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실개천이 아름다운 마을 -
주형(行舟形)이라 한다. 이 지역이 행주형이기 때문에 배에 많은 것을 싣지 못하기 때문에 인근에 창고를 만든 것이다. 월계마을은 비가 조금만 와도 늘 물이 마을을
장두리 월계-
범람하여 기옥과 도로가 유실되었다. 1973년도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의 지원 김영춘, 이병열
을 받아 하천의 제방을 석축으로 완성하여 정비하였다. 그래서 월계마을이 전북에서 첫 번째로 새마을사업을 하게 된 것이다. 마을 앞에는 마을의 수구막이인 3백년이
1.
된 왕버들이 있다. <그림 3. 월계마을 유래비>
위치와 유래
고수면 장두리는 국도 23번를 따라 고창읍에서 고수면소재지를 지나 있는 마을이다. 장두리는 동쪽으로 부곡리, 서쪽으로 인성리, 남쪽으로 사내리와 초내리, 북쪽으로 남산리와 접하고 있다. 장두리는 1895년(고종 32년) 이후, 수곡면(水谷面)의 월계리
月溪마을 由來碑 청량산이 뻗어내려 증산봉을 일으키고 낮으막한 산등으로 반달처럼 감아돌아 남향으로 아늑한터 月溪마을 이름함은 청량골의 맑은냇물 마을앞을 흘러선가
(月溪里), 오산리(五山里), 장두리(長斗里)로 분화되어 있었다. 그 후 1914년 4월 1
밀양박씨 신곡살다 이곳에다 터를닦고 광산김씨 溪菴處士 子孫計를 도모하여
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오산리(五山里)·월계리(月溪里)·신월리(新月里) 일
두姓씨가 繁衍하여 삼백여년 世居하고 여러성씨 뒤를따라 오순도순 살아왔네
부와 무장군(茂長郡) 성송면(星松面) 사내리(沙乃里) 일부가 병합되어 장두리가 되
땅심깊고 물길좋아 농사짓기 편한이곳 하천둑이 부실하여 홍수염려 있었는데
었고, 고수면에 편입되었다. 장두리는 고수면 서남부에 있다. 2010년 3월 현재 면적
새마을의 사업벌여 석축쌓아 튼실하여 水旱에도 所得높아 앞서가는 마을되니 주변경계 돌아보면 수구막이 왕버들은 三百年輪 자랑하여 보호수로 지정되고
은 2.18㎢이다. 경지 면적은 1.52㎢로 밭 0.76㎢, 논 0.76㎢, 임야 0.26㎢ 등으로 되
개울건너 豊樂亭은 여름에는 피서하고 가을이면 풍년즐겨 격양가를 불렀다네
어 있다. 장두리는 법정리이고, 장두리·오산리·월계리 등은 행정리이며, 운월은 월계
주민또한 순량하여 里仁으로 일러오고 勤儉으로 作農하여 삶의질을 높였으며
리의 자연촌락이다.
단한가지 바라는건 마을회관 중건하기 정부지원 삼천에다 출향인사 성금내고 지역주민 동참하여 오천만금 조성하여 화려하고 내실있게 삼간양옥 일으키니
1) 월계(月溪) : 월계마을은 옛날 수곡면에 속해 있던 마을이었다. 이 마을 앞 하천
우리마을 경사로움 보다더함 있으리요 고마운뜻 돌에담아 길이보람 알게한다
물이 달에 비치면 그 모양이 아름다워 “월계”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월계마을은
西紀二千九年 十 月 日
1700년대 밀양박씨들인 양오(楊梧) 서봉(瑞鳳)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하여 무
成均館典儀 光山 金宗鉉 짓고 大字 씀
안 등지에서 입향하여 은적(隱蹟)하여 살았다. 양오공의 후손들이 월계의 동편의 신 곡(新谷)에 터를 잡아 사는데 그 터가 도둑이 자주난다는 풍수설에 따라 1700년대
2) 운월(雲月) : 운월마을은 장두리 월계의 바로 옆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에 월계로 옮겨 마을터를 잡아 세거했다. 이후 광산김씨 계암처사(溪菴處士) 희길
은 행정리인 월계리에 속한 마을이다. 마을 뒤로 흐르는 산맥의 풍수형국이 운중반
(熹吉)이 해리면 왕촌에서 1790년에 이곳으로 이주하여 후손들이 번창하였다. 이후
월(雲中半月)형국이라고 유래되고 있다. 운중반월 형국은 구름 속에 반달을 드리운
월계는 박김(朴金)의 양(兩)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다가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형으로, 달은 새로 시작하는 초승달로 희망을 상징한다.
세거를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계마을 입구 23번 국도변은 먹거리로 불렸다. 인근의 묵점(墨店, 일제강점기에는 墨洞)은 묵을 생산하던 곳이라 하여 그리 불렸고,
3) 장두(長斗) : 장두마을은 원래 수곡마을에 속해있던 마을이며, 풍수적 형국은 노
내창(乃倉)은 먹을 생산하여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청계는 먹을 생산하기
루형국이다. 마을의 명칭은 章頭-章斗-長斗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章頭라
위해 나무를 공급하던 곳이었다. 월계는 바로 먹점에서 생산하던 먹을 길거리에 걸
는 한자의 지명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광산인 김상대가 성동면
어서 팔던 곳이라 하여 ‘먹거리’라고도 불렸다. 월계에서 청계까지는 풍수적으로 행
사내에서 수곡면 장두로 입향한 1835년 전후의 광산김씨 김상대의 호적단자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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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또한 김상대의 아들 김기두(金箕斗)의 77세(1907년) 호적단자에도 章頭
고 있다. 장두리로 발달한 산계(山系)는 장두마을로 발달한 것과 월계-운월-오산마
라는 한자가 쓰이고 있었다. 따라서 章頭라는 한자의 지명은 최소 19세기 초부터 쓰
을의 배후로 발달한 두 개가 있다. 즉 호남정맥의 내장산에서 갈라져 나온 영산기맥
이지 시작하여 20세기 초까지 쓰이던 명칭이다. 長斗라는 한자의 지명은 1914년 부․
은 입암산과 방장산을 이루고, 남남서로 발달하다가 목포의 유달산에서 멈춘다. 장두
군통합령에 따라 고사면과 수곡면이 통합되면서 한자가 개명되었다.
