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결정사안】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제3중대(지휘관 김용식)가 1951년 5월 10일 전북 고창군 무 장면 월림리에서 2km 떨어진 도곡리 시목동 옆 계곡과 봉암산 계곡에서, 공비 토벌의 임 무를 갖고 있던 마을 주민 89명을 집단 총살한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 【결정요지】
1.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0일 전북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에서 2㎞ 떨어진 도곡 리 시목동 옆 계곡과 봉암산 계곡에서 공비 토벌의 임무를 띄고 있던 전북경찰국 제18전 투대대 제3중대(지휘관 김용식)가 월림마을 주민 89명을 집단 총살하였으며 부상자 포함
6명이 현장에서 생존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2.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일 제59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불법적 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인 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3. 이 사건은 한국전쟁기에 인민군이 남한지역을 점령하여 특정한 지역 차원의 권력 담 당 주체가 뒤바뀌는 와중에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성씨 간의 갈등이 이념적 대립과 결합 하여 상호 보복 살해의 양상으로 발전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인민군 점령 이 후인 1950년 10월경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 용전마을에서 지방 좌익과 죽림마을 천씨들에 의해 김용식 일가 53명이 살해된 바 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제3중대 지휘관 김용식이 사적 원한을 갚기 위해 공권력을 이용하여 천씨 일가 등을 집단 살해하였다.
4. 가해자인 김용식은 사건 당시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제3중대장으로서 자기 고향 인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에서 천씨 등 89명을 살해한 죄로 구속 기소되어 1955년 12월 26 일 대구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아 그 판결이 확정된 바 있다. 그러므로 이 사 건은 당시 김용식에 대한 재판 판결문을 통해 가해이유, 희생자의 규모와 신원이 대략 밝 혀져 있다.
5. 이 처럼 이 사건은 52년 전에 사법부에 의해 확정 판결된 사건이고 김용식 개인에 대한 처벌은 되었으나 김용식에 의해 집단 살해된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지금까지 ‘빨갱 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는 등 명예가 회복되지 않았다고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또한, 사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721
제 2 부 진실규명 및 진실규명불능 결정 결과
건 현장에서 집단총살 계획을 보고받은 다음 재가한 대대장 차일혁과 사건을 집행한 경 찰관들에 대한 조사나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건의 배경과 원인, 경찰의 작전상황 과 사건경과 등에 대한 사건의 진상이 충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6.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적 차원에서 본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여 희생자의 영령 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한편, 사건과 관련된 양 측이 화 해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에 주안점을 두어 화해와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7. 이 사건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무장한 경찰부대가 공비 소탕, 부역자 처벌이라는 공적인 임무를 내세워 비무장ㆍ비교전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것으로 이는 김용식 이 사적 원한을 갚기 위해 공권력이 불법적으로 남용한 사례이다.
8. 또한, 김용식 및 소속 부대원들의 상급 지휘관인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대대장, 전북경찰국 등은 지휘계통을 통해 사건 발생 전․후 사건 내용을 보고 받은 바 있으나 사 건 발생 후 3일 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 측의 신고가 없었다면 사건은 영원히 은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주민의 신고에 의해 뒤늦게 김용식을 사법 처리하기는 했으나, 억울하게 희생된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잘못이 있다. 【전
문】
【사 건】다-3373 등 5건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신청인】천병순 등 14명 【결정일】2007. 11. 20. 【주 문】 위 사건에 대하여 이유 기재와 같이 진실이 규명되었음을 결정한다. 【이 유】
Ⅰ. 사건개요 1. 사건접수
722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신청인 천병순 등 14명은 진실화해위원회에 한국전쟁 시기에 전북 고창군 무장면 월림 리에서 발생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하여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신청건수 4건).
2. 진실규명 신청서 주요내용 신청인들의 신청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당시 전북경찰국 제18전투경찰대대 제3중대장을 맡고 있던 김용식이 고향인 고창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던 중 과거 인민군 점령시기 월림지역 부근에서 자 기 가족들이 입은 피해소식을 전해 듣고, 1951년 5월 10일경 자신의 소속부대 중대원을 동원하여 이 지역 주민 천이봉 등 100여 명을 새끼줄 등으로 포박하여 마을에서 2㎞ 정도 떨어진 도곡리 사건현장으로 끌고 가서 총살하였다. 신청인들은 김용식에 의해 살해된 주민들은 ‘빨갱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로 몰 려 억울하게 죽었다고 주장하면서 국가가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서 ‘빨 갱이’로 매도되어 왔던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본 사건의 접수 현황은 <표 1>과 같다. <표 1> 사건접수 현황 접수일자
사건번호
신청인
피해자
신청인과의 관계
2006. 4.14.
2997
황용섭
황창중(남, 당시 52세)
부
천병순
천이봉(남, 당시 59세) 천화순(여, 당시 16세) 서정자(여, 당시 36세)
친척
천영숙
천차봉(남, 당시 33세) 천신봉(남, 당시 22세) 천동태(남, 당시 4세)
부 숙부 제
천용만
김순여(여, 당시 33세) 천○○(여, 당시 3세)
모 제
천은수
천일봉(남, 당시 43세) 천중금(남, 당시 17세)
부 제
천병갑
천병문(남, 당시 22세)
제
조양례
천상봉(남, 당시 26세)
시부
천재영
천병인(남, 당시 43세) 한순예(남, 당시 38세)
부 모
2006. 5. 2.
3373
비 고
유족대표
이름 미정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723
제 2 부 진실규명 및 진실규명불능 결정 결과
접수일자
사건번호
신청인
피해자 천○○(여, 당시 2세) 천응섭(남, 당시 69세)
신청인과의 관계 제 증조부
천병거
천방욱(남, 당시 32세) 장성례(여, 당시 23세)
숙부 숙모
천병재
천재봉(남, 황정순(여, 천선희(여, 천병오(남,
천병직
천정욱(남, 당시 26세) 천진욱(남, 당시 17세)
천태영
2006.11.30.
2006.11.30.
