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고 있는 마을 상금리 원식
1. 상금리 상금마을 1)
위치와 유래
고창읍에서 남쪽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약 16km쯤 가다보면 대산면 면소재지 에 당도하게 된다. 면소재지 대성농협 앞 사거리에서 이정표를 보고 남동방향으로 500m 정도 가면 영광군 대마면과 장성․광주로 가는 816번 지방도와 상금리 고인돌 유적과 고산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동쪽으로 2km쯤 더 가면 상금 (上金)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대산면 15개 법정리 중 하나인 상금리에 속하는데, 동쪽은 장성군 삼계 면, 남쪽은 영광군 대마면, 북쪽은 성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주변에 고 인돌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 을 것으로 판단되나 확인할 길은 없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무장군 원송면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에 따라 상금, 중금, 석현 등을 병합하여 그 중심마을 이름을 따서 상금이라 하고 성 송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87년 1월 15일 행정구역 일부 개편에 따라 성송면에서 대산면으로 편입 되면서 상금리는 상금, 중금, 차동, 석현의 네 개 분리를 두게 되었다. 중금마을에는 안터골(남산)이라는 자연부락이 포함되어 있다. 마을이름을 상금(上金)이라고 한 까닭은 마을 앞을 흐르는 내[川]에서 쇠[金]가 많이 난다고 하여 쇠내[金川]라고 하였는데 마을이 금천(金川) 위에 있다 하여 상금 (上金)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김해김씨는 조선 영조 때 무장면 덕림리에 살던 김명오(金命 五)가 노모를 모시고 이 마을에 옮겨와 9대째 살고 있다고 하며 지금은 고흥유씨(高 興柳氏), 무송유씨(茂松庾氏), 청주한씨(淸州韓氏), 경주김씨(慶州金氏) 등 여러 성 씨가 함께 살고 있다. 옛날에 이 마을에 얼마만큼 많은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지만
의하면 여기에서 장성군 삼계면과 연결되는 가리재(표고225m)는, 도로교통 이 발달하기 전 법성포와 장성을 이어주는 주요한 육상교통로였다고 한다. 이곳으로 전라․경상 등지로 영광굴비를 팔러다니는 보부상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이 오갔고 상 금마을에는 주막거리가 있었으며 당신들이 어렸을 적에는 집집마다 굴비를 말리는 덕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옛길을 따라 가리재를 오르다 보면 길옆 천변에는 그 옛날 주막 터로 추정 되는 집터에 대나무와 잡초만이 무성하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1960년대 새마을사업이 한창이던 시절만 하여도 이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주업으로 살았는데 근래에는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2000년 초까지만 하여 도 40명이 넘던 인구가 지금은 23가구에 30명(남13, 여17)으로 줄어들었다고 한 다.
<
1> 상금마을 전경
<사진 2> 가리재
<
2)
3> 주막 터
자연환경 표고 526.7m인 고산(高山)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구릉 능선 남사면
자락을 따라 마을 앞은 낮은 구릉들이 이어지고 이 구릉들 사이에는 그리 넓지 않은 곡간평야가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진산인 고산을 배산(背山)으로 한 조용하고 아담한 마을로 선사시대 유물인 고인돌이 많다. 마을 앞에는 ‘망전들’이라 불리는 들녘이 있는데 들녘이 비좁아 상금리에 속하 는 토지는 논 200여 두락과 밭 100여 두락뿐이므로 대마면 성산리에 있는 농토를 구입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사진 4> 상금리 권영진 이장
<
3)
유물과 유적
(1)
[支石墓] 유적
5> 상금마을 정홍묵 님
상금리 일원에는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상금리 입구에서부 터 장성군과 경계인 가리재 정상까지, 연장 1.65km의 거리에 약 184기의 고인돌과 고인돌 상석으로 판단되는 석재들이 확인되었다. 이는 2001년 고창군과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고창 상금리 지석묘 지표 조사보고서」에 나와 있다. 1990년도에 학계에서 조사한 내용을 보면 고창군에는 205개소에 달하는 고인돌 군집(群集)이 있으며 각종 형식의 고인돌 1665기가 산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고창군은 우리나라에서 단위면적당 고인돌이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에 속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창읍 죽림리와 도산리, 아산면 상갑리와 봉덕리 일대의 447기의 고인돌군 다음으로는 이곳 상금리 고인돌 군을 꼽을 수 있다. 