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평리의 유래 및 고창문화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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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갑리 (고인돌과 쌍나발등의 마을) 1. 마을 구성과 위치 고창의 주산인 방장산 서쪽으로 5개 읍, 면 냇물이 합수하여 인천강을 이루 고 고성산( 태봉, 고수면과 아산면 경계에 위치) 한 자락이 서북으로 내려 감아 멈춘 이곳 아늑한 터에 큰 마을 형성되니 상갑리 갑평이다. 예로부터 고창 고을의 명지로 일도산 이갑평 삼독실이라 일컫는데 비산비야 전답이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하여 부촌으로 이름이 났 고 마을 앞 석치산 산성터는 삼국시대 유적이고, 그 아래 고인돌군은 세계문 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진 마을의 유래를 짐작 할 수 있다. 갑평리는 1895년 이전 대아면(大雅面)에 속한 하나의 리였으며 1914년 행정개편에 의하여 상갑리와 하갑리로 분리되고 상갑리(上甲里)는 고창군 대아면의 서당촌(書堂촌), 삭은재, 지리냉기의 각 일부를 합병하여 법 정리인 상갑리가 되었다. 법정리인 상갑리에는 자연취락으로 상갑([上甲 상 갑평(上甲坪)]과 서당촌(書堂村) 및 지리냉기[석치(石峙)] 등이 있다.

2. 마을의 명칭과 유래 갑평(甲:첫번째/坪:들판)이라는 이름은 ‘들판이 넓고 좋아 으뜸이 된다’는 뜻 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고창에서는 첫째가는 들판이라 할 수 있다. 또 한편 의 일설로서는 강순(淸溪公)의 중시조 강계용(博士公/고려원종 국자박사) 선 영이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甲山에 있어 甲자를 따와 甲坪이라 하였다고 도 한다. 갑평은 발음하기 어려워 갑평->개평->개패이로 흔히 부르고 있다. 갑평리에는 원래 진주 강씨는 살지 않고 조씨가 많이 살고 다른 성씨도 같 이 살았으나 1640년경 진주강씨가 정착하여 세거하면서 강씨 집성촌이 되었 다. 갑평리의 역사는 강순(청계공)이 입향 한 이후의 진주강씨의 역사라 해 도 과언이 아니다. 강순(청계공)은 참판공 강징(조선 중종조 예조참판)의 현 손으로 한양 장의동에서 사대부로 살아 왔으나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조정이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자 동지와 집안 가동 100 여 명을 데리고 참전키 위해 싸움터로 가던 중 청나라와 화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분함을 참지 못하여 삶의 의욕을 잃고 지내다가, 그 후 얼마 안 되 어서 청나라가 지배하는 세상(한양)에서는 살지 않겠다하고 정처 없이 남으


로 내려오다가 고창 고성산 아래 복죽리에 처음 정착하였으나 곧 인근의 갑 평리로 다시 자리를 바꾸었다. 강순은 갑평에 정착한 후 주자를 섬기고 세상 의 사치와 명리에는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충효를 실천한 선비로서 은거 하였다. 공은 청나라 오랑캐 세상에서는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 하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면서 스스로 청계일인이라 하였고, 후손들에게도 벼슬에 나가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청나라 연호를 쓰는 등 오랑캐를 섬기는 세 상에서는 과거에 나가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이다. 갑평이 수백년 이상의 유서 깊은 마을 이라는 것은 마을 입구에 있는 오래 된 느티나무를 보면 알수 있다. 장정 두 사람이 손을 잡아야 둘레를 안 을수 있다. 갑평리 들판 앞에는 B.C 5세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 돌의 수많은 유적들이 석치산 자락에 산재하고 있으며 또한 마을 앞 언덕너 머에는 마한시대와 백제시대의 작은 언덕같은 大墓가 여러 개 자리하고 있 다. 이는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풍요를 누리며 이곳에 살아온 땅이 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나 진주강씨 입향 이전의 삼한시대에는 고창의 모 로비리국의 중요한 거점 중의 하나 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며, 고려시대에는 갑향(甲鄕)1)이 있었는데 와음되어 갑평으로 불려왔다. 21세기 들어 갑평은 고창군의 문화유적과 교통의 요지가 되어 있다. 2천수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고인돌群과 마한시대의 부족장 묘 여러 기가 세계 적인 중요한 문화유적의 가치로 인정되어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또한 갑평리(상갑리, 하갑리, 서당리)는 아산면의 중심을 이루는 소재지이고 아울러 고창군의 중심으로서 고창읍, 선운사, 무장, 영광을 잇는 교통의 중심 이 되고 있다. 마을의 지명 굄바우(지석) : 똘치산 밑에 있는 고인돌. 똘치산(석치산, 성틀봉) 자락에 1)