리의 산계는 영산기맥의 구황산(500m)에서 남쪽으로 두 개가 발달한다. 하나는 두
장두마을의 첫 자인 노루장(獐)이 언제부터 썼는지 그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
평천의 서쪽을 따라 발달하다가 부곡리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발달하여 장두
으나 광산김씨 34세 기문(箕文, 1828-1877)의 묘지가 수곡면(水谷面) 장두(獐頭)
리를 지나 인성리에서 멈추었다. 장두리에서 북쪽으로 발달한 한 줄기의 산계는 태
에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기문이 살았던 시절 당시의 광산김씨 김상대
봉(110.9m)을 이루고 상갑리와 주진리에서 멈춘다. 장두리의 산계는 큰 줄기는 서
(1806-1884)와 그의 아들 기두(1828-1910)의 호적단자에는 모두 글 장(章)으로
에서 동으로 발달하나 이 산줄기들의 가지들은 북에서 남으로 발달하여 산자락에 월
만 기록하고 있어 마을이름으로 獐은 보편적으로 쓰인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
계부터 운월, 오산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의 마을 수계는 서에서 동으로 발달하
다. 단지 기문의 묘소 위치에만 獐자가 기록되어 있어, 풍수적 형국의 의미로서만 보
는 산계의 영향으로 마을의 남쪽으로 평지천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아야 하지 않을까 추정해본다.
각각의 마을과 마을들 사이로는 골이 발달하여 논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골들이
장두마을은 풍수상 노루형으로 마을 동쪽에 관총(官銃)이라는 산줄기가 있다. 산의
바로 수계를 이루어 남쪽으로 흘러 평지천과 합류한다.
형상이 장두마을을 향하여 총을 겨누니 노루머리에 총알이 맞는 격이라 하여 노루장
장두마을에서 멈추는 산계는 구황산에서 성송면 계당리를 지나 추산봉을 지나 초내
(獐)자를 썼다는 설도 있으나 그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장두마을은 북향이고, 장두
까지 북쪽으로 발달하다가 다시 서쪽으로 발달하여 낙양에서 멈춘다. 장두마을로 발
앞에 운월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림 1. 장두마을 표지석>
달한 산계는 북쪽으로 발달하다가 다시 서쪽으로 틀어 장두마을의 주산(60.5m)이 된다. 장두마을은 이 산계가 잘 발달되어 좌청룡과 우백호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정
4)
(五山) : 오산마을은 조선시대 금녕김씨가 입향해 설기한 마을이다. 마을명
자와 당산은 좌청룡과 우백호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수계는 장두마을의 동쪽과
칭은 본래 오산(鰲山)에서 오산(五山)으로 개칭되어 부르고 있다. 오산마을은 본래
서쪽으로 발달해 있다. 서쪽 수계는 성송면 학천리 잿등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흘
수곡면에 속해있던 마을로 광해군 12년(1620년)에 금녕김씨(東浩)가 입향하여 설기
러가다 평지천에 합류한다. 동쪽 수계는 성송면 초내마을 북쪽의 능선에서 시작하여
한 마을이다. 마을 앞산에 자라 “알”모양의 돌맹이가 지금도 있는데, 돌맹이의 형상
장두와 초내의 경계를 이루면서 흐르다가 평지천과 합류한다. 장두마을의 뒷산(남
을 의미하여 마을이름을 큰자라오(鰲)자를 놓아 오산이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 다섯
쪽)을 너머에는 뒷골이 있다.
<그림 4. 장두리 항공사진>
오(五)자 “오산”으로 개칭하여 불리게 되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고 수면사무소 직원이 “鰲”가 쓰기도 어렵고 획수도 많아 쓰기 쉽고 획수가 적은 “五”자
(1) 월계마을지명
로 바꾸어 버렸다는 설이 있다. 마을 앞에는 수령 600년이 넘는 버드나무 당산목이
부곡잔등 : 월계 한마음 주유소에서 장암방면 국도23호선 구 도로로 부곡마을 가는
있다. 그리고 마을 냇가에는 자라머리와 비슷한 높이 70cm, 직경 30cm 가량의 돌덩
낮은 재다. 재 주위에 소나무 아카시아 등이 많아 인적이 없어 음침하다. 한국전쟁
이도 있었는데, 근래 하천공사사업 때 매몰되어 없어졌다. <그림 2. 오산마을 표지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된 지역으로 70년대 초까지도 인골이 다량으로 널 부러져
석>
있었고 옹기항아리로 된 일반 초분도 많이 있었던 곳이다. 즉 영광경찰서는 한국전 쟁 당시 인민군들이 정읍을 거쳐 고창관내로 진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영광군의 좌익
5) 장두리의 자연환경과 지명
사상을 가진 군민을 두 대의 트럭에 약 40-50명을 싣고 와 이곳에서 대량 학살하
지형은 대체적으로 평지이고 일부에 구릉성 산들이 있으며, 남쪽에는 평지천이 흐르
였다. 그 후 부곡 잔등을 저녁 늦게 지나 올 때는 귀신이 나올 것 같아 무서워 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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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고 다녔던 곳이라 전한다.
틈안골 : 월계마을 뒤쪽에 있는 서씨제실 밑 들. 달메골 : 마을 뒤쪽 서씨 제실골.
(앙골 방죽) : 월계 북쪽 뒷골 안에 있는 월계제는 1943년경 일제강점기 말
월계제(月溪堤) : 월계마을 북쪽에 있는 보. <그림 월계제>
기 일본인들이 쌀을 공출하기 위하여 월계사람들이 남녀노소 모두 강제노역으로 지
큰조시골 : 비석골의 서쪽에 있는 골.
