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면 계산리 마을 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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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리 마을 조사보고서1)

전북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의 한 부분이다. 계산리는 법정리인데 편 의상 1구와 2구로 나뉜다. 1구는 부정(부정ㆍ지산ㆍ새터ㆍ병암)이고, 2구는 사신원 ㆍ계산ㆍ비석촌이다. 이 중에서 원래 가장 큰 마을이었던 사신원마을부터 살펴보도 록 하겠다. 이 마을에 대한 관련 사료는 매우 간단하여 실상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이에 대한 부족한 점을 현지 조사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현지 조사 시 관련 유적과 유물조사는 물론이고, 지형적 특징도 살피면서 토박이들의 구술도 적극 참조하였다. 본 조사에서 토박이라 함은 해당 마을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살고 있는 주민을 뜻한다.

1. 1)

위치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 아산면 계산리에 속하며 사신원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고창 군청으로부터 지도상 서편으로 직선거리 약 9.25km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 을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은 동쪽에 있는 계산마을이다. 사신원마을은 북편과 남편에 작은 산이 자리 잡고 있어서, 동서로 골이 형성되어 있는 듯한 형상이다. 사신원 서 쪽에 있는 산이 배바우이고, 북쪽은 뒷산(조씨 선산)이고, 남쪽은 앞산이라 부른다. 따라서 이 마을은 사철 골바람이 세게 부는 곳이다. 특히 계산제(최근에 조성된 저 수지)가 있는 곳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이 강하였다. 여름은 시원하여 그 덕을 보지만 겨울은 차갑게 느껴진다. 최근 마을 앞에 시정(정자)을 만들어 놓았는데 항시 시원 한 바람이 불어 잠깐만 앉아 있어도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이 시정에서 여름이라도 밤에는 오래 누워 있지를 못한다. 그만큼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분다는 것이다. 다만 계산제가 들어선 뒤로 바람이 약간 약해졌다. 계산제 둑이 골바람을 일정 부분 차단 하기 때문이다. 사신원마을의 시원한 골바람은 여름철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 1)  물길과 사신원의 옛길조사 (고창군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 2009. 8)에서 발췌한 것임.


것이다. 마을의 서쪽에서 내려오는 물과 북서쪽 계산제에서 내려오는 물이 만나 서 형성되는 사신원천은, 동쪽으로 더 내려가서 인천강(仁川江)2)으로 흘러간다. 농 사환경은 좋지 못하였다. 지금은 1970년대 이후의 경지정리로 논들이 평지에 들어서 있지만 예전에는 야산처럼 잡목이 들어서 있거나 풀이 무성한 곳이 많았다. 주로 밭 농사를 위주로 생활하였다.

2)

역사

사신원마을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부근에 있는 고인돌이 말해준 다. 고인돌은 대개 가까이에 물이 넉넉하고 농경지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그 모습 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신원마을 주변에 있는 고인돌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이곳은 앞뒤로 산이 자리잡고 있어서 마치 동서로 긴 회랑 같은 자연지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지형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왕래하기 쉬운 교통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이 드나들던 교통의 흐름과 같이하며 이곳에 누 군가에 의해서 정착이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이는 이곳의 자연지형과 고인돌의 존재 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고인돌의 존재로 인하여 적어도 이곳에는 청동기시대부 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것이다. 현재 표에 열거한 고인돌 중 하나가 계산제로 오르는 길 오른편에 옮겨져 복원되 어 있다. 4개의 받침돌이 상석을 받들고 있는 바둑판형이다. 원래 위치는 마을 주민 들 말에 의하면 계산제 둑 있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인돌의 장축이 동서 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사신원천의 방향, 그리고 회랑같은 이곳 지형의 방향과 같은 것이어서 흥미롭다. 고인돌을 만든 사신원의 먼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살던 곳의 자 연지형을 의식하며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고인돌을 사신원마을 사람들은 그냥 ‘바우’(바위)라고 불렀다.

2)

가까운 곳인 아산면 영모정 마을에 변성진(卞成振, 1540~1614년)이 살았다. 그의 호가 인천(仁川)이므로 인천강이라는 이름의 연원은 적어도 16세기 이전까지 소급해 서 생각할 수 있다. 아마도 초계 변씨 성진은 인천강이라는 이름에서 그의 호를 따온 것 이 아닌가 한다. 변성진에 대해서는 아산의 역사와 문화, 고창군 아산면, 2004, 175~176쪽 참조.


유적명

소재지

시대

유적종류

유적개요

참고문헌

사신원에서 계산제로 향하는

계산리 지석묘 유적

아산면

농로 등에 4기가 위치한다.

문화유적분포지

지석묘는 1기를 제외하고 모

도 고창군, 원

계산리

청동

지석묘

두 상석이 이동된 상태로 장

광대학교 마한백

1293-

(고인돌)

축은 동서방향이다. 현재 자

제문화연구소ㆍ

리를 옮겨 복원해 놓았다.

고창군,

경위도좌표 : N 35°27′45.

238쪽 참조.

1

2005,

4″, E 126° 36′ 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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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신원마을 주변 고인돌

기록되어진 사신원의 흔적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 신원(四信院)은 무장현의 북쪽 18리 지점에 있다”3)는 내용이 그것이다. 신증동국 여지승람은 조선 중종 25년인 1530년에 편찬되었다. 따라서 사신원마을은 이 책이 편찬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 상한시기를 정확 히 알 수는 없다. 현재 사신원의 행정상 주소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 사신원’이지만 조선 전 기에는 전라도 무장현 관할이었다. 원(院)은 국가 교통로의 주요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그 원이 있던 자리가 어느 곳인지 궁금하다. 토박이들은 김영 임의 집과 옛 시정 사이가 ‘원터’ 또는 가마가 자고 가던 ‘원집’이라고 말한다. 일제 말기에 누가 묘를 쓰기 위해 명당이라고 하던 곳을 팠더니 집터가 나왔다. 바로 그 집터가 원터라는 것이다. 또한 방재춘의 집 바로 동편을 ‘몰방죽’이라고 부르고 있다. 몰방죽은 원터에 드나들던 말이 물을 마시던 방죽이라고 한다. 이 방죽의 크기는 현 재 새 시정의 절반 크기였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가 않았다. 현재는 메워져 사 라지고 없다. 사신원 본래 터가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토박이들의 구술이 참고된다. 그런데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토박이들은 사신원의 한자 표기를 ‘使臣院’이라 쓰고 있고, 옥천조씨(玉川 趙氏) 족보에도 ‘使臣院’이라 쓰여 있다. ‘四信院’이라는 한 자 표기를 이구동성으로 처음 본다고 말한다. 아무튼 현재 거주하고 있는 이들의 조 상들을 조사하면 이 마을의 역사에 대해서 좀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을은 원래 옥천조씨가 제일 먼저 터를 잡고 살았다. 현재 확인 가능한 사신원마을

3) 신증동국여지승람권36, 전라도 무장현 역원.