갑은 음독하여 갓[邊]과 통하는 것으로 보고 갓마을[邊城-변두리마을]이라 하기도 하고, 갑을 대(大) 로 보고 '큰마을'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갑의 자전적 의미는 10간의 첫 글자로서 수(首)=시(始)=초(初)와 같 고, 차례와 등급의 첫째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어의를 그대로 살린 '첫째 마을' '첫마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향·소·부곡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양민과 달리 그 신분이 노비(奴婢)·천민에 유사한 특수한 열등계급이었다. 그 발생은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정복전쟁(征服戰爭)에 패배하였거나 투항 또는 귀순한 집단지, 촌락 본래의 형태인 공동체의 보존과 사회계층의 분화에 따른 예속관계와의 대립·모순, 또는 반역죄인의 집단적 유배지, 귀 화인의 집단부락, 기타 특수한 생산노비의 집단거주 등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회발전에 따른 공 동체의 통합과 붕괴, 계급분화에서 야기된 것으로 이해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조선 전기에는 13 개의 향·소·부곡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그 이전에 있던 것으로 파악된 것은 향 138, 소 241, 부곡 406 등 모 두 785개가 있던 것으로 전한다. 향·부곡은 대체로 같은 것으로 보이며 농업생산에 치중하였으나, 소는 수공 업 생산을 담당하였다. [출처] 향·소·부곡 [鄕所部曲 ] 네이버 백과사전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 군집지가 있다 똘치산(석치) : 지리냉기에 있는 산. 사근재(士隱齊) : 상갑리에 있는 고개. 고개밑에 있는 마을이름이다 석치(石峯) : 똘치산이라 부르는 산. 산 정상은 성틀봉이라 한다 석치는 또한 지리냉기로 불리는 고개를 뜻하기도 한다 지리냉기(석치) : 상갑리 앞들판에서 하갑리 독골로 질러가는 고개. 쌍나발등 : 상갑리 마을앞 작은 언덕너머 200 걸음 앞에 있는 작은 야산 2개. 예부터 왕들의 무덤이라 전해왔으며 2009년 원광대문화재발굴연구소가 발굴하여 금제 신발등 수십점의 마한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마한시대의 이지방 부족국가 (모로비리국) 우두머리의 가족묘로 추정되고 있다

3. 서당리의 명칭과 유래 서당촌은 원래 갑평의 작은똠 이라고 불렸다. 1780년 경 강근(姜槿/만회당) 은 이곳에 서당을 열어 훈학을 하였는데 그의 높은 학식과 경륜이 인근에 알려지게 되어 그에게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으며 문하생 중에는 이곳으로 이사 온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참의 정재룡, 참판 정성일도 그의 문하생이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마을 이름을 서당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1990년에 상갑리에서 분리되어 “서당리”라 칭하게 되었다.

4. 고인돌과 쌍나발등의 상갑리 ( 작시 : 강희석 ) 청동기시대 수많은 집채만한 고인돌 마을 마한시대 모로비리국 백제시대 모량부리현 통일신라 때 고창현 보리마을 모양현 지금은 고창군 아산면 상갑리 마을 등허리를 작은 언덕이 휘감아 북풍을 막고 앞마을 서당촌 잔등 사이에 기다란 논을 펴고 있네 마을 등허리를 왼쪽으로 돌아가면


널따란 들판 이천년 전부터 고창땅에서 첫째가는 갑평 들판 이천년 전엔 모로비리국 일꾼이 천오백년 전엔 모량부리현 일꾼이 천이백년 전엔 모양현 보리마을 일꾼이 물대고 김메고 나락 거두었지 모로비리국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저 들판 너머 인천강가 똘치산 자락에 집채만한 크나큰 돌밑에 장사 지내고 몇 백년 동안이나 아주 많은 가족들을 장사 지내고 세계에서도 가장 많이 돌무덤을 만들었다네 상갑리 앞 잔등 너머 이백걸음 나아가면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설같은 왕들의 무덤 작은 야산인가 언덕인가 두 개의 쌍나발등 우리는 이제야 보았네 모로비리국의 우두머리 금동신발 두켤레 청동죽엽형 장식, 귀걸이, 곡옥, 큰칼, 칠기 화살통, 은제 탁잔 이천년전 신지 읍차의 부귀 영화 쌍나발등 땅속 깊이 이천년이나 살아 남은 생생한 부귀 영화 우리는 이제야 알았네 이천년전 이곳에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집 덩어리만한 큰 돌덩이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강가에 나란히 고인돌 무덤을 만들면서 쌍나발등에는 왕 가족을 모시고 많고 많은 사람들이 곡식을 거두어서 휘황찬란 노래하며 별천지 이룬 것을


