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를 가기 위한 교두보 흥덕읍성 동학농민혁명 당시 흥덕현 관아는 흥덕리에 있었다. 흥덕리는 영산기맥의 방장산 소갈재에서 분기한 변산지맥은 흥덕면 흥덕리를 이루는 배풍산을 만 들고 흥덕리 배산 서남쪽 낮은 봉우리 작은 배풍산이 자리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나라가 어려울 때 우리의 선현들은 호국의
선봉에 서서 이 땅
을 지켜왔다. 호국의 영산 배풍산과 동부마을에 있는 들샘골은 흥덕리를 형 성한 지형이다. 흥덕리의 분리는 흥동, 흥남, 죽일, 죽이, 서일, 서이, 서 삼마을이 있고 자연부락으로는 흥동의 정동, 흥남의 동부리,
죽일의 솔아
물, 서일의 솔청, 서이의 대산모퉁이(죽현)서삼의 목화정이(목화정),서부리 가 있다. 흥동(興東)은 조선후기 밀양박씨가 설기한 마을로 백제 때 이후 흥덕현의 배풍산에 고을의 성이 있어 동쪽성문을 동문이라 하였다. 조선조 후기에 동 부로 부르다가 1945년 경부터 흥덕리의 동쪽마을이라하여 흥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흥남(興南)은 흥덕현의 배풍산에 고을의 성이 있어 성의 남쪽 마을 동부에서 흥동과 흥남으로 분리되어 흥남이라 부른다. 죽일과 죽이(죽현 竹峴)는 1550년대 여진진씨 진간(陳侃)이 들어와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대나무가 많아 “대삽모퉁이”로 부르다가 1960년대에 죽 현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죽일과 죽이 마을로 분리하였다. 서일과 서 이 및 서삼
(西一. 西二. 西三)은 1800년대에 담양국씨가 터를 잡아 정착
하면서 마을이 형성되면서 서부로 부르다가 인구가 늘어나 1960년대 서일과 서이로 분리하였다. 흥성동헌은 조선시대 고을수령이 정무를 보던 관청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등록되었으며 흥덕읍성 서문지가 있었던 지 역이다. 서삼은 조선조 순조 때 밀양박씨가 설기한 마을이다. 목화나무가 잘 자라 정자나무 같이 크다 하여 「목화정」으로 부르다가 흥덕리의 서쪽 에 있다하여 서부라 부르다 1950년경부터 분리되어 서삼이라 하였다. 1894년 3월 20일(양 4월 25일) 무장기포를 시작으로 무장의 부민들에게 군 량을 징수한 뒤 보국안민창의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고부로 향하였다. 고 부관아를 점령하고 향토현전투에서 감영군을 격파, 승리한 동학농민혁명군 은 홍계훈부대가 군산항으로 상륙하여 들어온다는 첨보를 접하자 정읍, 흥 덕에서 4월8일(음력) 10시경 고부군 신점 쪽에서 흥덕쪽으로 진격하여 민가 에서 점심을 제공받아 먹은 다음 군기고를 부수고 화약과 창검, 조총 등을 탈취한 후 오후 2시경 고창으로 향했다. 흥덕에서는 접주 차치구가 활동하 였던 곳으로 사회개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차치구는 고부봉기에 참여하
고 전주입성에 참가 하였다. 그러나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이 체포되자 고 향으로 돌아와 소성면 광조골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서 은신해 지냈다. 그 후 흥덕관아에 잡혀가 동학농민군과 함께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차경석(보 천교 창시자)은 평상시 부친이 옆구리에 칼을 차고 다닌 다는 모친의 말이 생각나 어두운 밤에 흥덕현 동학농민군처형장으로 찾아가 여러 구의 시체 중에서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는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한다. 차치구의 묘소는 정읍시 입암면에 있다. 그 후 1899년 영학당사건에도 이희삼을 비롯 한 흥덕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한 지역이었다.
