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송면 괴치리의 손화중도소 손화중도소는 성송면 괴치리 276-1에 있었다고 전한다. 괴치리는 조선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정씨가 건지산 아래 서당골이라는 곳에서 터를 잡 고 살았다가 석발터로 옮겨 갔다가 다시 지금의 괴치리에 옮겨 마을을 이루 었다. 마을이 형성하기 이전 괴치(槐峙)마을은 회화나무가 우거진 산으로 재 가 많은 것을 본따 회화나무 괴(槐)자와 재 치(峙)자를 붙여 괴치라고 부르 게 되었다. 괴치리는 논과 들이 넓고, 산과 고개가 있는 지형이다. 괴치리는 괴치고개 밑에 위치한다 하여 명명되었다. 괴치리의 자연마을은 괴치, 사천, 새터, 양실, 주산 마을이 있다. 양실(良實)마을은 윗골과 아랫골이 있어서 처 음에는 양곡(兩谷)이라고 불러 오다가 한말에 무장현감이 이 고을을 지나다 가 지형을 살피고는 용이 엎드려 있는 형태와 같다고 하며 복용이라고 불러 오다가 양실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사천마을은 냇가의 모래사장에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사천이란 지명이 붙었다. 주산마을은 들 가운데에 산등성이가 바다에 떠있는 배와 같이 보인다고 하여 명명하였다. 괴치는 진주정씨가 터 를 잡고 마을을 형성한 후 전의이씨가 들어와 마을이 크게 번성하였다. 이곳 은 토지가 비옥하여 농업소득이 많은 부촌이다. 본래 무장군 성동면 괴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복룡과 덕절 및 청송 마을을 병 합하였다. 손화중은 1861년에 태어났다. 그는 1881년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 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하여 수도하였다. 수도를 마치고 1883년 고향 정읍으로 돌아와 동학을 포교하였다. 정읍군 내 농소리, 입압리, 신면 리, 음성리 등지를 돌아다니며 포교하다가, 인근 무장군 성동면 괴치리에 들 어가 김모씨의 집에 포교소(布敎所)를 설치하여 동학 포교를 본격화하였다. 손화중이 고창 괴치리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4세 때인 1883년이 었다. 그는 1894년까지 12년 간 괴치에서 지내면서 동학포교활동을 전개하 였다. 송화중은 괴치의 만석지기 부자인 최부자를 만나 도소를 마련하였다. 왜 손화중은 동학 포교의 근거지로 성송면 괴치리로 하였을까? 1892년 8월 선운사 도솔암 미륵비기 탈취 사건은 당시 조선왕조 내내 정감록(鄭鑑錄)의 유령에 휩쓸려, 무엇인가 또는 누군가가 이 세상을 뒤집어 보기를 갈망 하던 때에 터진 사건이다. 이는 가히 혁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손화중의 도소(道所)에는 동학의 도(道)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구름 처럼 몰려들었다. 그는 출생 가문도 좋았을 뿐더러 외모도 준수 한데다 일찍 이 지리산 청학동에서 동학의 도를 전수받은 후 고향인 정읍과 부안 등을
거처 무장의 사천․양실로 들어 왔다고 하였다. 사천과 양실의 중간에는 불무 골 즉, 솥을 만드는 주물공장과 보부상들을 위한 숙소 등이 있었다. 또한 사 천과 양실 모두에서는 손화중접주가 거처했다는 구거지 터를 확인 할 수 있 다. 그리고 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의 잿등에는 객주집 대장간 마방 필방 유 기소 등이 있어 이곳에 드나드는 보부상을 비롯한 장꾼들과 지역민들을 상 대로 포교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손화중의 괴치 도소는 성송면 괴치리 276-1에 있었고, 주물공장은 괴치리 528번지, 보부상들의 숙소는 괴치리 542와 543번지에 있었다. 손화중의 양실 구거지는 괴치리 559-1와 사천의 괴치리 17-4에 있었다. 객주집는 성송면 향산리 362-2, 대장간1는 향산리 367-1와 353-11에 있었다. 마방은 향산리 368-1, 필방은 향산리 365-1에 있었다. 향산리의 지명은 향산마을의 지명을 취하였고, 따라서 향산마을의 지명유래 와 같다. 향산리의 자연마을로는 새터, 선량, 성산, 용두, 월평, 청송, 향산 마을이 있다. 향산(香山)마을은 마을 뒷산이 구릉으로 되어 넓게 보인다 하 여 그 산을 박산(博山)으로 불렀는데 마을 이름도 산 이름과 같이 박산으로 불렀으며, 1945년 8.15 해방 후에 향산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인 근 주민들은 박산 또는 박동네라고 부르고 있다.(진윤식) 향산리의 잿등마을은 옛날 동서남북으로 연결되는 4거리로 이곳이 바로 청 송역(靑松驛) 자리이다. 청송역은 무장의 중요한 역이었다. 조선조 초기인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동지도 등에 자세히 나오는 역이며, 무장읍지에는 3등 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 초기부 터 지도에서 누락되었다. 이렇듯 손화중 접주는 역(驛)에서 한발 비켜서 있 으면서도 또한 보부상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인 괴치리와 향산리 일대에 활동 무대를 잡았 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