게와 괭이 삽 소쿠리 등으로 울력을 통해서 축조한 큰 방죽이다. 방죽 안에는 여러
등가래들 : 보들 앞의 넓은 평지천 변의 들.
개의 샘물이 솟아나는 속샘이 있었고 방죽 위 논 모서리에 부근에 샘물이 나와 일
신골(싱국) : 23번 국도변으로 월계마을의 북동쪽의 골.
년 내내 마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주민들은 이곳에 포장을 치고 남자는 물론이고
월계들 : 월계마을 앞의 넓은 들.
부녀자들까지 목욕을 하고 약수로 이용하여 이를 물통거리(약수터)라 불렀다. 축조
보들 : 비석골과 큰조시골 앞의 들.
후 매년 농사철에 모심기가 끝나면 방죽물이 바닥을 들어내 온 동네 사람들이 쪽대
용오철 : 안골 서씨제실 좌측 골.
가래(물고기 잡는 기구) 등으로 붕어 가물치 등을 잡는 풍경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읍내절 : 터골 뒷산으로 고창읍 김해김씨 소유로 영광댁이 경작하는 밭.
1973년대 새마을 사업 소득 사업 일환으로 방죽 안에 자생되고 있는 순채(수련과)
산영굴 : 초내에 있는 논으로 월계마을에서 부르는 들.
를 채취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마당바우 한일식품에 납품하여 새마을 기금으로 조성
운월리(雲月里) : 장두 북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의 모양이 운중반월(雲中半月) 형국
하였다.
이라 함. 월계교(月溪橋) : 월계 어귀에 있는 다리.
애끼재 : 장두 마을 입구에서 학천가는 국도로서 낮은 재이다. 국도23호선 영광선의
각골 : 장두마을 동남쪽에 있는 골.
장두마을 입구에서 학천 방향 넘어 가는 낮은 재를 말한다. 월계마을에서 낮에 바라
뒷골 : 장두마을의 뒤(남쪽)에 있는 골.
보면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데 60년대 전기가 안 들어와 차량 통행은 물론 인적이
운월천(雲月川) : 하천의 기점은 고수면 장두리 695이고, 시점은 고수면 장두리
거의 없고 깜깜한 지역으로 칠흑 같은 밤에 비가 오려하면 도깨비가 자주 나타난다
184-27.
고 한다. 도깨비는 희미한 불빛으로 깜빡이며 크게 작게 보이는 등 움직이는 실체도
비석골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94-4번지의 유물산포지의 서쪽에 있는 골.
보았다는 주민들도 있었다.
운골(고라실골)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94-4번지의 유물산포지의 동쪽에 있는
놀이터 : 월계 이상일 집 앞 공터로 60년대 동네 청소년들이 놀이터로 이용하던 곳
골.
이다. 이곳에서 동네 아이들은 공차기, 가로막기, 진또살기, 자치기, 댕강놀이, 못치
숲쟁이(숯쟁이) : 월계 다리에서 내창 방면으로 보이는 낮은 산. <그림 숲쟁이>
기, 딱지치기 등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수득어지 : 운월에서 좌측으로 있는 들(계단식 논).
뒷동산 : 월계마을 김영대씨와 김영구씨의 집 뒷동산으로 박씨 문중의 묘지가 조성
물방아등 : 운월다리 건너 동쪽에 있는 들. <그림 물방아등>
된 곳이다. 이곳은 월계주민들의 유년시절의 놀이터로 2개의 망주를 이용하여 진또
궁계 : 월계마을 보 건너 남쪽에 있는 들.
살이 놀이 등을 하던 곳이다.
너덜이 : 국도 23호선 월계교에서 동쪽으로 연동(고랭이)넘어 가는 길. <그림 너덜
월계(月溪) : 장두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월계마을 앞에 흐르는 내 이름도 월계임.
이>
관청들 : 국도23호선 먹거리에서 초내 방면에 있는 들.
터골 : 월계마을 뒷골.
안골 :월계마을의 뒷 방죽(월계제) 아랫 쪽에 있는 골. 무당골 : 마을 뒤 방죽 위쪽에 있는 골.
(2) 장두마을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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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斗橋) :
동쪽에 있는 다리.
초내천(草乃川) : 하천의 시점이 고수면 장두리 745의 논.
장두리의 삼한시대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하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삼한의 마한에는 54개국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고창에는 모로 비리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보통 이렇게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3) 오산마을지명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 부르고 있다.
오산(烏山, 五山) : 운월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가막산이 있음.
역사시대의 시작인 마한 땅에 있었던 고창의 모로비리국의 영역은 명확하게 어딘지
가막산(烏山) : 오산 뒤에 있는 산. 산의 모양이 까마귀처럼 생겼다하여 가막산이라
알 수가 없다. 역대 지리지나 사서를 통해 고창 땅에 있었다는 모로비리국의 강역을
부름.