첫 입주 성씨는 옥천조씨이다. 또한 옥천조씨로서 고창군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이 가 처음 둥지를 튼 곳도 사신원마을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옥천조씨를 일명 사신원 조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신원에 맨 처음 정착한 이는 조덕린(趙徳隣)이다. 조덕린 이 1595년 임진왜란 시에 사신원에 와서 터를 잡았다고 한다.4) 현재 사신원에 거주 하는 사람들 중 조씨는 생존해 있지 않고 조씨들의 미망인들은 여러 명 생존해 있 다. 최근까지도 조씨들이 많이 살았다하므로 옥천조씨 덕린 이후에 계속해서 사신원 에 사람들이 거주하였다고 단정된다. 사신원마을의 입향조(入郷祖)인 옥천조씨에 대 해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3)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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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신원마을 전경

사신원마을은 원래 25호가 살았으나 여느 농촌처럼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떠나가고 현재는 10호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이나마도 두 집이 비어 있어서 실제는 8호가 이 마을의 전체이다. 나머지 8호의 성씨 구성은 각성바지이다. 하지만 원래 이 마을은 옥천조씨가 제일 많이 살았었다. 8호에 실제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11명이다. 남자는 3명이고 여자는 8명인데,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 70대 이상이다. 사회학적으 로 총인구 중에서 65세 이상의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 라고 한다. 이 마을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4) 아산의 역사와 문화, 고창군 아산면, 2004, 76쪽.


(

조원훈의 처)

(방재춘 부부) <

> (김영임) <원터> <옛 시정> <재실> <당산>

(김복순)

(김정자)

(전홍균 부부)

(김정자)

(빈집1)

(빈집2)

(이병연 부부)

<새 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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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신원마을의 구성과 배치

표는 현재 사신원에 거주하고 있는 구성원과 그들의 집을 평면에 배치해서 표시해 본 것이다. 아울러 마을 시설물의 위치도 적어 보았다. 정밀하지는 않지만 대 략적인 이해는 가능하리라 본다. 그 구성에 대해 설명을 해 보면, 남자는 방재춘, 전 홍균, 이병연 등 3인이다. 여자는 고 조원훈의 처, 방재춘의 처, 김영임, 김복순, 김 정자, 전홍균의 처, 김정자(동명이인), 이병연의 처 등 8인이다. 이렇게 해서 사신원 의 총구성은 11인이 된다. 본 조사 초기에는 12인이었는데 지난달인 6월에 조원훈 이 사망하여 11인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중에서 방재춘 부부는 고창읍내에 집이 있어서 양쪽으로 왕래하면서 거 주하고 있다. 따라서 항상 거주하고 있는 이는 9인이 되는 셈이다. 혼자 살고 있는 미망인들의 남편들 성씨는 대부분 조씨이다. (빈집1)에 살던 고부순은 남편 조씨가 사망한 뒤로 서울의 자녀 집에 거주하고 있다. (빈집2)는 박연팔의 집인데 역시 서 울의 자녀 집으로 거주를 옮겼다고 한다. 전홍균은 할아버지 때에 장성에서 사신원으로 이주하였다. 전홍균의 처는 해리면 에서 시집왔다. 고 조원훈의 처가 살고 있는 집과 방재춘 부부가 살고 있는 집 사이 에 공터가 있는데 이곳은 원래 조명률이 살던 집 자리이다. 조명률은 사신원에서 제 일 잘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인물도 좋았으며 전리(돈놀이)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6・25때 파산하였다. 자손들은 타지에 있다고 한다. 마을의 맨 동쪽에 있는 기와집이 옥천조씨 재실이고, 그 왼쪽에 옛 시정(모정, 정 자)이 있다. 옛 시정은 70여 년 전에 만들었다 하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 상


검은 먹으로 정축(丁丑) 4월 8일에 세웠다고 쓰여 있다. 70여 년 전에 만들었 으며 그것이 정축년이므로 1937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1937년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 시정을 조성했다고 이해된다. 재실과 옛 시정 사이에 있는 것이 사신원의 당산이다. 새로운 시정은 최근 마을입구에 조성하여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 되고 있다.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새 시정에 앉아 있으면 이내 땀이 가신다. 항시 시 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다. 한편, 지금은 없지만 계산제 안에 두 집이 살았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학전리에 속했으나 사신원마을 사람들과 생활을 같이 하였다. 이상과 같이, 사신원마을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작은 마을이라 현황 또한 소박하 다. 다음에서는 이 마을 생활의 이모저모를 기술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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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정에서 쉬고 있는 마을 사람들

4) 사신원마을은 광복 후에 25가구가 살았었다. 그때는 젊은이들도 많아서 편을 갈라 서 축구를 할 정도였다. 축구는 주로 현 시정 앞에 있는 들에서 했다. 젊은이들의 떠 드는 소리로 요란했을 들녘은 현재 논으로 변해 있다. 그때 공을 차던 젊은이 중 한 명이었을 방재춘에게 시집을 온 강복금은 가마를 타고 왔다. 그녀는 아산면 목동리 당산에서 19살에 사신원으로 시집을 왔다. 가마는 눈 오는 날에 인천강 징검다리를 건너 왔다. 원래 가마꾼은 8명이었는데 강을 건널 때만 여건 상 4명이 가마를 멨다.


