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最高)의 천일제염 생산지 고전리 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이병열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심원면 고전리(高田里)는 고전(高田), 진주(眞珠), 예동(禮洞), 염전(鹽田)을 일컫는 법정리이 다. 자연취락으로는 고전포, 진주, 옥동(玉洞), 예동, 염전, 독자골, 불뜽, 송현, 호룡동, 장승 배기 등이 있다. 심원면 고전리라는 지명은 1914년 이전에도 있었던 지명이었다. 1914년 이후 일제의 부군통합령에 의해 동군의 예동리(禮洞里), 만돌리(萬突里), 고전리(高田里), 주 산리(珠山里), 두어리(斗於里)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고전리라 하였다. 고전리(高田里)는 본래 포구였으므로 고전포라도 불렀다가 1937년 간척이후 포구는 사라지 고 염전과 논이 만들어졌다. 간척이전 고전리 앞은 전통적인 소금을 생산하던 염밭이었다. 그러나 간척공사를 하면서 둑이 쌓여지고 높은 밭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고전이라 불렀다한 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황학산의 누런 학이 높은 밭에 내려앉아 황학산의 정기가 높은 밭에 흘렸다고 해서 고전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독자골 마을은 부처바우가 있는 산 남쪽에 외따로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불 뜽마을은 염전 서쪽 갯가에 있는 마을로, 전에는 해풍으로 모래가 밀려와 섬처럼 쌓여 있던 곳을 개간하여 이룬 마을이라 한다. 송현마을은 소나무가 울창하던 곳이라 하여 칭해진 이 름이며,
장승배기마을은
장승이 서있던 곳이라 하 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고전리는 22번 국 도의 심원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군도
7번을
따라 약3km 들어가면 닿 는 곳이다. 고전리는 동 쪽으로 두어리와 만돌리, 서쪽으로 해리면 동호리, 남쪽으로 주산리와 궁산 리,
북쪽으로
곰소만과
만돌리에 접하고 있다.
<사진> 고전리 항공사진(다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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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을의 자연환경과 지명 1) 자연환경 고전리의 산계는 해리면 하련리의 청룡산(314m)에서 갈라져 나온 줄기가 안산의 이성산 (89.8m)을 지나 궁산(弓山)의 할뫼(275.5m)를 이루고 북동쪽으로 발달하다가 도천저수지 앞의 도산(174m)에서 멈춘다. 다시 도산에서 북서쪽으로 발달한 산계는 주산마을을 지나 남동쪽으로 발달하여 진주리의 주산(85.5m, 主山)이 되고, 북동쪽으로 발달한 산계는 황학 산(109m)을 이루고, 두어리 동산마을의 주산(81.5m, 主山)이 되어 멈춘다. 주산을 지나 형 성된 산계(동북-남서)의 가운데 부근(90.5m)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발달한 산계는 서쪽으로 발달하여 예동리의 주산(26.3m)이 되어 멈추고, 북쪽으로 뻗어 가다가(28.7m) 한 갈래가 서쪽으로 발달한다. 서쪽으로 발달한 산계는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한 갈래는 북서쪽으로 발달하다가 정동마을에서, 다른 갈래는 남쪽의 고전마을까지 발달하다가 멈춘다. 북쪽으로 계속 발달한 산계는 두어리의 주산(35.8m)이 되어 낮게 발달하면서 두어리를 감싸 돌면서 곰소만에서 멈춘다. 수계는 산계의 흐름과 반대로 골짜기 마다 골을 만들며 대체로 동에서 서로 흘러간다. 고전포(高田浦)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무장현 산천조에 고전포는 현에서 20리 떨어 져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염분이 있다는 기록(在縣北二十里鹽盆)이 있다. 간척사업 이 진행되기 전에는 이 일대가 모두 자염업이 성행하던 곳이다. 포구는 1910년 이전 예동 으로 가는 도로인 구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학허리라고 부르던 곳까지 갯골이 있어 배가 왕래를 하고 정박을 하였다고 한다. 구방조제가 쌓인 후에는 사장터에서 지금의 모정인 고 전정까지 포구였으나 1930년대 간척사업으로 염전으로 바뀌어 포구는 사라졌음. 고대도(古代嶋) : 고전리가 간척되기 전 고전리 앞 바다에 있었던 작은 섬. 공동산 : 알뫼 서쪽 아래 있는 공동묘지가 있는 구릉의 산을 말함. 구방조제길 : 삼양사가 간척하기 이전(1930년대 말) 간척한 땅의 방조제로 현재 고전에서 장승배기의 포장된 도로를 말함. 군계배미 : 예동낭갓 아래 북서쪽변의 들로 구방조제의 서쪽의 농지를 말함. 개매기 : 궁산 서쪽 산 목에 있는 마을 지형이 개의 목처럼 되었다 함. 기와집-벌터 : 일곱벌뜸터 서쪽에 있는 염막의 터. 염막의 주인이 기와집에 살았다 함. 난산(卵山) : 알미라 부르며, 고전의 동쪽 에 있는 낮은 야산. 넉굴-재 : 떡적골에서 준지메로 가는 고개. 노두먹-벌 : 노두먹 벌터에 있는 논. 노두먹벌-터 : 고전 앞에 있는 염막 터. 땅 이 질므로 노룻 돌과 같은 돌을 깔아 놓았 었음. 당산등 : 고전 북쪽의 당산나무와 당집이 있는 산등성이. 떡적골 : 지도상의 옥동제 앞의 골. <사진>떡적골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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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적골-샘 : 떡적골에 있는 샘. 돌 틈에서 나오는데 염전하던 사람들의 옷은 이 물로 빨아 야 때가 잘 지므로 예전부터 빨래터로 유명함. 독-바우(바위) : 부채바우. 독자-골(獨自一) : 떡적골 마을. 부채뜽 남쪽의 외딴 마을. 방아-다리(골)
: 알미 밑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방아의 다리와 같이 생겼음.