고인돌은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 유럽에서는 돌멘(Dolmen)이라고 불린다. 고인돌과 지석 묘는 같은 의미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지석묘라는 용어는 그 한자의 뜻에서 추 론되는 바와 같이 고임돌이 있는 무덤이라는 뜻이다. 이곳 상금리 고인돌은 대체적으로 산사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대부분 하부가 매 몰되어 있는 상태이며 지표관찰을 통해 본 고인돌의 하부구조는 기반식(바둑판형) 고인돌이 주류를 이루며 지석(支石)의 형태는 괴석형(塊石形, 돌멩이) 지석과 주형 (柱形, 기둥모양) 지석이 같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 표석, 혹은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상금리 고인돌군은 좁은 지역에 많은 수의 고인돌이 밀집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확인되는 기반식, 탁자식, 개석식, 지상석곽식, 위석식, 기반식과 지상 석곽식의 결합형식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고인돌 형식의 변화양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이곳 고인돌의 분포양상을 살펴볼 때 고창군 대산면 과 장성군 삼계면을 이어주는 가리재 도로변을 따라 가리재 정상까지 분포하고 있으 며 삼계면에서도 상당수의 고인돌이 확인되고 있어서 청동기시대의 문화전파 과정이 나 당시의 교통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
6> 고인돌1
<사진 7> 고인돌2
<
8> 선사시대 움집 모형
<사진 9> 고인돌 상석 채석 흔적
(2)
(高山)과 고산오봉(五峯)
대산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500m 지점, 대마면과 상금리로 가는 갈림길에서 동쪽으로 1km쯤 가다보면 굴다리가 나오는데, 이 굴다리를 지나면 석현마을 입구에 「고산유적지공원 등산안내도」가 있다. 이 안내도를 따라 표고 526.7m 의 고산에 오르면 고창군과 장성군 영광군의 인근 산하는 물론 날씨가 좋은 날은 광주 무등산, 담양 추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산은 북쪽에 있는 구황산의 기맥을 따라 남으로 가리재를 지나 고성산으로 이어지며 성송 면 암치리와 무송리, 산수리 대산면 상금리와 장성군 삼계면과 경계를 이루는데, 조 망이 아주 좋다. 또한 기암괴석과 울창한 송림이 어우러져 있으며 용추굴, 각시봉, 깃대봉, 용두암, 매바위, 거북바위, 치마바위, 촛대봉 등이 있는 고창의 진산이다. 이 산은 다섯 개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다.
1봉인 각시봉은 표고 278.3m의 봉우리로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흡사하 다 하여 와우형 봉우리라 불리기도 한다. 제2봉인 깃대봉(309.8m) 위에는 용의 머리처럼 생긴 용두암(394m)이라는 바위 가 있는데 용두암 위에는 용의 알처럼 생긴 둥그스름한 바위가 놓여 있다. 용두암 주변에는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추굴도 있다. 제3봉인 띠꾸리봉은 나무꾼이 지게에 나무를 지고 다닐 때 매는 끈에서 유래된 이 름으로 남쪽에는 세 겹으로 된 치마바위가 있고 정상에는 매의 모양을 하고 있는 매 바위가 있다. 주위에는 고산성에서 식수로 사용했던 용정(龍井)이라는 샘물이 있었 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구전과 문헌으로만 남아 있다. 제4봉인 촛대봉은 촛대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촛대봉이라고 부르는데 옛적에 상금리 주민들이 나무를 하고 숯을 굽던 구덩이가 있는데 이곳에서 불을 피우면 건 너편 수련산에서 연기가 났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촛대봉에서 서쪽으로 성송면 산수리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4부능선 계곡 주위에 300여 평 남짓한 녹차나무 군 락지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 산에 있었던 고산성(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추정) 축 조 당시에 병사들이 사용하기 위해 심었던 작설차나무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 된 야생 차밭이라고 한다. 제5봉인 고산 정상 봉우리(526.7m)는 고창군 성송면과 대산면, 장성군 삼계면을 경계로 하고 있는 고산의 정상으로, 고창군과 장성군, 영광군의 인근 산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고창군의 전망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시작하여 흐르는 계곡물은 대 산천과 와탄천의 발원지로 영광군 덕오리에서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간다. 이런 연유 로 헤어져 있거나 그리운 사람을 만나보고 싶을 때는 이곳 정상에서 만남을 기원하 면 만날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매년 1 월1일, 고산 정상에서 새해 소망을 담은 해맞이 기원제를 올리고 있다.