배풍산 변산지맥의 배풍산(△109.2m)은 흥덕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하는 호국의 영산이다. 정유재란 때에는 야수 채홍국을 비롯한 의병들이 왜적과 싸워 승 리를 이끈 배풍현전투의 격전지였으며 민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때 방어진 지로써 현재는 안보교육장을 비롯하여 지역주민의 근린생활시설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배풍산은 선인등주형(선인이 배에 오르는 형국)으로 757년 상칠 현을 상질현으로 하고 치소를 배풍산주변으로 옮긴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배풍산에는 녹차가 자생하며 남쪽 능선에 흥덕사, 옛 현터 주변에는 흥덕중 학교가
자리한다. 『정통풍수 전을선생과 함께 도산비기의 호남팔대지 고
창 흥덕을 다녀와서』에 의하면, 유산록 고창 흥덕편을 보면 68대가 두 번 가는 호남의 대지(大地)가 흥덕에 숨어 있다고 한다. 흥덕으로 가니 호암 (壺岩)이 여기로다. 반등산(半嶝山) 일지맥(一枝脈)이 절절(節節)이 기복하 여 십리맥(十里脈)이 호위(護衛)하여 혈락평지(혈락平地)하였으니 굴중(窟 中)에 있는 혈(穴)을 어느 명안(明眼)이 알아 볼꼬"라고 하였다. 반등산은 현재 방장산을 말하며 방장산의 한 산자락이 혹은 솟았다가 혹은 내려앉으 며 십리를 오다가 평지에 혈이 맺혔다는 것이다. 유산록에는 또 "갑묘십절 (甲卯十節) 간십절(艮十節)에 감계(坎癸)로 성봉(星峯)놓고 쌍귀추성(雙鬼 樞星) 특립(特立)하여 재결태극(再結太極) 했구나. 선운(禪雲) 백운(白雲) 양산간(兩山間)에 호남대지(湖南大地) 숨었으니 좌우선인(左右仙人) 춤을 추고 옥호(玉壺)가 뛰는구나. 그릇 가서 재혈(裁穴)하면 대대(代代) 역신 (逆臣) 나리로다"고 했다. 유산록은 이어 "혈성(穴星)이 원후(圓厚)하여 천 재체(天載體)로 생겼으니 사대왕비(四代王妃) 칠대장상(七代將相) 부족 할 것 없겠구나. 산진수회(山盡水回)하였으니 명현재사(名賢才士) 간출(間出) 하고 시대연조(時代年兆) 헤아리니 육십팔대(六十八代) 두 번 가리"라고 했
다. 혈성이 원후하다는 것은 묘 자리로 흘러온 맥이 두텁다는 것이고 나머 지는 발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한 것이다. 방장산의 한 맥이 흘러 와 끊겼다가 다시 기복해 배풍산을 만들고 배풍산과 명당자리가 방장산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혈이다. 굳이 따지자면 옥녀면경 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옥녀가 거울을 대하고 있는 형국이다. 한편 배풍산에서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일어나자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의 격문을 보고 채홍국(蔡弘國) 고덕붕 등이 고경명의 진영이 있는 금산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고경명이 이미 순절하고 부대가 패하자 흩어진 병사를 모아 고향에 돌아와 채홍국의 세 아들과 종족 33명을 규합하고 동지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 92 의사와 360여 병사로 흥덕 남당에서 의병창 의의 혈맹을 맺었다. 채홍국은 의병장이, 고덕붕은 맹주장이, 조익령, 김영 년, 지익수, 채명달, 채경달, 채영달, 한계상이 참모관이 되어서 해안을 사 수했다. 또한 군량 400석을 모아 300석은 의주행조로 100석은 곽재우 진에 보내기도 했다. 적이 순천에 침략하자 급히 출군하여 추격하였다. 선조가 그 사실을 듣고 가상히 여겨 채홍국에게 중추부사를 재수하고 그 후 가선동 추로 승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돌리고 야수의병장 채 홍국 제봉맹주장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조익수, 한계상 참모 등 500여명 의 동지를 규합하여 흥덕배풍산 흥덕읍성에서 왜적을 맞아 2일간 치열한 전 투끝에 왜병 7명을 참살하고 부안군 상서면 상량치까지 격퇴하였으나 상량 치에 많은 왜적이 대기 잠복하고 있었다. 40여 일 간의 전투 끝에 수백의 적을 사살하고 의병 119명이 순국전사하였다. 그 때의 일기와 동맹록이 김 영년의 집안에 간직되어 있는데 모두 참모관 조공의 기록이다. 후인들이 그 곳을 일러 호벌치라고 한다. 고종 9년 채홍국 의병장에게 병조판서를 증직 하고 고덕붕 맹주장에게는 고종 30년 1893년 나라에서 승정원좌승지를 증직 하였다. 고부를 가기 위한 교두보, 흥덕현 읍성 흥덕리에는 조선시대의 관아건물인 흥성동헌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를 운영하였던 곳이며, 배풍산에는 흥덕읍성터가 있다. 고창군 흥덕면 산22-2 번지 일대에 위치한 흥덕읍성은 조선 전기에 축조된 성으로 추정된다. 1450년 (문종 즉위년)에 전라도 지역의 읍성 정비차원에서 실태를 조사한 결과 개축 대상으로 분류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흥덕현의 읍성은 석성으로 규모는 295보』라 하며 1477년(성종 8)완공하였다 한다.