방죽안 : 지도상 옥동제로 기록된 저수지 안의 마을. 옥동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물이 없어 저수지를 만들어 수리시설로 이용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음. 부체-바우(독바우) : 부체에 있는 큰 바위. 모양이 돌부처가 서 있는 것 같음. 부체뜽 : 고전 동남쪽, 부체바우가 있는 산등성이. 부체뜽에는 현재 5기의 고인돌이 있음. 불-등(부등․부등도) : 염전 서쪽 갯가에 있는 마을 전에는 해풍으로 모레가 밀려와 섬처럼 쌓여 있던 곳을 개간하여 마을이 됨. 서지락(西地樂) : 군계배미 서쪽의 들을 말함. 소-산(少山) : 고전 남쪽에 있는 작은 산. 삼양염전(三養鹽田) : 고전에 있는 염전. 삼양사에서 경영하는 염전으로 규모가 큼. 알-미(卵山)산 : 송현 앞에 있는 산, 알과 같이 둥그렇게 생겼음. 알미-재 : 알미에 있는 고개, 고전에서 떡적골로 감. 이 주변 사람들이 무장이나 해리를 갈 때 넘는 고개. 오리방죽 : 준지메 동북쪽에 있는 웅덩이. 겨울철에는 물오리가 모임. 옥수-골 : 옥동 뒤에 있는 골짜기. 윗벌-뜸 : 웃벌터에 있는 밭. 윗벌-터 : 고전과 만돌 경계에 있는 염막 터. 고전의 위쪽. 현재는 밭으로 되어 있음. 일곱벌뜸-터 : 노두먹벌 터 서쪽에 있는 염막 터, 현재는 논인데, 일곱 개의 염막이 있었음. 일관내-원안 : 옥동 앞 뚝 안에 있는 들. 옛날 일관이라는 부자가 둑을 쌓고 개간했다 함. 장승-배기 : 고전과 준지메 사이 장승이 섰던 곳. 고전에서는 큰맷등이라고도 불리며, 조선 시대 비가 안와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가 대죽도의 용머리라고 한다. 이 용머리를 가기 위해 서는 고전의 장승배기와 사장을 통과하였다고 함. 준지-메 : 옥동 남쪽 산 밑에 있는 마을. 마을 뒷산의 풍수형국이 진주옥반형이라 함. 진주 메라 불리는 주산(珠山). 준지메 잔등 : 진주에서 옥동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 준지멧벌-터 : 준지메 앞벌에 있던 염막 터. 학허리 : 알뫼 아래 서쪽의 넓은 들을 말함. 학의 허리라 하여 학허리 또는 학어리로 불림. 흙굴재 : 학허리에서 두어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2) 고전리의 자연취락 고전리의 자연취락들의 설기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 면, 이 일대에 도적들이 들 끊었는데 검단선사가 이들에게 천일염 생산하는 방법을 통해 생 계수단을 만들어 준 이야기가 고전마을에도 전해오고 있다. 당시 도둑들이 선운산 일대에서 도적질을 했다는 것은 민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검단선사가 천일염 생산의 최적 조 건을 갖춘 고전을 두고 검당에 도둑들을 정착시켰다는 것은 고전일대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 어 있었다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삼국이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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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선운산 일대의 서해안 오지지역으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있 을 것이다. 고전리는 1930년대 후반 삼양사의 간척사업이 있기 전까지 넓은 갯벌이 발달한 작은 어촌마을들이었다. 특히 곰소만을 접하고 있는 이곳은 전통적인 소금생산(자염, 煮鹽 業) 중심지이다. 1910년대의 지형도를 보면, 이곳은 간척하기 전까지 염밭으로 기록되었다. 삼양사의 간척이전 궁산에서 고전을 오려면 해안가 마을인 죽곡-기미-진주-옥동-예동-군 계배미-고전을 따라 왔다고 한다. 즉 해안선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간척으로 옛 바닷가의 흔적은 삼양염전으로만 남게 되었다. 고전(高田) : 고전은 김해김씨 목경파(牧卿派) 김영하(金永夏, 1503년 전라관찰사)의 육세손 김관승(金寬承)이 사화(士禍)에 밀려 피신하여 정착한 1680년대 설기된 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서씨 할아버지와 주씨 할머니가 마을에 살았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이 두 분을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음력 정월 보름달 정성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고로들에 의하면 황학산(黃鶴山)에서 황학이 높이 올라 황학산의 정기가 높은 터전에 뻗쳤다고 하여 고전(高 田)으로 불렀다 한다. 그러나 고전이라는 지명은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古田에서 高 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을의 풍수형국은 학이 노니는 형국이다. 또 다른 마을의 유래는 고전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형국이라서 고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고전마을은 원래 달성 서씨들이 터를 잡고 사는데, 후에 신창표씨가 들어오고, 다음에 김해김씨가 들어왔다고 한 다. 김해 김씨들의 자손이 번성하면서 달성 서씨들이 마을을 하나둘 떠나면서 김해 김씨들 이 마을을 차지하였다. 김해 김씨가 고전의 마을 우물인 건샘 위에 묘를 썼다. 달성 서씨들 의 땅 문제로 일제강점기 김해 김씨와 달성 서씨가 재판을 하여 서씨들이 이겼으나, 서씨들 은 인근의 두어리로 이사를 하였다. 결국은 미당의 양조부만 고전에 살았다. 고전의 흥망 성쇠는 전통적 소금생산과 관련이 깊다. 전통 적 소금이 많이 생산되던 시절 고전은 경제 적으로 윤택하여 살기가 좋았으나, 전통소금 산업이 사양화되면서 마을은 쇠퇴하기 시작 하였다. 즉 고전은 삼양사의 간척이전에는 근 동의 소금 상권을 가진 곳이다. 고전은 집에 가지고 있는 돈이 1,000냥, 소금 판돈 1,000 냥, 소금 팔돈 1,000냥, 그래서 늘 3,000냥 은 있었다는 부자마을이었다고 전한다. <사진> 고전마을 입구 표지석
송현(松峴) : 당산의 동쪽에 위치했던 작은 마을로 김해 김씨들이 설기하였으며, 소나무가 울창하였다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김해 김씨들이 고전에서 소금을 사고팔고 하는 시장있었 던 고전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송현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마을은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다고 한다. 명창 김여란이 송현마을에서 탄생하였다고 한다. 진주(眞珠) : 진주마을은 1850년대 광산 김씨 한 분이 진주마을에 터를 잡았는데, 함평이 씨, 청주한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 형국이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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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옥반형(眞珠玉盤形)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진주라 하고 북쪽 옆 마을은 옥동이라 불렀다. 진주마을은 동북쪽으로 높은 산지가 발달해 있고 그 산지에서 뻗어 온 구릉성 산이 진주메 잔등을 이루어 진주와 옥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진주메잔등의 남쪽에 진주마을이 있고, 북쪽으로 옥동마을이 있다. 진주마을은 서쪽으로 넓은 간척지가 발달하여 겨울의 북서계절 풍에 그대로 노출된 형국이다. 그러나 진주마을의 골짜기에 있는 안골은 낮은 지형으로 인 해 겨울의 북서계절풍을 조금 피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진주마을 사람들은 낮은 골짜기의 안 골에 거주하고 있다. 진주와 옥동 마을의 성장은 간척 이후였다. 많은 사람들이 간척지에서 소작을 하고자 모여들었다고 한다. 옥동(玉洞) : 옥동마을은 함평이씨 현령공파(縣令公派) 이주(李椆)의 11세손 갑담(甲淡)이 예동에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 형국이 진주옥반형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옥동이라 하고 남쪽에 있는 마을은 진주라 했다 한다. 옥동마을의 지형은 마을 의 후방인 동북쪽으로 높은 산지가 발달해 있고, 남쪽으로 준지메잔등이, 북쪽으로도 낮은 구릉성 산지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의 전면인 서쪽은 예동리의 낮은 산지가 있어 겨울 의 북서계절풍을 막아주는 형국이다. 옥동마을 앞들은 1910년 이전에 이미 간척이 이루어 져 있었다. 삼양사가 대규모로 이 일대를 간척하기 전 준지메잔등과 예동리 간에 이미 제방 이 축조되어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옥동마을은 현재 다섯 가구가 살고 있다. 