징검다리 위에서 가마가 흔들려 물에 빠질까봐 혼이 났다고 한다. 당시 사신 원 사람들은 혼인 시에 가마를 이용했다. 그 가마는 이장집에 보관하였으나 지금은 옛날이야기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사신원천 냇물을 물이 맑아서 식수로 사용하였다. 지금은 상수 도를 사용하고 있다. 냇가에 빨래터도 있었다. 현 마을 시정에 가까운 남쪽으로 흘렀 던 시냇물이 지금은 경지정리하면서 산 아래로 물줄기가 이동하였다. 다슬기, 가재, 깔대기(검은 점이 있는 물고기), 은어, 참게, 장어, 자라 등이 있었다. 장어는 걸쾡이 고리로 잡았다. 걸쾡이는 세 가닥으로 되어 있었다. 그때는 장어를 먹을 때 비린내 난다고 껍질을 벗겨서 고추장에 발라서 구워 먹었다. 마을 냇물을 식수로 이용하고, 그곳에서 천렵하던 것은 이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마을의 경제생활은 원래 밭농사 위주였으나 경지정리를 한 후에는 논농사를 주 로 하고 있다. 이 곳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이용하던 장은 해리장이었다. 장터까지는 흔히 십리길이라고 말한다. 실제는 그보다 더 먼 거리이다. 해리장보다 무장장이 약 간 험하고 더 멀었다. 무장장까지 걸어가는데 빨리 가면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해리장은 소전이 유명하였고 제일 크게 열렸으며, 걸어서 접근하기에 편하여 제일 많이 이용하였다. 해리장을 갈 때는, 깨진바위 → 월성동 → 평지 → 수락을 거쳐서 갔다. 그 다음으로 이용하던 장은 무장장이었다. 무장장은 끄렁재를 통해서 넘어 간 다. 읍내에 있는 고창장은 가끔 이용하였다. 사신원 사람들은 장에 가서 쌀, 보리, 고구마종자, 깨 등을 가져다가 팔았다. 그리 고 반찬거리를 사온다. 계산마을에 복숭아밭이 있어서 사신원 사람들은 보리를 가져 가서 복숭아와 바꿔먹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현재 특별한 공동제사는 없다. 다만 당산(堂山)을 숭배하는 민속이 있 다. 원래 당산은 나무인데 동서에 각 한 그루씩 두 그루가 있었다. 둘 다 팽나무인데 동쪽에 있는 것을 앞당산이라 했고, 서쪽에 있는 것을 뒷당산이라 했다. 정월 보름 저녁에 농악을 하면서 줄을 감아 놓는다. 만약 정월 보름날이 좋지 않으면 2월 초하 루에 했다. 짚으로 만든 줄의 굵기는 집 기둥 정도 되고, 길이는 50m 정도 되었다. 그 줄을 당산나무에다 감아 놓았던 것이다. 나무보다 더 컸던 앞 당산나무는 익산에 거주하는 조우철 소유의 논에 있었으나 경지정리하면서 베어졌다. 뒷당산도 나중에 없어졌다. 조사자 생각에 양 당산나무 사 이에 마을이 있으므로, 두 당산은 마을을 양쪽에서 보호하는 형세였다고 생각된다.


앞 당산나무가 베어지고 난 뒤에 젊은 사람들이 아프기도 하고 또는 죽기 도 하는 등 안 좋은 일들이 생겨서 다시 당산을 모시기로 하였다. 그래서 조씨 재실 과 옛 시정 사이에 있는 현 위치에 팽나무 당산대신 돌 당산을 세운 것이다. 앞 당 산나무의 북쪽 가까운 곳이다. 높이는 어른 가슴팍 정도 된다. 아무튼 그 뒤로 질쌈 제와 당산제를 올리게 됐다. 원래는 당산제만 올리던 것을 질쌈제까지 올리게 되었 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는 줄 대신에 짚으로 작 은 움막 지붕처럼 만들어 덮어 놓았다. 따라서 육안으로는 돌 당산을 확인할 수 없 다. 그런데 그마저도 올해부터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없는 것이 주 된 이유가 된다. 그리고 장례를 치를 때 사용하던 상여틀은 상여집에다 보관하였으 나 지금은 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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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신원마을 당산

뒷당산 남북에 산이 있는 사신원마을에서 서쪽으로 통하던 길은 앞에서 설명한 무 장장과 해리장으로 가던 길이다. 동쪽으로 통하던 길은 세 갈래가 있었다. 세 갈래 중 맨 북쪽에 있는 길은 몰방죽 → 원터 → 조씨 재실 → 덕철뫼 밑으로 통해서 부 정마을로 가는 길인데 제일 오래되었다고 한다. 조사자 생각에 이 길은 가장 빠르게 바다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이다. 다음은 가운데 길인데 지금은 논으로 변해버렸다. 주


계산마을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맨 남쪽에 있는 길도 계산마을과 연결되는 도로 인데 현재 주 통로로 사용하는 길과 비슷하지만 경지정리로 인하여 약간 변동되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확장되었다. 사신원마을에는 주변 마을 사람들도 잘 아는 전설이 하나 있다. 가까운 인천강에 보가 두 개가 있었다. 웃보와 아랫보가 그것이다. 아랫보(또는 웃 보)가 밤낮 터져서 애기를 사서 넣고 보를 막으면 튼튼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리했는데 그 뒤로 보가 터지지 않았다. 애기의 어머니가 사신원마을 서쪽에 있는 바 위 밑에서 애기를 팔아서 받은 돈을 세고 있는데 벼락이 쳤다. 벼락이 바위를 치자 바위가 깨지면서 애기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 바위를 깨진바위라고 한다. 위 전설은 구술하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다. 아무튼 깨진바위는 전 설처럼 깨진 채로 사신원마을의 서편에 있으며 예전에 해리장을 갈 때는 이 바위 앞 을 지나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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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깨진바위

(入鄕祖)와 옥천조씨

앞에서 사신원마을의 입향조인 옥천조씨 덕린(徳隣)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였다.


임진왜란중인 1595년에 사신원마을로 들어 온 것은 피난과 관련된 듯하다. 현재 사신원마을의 입향조에 대해서는 조덕린(趙徳隣)이라는 설(조세훈)과 그의 아 들인 조숙(趙淑)이라는 설(조택훈)이 있다. 여하간 그 시기는 임진왜란 발발이후임 은 확실할 것이다. 조덕린의 아들이 조숙이므로 설명은 덕린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해하는 데 좋을 듯하다. 이에 대한 설명은 주로 옥천조씨 대동보ㆍ지평공파세보 (持平公派世譜)와 후손인 조세훈ㆍ조택훈의 구술에 상당 부분 의존하였다. 옥천조씨의 관향인 옥천은 현재의 전북 순창군이다.5) 시조는 조장(趙璋)인데 고려 말 때 인물로 추정된다. 장의 8세손인 지평공(持平公) 부(溥)로부터 갈라져 나왔기 에 고창의 옥천조씨들은 지평공파로 불린다. 또한 구술자인 조세훈의 16대조가 지평 공이고 11대조가 덕린이다. 또한 덕린은 시조로부터 13세손이며 1564년생(명종)이 었다. 1595년에 덕린이 고창 사신원마을로 들어왔다. 덕린은 아들 둘을 두었다. 큰 아들이 함(涵)인데 손이 귀하였다. 둘째가 숙(淑)인데 후손이 번창하여 고창 후손의 대부분이 바로 숙의 자손이다. 아산면 용계리 덕천사 뒷산에 덕린의 묘가 있고, 사신원 북쪽(뒷산)이 조씨 문중 산인데 그곳에 숙이 묻혀 있다. 족보에는 숙이 서당동(書堂洞) 왼쪽기슭 임좌(壬坐) 에 부인인 전주이씨와 함께 묻혀 있다고 적혀 있다. 숙은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 는데 고창의 옥천조씨들은 대부분 셋째인 상열(相說)의 후손이다. 첫째와 둘째는 손 이 귀하였다. 즉 고창의 옥천조씨들은 덕린의 둘째인 숙의 자손 중에서도 셋째 상열 의 후손들이 가장 많다고 이해된다. 고창에 거주하는 옥천조씨들은 모두 77호인데 그중 계산리 부정마을에 제일 많이 산다. 숙의 자손 중에서 제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삼호(三湖)였다. 시조 장의 17세손 인 첫째 인호 현동(仁湖 顕東, 1701년생), 둘째 덕호 후동(徳湖 垕東), 셋째 석호 석동(石湖 錫東)6) 이렇게 세 자손이 삼호이다. 이 세 형제 대에 조씨네는 최고 번창 하였다. 아산면 용계리의 19번 군도 동편에 있는 삼호정(三湖亭)이란 이름은 바로 이 삼호에서 따온 것이다. 삼호정은 19번 군도를 사이에 두고 부정마을과 약간 대각 선으로 마주보고 있다. 지금은 정자 가까이 4차선 국도가 지나가서 풍광의 기가 꺾이었지만, 건립 당시에 는 동쪽으로 산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인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고 생 각된다. 또한 이 정자는 앉아서 바라보는 이의 눈높이를 생각하여 설계했다는 것을 5)  권39, 전라도 순창군 군명 참조. 6) 석호는 경암(敬菴)이라는 호도 가지고 있었다.