집 덩어리 같은 바위 굴려 무덤 만들고 강가에서 고기 잡고 들판에서 곡식 거두고 왕의 무덤을 둘러싸고 노래하면서 천년 만년 영화를 누리려 했던 그 힘센 역발산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모로비리국 마한땅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이천년 지나 오늘 우리는 집채 덩어리 바위 굴리던 역발산의 힘 잠자리 날개 같은 금동신발 만들던 손재주 누구에게 내려왔나 하늘속에 사라졌나 아 그날로 돌아가고픈 고창군 아산면 상갑리 사람들

5. 마을의 인물과 행적 강순(姜 恂/1607-1674 ) 호는 청계 또는 청계일인, 강징(姜澂/중종조 예조 참판)의 현손으로 선비로서 서울 장의동에 살아 왔으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 갇혀 조정이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자 동지와 가동 100여명으로 근왕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가던중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는 소 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지내다가 끝내는 통분함을 참을수 없어 오랑캐 세상 에서는 살지 않겠다 하고 남으로 정처 없이 내려와 정착하니 그곳이 고창 갑평이다. 죽림7현을 흠모하고 오직 주자를 섬기며 인근 주민 순화를 위하여 힘썼다. 오랑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 하고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면서 스스로 청계일인(淸溪逸人)이라 하시고 자손들에게 도 오랑캐가 지배하는 세상 에서는 결코 벼슬에 나가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 셨다. 강순(청계공)은 고창군 아산면 갑평리 진주강씨의 입향조이시다. 강창영(姜昌永/1889-1979) 자는 成淑이며 호는 위은. 渭隱은 대대로 전해오 는 문한가에서 태어났고 이웃 마을의 석학 농와 김상준의 문하에서 수업했 다. 일찍이 일제의 통치에 한스러워 세상과 교섭을 끊고 시문에만 정진하였 다. 을유년 광복을 맞아 면민의 추대로 독립촉성회에 참여하여 면의 책임을 맡았고 금융조합장과 면장 등에 피임되어 진실과 검소로 봉직하였으며 재직 당시 한발이 심하여 전곡이 고사하게 되자 면민과 목욕재계하고 기우제를 지내니 그날 밤에 비가 내려 지금까지 칭송한다. 한국동란이 끝나자 면민의


추천으로 구국연맹위원장이 되어 많은 인명을 구제했다. 그는 만년에 아산중학교를 세울 때 4300평의 대지를 기증하는 등 후진교육 에도 진력하며 향민의 귀감이 되었다. 1979년 향제에서 고종하니 향년 91세 이고 유고가 <篤谷世蹟>에 합철 간행되었다 강호영(姜浩永/1890-1965) 자는 直卿, 호는 克齋. 극재는 국운이 기울어 가 는 시대에 출생하였고 국파 민산의 암울한 세상에서 성장했다. 노사와 송사 의 학통을 이은 부친 節庵公과 백형 泰永 밑에서 가학을 이어받아 경전과 사서에 통하였고 인근의 명유 석학들인 오암 조석일, 흠재 조덕승, 미산 변 종혁, 보정 김정희 등과 교유하며 경전을 강론하여 학문이 진취하였다. 27세 때부터 한시를 지었으며 저서로 克齋遺稿 (2권1책)가 있다. 그의 유고 에 한시가 750여수 문장이 70여편 수록되어 있다 강계흠(姜桂欽/1904-1989 ) 자는 隱招이며 호는 槿谷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향학에 탁월하고 부모와 어른을 모시는데 스스로 알아서 행해 나가니 서당 선생이 장차 크게 될 사람이라 칭찬하였다. 가정에서는 부모님 병환에 대소 변을 받아내고 손수 수발하며 지극한 효성을 다하고, 문중에서는 규약을 제 정하고 선산을 마련하고 재실을 건립하는데 앞장서 문중 대소사를 주관하시 면서 문중의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공은 일찍이 신학문에도 뜻을 두고 1922년 도일하여, 일본에서 학비를 마련하여 수학할 생각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년여 동안 문물의 발전등 세상의 변화를 목격하고 귀국 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전에 무사히 귀국하니 하늘의 도움이라 생각하였다. 1934년 아산면장에 취임하여 7년을 봉직하고 광복 다음해에는 면민의 추천으로 아산면 농회장 직을 맡아 근대 국가의 기초 기관인 면의 행정과 금융의 기초를 놓는데 헌신하였다. 노년에는 고창 향교 전교직을 맡아 성현들을 모시는 절차와 주민들의 미풍양속을 유지시켜 나가는데 혼신의 정성을 다하고 병오년에는 고창 유도회 지부장 직을 맡아 향민들의 화합을 다지는데 힘썼다. 공은 “아무리 재산을 많이 불려 물려 준다 해도 자손들에게 글 한자라도 더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는 가훈을 남겨 후손들 에게 항상 학행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다. 강동영(姜東永/1904-1957) 호는 訥圃이다. 공은 가정이 궁하여 서당에 입학 을 못했으나 학동들의 글읽는 소리를 듣고 곧 암송하여 문사가 일취월장 하 다가