예동(禮洞) : 예동은 함평이씨 현령공파 이주의 오세손 이태현(李泰賢)이 광주에서 은신처를 찾아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들은 예의를 매우 숭상하던 집안 의 후예들이 모여 산다하여 예동으로 호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풍수형국은 학의 형 국이라 한다. 예동마을은 북동쪽에서 발달한 산지가 마을의 배후가 되고 있고, 북서쪽으로 낮은 구릉성 산지가, 남쪽의 고정머리 방향으로 남서쪽의 낮은 산지가 감싸주고 있다. 예동 마을은 남서쪽으로 삼양사의 넓은 염전이 있다. 마을 안의 들은 1910년 이전에 개간하여 논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바닷물이 들어오는 간석지는 전통적인 천일염생산지였다. 1930년 대 후반 삼양사의 대규모 간척에 의해 이곳은 논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천일제염 생산지로 탈바꿈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다섯가구 만이 축산업과 농업으로 살고 있다. 한국전쟁 후 예동마을 출신의 유명한 함평 이씨 형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범인을 매우 잡기로 유명하 였다고 한다. 호룡동(虎龍洞, 고정머리) : 예동마을의 남쪽 끝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고정머리는 북쪽에 서 뻗어 내려온 구릉성 산지의 끝부분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은 북쪽을 제외하고 동쪽과 서쪽 및 남쪽으로 산이 없어 겨울철의 북서계절풍의 찬바람을 직접 맞는 곳이다. 고정머리 의 앞들의 일부는 1910년 이전에 이미 개간이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논경지는 1930년대 후반 삼양사의 간척으로 육지화가 된 마을이다. 그 이전에는 전통적인 천일제염이 발달하였 던 곳이다. 고정머리는 예전에 십여 채의 가구가 있는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사람은 떠나고 빈집만 두 채 남아 있다. 마을은 간척이 이루어진 후 간척지에서 소작을 하고자 정착하면서 세워진 마을이다. 염전(鹽田) : 염전마을은 1930년대 삼양사에서 간석지의 간척사업으로 제방을 쌓아 염전개 발을 개발하면서 공사현장에 거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삼양사의 간척사업에는 이북의 피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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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중 염전개발에 경험이 있는 인부들이 내려 와 염전개발을 개발하였다. 이들의 수효가 점 점 늘어남에 따라 1965년 3월 주민조직개편령 에 의해 심원 고전리에서 분리가 되어 행정리 가 되었다. 염전리는 부등도의 남쪽에 있는 마 을로 고창컨트리클럽이 들어선 바로 옆에 있었 던 마을이다. 현재 13가구가 소금을 생산하면 서 살고 있으나, 마을에 주소지를 두고 사는 가구는 8가구라고 한다. 염전마을은 소금을 생 산하는 시기는 사람들이 모이고, 소금이 생산 안 될 시기는 본 집으로 간다고 한다. <사진>염전마을 전경
부등도(阜嶝島) : '불뜨' 또는 ‘부등’이라고도 불렸던 섬마을이었으나, 1930년대 완공된 간척 사업으로 육지화 된 마을이다. 삼양염업사 해리지점과 제염과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부등도의 최고 해발고도는 7.5m이다. 부등도는 해리천에서 많은 퇴적물이 나 오지만 서해안의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퇴적되는 토사가 씻겨나가므로 삼각주보다는 간석지(tidal flat)가 발달하였다. 부등도는 해풍에 의해 모래가 쌓여 사구상의 섬이 되었다. 이러한 사구 위에 다양한 피복 식물이 터를 잡아 지표의 사구가 안전이 된 후 해송이 자라 면서 섬으로 발달하여 사구가 안정되었다. 또한 죽도는 하천에서 가져 온 퇴적물들이 조수 에 의해 토사가 씻겨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부등도와의 사이에 넓은 간석지를 만들었다. 고 창군의 해안선은 구시포에서 명사십리를 거쳐 죽도까지 일직선상으로 발달하여 있는데, 특 히 죽도의 내부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넓은 간석지가 발달하였는데, 이는 죽도가 고창 고전 리와 동호리 연안의 간석지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3. 마을의 인문환경과 산업 1) 고전리의 토지이용변화 고전리의 토지이용에 대한 역사는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서 가까운 검당포 에 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검단선사가 백제의 도적들에게 소금 생산하는 기술을 전수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는 이 일대가 일찍부터 어업과 소금을 생산하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 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의하면, 고전포(高田浦)에는 염분(鹽盆)이 명시되어 있으며, 1872년 무 장현지도에도 고전과 동호에 염장(鹽場)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염분은 소금을 굽기 위 한 가마로, 크기는 보통 12자×10자이며, 쇠로 만든다. 근대 지도인 1918년 지형도에서도 고전리 일대에서 자염업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간척의 정확한 시기는 확인 하기 어려우나 1910년 이전부터 고전리 일대는 개간이 조금씩 이루어졌다. 1910년대 지형 도를 보면, 이미 신방-진주-옥동-예동-군계배미-고전-만돌-난포로 연결되는 방조제가 축 조되어 그 내부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방조제 밖으로는 염전이 행해지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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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1918년 고전리의 해안선(국립지리원 1:50,000) 삼양사의 고창간척사업 시작 전통적인 자염업이 발달한 지역은 간석지1)가 넓게 발달한 지형이다. 간석지는 일제강점기 식민지를 자본축적의 기회의 땅으로 여긴 일본인과 유력 자본가들에 의해 간척사업이 활 발하게 진행되었다. 고전리 일대의 간척사업은 1930년 1월 29일 익산군에 거주하는 일본인 고모토(河本國三郞) 외 2명 이 약 6.8km²에 대한 개발 면허를 추진하다가 자금이 부족해 지자 (주)해원농사(海元農事)를 설립해보지만 5년 이상 해결 하지 못하자 매립권이 소멸되었다. 중단된 매립공사는 삼양사가 인수하면서 재계되었다. 김 연수(金秊洙)는 300만엔의 자본금 중 260만엔을 투자하였다. 삼양사가 매립면허를 취득한 것은 1936년 4월 9일이며, 사업지의 면적은 약 7.1km², 사업기간은 1938년 3월 31일까지 지정되었다. 삼양사는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농장 간척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희준(李熙 晙)2)이 주도적으로 개발하여 1937년에 약 6.8km²
간척지에 대한 매립공사를 종결하고 준
공인가를 받았다. 간척지의 매립을 마친 삼양사는 용수를 확보하고자 심원면 궁산리 외궁에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궁산저수지는 1937년에 착공하여 1945년 1월에 준공하였다. 저수지 의 유역면적은 30.25km², 만수면적은 0.81km²였다. 해방이 되자 삼양사는 1946년 6월 12 일 전매 제2호로 소금의 제조 허가를 받아 1947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소금생산에 들어갔 다. 삼양사는 해리농장을 해리지점으로 승격시켜 농장부와 염전부를 두었다. 1948년 12월 1차로 작업이 완료되자 52.7정보에서 천일염 8998가마를 생산하였다. 그 후 지속적으로 염 전을 확대하였다. 1949년에는 42.3정보, 1952년 100.8정보, 1953년 63.5정보, 1954년 58.46정보 등 총 317.76정보의 농지를 염전으로 용도를 변경하였다. 1958년부터 1만5,800 여톤의 소금을 생산하여 국내 최대의 민영염전이 되었다. 1956년 6월에는 주식회사로 개편 하면서 해리염전을 삼양염업사로 독립시켰다. 삼양사의 염전은 미완성 간척농지로 분류되어 농지개혁을 피할 수 있었으나 이는 추후 농지분쟁의 소지를 남겨놓은 것이었다(홍금수, 2008). 소작인들에게 토지매각과 골프장 건설 1960년대 말 고전리 삼양염전의 면적은 296.8ha이고, 직원은 정규직 115명, 임시직 200명 등 총 315명이 근무하였다고 한다. 1985년부터 재계된 분쟁결과 1987년 12월까지 내무부 과세표준지가에 의거해 평당 1,882원의 가격으로 소작인에게 토지를 매각한다는 결정이 내
