주산골이라 한다.(류상원님) ③ 샘 - 월곡 마을샘 : 월곡 마을의 샘은 박희구집 앞 도로변에 있다. 시멘트로 높이 45cm 가로 1.37cm 세로 1.20cm의 축대를 쌓은 샘으로 지금은 상수도가 설치되어 사용하지 않고 있어 방치된 상태이다 마을회관에서 쉬고 있는 여자노인들의 한마디. 옛날에는 그 샘물로 식수를 하였고 특히 명절 때는 다 른 사람보다 먼저 물을 길러다 정한수로 떠놓고 기도하고 또 조상에 바치는 제물도
그 샘물로 장
만했다며 술회한다. - 예천동 마을 샘 : 예천동 마을 샘은 당초 예천사 앞 은행나무 아래에 있었다. 샘 주변의 집들이 없 어지고 또 아랫등 집들은 상수도가 설치되므로 마을 샘은 메워졌고 그 샘에서 약 10여 미터 위쪽에 예천사에서 사용하는 샘을 새로 팠다. 마을 샘의 수맥 따라 위로 옮긴 것이며 물맛이 좋아 샘물 때문 에 마을이름도 단술醴자와 샘泉자를 쓰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이 쇠퇴해지면서 예돈禮 자와 내川자로 바뀌어 있다며 샘도 없어지고 글자도 변한 것을 술회한다.(예천사 관리인 김정길님) - 벽오봉샘 : 방장산 정상에서 약 30여 미터를 내려오면 아담한 정자(亭子) 한 채가 있고 그 밑에 맑 은 샘물이 있다. 옛날에는 아쉽게 서너 명만 마실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샘이었는데 2009년 고창군청 에서 정비하여 지금은 100여명도 마실 수 있는 샘으로 변모했다 산봉우리에서 샘물이 솟는 것이 신기 할 뿐이다. ④ 고개 - 고창고개 : 고창고개는 방장산 등마루인 벽오봉 밑에서 전남 장성군 북이면 만골 지금의 산 림청 휴양림으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자동차등 현대 기계문명이 발달되지 않던 조선조 후기까지도 입암산성과 추월산을 잇는 작전상의 고개이기에 현대의 군경 작전지도에 명시되어있는 고개이다. - 덕고개 : 덕고개는 상월 윗뜸에서 신림면 반룡, 세곡, 가평 등의 마을로 가는 고갯길이다. 1960년 대 전반까지도 전남 장성 지방 및 고창읍, 월산, 월암, 월곡 등의 주민들이 신림 성내 일부의 방장산 밑 지방을 래왕할 때 이 고갯길을 이용했다. 특히 일제 말기에서 6.25전후까지는 지름길의 큰길로 결 혼 시 가마의 행렬, 소장수와 장사군 등이 빈번히 다니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전설의 고갯길이 되어 잊 혀져간 길이다. 또한 상원사에 비치된 불교서적에는 사자치(獅子峙) 약치(藥峙) 등의 고개도 있다.(임정 빈님) ⑤ 저수지 - 상원저수지 : 상원사 골에서 흐르는 물을 저수하여 월곡마을 앞 농지와 성덕마을 앞 농지를 몽리면 적으로 축조한 저수지다. 1944년경 축조한 이후 계획대로 물을 공급해 농사를 경작했다. 그러나 월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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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농지는 관정시설이 잘되고 성덕 주변 농지는 꿈에 그린 농어촌뉴타운조성계획에 저수지의 수원이 필요 없게 되었다. 2009년부터 고창하수 종말처리장에서 하수처리된물을 다시 관을 통해 상원 저수지에 상류시켜 고창천으로 흐를 수 있는 시설로 바뀌었다. - 면서골 유천 저수지 : 미국의 미공법 제480호에 의한 저개발국 잉여농산물 무상원조 계획에 1965 년대 후반에 시행한 저수지이다. 면서골 200미터 지점 계곡에 제방80여 미터 높이 6미터를 소맥분을 임금으로 지금하며 축조한 저수지이다. 그러나 지금은 관정시설 발달로 제방도 유실되고 활용가치가 없어지자 근래에는 산불진화용 저수물로 활용하고 있다. - 덕고개 상월저수지 : 상월마을에서 덕고개 가는 길목에 있다. 1944년경에 축조하였는데 덕고개에 서 상월마을까지 다랑논의 젓줄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다. - 학산제 저수지 : 산소동 고흥류씨 선조묘역 아래에 있던 저수지이다. 1944년경 축조하여 지금의 제일아파트와 하월지역이 농지였을 때 수원을 공급하였지만 1990년 초부터 택지로 개발되어 지금은 제방도 없고 일반 나대지로 풀만 무성하다. ⑥ 들 : 월곡마을에 들은 없다 1990년대 초까지는 지금의 하월마을(주택단지)은 속칭 한서 평이라는 옥토의 농경지(총 292,240.5㎡ : 88,402평)이고 또 꿈에 그린 농어촌뉴타운조성지구 역시 속칭 “구례통” (149,822㎡ : 45,360평)이란 옥토의 농지였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무상할 뿐이다. 60~70년대 까지만 해도 모내기철이 되면 농부들의 풍년을 기원하던 격양가(擊壤歌)소리가 그치지 않 던 들녘이였다. 마지막 남은 구례통의 농지도 2011년 5월25일자 기공식에 이어 불도저가 농지를 메꾸 기 시작 이제 들녘은 없다. 3. 마을의 인문환경과 산업 1) 시대별 특성 (1) 방장산 - 고창현의 진산(鎭山)인 방장산 벽오봉에 산성을 쌓았던 흔적들이 있다. 축성 시기는 삼한시대로 보 지만 산성을 축성하려면 첫째 물이 있어야 하는데 벽오봉 산자락에 샘이 있고 작전상 필요한 고창고개 가 있다. - 고창현의 반등산에는 방등산가(方等山歌)의 노래가 있다 고려사의 악지편에 백제가요 5편이 수 록되어있다. 1. 선운산가 2. 방등산가, 3. 지리산가 4. 무등산가 5. 정읍사 등이다. 방등산가를 뒷받침 하는 문헌은
(新增東國輿地勝覽 성종12년 1481년 편찬)에 보이고 있다.(在縣東五里鎭山新羅末盜賊大
起據此山良家子女多被掠長日縣之女亦在其中作歌諷其夫不卽來救曲名謂之方等山方等語轉爲半登長日縣疑 卽長城)현 동쪽5리에 진산이 있다 신라말 도적이 크게 일어난 근거지가 이산이다. 양가집 부녀자가 피략을 당하였다. 피략당한 여인중 장일현의 여인들도 있다. 노래를 지어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는 곡 명이 방등산가라 말한다. 그 말이 옮겨져서 오랫동안 반등이라 했다. 장일현은 장성에 있는지 의심이 된다라는 방등산가의 내력이 있으므로 가사를 수집하여 방장산 정상에 방등산가 노래비는 꼭 세워야 한다. - 한말의사 박경래(朴慶來)가 피 채 된 산이다. 字는 道京(1874~1910)은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됨 에 격분한 호남제의진의 영수 기삼연을 찾아가 포사대장이 되었다. 고수면 우평리, 은사리, 공음면 군 유리, 담양, 순창, 부안등지에서 싸울 때 마다 전과를 올려 일군을 48명이나 사살한 기록이 있다. 의병 장 기삼연이 피체되어 죽음을 맞자 의장이 되었다 전투 중 부상을 입고 바로 방장산 석굴로 들어가 은 거하였으나 피체된 산이 방장산이다. -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하고 1945년 광복 시까지 일제는 방장산 정상 봉우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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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쇠말뚝을 박았다. 광복이후 월곡 마을 주민들이 그 쇠말뚝을 뽑은 일이 있다.(류제풍님)
