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 그대로 간직한 사내리 성송면 사내리 사내마을 옥희
1.
유래와 위치
성송면은 마한시대에 모이부고현이었다가 백제시대에는 송미지현(松彌知縣)에 속 해 있다가 통일신라에 와서 무송현(茂松縣)이 됐다. 그 후 무장현(茂長縣)으로 개칭 되었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 중엽까지 전남 영광군에 속했던 성송면은, 1914년(일제 강점기) 성동(星洞)면과 원송(元松)면이 병합될 때 성(星)자와 송(松)자를 따서 유 래된 것이다. 고창군의 남부에 자리 잡은 성송면은, 전남 장성군 삼계면과 도계를 이 루고 있으며 북쪽은 고수면, 서쪽은 무장면과 대산면에 경계를 이루고 남쪽과 동쪽 은 고산 등에 접해 있다 . 성송면 사내리(沙乃里)는 성동면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포동(浦洞), 복동 (福洞), 사내(沙乃) 및 향산(香山), 계양(溪陽) 등을 병합하여 그 중심마을인 사내 (沙乃)의 이름을 붙여 사내리라 하여 성송면에 편입되었다. 사내리의 사내마을은 고창읍에서 국도 23호를 타고 대산방면으로 가다가 고수 장 두교를 넘어 초내마을에서 우회전하여 약 1km를 들어가면 나온다. 사내리의 포동과 복동마을은 국도 23호를 타고 가다가 무장방면의 군도 20호를 타고 약 2km 정도 들어가야 한다. 잿등에서 첫 번째 북쪽 있는 마을이 포동이고, 군도 13호선을 타고 150m 더 들어가서 만나는 마을이 복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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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마을전경
자연환경 고창의 대표적인 비산비야 지형에 해당된다. 마을의 기맥(산의 흐름)은
호남정맥의 영산기맥인 방장산 줄기가 문수산을 지나 구황산(500m)을 만든다. 구황 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기맥이 추산봉을 만들고 초내를 지나 잿등을 이룬 뒤 성송면 낙양리에서 끝난다. 낙양으로 흐르는 기맥은 사내리의 뒤로 동에서 서로 흐르며 사내리 지역에 네 개의 기맥이 북으로 뻗어 내리고 있다. 그 첫 번째가 학천 에서 갈라져 북쪽으로 발달한 기맥으로 동쪽에 사내마을이 입지해 있다. 두 번째 기 맥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세 번째 기맥의 동쪽에 포동마을이 취락을 형성하 고 있다. 네 번째는 북서쪽으로 발달하다가 낙양리에서 끝을 내는 기맥으로 그 중간 북동쪽으로 복동마을이 자리해 있다. 사내리의 수계는 사내리 뒤로 덕림천의 수계가 있고, 앞으로는 평지천이 흐르고 있다. 사내리의 사내와 포동 및 복동의 수계는 전면에 평지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마을의 작은 물들은 남에서 북으로 흘러 모두 평지천으로 합수된다. 합수된 평지천 은 주진천과 합수된 뒤 서해의 곰소만으로 흐른다. 사내리의 마을들은 모두 산의 동 쪽에 있어, 북서계절풍과 겨울철의 일조시수을 고려한 양택지에 입지해 있다고 하겠 다. (1) 평지천 : 평지천은 전라북도 고창군 구황산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다 가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낙양리에 위치한 주진천 좌안으로 합류되는 주진천의 제 1지류 지방2급 하천이다. 평지천 유역은 주진천의 중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진천 합류 후 서해로 유입된다.
(2)
: 포동마을의 남쪽에 있는 골.