촌후 동산에 설립한 학당에 입학하여 2년 되든해에 학당이 폐하매


신학에 정진할 목적으로 여비를 마련 도일하여, 서점에 취직되어 법률서적을 탐독하며 법률상식을 넓혔다. 1935년 사법서사시에 합격하여 대서를 하면서 도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에겐 무료로 일해주니 칭송이 자자했다. 1939년

왜정 말에 강문에 큰 송사가 있었다. 문재를 조성하기위해 선산 임야 79정의 임목을 법에 어두운 유사가 매도계약을 모호하게 하여 종중재산이 파정나게 될 지경이었다. 공이 이를 알고 서둘러 종규를 제정하고 소송을 제 기할 세 상대는 도 평의원에다가 부호이고 세도가여서 소를 진행하다가는 문중만 망한다고 하여 종인이 만류하였으나 공이 자수로 진술서를 작성하여 대구고법에까지 항소하여 마침내 승소하니 공의 강인한 의지에 일향이

두 감탄했다. 광복직후 독립촉성회 군 지부장을 역임했고 1946년 초대 민천 면장으로 추대되어 행정질서를 확립했으며 한국전쟁이 끝나자 구국연맹에 참여하여 많은 인명을 구제했다.

강수원(姜壽元/1916 ~ 2003 )호는 늘봄, 1939년3월 도일하여 고학으로 전 수대학을 1941년12월 졸업. 1940년 11월 조선대학동아연맹에 가입하여 항 일사상을 고취하다가 다시 비밀그룹인 우리들이라는 조직체를 구성하고 독 립운동을 하였다. 1943년 6월에 체포되어 1년이상 미결수로 모진 고문을 당 하면서 예심 끝에 1944년 10월 6일 산구 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해방이 후 익산 남성고등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정부에서 는 197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강인섭(1936년 -현재) : 시인, 언론인(동아일보 기자), 정치가(대통령 정무수 석, 14대/16대 국회의원) 그는 청년시절에 시인이 되었으며 1958년 22세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산록”으로 문단에 등단하고 “녹슨경의선” 등 통일 을 염원하는 시를 주축으로 하는 4권의 작품집을 내었다. 23세에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하여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등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동아일보 논설주간 으로 언론인 생활을 마감했다. 언론계에서 은퇴 후 정계 에 진출 1997년 대통령 정무수석을 역임하고, 14대/16대 국회의원으로서 8 년간 국가에 봉직했다


6. 마을의 문화 유적과 유산 상갑리 유물산포지 : 아산면 상갑리 565-5번지. 상갑마을의 남측이며 아산 농공단지의 동남측에 위치한다. 구릉은 해발 52m로 정상부에 도로가 지나고 있다. 구릉은 대체로 평탄한 편이지만 삭평이 심하게 이루어졌다. 정상부는 일부 송림과 진주강씨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수습된 유물은 개배편, 경질토 기편,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이다. 이 지역의 출토유물은 삼국시대 것으로 추 정된다. 고인돌군 : 아산면 상갑리 산 1-1번지. 상갑리의 지석은 1994년 12월 21일 사적 제391호로 지정이 되었다. 또한 200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유적은 석치동마을 뒤편에 위치하여 지석묘군 앞으로는 고창천 이 흐른다. 성틀봉 남쪽 사면의 등고선 방향을 따라 해발 20~52m 사이에 총 181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상석의 규모는 155~481cm, 단축길이 는 120~348cm, 두께 43~208cm 내외이다. 상석의 평면형태는 방형, 장방 형, 제형, 삼각형, 타원형 등이다. 장축은 등고선 방향과 직교하거나 일치하 는 것으로 구분된다. 상갑리 고인돌군(1지구) 상갑리 고인돌군은 석치동마을 바로 뒤편에 위치하며 고인돌군 앞으로 고창 천이 흐르고 있다. 성틀봉의 남쪽 사면에 등고선 방향을 따라 해발고도 2 0~52m 사이에서 분포하고 있다. 상갑리고인돌군(1지구)은 기존 조사에서 4 개군으로 나누어 총 181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었다. 남방식과 함께 3~4기의 북방식 고인돌이 섞여 있는데 이들은 남쪽에 위치한 북방식으로서 학술적으 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군 : 1군은 석치동마을 바로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죽림리 고인돌군 중 가장 서쪽에 있다. 모두 42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었다. 1101호 : 개석식이며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46cm, 너비 190cm, 두께 165cm의 긴 네모꼴이다. 지정된 고인돌군이 시작되는 첫 번째 고인돌임에 도 불구하고 풀과 나뭇가지에 가려져 찾기가 힘들었다. 고인돌군의 구역을 확실하게 구획해 두어 시작점과 도착점을 알기 쉽도록 정비하는 것이 좋겠 다. 1109호 : 바둑판식이며 일부가 노출된 묘실의 규모는 길이 172cm, 너비 90cm,