추정해보면, 아마 주진천 유역으로 추정된다. 모로비리국의 중심은 고창읍 도산마을
저사골 :오산 마을 앞 동쪽 들(장두리436번지 일대)
로 추정된다. 그러나 도산이 처음부터 그 중심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왜
비성골 :오산과 운월사이 들(장두리 919번지일대)
냐하면 월계마을 옆의 부곡리에서 발굴․조사된 유적과 유물이 도산리 인근의 유적보
박구태이 :오산과 학산마을 중간에 위치한 냇가(인성리 268번지 일대)
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서당골 : 오산과 인동마을 사이 벌판(인성리 62-3번지 일대)
즉 부곡리에는 삼한시대(또는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 분묘인 분구묘, 옹관묘, 석
웅골 : 오산과 운월마을 사이 벌판(장두리 909번지 일대)
관묘 등의 유적과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이는 고수천 하류의 만동·예지·봉덕·
새때골 : 오산마을 앞산의 동쪽방향 밭 구릉지(성송사내리 231번지 일대)
남산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서고 규모는 작다. 분묘가 조성된 맞은편에는 원삼국시대
새구랑목 :오산마을 앞 동쪽 야산 아래 진입로(장두리 571-4. 아랫 도로)
의 주거지 26기가 조사된 부곡리유적이 위치하고 있어 주거지와 분묘군이 공간분할 이 이루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원래 중심지가 부곡리의 증산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시루봉이라 불리는 말 자체가 신앙과 성지의 개념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즉 시
2. 장두리의 역사
루봉이 바로 이 근처의 성산(聖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이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석기인들은 인구가 적어
1) 선사시대의 장두리
그들이 필요로 하는 면적의 땅만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구
장두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
가 늘고, 청동기가 발달하면서 계급이 생기자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가능하였다. 그래
한 것은 월계마을 옆 시루봉(甑山) 아래의 부곡리를 통해 추정이 가능하다. 부곡리
서 청동기인들은 더 넓은 곳을 개척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때 선사시대의 전통적인
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중기구석기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지는
중심지인 증산 주변보다는 고창천과 고수천이 만나는 도산 주변으로 이주하여 넓은
그 시기가 최소한 기원전(B․C) 5만 년 전이다. 이미 월계에서 1km정도 떨어진 부곡
충적지를 개간하였을 것이다. 넓은 땅을 개간한 이주민들은 이곳에 도산리고인돌을
리에 5만2천 년 전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두리 또한 이 시기에
세워 천제를 올리고 주변에 많은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외침에 대비하기 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해 예지리에 토성을 쌓았다. 구석기시대부터 중심지였던 고수 부곡리와 장두리는 점
장두리는 중기구석기 유적이 나오지 않았지만,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은 장두리 곳곳
차 청동기시대로 갈수록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쇠퇴하여 마한시대에는
에 남아 있어 청동기시대의 장두리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았던 고인돌들도
완전히 모로비리국의 주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림 증산구석기유적>
지금은 거의 파손되어 남아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장두리에도 이미 청동기시대 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한국사에서는 청동
2) 백제시대의 장두리
기시대라 부르고,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있지 않은 시기를 선사시대라 부른다.
모로비리국의 강역이었던 장두리는 369년 3월 근초고왕에 의해 백제의 영토로 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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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근초고왕에 의해 장두리가 백제에 편입되었다 하더라도 마한의 모로비 리국의 수장은 100여 년간 권력을 유지하면서 백제에 경제와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3)
(통일신라시대)이후의 장두리
구조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도성인 사비(지금의 부여)가 660년 함락당하고, 의자왕과 백제의 신료 및 백
왜냐하면 고창지역 삼한시대의 분묘로 추정되는 봉덕리의 분구묘는 구릉의 말단부를
성들 1만 2천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이후 백제군들은 흑치상지․복신․도침을 중심
장방형 형태로 다듬은 후 그 위에 성토하여 분구를 조성하였다. 봉덕리 분구의 상부
으로 부흥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왜에 있던 의자왕
에는 석실분 5기와 옹관묘 2기를 안치하고 있는 방식으로 수혈식이라는 특징이 있
의 아들 부여풍이 복신을 죽임으로써 백제부흥군은 분열되고 말았다. 왜의 군세만
다. 즉 마한의 무덤양식과 백제의 무덤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는 백제
믿었던 부여풍은 결국 663년 8월 26일과 27일 양일간의 나당연합군과 제․왜연합군
의 매장문화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 절대적으로 마한의 옛 매장문화를 버린 것은 아
의 백강전쟁(지금의 두포천과 계화도 일대)에서 패하자 고구려로 도망가고 말았다.
니고 어느 정도 마한의 고유문화를 유지 존속시켰다는 뜻이다. 당시 매장문화의 변
백제군은 동년 9월 7일 십여 일간의 처절한 마지막 전투를 고비로 결국 주류성(지
화는 거의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모로비리국과 백제의 관계는 고구려의 장
금의 부안 개암사의 위금암산성)이 항복하고 말았다.
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크게 수정된다.
당시 이 백강전쟁은 고부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중방이 그 핵심전력이었다. 중방은
즉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한성(서울)에서 쫓겨나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는 5세
고부를 중심으로 정읍, 부안, 김제, 고창 등지였다. 백제는 200개의 성이 있었고, 이
기에 호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무령왕은 호남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백
성들은 군사와 행정 조직이었다. 고창에는 백제의 현이 4개가 있었다. 이는 고창의
제를 22담로로 나뉘어 왕족들을 파견하여 직할 통치하였다.
인구부양능력이 인근의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았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
무령왕의 중앙집권 통치는 도산을 중심으로 한 모로비리국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
창은 군수물품 보급뿐만 아니라 인력동원에도 유리하였다. 이러한 배경이 고창의 백
근거가 되는 묘제가 장두리 인근 연동저수지 옆의 광산김씨 선산에서 조사되었다.
제 백성들이 부흥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패망한 백
연동마을에는 횡혈식 석실분이 출토 확인하였는데, 이 석실분은 5세기 웅진도읍기의
제인들은 부안에서 고창을 지나 함평으로 가다가 신라군들에게 짓밟혔다. 함평군 신
묘제 특징인 궁륭식(천정이 둥근 모양의 돌방무덤)의 채용과 긴 연도 및 방형의 매
광면 삼덕리 서군교(誓軍橋)에는 썩은다리 전설이 남아 있다.
장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백제의 웅진도읍기의 분묘로 추정된다. 즉 웅진도
서군교 옆에는 ‘신라흥무왕서군교유허비(新羅興武王誓軍橋遺墟碑)’라는 비가 세워져
읍기의 대표적인 묘제인 횡혈식 석실분이 마한지역에 출현한 시기는 웅진 천도 후
있다. 신라의 흥무대왕은 김유신장군을 말한다. 패망한 당시 백제의 유민들은 장두리
국가의 위기를 수습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가 이루어진 때
앞을 지나 영광으로 해서 일본으로 피난하였을 것이다. 조선조 성종은 김해김씨에게
이다.