(3) 초당골 : 포동마을의 남동쪽에 있는 골. (4) 포동제 : 주을제라고도 부르는 저수지로 포동마을의 서쪽에 있음. (5) 잿등 : 영등(嶺嶝)으로도 불리는 고개로 포동제의 남서쪽에 있음. (6) 녹봉(鹿峰, 54.5m, 사슴봉) : 포동마을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 모양이 사슴과 같이 생겼다고 함. (7) 욋골 : 사내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8) 몰매등 : 사내마을의 북쪽에 있는 능선 (9) 아랫뜸 : 사내마을의 공동샘이 있는 부근을 말함 (10) 윗뜸 : 사내마을 마을회관 부근을 말함 (11) 사내들 : 사내마을 북쪽에 있는 평지천 주변의 들을 이르는 말 (12) 막천골 : 사내마을 몰매동 바로 아래 북쪽의 골 (13) 진등 : 긴 능선으로 사내마을 뒤쪽의 산줄기 (14) 세탁골 : 사내마을회관에서 진등을 넘은 서쪽의 골 (15) 성주(적)골 : 진등 넘어 서북쪽의 골 (16) 고재기: 윗뜸 넘어가는 길로 남서쪽이 있는 고개 이름 (17) 대사골 : 고재기 넘어 서남쪽의 골
3.
인문환경
사내리의 법정리는 사내리이고, 행정리에는 사내리와 포동리가 있다. 사내리의 자 연부락으로 사내마을과 포동마을 및 복동마을이 있다. (1)
성촌 및 지명
현재 사내마을 뒤쪽에 몰매동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기 왓장, 그릇, 파편, 주춧돌 등이 발견되고, 1945년 광복 직후 뒷골에서 포강을 팔 때 에는 땅속 4m 깊이에서 두꺼운 판자 형태로 만든 우물이 발견되었으며, 산기슭에 6·25 무렵까지 가실 2동이 있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원래 마을은 현재의 위치가 아니고 사내마을 뒤 몰매동이 아닌가 생각된다. 몰매동에서는 수십 년 전까지도 인 골이 상당량 발견되었다 하니 어느 난과 관련이 되어 폐촌되면서 현재의 사내마을 (새나지터)이 형성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사내마을은 본래 초천(草川)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순우리말로 새날리, 새나지로
한다. 이후 일정말기에 사내리로 바뀌었다. 마을에 대나무가 많고 먼 데서 보면 새날개 형이라 해서 새나지로 불렸다. 예전 기록 일부에서 조비리(鳥飛里)였다 는 지명이 있는데 이에 대해 현재 마을주민들은 잘못된 근거로 기록이 되었다고 말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내(沙乃)라는 마을이름에 대해서도 마을주민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 당시 마을주민 중 광산이씨가 마을 일을 보면서 새나지에서 사내로 이름이 바뀌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내(沙乃)’의 한자가 ‘모래 사 (沙)’, ‘이에 내(乃)’니 ‘모래가 흐트러진 형국’이라는 뜻 같지만, 마을 주위에 냇가도 없고 모래도 없어 왜 갑자기 마을이름을 그렇게 바꿨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 이다. (2)
(浦洞)
마을이름은 옛날에 바닷물이 들어올 적에 수초인 줄이 많다고 하여 줄울이라고 부 르다가 행정구역상 명칭으로 포동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줄울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포동은 조선 중기까지는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가 250여 년 전 장 성에서 금녕김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후에 진주정씨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포동마을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감싸고 있고, 마을 앞으로는 티재골에서 내려오는 물 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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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동 마을회관
(3) 복동(福洞) 복동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소가 누워 있는 형국(臥牛形)’으로 소가 일어나 기만 하면 흥한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복골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 때 복동으로 불 렀다고 한다. 복동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풍천임씨가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하 였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부자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마을의 풍속으로는 마당놀이 가 있었다고 한다. 정월대보름날 자기 집 입구에 황토를 뿌리고 첫 닭이 울 때인 새 벽에 대나무불로 총소리를 내어 액을 물리치고 계통으로 땅을 두드리며 그 해의 소