노출된 깊이는 32cm이다. 굄돌이나 뚜껑돌은 없고 벽석 위에 바로 덮개돌이 놓여 있다. 동벽은 일부 작은 할석이 보이고 길이 44cm, 너비 42cm 정도의 찬석형의 석재가 놓여 있으나 덮개돌을 지탱하고 있지는 않다. 서벽은 길이 34cm, 너비 30cm 정도의 석재 1매로 구성되어 있다. 북벽은 동쪽 부분만 노출되어 있 는데 길이 34cm, 너비 18cm 정도의 석재 1매를 세우고 20cm 규모의 할석 을 3~4단 쌓았다. 남벽은 동쪽 부분이 유실되어 없고 길이 84cm, 너비 32cm 판석 1매를 사용하였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84cm, 너비 144cm, 두께 118cm인 긴 네모꼴이며 바닥은 완전히 노출되지 않아 알 수 없었다. 덮개돌의 윗면이 평평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있도록 한 것이 의도적으로 한 행위인 지 좀더 다른 자료들과 비교 분석해보아야 한다. 1120호 : 개석식이며 일부가 노출된 묘실의 규모는 길이 122cm, 너비 58cm, 깊이 40cm이다. 굄돌이나 뚜껑돌은 없고 벽석 위에 바로 덮개돌이 놓여 있다. 동벽은 길이 44cm, 너비 34cm의 판석 1매를 사용하였고 서벽은 길이 38cm, 너비 32cm 판석 1매가 노출되어 있으며 북벽은 판석과 할석이 놓여 있다. 남벽은 판석 1매가 남아 있고 유실되었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06cm, 너비 162cm, 두께 174cm의 긴 네모꼴이다. 이 고인돌 역시 덮개돌 에 평평한 면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2군 : 2군은 1군에서 동쪽으로 17m정도 떨어져 위치하고 있으며 총 43기의 고인돌 이 보고되었다. 1217호 : 바둑판식이며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450cm, 너비 404cm, 두께 278cm의 사다리꼴이다. 덮개돌의 긴 길이 측면은 비교적 정연하게 다듬어 져 있으나 너비 측면은 정연하지 못하다. 5개의 굄돌이 덮개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굄돌은 1m정도 규모를 가진 대형이다. 2군에서 가장 큰 덮개돌을 갖 고 있다. 1231호 : 바둑판식이며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87cm, 너비 224cm, 두께 144cm의 부정형으로 굄돌은 1개가 보이고 덮개돌에 다듬어진 흔적이 보인 다. 1234호 : 개석식이며 묘실 위에 덮개돌이 올려져 있다. 남벽은 유실되었고 동ㆍ서ㆍ북벽은 판석 1매씩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출된 묘실의 규모는 길이 53cm, 너비는 단벽석으로 60cm로 추정된다. 굄돌은 2매가 노출되어 있고 형태는 기둥 모양이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184cm, 너비 224cm, 두께 64cm의 사다리 꼴이다. 덮개돌의 평평한 면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3군 : 3군은 2군에서 동쪽으로 13m정도 떨어져 위치하고 있으며 총 49기 고인돌 이 보고되었다. 1340호 : 개석식으로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46cm, 너비 87cm, 두께 42cm인 사다리꼴이다. 길이가 너비보다 현저히 긴 형태로 보아 선돌일 가능 성이 있으며 이것이 넘어지면서 현재의 상태로 된 것이 아닌가 해석된다. 4군 : 4군은 1347호에서 동쪽으로 18m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 며 총 47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었다. 고인돌의 배치는 덮개돌의 길이 방향을 따라 2열로 놓여 있으며 주변의 고인돌 일부는 산만하게 되어 있다. 상갑리 고인돌은 산허리의 등고선을 따라 몇 개의 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의도 적으로 배열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배치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 지 앞으로 고인돌 연구에 한 과제로 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덮개돌은 너비 에 비해 두께가 두꺼운 것이 많고, 정교하게 손질한 돌을 사용하기보다는 바윗덩 어리 같은 느낌의 덮개돌을 그대로 올려 놓은 것이 많았으며, 암질 또한 좋은 암 질이 아니다. 이는 이 주변에서 이미 조사된 23곳의 채석장과 덮개돌과의 비교연구 를 통해 관계를 밝혀내어야 할 과제이다. 채석장 : 고인돌유적의 덮개돌 원산지 연구는 당시 사회복원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데, 상갑리 고인돌군과 죽림리 고인돌군이 위치하고 있는 성 틀봉과 중봉의 채석장은 전주대학교 박물관팀의 조사연구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 다. 총 23개소로 가군(성틀봉쪽)과 나군(중봉쪽)으로 구분한 뒤 각각 15개소, 8개 소로 나누고 계곡이나 능선을 경계로 하여 6개 군락으로 나누어 조사하였다. 채석장이 위치하는 지점의 해발고도는 가군의 경우 해발고도 60~115m 사 이이고 나군은70~130m 사이이다. 채석장의 면적은 가군 50~2,500㎡사이, 나군 150~1,200㎡사이이다. 채석지는 채석이 용이한 지역을 선택하여 산의 능선 방향을 따라 이동되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채석장의 암질은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화산암에 대비되는 안산암질응회암, 데사이트질응회암, 안산반암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창 고인돌유적 은 산기슭에 위치하면서 산의 능선 방향으로 열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주 로 성틀봉과 중봉의 남쪽 사면부에 입지하고 있으며, 등고선 방향으로 2~3 열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유적의 주변에 위치한 고창천의 방향과 같다고 할 수 있지만, 하천의 방향과 직교하는 것도 있어 이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하천의