수 있다. 앉아 있을 때 마루의 턱은 팔걸이 높이이다. 또한 앉은 이의 눈높이는 일대를 관망하기 편하게 되어 있다. 덕천사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의 마루는 한단 올라있어서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한옥의 과학적 우수성을 느낄 수 있 는 정자가 바로 삼호정이라 하겠다. 시조의 20세손인 진혁(進爀)이 사신원에서 학전리로 이주하여 학전리에 조씨들이 살게 되었다. 따라서 아산면에서 사신원마을과 학전마을 그리고 부정마을 사람들이 교류를 하는 것은 관향이 같은 성씨이기 때문이다. 사신원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동 서의 교통로를 따라 퍼진 것이다. 삼호정의 뒤편에 덕천사(徳川祠)가 있다. 1826년에 건립하였으며 아산면 용계리 43번지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귀래정 신말주, 돈세암 조윤옥, 돈암 장조평을 모시고 있다.7) 사우인 덕천사에는 지역 유림들이 와서 음력 9월 8일 아침 9시에 제사를 지 낸다. 옥천조씨 시향은 일 년에 한번, 음력 10월 7일에 지낸다. 날씨가 좋으면 덕천사 뒷산에 있는 숙(淑)의 5대조 묘 앞에서부터 지낸다. 순창에 있는 묘를 현재의 장소 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조상 순서대로 지낸 다음, 사신원의 선산에 있는 숙의 묘에서 지내면 끝난다. 사신원마을의 동편에 있는 조씨 재실이 바로 이 제사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3시경에 모두 끝난다. 만일 비가 와서 날씨가 안 좋으면 덕천사의 숭절당 가운데 대청마루에서 지낸다.

7)

대해서는 아산의 역사와 문화, 고창군 아산면, 2004, 326~327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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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덕천사

6) (田洪均)(담양 전씨, 남 78세, 사신원 토박이). 방재춘(남 1945년생, 사신원 토박이). 강복금(여 61세). 김영임(여 67세). 김정자(여 67세). 김선철(광산김씨, 남 1941년생, 계산마을 토박이, 현 계산이장). ※ 옥천조씨에 대해서는 다음 두 사람이 구술해 주었다. (趙沢勳, 남 66세, 옥천조씨 유사) 조세훈(趙世勳, 남 71세, 2008년까지 부정마을 이장을 역임, 조세훈의 16대조가 지평공이고 11대조가 덕린이다).

2. 1) 자연환경과 마을생활사 사신원마을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 계산마을이다. 본래 고창군 산내면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산리, 부정리, 비석리, 사신리, 병암리, 내독리 일부를 병합하여 계산리라 해서 아산면에 편입되었다.8) 계산마을의 동쪽에는 비석촌이 있다. 남북으로는 산이 자리잡고 있어서 이 마을도 역시 사신원마을처럼 동서 방향으로만 통행이 가능한 곳이다. 이 마을은 남쪽에 있는 산을 뒷산이라고 부 르는데 그 산이 바로 계산(鶏山)이다. 계산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계산마을의 이름은 바로 이 산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닭이 알 을 품고 있는 곳은 명당으로 꼽는다. 뒷산(계산)은 고흥유씨들 선산이다. 관계되는 고흥유씨들은 와룡마을에 거주한다. 계산마을은 겨울에 북풍이 심하게 분다. 바다의 영향인 듯 겨울바람은 사신원보다 강하다. 그러나 다른 계절에는 바람이 괜찮다. 이 러한 점이 사신원마을의 바람과 다르다. 계산은 한때 열댓 집이 살았는데 그중 7~8호가 광산김씨였다. 현재는 10호가 살 고 있으며, 주민들 성씨의 구성은 각성이다. 이 마을의 광산김씨는 인천강 건너 용계 리 원평에서 이주해온 성씨이다. 충청도 연산에서 원평으로 이주한 광산김씨는 김선 철의 5대조가 계산마을로 이주하여 그 자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 광산김씨도 옥 천조씨 못지않게 이 일대에 널리 알려진 성씨이지만, 본 보고서의 주 조사지역이 사 신원마을과 비석촌의 비석이 있는 곳이므로 광산김씨에 대한 자세한 조사는 하지 않 았음을 밝혀둔다. 계산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사신원마을의 역사를 미루어 볼 때 역시 청 동기시대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신원마을이 바로 이웃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추정이 허락된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그것은 아래에서 설명할 청자 유물 산포지가 이 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계산마을은 사신원마을과 같이 계산리에 속해 있지만 문상이나 다니지 별로 교류가 없다. 그 이유는 사신원 조씨들은 학전리에 사는 같은 조씨들과 교류하고, 계산마을 광산김씨들은 원평의 같은 김씨들과 교류하기 때문이다. 즉 조씨들과 김씨들은 같은 계산리보다는 다른 마을의 같은 관향 성씨끼리 교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신원 마을, 계산마을, 비석촌을 통틀어 마을회관은 가운데 마을인 계산마을에 있다. 계산마을의 경제생활은 밭농사와 논농사이다. 예전에 보릿고개 시절에 생활이 곤 란하여 고생이 심하였다. 그 밖에 마을에서 참외와 복숭아를 재배했는데 이를 주변 장날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마을계가 있지만 연말에 결산하기 위해 모여서 식사를 8) 

11(전북편)상, 한글학회, 1981, 97쪽.


정도이다. 정월 보름에 농악을 하고 놀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그만두었다고 한다.