9628
9695
당시 당시 당시 당시
51세) 48세) 21세) 16세)
부 모 제 제 부 숙부
천순자
천이봉(남, 송귀조(여, 천병조(남, 김순덕(여,
59세) 50세) 36세) 33세)
부 모 제 외사촌
조성기
최창식(남, 당시 59세) 손자근(여, 당시 47세) 최재현(남, 당시 18세)
외조부 외조모 외삼촌
당시 당시 당시 당시
비 고 이름 미정
Ⅱ. 조사의 근거와 규명과제 1. 조사의 근거 가해자인 김용식은 사건 당시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제3중대장으로서 자기 고향인 고창군 무장면 월림지역에서 천씨 등 89명을 살해한 죄로 구속 기소되어 1955년 12월 26 일 대구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그 판결이 확정된 바 있다. 김용식은 이후
15년으로 감형된 이후 만기 출소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당시 김용식에 대한 재판 판 결문을 통해 가해이유, 희생자의 규모와 신원이 대략 밝혀져 있다. 이처럼 이 사건은 52년 전에 사법부에 의해 확정 판결된 사건이긴 하나, 확정판결을 받 은 김용식이 아닌 희생자들이 진실규명을 요청했기 때문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 리 기본법」(이하 기본법) 제2조제2항의 재심 사유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확정판결의 효 력은 김용식 개인에게만 미칠 뿐 지휘․명령권자인 대대장, 직접 사살 행위를 한 부대원
724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에게 미치지 않는다. 판결문에서는 김용식 개인의 살해 행위에 초점을 두고 있고 공권력 남용에 의한 무고한 주민 집단 살해의 측면은 단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사건의 배경과 원인, 경찰의 작전상황과 사건경과, 사건은폐 여부, 책임자 조사 및 처벌 등 사건의 진상 이 충분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신청인들은 김용식에 의해 살해된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지금까지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는 등 명예가 회복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1월 23일 제25차 회의를 열고 본 사건을 검토․심 의하여 기본법 제2조제1항제3호를 적용,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조사개시를 의결하 였다. 특히 이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하고 있는 전북지역 군․경토벌사건 중에서 사 건의 인지도, 피해규모, 종합성, 조사의 완결성, 자료 입증의 가능성 등이 비교적 높은 편 에 속하므로 이를 고려하여 우선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더구나 본 사건은 한국전쟁 전 후에 이념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우리 사회의 특수한 환경에서 인민군과 지방 좌익 등 적 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희생과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희생이 인과적으로 얽혀 있 어, 사건 관련 당사자 양 측이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였던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적 차원에서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여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한편, 사건과 관련된 양 측의 화해를 위한 여 건 조성에 주안점을 두어 국민 화해와 통합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의 재발 방지를 위해 국가가 법적ㆍ제도적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하여 잘못된 과거사를 극복하고 인권국가를 수립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2. 쟁점과 규명과제 가. 당시 정치․시대적 상황과 군과 경찰의 작전상황 등에 대하여 포괄적인 배경조 사를 실시하여 본 사건의 원인과 성격에 대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다.
나. 희생자들의 신원을 확인하여 그들이 지방 공비에 협력하는 등 부역자였는지 여 부를 확인하고 이 사건 이전에 발생했던 ‘인민군 점령 시 지방 좌익과 천씨 일가에 의한 김씨 일가 피살사건’의 실재 여부에 대하여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다. 본 사건이 발생한 직후 경찰 혹은 국가기관에 의해 은폐 조작되었는지 여부에 대 해서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725
제 2 부 진실규명 및 진실규명불능 결정 결과
Ⅲ. 조사경과 1. 신청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인 14명에 대하여 신청이유, 피해상황, 희생자와의 관계, 사건 내용 등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신청인들의 사건경위에 대한 진술은 일부 엇갈리는 부분 도 있었으나 기본적인 내용은 일치하였다. 신청인들의 진술일, 진술 장소, 주요 진술내용은 <표 2>와 같다. <표 2> 신청인 조사 현황 연번 사건번호
신청인
진술일
진술장소
진 술 내 용
황용섭 2007. 2.12.
사건 당시 16세의 나이로 고창읍내에 거주했으 무 장 며 진술인의 부가 월림리에 있는 큰 집에 갔다 면사무소 가 살해되었음.
2
천병순 2007. 2.12.
무 장 당시 월림지역은 국군들이 수복한 상태라 못자 면사무소 리를 준비하는 등 평온한 상태였음.
3
천영숙 2007. 3. 6.
치 평 본인은 어려서 잘 몰랐지만 김씨 집안에서 보복 동사무소 을 한 것으로 알고 있음.
4
천용만 2007. 2.12.
무 장 마을 사람들이 경찰관들에게 비참하게 희생되었 면사무소 다고 전해들었음.
5
천은수 2007. 2.12.
무 장 사건 당시 2살이었으며 이 사건 때문에 아버지 면사무소 가 희생되었다고 함.
천병갑 2007. 2.12.
무 장 사건 당시 10살이었는데 동네에서 떨어진 현장 면사무소 에서 총소리가 많이 나는 것을 들은 적 있음.
7
조양례 2007. 2.12.
사건 당시 시아버지가 희생되었는데 본인은 시 무 장 집오지 않을 때라 사건과 관련해서는 모른다고 면사무소 함.
8
천재영 2007. 2.12.
무 장 사건 당시 12살이었는데 본인은 아버지가 집에 면사무소 서 나오지 말라고 해서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함.
9
천태영 2007. 2.12.
무 장 사건 당시 태어나지 않아서 사건에 대해 잘 모 면사무소 른다고 함
10
천병거 2007. 2.12.
사건 당시 4살이었으며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들 무 장 은 적 있으며 아버지가 산으로 도망갔다가 희생 면사무소 되었다고 나중에 전해들었음
1
6
2977
3373
726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연번 사건번호
신청인
진술일
진술장소
진 술 내 용
11
천병재 2007. 2.12.
부모형제들이 끌려간 장소에서 총소리가 많이 무 장 나는 것을 들었고 해리에 거주하는 고모부가 와 면사무소 서 시신을 매장하였다고 전해들었음.
12
천병직 2007. 2.20.
진실화해위 사건 당시 2살이었으므로 사건 진상에 대하여 원회 사무실 잘 모른다고 함. 사건 발생 시점이 본인이 태어나기 전이라 사건 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외조부 등 3명이 희생되 었다고 전해들었음.
13
9625
조성기 2007. 2.20.
고창군청
14
9628
천순자 2007. 4.10.
사건 당시 13살이었는데 부모형제를 잃고 그 충 무 장 격으로 정신병이 생겨 정상적인 삶을 못 살았으 면사무소 며 지금 죽림마을에서 혼자서 살고 있다고 함.