<
10> 고산유적지공원 등산안내도
<
(3)
11> 증언하는 태봉산악회장 강형렬 님
(高山城址)
우리나라에서 성곽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고조선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 기조선전(史記朝鮮傳)』에 평양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한서조선전(漢書朝 鮮)』에도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BC 2세기 무렵에는 상당히 발달 된 성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뒤 삼한시대 이후에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군(郡)과 현 (縣)의 치소(治所)에 기존의 성곽을 보수하거나 읍성을 새롭게 축성하는데 이 성은 군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성은 가장 효과적인 방어수단으로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것은 아니었고 원 시적 형태의 목책(木柵)이었는데 더 견고하고 항구적인 성곽을 만들기 위하여 토성 과 석성, 전축성(塼築城)으로 발전되어 왔다. 또 적군의 접근을 방해하기 위하여 성 아래로 해자(垓字)가 만들어졌고, 성의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치성(雉城)을 만들었다. 그리고 성 위에는 거기에 있는 군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여장(女墻)을 쌓기도 했다. 이런 성곽들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 군(郡)과 현(縣)의 치소(治所)에 있는 읍 성, 그리고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산성이 있었다. 산성은 산봉우리를 둘러쌓은 퇴뫼 형과 산과 산을 이어서 쌓은 포곡형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에는 남북한을 통틀어 3 천여 개소에 달하는 성곽이 있었다고 하는데, 남한에만 1,800여 개의 성지가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그러나 수많은 전란과 중소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부 분의 성곽은 무너지거나 멸실되어 버렸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 정도다. 고산성은 성송면 상금리와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 경계인 고산에 있다. 성의 길이
약 5,000m 정도이고 높이는 5m인데 지형에 따라 다르며 자연을 이용한 토석 혼축성이다. 성의 양식은 포곡형이고 석축의 공법은 내탁법(內托法 )을 써서 겉은 석축으로 쌓고 안은 흙과 잡석을 다져서 쌓았다. 외면은 자연석을 수직 혹은 물림쌓 기로 아랫돌에 비해 윗돌을 5~6㎝씩 안으로 물려쌓은 방식을 썼다. 성문은 남문과 북문의 형태가 남아 있으나 동문과 서문은 찾아볼 수 없다. 문헌에 는 산성의 둘레가 8,100척(2,400m)이고 내유삼천(內有三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에 따르면 성 안에는 용지(龍池)와 서봉사(瑞峯寺), 수고암(水庫庵) 등이 있었 다고 한다. 현재 산성의 형태는 600m 정도가 남아 있는데, 거의 도괴된 상태이다. 『신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 등에 의하면 고려 이전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고창에는 고산성 외에도 고창읍성과 무장읍성, 흥덕읍성, 서산산성, 성남리 산성, 장사성지, 예지리성지, 삼인리성지, 왕촌리성지, 무송고현성지, 성내리토성 등 12개 소의 성지가 있다.
<
12> 고산성
(4) 법우선사(法雨禪寺) 상금리 북쪽 고산 산자락에 위치한 이 사찰은 한국불교 법륜종에 소속된 사찰로 2001년 3월, 당시 주지스님이셨든 석호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40 여 년 전에 석호스님이 중국 남해 보타낙가산에 들렀을 때 관음보살을 모신 법우선 사를 다녀왔다고 한다. 그 뒤 계룡산에서 산신제를 지내던 어느 날,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 황금을 쥐어주면서 하는 말이 “너에게 황금을 준다. 이 보물은 천하에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중국에 있고 하나는 백관(석호스님의 호)이 보관하라”하면서 사 라졌다고 한다. 선몽에서 깨어난 스님은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수년이 지난 1998년에 풍수에 밝은 사람과 함께 고산에서 법당 터를 찾기 위하여 수차례 산신제
올렸는데 부처님께서 선몽하여 법당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 유로 사찰 이름을 물질보다 위에 있는 정신세계를 의미하는 ‘법우선사’라 하였다.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삼고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매화당, 관세음보살석불 상, 법종각 등을 두었다.
