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군의 사전모의 장소로 추정되는 용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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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군의 사전모의 장소로 추정되는 용수마을 용수마을은 공음면소재지로부터 동남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동네 앞으로는 저수지가 있고 마을 뒤로는 정산(正山)과 옥녀봉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그 형국이 마치 용의 꼬리와 같다고 해서 용수리라 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해발 300m 미만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지금은 소 나무와 자작나무 숲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산마루 능성이에 오르면 영광군 대마면까지 보이는 질펀한 들녘이 조석으로 매우 아름답다. 이 마을은 지금 으로부터 약 350년 전인 1650년대 말쯤에 안동김씨(安東金氏)가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했다. 그 후 김해김씨(金海金氏)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 용은 물이 있어야 하는데 물이 없을 때에는 아주 빈곤하게 살다가 청천마을에 저 수지를 막고서부터 용수마을이 부유하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용수리 석정마을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샘이 하나 있는데 이 샘의 물이 한여름에도 시원하기 이를 데 없고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을 뿐 아 니라 다친 사람이 이 물을 마시면 아픔이 가시고 감쪽같이 낫는다고 하여 약수터로 소문이 나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석정(石井)이다. 하지만 마 을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 샘물도 수돗물의 보급으로 옛 정취를 찾아보 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마을사람들은 아직도 그 샘물의 물맛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한다. 석정마을 앞에는 수령이 300년이 된 팽나무가

있는데 둘레 3m, 높이 17m

로 촌중(村中) 소유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잎이 부분적으로 피면 비가 적게 오고 전부 피면 풍년이 든다고 한다. 또 이 나무에 쇠붙이를 대면 액 이 범한다 하여 보호하고 있다. 용수마을 뒷산에는 절터가 하나 있는데 지 금은 소실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다만 그 절터에서 나온 조그마한 사 리탑 하나가 고즈넉하게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사진 1> 석정마을 샘물 동학의 지도자들이 피난지(정감록)로 잘 알려진 용수마을에 집결하여 산 너머 구수마을에서 일차 봉기를 하기 위하여 사전모의를 하던 곳이 바로 이 곳 절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마을 앞 도로가 포장 이 되어 교통이 나은 편이나 그 옛날 동학혁명 당시에는 외딴 시골 마을로 외지에서 찾아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고창의 전봉준 장군 외에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의 세 거두가 선운사 도 솔암 마애석불의 비문을 탈취하기 위한 사전모의를 하던 곳도 이곳이 아니 었나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동학관련 문헌자료는 찾을 수 없고 다만 구전 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이 마을 김경회 이장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지 금도 공음면 신대리 일원에는 전봉준 장군과 일가인 천안전씨 후손들이 살 고 있다.

<사진 2> 아름드리 팽나무와 밭을 매는 할머니 마을에는 사리탑이 있다. 이 사리탑은 높이 1m 20 cm 정도의 아담한 탑으


로 아래 부분의 탑신이 손으로 들어갈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이 탑은 동학 란 후 폐쇄된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공음면장을 하던 사람 이 이 탑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고자 집으로 옮겨갔다가 집안에 자란(自亂)일 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떡시루를 빚어놓고 빌었 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뒤 다른 이가 또 한 차례 옮겨갔다가 또 한 번 어 려운 일을 당하고 다시 현 위치에 모셔놓았다고 한다. 용수마을 뒷쪽에 있는 정산은 서당(書堂)산이라고도 하며 산마루 귀퉁이에 왜정 말기 파놓은 굴이 두 개가 있다. 일제가 패망하기 전 미군의 가막도 상륙을 대비하여 이곳을 최후의 거점본부로 삼아 결사항전하려 하였다고 한 다.

<사진3> 김경회 이장과 사리탑 용수마을 뒷산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어서 동학을 주도하였던 분들 과 영광군 대마면에서 이곳에 래왕을 하였던 함평이씨 문중의 접주 이대극 (李大克)이라는 분이 이곳 절터에 수시로 들렀다고 한다. 이대극 접주에 관 한 기록은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육일정(六一亭) 공원 마루에 있는 이화 삼(李化三) 장군 추모비에 나와 있다. 이대극 장군은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그 이듬해인 1906 년(丙牛年) 봄 이화삼 선생을 부장(副將)으로 하여

영광군 대마면 마치산

(馬峙山)에서 기병하였다. 1907년 9월 오산(鰲山)에서 기병한 기삼연(奇三 衍)장군과 고창 문수산(文殊山)에서 합진(合陣), 무장, 고창, 법성포 전투 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고 1907년 10월 장성 유탕전(流湯戰)에서 일군 (日軍)을 대파하였다고 한다. 이후 무장전투, 고창석곡전투, 불갑산전투,