2. 가해자 김용식 조사 가. 신청인 14인이 주장하는 본 사건의 가해자이자 사건 당시 3중대장으로 현장을 지 휘하였던 김용식(87세, 영등포구 문래동 거주)이 현재 생존해 있어 4회에 걸쳐 조사를 실 시하였다. 김용식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김용식 약력 ▸ ▸ ▸ ▸ ▸ ▸ ▸ ▸ ▸ ▸ ▸ ▸
성 명 : 김용식(金龍植, / 1921년 7월 21일생,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거주) 본 적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 82번지 정읍공립농업학교 졸업 일제 지원병 훈련소 졸업 함흥 주둔 일본군 제43부대에서 근무, 1944년 12월경 육군 오장(伍長)으로 만기 제대 후 평양 제44부대에 재소집 근무 중 평양병사부사령부(平壤兵事部司令部)에 근무 1950년 3월 육군 보병학교 간부후보생 입교 1950년 8월 경북 울진지구 전투에서 부상하여 육군대위로 퇴역 1951년 4월 경찰경위로 특채(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제3중대장) 1951년 5월 10일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 사건 발생 1951년 5월 19일 ‘비상시경찰관특별징계령’에 의해 면직처분 1952년 7월 3일 전주지방법원 : 사형(살인 및 동 미수) 1952년 7월 5일 대구고등법원 : 사형(살인 및 동 미수)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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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부 진실규명 및 진실규명불능 결정 결과
▸ ▸ ▸ ▸
1955년 2월 22일 1955년 12월 26일 1955년 12월 28일 대구교도소 등에서
대법원 : 파기환송 대구고등법원 : 무기징역(확정판결) 피고인 상소포기 15년 수감 후 1970년 출소
나. 김용식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시 판결문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사건을 자신이 주 도적으로 지휘하였다고 인정했다. 그는 그 당시는 전쟁 상황이어서 국군 8사단 지휘하에 모든 작전을 수행하였고 중대의 기본화기로 소련제 소총, 칼빈소총, M-1소총, 수류탄, 중화기 1개 소대(박격포 보유) 등 을 소지하고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진술했다. 또한, 국군 제8사단장의 명령에 의해 자신의 소속부대원들과 이동하던 중 가족의 피해 상황을 알게 되자 월림지역 주민 95명을 집결시킨 직후 인근 지역에서 작전 중이던 대대 장(차일혁)에게 보고하고 대대장 지침에 의해 그들을 살해하였고, 이는 천씨 측이 자기 가족들을 몰살시킨 것에 대한 원한 때문에 복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집단희생 사 건의 원인은 천씨 일가가 제공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그 쪽에서 먼저 화해를 요청 하면 화해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지고 가겠다는 일념으로 조사를 받았고 재판 과정에서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사건 현장에서 주민 살해를 보고받고 명령한 대대장 차일혁과 사건을 집행한 경찰관들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형무소 수감 중에 대대장 차일혁이 면회를 왔었지만 서운한 감정 때문에 만나지를 않았다고 하였다.
3. 참고인 조사 이병선(당시 제18전투대대 부대대장) : 사건 전체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당시 중대 장인 김용식 혼자서 한 일이라 자신에게 책임은 없다고 주장하였고 구체적인 사건 은폐 여부, 지휘책임 관계 등에 대해서는 진술을 기피하였다. 또한, 당시 토벌 작전 중 경찰에 게 부역자들에 대한 처형권은 부여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황남수(당시 제18전투대대 감찰담당) : 이 사건이 국군 제8사단 및 전북경찰국에 보고 된 것은 알고 있지만 지휘책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였다. 윤재곤(당시 제18전투대대 중대원) :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중대원들도 많이 죽 었고 공비와 주민들이 구분이 되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본 사건에 728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대해서는 본인이 사건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내용을 잘 모른다고 증언하였다. 신점수(당시 월림리 거주, 김씨나 천씨 어느 쪽에도 이해관계가 없는 유일한 생존자)
: 인공 시절 죽림마을 천대욱이라는 사람이 월림리 새책(이장) 역할을 하면서 김씨 등 6 가구 90여 명을 살해하였고, 수복 후 김용식이 중대원을 데리고 와서 마을 주민들에게 여 론조사까지 하는 등 주도적으로 사건을 지휘하여 천씨 등 100여 명을 총살하였다고 진술 하였다.
4. 자료조사 김용식에 대한 사법처리는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불법처형 사 건 중에서 가해자가 처벌을 받은 매우 희귀한 사례였고, 재판 기록은 사건과 관련된 결정 적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자료로 판단되므로, 조사계획 단계부터 이에 대한 자료 확 보에 주안점을 두고 조사를 추진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건과 관련된 간접적인 정황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자료는 <표 3>과 같다. <표 3> 자료조사 현황 연번
자 료 명
내
용
발행자
발행연도
김 용 식 재판기록
검사 작성 진술조서, 현장조사, 참고인 조사기록, 공판 전주지검 조서 등 사건의 실체가 전부 기록된 문건.
1951
2
좌익사건 실록 8권
북한군 점령기간인 1950년 10월 초순경 고창군 무장 면 월림리 일대에서 발생한 ‘고창군 무장면무장리특 대검찰청 별자위대 살인사건’이 기록된 문건에서 자위대원들이 공안부 지주 등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정황 증거.
1972
3
한국전쟁사료 8집(전투상보)
국군 제8사단 전쟁사료 중 ‘국사봉지구토벌작전상 보’는 1950년 5월 4일부터 동년 5월 10일까지 전 육군본부 투상보로서 작전상황, 전투성과, 전투장비 등이 기록된 정황 증거.
1951
4
인사비밀 관계서류철
사건에 대한 ‘중요돌발사건 중간보고’를 대통령에 국무총리실 게 보고한 문건, 사건경과에 대한 정황 증거.
1951
5
한국전쟁시 점령정책연구
인민군 남한 점령지역 내의 공산당 조직체계, 운영방 국방군사 식 등 점령정책에 관한 정황 증거. 연구소
1995
6
빨치산토벌대장 제18전투대대장 차일혁 경감의 자서전으로 사건에 대 차일혁의 차일혁의수기 한 정황 증거. 자, 차길진
1
1990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729
제 2 부 진실규명 및 진실규명불능 결정 결과
연번
자 료 명
내
용
발행자
발행연도
7
아, 대한만국 경찰의 혼
사건 관련 부대이동 상황, 작전상황 등의 정황증거.
경찰청
2003
8
전라북도 경찰전사
사건 관련 부대이동 상황, 작전상황 등의 정황증거.
전북청
2002
9
요시인명부 등 보안자료
고창경찰서에서 1951~1953년까지 좌익간부(빨치산 고 창 포함)로 활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작성한 자료(사건 경찰서 관련 희생자 명단은 기재되어 있지 않음).
1952
5. 현장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2월 12일 신청인 천병순 등 2명과 함께 신청인의 주장, 공판 기록에 나타난 사실의 진위 여부 등을 분석, 평가, 검증하는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에서 주민 집결장소, 희생자 연행경로, 희생 장소 등을 사건발생 순서대로 조사 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하였다. 이 때 확인한 내용은 <지도 1>, <사진 1>, <사진 2>와 같다.