<사진 고창의 진산 방등산> (2) 고창향교 터 고창향교는 당초 지금의 하월마을과 벽산사 일대가 학당동이란 지명일 때 그곳에 고창향교가 설립 되어있었다. 지반이 누습하고 장소가 협소하여 어려움이 있던 중 조선 선조22년(1589) 당시 고창현감 이홍업(李弘業)이 부임하여 향유(鄕儒) 안지(安祉)와 오희길(吳希吉)이 협의한 후 오희길의 집터를 쾌 척 받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2) 입향성씨와 인구현황 (1) 월곡마을 월곡마을은 고흥류씨 양곡파(高興柳氏暘谷派)의 현손 류익상(柳翊商 1659~1729)이 설기한 마을이다. 양곡파조인 류춘발(柳春發)은 먼저 고창에온 종형 류춘영(柳春英)의 연고따라 양곡으로 내려와 4대를 살았다. 그의 5세손인 류익상은 당시 선비중 고매(高邁)한 학자였다. 류익상이 남긴 유고(遺稿)에는 말년에 현의 동쪽 반등산 아래 예천동(醴泉洞)에 몇 칸의 집을 마련 삼소당(三笑堂)이라 편액하고 후 진양성하며 살았다라는 문헌이 있고 또 삼소당 기(記)에서도 보이는 것과 같이 1700여년 경에 들어 온 입향조로 볼수 있다. 좀더 고찰을 하면 류익상은 아버지 류교령(柳喬齡)의 4남매중 둘째로 태어나 4살 때 백부 류만령(柳萬齡)에게 양자로 입양한다. 맏형인 류익하(柳翊夏)도 신월리 갱변(강변)에 합간 정(合澗亭)을 세웠는데 신월리 역시 월곡리 앞에 있던 마을이다. 종합하면 아버지 생존 시 이전부터 후손들은 양곡마을 이웃인 월곡마을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본다. 두 번째 같은 고흥류씨인 류상섭(柳 相燮80세)의 8대조 류영(柳泳)은 이진파 파조 류경원(柳慶元)의 6대손으로 족조인 류익하의 후손 연고 따라 입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타성인 풍천임씨(豊川任氏)의 입향 내역이다. 전 공무원 출신 인 임상혁(任尙赫 57세)의 고조부인 임영호(任榮鎬 1871~1938)는 동생 명호(命鎬)와 함께 100여년전 전남 장성군 동화면 초지리에서 월곡으로 왔다. 선친인 임광준(任光準:義禁府都事壽陞嘉善大夫)의 풍수 지리설에 의한 반월형의길지에서 살기를 재언하여 입향케 된것이며 현재 상혁의 아들(임용균 25 세)까지 6대째 계승되고 근친 일가중 대학교 학장및 교육자출신이 많다. 월곡마을은 그간 柳氏가 집성 촌을 이루었으나 90년대에 마을주변개발로 성덕, 계명, 예천, 상원나들 합하여도 유씨는 8세대 뿐 지 금은 각 성받이가 살고있으며 인구는 총87세대에 남자 103명, 여자 80명 계 183명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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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월마을 상월마을 역시 월곡리의 웃뜸으로 양곡파 파조(류춘발)의 후손이 살았던 곳이다. 월곡마을을 설기한 후 길지를 찾아 시나브로 한집 두집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 그 후 성두파 류지 태(柳志泰)의 후예인 류세방(柳世芳)도 성두에서 상월로 들어와 6세손 류정일(68세)까지 180여년을 살 아 왔음으로 고흥 류씨의 전통을 이은 집성촌이 되었고 그 후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1970년초 상 월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는바 개발지역과는 떨어져있어 유씨는 지금도 24세대가 살고 있으며 하 월 마을과 연접된 곳에 포에버빌라, 이화어린이집 등이 있고 각성받이가 살며 총 58세대 남자 67명 여자 63명, 계 130명이 살고 있다. (3) 하월마을 하월마을은 당초 월곡리 관내의 허허 벌판인 농경지와 일부 구릉지였다 1994년 2월부터 고창군에서는 고창월곡 택지개발조성사업지구로선정, 택지조성공사를 시작 하였는데 계획대로 1998년 12월까지 공사는 마무리 되었다. 총면적 292,240..㎡(88,402평)중 고창읍 교촌리 일부를 제외한 월곡리 해당지 역은 206,838.6㎡(62,568평)이다. 이중 공원녹지 39,120,9㎡(11,834평)과 사회복지시설 5,063.9㎡ (1,528평)을 제외하고 아파트와 주택. 기타. 상업. 종교단체 등 각종 시설들이 입주하여 신흥도시 형태 를 갖춘 마을이 되었다. 아파트촌을 제외한 하월마을은 현재
표 1. 월곡리(주공, 제일아파트) 인구 현황
268세대 637명으로 남자 320명, 여자 317명의 각성받이가
(2011. 5. 10現在)
살고 있다.
아파트명 세대수
(4) 주공아파트 주공아파트 역시“월곡 택지개발 조성사업지구”내에 포함된 면 적의아파트다. 1990년대 중반에 택지조성공사를 마무리하고 대한주택공사에서 시공한 아파트이다. 1동과 2동은 18층 21 평이고 3동은 15층에 16평형. 4동은 18층에 21평형으로 건 축되었다. 1997년 주공아파트촌이 조성될 때는 월곡 1동으로
주공 주공 주공 주공 제일 제일 제일 제일
1 2 3 4 1 2 3 4
87 76 71 77 136 101 182 110
인 계 259 220 161 229 455 324 625 373
구 남 123 103 69 100 209 159 307 164
수 비고 여 136 117 92 129 246 165 318 209
호칭한 바 있다. 그러나 2003년 8월부터 주공 1,2,3,4동으로 분리 이장을 선임하고 주민의 편의를 돕고 있다. 주공아파트 1,2,3,4동의 인구 현황도 표 1과 같다. (5) 제일아파트 제일아파트역시 “월곡택지개발조성사업지구”내에 포함된 면적의 아파트다. 1990년대 중반에 택지조성 공사를 마무리하고 제일건설(주)회사에서 시공한 아파트다. 1999년도에 입주가 시작되어 23평형 15층
<그림 고창 월곡 제일아ㅣ파트 전경>
으로 건축되었다. 위 주공아파트와 같이 아파트촌이 조성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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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2동으로 호칭했다가 2003년 8월부터 1,2,3,4동으로 분리 리장을 선임하고 주민의 편의를 돕고 있 다. 제일아파트 1,2,3,4동의 인구 현황도 표 1과 같다.