2)

청자 유물 산포지

소재지

용계리 청자요 지 (사적 제345 호, 1991.2 .21)

아산면 용계리 206

시 대

고 려

유적 종류

유적개요

참고문헌

자기 요지

아산면 운곡저수지 북측에 위치한 이 가마터 는 10세기부터 11세기 전반까지 청자를 굽던 곳으로 전북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청자가마 터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3곳의 가마는 길이가 38m, 31m, 14m로 서로 다르지만 그 폭은 1.1m~1.3m로 비슷하다. 가마바닥의 경사면 은 갑발을 이용하여 수평을 이루었으며 벽과 천장은 돌과 점토를 섞어 쌓아 올렸다. 이 가 마에서는 대접, 접시, 병, 호, 합, 탁잔 등을 구웠으며 대부분이 무늬가 없는 것들이다. 태 토는 양질의 회백색을 사용하였으며 비교적 세련된 제품을 생산하였다. 이 가마터는 인근 의 부안군 유천리와 진서리보다 먼저 조성된 것으로 고려청자의 발달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경위도좌표 : N 35° 28′ 36.4″, E 126° 38′ 00.3″

 문화유적 분포지도 고창군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 화연구소ㆍ 고 창 군 , 2005, 245 쪽 참조.

<표 2> 용계리 청자요지

이번 조사에서 새롭게 알려진 것은 계산마을에 청자편들이 다수 보이는 유물산포 지가 있다는 것이다. 계산마을의 시정에서 동쪽의 비석촌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꺾이는 오르막 시멘트길이 있다. 바로 뒷산(계산)에 오르는 길인데 약 200m쯤 걸으 면 시멘트길이 끝난다. 바로 그 시멘트길이 끝나는 지점에 청자편들이 다수 보인다. 이 근처에서 1970년대에 묘를 쓰려고 했는데 그 속에서 청자편들이 많이 나왔다. 또 한 정읍의 진사묘라고 하는 큰 묘도 근처에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온전한 청자가 나 와서 민아무개가 다른 곳으로 팔아 넘겼다 한다. 그 묘의 관은 보통 묘의 관 뚜껑이 한 치(3cm)인데 반하여 두 치 정도로 두꺼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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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계산에서 발견된 청자편 내면

<사진 7> 계산에서 발견된 청자편 뒷굽

보이는 것은 작은 편들이 대부분이라서 정확한 해석이 어렵다. 그중 굽 이 온전한 청자편(사진 8에서 볼펜 가까이에 있는 것)을 토대로 살펴볼 수 있다. 안 쪽에 태토비짐 세 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포개구이로 만든 것이다. 굽에 모래흔이 있으므로 이 청자편은 포개구이 시 맨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굽은 죽절굽(대마디 굽)의 형태가 보인다. 따라서 해석을 해보면 그 시대가 고려 말(14세기 말)로 추정 되고 있다.9) 한편 가까운 곳에 초기 청자요지가 있어서 참고된다.

9) 2009년 8월 4일, 고려 후기 청자 전공자인 한성욱 박사의 도움을 받아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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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계산에서 발견된 청자편

표에 제시한 용계리 청자요지는 계산마을에서 인천강을 건너 부안쪽으로 걸어 가던 길목에 있다. 향후 계산마을 청자 유물산포지는 용계리 청자요지와 함께 보다 자세한 조사가 요구된다. 초기 청자 생산지였던 용계리 청자요지와 말기 청자편들이 보이는 계산마을의 청자 유물산포지는 인천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인천강을 빠져나 가면 곰소만에서 부안군의 유천리ㆍ진서리 청자요지와 뱃길로 연결된다. 또한 계산마을의 청자 유물산포지는 고려시대 묘지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발견 된 것인지 아니면 근처에 요지가 있는 것인지 두 가지 상황을 설정하고서 살펴보아 야 할 것이다. 물론 두 가지 상황이 함께 존재할 수도 있다.

3) 김선철(광산김씨, 남 1941년생, 계산마을 토박이, 현 계산이장). 김낙중(광산김씨, 남 68세, 계산마을 토박이).

3. 1) 자연환경과 마을생활사 비석촌은 비석(고비古碑)이 있다고 해서 그리 불린다. 비석은 마을의 동남쪽 밭에


있다. 앞뒤로 산이 있고, 서쪽에는 계산마을이 있으며, 동쪽에는 인천강 건너에 용계리 원평마을이 있다. 이곳은 사신원마을, 계산마을과 함께 계산리 2구에 속한 마을이다. 남쪽에 있는 산은 ‘목청나무갓’인데 그곳에서 땔감을 채취하였다. 북쪽에 있는 뒷산이 덕철뫼이다. 밖에서 이 마을로 접근할 때에는 원평마을 쪽에서 인천강을 건너거나, 서쪽에서 사신원마을과 계산마을을 거쳐서 와야 된다. 주 통로는 인천강을 건너서 들어오는 길인데 1972년에 완공한 계산교(또는 인천강 다리)를 이용해야 된다. 비석촌에서 고 창읍내로 다닐 적에는 오벵이골을 통해서 걸어갔다. 비석촌의 동편을 흐르는 인천강에는 예전에 보가 두 개 있었다. 웃보와 아랫보가 그것이다. 아랫보는 일명 애들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흔적만 U자형으로 남아 있다. 아랫보는 삼호정 앞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전에 다리가 없을 적에는 아 랫보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거나 물이 많으면 나룻배를 이용했다. 나룻터는 웃보와 아랫보의 중간쯤인데 바로 비석이 있는 곳의 동편 강가이다. 나룻배는 간두깨(삿대) 를 이용하여 이동하였다. 이 나룻배 일은 김익두(동생)와 김영태(형) 형제가 했다. 형제는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면서 나룻터 뱃일을 했던 것이다. 사신원, 계산, 비석 촌 3개 마을에서 모두가 일 년에 보리 한 말과 나락 한 말씩을 거두어서 그 형제에 게 배삯으로 주었다. 뱃일은 김익두가 주로 많이 했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 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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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비석촌의 옛 나루터 자리

비석촌은 11호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계산교를 건너 계산마을과 사신원마 을 쪽으로 연결된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마을이지만 다시 둘로 나뉘어 불 린다. 길가에 팽나무가 있는데 팽나무의 서쪽(계산마을 쪽)을 아랫똠이라 하며 5호 가 산다. 그 동쪽이 윗똠인데 6호가 산다. 윗똠의 가까운 곳에 비석이 있다. 주민들 의 성씨는 각성바지이다. 그중 광산김씨가 오래된 성씨이다. 아랫똠 안쪽에 있는 나무가 당산나무(느티나무)이다. 마을 사람들이 적어서 마을 제사, 위하는 것, 마을계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칠월 칠석에 당산나무 밑에다 술 한 잔을 따르기는 했다. 그리고 윷놀이 등을 하며 놀았다 한다. 비석촌에는 둠벙이 몇 개 있었다. 덕철뫼 앞 100m쯤 되는 곳에 자라둠벙이 있었 는데 크기는 200평 가량 되었다. 그 둠벙에서 볼 수 있었던 것들은 자라, 붕어, 잉어 였다. 특히 자라가 많아서 자라둠벙이라고 했다. 이 둠벙을 홍순옥이 메워서 자신의 논으로 만든 것은 30년 전의 일이었다. 계산마을 앞에도 둠벙이 있었다. 마을회관 앞에 100평 정도 크기의 둠벙이 있었으나 이 역시 지금은 논으로 변했다. 인천강에 가까운 마을이어서 물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촌의 식수는 도내기샘이라고 불리는 샘물이었다. 샘의 위치는 덕철뫼 앞에 있 는 인천강의 강둑 안쪽이다. 현재 까치집이 있는 곳 앞쪽에 있는 전봇대 자리가 예 전에 도내기샘이 있던 곳이다. 바가지로 떠서 먹거나 길러다 먹었다. 마을 사람들 전