1)
만조일 때는 물에 덮이고, 간조 때는 물 위에 드러나는 해안의 땅을 말하며, 이를 일명 개펄이라고 도 한다. 간척지는 위의 간석지에 제방을 만들어 물을 빼내어 육지화 하여 농업용 또는 다른 산업용으로 만드 는 일을 말함. 2) 이희준은 정규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토목공학도로, 그는 일제강점기이던 1926년 일본 교토 제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토목기사 1호가 되었다. 당연히 그는 귀국과 함께 조선총독부의 토목기사가 되었 으나 1931년 민족기업인 김연수간척사업단에 들어가 광복될 때까지 함평 고창 영암 등지의 간척사업에 종사 했다. 이희준은 광복 후 정부에 들어가 경제기획관으로 우리나라 경제발전과 국토활용 전반에 대한 기본구상 을 계속했다.....중략. 국민일보 2009년 9월9일(수)자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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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졌다. 매각된 염전부지는 다시 농지로 전환되었고, 이 결과로 삼양염전은 3km²로 크게 축소되었다. 1992년에는 소금을 수입하면서 한국의 천일제염은 경쟁력을 잃어 염전은 대폭 줄었는데, 고전리의 염전 도 마찬가지로 0.6km²
축소되었다. 2006년 6월에는
0.86km²의 면적의 고창컨트리클럽(골프장)이 개장되 었다. 염전마을은 2005년 190mm, 2011년 8월 10 일의 317mm의 집중호우로 염전이 완전 침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침수의 원인은 수문이 1개소로 만조시에는 물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23만평에 달하는 골프장 건설 후 골프장의 고도가 230cm가 올라감에 따라 물이 낮은 곳인 염전으로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009년 4월 국 토해양부는 폐염전․폐양식장 등 경제적 가치 상실로 훼손·방치·오염돼 있는 고전리 갯벌지역을 건강한 갯 벌로 복원시키기 위한 '갯벌복원 추진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고창군 해양수산과 2010년 12월 현재 자료에 의하면, 삼양사의 염전을 임 대받아 사업을 하고 있는 대표자, 사업장, 면적, 염판수, 칸, 생산량은 다음과 같다. 대표자
사업장
계 박원준
심원면 고전리 2268,
유윤복 김동선 박동석 홍경호 황건중 김상섭 박은경 김익수 이명숙 김홍근 박맹철
2269, 2270 심원면 고전리 2279 심원면 고전리 2280 심원면 고전리 2281 심원면 고전리 2283 심원면 고전리 2286 심원면 고전리 2287 심원면 고전리 2291 심원면 고전리 2293 심원면 고전리 2294 심원면 고전리 2295 심원면 고전리 2296
김홍균
심원면 고전리 2290
유기봉
심원면 만돌리 1508, 2-5
면적(㎡)
염판수
칸
생산량(톤)
637,613
370
4,470
135,722
72
타일16칸, 장판16칸
900
44,400 44,582 44,231 44,350 44,526 45,111 45,131 44,830 45,051 43,263 44,780
24 24 24 24 24 24 24 24 24 24 24
타일16칸, 장판8칸 타일16칸, 장판8칸 타일16칸, 장판8칸 타일28칸, 장판12칸 타일16칸, 장판12칸 타일16칸, 장판16칸 타일16칸, 장판14칸 타일16칸, 장판10칸 타일16칸, 장판16칸 타일16칸, 장판16칸 타일16칸, 장판16칸
360 240 240 600 240 390 240 210 240 180 210
45.131
24
타일16칸, 장판14칸
240
11,591
10
타일12칸, 장판2칸
180
2) 한국전쟁과 심원면 고전리 일대 사건 한국전쟁 때 인민군 및 좌익에 의해 피살된 고창군민은 2,364명으로 등재가 되었다. 그 후 전북도의회가 1994년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사건 조사를 하여 11개 시군, 50개 읍면에서 희생된 4,420명의 명단을 수록한 자료에 의하면, 고창군이 1,677명으로 가장 많았다. 심원 면은 당시 고창군에서 가장 작은 면이었지만 좌익들의 활동은 활발했던 지역이어서 51년
- 8 -
봄이 되어서야 군경에 의해 수복이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고창군 일원에서 국군 11사단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총살 되었는데, 1950년 12월 22일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가 해리면 동호리 구동호 선창가 주변, 심원면 고전리․만돌리 주변 해안가에서, 인근지역에서 몰려온 피난민 200~330여 명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사살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희생자는 105명이다. 11사단장(최 덕신)의 ‘견벽청야’ 작전명령이 예하 대대장에게 하달되었고, 현장의 지휘관들은 민간인과 빨치산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간주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 하여 작전상의 위험을 제거하고 공비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했으며, 그에 따라 다수의 주민이 희생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50년 12월 22일 오전 11시경 해리면 동호리 구동호 선창가에서 11사단 6중대가 해리면 과 심원면의 내륙지역에서부터 몰려나온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이들을 사살하 였다. 오후 3시경 일부 피난민들은 해변가로 도망3)하였는데, 50여명은 만돌리 계명산 입구 에서 붙잡혀 집단 총살되었다. 해변가로 도망간 사람들은 바닷물이 빠진 간조상태라 외죽도 섬이나 독우너섬으로 피난을 갈 수 있었는데, 외죽도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전부 생 존했으나 독우너섬으로 피신한 사람은 바닷물이 만조가 되면서 전부 수장되었다. 전북도의 회 보고서에 의하면, 그날 늦게까지 계명산 일대 해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200명이 넘었다 고 한다. 해리면 주민 30여명은 총소리에를 듣고 해리천을 건너 심원면 방향으로 피난하였 다. 군경은 고전리 마을에 도착하면서 붙잡은 해리의 피난민 30여명을 새끼줄로 묶은 뒤 마 을 앞 당산나무 주변에서 총살을 하여 20여명이 희생되었다4).
3) 한국전쟁과 해리염전 사건 6.25전쟁이 발발한 뒤 해리염전5)은 1950년 7월 20일 남하한 인민군에 접수되었다. 9월 28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해리염전을 장악하고 있던 인민군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9 월 30일, 해리염전의 염전부장 진치경(陳致京)은 고창으로 피신해 있다가 인민군이 사라졌 다는 소식을 듣고 염전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80여명의 삼양사 종업원들은 자체 경비 대를 조직해서 죽창을 들고 염전을 지켰다. 인근의 산 속에 있던 빨치산들이 10월 1일 오 전 10시 정도에 염전을 공격해왔다. 삼양사 종업원들과 빨치산들은 취수갑문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벌였다. 무기가 빈약한 삼양사 종업원들은 세 시간을 버텼으나 결국 진치경을 비 롯한 20여명이 붙잡혔다. 빨치산들은 붙잡힌 삼양사 종업원들과 가족들은 물론주민들까지 모두 132명을 학살했다. 해리염전에 군경이 진주하자 삼양사는 1951년 2월 14일 김상협을 보내 중지되었던 염전축 조공사와 소금생산을 재개하였다. 또한 빨치산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하여 양수장 근처에 높 직한 원통형의 망루를 설치해서 박격포 2문과 기관총 3자루를 설치하고 카빈소총도 100자 루 가까이 확보하였다. 1952년 2월 14일 밤에는 빨치산들이 해리지점 직원 2명과 마을사 람 6명을 포함한 8명을 죽이고 달아났다. 그해 7월 초에는 동호지서의 경찰관 5명과 삼양 사 종업원 20명이 잠복근무 중 빨치산 80여명의 습격을 받았다. 이때에는 약 세 시간에 걸
3)
부분은 두 가지의 진술이 있다. 하나는 인민군에 부역을 하다가 군경을 피해 자의적으로 도망을 했다와 다 른 하나는 군인들이 총을 쏴 몰아쳐 어쩔 수 없이 타의로 바다에 뛰어 들었다는 진술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본고에서 생략하도록 한다. 4)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8, pp.165-168의 내용을 요약정리. 5) 해리염전이라 부르지만, 해리염전지역은 대부분이 심원면 고전리에 속한 행정구역이다.