(6) 성덕마을 성덕마을은 하월마을을 관통하는 중앙로의 아랫뜸 고창천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중앙부에 4m 간격 의 마을안길을 경계로 서쪽은 교촌리 성덕, 동쪽은 월곡리 성덕마을이다. 1900년대 이전부터 형성된 마을인데 읍내와 인접하여 농업이 한창일 때 농경업을 주업으로 생계 유지차 각성받이가 들어와 살았 다. 그중 고창읍에 뿌리를 내렸던 밀양박씨 중 박남기(77세) 조부 (박판형)가 입향하여 3대를 살다가 1970년대 박남기 가족도 모두 서울로 이거하여 지금은 각성받이가 살며 월곡 리장이 관리하는 마을이 다. (7) 계명마을 계명마을는 속칭 닭우리~달고리로 부르던 마을이다 이 마을역시 동리로와 동서대로가 (옛 고창장성간 도로)가 연결되는 월곡3거리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1970년대 지금의 도로 확장공사 때 마 을은 없어지고 1990년 말경, 모텔 1개소와 식당 5개소가 신설 유지되고 있을 뿐 이른바 달고리란 명 칭도 잊혀져가는 지역으로 변모했다. 이곳도 월곡리장이 관리하는 마을이다. (8) 예천동마을 예천동마을은 월곡마을과 연결된 웃뜸으로 옛날 柳氏들 20여세대가 살던 마을이다. 醴泉동, 禮川동으 로 그 어원이 바뀌어 왔는데 그 이유는 샘의 물맛도 그렇거니와 양곡에서 입향한 삼소당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 된다. 특히 마을 중앙에 삼소당이 살았던 집터로 보이는 돌담의 흔적은 고색이 창연 한채 성곽처럼 보이고 있다. 예천사 관리인(김정길 70세)은 60여년 전만 해도 돌담 안에 기와집이 두 서너채가 있었다고 재언한다. 그러나 지금은 각 성받이가 살며 월곡리장이 관리하는 마을이다. (9) 상원나들마을 “상원나들” 이 마을 역시 토착성씨가 설기한 마을은 아니다. 방장산 중턱에 상원사가 있고 상원 사에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였기에 “상원나들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 이후 상원사 중간지점에 “동 구”란 마을도 있었다. 약 10여세대가 살았으나 전략상 취약 마을로 선정하여 소개(疏開)하는 계획에 “상원나들”마을에 이주시키므로 마을이 확장되었다. 1980년 이후 산업화에 따라 주민은 다시 타 지역 으로 이주하므로 지금은 각 성받이가 살고 있으며 월곡리장이 관리하고 있다. (10) 산소동 산소동은 고흥류씨의 선조 묘소와 제각 및 벽산사가 있으며 1940년경까지 기와를 굽던 곳일 뿐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은 아니었다. 상월리장이 관리하는 지역이다.
(11) 신월마을 신월마을은 1950년 후기까지 약15세대 정도가 살았던 보편적 마을이었다. 마을 주변은 산이 없 고 농경지가 많아 농사짓기에 적합한 마을이었다. 토착성씨도 없고 그렇다고 많은 농지를 보유한 가옥 도 드물었다. 단 읍내와 가까운 거리여서 농사와 관련 생계유지차 들어와 살았던 마을이다. 동력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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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1970년대 초기까지 고창천 상류의 물을 이용한 물방앗간(절구통방아)이 있어 읍내는 물론 월산및 주변마을에서도 방아를 찧어가는 노랫말 같은 추억이 담긴 마을이었다. 산업화에 따라 시나브 로 집이 헐리더니 2009년 마지막 남았던 1채의 집도 헐리었다. 농촌 귀농자를 위한 월곡 꿈에그린 농어촌뉴타운조성사업지구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총사업비 326억원(국비 39억, 지방비 198억, 융 자 89억)을 들여 2011년부터 단독주택 80세대 타운하우스 20세대로 입주 희망자는 벌써 100%를 넘 긴지 오래 됐다고 한다. 현재 부지정리 작업 중에 있는바 하월마을과 같은 이상형 신도시가 생기므로 마을이름은 그대로 새로운 달이 뜨는 마을로 변신 되어가는 현상이다.