고인돌은 해발고도 20~65m 사

이에 분포하며, 해발고도 25m정도에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다.


서산산성 : 1990년에 서산성(西山城)의 실측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 백제시대 기와, 토기 파편이 출토되었고,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윗 단 건물 터는 길이 120m, 최대폭 12m, 하단의 건물 터는 길이 75m, 최대 폭 12m 에 이르렀다. 이러한 규모는 지금 보더라도 대단한 규모이고, 당시로 보아서 는 매우 큰 성이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마한시대 고분 유적 : 아산면 상갑리 山 8번지. 예부터 갑평리 앞 언덕너머 에 “쌍나발등”이라 불리는 언덕이 4개 연이어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옛날 왕족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왔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일부는 상갑 리에, 일부는 봉덕리에 속해 있다. 이 고분에서는 국내에서 출토된 것 가운 데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한 금동신발과 칠기로 만든 화살통, 그리고 중국제 청자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됐다. 고분은 한성 백제기의 마한문화 전통을 가 진 분구라 한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봉덕리 1호분은 방대형(方臺形)으로 길이 72m, 너비 50m, 높이 7m 정도로 그 규모가 커서 작은 야산으로 보일 정도이다. 이 분구묘는 구릉의 말단부를 장방형 형태로 다듬은 후 그 위에 성토하여 분구를 조성하고, 상부에는 석실분 5기와 옹관묘 2기를 안치하고 있다. 이번에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석실분은 4호분으로 다른 석실분이 횡혈 식인 것과는 달리 수혈식으로 분구의 동남편에 치우쳐 자리하고 있다. 4호 석실 내부 유물의 배치상태를 보면 시신이 안치되었을 중앙에는 머리 부분 에서 청동제 대나무잎 모양의 장식(竹葉形頭飾)이, 머리와 가슴부분에서 귀 걸이(耳飾) 2쌍과 곡옥 2점을 비롯한 다량의 옥이 발견되어 합장이 이루어 졌다. 팔 부분에서는 칠기로 만든 화살통, 대도(大刀) 2점과 손칼(刀子)이 놓 여 져 있었는데, 대도 1점은 칼자루와 칼집이, 손칼은 손잡이가 완전한 상태 로 발견됐다. 한편 금동제 신발은 발치 쪽에서 약간 비스듬이 뉘어진 상태로 발견 우측신발 내부에서는 뼈가 남아 있었고, 좌측에서는 직물류 흔적이 발 견됐다. 중국제 청자와 호는 동남 모서리에 나란히 놓여져 있었고, 남벽 중 앙에는 국내 최초로 발견된 소호장식유공광구호가 기대에 올려 진 채 발견 그 밑에서 은제 탁잔이 출토됐다. 그리고 북벽에는 성시구와 등자를 비롯한 마구류와 철제 무기류가 놓여져 있었다. 발치쪽 서편의 단벽에서는 개배 18 점이 발견됐다. 금동제 신발은 목부분과 측판 2매, 바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작은 못으로 결합하였고 측판과 바닥에는 빈틈없이 투조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에는 18개의 스파이크 모양의 징을 부착했는데 부착지점에는 6엽 의 화판이 장식되어 있다. 특히 바닥 중앙에는 1마리의 용을 배치하였고, 발