식수로 사용하였다. 샘물이 지표면과 비슷한 높이여서 입을 대고 마셔도 될 정 도였다. 샘의 깊이는 약 40cm이고 넓이는 반 평 정도였으며 돌로 쌓았다. 마을 사람 들이 도내기샘물을 길러다 먹다가 나중에는 각자 작두샘을 박아서 사용하였다. 그러 다가 2007년도부터 부안댐에서 상수도가 들어와서 사용이 중단되자 도내기샘 자리 는 논으로 바뀌었다. 식수는 도내기샘물을 이용했지만 빨래는 인천강에서 했다. 그런 데 이 도내기샘은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에 있는 ‘되내기샘’과 그 이름과 형태 및 용 도 등이 비슷하여 흥미롭다. 차후에 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10) 비석촌 사람들의 경제생활은 자급자족이고 논농사와 밭농사가 주이다. 예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2)

비석(계산리 고비)

아산면 계산리 비석촌이라는 마을에는 오래된 비석(고비古碑)이 하나 있다. 이 비 석은 마을의 동남쪽 가까운 곳에 있는 밭의 한쪽에 서있다. 비석 가까운 곳에 있는 인천강가에 예전에 나룻터가 있었다. 서있는 모양새는 튼튼해 보이지만 비문은 대부 분 훼손되어 있다. 비석의 크기는 지표면 위로 드러난 높이는 146cm이고 폭 49cm, 두께 32cm이다 (2009년 3월 7일 측정). 표면이 정교하게 다듬은 것은 아니기에 위치에 따라 치수 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위치는 경위도 N35° 27′ 39.5″ E126° 37′ 33.4″이며, 해 발고도는 18m이다.11) 전면에만 글씨가 몇 글자 보이는데 이에 대한 판독 시도는 뒤 에서 설명할 것이다.

10) 되내기샘은 최근에 복원을 하였는데 주변이 논으로 변해서 옛 모습과는 다르다 고 한다. 하지만 이름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상황이 비석촌의 도내기샘과 비슷하다(2009 년 7월 7일 ~ 7월 8일, 김명진 신시도 답사). 11) 비석이 자리하고 있는 경위도와 해발고도는 변남주가 측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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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비석촌 전경

이름이 비석촌인 것을 보더라도 이 비석은 이 마을의 상징이라 하겠다. 일대 에서는 이 비석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특정한 이름도 없이 그냥 ‘비석’이라고 불 리고 있다. 먼저 이 비석의 이름부터 지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문화재를 작명할 적에는 소재하고 있는 행정 지명을 따서 붙인다. 그렇다면 ‘계산리 비석’, ‘계 산리 석비(石碑)’ 또는 ‘계산리 고비(古碑)’라고 해야 된다. 문화재의 명칭은 대체로 행정지명을 따서 그 이름을 짓는 보편성이 있으므로 ‘계산리 고비’가 무난할 듯싶다. 석비는 그 모양새에 따라 머리 부분에 이수(螭首)같은 장식이 얹어진 것을 비(碑) 라 하고, 머리 부분에 장식이 없는 원형의 형태를 갖춘 것을 갈(碣)이라고 한다.12) 따라서 비석촌의 비석은 굳이 그 모양새를 가지고 분류한다면 갈이라 하겠다. 석비 는 어떤 사적이나 글을 새겨 후세에 오래 전하기 위해 세운 것을 말하는데 비문의 내용에 따라 탑비ㆍ묘비ㆍ신도비ㆍ사적비ㆍ송덕비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이것은 미 술사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며 비문은 역사학ㆍ서지학 등에서 중요한 자료이다.13) 그 런데 비석촌의 비석의 글씨는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몇 글자 외에는 불가하여 내용 에 따른 분류가 어렵다. 하지만 추정이 허락된다면 아마도 무언가 기념하기 위해 세 워둔 것이 아닐까 한다.

12) 문화유적조사요람제1집 유형편, 사단법인 향토문화개발협의회, 1989, 138~139쪽. 13) 그림과 명칭으로 보는 한국의 문화유산1, (주)시공테크, 2002, 177쪽.


80m 가량 뒤편에 불 먹은 흙과 옹기편들이 보인다. 옹기가마터로 추정되 는데 이것이 비문의 훼손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또한 바닷바람의 영향을 받는 곳이므로 자연현상의 영향으로 인하여 비문이 훼손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상당히 정성을 기울인 비석임은 틀림없다. 언뜻 보면 충주에 있는 고구려비와 분위기가 비 슷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동남인데 바로 앞의 인천강 건 너에 있는 산꼭대기를 바라보고 있다. 그 산의 이름은 없으나 갈마음수형(渇馬飲水 形)이라고만 부른다. 그런데 비석촌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곳은 바로 갈마음수형의 산이다. 이 비석이 바라보는 방향은 아침에 뜨는 태양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3) 홍순옥(남양홍씨, 남 69세, 비석촌 토박이). 김선철(광산김씨, 남 1941년생, 계산마을 토박이, 현 계산이장). 강신교(남 1948년생, 고창읍 도산에서 출생하여 아산면 독곡에서 53년째 살고 있다.)

4. 1) 자연환경과 마을생활사 이상에서 계산리 2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1구인 부정에 대해서 조사한 바 를 적고자 한다. 19번 군도에서 부정교를 건너면 바로 맞닿는 마을이 부정마을이다. 마을의 남서쪽에 덕철뫼라는 작은 산이 있고 앞에는 인천강이 있다. 전통시대에 풍 수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터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마을은 겨울에 따뜻하다 고 한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동북쪽에 병풍바위(병암)가 있고, 병암의 서쪽에 할 미바위가 있다. 용계리 삼호정은 대각선 건너에 자리한다. 부정마을은 부정, 병암, 지산, 새터 등 네 마을로 이루어졌다. 이중 새터마을 자리 인 현재 19번 군도 건너에 복분자주 공장이 들어서 있다. ‘고인돌 복분자주 시음전 시관’이라는 간판이 들어선 자리가 그곳인데 사실상 도로확장과 술 공장이 들어서면 서 새터는 사라진 셈이다. 이 네 마을 중 대표마을이 부정이어서 통칭 부정이라 부 른다. 본 보고서에서는 대표 마을인 부정만 조사하였다.