개암사 입구의 넓은 땅을 사패지지로 주는데, 그 이유가 바로 김유신장군이 백제를
백제는 고창을 직접 중앙집권통치하면서 과거의 중심지인 도산세력을 배제하고, 새
구원하기 위해 온 4만 2천명의 왜를 몰아냈기 때문이었다.
로운 세력이자 도산의 정치세력으로부터 소외를 받았을 고수일대의 제지 세력들을
백강전쟁 이후 한반도 남부를 점령한 당나라는 667년부터 신라와 매초성전투까지인
규합하여 통치를 강화하였을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유적이 바로 연동마을의 횡혈
672년까지 고창을 무할(無割)로 개명하여 잠시나마 불렸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식 석실분이다. 잠시 연동이 중심지가 되었다가 다시 6~7세기 사비시대에 들어서면
장두리는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에서 신라의 고창현(高敞縣)에 속한 마을이
서는 고수 예지리로 중심지를 옮긴 것 같다. 예지리에 사비시대의 묘제양식의 원형
되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이 발굴되었다. 한편 지금도 월계마을 뒷산의 구릉성 산지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있다.
삼국사기』권36, 잡지 제5, 지리3의 지리지에서 볼 수
은 물론이고, 원삼국시대와 삼국시대의 토기편와 옹관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월계마 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 연동횡혈식 석실분>
“무령군은 원래 백제의 무시이군을 경덕왕 때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영광군이다. 이 군에 속한 것이 셋인데 장사현(長沙縣)은 원래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을 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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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고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고창현(高敞縣)은 원래 백제의 모량부
양오공(陽梧公) 서봉은 은산부원군의 현손(고손자)으로 세조9년(1463)에 경남 밀
리현(毛良夫里縣)을 경덕왕 때 고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르며, 무송현(茂松
양에서 출생하여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공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스승 김종직
縣)은 원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을 경덕왕 때 고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金宗直)과 친척이 화를 당하고 일가가 화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즉 공은 노친의
부른다.” 라고 되어 있다.
사우 족척이 대화를 입어 일가에 화가 미치자 노친을 모시고 가솔을 거느리고 밀양 을 떠나 무안으로 떠났다. 이후 추산봉 아래 고수면 초내리(草乃里) 산양동(山陽洞)
경덕왕 16년 장두리가 속한 고창현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고창현에 속하였으 나, 1914년 부군통합령으로 고창군에 속하게 되었다. 장두리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부곡리의 남고창IC 발 굴조사결과 이 주변에서 절터가 발견되었다. 주변의 건물지에서는 기단석열과 건물 지 1동, 집수정 등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중기까지의 것으로 추정 되었다.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장두리의 고려사를 추정해볼 뿐이다. 장두리는 지형적 으로 마을 앞으로 하천이 발달하여 물이 풍부하고 잦은 범람으로 넓은 들판이 발달 하였다. 또한 마을 주변은 구릉성 산지라 개간이 쉬웠다. 그래서 장두리는 선사시대 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또한 월계리는 남향에 배산임수의 지 형이다.
에 은거하였다. 공의 7세손 사일(師一)은 정조3년(1779)에 고수면 장두리에서 아산 면 중월리 이거하여 박달(朴達)이라는 뜻으로 단목(檀木)을 집 뒤에다 심었다. 공은 호를 단음(檀陰)이라 하고 아산 중복에 입향하여 그 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돈재공 박연생(朴衍生)의 증손 박이종(朴李宗)은 1480년(성종 11)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고창읍 노동리(蘆洞里)로 이거하였다. 밀성군 박척(朴陟)의 16대손 박태동 (朴泰東)은 1659년(효종 10)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벼슬에 뜻이 없어 한적한 곳을 찾아 남하하다가 공음면 덕암리(德岩里)에 정착하였다. 청재공(朴淵公) 박심문 (朴審問)의 14대손 박연호(朴淵浩)는 전라북도 금산군 질곡(秩谷)에서 태어나 고창 군 고수면으로 이거하였다. 2009년 현재 박서봉의 후손들이 고수면 초내리에 13대째 살고 있으며, 아산면 중월 리 중복(中福), 고수면 장두리 장두(長斗)와 월계(月溪) 등지에도 살고 있다. 박이종
3.
입향조(入鄕祖)와 내력
의 후손들이 고창읍·아산면·고수면 등지에 살고 있으며, 박태동의 후손들이 공음면
고창은 조, 류, 김이라는 말이 있다. 즉 고창 고을의 중심 성씨가 조씨, 류씨, 김씨라 는 말인데 이때의 김씨는 광산 김씨이다. 또 이것에 빗대어 월계마을은 김, 박의 동 네라는 말도 있다. 즉 밀양 박씨와 광산 김씨가 주로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현재 이 마을의 토박이 성씨에는 광산 김씨, 밀양 박씨가 있다. 월계마을은 고창읍에서 남
덕암리에 11대째 살고 있다. 박연호의 후손들이 고수면 평지리 청계, 고수면 장두리 월계, 고창읍 등지에 살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고창군에 살고 있는 밀양박씨는 1,500가구에 4,073명이다. 장두동 입구에 은산군파 후손들이 세운 희구 정(喜懼亭), 아산면 중월리 중복에 추모비(追慕碑)가 있다.
서 방향으로 10여리 떨어진 평야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 작은 내가 흐 르고, 그 너머로는 너른 들이 펼쳐진다. 마을 뒤는 낮은 구릉지대로, 이 구릉이 마치 뒷산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월계라는 마을 이름은 마을 앞의 내에 달이 비치는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2) 월계마을과 광산김씨(光山金氏) 입향 월계마을의 광산김씨 입향은 31세인 전리판서공파 김희길(金熹吉)이다. 공의 자는 내백(來伯)이고 호는 계암(溪菴)이다. 공은 영조 정해(1767년) 11월 3일생으로 타 고난 기질과 성품이 맑고 빼어났다. 공의 재주와 기질은 총명하고 민첩하여 경서와
1) 월계마을과 밀양박씨(密陽朴氏) 입향 박언침을 시조로 하고 박서봉·박이종·박태동·박연호를 입향조로 하는 고창군 세거 성
사학을 강구하였다. 공은 해리면 왕촌 에서 고수면 월계로 이거하였으며, 庚寅(1830 년) 11월에 졸하였다.