3) 문화유산 (1) 문화재 : 월곡마을 상원사 목조 삼세불좌상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10호(2007년 1월10일 등록 이며) 상원사 대웅전 문화재 자료 제126호(1986년 9월9일 등록)등 2점이 있다. (2) 비석 ① (高興柳氏世蹟碑)
산소동 옛날 기와 굽던 터 바로 밑에 있다. 2004년 12월에 세웠는데 처음 고
창에 입향한 류춘영(柳春英 1507~1575)의 입향 내역과 조부 류면(柳沔 1457~1538)이하 14위의 세 적과 고창에 류씨가 들어와 살았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그림 고흥류씨 세적비> ② (月溪書院遺墟碑) 상월마을 앞 산기슭에 있다. 1971년 4월에 정순명(鄭淳明)과 변동수(卞東洙)가 서둘러 세운 비인데 조선영조 18년(1742)에 창건한 변성진외 3위를 배양 했던 사우를 고종5년(1868) 훼철되므로 그 후 배향인물들의 행장과 훼철 된 사유를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그림 월계서원 유허비> ③ (高興柳氏正雨平澤林氏孝烈碑) 월곡과 상월마을 중간에 있다. 1946년 4월에 세웠는데 류정우의 부 류성기(柳成基)가 장수하므로 효원(孝元)이 란 사시호(私諡號)를 받을 수 있도록 효성을 다 한 그 공적을
기록한 효
열비이다. ④ (侍從院副卿柳孝元公神道碑) 미륵암 가는 입구 언덕배기 논두렁에 있 다. 1945년 가을에 세웠는데 고흥류씨 성두파 류지태(柳志泰)의 후예인 류성기가 나이 80이 넘어서도 부모에 대한 효를 다 하므로
시종원부경이란 작위와 효원이란
사시호를 지어 세운 비석이다. ⑤ (碧山祠廟庭碑) 벽산사 경내에 있다. 1928년에 창건하고 그 후 1975년 중추에 세웠는데 류탁(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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濯 1311~1372)을 주벽으로 10위를 향사하는 그 사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⑥ (士人高興柳公衍福室內夫人蔚山金氏紀蹟碑)월곡마을 앞에 있다. 1976년 단오절에 세웠는데 류연복 (1894~1935)이 사망함으로 처인 울산김씨가 척추장애가 있는 아들 류경술(1924)을 양육하며 수절하 였다는 그 공적을 새겨 종손 류상섭이 세운 열녀비다. ⑦ (柳氏暘谷派 和義契碑) 상월마을 입구에 있다. 1989년 청명절에 세웠는데 월곡 및 상월 마을에 살 고 있는 고흥류씨 양곡파 후손들로 결속된 속칭 “가마계”이다. 1924년 정월 류씨(柳氏)원로인 원식(元 植1891~1969)이 당시 천수답(天水沓) 농사철엔 일가 끼리 싸우고 나면 앙금이 가시지 않자 서로 화 해시킬 의도로 친목계를 조직, 그간 지대한 효과를 거두자 그 내용을 기록하여 비를 세웠다. ⑧ (바르게 살자 塔碑) 하월 공원 중앙에 2003. 3. 1 세웠는데 바르게살기 운동 행동강령 및 고창군 민 헌장 등을 기록하여 세운 비다. (3) 고인돌 : 월곡리 상원나들마을 웃뜸에 고인돌 중형 1기가 1960년 이후까지 있다가 없어졌고 월곡리 상월마을 한영복 집안에도 고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또 상월과 월곡마을 중간지점 에 세워진 위 평택임씨 효열비의 받침돌도 고인돌로 추정되는데 당초에는 상월에 있던 것을 사람의 힘 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4) 인물의 묘 ① 산소동 고흥류씨 선조묘역에 류면(1457~1538), 류춘영(1507~1575), 류춘발(1536~1609) 류운(1547~1617), 류동희(1579~1644), 류동신등 6위가 안장되어 있고 백호등(白虎嶝)에 2위 합하여 15위가 안장 되어있으나 인물의 묘로 6위만 기록했다. ② 방장산에 전 국회의원 유진(柳津 1906~1985)의 묘가 속칭 “소쿠리형국”에 안치되어 있다. (5) 재각 : ①
설립된 재각은 學山齋로 위 고흥류씨 15위 시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 건물이다.
② 동구마을(상원사 가는 중간지점)에 밀양박씨 上院齋가 있었으나 1970년대 초 노동으로 옮겼다. (6) 길 : 월곡리 관내에 시설된 중앙로와 동서대로는 모두 월곡리를 관통하고 있다 하월마을이 농 경지일 때는 한서평이라 하여 옥토로 인정 받았으나 대로가 개설됨으로 농민의 불만 여론도 많았 다. 그러나 1990~1993년까지 택지개발조성공사와 함께 도로는 개설되었다. 마을안길 역시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길을 넓혔으며 덕고개를 넘는 길은 월곡 지금의 길 윗편 대밭사이의 면서골에서 흐르 는 개울가따라 큰길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도 없어 찾기 어렵다. (7) 보호수 : 월곡마을 모정앞에 있는 보호수 수종은 느티나무이며 2006년 7월기준 300년의 수령 을 갖고 있고 키는 약 20미터 둘레는 6.3미터이다. 2005년 10월14일 고창군 보호수 제9-14-48호로 지정되어 있다. (8) 亭子 ① 합간정(合澗亭) 고창읍 월곡리 신월 갱변 가에 있었다. 류춘발의 현손 류익하(柳翊夏 1650~1716) 가 세운 정자다. 풍류를 즐기고 쉴 곳을 갖기 위해 월곡리 신월마을 갱변가(월산천과 노동천에서 합류 되는 곳 추정)에 세웠다. 백사장이 좋아 황윤석의 시가 있다. 城角山回扚
籬根水落沙梁魚大小味塊月淺
深波성곽모서리산은 외나무다리 둘러가고 울타리 밑을 흐르는 물은 모서리에 떨어지네 어량으로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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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고기 크고 작은 그 맛은 회나무 달빛은 얕고 깊은 물에서라 (이하생략)그러나 지금은 정자터도 흔 적도 없다.
<그림 월곡 뉴타운과 합간정 터>
② 명암정(明菴亭) 고창읍 월곡리 261번지에 있다. 월곡 마을에 입향한 임영호(任榮鎬)의 증손자인 임정빈(任正 彬)이 부친 임달순(任達淳 1907~1957)을 기리기 위해 2002년 4월 집 앞 50m 부지(167평)정원 한편에 정자를 세우니 부친의 아호(雅號) 그대로 명암정이라 편액(扁額) 했다. “가세가 기울자 전념하시던 學業 중단하시고 司法 書士의 길을 택하여 정려한 보람으로 가세 회복시키고 후예(後裔)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라는 그 은 혜 망극지은 하해 (罔極之恩 河海)같아 자녀들 뜻 모아 명암정을 세웠다.