- 9 -
친 교전 끝에 빨치산들은 물러났다. 이튿날 군경과 삼양사 종업원들은 패주한 빨치산들을 추격해 28명을 사살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삼양80년사).
4) 고전리의 인구변화 고전리의 2003년 이후 인구변화는 큰 변화는 없으나, 예동의 경우는 7년 동안에 인구가 50% 이상 큰 감소를 보였다. 다만 염전은 계속 줄다가 2011년에는 인구가 갑자기 증가를 하였는데, 이는 소금의 가격인상으로 인한 노동력의 유입으로 증가하였다. 마을명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12.31
12.31
12.31
12.31
12.31
12.31
12.31
12.31
08.05
61
고전
138
진주
78
예동
32
염전
40
77 38 40 15 17 19 21
61 137
76 35
71
36 16
33
17 21
41
20
64 134 75 29 42
70
57 126
39
37
70
36 14
33 13
28
15 22
15 19
38
20
69
19
53 121
48 112
68 38
73
73
35 13
27
23
14 18
38
37
20
64
57 120
37
38
74
36 12
36 12
21
11 18
9 19
37
19
63
18
60 122 73
62 37
73
36 9
16 28
57 117
15
7 15
36
13
60 36 37 8 7 18 18
5) 고전리의 성씨별 현황 성씨는 문중의 성을 따라 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 된 독거여성노인인 경우는 사망한 남 편의 성씨나 자녀들의 성씨를 중심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조사 대상자는 2010년 심원면의 전화번 호부를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따라서 심원면사무소의 인구현황과 실제 거주자와는 차이가 있다. 전화 번호부상에도 부부가 함께 나온 경우 남편 쪽 본관만을 기록하였다. 고전마을의 성씨 분포를 보면 함 평이씨 20가구, 김해김씨 17가구로 가장 많고, 기타 다양한 성씨들이 고전리에 거주하고 있다. 성씨
마을
고 전 진 주 예 동 염
김
함 진
연 광
여 전 밀
부 청
파 금 장
천 신
달 해
탐 흥 청
언 안
해
평 주
주 산
양 주 양
안 주
평 녕 성
안 창
성 주
진 성 송
양 동
기
김
이 강
현 김
진 이 박
김 한
윤 김 서
전 표
서 오
최 장 심
김 김
타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3
3
1
1
1
12 12 2 4
5
1
3
1 1
4
3
1
1
1
2
3
2
2
1
1 1
3
1
1
1
1 1
다 문 계 화 1
51
석 2
25 5
전
6) 문화유산 고전리 유물산포지 : 심원면 고전리 825-1번지로, 예동마을 남측 구릉에 위치한다. 수습된 유물은 무문토기, 옹관편, 연질타날토기편, 석기편 등으로 시대적으로는 청동기시대부터 원 삼국시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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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재소터 : 일제강점기 일본이 고전리에 순사를 파견하여 사무를 맡아 보던 경찰의 말 단 기관으로 고전의 당산 아래 있었다. 미당 서정주 조부댁 : 미당의 조부는 고전리길 213에 살았다. 고전리에 살던 서이권씨는 자 손이 없어서 서광한을 양자로 삼았다. 그래서 미당이 고전에서 8-1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미당의 부친인 서광한씨는 1955년까지 고전에 살다가 질마재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미당 은 고전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주민도 있다. 고전리 보호수 : 고전마을의 동측 구릉(16.7m) 정상부에 위치한다. 정상부에 2그루의 나무 가 심어져 있는데, 나무 사이에는 최근에 지어진 당집이 있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당산 나무라 부르며 매년 당산제를 올렸다고 한다. 수종은 느티나무이며 수령은 200년 정도이다. 나무의 높이는 14m, 나무둘레는 5.5m이다. 그러나 마을사람에 의하면 500년은 넘었을 것 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당산은 등대를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도 한다. 고전 당집 : 당집은 고전의 두 그루의 당산나무 사이에 있는 작은 집을 말한다. 조선후기 전라감사 김수연이 상량문을 썼다고 한다. 당산의 주신은 서씨 할아버지와 할머니인데, 고 전의 고로들이 서씨 할아버지를 주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고전당골터 : 심원면 고전리 645번지(고전로 218) 집이다. 당골은 귀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 고 굿을 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 전라도지역의 방언이다. 당골의 어원은 고조 선시대 제사장을 뜻하는 단군에서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고전양조장터 : 심원면 고전리 774-1번지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모리가 이곳에 양조장을 운 영하였다고 한다. 삼양염업사 염전과 창고 : 고전리의 염전의 창고는 현재 72년이나 지난 귀중한 근대문화유 산이다. 지난 1939년 전북 고창의 염전에 건립된 삼양염업사 사무소와 창고를 근대문화유 산으로 지정하는 작업이 추진되었으나 지정되지 못하였다. 이 사무소와 동호리의 창고는 당 시 삼양사의 설립자인 김연수가 지은 것으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했으나 그간 염전 업이 쇠퇴하면서 방치돼왔다. 염전을 따라 길게 늘어선 사무소와 창고 등의 건축물은 목조 단층이다. 지붕은 목조 트러스 구조에 슬레이트를 얹은 형식이다. 근대문화유산의 지정은 문화재청이 50년 이상 된 시설물을 대상으로 실사를 벌여 역사적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 되면 지정하고 있다. 건샘(乾泉) : 고전사람들이 모두 먹던 물로 고전 보호수 아래 길가에 있는 샘이다. 건샘을 만들 때 사용한 고자(돌)들은 부체뜽의 고인돌로 만들었다고 한다. 마방터(馬房) : 말을 키우던 곳으로 고전1길 15(고전리 630번지) 집터가 마방터로 알려져 있다. 고전양조장터(高田釀造場) : 마방터의 바로 옆의 서쪽의 빈터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모리(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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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고전에 양조장을 경영하다가 해방이 되자 한국인 송말봉이 인수하여 술을 제조하였다. 그 후 양조장을 면소재지(현 심원면소재지 수경건강원)로 이동을 하여 운영을 하다가 다시 아산양조장과 합병하였다. 송말봉은 심원에서 술을 제조하다가 다시 이리로 가서 양조장을 운영하였다. 다시 그는 위도의 파장금으로 들어가 장사를 하였는데 그는 전가발전기를 통해 주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딸이 한 남자를 데리고 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거친 말로 반대를 하였다. 거칠게 반대하는 송말봉에게 화가 난 남자친구는 그를 잔인 하게 살해했다고 한다. 사장터(士場) : 고전의 고로들이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거나 노니는 장소로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형제지간 다툼이 있을 때 이곳에서 훈계를 하던 곳이다. 사장에는 정자와 집 및 활을 쏘던 곳이 있었다고 전한다. 고전리 751번지 앞의 논이다. 수살(水殺) : 동네 어귀에 서 있는 돌이나 나무을 말함. 동네를 지키는 신성한 것으로 믿어 전염병이 돌 때는 새끼줄을 쳐서 모시고, 개인이 병이 났을 때는 환자의 옷을 걸어 놓기도 함. 비슷한 말로 수살막이ㆍ수살목 등이 있음. 고전리에는 세 개의 수살이 있음. 앞수살, 뒷 수살, 부체등의 부처바위 등이 수살임.