씨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을 시조로 한다. 밀양박씨는 파계가 여럿 있는데 대표적인 파로는 은산군파(銀山君派), 돈재공파(遯齋公派), 밀성 군파(密城君派), 청재공파(淸齋公派)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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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世
26世
汝剛
南銑
27世
28世
29世
30世
31世
안은 호적단자와 소지(所志)류를 현재까지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기에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26세 남진(南鎭)의 경우, 강희 5년 10월 병오년(1666)의 호구장(戶口帳)
15701649
에서 무장 성동면 방축리 거주 학생 김남진의 처 윤씨를 기술하고 있는 바, 이로써
南鎰
長曄
1600-
보면 이때까지는 무장 방축리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44
27세 익엽(益曄, 1648~1709)에 이르러서는, 무오년(1678) 공의 31세시의 호구
斗曄 萬瑀
廷曄
萬璉
仁復
龍震
1639-
1670-
1703-
1737-
1737
1770
1794
1677
萬瑀 (出) 重曄 南鎭 16121656
장에서는 성동면 방축리에 거주하고 있으나, 다음 갑자년(1684) 공의 37세시의 호
尙曄
萬秋
景復 再復
迪吉
구장에는 성동면 판정리(板井里)에 거주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1678년과 1684년 사
鐘吉
이에 방축리→판정리로 이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29세 상덕(象德, 1708~1766)에
熹吉(월계입향)
이르러서는 성동면 사내지리(沙內地里)로 이사하여 거주하였는데,1) 이후로 30세 언
1767-1830
장두의 광산김 씨 선조
승(彦承, 1731~1788)에 이어 31세 진길(鎭吉), 32세 달현(達泫)까지 이어지고 있 다. (다만 진길공 48세시 1798년에 작성된 호구단자에서는 마을이름을 沙乃地里에 서 →沙內之里로 표기하고 있으며 이 후는 모두 바뀐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
3)
광산김씨(光山金氏) 입향
후손들의 사내지리 거주는 33세 상대(相大, 1806~1884)에 이르러 고창현 수곡면
선대의 무장 입향 이후 후손들의 분가 이주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된 것
(水谷面) 장두리(章頭里)로 옮겨졌다. 그 시기는 상대공의 35세(1840년) 전으로 추
은 21세 부정공의 거주지에 대한 것이다. 곧 부정공이 무장에서 고창으로 분가 이주
정되며 이후는 현재까지 변함이 없으니 장두리 만을 놓고 본다면 약 160여 년간 거
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창현의 어느 마을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주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2)
부정공의 아들인 돈목재공(敦睦齋公, 麒瑞)의 경우이다. 곧 돈목재공은 정암(靜庵 趙 光祖)의 문인으로서 효행으로 광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양학포(梁學 圃:彭孫)와 경의(經義)를 강론하였다. 공은 기묘사화 이후 둔세에 뜻을 굳히고 후학
29世
30世
31世
32世
33世
34世
35世
象德
彦承
鎭吉
達泫
相大
箕斗
在聲
1708-
1731-
1751-
1779-
1806-
1828-
1766
1788
1799
1810
1884
1910
輔泫
相大
1781-
1806-
箕泰
을 기르기에 전념하였다. 공은 모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넣었으며 상을 당하여는 죽을 먹으며 시묘하였는데, 여묘를 마친 뒤에도 차마 그곳을 떠날 수
1820
在興
(양자, 장두 입향)
1884
없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살았다. 당시에 사람들이 그 집을 돈목재라 부르고 그 마 을을 시묘동(侍墓洞)이라 하였다 한다. 이어서 돈목재공의 아들인 노계공(蘆溪公, 景
相滿
箕文
1808-
1828-
1833
1877
在元 在萬
熹)의 거주지는 그대로 호동이었다. 곧 공은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나, 당시의 권간(權奸)에게 꺼림을 받아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후 다시 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에 뜻을 잃고 낙향하여 호동에 취석정(醉石亭)을 짓고 제생들과 학문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이후는 호동에서 노동으로 옮긴 듯, 부사공(남원부사, 24세 弘宇)의 출생지가 노동(蘆洞)임을 밝히고 있다. 이상에서 보면 부정공의 후손들은 호동과 노동에 분가 이주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실례를 부정공의 5세손인 26세 남진(南鎭)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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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산마을과 금녕김씨(金寧金氏) 입향 1)
沙乃地里 乙酉成戶籍單子 第0統 第0戶 幼學金象德年五十八 戊子本光山"(영조 41년 을유(1765)의 호 적단자) 2) 33세 상대(相大)공의 경우 20세·23세·26세 때의 호적단자에는 주거지가 모두 사내지리로 표기되었는데 비해 35세 때인 경자년(庚子年, 1840)의 호적단자에는 水谷面 章頭里로 표기되어 있다. 이에 앞서 작성되었을 29 세·32세 때의 호적단자를 접할 수 없으므로, 따라서 거주 이전 시기는 29세(1834)부터 35세(1840) 사이에 해당됨을 알 수 있겠다. 한편 호적단자에 의하면 相大공은 원래 이름이 漢裕였는데 68세에 相裕로 개명하였 다가 71세에 相大로다시 개명하였음이 드러난다. 또한 32세 達泫공의 경우는 호적단자에는 達鉉으로 기록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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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장성군 북일면 성덕에서 살다가 아산면 반암으로 이거를 한 후 고 수면 장두리 오산과 성송면 포동에 정착을 하였다. 오산마을의 입향조는 1620년 경
김재관(金在寬, 1888∼1958년) : 고창군 고수면 월계리에서 태어났다. 字는 순명(舜
반암에서 고수 장두 오산으로 이거한 금녕김씨 16세 김동호(金東浩)이다. 금녕 금녕
明), 호는 후석(後石), 아버지는 기락(箕洛)이다. 지은 최전구 선생에게 수학하고,
김씨는 현재까지 오산과 포동 마을에 분산 입향하여 10여대를 이어오고 있다. 오산
1905년 최면암의 의병진에 참여하였다. 1908년 기삼연 등의 호남의병창의대와 합동
마을은 금녕김씨 익화공파가 이웃 성송면 포동마을과 함께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
하여 고창전투에 참가하여 5∼6차의 전투를 치루었다. 1913년 경술국치이후에 새로
다.