<지도 1> 김용식과 소속부대원들이 죽림마을에서 사건현장으로 이동한 경로
730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진 1> 희생자 중 남성들이 희생된
<사진 2> 희생자 중 여성들이 희생된
장소, 시목동 계곡
장소, 봉암산 계곡
Ⅳ. 조사결과 1. 사건배경 가. 한국전쟁 이전의 고창 월림지역의 상황(해방 이후~1950. 6. 25. 이전) 전북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 용전마을에는 김씨 일가 5가구가 살았고, 용전마을에서
700m 떨어진 죽림마을에는 천씨들이 대대로 집성촌을 형성하여 살아왔다. 두 마을 사이 에는 농지가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신청인․참고인 진술에 의하면, 두 마을 사이에는 다른 어느 마을처럼 논을 경작하면 서 물꼬싸움을 하는 등 사소한 감정대립이 늘 존재하기는 했으나, 죽림마을 천씨들이 용 전마을 앞 텃밭을 경작하는 것과 같은 상호교류가 있었으며 두 마을 사이에 농업 노동 고 용관계나 지주․소작농의 관계 등 신분 또는 계급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다.1) 그러나 해방 이후 지역사회에서 좌익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죽림마을 출신 천대욱 이 남로당 무장면 책임자를 맡으면서 죽림마을 천씨들 중 일부가 좌익 성향을 갖게 되었 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용전마을 김씨들은 집안사람들이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 등 관공서에 근무했다는 신청인․참고인의 증언과, 김용식이 일제시대에 일본군에 지원했고
1) 신청인 천병순, 진술조서 2쪽; 참고인 김희태, 진술조서 2쪽.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731
제 2 부 진실규명 및 진실규명불능 결정 결과
해방 후에는 경찰로 재직하면서 좌익 척결에 앞장선 경력들을 참고해 볼 때, 우익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2)
<사진 3> 용전마을 모습 / 1951.5.14. 촬영
<사진 4> 죽림마을 모습 / 1951.5.14. 촬영
<표 4> 사건 당시 월림리 두 일가의 현황 구 분 계
김 씨(용전마을)
천 씨(죽림마을)
호구수
인구수
호구수
인구수
5호
52명
33호
250명
비 고 총호수 : 86호 총인구 : 625명
* 총호수와 총인구는 김씨와 천씨 이외의 주민들도 포함한 수치임. <자료 출처> : 김용식의 재판기록
이러한 상황 하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전 용전마을 김씨들이, “천씨 마을에서 공산당을 조직한다.”라고 경찰에 신고하여 죽림마을의 천씨들이 경찰에 끌려가서 심한 육체적 고 문과 고통을 당한 일이 발생한 뒤, 두 마을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관계가 형성되었다.3)
나. 인민군 점령 이후 고창 월림지역의 상황과 김용식 일가의 피살(1950.7.22.~1950.10.) 한국전쟁 기간 중 남한지역을 점령한 인민군은 당 건설 및 인민위원회 건설 사업을 최 우선적으로 실시하였고, 점령지역의 도(道)를 제외한 각 군․면․리(동)에서는 인민위원 2) 참고인 김정순, 진술조서 2쪽. 3) 전북도의회 발행, 6.25 양민학살진상실태조사, 1994, 118쪽.
732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하였다. 인민군과 함께 진주한 민사담당 부대는 전쟁 이 전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지방 좌익들로 하여금 임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하였고, 마 을의 치안을 맡을 자위대를 조직하게 하였다. 곧이어 지방 좌익들은 반동 숙청이라는 명 목으로 지역내 우익인사들을 처형하거나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기도 하였다.4) 인민군이 점령한 고창지역에는 인민군 내무서장이 배치되어 지역의 치안을 관장하면 서 어느 정도 질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1950년 9월 하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하여 고창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인민군 내무서장이 철수하자 이 지역은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그 래서 주민들의 생사도 이념적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소의 인간관계와 사적인 원한관 계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적법 절차 없는 총살과 학살이 만연하였다. 그 일례로 1950년 10 월 11일에는 좌익인 특별자위대장 박진열이 자위대원 15명을 소집하여 무장면 월림리에 피신 중인 우익인사인 김동주의 유가족 8명을 살해하는 사건(고창군 무장면 무장리 특별 자위대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고창군 무장면 원촌리 빨치산대장 사건’ 등과 같이 당시에는 좌익들이 자위대원들을 수시로 소집하여 반동 숙청이라는 명목으로 철창, 죽창 등을 사용하여 우익인사 및 마을 주민을 다수 살해한 일이 자주 있었다.5) 그리고 이러한 무정부 상태는 고창지역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형식적으로 수복되던 1951년 2월 이 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전북 일대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후퇴하던 인민군이 총탄이 없어서 우익인사들을 곡괭이와 삽으로 찔러 죽이는 일도 있었는데 정읍에서는 유치장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 다. 무기를 가지지 않았던 민중들의 보복방법은 주로 죽창, 삽, 곡괭이 등으로 난자하는 것이었다. …(중략)… 군인과 경찰 역시 감정적 ’보복‘을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효수(梟首) 등의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학살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대체로 개인적 복수심이 결합된 경우 학살은 더욱 잔인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6) 한편, 월림지역에서는 인민군 진주 이후 천씨들이 자위대, 리책(이장) 등의 지위를 차 지하고 마을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1950년 10월경 죽림마을 천씨 일부를 포함한 토착 좌익세력들이 평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용전마을 김종식 등 53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 하였다. 당시 좌익에 의한 피해자 중 한 사람인 김씨 측 현장 생존자 김희태는 진실화해
4) 국방군사연구소 발행, 한국전쟁연구 ‘점령정책’, 1995, 20쪽. 5) 좌익사건실록 11권, 대검찰청, 1975, 187쪽. 6)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234쪽.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733
제 2 부 진실규명 및 진실규명불능 결정 결과
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죽림마을 천씨들이 용전마을에 와서 김씨 일가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집 안 사람 전부를 잡아다가 25평 정도의 창고에 가두어 두었다가 그날 저녁에 전부 죽여 버 렸지요. 할머니가, ‘너희 놈들은 온전할 것 같으냐?’라고 악 쓰는 소리가 동네까지 다 들 렸다고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지로 함께 도망가서 살아남았죠.”7) 이러한 사실은 김용식의 김씨 일가 피해상황에 대한 진술, 김용식의 검찰조사 기록에 서 나온 김태옥, 김덕윤, 손학봉의 증인신문조서, 적대세력 사건 신청인 김정순의 진술, 참고인 신점수의 증언 등에서도 확인되었다.
8)
그러나 위의 여러 가지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김씨, 천씨 양측 주민이 거의 사망했기 때문에 김씨 일가의 희생사건이 인민군 측의 지휘․묵인 하에 이루어졌는지, 지방 좌익이었던 천씨들 주도로 진행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인민군 점령 이후 살해된 김씨 측 희생자의 신원은 <표 5>와 같다. <표 5> 인민군 점령 시 살해된 김씨 측 희생자 명단 연번
성 명
성별 당시나이 김용식과의 관계
직 업
주
거
1
이연순
여
65
모
2
김종식
남
42
제(형)
3
양계화
여
25
처
〃
4
김일순
여
6
장녀
〃
5
김차녀
여
2
차녀
〃
6
김희성
남
16
조카
7
김희옥
남
5
〃
〃
8
김희문
남
1
〃
〃
9
최마순
여
〃
〃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 농업
학생
〃
〃
〃
10
김명주
여
제
11
김양자
여
조카
12
김양녀
여
〃
〃
13
김미순
여
3
〃
〃
14
양일남
남
18
처남
〃
15
양이남
남
12
〃
〃
농업
7) 참고인 김희태, 진술조서 2쪽. 8) 증인신문조서(김태옥, 김덕윤, 손학봉); 김용식 검찰조사기록.