뒤꿈치 부분에는 고구려(장천 1호분)고분벽화나 무령왕릉 과대 장식에 보이 는 역사상(力士像)이 투조되어 있다. 또한 여백의 공간에도 봉황이나 그 밖 의 길상조(吉祥鳥)가 투조로 장식되어 있다. 소호장식유공광구호는 일본 고 분시대의 토기인 스에끼(須惠器)에서는 장식호(子持壺)라 불리는데 금번 고 창에서 출토된 것은 이들 토기의 원류로서 한일 고대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고분의 구조나 4호에 서 출토된 남조대의 청자연대를 참고하면 5세기 초엽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봉덕리 1호분 주변에는 마한 분구묘 계통의 분묘가 밀집되어 있는 곳 으로 마한의 중심지로 지목할 수 있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을 통해 볼 때,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한 정치세력이 유지되고 있 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창지역에서 고인돌 문화이후 마한문화의 단면 을 새롭게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백제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를 조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청계정사(淸溪精舍) : 참판공 강징의 4대손으로 한양에서 사대부로 살아 온 청계공 강순(姜恂)이 청나라에 대항 의병한후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통분 함을 참을수 없어 청나라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살지 않겠다 하고 정처 없 이 남하하여 고창땅에 정착하니 이곳이 갑평이다. 공은 인근 雲谷 산수를 사 랑하였는데 雲谷이 우연히 朱子의 사는곳(雲谷精舍)과 같아 이곳에 정자를 짓고 朱子 遺像을 받들어 朔望으로 참배하며 경모하고 후진 계도에 주력 하 셨다. 서리 이슬 내려 오랜 세월에 흔적이 묘연하고 공의 은거하던 곳이 생 각나 후손들이 운곡에 있던 이 정자를 갑평리에 다시 지었으니 그 이름 청 계정사다 ( 1935년). 운곡에다 짓지 않고 갑평에다 지은 것은 자손이 오래 세거하기 위해서다. 마침내 웅장한 기와집이 완공되니 학자는 “고성봉 높아 있고 인천강 출렁거렸네” 라고 노래하며 주자가 머물던 “무이산 한류의 맑 음이 여기에 있음이다“ 라고 영탄하였다. 상갑리보호수 : 상갑리 마을 입구에 있는 400년 이상 된 늙은 느티나무로 장정 두 사람이 손을 잡아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오랜 역사에 여러 곳이 부러지고 가지가 죽으니 흙을 바르는 등 다시 살리기 위한 노력을 쏟 고 있다. 군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姜隨欽 사시(私諡) ; 강수흠(慎齋公/1859-1885 )은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의 병환에 수년간 친히 약을 달이고 매일 속옷과 변기를 몸소 깨끗이


하였으며 대변이 불통함에 대롱으로 빨기 3삭을 하루같이 하였다. 위독해서 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9일간 목숨을 연장시켰으며 喪을 당해서는 너무 슬 퍼하다가 뼈만 남았다. 지극한 효성으로 몸이 쇠하여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효행이 郡誌와 道誌 三綱錄에 기록되고 향교 서

원에서 나라에 천거하여 “孝安“ 이란 사시를 받았다. 箕山書院에 배향하였 다. (참고) 여러 향교의 추천장과 나라에서 내린 사시 사진

강헌(姜櫶) 配(배) 烈婦 진주 蘇氏 정려각 (열녀비 전문) : 사람이 세상을 사람답게 살아 가는데 가장 훌륭한 일은 忠과 孝와 烈이라 보았다. 그러하기에 예전에는 이러한 생활이 뚜렷하여 풍속과 교화에 도움이 될만하면 고을에서 천거(薦擧)하고 나라에서 정표(旌表)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드는 열부蘇氏는 그러한 분이다. 蘇열부는 조선왕조 영조42 년(1766) 5월11일 무장에서 출생하여 18세때 (1783) 고창 갑평 姜櫶 의 繼配로 건질을 받드니 구고(舅姑) 다 세상 떠나고 자녀 없는 雅堂 29세 때였다. 그 뒤 3년 되던 丙午(1786) 동짓달 남편이 병석에 누우 니 宿症이라 回蘇의 길이 막연하여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하늘에 빌 어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기를 울면서 호소했고 음식을 폐하고 扶護에 전념하니 人肉을 써야 살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몰래 허벅지 살을 베어 그 피를 닭고기에 섞어 끓여 드리니 효험이 있기에 두 번 세 번을 거 듭 했어도 몰랐다가 신음하는 소리 피흘린 흔적 때문에 알려지게 되었 다. 그 때 수많은 까막 까치들이 집 주위에 와 지저귀니 처음에는 不 吉을 알리려고 그러는줄 알았더니 병세가 호전되자 烈行에 감동하여 그리 한 것을 알았다. 烈을 천거 찬양한 글에 하늘도 감응하고 微物도 祥瑞 드리었네 했고 옛적엔 충신 介子推가 그 임금을 위해 허벅살을 베었고 지금엔 蘇열부 가 그 남편을 위해 배었네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洞薦 鄕薦에 이어 여러 고을에서 연합천거하고 그 다음에 丁未(1787) 6월 세금과 부역 을 면제하는 給復의 특전을 받았으며 그 뒤 戊午(1798) 11월 1일에 33세로 세상을 떠나니 10여년이 지나 순조 辛未(1811) 旌閭가 내려졌