4) 전설과 풍수이야기 (1) 臨磵堂과 伏雉 이야기 양곡마을 앞산 2 부능선에는 복치형국이란 묘가 있다. 월곡 파조의 묘인데 그곳에 묘를 쓰 고는 명당 바람이 불었는지 그 후손들의 생활은 윤택해지고 출세하는 등 성장일로에 있었다. 뿐만 아 니라 지금은 없어졌지만 양곡파조가 세웠던 임간당이란 정자는 복치묘에서 훤히 보이는 약 300미터 앞쪽으로 지금의 동산물 끄트머리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양곡마을 부근이기에 류씨 후손들 은 임간당에 모여서 거드름을 피우며 횡포가 심했다. 임간당 아래쪽에는 고창장성간의 양곡잔등길 목이어서 하루에도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길이다. 특정인이 아닌 낮선 사람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지 나가다가 눈에 띄게 되면 봉변을 당하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승(老僧)이 고개 를 들고 지나가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임간당에서 보고 있던 류씨의 패거리가 노승에게 오더니 무 조건 발길질을 하며 시비를 건다. 중놈이 감히 여기가 어데라고 고개를 쳐들고 지나가느냐행패를 당한 노승의 한마디 고개를 들고 간 것은 저기 저 앞에 보이는 묘 때문이오 저 묘는 좌향도 틀어지 고 또 묘에 구렁이가 들어있어 안타까워서 쳐다보고 가는 길이요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패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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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감언이설인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너이놈 그말이 사실이렸다 묻자 소승이 뉘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겠소하며 호언 장담을 했다. 노승의 말을 들은 패거리들은 일단 임간당 기둥에 묶 어놓고 “묘를 파서 구렁이가 나오지 않을 때 너는 죽을 줄 알어라라는 조건을 붙이고 묘를 파기시작 석자정도 팠는데 별안간 꿩 한 마리가 묘에서 나오더니 산소동쪽으로 날아 가버렸다. 바로 엎드려 날 아갈 기세를 취하고 있는 꿩 형국이기에 묘를 건드리면 안 되는 형국이다. 화가 날대로 난 패거리들은 노승을 죽이려고 임간당에 와보니 노승은 없고 빗자루만 묶여있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그 노승 은 일반중이 아닌 도사였다. 류씨들의 지나친 횡포에 벌을 내렸고 그 후 가문이 쇠진하여 양곡을 떠나 게 되었다는 풍수 이야기다.(류택주 님) (2) 상원사 부처 이야기 당시 백양사 방장이던 만암 스님은 상원사와 인연이 아주 깊은 관계였다. 백양사에 극락전을 세로히 짓고 모셔야할 부처님은 시대적으로 오래되고 영험이 있는 상원사 대웅전 부처님으로 정하고 인부를 동원하여 상원사 에 왔다. 부처를 가마에 태우고 상원사를 내려와 동구마을(정자나무 휴게소) 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때에는 기계문화가 발달되지 않은 시기여서 소달구지나 아니면 사 람의 힘으로 운반할 시기였다. 다시 백양사를 가기 위해 가마를 들려 하자 가마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 았다. 만암스님과 수행 스님들은 부처님 앞에 기도를 울리며 땅에서 떨어지도록 축원을 하여도 반응이 없었다. 그때 만암스님은 부처님이 상원사를 떠나지 않으려는 뜻임을 알고 “부처님 그럼 상원사에 도 로 갑시다.” 라고 기도를 하자 그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그때야 땅에서 떨어져 다시 상원사에 모신 부 처님이시다 라는 이야기인데 현재 모셔있는 삼존불(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의 영험함을 말 하는 이야기다.(임정빈 님) 5) 민간 신앙과 민속 (1) 마을의 당산제 월곡마을의 당산제는 음력 정월 보름날오전10경 떡시루, 나물류, 술등의 제수를 장만하여 당산 나무 옆쪽에 제상을 차리고 지낸다. 미리 정한 제관은 제례 순서에 따라 제사를 진행하며 끝나면 농악 놀이도 한다. 농악대는 가가호호를 방문 한해의 복을 빌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1960년 대 이후 지금은 특정개인이 자비로 제수를 준비하여 제사의 예를 드릴뿐 농악도 참석자도 별로 없다. 그러나 당산제의 맥은 계속이어가고 있다. (2) 마을의기우제 월곡마을에서는 가믐피해가 심할 때 진산(鎭山)인 방장산(예천사의 위쪽능선)에 제수를 차리고 불을피우며 기우제를 지낸다. 이는 마을사람들이 주관을하고 주변마을 농민들도 참석을하는대 1968년 여름 한해(旱害)때 기우제를지낸 것이 마지막이었다(류택주 님) 6) 마을의 인물 (1) 류춘발(柳春發 1536~1609) 자는 중화(仲華)이고 호는 관란(觀瀾)이며 본관은 고흥으로 경기도 수군절도사 류의함(柳宜諴) 의 아들이다 서울에서 출생을 하였고 활쏘기 말타기를 잘하며 경전을 배워 글읽기를 좋아했다. 41세에 중시에 합격 광양, 교동, 흥덕등의 현감을 지냈다. 이어 충주 홍주등의 판관을 지냈고 방답, 벽단등의 첨사와 훈련군기 첨정을 거쳐 보성군수로 승진했는데 선조 20년(1587)해적이 보성군의 해변을 침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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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군사들이 기강을 잃게되니 문책을 받아 경원(지금의 부천시)으로 귀향갔다가 선조 21년(1588)에 석방 되었다. 가족을 이끌고 고창 양곡으로 내려와 관란정, 임간당을 짖고 은둔하며 지내다가 선조 30 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통정부호군으로 명나라 장군을 반접했으며 난이 끝나자 귀향했다. 관란 유고가 있으며 시등 묘갈명이 남아있다.(고창의 유학편) (2) 류동립(柳東立 1577~ ?) 자는 사정(士挺)이고 군수 춘발의 아들이다. 일찍 문장에 능하여 선조 10년 정축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부정, 정랑을 거쳐 임진왜란때 호성(扈聖)의 공이 있어 1등훈에 참여했다. (국조문과 방목편) (3) 류동휘(柳東輝 1579~1623) 자는 사명(士明)이고 군수 춘발의 3남 정랑의 아우이다. 사계 문하에서 경사를 섭렵하고 시,예(詩,禮)를 잘했다. 사마에 올라 의금부 도사가 되었고 인조반정 정사 1등훈에 참여 했으며 정묘호란에는 호종의 공으로 영사 1등 훈에 참여 했다 병자호란에 모의했다가 강화하니 벼슬을 그만 두었다 뒤에 좌승지가 주어졌다.(호남병자 창의록편) (4) 류철견(柳鐵堅 1583~1655) 자는 여수(汝壽) 호는 양곡 군수 춘발의 손자이다 광해7년(1615) 사마하여 창릉 참봉을 지내고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에 영광군수 원두표(元斗杓) 진사 신유일(辛惟一)과 병양을 모취하였으며 정 묘노란에도 사계 김장생을 따라 병량을 모취하는 등 병자호란에도 창의하였으나 청주에 이르자 화의가 되었음을 알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도원 도찰방에 재수되고 뒤에 벽산사에 배향되었다 (호남모의록편) (5) 류익상(柳翊商 1659~1729) 자는 상경(商卿) 호는 삼소당이며 춘발의 현손이다. 고창양곡에서 태어나 4살 때 어머니를 여 의고 백부 만령에게 출계했다. 양부의 정훈을 계승하여 문학이 흥취했고 예학에도 밝았다. 아우인 익 주가 세상을 뜨자 祭生庭叔弟翊周文을 지었고 고숙이 세상을 뜨자 挽內舅魚公大叔의 시를 지었다. 