734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
비고
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연번
성 명
성별 당시나이 김용식과의 관계
16
김수옥
남
58
숙부
〃
17
손죽림
여
55
숙모
〃
18
신미녀
여
22
조카
〃
19
김윤식
남
25
사촌
〃
20
김삼채
남
22
〃
〃
21
김양영
여
2
〃
〃
22
김광임
여
22
〃
〃
23
김말임
여
17
〃
〃
24
정길성
남
8
〃
25
정길남
남
65
〃
26
김윤식
남
24
6촌
〃
27
김광식
남
29
4촌
〃
28
김한익
남
55
5촌
〃
29
김남식
남
25
6촌
〃
30
김희경
남
5
〃
〃
31
김고전
여
22
〃
〃
32
최봉산
여
52
5촌
〃
33
김길사
여
17
6촌
〃
34
김양임
여
14
〃
〃
35
김금녀
여
2
7촌
〃
36
김계현
남
60
5촌
농업
〃
37
김은식
남
41
6촌
농업
〃
38
이화복
여
28
〃
〃
39
김희춘
여
12
7촌
〃
40
김희옥
여
8
〃
〃
41
김희녀
여
2
〃
〃
42
김남재
여
62
5촌
〃
43
이화산
여
58
삼촌
44
은주양
여
33
사촌
45
김명화
여
17
〃
46
김윤식
남
11
〃
47
김만식
남
15
〃
48
김관극
남
70
친척
직 업
주
거
비고
〃
〃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735
제 2 부 진실규명 및 진실규명불능 결정 결과
연번
성 명
성별 당시나이 김용식과의 관계
직 업
주
거
49
이성무
남
62
〃
〃
50
김은석
남
41
〃
〃
51
김성녀
여
38
〃
〃
52
김범계
남
18
〃
〃
53
김희삼
남
8
조카
〃
비고
<표 5>에 나타난 김씨 일가 희생자들의 신원을 보면, 여성과 미성년자 및 유아까지 다 수 포함되어 있다. 이는 김씨 일가 희생 사건이 단순히 토착 좌익의 우익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일환이 아니라 전쟁 발발 이전에 원수지간이었던 김씨 일가에 대한 집단 학살의 양상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다. 고창지역 수복과정(1950.11.~1951.5.10. 사건발생일) 유엔군의 인천상륙과 수도 탈환으로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 패잔병과 빨치산들은 수복 이 늦은 고창 서부지역인 공음면, 대산면, 무장면 등에서 활동거점 방어에 주력하였고 이 방어전에 마을 주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였다.
1950년 11월경에는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 병력이 고창읍내에 주둔하면서 군 경 합동으로 빨치산 유격대의 거점마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이듬해 중순 까지 이 지역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상황이 되면서 공권력 부재, 치 안 부재의 극심한 혼란상태가 초래되었다.
2. 사건경위 가. 사건경과 국군 8사단 전사편술부에 의해 작성된 ‘출동인원상황표’에는 본 사건 발생 하루 전인
1951년 5월 9일 24:00에 작성된 기록에 중대장 김용식의 이름과 출동인원(84명)이 표기 되어 있었다. 국군 제 8사단이 1951년 5월 9일 하달한 작전명령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창군(高敞郡) 아산(雅山), 해리(海里), 심원(心元), 부안(富安), 무장(茂長) 등 (等)은 선운사(禪雲寺) 근방(近傍)과 해안선(海岸線) 가까운 일대(一帶)에 잔재(殘在) 하는 적(敵)을 섬멸(殲滅)시키고 변산(邊山)으로부터 도주(逃走)하는 적(敵)을 해변
736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海邊)에 잠복(潛伏)하고 있다가 체포(逮捕) 섬멸(殲滅)하라……지금까지의 정보(情 報)에 의하면 적(敵) 상황(狀況)은 선운사(禪雲寺)를 중심(中心)한 인접지역(隣接地 域)에 무장(武裝) 150명(名), 비무장(非武裝) 70명(名) 등 합계(合計) 220명(名)이 출 몰(出沒)하고 그중 무장면(茂長面)은 토비발호(土匪跋扈)가 극심(極甚)하니, 제3중대 장은 본적지(本籍地)인 만큼 지리(地理), 인물(人物)등 상세(詳細)할 것임으로 무장면
(茂長面)을 통과(通過) 해리(海里) 후산(後山)을 경유(經由) 심원면(心元面) 해안(海 岸)으로 도달(到達)하라.”9) 이 명령에 의해 김용식이 지휘하는 3중대는 1951년 5월 10일 새벽 5시경 대대본부를 출발하여 동일 오전 7시 30분경 고창군 무장면을 경유한 뒤 월림리 방면을 통과했다. 이 때 김용식은 논에서 일을 하는 지역주민 황뇌성을 우연히 만났고 황뇌성으로부터 어머니 이연순, 임신하고 있던 처 양계화, 자 김일순 등 자신의 가족과 일가친척 전원이 천씨 일 부가 포함된 지방 좌익세력에 의해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대장 김용식은 소대장을 불러 마을 주민들을 소집하라는 명령을 하였고, 중대원들은 죽림마을 천씨 등이 거주하던 죽림부락을 수색하여 마을 주민들을 전원 집결 시킨 다음 김용식의 앞에 전부 엎드리게 하였다. 또한 황뇌성을 시켜 주민들 뒤에서 손짓 으로 김씨 일가의 살해행위 가담자 및 인민군 점령 이후 부역행위자를 지목하게 하고 성 씨 등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 95명을 선별하였다. 그 다음 김용식은 자기 가족의 살해행위 가담자와 부역행위자로 지목된 95명을 연행한 사실을 대대장 차일혁에게 보고한 다음 총살 재가를 얻었다. 그리고 “선운산 전투도 해야 하는데 그냥 죽이라.”라는 대대장 명령에 따라 현장을 지휘하여 본부소대 소속 화기 소대 원들을 시켜 남성들은 월림리에서 2km 떨어진 도곡리 시목동 옆 계곡에서, 여성들은 남 성들이 희생된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봉암산 계곡에서 경기관총 등으로 집단 총살하였 다. 그 결과 8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부상자를 포함한 6명은 현장에서 생존하였다.10) 현장에서 살해된 사람들의 신원과 부상자의 명단은 <표 6>, <표 7>과 같다. <표 6> 경찰부대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 명단 연번