다. 소생은 3남인데 承煥 渭煥 倫煥이요 묘는 서당촌 坤坐 夫墓에 祔 左 되었다. 열부의 貫鄕은 진주이고 香亭沿의 玄孫 希轍의 七世孫 廷 相의 딸인데 祖는 德雄 曾祖는 敏天 이다. 外祖는 光山 金尙秋다 이는 강씨 족보 및 고창읍誌 鄕校誌 烈夫條에 전해 온다. 아당은 진주 강씨 淸溪(諱 恂)의 5세 손으로 영조31년 乙亥(1755)에 출생하여 정조21년 丁巳(1797)에 4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자는 士章 雅堂은 號이며, 글 잘하여 많은 후진을 길러내고 형수의 旌閭에도 힘쓴 晩悔 堂 槿의 伯氏다. 考는 단園 염이오 妣는 행주 奇鳳相의 딸이며 祖는 黙軒 復一 曾祖는 省一齋 再文이다. 初配는 영광에 살았다. 고흥 유씨 王子師傅 龜山의 후손 錫龜의 딸이요 祖는 東起 曾祖는 公翼 外祖는 茂松 尹惟稭다. 부부 동갑인데 자녀없이 26세로 세상 떠났다. 族 曾孫 冏欽이 지은 墓表가 있다.

지난번 진산세적을 增補할 때 열부 蘇氏를

수록한 일이 인연이 되었던지 열부 5세손 순원 주원 종형제가 관계문 건을 가지고와 비문을 청하니 막연하다. 사양할수 없기에 여러 족보를 더듬어 이를 밝혀 적고 가사 지어 읊어 본다. 여기 드는 소열부는 여 훈이며 열녀전을 대강 배워 알고 나서 갑평강씨 문중 종부되어 들어와 서 봉제사와 접빈객에게 정성들여 살아갔고 상봉하솔 내외 친척 화목 으로 감싸 주네. 시집 온지 3년만에 사내아이 얻었으나 남편 병석 눕 게되니 눈앞 하늘 캄캄했네. 목욕재계 축천기도 눈물흘려 호소하고 人肉써야 낫는다는 말 듣고 난 뒤 어떠했나. 허벅살을 칼로 베어 흐른 피를 받아 내어 닭과 함께 끓여 냈네. 이 약 들고 효험 보자 두 번 세 번 이었네. 이 무렵 까막 까치

떼를 지어 모여 들어 辟邪進慶

알리었네. 남모르게 하였어도 신음소리 피자국이 알려지게 되었다네. 洞薦 鄕薦 이어지며 여러고을 호응하고 연합하여 薦揚하니 巡營에도 알려지고 給復 恩典 내려지며 세상떠난 십여년뒤 旌閭之典 내려졌네. 藍浦 烏石 곱게 갈아 이를 새겨 遺傳 하리. (註) 介子推의 벰 -- 介子推의 고사 춘추시대 晉나라에 개자추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일찍이 진 文公이 왕위 계 승전으로 아버지 獻公에게 추방당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며 19년간 유랑하던 어느날 기진맥진하여 아사 직전에 빠졌다. 그 때 개자추는 허벅지 살을 베어


탕을 끓여 봉양하니 회복하여 원기를 되찾았다. 문공이 位에 오른 다음 수행 한 대부분이 녹을 받았으나 그에게는 녹상이 없었다. 개자추는 신하들이 논공행상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는 것을 보고 탐천지공을 다투는 것은 도 둑질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면산에 숨어 버렸다. 문공이 뒤늦 게 그 사실을 알고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산에 불을 놓아 그를 나오게 했으나 나오지 않고 끝내 타죽었다. 후에 그가 죽은 날을 한식일 이라 하여 불을 지피지 않고 그의 덕을 추모하였다. 한식은 개자추의 혼령 을 위로하는 날로 이날은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참고) 향교 및 유림의 추천장 및 나라에서 내린 정려장 마을의 시설 아산치안센터 : 아산면 상갑리 355-2번지. 1914년 3월 5일 주재소가 설치 되었으며, 2004년 10월 28일 현 위치에 개축하였다. 아산우체국

아산면 상갑리

:

585-930

아산보건지소 인천강지킴이

: :

이다.

336 1962

아산면 상갑리 아산면 상갑리

번지. 전화는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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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562-5002

일 개국하였다.

번지.

340-13

번지. 아산면의 사회단체로 인천강을 지키

는 단체임. 아산 소방서

:

선운산 농협 아산지소

이며, 우편번호는

:

참고자료 도움을 주신 분 강형희 (1932년 상갑리 출생, 전 진주강씨 청계공파 종회 회장 ) 강헌희 (1950년 상갑리 출생, 대성중학교장) 강희석 (1950년 상갑리 출생, 미당 서정주 문학관 해설사 ) 참고문헌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 1971.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한글학회, 1981. 『한국의 풍수』명문당, 村山智順저, 정현우역, 1996. 『한국의 자생풍수2』민음사, 최창조저, 1997.

http://www.dailian.co.kr/news http://100.naver.com/100.n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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