기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4. 1)
유물과 유적 (晩悔齋)
포동에 있는 강당으로 조선조 말기에 효자 김영태(金永泰)가 글을 가르쳤다고 함. 2) 금녕김씨삼강려(金寧金氏三綱閭) 성송면 사내리 447-3번지인 포동마을에 있다. 정려는 내 3면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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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금녕김씨삼강려
3) 사내리 고분 포동마을과 형재농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나오면 좌측으로 도로에 인접하여 고 분이 있다. 분구묘는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하며 광산김씨 세장산으로 이용되고 있다. 분군은 원형이고 직경 약 10m 정도에 높이는 3m 정도로 추정된다. 시대는 삼국시 대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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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사내리 유물분포 도면
지석묘군2 고창군 성송면 사내리 77-1. 사내마을 서측 구릉 말단부 무밭에서 약간의
간격을 두고 3기가 확인되었고 남측으로 30m 정도 떨어져 송림 내에 1기가 확인되 었다. 그 중 대표적인 지석묘의 크기는
394×190×42cm로 상석의 형태는 방형
을 띠며 단면은 장방형이다. 장축은 남북방향이며 지석은 1개이다. 마을주민에 의하 면 원래 이곳에는 더 많은 수의 지석묘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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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사내리 지석묘군
유물산포지3 고창군 성송면 사내리 산15-2. 원삼국∼삼국 시대로 추정되며, 사내마을로
들어가는 소로 북쪽에 있다. 남북으로 뻗어내린 가지능선으로 해발 50m 내외의 저 평한 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구릉의 정상부를 제외한 중단부와 하단부는 1~2m 정도 깎여 인삼밭과 무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북서측 말단부는 진주정씨 선산으로 10여 기의 민묘들이 분포하고 있다. 유물은 전지역에 걸쳐 옹관편, 경질토기편, 타날문토 기편, 연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사진 5> 유물 분포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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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 유물
유물산포지 4 고창군 성송면 사내리 128-1. 원삼국 시대로 추정되며 사내마을의 북서쪽에
있다. 해발 51m의 저평한 대지를 이루며 정상부로 이어지는 소로가 나 있다. 구릉 은 현재 잔디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말단부는 송림으로 광산김씨 묘가 있다. 유물 은 1m 정도 깎여 고추밭이 된 곳에서 옹관편, 연질토기편, 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 었다.
<사진 7> 유물 분포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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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8> 유물
유물산포지 5 고창군 성송면 사내리 6-7. 원삼국∼조선시대로 추정되며 사내마을의 북측
에 있다. 동측으로는 사내들이 펼쳐져 있고 마을과 이어지는 소로가 나 있다. 구릉은 해발 55m의 비교적 높은 편으로 정상부를 제외한 전사면에 걸쳐 밭과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어 삭평이 심한 편이다. 정상부에는 현재 3기의 민묘가 있다. 유물은 동 사면에서 주로 수습되었는데 옹관편, 경질토기편, 연질토기편 등이다.
<사진 9> 유물분포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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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0> 유물
당산 고창군 성송면 사내리 864. 조선시대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32호(1999년