고산전투 등 수십 차례에 걸쳐 일군을 격파하였다. 무장 장자산전투와 백산 (白山)전투에서도 전과를 올렸으나 1909년 4월 3일 일본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용수마을 원로들은 한목소리로 공음면 용수마을 뒤 절터가 접장들의 모의 장소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용수마을 이장인 김경회 씨는 용수마을의 입지 조건과 위치를 설명하며 당시 이대극이란 인물이 용수마을로 찾아왔다고 하 는데 아마 동학과 관련하여 중책을 역임했던 인물로 추정된다고 구술하고 있다. 이대극은 구술자 김경회 씨의 백모님과 당숙지간이었다. 그는 서자 출신으 로 기골이 장대했다고 하는데, 손화중 포의 접주였다. 당시 접주들이 모여 서 회의하였다는 절터는 서당산에 있는 암자(菴子)로 현재 폐사되었으며 폐 사 후 남은 재목으로 공음면 면사무소 부속건물(숙직실)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사리탑과 절터만 남아 있다. 1894년 말 동학혁명군은 공주 우 금치 전투에서의 치명적인 패배로 경향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으며 동학혁명 에 가담한 수많은 농민군들이 붙잡혀 참수되었다. 그들의 일가친척 또한 무 사하지 못하였고, 갖은 수모와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 중 한 분이 김영래(金永來) 선생으로 호는 진범(眞範), 본관은 김해김 씨이다. 1857년 11월 11일 출생하여 동학군으로 가담하여 전봉준 장군의 무 장기포와 창의문 포고에서부터 행동을 같이하였다. 그 뒤 대소전투에 참가 하여 공을 세웠으나 1894년 말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한쪽 팔이 잘린 채로 장렬하게 전사하여 자손들이 등에 업고 와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기일은 12월 27일이고 묘소는 용수리 산 100번지 양지 바른 곳에 있다. 다른 한 분은 김정권(金正權) 선생으로 본관은 김해김씨이다. 1850년에 나 서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여러 전투에 참가하고 겨우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당시 정부와 일제세력의 동학군 색출을 피해 이름과 성을 바꾸고 각지로 돌 아다니며 피신하였다고 하니 그 신역이 얼마나 고단하였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정권 선생에게는 영관(永官)과 영순(永順), 두 자녀가 있었는데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살면서 어떠한 혁명단체에도 가담하지 말라”고 유 언을 남겼다고 한다. 용수마을의 인물로 기록할만한 분은 정휴삼(鄭休三) 선생으로, 호는 율정 (栗亭) 본관은 진주정씨이다. 선생은 주역(周易)을 통달하여 세상의 이치를 깨우쳤다고 하며 이 분의 대표적인 예언이 앞으로는 하늘에 거미줄을 칠 것


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이는 지상에 전깃줄이 생겨나서 마치 거미가 하늘에 줄을 친 것과 같음을 미리 내다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용수리 뒷산은 정산(正山) 또는 서당산(書堂山)이라고 하는데 동학을 모의 하였던 분들뿐 아니라 6·25 전란에도 정산에 피신하였던 인근 마을주민 300~400명이 모두 무사하였다고 한다. 청천마을은 저수지 바로 옆에 위치하 고 있고 1700년대 초 달성배씨(達城裵氏)가 터를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배씨 할아버지의 자(字)를 따서 신기(新基)라고 불렸으나 마을 앞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고 해서 청천(淸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인물로는 동학 당시 한의원을 경영하며 동학군을 도왔던 배환정 씨가 있다. 그는 영광에서 체포되어 전란이 가라앉은 다음 돈을 주고 방면되었다 고 한다. 배환정 씨는 “다시 피는 녹두꽃”에 동학혁명을 ‘다란(多亂)’ 으로 묘사하고 있다. 청천마을에는 배씨들 문중(門中) 재각(齋閣)인 청천사 (淸川詞)가 있다. 청천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에서 건너온 경주배씨 달성파(達城派) 문중이 터 를 잡고 살아온 지가 오래되었다. 달성배씨의 시조는 문양공으로 지금도 경 상북도 경주시에 다른 성씨의 시조와 함께 분묘되어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하게 된 이는 송간공(松澗公) 배세조(裵世祚) 어른이 시라고 한다. 송간공은 이씨 조선 효종(孝宗)조, 1600년대 후반에 나주에서 출생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숙종(肅宗) 조에 조정으로부터 교수(敎授) 직책을 하사받았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맞아 피비린내 나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몸소 체험(體驗)한 후 벼슬을 버리 고 낙향하여 청천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서 송간정사(松澗精舍)를 신 축하고 후학들을 위해 학규(學規) 12칙(則)을 만들어 학문을 지도하였다고 한다. 청천마을에는 지금도 배씨 문중 조상들의 얼과 업적을 기리는 청천사(淸川 詞)가 있다. 이곳에는 이조 말엽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를 지낸 모암 공(慕菴公) 배승득(裵承得)과 구한말 고종(高宗)조에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은암공(隱巖公) 배후근(裵厚根)의 행장 (行狀)이 있다.


<사진 4> 은암공 이조참판 공적비 배씨 문중 배상수(裵商洙) 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분들은 모두 학문과 덕

행이 출중하여 타의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조정의 세력다툼의 한가운데서 청천마을을 흐르는 시냇물처럼 부패하고 오염된 당시 조선사회 를 정화하고 계도하는 데 커다란 업적을 남기셨다고 한다. 배씨 문중에서 한일합방 이후에 활약하신 유학자(儒學者)로는 학노(學魯) 배성수(裵聖洙) 선생이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제(日帝)의 온갖 박해 (迫害)와 갖은 만행(蠻行)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강직한 정신력은 달성파 배씨 문중에 오랜 세 월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가풍(家風)과 훈육(訓育)의 결과와 연관이 있다. 석정마을에서 보천마을로 가는 길옆에 계동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 을은 달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달터’라고 불렸는데 1970년대 이전에 는 인근 동네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마을이었다. 계동마을은 구름 속에 든 마을, 즉 운중망월(雲中望月), 또는 어옹수조(漁翁水照)의 마을로 부안김씨 (扶安金氏)가 약 150년 전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동쪽으로는 선녀봉 과 술황골, 북쪽으로는 삿갓봉이 있고 뒷 뜰에는 가재들이 널려 있다. 서쪽 으로는 정산 마루에 봉홧대가 자리하고 있어 과거 전란 시에 척후연락을 하 였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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