조직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창립에 가담하여 참모관의 직책을 받고 첩보활동에 종사하였다. 고종황제의 인산(因山)때에는 고창 성송 추산봉에 망곡단(望哭壇)을 만
16世 世雄 -1597
17世
18世
19世
東浩
茂位
德秋
1591-
1622-16
1662-17
1636
75
45
20世 有相 1693-
21世 應泰
들어 2년 복을 마치어 충의의 정을 극진히 하였다. 1980년 광복절 날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광산김씨 양간공파/전리판서공파/부정공/양촌공의 후손이다.
1727-17 90
오산
김재익(金在翌1897~1957년) : 공은 월계에서 태어난 효자로 본관은 광산이다. 공의
입향
자는 명원이고 호는 月村으로 노계 경희(蘆溪 景憙)의 12대손으로 송파 기호(松坡 箕鎬)의 아들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정성으로 하였다. 공의 老母가 머리에 4.
발찌가 나 농즙(濃汁)이 흐르고 구더기기가 생겨 어떠한 약을 써도 듣지 않았다. 공
인물과 행적
은 노모에게 날마다 첩약(貼藥, 여러 가지 약재를 섞어 지어서 약봉지에 싼 약)을 김훈석(金勳錫, 1884∼1962년) : 공은 자가 덕현(德賢)이고 호는 인암(忍菴)이며
지어 3년을 하루같이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니 병세가 회복하였다. 이웃 마을사람들은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노계 경희(蘆溪 景熹)의 후손이고, 장계 기두(章溪 箕斗)의
공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렇게 된 것(孝感所致)이라 칭찬하였다. 공의 이러
손자이며, 노천 재성(蘆川 在聲)의 아들이다. 고종 21년(1884)에 고창군 고수면 장
한 孝行이 알려져 2004년 남원향교․나주향교․광주향교․고창향교 등에서 향천되어
두리(長斗里)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는 가학으로 글을 배웠다. 광무 1년(1897) 14
2006년 성균관에서 최종 포양(襃揚)을 받았다. 또한 공은 일찍이 문예를 이루어 日
세 때 사서(四書)를 독파하고 겨울에 노사의 문인 보산 기우승(普山 奇宇承)의 문
三省으로 경계를 삼아 성인의 가르침에 종신복응하였고, 후학 양성에도 정진하였다.
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뒤에 거산 강천수(巨山 姜天秀)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공의 묘는 효자비와 함께 월계 선영에 있다.
진취했다. 광무 7년(1903) 20세 때 전남 광주의 도강소(道講所)에서 서경(書經) 의 「우공(禹公)」 편을 줄줄 암송하여 강장을 놀라게 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향
박성근(朴成根, 1902∼1963년) : 박성근은 농악 상쇠 명인으로 1902년 지금의 전라
리에서 은거하며 그는 당시 이 고장의 6 군자라 부르던 회천 김재종, 신암 이공우,
북도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1903년 장
국사 김기일, 두치 유익경, 갑촌 강내성 등과 함께 청계재(淸溪齋)에서 학문을 강론
성군 황룡면 아곡리(아치실)에서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적은 장두리이지만 장
하며 교유하였고 또 선대의 문헌을 모아 간행했다. 그는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갖고
두리는 형 박영근이 살던 곳이다. 형의 주소를 호적에 기재한 것이다. 그는 어려서
구용(九容), 구사(九思)의 조목과 사물(四勿)의 구절을 써서 벽에 붙여 놓고 좌우명
조실부모 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생활했다. 그는 쇠잽이 강성옥에게서 주로
으로 삼아 몸소 실천했다. 나이 70세가 넘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붓을 잡으
쇠를 배웠고, 김성대에게 굿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특히 부포놀음에 매우 뛰어났고,
면 시구와 문장이 줄줄 나왔다. 1962년에 졸하니 향년 78세이고 저서로 인암문고
쇠가락뿐만 아니라 상쇠로서 굿판을 통솔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1900년대 이후 출생
(忍菴文稿) 3권 1책을 있다.
한 영무장(영광·무장·장성·함평 등의 지역) 예인들은 대부분 박성근으로부터 예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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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걸궁패 활동했다. 1947년 창경궁에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참가
녁으로 上食과 朔望에 尊哭을 빠뜨리지 않고 3년 상을 마쳤다. 그 후 시아버지도 마
해 특등상과 개인상을 함께 받았다. 이후 다양한 농악 경연 대회에 참가했으며, 이를
찬가지로 3년상을 치루는 등 효를 몸소 실천하여 2010년 고창향교의 효부로 추천을
계기로 미국 공연까지 했다. 남원에서 여성농악단을 지도하다가 1961년 61세의 나
받았으며, 1992년 고수경로당에서 효부로 표창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로 고창군 아산면 주진리 17번지에서 사망했다. 이경연(李京淵, 1946년생) : 광주농고를 졸업하고, 광양시청 국장과 전남도청 고장 (金宗鉉, 1929년생) : 자는 德信이며 호는 松下이다 본관은 光山으로 盧溪 景
(서기관)으로 재직하였다.
憙의 13대 후손으로 고수면 월계에서 출생하였다. 인후한 성품으로 타고나 居家에 효우로 在鄕에 誠信으로 처신하여 향인의 신망을 얻었다. 일찍이 家學을 익혀 東谷
김영춘(金永春, 1954년생) : 고수면 월계에서 태어나 고창고를 졸업을 하였다. 그는
成桓奎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의 大方을 깨우쳐 19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가세가
38년 간 공직에 있으면서 상하와 해리 면장, 문화관광과장, 주민생활지원과장을 거
기울어 학업에 전념할 수 없어 주경야독으로 사서를 섭렵(涉獵)하여 소양을 넓혔다.