한자이름은 부정(釜鼎)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발 행한 지도에는 부정(夫丁)이라고 적혀 있다. 마을 이름이 부정(釜鼎)인 것은 마을 터가 가마솥과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마을에서 내려오는 유래에 의한다면 한자표기는 부정(夫丁)보다는 부정(釜鼎)이 합당할 듯 싶다. 이곳은 샘을 파도 물이 안 나온다는 말이 있다. 솥에서는 물이 안 나기 때문이란다. 또는 터가 가마솥 같아 서 일부러 우물을 안 팠는지도 모른다. 우물을 파면 솥에 구멍이 나는 꼴이니 터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 마을 사람들은 원래 샘을 파지 않고 인천강 물을 먹 고 살았으며 그곳에서 빨래도 하였다. 조세훈의 처가 말하기를 자신은 정읍에서 1958년도에 시집을 왔는데 그때도 또랑물(인천강)을 썼다고 한다. 1990년대쯤에 지 하수를 개발해서 남쪽에 있는 오공등에 올려서 저장하여 다시 마을로 내려 보내 식 수로 사용하였다. 2003년도부터 상수도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의 구성은 한참 때는 60호였는데 지금은 50호이다. 마을 앞 19번 군도가 확 장되면서 마을이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전체 주민의 60%가 옥천조씨였으나 지금은 절반이 조씨이다. 조씨 집성촌이라 할 만한 곳이다. 고창군에 있는 옥천조씨들 중 가 장 많은 수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 나머지 주민들의 성씨는 각성바지이다. 밀양손 씨, 신천강씨, 광산김씨 등의 각성들이 옥천조씨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도 당산나무가 있고 당산제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하겠다. 마을에 촌계가 있었다. 그리고 마을 재산으로 마을산이 있었으나 팔았다고 한다. 부정 앞 인 천강에는 민물장어가 있었다. 특히 선운사 입구에서 강정 사이에 서식하는 장어를 풍천장어라 불렀다. 장어를 잡을 때는 물을 막고 퍼내는 방법을 사용하여 많이 잡았 다. 장어를 먹는 방법은 껍질을 벗겨서 소금 또는 고추장에 발라서 화로에 구워먹었 다. 또한 중복 무렵에는 선운사 주변에서 자연산 복분자를 딸 수 있다. 양식 복분자 는 이 마을의 수입원 중의 하나이다. 양식 복분자는 6월 12일부터 수확을 시작하며 10일 간이면 끝난다. 복분자주는 100일간 숙성시켜서 만든다.14)

14) 타 고 다 이

복분자를 1,300ha 심어서 1300억 원의 수입을 올린다. 공장은 전부 9개이다. 지역의 복분자보다 가격을 더 받는다. 그만큼 오리지날이라는 인식을 소비자들이 가지 있기 때문이다. 한편 쌀은 13,000ha에서 1300억 원의 수입을 올린다. 복분자가 쌀보 10배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 이에 대해서는 고창군청 조용호 계장 구술해 주었다(2009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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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부정마을 전경

2) 옆에 흥미로운 돌 들이 있다. 마을회관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있 는 석재들이 그것이다. 예전에 연자방앗간에서 사용하던 것들이다. 연자방아는 둥근 큰 돌판을 밑판 삼아 아래에 놓고, 그 위에 밑판보다는 작지만 두께가 굵은 윗판 돌 을 얹어 놓는다. 윗판을 소나 말이 원을 그리며 돌리면 곡식을 빻게 되는 방아가 바 로 연자방아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실제 연자방아를 찧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윗대의 어른들한테 이곳 부정마을에 연자방앗간이 있었다는 말만 들었다 한다. 윗판은 왼쪽에 완전한 상태로 있고, 오른쪽에 밑판은 두 동강 난 상태로 있다. 윗 판의 최대지름은 107cm, 두께는 40cm이고 밑판은 최대지름이 150cm, 두께 25cm 정도로 추정된다. 연자방앗간자리는 조세훈의 집과 마을회관 사이였다. 현재는 서울 에서 온 외지인인 유재욱이 살고 있는 집자리에 연자방앗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 토박이들의 기억에 연자방아는 없고 지산에 있는 조아무개가 운영하던 물레방아에서 근처 마을 사람들이 방아를 찧었다. 조아무개는 많은 돈을 벌었으나 익산에서 성냥 공장을 운영하다가 실패했다는 말도 있다.

3) 당산나무 본 조사에서 한 가지 특기할 것은 고창군에 당산나무가 많다는 것이다. 충남지역 에서 마을조사를 해보면 당집들이 많이 보인다. 이에 비해 고창군에 당산나무가 많 다는 점은 이 지역의 특징 중 하나로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창사람들은 마을의


번영을 위해 당산나무를 신령시하고 이를 통해서 마음의 위안을 삼고 있었 다. 조사한 것 중에서는 나무의 수종은 팽나무가 많았으며, 그 다음은 느티나무가 있 었다. 지금은 사라진 사신원마을의 것은 팽나무였고 부정마을도 팽나무인데 비석촌 은 느티나무이다. 이외의 마을에서도 당산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나무의 크기는 아름 드리인데, 어른들 팔로 한 사람이 감싸지 못할 정도에서 두 사람이 감싸지 못할 정 도까지 대체로 오래되고 큰 나무들이다.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에는 노거수(老 巨水) 또는 보호수로 표기하고 있다.15) 아산의 역사와 문화에는 아산면 관내인 50여 개의 노거수가 소재해 있는 마을이름이 열거되어 있다.16) 여기에 소개되어 있 는 노거수는 대부분 당산나무일 것이다. 주민들 기억 속에 자리잡은 나무의 이름은 하나같이 당산나무이다. 따라서 그 명칭은 노거수보다는 당산나무로 부르고 적는 것 이 옳을 듯하다. 고창군민의 마음 속에 오랜 시간 신앙처럼 자리잡고 있었던 나무는 당산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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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부정마을의 당산나무

부정마을에는 정월 보름에 당산제가 있었다. 정월 14일 저녁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농악을 치며 매굿을 했다. 보름 이후에는 날을 잡아서 당산나무에 줄을 감았다. 그런 데 1990년대 후반부터 농악 전수자가 없어서 중단되었다. 본 조사 중 첫 방문했을 때인 5월 2일에는 비가 많이 와서 부정마을의 당산나무를 촬영할 수 없었다. 두 번 15)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ㆍ고창군, 2005. 16) 아산의 역사와 문화, 고창군 아산면, 2004, 앞부분에 있는 김상휘의 ‘아산의 평설’ 중 ‘노거수가 있는 마을’ 참조.