성 명
성별
나이
1
황뇌성
남
53
부 역 사 실
비 고 호 주
9) 김용식 재판기록. 10) 김용식 재판기록, 신청인 천병순 진실규명신청서.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737
제 2 부 진실규명 및 진실규명불능 결정 결과
연번
성 명
성별
나이
2
표 씨
여
51
3
박봉례
여
22
부 역 사 실 여맹원
4
황선례
여
17
〃
5
황은순
여
11
소년단
6
황금수
남
38
자위대원
7
최옥순
여
29
여맹원
8
황춘부
남
11
9
최현숙
남
72
10
최홍기
남
15
11
최재호
남
31
12
황금녀
여
29
13
최계순
여
15
14
최창식
남
59
15
손 씨
여
47
16
최재현
남
18
17
천병환
남
37
18
서정자
여
36
19
천화순
여
16
20
박임녀
여
52
20
박임녀
여
52
21
천년봉
남
42
구당원, 리 선전책, 김용식 일가 살해 가담
22
천병선
남
17
민청원
23
천기종
남
63
24
천서봉
남
46
25
유 씨
여
47
26
천귀례
여
3
27
천기일
남
34
구당원, 자위대원
28
김 씨
여
30
여맹원, 남편 입산
29
천연례
남
3
30
천병인
남
43
구당원, 자위대원
31
한 씨
여
38
여맹원
32
천(명 미상)
여
2
33 34
천재봉 황 씨
남 여
51 47
738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비 고
호 주
호 주 소년단 호 주 여맹원 호 주 신당원, 빨치산 여맹원
호 주 호 주
신당원, 군 인민위원장, 경리과장
호 주
호 주
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연번
성 명
성별
나이
부 역 사 실
비 고
35
천향봉
남
39
구당원, 자위대원, 김용식 일가 살해 가담
36
황정연
남
60
37
황용재
남
28
구당원
38
황숙자
여
22
여맹원
39
황창중
남
52
40
천병훈
남
23
구당원, 면 인민위원, 서기
41
천병노
남
17
민청원
42
서기섭
남
17
43
김해용
남
31
구당원, 빨치산
44
민영례
여
22
여맹원
45
천경림
여
5
46
천(명 미상)
여
3
47
천방욱
남
33
자위대원
48
장 씨
여
23
여맹원
49
천금순
여
49
50
천정욱
남
26
구당원, 자위대원
51
천진욱
남
17
민청원
52
천병모
남
20
자위대원
호 주
53
천윤례
여
16
54
천윤순
여
13
55
천차봉(두봉)
남
33
구당원, 자위대원
호 주
56
천신봉
남
22
신당원, 자위대원
57
천동태
남
4
58
천선희
여
21
59
천병호
남
16
60
표 씨
여
50
소년단
61
정 씨
여
25
여맹원, 남편 입산
62
천춘애
여
6
63
천성애
여
4
64
천(명 미상)
남
1
65
천이봉
남
59
66
송 씨
여
50
67 68
천병조 김 씨
남 여
36 33
호 주
고창읍 호 주
호 주
호 주
리 여맹위원장
호 주 구당원, 자위대원 여맹원
고창 월림 집단희생 사건
739
제 2 부 진실규명 및 진실규명불능 결정 결과
연번
성 명
성별
나이
부 역 사 실
비 고
69
김 씨
여
33
여맹원, 남편 입산
70
천일봉
남
43
신당원, 호위대
71
천중금(진봉)
여
17
여맹원
72
천영욱
남
34
구당원, 자위대원
73
정 씨
여
30
여맹원
74
천희순
여
3
75
천하봉
남
34
구당원, 자위대원
76
김 씨
여
30
여맹원
77
천(명 미상)
여
3
78
천기신
남
74
79
천춘봉
남
33
80
천양순
여
4
81
천응섭
남
69
82
천병문
남
22
신당원, 자위대원
호 주
83
최복만
남
39
구당원, 자위대원
호 주
84
김 씨
여
30
여맹원
85
최(명 미정)
남
2
86
천상봉
남
26
87
천봉욱
남
22
88
오 씨
여
22
89
천(명 미정)
여
3
호 주 호 주
호 주
호 주 구당원, 리 서기장 호 주
구당원, 자위대원 여맹원
<표 7> 현장 생존자 및 부상자 명단 연번
성 명
성 별
당시나이
관 계
1
황영수
남
29
2
천득붕
〃
40
3
김 씨
여
4
홍 씨
〃
35
천춘봉 처
5
정 씨
〃
22
천차봉 처
6
김 씨
〃
비
고
흉부 관통상을 당했으나 생존 천기신 처
<자료 출처> 김용식의 재판기록
740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천신봉 처
업고 있던 아이의 피가 온 몸에 흘러내려 생존
제 2 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위의 표를 보면, 이 사건은 살해된 사람이 주로 천씨와 황씨였으며, 이들 일부가 자의 에서든 타의에서든 인민군 점령 이후 부역행위를 한 사실이 있다는 점도 확인된다. 더욱 이 희생자 중에는 여성 및 20세 이하 어린이․청소년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본 사건이 사 실상 무차별 집단살해 사건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사건현장 생존자 정○○의 진술에 의하면 제3중대 경찰부대원들은 사건현장에서 천○○ 등 3명의 천씨 측 여자를 성추행했다고 한다. 다만, 진술인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고, 재판기록에도 성추행 부분이 없으므로 제3중대 경찰부대의 의한 성추행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 추정은 되지만 확정할 수 없다.