7) 전설과 이야기 알뫼(卵山) 설화 : 변산의 줄포만 연안에 왕포라는 곳에 명당이 있어 누군가가 묘를 썼다고 한다. 그 터에 묘를 쓰면 왕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래서 왕이 이를 알고 그 명당터 를 파 헤쳐 없애라 하였다. 묘를 파보니 그곳에서 뀡 암수 두 마리가 나와 고전리의 알뫼에 앉았다고 한다. 꿩은 알뫼에서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이곳이 알뫼(卵山)이 되었다고 한다. 부안향리지에는“조선 말엽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가 변산을 일주하던 중 이곳을 지나다 가 금관자, 옥관자복으로 차린 80여명의 부안 장씨들이 시제를 지내는 것을 보았다. 풍수지 리에 밝은 이서구는 군신봉의 묘가 대명당이라는 것을 알고 시샘하여 즉시 파묘를 명하니 그 묘에서 검은 황소가 뒷무릎을 세우고 앞무릎은 반쪽 세우고 황소의 등위에는 세 마리의 학이 앉아 있다가 고창, 운호, 마동방면으로 날아간 직후 황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 았다”고 한다. 건샘(乾泉) 설화 : 옛날 고전에 살인사건이 끝이지 않고 발생하였다. 한 도인이 고전을 지 나가다가 사장에서 마을 유지들과 이야기를 하였다. 술 한 잔을 대접받은 도인은 마을의 앞 수살 옆의 물을 마시면 사람이 살기가 생긴다고 하였다. 이 샘은 언제나 물이 마르지 않고 넘쳐
흘렀다. 도인은 마을의 샘을 건샘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건샘으로 하자 물은
넘쳐나지 않았으나, 사람 수 만큼 언제나 풍족하게 물이 솟았다. 이 후 고전에는 살인사건 이 생기기 않았다고 한다. 검단선사 이야기 : 검단선사가 백제 위덕왕 때 선운사를 창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위덕 왕 당시 백제는 북으로는 고구려의 남침을 받고 있었으며, 동으로는 신라와 대치를 하고 있 었다.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하류를 빼앗기고 아버지인 성왕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다가 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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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급습으로 사망을 하여 백제는 국내외로 매우 위태한 상황이었 다. 이러한 백제의 위기상황을 피해 많은 백제인들이 도적이 되었다. 이들은 선운산의 골짜 기에 본거를 두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검단선사는 이들을 설득하여 소금 굽는 법과 검당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검단선사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검당 오가는 길에 고전의 진 씨 부자에게 들렸다고 한다. 고전 당산설화 : 고전마을 당산의 주신은 두 명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한 명은 구동호 당 산의 당신(堂神)이 되고, 다른 딸은 변산의 작당(鵲堂) 당산의 당신이 되었다. 고전리 주변 의 당산들은 모두 고전리 당산을 바라보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주변 당산의 중앙당산 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전 당산이야기 1 : 언제인가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낼 때였다. 당산제를 지내는데, 당산 위로 기러기 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을의 한 청년이 “당산이 용하면 날아가는 기러기 를 떨어 뜨려보라”며 말을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잘 날던 기러기가 떨어졌다고 한다. 고전 당산이야기 2 : 당산을 지낼 제주는 언제나 맑고 깨끗하게 정성을 드려야한다. 제주는 해년마다 바뀌는 경우가 많다. 당산의 제주가 아들이 없을 때 제를 정성스럽게 지내는 사람 에게는 당산이 아들을 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아들이 없는 사람 세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제를 정성스럽게 올리니 한 명은 두 번 제주가 되어 두 명의 아들을 낳았고, 두 명은 각각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마을 고로들은 당산의 신령스러움과 효험을 굳게 믿고 있었 다. 고전 당산이야기 3 : 당산제가 지낼 시기가 되어 아이의 출산일이 가까워지면 주민들은 마 을에 해가 된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임산부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소산이라는 곳에 준비된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소산에는 임산부의 출산을 위해 두 채의 가옥이 있었 다고 한다. 고전 당산이야기 4 : 보름 때 고전에서 당산굿을 안하면 아이들이 홍역에 죽어 나갔다. 그 러나 마을을 돌며 굿을 하면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전 당산이야기 5 : 언젠가 태풍이 심하게 불어 당산나무 가지가 부러졌다. 마을의 한 사 람이 당산나무의 가지를 가져다가 불을 땠는데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은 그의 죽음은 당산 할매가 벌을 주었다고 믿고 있다. 고전 당산이야기 6 : 당산에서 놀고 있던 한 마리의 꿩이 고전마을의 어느
한 집으로 들어
갔다. 그 집 주인은 그 꿩을 잡아서 먹었는데, 그 후 그는 죽었다. 이것도 마을 사람들은 당산 할매가 벌을 주었다고 말한다. 가짜 암행어사 사건 : 옛날 무장현에 가짜 암행어사가 현감을 사기치고, 고전에 부자가 많 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전의 부자를 사기를 치기 위해 들어왔다. 고전의 부자로 알려진 김해 김씨는 3,000석 걸이 또는 10,000석 걸이로 알려져 있었다. 가짜 암행어사가 이 분을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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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기 위해 고전으로 들어왔다. 고전의 사장에서 자신이 암행어사라며, 술대접을 받았다. 당 시 선달로 알려진 함평이씨의 이재현 조부는 서울을 자주 왕래하여 서울지리에 밝았다. 그래서 선달은 가짜 암행어사에게 서울의 지리에 대해 물어보니 전혀 몰랐다. 가짜라는 것 을 알고는 상투를 쥐어틀어 사정없이 패댔다. 매에 가짜 암행어사는 사실을 말하였다. 고전 사람들은 가짜 암행어사의 상투를 말꼬리에 묶어 무장현감에게 바치니, 무장현감이 고전사 람들에게 무장현감보다 낫다며 고전의 사장에 일부 권한(문제 해결)을 주었다고 한다. 장군바우 전설 : 김금배씨 5대조 할아버지는 장군을 낳았다고 한다. 그는 장군등에 묘를 써 서 장군을 낳았다. 장군을 임신한 어머니는 장성의 친정집에서 감을 잔뜩 받아 가지고 시댁 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오다가 그 많은 감을 다 드셨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에게서 장 군을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신통력을 발휘하여 하늘을 날거나 벽을 기어다는 등의 기이한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안 임금이 아이가 성장하면 반역을 할지 모른다며 아이 를 죽이라 하니 어쩔 수 없이 사람 한 명을 누를 수 있는 바위로 눌렀다. 바우는 며칠 동안 들썩들썩 하다니 멈추었다. 변산에서 백마가 달려와 사흘 동안 바우 주변을 울며 돌다가 돌 아갔다. 아이가 죽자 먹을 물로 알려진 소죽도의 샘이 말라버렸다고 한다. 옥동의 큰 각시 김경희 작은 각시 최경희 : 옥동마을에 사는 최경희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 기 전 영광군 홍농면 월암리 풍암마을에서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 옥동으로 시집왔다. 당시 홍농에는 그녀의 오빠와 조카들 내외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큰 오빠의 장조카는 홍농에서 경찰을 하였는데, 북한군이 전라도를 점령하자 당시 경찰관이나 군인 및 공무원 가족들을 잡아다가 학살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 영광 홍농에 살던 최경희의 오빠 부부와 조카 들 부부 등 총 6명이 공산치하에 학살당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최경희를 찾으려고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 옥동까지 찾아와 최경희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자 그녀의 시아버지는 그녀를 큰집의 벽장 속에 숨겨 두고, “우리 집에는 김경희는 있어도 최경희는 없소!”라고 말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 후 시아버지는 그녀를 동네의 김씨 호적에 올려 김경희로 바꾸어 버 렸다. 그래서 호적에는 김경희로 올라가 있었는데, 2008년 법원을 3년간 쫓아 다녀 겨우 본인의 이름인 최경희를 찾았다. 그녀의 남편(이계춘)은 군대를 갔다가 휴가 와서 복귀를 하지 않아 군생활을 9년간이나 했다. 2008년까지 이계춘의 아내 최경희는 큰 각시 김경희 와 작은 각시 최경희로 살다가 겨우 본 이름과 한 남자의 첩이 아니라 본처로 살 수 있었다 고 한다. 호룡동의 나병환자 완치이야기 : 호룡동의 산 밑에는 작은 샘이 있어 늘 맑은 물이 솟았다 고 한다. 또한 호룡동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나병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 고 한다. 그 나병환자는 산 밑의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매일 마시고, 목욕하니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이 샘은 얼마 전까지 있었는데, 지금은 확인해 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고 한다. 고전포와 한국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 : 진채선의 할아버지는 무장에서 살았고, 아전 집안 이라 행세도 하고 공부도 하였으며, 풍채도 좋았다. 그러나 너무 가난하여 검당포에서 소금 일을 하게 되었다. 검당포의 과수댁인 김당골은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김당골은 채선의 할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무장의 진씨 가문에서는 이렇게 사는 채선의 할아버지를 족보 에서 빼버렸다. 그래서 채선의 할아버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김당골은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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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당골수업을 하도록 하였다. 채선은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등 넘어 배운 것이 어머니보 다 더 잘하게 되었다. 김당골은 채선을 고전포의 스승광대에게 부탁하여 기초를 배우게 하 였다. 당시 기생이나 당골들은 판소리와 가무 시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능통해야만 대중 을 이끄는 매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배우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진채선은 고전포에서 노래를 배웠다,
8) 민간신앙과 민속 고전리 당산제 : 먼저 당산제를 지낼 사람을 마을회의에서 정한다. 당주로 정해진 사람은 당산제라 시작되는 세 달 전부터 부부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며, 나쁜 음식이나 상갓집을 가 서는 안 된다. 당집에는 백자가 궤 속에 들어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제기들과 탱화를 모두 도둑
맞았다고 한다. 당산제에 쓰이는 그릇은 사서 한 번 쓰고 두 번 다시는 안 썼다.