만 년에는 현의 동쪽 방장산 아래의 예천동(醴泉洞)에 몇칸의 집을 마련 삼소당이라 편액하고 후진을 양 성하였다. 삼소당유고목록시문등의 글이 있다 (고창의 유학편) (6) 류광적(柳光迪 1715~1789) 자는 여실(汝實) 호는 성은(城隱)이며 철견의 현손이다. 대대로 이어오는 시례의 가정에서 출생 했고 성품이 자량했다 종영 외암명적으로부터 글을 배워 가학을 계승했다. 조부 류익하가 지은 합간정 을 중수하고 학문을 연찬하며 후진교도에 힘썼다. 저서로 성은유고가 있다.(고창의 유학편) (7)임석재(任晳宰1903~1997) 풍천임씨 명호(命鎬)의 장남이며 서울대학교 철학과 제1회를 졸업했다. 서울대교수(민속학자)로 40여년을 재직하며 설화집(說話集)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8)류 진(柳津1906~1985) 석탄 운의 후손이며 동천(東川) 흥선(興善)의 아들이다. 월곡에서 출생하 여 고창고보 연전(延專) 문과를 거쳐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수학했고 일본 천리대교수 정읍농고교장 미 소공동위원회 1급 통역관 서울대 교수 미시간대 교환교수를 역임했고 4.19혁명이후 정치에 투신 재 5,6대 국회의원에 당선 되었다. 특히 영어에 조회가 깊어 영어구문론(英語構文論) 상하 2책은 명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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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낙향의 지가를 올리기도 했다.(고창군지편) (9) 임택재(任澤宰 1912~1938) 풍천임씨 명호의 차남이다 월곡에서 출생 고창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중 항일독립운동사건 에가담중 왜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후 후휴증으로 26세에 사망했다. (10서정주(徐廷柱 1915~2000) 달성서씨 광환의 장남이다.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578번지에서 출생 1929년 서울중앙고보 1 학년 재학중 광주학생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되여 1차는 훈방 처리되었다. 2차년도인 1930년 동 사건 관련 주모자 4명중 1명으로 구속되어 미성년자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동 교에서 퇴학을 당한 다.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하기위해 그때 전 가족이 고창읍 월곡리 276번지 에 전입하였다. 동년3월 에 고창고보 2학년에 편입했으나 5월에 자퇴 처리되어 왜경의 감시 하에 학교를 떠나야 했던 비운을 짊고 가족은 1939년경까지 살다 이거한 흔적이 있다. (11) 임흥순(任興淳1916~1977) 풍천임씨 덕재(德宰)의 차남이다 고창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경도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학교병원 약국장을 역임하고 조선대학교수 및 약학대학장을 역임했다. (12) 김경태 7) 마을의 기관과 시설 (1) 보육시설 : 월곡리 312-2번지에 “열린 아동센터”와 “이화어린이집”(원장 박진희)이 있다. 2006년 3월에 개설한 어린이집은 2세~7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 (三歲之習至 于八十)라는 뜻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키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 라”는 목표로 77명의 어린이를 지도하며 열린 지역 아동센터에서는 초등학교 1~6학년까지 맞벌이 가 정을 위해 29명의 학생을 고창군의 보조로 관리 운영 중에 있다. (2) 교회 ① 창대교회(고창읍 월곡리 615번지) 창대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전도총회) 소속교회이다. 2002년 6월 지금의 위치에 성전 186 평과 선교관 40여평을 건축하고 지역 청소년 100명과 신도 130여명에게 “겸손하게 지역을 섬기는 문 화와 풍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동훈 부목사의 설교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당초에는 1992년 3월 이병희 전도사와 최기쁨 사모외 3명이 고수면 봉산 와촌마을과 고창 읍 은동, 백양, 덕산마을 등을 중심으로 덕산리 산 35번지에 “전원교회”를 개척하여 선교활동을 시작 한 것이 대창교회의 전신이기도 하다. ② 고창교회 예배당(고창읍 월곡리 624번지) 고창교회는 특정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교회이다. 2003년 9월에 남중희 목사 주도로 대지 약 80여평에 건평 80여평(1,2층 포함)을 건축하고 “신도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의료봉사를 실천하 면서 특히 어린이 및 청소년들에게는 스포츠를 통한 선교활동에 관심을 보인다”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③ 기독교 복음 침례회 고창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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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절 ① 상원사(上院寺) : 상원사는 고창군 고창읍 월곡리 1번지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본사 (선운사)의 말사로 경내에는 대웅전과 나한전이 있으며 전통사찰 제29호(1988. 7.29)로 지정되어있다. 상원사 목조 삼세불좌상은 도지정 유형문화재 210호(07.01.19)로 등록 되어있고 대웅전은 도지정문화 재 자료 제126호(86.09.09)로 각각 등록되어 있다.
<그림 상원사 대웅전> 상원사 창건시기는 백제 성왕24년(546)에 고봉(高峯) 스님과 발용(發龍)스님 두분에 의해 창건되었다 고려태종 25년(942) 은장(殷欌)스님이 중건을 했는데 대웅전에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비로자나불과 노 사나불을 좌우에 안치 했다 경내에는 보광전과 산신각이 있으며 범종각 및 요사채등 건물 8동이 있 다.(563-2594) 상원사 경내에 11층의 청석탑이 있었다고 문헌에만 보일뿐 실제는 없다. 또다른 문헌에는 상원사에 대 하여 이사찰외에 內院. 外院. 臨空. 碧昊. 五峯. 水月. 醴泉. 上月. 下月등 八方九庵齋가 있었다고 기록 되어있다. 전래되는 구전에 의하면 지금의 상원사는 암자이고 큰 절은 동구마을터에 있었다고 전래된 다. ② 미륵사(彌勒寺) : 미륵사는 고창군 고창읍 월곡리 48-2번지에 있다. 대한불교 태고종 종단에 등록된 사찰이다. 경내에는 대웅전등 3동의 건물과 모정(휴계소)이 있으며 사단법인 태고종 제621호의 현판이 걸려있다. 대웅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좌우에 안치하였다. 대웅 전의 후면 벽에는 탱화가 그려 있는데 그림이 동(銅)으로 양각되어 설치했다고 한다. 그 외에 보살등 따로 100불을 안치했고 특히 대웅전 윗편 언덕에는 9척의 석불이 서있고 사찰입구에도 크고작은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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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안치했다.
미륵사는
1974년
가을
현재의
추담스님이
설립했다.