<사진 5> 노끈으로 묶인 채 살해된 천○○(여, 21세)의 사체, 1951.5.14. 김용식의 사법처리 과정에서 현장검증 시 촬영한 사진
나. 사건의 원인과 성격 <표 6>의 ‘부역사실’에서 나타난 것처럼 천씨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자위대원, 당원, 여 맹원 등의 자격으로 마을의 주도권을 잡았고, 천씨 중 일부가 부역활동에 가담했으며, 이 중 일부는 김용식 일가 살해 사건에 가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씨 일가 집단 살해의 가해 책임자인 김용식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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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마을 천씨를 살해한 행위는 지금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우리 가족을 먼저 죽였기 때 문이며 이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죽였고 하늘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원수를 갚을 수 있었 다.”라고 진술하였다.11) 위의 사실만 보면 본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당시 3중대 지휘관의 자격으로 병력을 이끌 고 현지에 간 김용식이 개인적 보복심에 기초하여 죽림마을 천씨 등을 포함한 부역혐의 자들을 살해한 것으로 보이며, 1955년 김용식에 대한 재판 판결문도 본 사건의 성격을 이 렇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판결문에는 “죽림마을 천씨 등을 총살한 직후 대대본부에 상황을 보고하 니, 다른 부락 공비들도 소탕하라.”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12) 이 기 록에 의하면, 당시 김용식이 지휘하던 제18전투대대 제3중대가 공비토벌작전의 일환으로 마을에 숨어 있었던 토착좌익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법원 판결문에서도, “피고인(被告人)의 가(家)는 부지타인(不知他人)이 주거(住居)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피살현장(被殺現場)에는 고승(菰繩), 목봉(木棒), 죽창(竹槍) 등
(等)이 산재(散在)하고 있음을 목격(目擊)하자 빨치산의 행동(行動)과 동일(同一)한 것 으로 인정(認定)하고 토벌작전(討伐作戰)의 완수(完遂)를 기(旣)하기 위하여 악성분자
(惡性分子)인 피해자(被害者)를 총살(銃殺)한 것은 반드시 피고인(被告人)의 복수적 행 위(復讐的 行爲)라고 단정(斷定)할 것이 아니고 작전상 필요(作戰上 必要)에 의(依)한 조치(措置)라고 간주(看做) 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라고 적시하고 있다.13)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재판부도 김용식의 천씨 일가 총살행위가 공식 토벌작전의 성격 을 가진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이 이후 감형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14) 또한, 김용식은 사건 당시 현장에서 지역 주민들의 신상과 활동을 잘 알고 있는 황뇌성 에게 마을 주민 가운데 빨치산 및 입산자 가족이 있는지, 부역행위자가 있는지 등을 확인 하는 절차를 거쳤다. 이 사실을 보면, 그는 부역 혐의자를 색출하는 공적인 임무도 부분 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사건은 김용식의 사적 보복심이 바탕에 깔린 사건이기는 하나 무장한 군경이 공 비 소탕, 부역자 처벌이라는 공적인 임무를 내세워 비무장ㆍ비교전 상태의 민간인을 집 단살해한 것으로, 단순히 사적인 보복살인 사건으로만 볼 수는 없고 한국전쟁기에 공권 11) 12) 13) 14)
김용식, 진술조서 5쪽. 김용식 대법원 재판기록. 김용식 대법원 재판기록. 김용식 대법원 재판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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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이 부당하게 남용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사건의 희생자 중 여성이 절반 정도이고 13세 이하의 어린이도 18명이나 포함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용식이 천씨 마을의 거의 모든 민간인을 보복 대상으로 삼고 있 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다. 가해자 및 사건 은폐 여부 재판기록과 본인의 진술에 의하면, 김용식은 국군 제8사단의 지시로 자신의 고향마을 인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로 자신이 지휘하는 제3중대를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 족과 친척들이 희생된 사실을 알게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천씨 일가 등에 대한 살해를 지시․감독하였다. 따라서 월림리의 민간인 89명을 집단 살해한 주체는 김용식과 그의 휘하에 있던 전북경찰국 제18전투경찰대대 제3중대원들이었다.
1951년 5월 10일 김용식은 마을 주민 89명을 사살한 직후 대대본부 부대대장에게 ‘부역 토비 사살조치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이후 대대본부 부대대장으로부터 ‘잔재부락토비 숙청’ 명령을 받았고 “제1요 수색지역인 심원면 월산리로 이동하라.”라는 지시를 받고 그 곳으로 이동하였다. 특히 이 부분과 관련하여 김용식 자신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마을 주민 95명을 선별하 여 집단 살해하기 직전에 인근에서 작전 지휘 중이던 대대장 차일혁에게 모든 상황을 보 고하였고, 대대장으로부터 “선운산 전투도 해야 하는데 그냥 죽이라.”라는 지시를 받은 다음 죽였다고 하였다.15) 여기서 김용식의 보고내용이 단순히 ‘토비사살’의 내용이였는지 여부는 구체적으로 확 인할 수는 없으나, 이후의 정황으로 보아 대대장 차일혁은 본 사건이 단순한 ‘토비사살’의 범위를 넘어서는 민간인 보복살해의 성격을 인지했을 개연성이 크다. 당시 대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보면 국군 11사단 종군기자였던 전북일보 김만석이 대대 장 차일혁에게, “당신 부하들이 내가 김경위 사건에 대해 사진은 물론 취재하는 것을 방 해했소.” 라고 하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내가 사과드리겠소. 검열상 보도가 힘든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이요.”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16) 이에 근거해볼 때 대대장 차일혁은 당시 김용식이 사적 보복 차원에서 여성과 어린이가 포함된 민간인들을 불법 살해한 사 실을 알고도 묵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5) 김용식, 진술조서 2쪽. 16) 차일혁,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기린처, 1990,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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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계엄 상황이기 때문에 군․경의 민간인 불법살해 사건은 군 민사부장이 관할하 여 해야 하지만, 군 민사부장은 물론 대대장도 그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김용식은 사건을 저지른 후에도 3일간 작전을 계속 수행했다. 그 후 정읍에서 거주하던 민간인 천기호(호남고 교사, 현재 사망)가 이 사건에 대해 검찰에 신고하자, 비 로소 김용식은 1951년 5월 13일 대대장의 명령에 의해 본부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그 후 살인 및 동 미수 혐의로 전주지방검찰청에 구속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당시 18전투대대 부대대장 이병선을 조사한 바, 그는 당시 대대 본부에서 작전 관련 모든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으므로 이 사건도 보고 받았을 것으로 판 단된다. 그러나 그는 조사과정에서 구체적인 진술을 기피하였다. 또한, 본 사건은 1951년 5월 21일 ‘중요돌발사건 중간보고’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이승 만에게까지 보고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부는 사건이 언론이 보도되는 것을 통제 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살해 당한 희생자 유가족에게도 어떠한 위로의 조치를 하지 않 았다.17)
라. 가해행위에 대한 책임 이 사건의 가해 명령자는 이미 판결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김용식이며, 그는 사건 관련 책임으로 재판을 받은 이후 15년간의 수형생활을 했다. 그러나 김용식의 상부 지휘자인 차일혁은 김용식으로부터 본 사건의 경과를 처음부터 보고받아 알고 있었고, 사살명령을 하였지만 이 사건과 관련하여 어떤 문책도 받지 않았다.18) 이 사건에서 김용식은 사건 지휘계통상 상급자인 차일혁 대대장에게 사전, 사후 보고 및 지시를 받는 등 지휘책임의 관계적 요건들이 있었다. 이 경우 전북경찰국 제18전투경 찰대대 대대장 차일혁은 제3중대 중대장 김용식과 제3중대 소속 경찰들에게 범죄의 실행 을 명령한 직접 책임자로서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리고 설사 범죄의 실행을 명령하 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실효적 지배하에 있는 부하들의 범죄행위를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 하고 사건을 예방하거나 사후에 현장 조사 및 가해자 처벌 등을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 지 않았으므로 지휘 책임이 발생한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 사건의 가해 경찰관들은 상급자인 김용식이 자신의 사적 원한을 풀기 위해 국 가기관의 힘을 이용하여 비무장, 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살해한 행동이 최소한의 인도 17) 1951년 국무총리실 인사비밀 관계 서류철(사건과 관련하여 김용식을 구속하여 수사중임을 보고한 문건). 18) 김용식, 진술조서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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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고려가 없는 불법적 명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이 사건의 가해 경찰관들은 국민을 보호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이는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공 무원의 불법행위에 해당하며,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국가 책임이 발생할 수밖 에 없다. 그러므로 국가는, 무장한 군․경이 공비 소탕, 부역자 처벌이라는 공적인 임무를 내세 워 비무장ㆍ비교전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살해한 이 사건을, 가해자 김용식의 개인 처벌 로 한정하여 처리하고, 가해행위를 명령했거나 최소한 막지 않았던 김용식의 직접 상급 자와 가해행위를 이행한 경찰관에 대한 조사나 처벌을 이행하지 못한 점에 대한 책임이 있다. 또한, 가해 군․경의 범죄행위의 사전 예방 및 사후 수습과 관련한 최종 책임 역시 국가에 귀속된다고 판단된다.