고전리 당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농악을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고전리에서는 잘하 는 농악패들을 불러다가 굿판(공연) 벌렸다. 당산제는 정월에 줄을 두 개 꼬는데 시작한다. 꼰 줄을 마을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지신밟기를 한다. 줄을 어깨에 메고 당산에서 제를 지내고, 당산의 아래에 있는 건샘에서 제를 지낸다. 건샘에서 지낸 뒤 뒷수살과 앞수살에서 굿판을 벌린다. 앞수살 에서 굿판이 끝나면 고전정 앞의 다리(지금은 사라지고 작은 개천이 흐름)에 대나무를 세우 고 대나무에 새끼줄을 친 뒤 굿판을 벌린다. 굿판을 벌릴 때 마을의 어르신들이 동네 안쪽 에서 심사를 하여 굿이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문을 열어준다. 정월대보름날은 마을의 모든 남녀가 모여 줄다리기를 한다. 줄다리기는 남성편과 여성편으 로 나뉘어 진행된다. 보통은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하니 여성이 이기는 경우가 대부 분이란 한다. 줄을 메고 마을의 집집마다 돌면서 쌀과 돈을 받아 1년 경비를 마련하였다. 마을을 돈 후 그 줄은 앞수살과 뒷수살에 감음으로써 끝난다. 옛날에는 부자가 있어 넉넉하 게 당산제를 지냈다. 고전리의 당산제는 20여일 간 진행되었으며, 정월대보름날이 최고조였 다.
9) 마을의 인물 김여란(金如蘭) : 1906년 전북 고창군 심원면 고전의 당산 동쪽 마을인 송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분칠이다. 여섯 살 때부터 김비취에게 가곡·시조·가사와 아쟁·거문고 등 기악을 익 힌 뒤 18세 때 당대 5대 명창 정정렬(丁貞烈)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시작하였다. 그 뒤 영천 은혜사,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 금강산 등에서 10여년 판소리에 전념하여 판소리 다섯 마당을 떼었다. 1929년 25세 때 대구극장에서 첫 발표회를 열었는데, 첫날부터 만원사례를 기록해 5일 동안 공연하기로 했던 발표회를 이틀 연장하면서《춘향가》《심청가》《적벽 가》세 마당을 한 장소에서 연창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광복 후에는 박귀희(朴貴姬)·김소희 (金素姬) 등과 함께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57년 수도국악예술학 원으로 승격시켜 판소리·기악·무용 등을 전수하는 데 주력하였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는데, 특히 정정렬의 《춘향가》를 가장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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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하게 소화해낸 명창으로 평가받는다. 후계자로는 최승희·박초선·최영기 등이 있다. 현동환(玄東煥, 1885 ~ 1947.9.15) : 그는 전라남도 일대와 무장현에서는 현약방이라 불렸 으며, 호는 송하(松下)다. 그는 고전에서 동해한의원(東海韓醫院) 원장으로 전라남도 일대와 무장 일대에서 빈민구제사업을 한 명의 한의사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동의보감에 달통 하여 고전의 허준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에게 진료를 받으려면 부자는 가마를 가지고 와야 외진을 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약 값을 안 받고 산천초목을 이용한 치료방법을 처방하 였다. 특히 그는 약 한 첩을 처방해주고 약을 먹고 효과가 있으면 오고 효과가 없으면 오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의술을 공부하고, 오전에는 진료를 하고 오후에는 쉬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자녀들을 다 모이게 하고 논 밭에서 햇곡식을 해오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식사를 하시고 난 뒤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하 고 돌아가셨다. 그는 글이 뛰어나 무정부상태인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정리하는 일을 도와 주셨다고 한다. 김현춘(金顯春, 1893. 4.24 ~1929.12.9) : 김현춘은 고전의 사람으로 별감벼슬을 하였다. 그는 양부의 재산을 가지고 지인들과 사냥하고 돌아 다녔다고 한다. 그는 1,000냥짜리 총을 들고, 1만 냥짜리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고전에서 30리 안은 그의 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그는 어디를 가건 짐승들이 보이면 잡아먹고 돈을 주었다고 한다. 고전리에서 그의 밥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당산의 동쪽인 송현마을에 살았는데, 대가 끊겨 자손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양부의 묘는 현재 해리면 칠곡에 있다고 한 다. 이기일 : 그는 고전리 예동에서 태어나 인공시절 고창군 심원면의 인민위원장을 지낸 인물 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많은 우익인사들을 살려 신망이 두터워 이 승만 정권하에서도 교도소를 가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것과 경찰을 지낸 자신의 조카를 죽 인 잔인한 사람이었다는 평가이다. 특히 좌익계열의 고로들에 의하면, 그는 우익인사들을 많이 살려주고 보호를 해주었으며, 좌익들이 한 불법적인 행위들에 대해 자기 재산을 떨어 보상해주었다고 증언하였다. 한 우익계열의 마을 고로는 그는 조카를 죽였기 때문에 그의 친척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많은 재산을 예동에 놓고 고전으로 이사 와서 살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서울로 올라가 살다가 죽고, 그의 묘가 예동에 있다. 동학농민혁명 가담자에 대한 설 : 고전리에는 두 명의 동학동민혁명 가담자가 있었다고 한 다. 그 두 사람은 박상철과 이상삼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들은 도둑으로 몰려 감방에 갔는데, 도둑질이었다면 3년 이내 살고 나오는데, 이들은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미당 서정주 태생설 : 미당 서정주 선생이 태어난 곳이 고전길 213번지라고 주장하는 마을 사람이 있다. 그러나 미당은 1915년 5월 18일(음)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578번지 질마재에 서 서광한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10) 마을의 기관과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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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경로당 : 심원면 고전리 591-1번지(고전로 42)에 있으며, 2000년에 걸립하였다. 고전정(高田亭) : 장승배기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정자 1999년 10월 8일 건립 하였음. 현판은 태풍 사라(1959년 9월 17일)로 인해 당산나무의 가지가 잘라져 나간 그 나 무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한다. 고창컨트리클럽(골프장) : 전북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 1694-1,