속명은
이내훈
전화
011-657-3607 <그림 미륵사 대웅전> ③ 만불사(萬佛寺) : 만불사는 고창군 고창읍 월곡리 20-1번지에 있다 대한불교 삼론종 전북총 무원 역을 맡은 사찰이다. 경내에는 4동의 건물과 종각이 있으며 대웅전엔 아미타불을 주불로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안치하였으며 창건시기는 1997년 청담스님(속명 김호영)이 청건한 사찰 이다. 전화 010-7171-9664 ④ 예천사(醴泉寺) : 예천사는 고창군 고창읍 월곡리 60-1번지에 있다 대한불교 태고종으로 되 어있다는 관리인 김정길(70세)의 제언이다. 예천사는 150여년전 명불상인(名不詳人)이 당초
포교당으
로 창건 하였다. 창건인 사망으로 현 관리인의 아버지(김갑수 98세 1975년사망)가 인수하여 관리 하 였으나 사망으로 그의처(현 관리인의어머니:하납순 92세 2003년 사망)가 관리하다가 역시 사망함으로 지금의 김정길부부와 여동생(김정례)이 공동 관리중에 있다. 1980년 모(하납순) 생존시 극락전을 건축 예천사로 명칭을 바꾸고 본채에 봉안된 불상 약사여래불, 나반존자를 극락전에 옮겨 관리중에 있으나 김정길은 승려가 아니고 부모 생존시부터 불교 신봉 가정에서 출생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화 564 2482 (4) 벽산사(碧山祠) : 고창군 고창읍 월곡리 102-1번지에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학문과 공훈이 많은 10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하는 사우(祠宇 )로 1928년에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며 매년 음 9월 13일에 향사하고 있다. ① 柳濯(1311~1405) : 고려 공민왕 때의 대신 고흥인으로 호는 誠齋 시호는 忠正이다. 고려 공민왕때 문화시중 도첨의 정승 고흥부원군에 봉하였고 조선태조 6년(1397년)에 보국순록대부 고흥백을 증직하 고 시호를 내렸다. 축문:志大勇邁 德備行純 斥邪衛正 興王定難 貞忠扶義 直道成仁 遺風永世 啓佑後人
<그림 벽산사 전경> ② 徐弘渡(1543~1593) : 임진왜란 때의 순절인 利川人으로 자는 여즙(汝楫) 효행과 충의가 탁월하였 다 부모상에 여묘 읍혈 육년하였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 신 순절하였다. 축문:惟孝惟忠 扶植綱常 鰲倡晉殉 百世可徵 ③ 柳澐(1547~1611) : 조선시대의 학자 고흥인으로 호는 石灘 탁의후예로 품은 뜻이 아름답고 문장 이 화려했다 조정에서 청암 찰방으로 불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창에 은둔하며 학문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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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문:謝絶榮途 高尙其事 養德林泉 淸風百世 ④ 安貞 : 임진왜란 때 창의한 선비 竹山人으로 司果 子詮의 증손이다. 무과에 올라 선전관을 거쳐 의금부도사를 역임하고 선략장군에 올랐다. 품성이 대범하고 지절이 강계하였다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축문:慷慨有節 殉身扶義 于彼錦山 百世仰止 ⑤ 徐馹男(1560~1636) : 정묘호란 때의 창의한 선비 이천인으로 진사 應星의 손 첨정 홍도의 종자 인조2년(1627) 정묘호란 때 류철견등과 함께 의병과 군량을 모아 의청으로 갔으나 화의가 이루어졌다 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여 무장에 은거하였다. 축문:學有淵源 盡忠報國 北望一坮 瞻仰來百 ⑥ 柳慶元(1574~1638) : 조선초기의 무신 유학자 고흥인으로 운의 아들 학포 梁彭孫의 문인 무과에 급제 훈련원 주부에 이르고 인조2년(1624) 이괄 이 장차 모함할지 모르니 대책을 세우자고 주장하였 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림 ?
벽산사 전경> 축문:孝友之性 文武之器 棄官養德 風韻仰止 ⑦ 柳東仁(1577~1641) : 조선전기의 무신 고흥인으로 운의 아들 문무가 양전하고 충효가 겸비하였 다. 무과에 급제 鉢浦 수군만호에 이르렀다. 이괄의 난에 안현에서 큰 공을 세워 녹훈되었다. 축문:文武慷慨 奮義討賊 鞍峴樹功 有辭來百 ⑧ 柳鐵堅(1583~1655) : 본문 인물란에 기록되어 내용은 생략. 축문:行敦學博 奮忠報國 三倡苦節 千秋炳爀 ⑨ 安晉(1586~1637) : 정묘호란 때 창의한 선비 죽산인으로 호는 宋岡 참판 초(迢)의 6세손이다. 이 괄의 란과 정묘호란에 창의하여 병정을 모집하고 군량을 취합하여 병영에 수급하였고 대첩의 공을 세 웠다 화의가 성립된 후 은거하였다. 축문:行高學邃 韋布奮義 忍恥南漢 杜門自閟 ⑩ 柳汝檜(1589-1591) : 조선중기의 의사 고흥인으로 운의 손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효우가 출중하였고 문무에 겸전 하였다. 인조2년(1624) 이괄의 란에 창의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축문:奮義敵愾 從事獨賢 惟忠惟孝 矜式後人 (5) 모정 ① 월곡리 모정(茅亭)은 마을앞 보호수 옆에 있다. 1982. 5월 마을출신 출향인 류택준(일명 오조) 이 당시 자비 300백여만원을 드려 서울에서 직접 인부대동 시멘트 슬라브 8평을 건축하여 마을에 기 증한 건물이다. 당초의 모정은 노후 된 초가지붕 2칸 인데 1981년 여름철 태풍에 전파되었다.당시의 사정상 행정적 지원은 물론 마을 형편도 열악하여 노심초사 중 자수성가한 기증인이 종형(류택주)의 직언에 의해 찬조한 것이다. ② 상월마을 모정은 마을회관 옆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4평가량의 목조건물이 보존되고 있다. 풍 우에 기둥이 부식되어 무너질 위험이 있자 20여 년 전 이장 류제풍이 시멘트벽돌로 기둥을 쌓아 교체 했고 근래 지붕도 강판기와로 교체 관리 중에 있다. ③ 하월마을 모정은 공원부지(11,834평)내에 1994년 개발당시 2동의 모정과 어린이 놀이기구 등이 완비되어 있었으나 2011. 4월 이장 (정일송)이 주관하여 소공원 마을회관 옆에 군 지원금 1,700만원 을 들여 6각 목조와즙 1동 약 2평가량을 신축 관리 중에 있다. ④ 상원나들 모정은 월곡리 121-3번지 마을 앞 도로변에 있다. 2003. 2월에 군지원금 1,500만원으 로 목조와즙 약 5평을 건축 관리하고 있다. (6) 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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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월곡마을 회관은 마을길 옆에 임정빈 소유 논 45평을 희사 받아 1997. 12월 군비 2,000만원과 마을기금 1,000만원으로 벽돌 슬라브 22평을 건축, 대한노인회 고창읍지회 월곡경로당 현판을 붙이고 마을회관 겸용으로 회장 박희구(회원 45명)가 관리하고 있다. ② 상월마을회관은 1988. 