배풍산 7부 능선을 따라 토루(土壘)가 둘러져있는데, 읍성의 평면 형태는 밀각 장방형이며, 성의 둘레는 약 950m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표기된 규모를 포백척(46.66㎝)으로 환산하면 826m이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영조척(30.8㎝)으로 환산하면 974m이다. 『조선보물고적자료』에 의한면 규모는 1,440m인데, 외벽의 기저부를 기준 으로 둘레를 측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상단부의 토루는 전체적으로 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지만, 남동쪽의 토루는 배수지(당시 정수장)가 생기 면서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토루의 폭은 약 7m 정도이다. 토루의 연결 상 태에서 끊어진 부분과 곡부를 이루는 지형을 고려하여 문지를 추정할 수 있 는데, 현재 교운리 서문밖 마을과 이어지는 서문지와 북문지가 관찰된다. 산의 정상부는 평탄한 대지가 동서 방향으로 길이 100m, 폭 30m 정도 길게 조성되어 있다 정상부 서쪽에 배풍정이 세워져 있고, 동쪽 평탄지에는 잔 디, 좌우측면에는
벚나무를 비롯한 수화목이 식재되어 운치를 더해준다.
성안에는 우물이 3개소 있었다고 하나 1개소는 근린공원을 조성하면서 없어 지고 현재는 1개소만 찾아 볼 수 있다. 들이 눈에 띈다.
읍성 내부 곳곳에서 기와 자기조각
배수지, 안보교육장, 체련시설, 휴게시설이 토루의 일부
분이 훼손한 채 조성되어 있으며, 정상부의 평탄 지역에도 배풍정과 기념비 등 근린공원이 조성되었다. 1450년대에 개축 대상으로 분류되어 1477년(성 종 8)에 완성되었고, 이후 임진왜란 후 치소가 성 밖으로 이주하였다. 조선 전기 읍성의 구조가 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라 한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흥덕읍성은 석성으로 주위가 3천 1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성안에는 3개소의 샘이 있었으나 축성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72년 흥덕현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지도에는 배풍현 정상에 성 황당이 있고 남쪽 하단부에
관아건물인 내아, 동헌과 동문과 서문이 있다.
흥덕읍성은 시대에 따라 변화된 기록을 볼 수 있다. 문종 9권 1451.8.21 영 인본 6책 423면에 의하면 의정부에서 전라도 각 고을의 성이 규격에 맞지 않게 쌓여져 있다고 아뢰다. 이때 흥덕현읍성은 그 주위가 1천 7백 47척이 고, 높이가 6척 8촌이며, 여장의 높이는 1척 8촌에 적대가 없고, 문 2개소 에도 옹성이 없으며, 궁가가 3백 30호이고 ,해자는 성터가 높고 험하여 파 기 힘들다 보고하였다. 또한 성종 85권 1477. 10. 29 영인본 9책 523면에는 흥덕의 읍성은 북면을 뒤로 물려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81척이고 높이 가 7척 7촌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호남읍지에는 배풍현에 석축으로 축성한 읍성이 있는데 주위가 3천 1척 높이가 9척이다. 축성년대는 알 수 없다 하
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읍성석축 주삼천일척 내유삼천(邑城石築 周三千一尺 內有 三泉),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성주위이백구십오보 (邑城周圍二百九十五步), 대동지 지에는 읍성 배풍치상 주삼척임진왜란후이치성외(邑城 陪風峙上 周三尺壬辰 倭亂後移治城外), 여지도서에는 고읍성 재현북 배풍치상 석축 주삼천일척 (古邑城 在縣北 培風峙上 石築 周三千一尺)이란 기록을 볼 수 있다. 조선보 물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토성지로써 타원상 이중으로 둘러 쌓여 있고 외벽 둘레는 약 800간(1,440m) 높이 10척, 조사당시 토축지가 남아 있는데 둘레 1,440m, 높이 4m이다. 흥성동헌 동헌은 고을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로써 흥덕면 흥덕리 428~3번지(동헌길 4)에 소재한 흥성동헌은 흥덕현의 객사로 알려져 있었으나 1983년 보수 할 때 상냥문이 발견되어 흥성동헌이라 하였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화약에 따라 집강소를 설치 운영하던 곳이다. 1976년 4월 3일 전 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었다. 흥성동헌은 일반적으로 정당과 동·서익실로 되어 있다. 정당은 국왕의 위 패를 안치한 곳이며 삭망시 대소관원들이 여기에 모여 대궐을 향하여 배례 를 하던 곳이었다. 동·서익실은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으로 이에 조선시대에는 각도의 주요한 읍성에는 동헌이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흥덕현의 동현으로 선조 30년 정유재란(1597)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영조 11년(1735) 현감김승연이 동헌과 함께 중건하였다. 이 동헌은 익실이 없는 특이한 유형의 것으로 그 구조와 수법이 매우 단소 소박하게 되어 있 다. 당시의 대문은 선운사로 이축되어 사천왕문으로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보수작업을 하기 전 까지 한때 고창보건소 흥덕보건지소로 사용하였다.
<흥성동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