마. 이후 유족의 피해 사건 발생 후 살아남은 희생자의 유족들은 힘든 생활을 하였다. 13살의 나이로 부모형 제를 잃은 천순자(현재 69세, 죽림마을 거주)는 당시의 충격 때문에 정신질환이 생겨 정 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였다. 또한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썼고, 신원조회를 우려하여 각종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등 연좌제로 말미암은 피해를 입었다.
바. 소 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1951년 5월 10일 전북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에서
2km 떨어진 도곡리 시목동 옆 계곡과 봉암산 계곡에서, 공비 토벌의 임무를 갖고 있던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제3중대(지휘관 김용식)가 마을주민 89명을 집단 총살하였다. 이 사건 이전에 인민군 점령 이후인 1950년 10월경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 용전마을에 서 지방좌익과 죽림마을 천씨들의 주도로 김용식 일가 53명이 살해된 바 있고, 이 사건은 이와 관련하여 지휘관 김용식의 사적 보복 차원에서 자행된 사건으로 확인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기에 인민군이 남한지역을 점령하여 특정한 지역 차원의 권력 담당 주체가 뒤바뀌는 와중에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성씨들간의 갈등이 이념적 대립과 결합하 여 보복 살해의 양상으로 발전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무장한 경찰이 공비 소탕, 부역자 처벌이라는 공적인 임무를 내세워 비무장ㆍ비교전 상태의 민간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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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살해하여 부당하게 공권력을 남용한 사건의 성격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지휘관 김용식의 경우, 전시상태에서 가족이 몰살당한 데 대한 극도의 복수심이 발동 하여 상대방 천씨 일가를 포함한 부역혐의자들을 살해한 행위는 인간적 정리 면에서는 이해될 부분이 있겠지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공권력을 남용한 것에 대 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 또한, 상급 지휘관인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대대장 및 전북경찰국과 국군 8사단 역 시 지휘계통을 통해 사건을 전부 보고받았고 김용식이 89명의 마을 주민을 불법 살해한 사실을 인지했을 개연성이 높지만 사건을 3일 동안이나 문제 삼지 않고 은폐하려 했던 잘못이 있다. 그리고 국가는 주민의 신고에 의해 뒤늦게 김용식을 사법 처리하기는 했으 나 군․경의 공권력 남용이라는 불법 행위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잘못이 있다.
Ⅴ. 결론 및 권고사항 1. 결 론 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0일경 전북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에서 2㎞ 떨어진 도 곡리 시목동 옆 계곡, 봉암산 계곡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 중이던 전북경찰국 제18전 투경찰대대 제3중대(지휘관 김용식)가 죽림마을 주민 89명을 집단 총살하였다. 조사결과, 이 사건 신청인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한 황창중(다-2997), 서정자, 천화순, 천 두봉, 천차봉, 천신봉, 천동태, 김순여, 천명미정, 천일봉, 천금중, 천병문, 천상봉, 천병인, 한순예, 천정애, 천응섭, 천방욱, 장성례, 천가봉, 황정순, 천선희, 천병오, 천정욱, 천진욱 등 24명(다-3373), 천이봉, 송귀조, 천병조, 김순덕 등 4명(다-9628), 최창식, 손자근, 최재 현 등 3명(다-9695), 미신청자 황뇌성 등 57명을 합한 총 89명이 이 사건으로 희생된 것 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부상자를 포함하여 6명이 생존하였다. 나. 이 사건은 한국전쟁기에 인민군이 남한지역을 점령하여 특정한 지역 단위의 권력 담당 주체가 뒤바뀌는 와중에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성씨 간의 갈등이 이념적 대립과 결 합하여 상호 보복 살해의 양상으로 발전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인민군 점령 이후인 1950년 10월경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 용전마을에서 지방 좌익과 죽림마을 천씨들에 의해 김용식 일가 53명이 살해된 바 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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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중대 지휘관 김용식이 사적 원한을 갚기 위해 천씨 일가 등을 살해하였다. 이 점은
1955년 김용식에 대한 재판 판결문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다. 그러나 본 사건은 객관적 차원에서 보면 무장한 군경이 공비 소탕, 부역자 처벌이 라는 공적인 임무를 수행한다는 명분하에 비무장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것으로, 지휘관 김용식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공권력을 남용한 사실이 명백하다. 라. 또한, 김용식 및 소속 부대원들의 상급 지휘관인 전북경찰국 제18전투대대 대대장 및 전북경찰국 등 지휘계통을 통해 사건 발생 전․후 사건 내용을 보고 받은 바 있고 ‘토 비처벌’의 명분하에 89명의 마을 주민이 불법 살해된 사실을 인지했을 개연성이 높지만,
3일 동안이나 문제 삼지 않고 은폐하려 했다. 그리고 국가는 주민의 신고에 의해 뒤늦게 김용식을 사법 처리하기는 했으나, 군․경의 공권력 남용이라는 불법 행위에 의해 억울 하게 집단 희생된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잘 못이 있다. 마. 이 사건에 대하여 진실화해위원회에 천씨 일가가 신청한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 단희생사건에 대해서는 이상과 같이 진실이 규명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발생 원인이 라고 볼 수 있는 지방 좌익세력에 의한 김씨 일가 집단살해 사건에 대해서는 진실화해위 원회에서 추후 보완 조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2. 권고사항 가. 경찰에 의해 불법 살해된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국가 차원에서 회복시킬 수 있도 록 피해자 명예회복 등에 대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 나. 전쟁 시기의 비상상황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불법살해를 막을 수 있도록 민간 인 보호조치 관련 법을 제정할 것을 권고한다. 다.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이후 지금까지도 상처 를 안고 살아온 김씨, 천씨 양측 일가 간에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희생자 위령사업 등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필요가 있다. 라. 또한, 월림리 용전마을 김씨 유족들과 죽림마을 천씨 유족들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아픈 기억들을 청산하고 서로 진정으로 사과하고 화해하여 새로운 공동 체 건설에 동참할 것을 진심으로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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