5월 모정이 있는 부지에 인접한 박상일 소유 논 100평을 매입 군비 2,000 만원과 마을주민 및 출향인 등의 성금 1,000만원으로 벽돌 슬라브 20평을 건축 마을회관겸 남녀 경로 당으로 회장 류제풍(회원 32명)이 관리하고 있다. ③ 하월마을회관은 월곡리 567번지(소공원)에 이장 (정일송)이 주관하여 2010. 12월에 군지원금 5,000만원으로 벽돌 슬라브 20평을 건축, 남녀 경로당겸 회관으로 회장 김해성(회원 20명)이 관리하 고 있다. ④ 주공아파트 마을회관은 1,2,3,4동 공동소유로 2010. 2월 군지원금 5,000만원과 자부담 500만원으 로 주공아파트 102동 102호(22평)을 매입, 마을회관겸 남자경로당으로 회장 이영수(회원 15명)가 관 리중이며 여자 경로당은 별도 관리 동에 있다. ⑤ 제일아파트 마을회관은1,2,3,4동 공동소유로 2000년 5월 제일아파트 102동 107호(22평)을 아파 트 신축당시 시공사인 제일건설에서 기증하였으나 유명무실 운영하다가 2009년 4월부터 회원을 늘리 고 본격 관리하여 회장 배홍기(회원 53명)가 관리하고 있다. (7) 고창군민 종합복지회관 종합복지회관은 1997. 12. 30 부지 725평에 건평461,3평(3층) 으로 건축되어 장애인단체 및 관련 단체 등이 입주하여 1층에는 ① 지체장애인협회 회장 신욱 561-1080 ② 신체장애인협회 회장 최관주 564-5108 ③ 시각장애인협회 회장 김원종 562-0226 ④ 농아 장애인협회 회장 최희수 561-2053 ⑤ 장애인자립생활 지원센터 대표자 정종만 561-2337이 있으며, 2층에는 ① 고창지역 자활센터 센터장 김정욱 560-2589 ② 자원봉사단체 대표자 김복동 560-2698 ③ 바르게살기운동 고창군 협의회 회장 김복동 563-7896 ④ 자유총연맹 고창군지회 대표자 장세영 564-2272 와 회의실이 있다. 여성회관은 별도건물로 1998년 11월 부지 803평에 건평308.6평(2층)으로 건축되어 ① 여성회관 교 육담당 안해자 560-2582 ② 여성자원활동센터 담당 김명숙 560-5683 ③ 취업센터 담당 강혜윤,유주 호 560-2796 ④ 아이들 돌보미담당 이민희 560-5688 ⑤ 소비자고발센터 대표 장명희 564-3131 등 의 단체가 배치되어 있으며 2층공간은 교육장소 및 회의실로 활용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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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고창군사회복지관 전경> (8) 소득작물 ① 경작규모 월곡마을의 농사이야기는 흘러간 옛이야기인 것 같다. 앞에서 농경지에 대하여 기술 했듯이 월곡리의 농경지는 마을앞 적은면적 뿐이겠지만 고령가구에 읍과 인접 젊은 층은 상공업으로 전환했기에 전체 87세대중 15가구만 논농사를 짓고 있다. 그중 2000평 이상 3가구 1000평 이상 4가구 1000평 이하 6가구이며 2가구는 복분자를 경작한다. 밭농사 경작역시 10가구 중 1000평 이상 2가구이고 1000평 이하 8가구이다. ② 농산물재배 변천과정 월곡마을은 조상대대로 논에는 벼와보리를 경작하여 왔다. 그러나 지금은 보리는 일체경작하지 않고 1 모작인 벼만 경작한다. 밭에는 고추와 복분자를 경작하고 있으며 그중 뽕나무를 심은 가구(400평)이며 감나무를 심은 농가도1가구(700평) 가 있다.
4 마을의 조직과 행사 1)마을의 조직 월곡마을에는 곡청 단성계(谷靑 團成契)라는 명칭의 마을계가 있었다. 1954년 12월에 이 마을을 거주 임정빈 류택주 등이 주축이 되어 당시 청년모임으로 시작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70년대에는 새마 을 사업에도 적극 봉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 곡청”이라는 명칭은 빼고 단성계 이름으로 마을 1가구 1계원 자격을 부여하여 출향인도 희망에 따라 참여하는 마을계로 회원은35명이며 매년 12월25일 수계를 한다. 하월마을에는 하월친목회가 있다. 2008년 2월9일 마을주민 20여명이 결성한 모임인데 발전하여 40명으로 증원되었고 그간 마을 회관과 모정건립에도 기여했으며 모임은 분기별 1회이고 회 장은 이장 정일송이 관리한다.
☐ 월곡리(월곡 ‧ 상월 ‧ 하월 ‧ 주공 ‧ 제일APT) 이장임명사항 마을명
임명일
퇴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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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비고
월곡 ″ ″ 상 월 ″ ″ 하월 ″ ″ 월곡1동 주공1 ″ 주공2 ″ 주공3 ″ ″ ″ 주공4 월곡2동 제일1 제일2 제일3 ″ 제일4
1984-01-01 1998-01-01 2006-01-01 1984-01-01 2000-01-01 2008-01-01 2003-09-09 2004-01-01 2008-01-01 2001-05-23 2003-09-09 2010-01-01 2003-09-09 2010-01-01 2003-09-09 2006-01-01 2006-12-01 2009-02-05 2003-09-09 2001-05-23 2003-09-09 2003-09-09 2003-09-09 2006-09-01 2003-09-09
1997-12-31 2005-12-31 1999-12-31 2007-12-31 2003-12-31 2007-12-31 2003-09-08 2009-12-31 2009-12-31 2005-12-31 2006-11-30 2009-02-04
2003-09-08
2006-08-31
※도움주신 분 임정빈(전고창중 교장) 이기화(전고창문화원장) 류제풍(전상월이장) 정일송(하월 이장) 이천수(전고창군청공무원) 류택주(고창군관광해설사) 서동진(미당시문학관근무) 김노수(산경연구가) 최주화(고창군청근무) 염양선(고창읍사무소) ※ 참고문헌 전북 전래지명총람, 柳在泳, 1993. 高敞郡古邑誌 影印本, 고창문화원, 1991. 高興柳氏水使公派 世譜, 柳濟喆, 1979.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朝鮮總督府, 1912. 全北佛敎年鑑, 文在坤, 1993. 戊己解 (山經表), 金明濟, 1994. 佛敎辭典, 東國譯經院, 1964. 湖南人物志, 金鳳文, 1991. 高敞三鄕誌, 羅弘燦, 1991. 高敞의 儒學, 高敞郡, 1994. 全北院宇大觀, 全北鄕校財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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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섭 문기태 김재덕 유제풍 유용상 송태의 김병선 김상영 정일송 김병현 김병현 이영신 정우진 이덕순 정균상 정오순 정미숙 안홍중 김길환 문영식 정경미 김덕현 김현대 최진수 김량희
010-3640-2864
010-5191-2207
011-218-7955
019-616-1631 010-2030-8526
010-2639-6818 011-672-9518 010-5664-5317 011-670-2552 011-650-0585 010-4657-4846
高敞郡誌, 高敞郡,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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