7월 9일)로 지정되어 있다. 1) 1592년 선조 24년 임진왜란 때 외침을 막고 마을의 화평을 축원하기 위하여 당 산제가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 내려오나 확인할 길이 없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시 대 성종(1469년~1494년) 때 숭유억불이 강화되면서 승려들의 포교는 물론 생존의 길조차 막연하게 됨에 따라 도승이 입산수도하러 이곳을 지나다가 새나지터를 둘러 보고 당산의 위치를 정해주면서 이곳에 당산을 모시고 정월 열나흗날 밤에 당산제를 모시면 동네가 천세만세토록 복을 누릴 것이라 하여 당산제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12당산을 모셔왔는데 어느 날 밤 동네에서 제일 나이 많 으신 어른께 신령님이 나타나 앞으로는 4기의 당산제를 올려라 하여 현재와 같이 4 기의 당산제를 거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12당산에 대해 마을주민들은, 아마도 마을 주위에 있는 고인돌 형태의 바위들이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나 확인된 바는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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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1> 고인돌 형태의 바위
형태 표시로 촌전로변에 남북직선 50m 간격으로 마을을 등지고 동향에 4기의
입석이 있다. 마을 중앙에 아버지당, 어머니당이 있고 그 양쪽에 아들당, 며느리당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 당산 입석은 갓을 쓰고 있는 것[관립(冠笠)]이 특징이다. 아버지 당산은 높이 160cm, 둘레 128cm, 갓둘레 173cm이고 어머니 당산은 높 이 124cm, 둘레 115cm, 갓둘레 257cm이다. 아들과 며느리 당산은 갓을 쓰지 않 았고, 부모당산보다 작은데 전체의 3분의 1은 지상에 노출되어 있고 나머지 3분의 2는 지하에 묻혀 있다. 일설에 의하면 아버지당은 갓에 구멍을 파서 고정시킨 것으로 보아 갓의 형태가 완연하나 어머니 당은 갓의 형태가 아니고 광주리를 이고 있는 형태로 부지런하고 소박한 우리의 전통적인 어머니 형인 촌부(村婦)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입석의 형태를 갓으로 보았을 때 어머니당이 아버지당보다 갓둘레가 큰 것이나 어 머니당이 갓을 쓰고 있고 아들 당은 갓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은 모계중심사상, 효사 상에 유래된 것으로 판단되나 확인할 길은 없다.
<사진 12> 아버지당산
<사진 13> 어머니당산
<사진 14> 아들당산
<사진 15> 며느리당산
며느리당산
어머니당산
아버지당산
아들당산
마을가실 당산의 위치 및 순서 (50m 간격)
3)
거행절차 정월 보름에 올리지만 마을에 부정이 있거나 상고가 있으면 2월 초하루
에 제를 모시기도 한다. 6·25 전까지는 당산제를 모시기 일주일 전부터 동네에 궂 은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금줄을 치고 외부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고 하는 데 지금은 정월 열나흗날 금줄을 치고 제를 올릴 준비를 한다. 제관(祭官)은 화주(化主)를 겸했고 제주는 정월 초닷새 마을총회에서 생기복덕(生 氣福德)하고 집안에 상고(喪故)와 태기(胎氣)가 없고 부부관계를 금할 수 있는 사람 을 선정한다. 제주로 선정되면 금줄을 치기 전에 청강수가 아닌 지하수 깨끗한 물에 목욕재계한다. 언제부터인지 그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용솟음처럼 폭폭 솟아오르고
청정한 초당샘(서당샘 이라고도 불림)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초당 샘을 사용하지 않으나 아직까지 깨끗한 물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또한 마을 앞에 공동우물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데 식수로는 쓰지 않고 마을 허드렛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16> 초당샘
<사진 17> 마을 앞 공동샘
제물(祭物)은 임시로 지은 제실(움집형태)에서 준비하는데 육물은 금하고 주(酒), 과(果), 포(脯), 병(餠), 탕( )을 써서 농경사회의 도미(稻米, 쌀)의례를 갖추었다. 특히 곶감을 마을 사람 수대로 사서 음복(飮福)하라고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술과 쌀은 누룩으로 바로 빚어 발효상태인 것을 차려 놓았다고 한다. 제물을 준비하는 중에 제주가 인(人)소변(小便)을 보게 되는 경우 다시 목욕을 해 야 하며 백지(白紙)로 입을 가린다고 한다. 열나흗날은 여자들이 문 밖 출입을 하지 않는 전통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제기는 매년 고창시장에서 새로 구입하여 사용하고 제비(祭費)는 백미 세 되를 호 구로 할당하며 희사금 등으로 충당한다. 순서는 강신(降神), 헌잔(獻盞), 축원(祝願), 헌찬(獻饌), 소지(燒紙), 음복(飮福),
(奉送), 철상(撤床) 하고 아버지당부터 어머니당, 아들당, 며느리당 순서로 모시 는데 왼대 새끼에 흰 천과 백지를 꽂아 당산을 두르게 된다. 흰 천은 겉옷이고 백지 는 속옷이며 왼대 새끼는 허리끈이라 한다. 이때 불을 피우면서 남자들이 각기 다른 농악굿을 다양한 가락으로 치면서 잡귀를 물리친다. 현재는 인구감소로 마을농악대 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농악대 없이 제만 지내고 있다.