광주대동고 재단 소유주인
대동건설이 건설하고 운영한다. 세계적 코스 디자이너인 일본인 사토 겐타로의 설계로 지어 진 고창골프장은 동호해수욕장 인근 삼양사 폐염전 부지이던 76만515㎡(23만여평)의 부지 에 정규코스 18홀(파72)과 연습용 3홀(파12) 등 총 21홀(길이 7474m) 규모의 시설을 갖추 고 있다. 순복음심원교회 :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 707-1에 있는 교회이다. 삼양염업사 해리지점 :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 1942. 해리염전은 삼양사 경영의 활 로를 열어준 사업이었다. 해리염전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5차에 걸친 염전 축조공사로 317정보의 국내 최대의 민영염전이 되었고, 1958년부터는 1만 5,800톤의 소금을 생산하였 다. 그 후 삼양염업사(사장 金相駿)로 독립시켜 염전업을 삼양의 사업분야에서 분리했다. 삼양사 제염과 :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 1941. 고전정미소 :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 2072-2. 바람공원 : 고창군이 24억원을 들여 서해안의 심원면 만돌과 고전리 일대 10ha에 만든 공 원이다. 바람공원이란 이름은 바람이 많은 이 지역의 특성을 따 붙인 것이며, 바람 광장과 해넘이 광장, 사구(砂丘, 모래언덕) 체험장 등 3가지 테마로 조성되었다. 바람광장에는 풍차 와 바람개비 등을 설치해 바닷바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해넘이 광장에는 전망대를 세웠 다. 사구체험장은 최근 사라지는 사구를 복원하고 나서 갯완두 같은 해안식물을 심어 만들 었다. 또한 공원에는 또 1km에 이르는 해송 숲 산책로와 갯벌 체험장 등도 들어섰다. 보장복지관 사랑의 집 : 고창군 심원면 고전리 584번지의 노인복지시설로 이형옥 목사가 운영 및 관리하고 있다. 김가공 공장 : 고전에 있었던 김가공 공장으로 영광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자 피해보상을 받고 운영을 중지하였다. 현재는 건물만 남아 있다. 11) 소득 작물 고전 주민들은 삼양염전과 관련이 깊었다. 현재는 벼농사가 중심이나 30여 년 전인 1990년 대까지 염전 일을 하였다. 1960년대에는 하루에 30원씩 받고 쌀을 한 되를 받았다고 한다. 염전이 거의 폐쇄가 되고 난 뒤 복분자를 많이 하였으나 이도 병충해로 지금은 거의 논농사 중심으로 바뀌었다. 예동은 한우축산업을 하는 농가가 많으나 대부분이 농사가 주업이었다. 염전마을은 현재까지도 13가구가 염전생산업에 종사를 하고 있으나, 실제로 거주하면서 하 는 사람은 없고, 소금을 생산하는 시기인 3월부터 11월까지만 거주를 하고 소금을 생산하 지 못하는 겨울에는 마을이 텅 빈다고 한다.
4. 마을조직과 행사 고전체육대회 : 1960년대까지 마을에서 체육대회가 열렸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짐. 고전청년회 : 고전에 청년회가 발족된 후 심원에 청년회가 생겼다. 민선면장 선거 당시 고 전청년회장이 심원면장을 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유명무실하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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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을의 역대 이장 고전 ~ 71.7.16 김진태
진주
예동
염전
문제철 72.1.1~
양용석 72.1.1~
위정석 72.1.1~74.4.30
71.7.20~71.12.31 박영근 72.1.1~72.2.29
서영기 ~73.10.1
이계업 ~74.2.28
박동석 74.5.15~75.7.11
박영근 73.10.2~75.3.26
이근행 74.3.1~74.2.28
박경용 75.7.12~77.1.31
김용조 72.3.1~
전정수 75.3.27~77.2.1
양용식 74.7.1~77.2.28
박동석 77.2.1~현재
김연태 ~75.6.10
김만권 77.2.3~78.9.28
이강헌 77.3.2~79.2.28
이계술 75.6.14~75.7.11
서영기 78.10.1~79.3.30
양용석 79.3.1~81.2.28
이창헌 75.7.12~77.1.31
윤정표 79.4.1~79.8.14
이신범 81.3.1~84.2.28
이계술 77.2.1~77.7.30
전정수 79.8.15~88.1.30
이계주 84.3.2~88.1.30
진종상 77.8.1~79.2.28
이수범 88.2.1~88.12.31
김흥주 88.2.1~90.2.28
김용조 79.3.1~79.5.31
김주헌 89.1.4~92.12.31
김영식 90.3.1~92.12.31
오세창 93.1.4~94.1.31
이계주 93.1.1~현재
현상곤 79.6.11~82.12.20 김상수 83.1.1~83.5.27
박영근 94.2.1~94.9.8
박창근 83.6.1~84.8.31
심동현 94.9.9~98.12.31
김용조 84.9.1~89.1.31
김주성 99.1.2~03.2.17
현병철 89.2.1~89.8.30
이규원 03.2.18~03.9.30
진종상 89.9.1~90.12.7
이진행 03.10.8~05.5.12
이만헌 91.1.1~93.6.30
이수범 05.5.20~ 현재
김은태 93.7.1~ 김기권 ~98.8.11 진종상 98.8.13~02.5.22 이창헌 02.7.2~07.12.31 박영근 08.1.1~현재
도움을 주신 분 김길태 (1927년생, 고전) 563-5201 김순자 (1938년생, 고전) 박영근 (50세, 고전이장) 박성근 (1937년생, 고전) 이동철 (40세, 심원면사무소) 이기화 (73세, 전고창문화원장) 조희정 (34세, 심원면사무소) 진종상 (65세, 전 고전이장) 최경희 (1936년생, 고전 옥동) 현상곤 (62세, 심원 월산) 현종하 (1930년생, 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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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군 해안지역의 지형과 토지이용 변화』유승상,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9. 『고창 사등 문화역사마을가구기』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건축공간계획연구실, 2008.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삼양80년사』삼양그룹, 2007.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 1971. 『우리말의 상상력1』정호완, 정신세계사, 1991. 『전라도무장현지도』1872.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한글학회, 1981. 『전라북도 연해지역의 간척과 경관변화』홍금수, 국립민속박물관, 2008. 『조봉암과 1950년대 하』서중석, 역사비평사, 1999.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8권』진실화해위원회 제9차보고서, 2010. 『무장현지역조사보고서』전북역사문화학회, 2009. 『한국의 풍수』명문당, 村山智順저, 정현우역, 1996. 『한국의 자생풍수2』민음사, 최창조저, 1997.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김용섭, 일조각, 1992. 『한국근대기업의 선구자』수당 김연수 선생 전기편찬위원회, 2006. 네이버 백과사전 김여란 [金女蘭 ] 네이버 백과사전 고전리 [高田里, Gojeon-ri ] http://local.daum.net/map/index.jsp 2009년 9월 9일. 동아일보, 1963년 3월 31일. 연합뉴스, 2005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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