방문 조사일인 7월 30일에 촬영을 했다. 그러나 7월 중에 있었던 비바람에 그만 가지 하나가 부러져서 아쉬움을 남겼다. 원래는 3가닥이었는데 동쪽가지가 부러져 있다. 고창군의 당산나무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자세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 편 고창군의 군목은 은행나무였다. 그러다가 작년인 2008년부터 소나무로 바꾸어서 현재 고창군의 상징 나무는 소나무이다. 고창군에 소나무가 많고 그 상징적인 절개 를 높이 사 그리했다고 한다.17)

4) 조세훈(趙世勳, 남 71세, 2008년까지 부정마을 이장을 역임, 조세훈의 16대조가 지평공이고 11대조가 덕린이다). 김선철(광산김씨, 남 1941년생, 계산마을 토박이, 현 계산이장).

5.

고비

계산리 입구의 속칭 비석촌에는 성격을 알 수 없는 고비(古碑) 1기(基)가 서 있 다. 비석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이 비석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비석의 유래 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마을에서도 이 비석에 관련한 특별한 전승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7) 2009

8월 5일, 고창군청 조용호 계장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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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갈마음수형의 산을 바라보고 있는 비석촌 비석(계산리 고비)

화강암 재질로서, 크기는 높이 146cm, 폭 49cm, 두께 32cm, 둘레 163cm 이며, 앞면만을 약간 다듬어 글씨를 새겼고, 옆면과 뒷면은 다듬지 않은 원래의 상태 이며 글씨도 본래부터 새겨지지 않았다. 글씨가 새겨진 앞면의 경우 오른쪽은 완전 히 마멸되어 글씨를 확인할 수 없고 왼쪽에서만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데, 왼쪽 윗 부분 일부가 깨져 나가 중간부 이하의 글씨 일부만 확인 가능한 형편이다. 2009년 3월 사신원마을 1차 조사 때에 이 비석의 현황과 새겨진 글씨에 대한 간 략한 조사를 하였는데, 이때는 비석의 훼손 상태를 확인하는 한편 왼쪽 아랫부분에 ‘代王’으로 읽을 수 있는 글씨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쳤고 그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당시의 조사를 토대로 더 정확한 내용 확인을 위하여 전 문적인 탁본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2009년 4월 12일에 탁본 전문가인 홍영의 (국민대 박물관 연구위원) 선생과 서예가인 이대성(국전 초대작가) 선생 등과 함께 탁본을 실시한 결과 글씨가 남아 있는 부분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판독이 가능한 탁 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탁본을 토대로 판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 ‘代王’으로 판독한 부분은 탁본 결과 ‘代主’로 확인되었고, 그 밖에도 여러 행의 글씨 를 확인할 수 있었다.


(

)

△ 上

升(?)鄭 朴 泰 夜(?)△ 失(?)△ △

代 主

金(?) 글 ■

마 멸

<

2> 비석에 새겨진 글씨

글씨가 남아 있는 부분은 사람들의 명단으로 보이는데, 큰 글씨로 쓰여진 ‘△上’과 ‘代主’는 직책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고 그 아래의 작은 글씨 부분은 그 직책을 맡은 사람들의 人名으로 생각된다. 큰 글씨의 경우 ‘△上’은 글자의 폭과 길 이 각기 8cm 정도이며, ‘代主’는 글자의 폭과 길이가 10cm 정도이다. 한편 人名 부 분은 글자의 폭과 길이가 5cm 정도씩이다. ‘△上’의 경우 아래에 세 사람의 인명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朴, 金, 升(?) 등 의 성씨는 확인되고 있지만 그 아래의 이름 부분은 정확하게 판독되지 않고 있다. ‘代主’의 경우에도 세 사람의 인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왼쪽에서만 글씨 가 확인되고 나머지 부분은 마멸되어 글씨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확인되는 부분의 경우에도 성에 해당하는 金(?)만 볼 수 있고 이름 부분은 마멸되어 판독되지 않고 있다. ‘△上’과 ‘代主’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직책을 나타내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기존 의 역사 기록은 물론 금석문이나 고문서 등에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 上’의 경우에는 윗 글자가 판독되지 않아서 그 성격을 알기 어렵다. 다만 통일신 라 시대에 만들어진 中初寺 幢竿(827년 완성)의 제작 참여한 인물의 직책 중에 徒 上, 作上이 보이고 있고, 최근에 공개된 고려시대 불국사 석탑의 중수(1038년)에 참 여한 인물의 직책에 絃上이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와 비슷한 성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徒上과 作上은 당간을 제작하는 데 참여한 일꾼과 장인의 책임자로 생각 되고, 絃上 역시 석탑의 중수에 관여한 기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로 볼 때 ‘△上’ 역시 이 비석을 만드는 일과 관련된 어떠한 공사에 참여한 일꾼 혹 은 장인 중의 책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代主’라는 용어는 고문서 등에서는 노비가 주인을 대신할 때에 ‘주인[主]을 대신 한다[代]’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문맥이나 문장 형식 등으로 볼 때 이 비석의 내용을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代’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 다. ‘代’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문서인 浄兜寺形止記 중에 보이는 ‘寺代’ ‘文 達代’ 등의 용례가 주목된다. 이들은 ‘사찰의 代’ 혹은 ‘文達이라는 사람의 代’라는 의 미로서 사찰이나 특정 개인이 소유한 땅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代도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의 代는 땅 중에서도 농사를 짓는 농지인 전답(田畓)이 아닌 집터 혹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비어 있는 토지 등의 의미로 이 해된다. ‘垈’의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에 기록된 ‘代主’는 땅 [터]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아마도 이 비석과 관련된 어떠한 공사에 필 요한 땅[터]을 제공한 사람들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비석이 건립된 시기는 현재 판독한 내용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비석 의 형태 및 쓰여진 글씨의 서체 등으로 볼 때 조선시대 중기 이전에 건립된 것이 아 닌가 추정된다. 탁본에 참여한 서예가인 이대성 선생은 하나의 비문에 크기가 서로 다른 글씨를 적는 것은 조선 중기 이전의 비석에 보이는 현상이라고 하였고, 특히 ‘代主’의 代의 서체는 상당히 古式의 글자라고 평가하였다. 한편 이 비석에 등장하는 인명들의 성씨는 金, 朴, 鄭, 升(?) 등이 확인되고 있는 데, 이중 이 비석이 위치한 지역인 조선전기의 茂長県의 성씨로 확인되는 것은 金과 朴 뿐이다. 茂松과 長沙의 土姓으로 金이 있고, 長沙의 來姓으로 朴이 보이고 있다. 다만 鄭과 升(?)은 茂長의 성씨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웃한 고창에서도 金과 朴은 확인되지만 鄭과 升(?)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웃한 興徳県의 성씨 중 에 土姓으로 鄭이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비석에 보이는 金, 朴, 鄭 등은 이들


및 고창, 흥덕 등의 성씨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升(?)에 해당하는 무장 및 주변 지역의 성씨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비석은 본래 사신원과 관련되는 비석일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판독된 내용만으 로는 사신원과의 관련성을 확인하기 힘들다. 향후 더 면밀한 검토를 통하여 그 성격 을 추정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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