<
13> 법우선사
<사진 14> 법우선사 표석
4)
전설과 풍속
(1) 당산제(堂山祭) 당산(堂山)은 신역(神域)에 마을의 수호신을 형상화한 것을 두고 여기에 제사를 올려 부락의 재앙을 물리치고 풍년과 복을 비는 동제신앙(洞祭信仰)의 유적이다. 또 한 당산은 이정표와 경계표시 몫까지 갖고 있었으며 성역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마 한시대에도 당산이 있어 죄지은 자가 이곳에 들어가면 잡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선사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청동제기에 당산과 솟대가 그려져 있는 것이 이
사실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니까 당산은 자그마치 2천 5백 년 이상의 전 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산은 일반적으로 당산나무[堂山樹], 당산석(堂山石),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신주를 세워두는 누석단(屢石壇)과 당집[堂宇]으로 이루어지나 고창에는 당산 나무와 당산석간(堂山石竿)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상금리당산은 마을 입구에 수령이 500년은 넘음직한 느티나무가 있고 수십 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나무 밑 기단부와 주변에 널려 있다. 예전에는 마을사람들이 농한기의 이완된 생활을 걷어젖히고 이제 입춘(立春)이 머 지않았으니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한다는 결심의 뜻으로, 또 한편으로는 마을의 질병 과 재앙이 없으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의병으로 전사한 남정네의 영혼을 위로하고 자손을 점지해달라는 염원까지도 곁들여 제를 올렸고 줄다리기 후 당산에 줄을 감아 올려 그날의 축제와 기원을 일 년 내내 기억하였다고 한다. 당산나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신비스런 샘(泉)이 있다. 마을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이 샘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사철 고여 있었다. 또한 옛날부터 부스럼이 심한 환자가 이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하였는 데, 어떤 이가 한 달여 동안 이 물을 마시고 부스럼이 완치되었다고 한다. 이런 소문 이 퍼지자 한 때는 피부병을 고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이 물을 먹었다고 한다. 얼마 전 이 마을에 상수도가 보급되자 마을에서는 샘가를 화강석으로 다듬어 정비하 고 지붕을 씌워 소중하게 보존하고 있으며 몇몇 집은 수돗물 대신에 아직도 이 샘물 을 먹는다고 한다.
<
15> 당산나무
<
16> 당산나무 기단 부근 지석묘
<사진 17> 상금리 우물
5)
전통과 생활환경 마을 앞을 지나는 가리재가 법성포와 장성을 이어주는 주요한 육상교통
로로서 전라․경상 등지로 영광굴비를 팔러다니는 보부상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이 왕 래하여 상금마을에 주막거리가 형성되었고 집집마다 굴비를 말리는 덕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산 제4봉인 촛대바위 부근에 옛날 상금리 주민들이 나무를 하고 숯을 굽던 구덩이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이 마을 사람들이 농사와 상업으로 풍 족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 앞 망전들에 논 200여 두 락과 밭 100여 두락 그리고 대마면 성산리에 있는 농토에서 대부분 농사를 짓고 있 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정월대보름에는 당산제, 칠석날에는 음식을 준비하여 농악 을 치고 춤과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는데 근래에 와서는 농악을 하시던 분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젊은 사람들도 도시로 떠나면서 그런 풍습들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2년 전 마을총회에서 당산제와 마을의 전통행사를 부활하기로
대보름날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마을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농한기에는 단체관 광을 가는 등 옛날 어르신들이 해오던 마을풍습을 되살리고 있다고 한다. 마을총회는 연말이나 연초에 한 번 하고 주요안건이 있을 때는 임시총회를 개최하 며 대부분 마이크방송으로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마을조직은 인구가 적어 상금리와 중금리, 석현리를 합하여 결성되어 있는데 노인 회 30명(회장 진길환), 부녀회 20명(회장 서경심), 청년회에는 출향인사를 포함하여 22명(회장 조성순)이 조직되어 있다.