<사진 18>
<사진 19>
<사진 20>
<사진 21>
<사진 22>
<그림 23>
<사진 18~23> 당산제 지내는 모습 (2001년 1월 14일)
7.
현황
1)
당산나무 입석 당산만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큰 당산나무도 있었다고 한다. 당산나
무 옆 동네 뒤에 ‘시정모퉁이’라 불리는 곳이 있었다. 예전에는 모정을 시정이라 고 했는데, ‘뒤로 돌아간다’고 해서 시정모퉁이라고 불렸다. 옛날에는 시정이 동네 앞에 있지 않고 동네 뒤에 있고 마을 우물은 동네 앞에 있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시정에는 주로 동네 남자들이 모이고 마을 우물에는 동네 여자들이 모이기 때문이 다. 남자들하고 여자들하고 가깝게 지내지 않아서 시정에 주로 생활하던 남자들이 상의 옷을 벗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서 마을 여자들과 내왕을 하며 마주치지 않을 곳 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는 시정모퉁이가 없어지고 마을 앞에 모정이 있다.
<그림 24> 마을모정
2) 인구 총 45명(남자 18명, 여자 27명)으로, 24가구가 있다. 가장 인구가 많았을 때는 60년대 초반으로, 30여 호가 넘는 가구에 120여 명이 넘게 살았다고 한다. 3) 주요 성씨 고수 장두마을에 살았던 광산김씨들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현재 마을 옆에 광산김씨 산이 있으며 시제를 모시는 묘와 상석이 있다. 이후에 진주정씨 가 들어와 살았고 광산이씨가 학천마을에 살다가 이 마을로 들어왔다. 현재는 진주정씨 10명, 광산이씨 4명, 여주이씨 2명, 황주병씨 2명, 중산안씨 1명, 전주이씨 2명, 영양천씨 1명, 하동정씨 1명, 기타 1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림 25> 광산김씨 묘와 상석
4) , 정흥도, 변영섭(1972), 정홍묵(1982), 이병삼(1994), 정재열(2000), 변 상섭(2002), 정석환(2010) 이장 순서로 역임했다. 5) 현재 마을 지도자 정석환 마을이장(52세), 양경순 부녀회장(56세), 이소진 새마을지도자(66세), 변 상섭 개발위원장(65세, 1946년생)이 활동하고 있다. 6) 직업현황 및 전답규모 모두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논은 약 11만평(550마지기)에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밭은 약 1만 5천평 정도로 땅콩, 복분자, 고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7) 전라북도 환경개선시범마을 지정 1991년에 전라북도 환경개선시범마을로 지정, 집집마다 500만원씩 보조를 받아서 지붕개량 및 집을 보수하고 마을진입로를 포장하고, 마을회관과 모정을 새로 지었다. 상하수도 또한 땅으로 복개하여 마을이 현재와 같이 깨끗하게 정돈되는 계기가 마련 되었다.
<그림 26> 마을진입로 입구에 세워진 환경개선시범마을 비
<그림 27> 마을회관
8) 중구날(음력 9월 9일) 마을 일꾼들과 농사일을 하루 쉬고 마을잔치를 하였는데 현재는 1년 중 하루를 정하여 마을잔치를 하거나 야외로 여행을 간다.
주신 분
변상섭(1946년생, 사내마을 주민) 정창진(1935년생, 사내마을 주민) 서양순(1933년생, 사내마을 주민) 성송면사무소
<그림 28> 변상섭
<그림 29> 정창진
『고창충의사』, 고창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2001. 『한국지명총람』, 한글학회, 2003.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편, 원광대학교.백제문화연구소, 2005. 『고창군지』, 고창군, 2009. 『모양성의 얼』, 고창학술문화연구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