2. 1)
중금(中金)마을 위치와 유래
상금마을에서 남서쪽으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중금마을은 94년, 96년, 97년 세 차례나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된 마을이다. 고산(高山)을 등지고 앞쪽은 금천 (金川)이 흐르고 있는데 쇠내[金川]의 중간 지점에 있다 하여 중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 광해군 초기인 1610년경에 한양조씨(漢陽趙氏) 조진방(趙鎭邦)이라는 사람 이 처음으로 마을 터를 이루고 살았는데 한양조씨 후손들이 번창하여 영광군 대마면 등에 터를 옮겨 살고 대마면 평금에 살던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옮겨와 살면서 두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정씨, 진씨, 차씨, 한씨 등 여러 성씨 가 함께 살고 있다. 이 마을도 상금리처럼 조선시대에는 무장군 원송면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창군 성송면에 편입되었고 그 후 1987년 1월 15일 행정구 역 일부 개편에 따라 대산면으로 편입되었다. 옛날에 이 마을에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 러나 이 마을도 상금리와 마찬가지로 마을 앞 도로가 법성포와 장성을 이어주는 주 요한 육상교통로로서 영광굴비를 팔러다니던 보부상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이 왕래했 다고 하니 그 시대에는 무척 살기 좋았던 마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은 24가 구에 77명(남30, 여47)이 농사를 생업으로 살고 있다. 중금리에서 상금리쪽으로 안터골[南山]이라는 자연부락이 있는데, 행정구역상 중 금리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은 지금부터 400여 년 전에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익수 (金益壽)라는 사람이 세장(世庄)마을에서 중금리 위 안쪽에 마을 터를 만들고 안터 골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옥녀금차낙지(玉女金釵落地) 명당 터가 있다는 차동(釵洞)
옮겨 마을 터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 안터골에는 그의 후손과 김해김씨 (金海金氏) 등이 거주하며 7가구에 13명(남7명, 여6명)이 살고 있다.
<
18> 중금리 전경
<사진 19> 안터골 전경
2)
자연환경
고산(高山)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구릉 능선 남사면 자락을 따라 마을 위에는 상 금리와 안터골이 있다. 북쪽으로는 성송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영광군 대마 면 성산리의 망전들과 평금저수지가 한눈에 보인다. 주민들은 망전들 앞 잿등에 있는 논 500여 두락과 밭 50여 두락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
20> 중금리 김범길 이장
<사진 21> 중금리 김영진 님
3)
전통과 생활환경 김해김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새마을사업 때 지붕
개량으로 옛날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젊은이들은 직장을 찾아 도시로 떠나버려 노인 들만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수령이 500년은 넘음직한 당산나무가 있는데 옛날에는 정월보 름에는 음식을 장만하고 걸궁(농악)을 치며 풍년을 기원하고 질병과 재앙이 없으라 고 당산나무에 제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줄다리기를 하고 나면 당산에 줄을 감아올 려 그 날의 축제와 기원을 일 년 내내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풍속 마저도 사라져가고 있어 재작년부터 정월대보름날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마을 어르 신들을 모시고, 농한기에는 단체관광을 하는 등 옛날 어르신들이 해오던 마을풍습을 되살리고 있다고 한다. 당산나무 바로 옆에는 옛날부터 있었다는 마을 공동우물이 있는데 가뭄에도 마르 지 않는 이 우물을 지금도 식수와 생활용수로 쓰고 있다.
<
22> 중금리 당산나무
<사진 23> 중금리 공동우물
10여 년 전에 한옥으로 지어 상금리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마을총회는 연말이나 연초에 한 번 하고 주요안건이 있을 때는 임시총회를 개최하며 대체로 공지사항은 마이크방송으로 전달하고 있다. 마을조직은 인구가 적어 상금리와 합하여 결성되어 있다고 한다
<
3. 1)
24> 중금리 경로당
차동(釵洞)마을 위치와 유래 남서쪽으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차동마을은 대산면 상금리에 속하
는 행정분리로 고산(高山)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구릉 능선 남사면 자락을 따라 마 을 앞은 낮은 구릉들이 이어지고 이 구릉들 사이에는 그리 넓지 않은 망전들이 있으 며 동쪽으로는 중금리, 서쪽으로는 석현마을과 경계를 이룬다. 남으로는 대산면 소재 지에서 장성으로 가는 도로를 경계로 전라남도와 도계를 이룬다. 이 마을의 설기(設基)년대는 1600년경으로 추정되며 구전에 의하면 임진창의선무 원종공신(壬辰倡義宣武原從功臣)으로 록권(錄券)을 하사받은 예빈사(禮賓寺) 주부 (主簿) 경주김씨 김익수라는 사람이 중금리 안터골에 터를 잡은 뒤 옥녀금차낙지(玉 女金釵落地) 명당 터를 찾아 이 곳에 마을 터를 이루고 마을이름을 차동(釵洞)이라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마을도 상금리와 중금리처럼 조선시대에는 무장군 원송면 지역에 속해 있었으 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창군 성송면에 편입되었고 그 후 1987년 1월 15일 행정구역 일부 개편에 따라 대산면으로 편입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70여 명이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농토도 비좁고 돈벌이가 될만한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서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지금은 24가구에 55명(남25, 여30)만이 남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
25> 차동마을 전경
<사진 26> 차동마을 오정옥 이장
2)
자연환경 마을은 고산(高山)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구릉 능선 남사면 자락을 따라 마을
앞은 낮은 구릉들이 이어지고 이 구릉들 사이에는 망전들이 있다. 마을입구에는 선 사시대 유물인 고인돌과 4기가 잘 보존되어 있다. 마을 앞 망전들에 논 100여 두락과 밭 50여 두락이 있고 전라남도 대마면 평금마 을 앞 농토를 구입하여 평금저수지 물로 주로 논농사를 짓고 있다. 3) 마을의 유물과 유적 (1) 효열비각(孝烈碑閣) 마을입구 야산 자락에는 효열부 광주이씨기적비(孝烈婦 廣州李氏紀蹟碑)와 비각 (碑閣)이 있는데 이씨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심성이 착하기로 소문이 나 있 었는데 17세에 문민공 충환의 후예 사인(士人) 홍신의 아들인 경주 김광희(金光喜) 에게 시집왔다. 그 뒤 시부모 섬기기를 친부모와 같이 하고 남편 섬기기를 큰 손님
같이 대하였으며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농사일을 하는 등 부도를 지켰다. 시집온 지 몇 년이 지나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매 집상을 공손히 하고 남편이 지자(支子)로 서 분가하기 1년 전에 군에 징용되어 얼마 되지 않아 죽으니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남편을 따라 바로 자결하려 하였으나 남편의 신주와 괘를 누가 받들며 후사가 영 영 끊길까 봐 자결하지 못하고 25세의 나이로 억지로 슬픔을 참으면서 시어머니를 위로하고 봉양하는데 정성을 다하여 시어머니가 90세가 되도록 강녕하였다. 시어머 니가 말하기를 내가 모진 목숨을 이어간 것은 우리 며느리의 효행 덕분이라고 칭송 이 자자하였다. 시어머니가 노환으로 위독하자 먹는 것과 약 대접을 게을리하지 않 았고 돌아가신 후에도 상사를 갖추어 조카 용진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하였다. 단기 4310년(1977년) 정사(丁巳) 8월에 진양 정익환(晉陽 鄭益煥)이 짓고[撰] 전주 이학용(全州 李學庸)이 글을 써서 비를 세우고 달성 배성수(達成 裵聖洙)가 상 량문을 지어 비각을 세웠다. 2년 후인 기미년(己未年)에 풍산 홍석희(豊山 洪錫憙) 가 비각기(碑閣記)를 만들었다.
<
4)
27> 차동마을 효열비각
전통과 생활환경
경주김씨(慶州金氏)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이 마을에는 수령이 500년은 넘음직한 당산나무가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옛날에는 마을사람들이 이웃 마을과 마 찬가지로 정월대보름에는 음식을 장만하고 농악을 치며 당산나무 아래 모여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고 줄다리기 후 당산에 줄을 감아올려 그날의 축제와 기원을 일 년 내내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풍속마저도 사라져가고 있어 지금의 이장(오정옥)이 마을일을 맡으면서 대보름날에는 음식을 장만하여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농한기에는 단체관광
가는 등 옛날 어르신들이 해오던 마을풍습을 되살리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20여 명의 노인들이 노인회를 결성하여(회장 김전희) 경로효친사상 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데 특히 노인회장 부인(서영순)은 3년 전부터 노인들을 위한 김장김치를 마련하여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노인들에게 식 사를 대접하고 김치를 나누어 주고 있다고 칭송이 자자하다.
<
28> 차동마을 당산나무
<사진 29> 선행으로 칭찬이 자자한 서영순 님
마을 안에는 옛날부터 있었다는 마을공동 우물이 두 곳 있는데 위쪽의 샘은 ‘웃 덤샘’이라 부르고 아래쪽에 있는 샘은 ‘아랫돔샘’이라고 부른다. 상수도가 보급 된 지금도 웃덤샘물은 음용수로 사용하고 있으며 아랫돔 샘물은 소화전으로 사용하 고 있다. 마을회관은 몇 년 전에 현대식 건물로 지어 회관 겸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마을총회는 연말이나 연초에 한 번 하고 3개월에 한번씩 임시회의를 개최하며 전달 사항이 있을 때는 대부분 마이크방송으로 알리고 있다. 마을조직으로는 노인회 20명(회장 김전희)과 부녀회 25명(회장 이영숙)이 있고
마을에는 살고 있지 않으나 출향인사 10여 명이 청년회(회장 김형성)를 조직하여 마을에 애경사나 큰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협조하고 있다고 한다.
<
4. 1)
30> 차동마을 마을회관
석현(石峴)마을 위치와 유래
차동마을에서 서북쪽으로 걸어서 10여 분 정도 거리에 있는 석현마을은 대산면 상금리에 속하는 행정분리로 고산(高山)에서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구릉 능선을 따라 마을 앞에는 낮은 구릉들이 이어져 있다. 이 구릉들 사이에 자그마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데 동쪽으로는 차동마을, 서쪽으로는 신방마을, 남으로는 영광군 대마면 평 금마을, 그리고 북으로는 성송면 산수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1730년경인 조선 영조 때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마을 터를 이루었 고 성송면으로 넘어가는 마을 뒤쪽 고개에 큰 바위가 있어서 ‘석현(石峴)’이라 부 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도 상금리에 속하는 다른 마을과 같이 조선시대에는 무장군 원송면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창군 성송면에 편입되었고 그 후 1987년 1월 15일 행정구역 일부 개편에 따라 대산면으로 편입되었다. 전에는 이 마을이 10여 가구에 남녀 30여 명이 농사일을 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귀농자가 늘어나고 특히 다문화가정(3가구)이 생기면서 진주 강씨, 김해김씨, 전주 이씨 등이 함께 살면서 12가구에 40명(남13, 여27)이 논 200여 두락과 밭 200여 두락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
31> 석현마을 전경
<사진 32> 석현마을 이연수 이장
2)
자연환경 들어오는 길목은 산정마을 쪽에서 들어오는 남서방향 길목과 차동마을 쪽
에서 들어오는 동남방향의 길목이 있으며 차동마을 쪽 길목에는 「고산유적공원 등 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석현마을은 고산등산로 입구에 있는 마을로 대산애향회와 태봉산악회 회원들이 고 산 정상까지 등산로를 정비하고 군데군데 고산으로 오르는 안내표지판을 설치하였 다. 마을에서 고산을 향하여 1.2km쯤 오르면 석현마을과 성송면 암치재가 연결되는 데 암치재에서 마을까지 7.5km의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 3) 마을의 전설 석현마을에서 성송면 산수마을로 가는 언덕길가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서 있는데 이 바위가 서북쪽에 있는 대산면 중산리 미동마을과 목동마을, 목교마을에 비춰져 세워 있으면 그 마을 처녀들 중에 생피[상피, 同族相姦]가 난다고 하여 50여 년 전 까지만 하여도 그 마을사람들이 몰려와 바위를 눕히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바위가 눕혀 있으면 마을에 불길한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어서 십몇 년 전에 마을에서 그 바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4)
전통과 생활환경
진주강씨, 김해김씨, 전주이씨 등이 함께 살고 있는 이 마을에 옛날에는 마을사람 들이 돌을 세워[笠石] 만든 당산에 제를 올렸다고 한다. 정월대보름에 음식을 장만 하고 농악을 치며 당산나무 아래 모여 풍년을 기원하였는데, 마을사람들끼리
줄다
리기를 하고 나면 당산에 줄을 감아올려 그날의 축제와 기원을 일 년 내내 기억하였 다고 한다. 그러나 70년대 새마을사업 때 마을길을 넓히면서 당산을 없애버려 지금 은 그런 풍속마저도 사라져버렸다고 마을사람들은 무척 아쉬워한다. 마을총회는 연말이나 연초에 한 번 하고 안건이 있을 때는 임시총회를 개최하며 대부분 마이크방송으로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마을조직은 인구가 적어 상금리와 합하여 결성되어 있고 단체관광이나 마을잔치도 상금리와 함께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고창 상금리 지표 조사보고서』,고창군·원광대학교박물관 『무장향교지』, 무장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