쳐 현재 고창군청 기획예산실장(지방서기관 4급)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여가로 연묵(硏墨)하여 필법이 정묘(精妙)하여 한국서화작가협회 회원으로 활 동하기도 하였으며 서예가이다. 또한 고창향교 등 4개 향교의 향천(鄕薦)을 받아 성
박혁(朴爀, 1963년생) : 월계 출신으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
균관의 포양(襃揚)을 받은 아버지의 효를 선양하기 위한 효행비도 세웠다. 향사로
시40회에 합격하여 정읍시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고창향교 전교와 성균관 전의를 역임하였고 宗事에도 특성을 보여 누차의 족보편수 (族譜編修)에 전념하였다. 만경(晩境)에는 副正公 종중 도유사에 선임되어 계해파보
김정용(金正容, 1969생) : 김정용의 아버지는 고수면 장두리 장두마을에서 출생하였
(癸亥派譜)를 속간(續刊)하고 노산사지를 역간(譯刊)하였다. 문집으로 송하사고(松
고, 김정용박사는 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신시내티 문리대학에서 이학박사
下私稿)가 있다.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인천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김대진(金大鎭 1926년생) : 육군 준장으로 오산에서 출생하여 3군관구 부사령관을
장두리의 박사 : 김용주(金容柱, 1967생)는 전남대학교 의대에서 의학박사학위, 김
역임하였다.
금남(金錦男, 1965년생)은 문학박사 학위, 박정기(朴正基, 1961년생)도 문학박사 학 위를 받았다.
김익현(金益鉉, 1932∼1990년) : 김익현은 고수면 장두리 149번지에 태어나, 고창 고와 조선대를 졸업하였다. 그는 조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조선대 경제
장두리 사무관 : 박인규(朴仁圭 1952년생)는 월계 운월 출신으로 포항 해병대 군속
학과 교수와 한국은행 금융통화운영위원을 역임하였다.
사무관으로 재직 중이며, 박종기(朴鍾基 1953년생)는 장두출신으로 정읍시청 상교동 장 과학산업과장을 역임하였다, 박경수(朴京洙 1955년생)는 월계 운월 출신으로 전
남평반씨(潘在羽 1929~2012년) : 장성군 서삼면 내연출신으로 진사 영구(榮龜)의
북도청 보건환경연구원 연구원으로 기획실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운월의 김형일(62
孫으로 두환(斗煥)의 장녀이다. 남평반씨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품자정숙하고 효우천
년생)은 서울시청 기획관실 사무관으로, 오산의 오판동은 교육과학기술부 사무관으
식하여 19세에 월계로 시집와서 병든 시조모와 시모 및 연로하신 시부를 정성껏 모
로 재직 중이다.
시고 미혼인 어린 시매 등을 수발하는 등 가사가 너무 많고 바빠 잠시의 편안한 날 이 없었다. 특히 결혼 후 1~2년 만에 시할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아침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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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을의 문화유적과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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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석이 이동되었고 하부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의 판석재와 활석들이 도로 유물산포지1 :
고수면 장두리 594-4. 시대상으로는 삼국시대의 유물
변에 쌓여 있는 상태이다. 그 중 양호한 지석묘의 크기는 235 × 147 × 45cm 이며,
산포지로 학산마을의 남측에 위치한다. 고수면에서 동-서로 뻗어 내린 가지구릉의
평면형태는 제형이다. 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있다. 지석은 없으며 장축은 북동-남서
남측일부이며 비석골과 운골의 사이의 구릉이다. 북측으로는 인성제가 있다. 구릉의
측이다. 또한 주변에서 다량의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남측은 밭이 있다. 유물이 수습된 곳은 하단부의 평탄한 곳으로 2기의 민묘가 위치 하고 송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경질옹관편과 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
쌍괴정(雙槐亭) : 쌍괴정은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283에 있는 정자로, 단기 4200년 丁
다.
卯 (高宗 4년, 1867)에 건립되었다. 지붕은 팔작이며 홑처마로 전면 2칸, 측면 1칸의 누정이다. 양오(陽梧) 박서봉(朴瑞鳳)의 10세손인 밀양인(密陽人) 처사(處士) 박승현
장두리 유물산포지2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91-11. 시대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朴升鉉)이 마을 앞에 홰나무 2구루를 심었는데, 나무가 번성하여 녹음(綠陰)을 이루자
고려시대의 유물산포지로 운월마을 북측 구릉으로 양계장이, 서측은 밭으로 경작되
그 손자 양휴(陽休)가 그 곳에 정자를 세우니, 향우(鄕友)가 휴식하는 곳이 되었다. 고
고 있다. 정상부는 송림으로 운월마을과 이어지는 소로가 개설되어 있다. 구릉은 동
수면 장두리 마을 앞에는 지금도 보호수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245년
-서로 뻗어 내린 능선의 말단부로 저평한 편이다. 유물이 수습된 곳은 서사면으로
[2010년 기준]인 이 나무는 둘레가 4.2m나 되는 고목으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의 휴식
광산김씨의 묘가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는 경질토기편과 연질타날문토기편 등이 수
처로 사용되고 있다. 괴목나무 옆에 있는 쌍괴정은 나지막한 기단에 둥근 주초를 놓고
습되었다.
두리기둥을 세운 정면 2칸, 측면 1칸의 정자이다. 팔작지붕은 초익공 홑처마로 간결하 게 중수했다. 정자 안에는 역사를 말해주는 「쌍괴정기」가 걸려 있고, ‘쌍괴정’이라는
장두리 유물산포지3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184-9. 시대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고 려시대의 유물산포지로 월계마을의 북측 구릉이며, 월계제의 사측이다. 구릉은 해발 50m의 저평한 대지이며 남북으로 뻗어 있다. 구릉의 말단부에는 서씨재실과 묘역군 이 형성되어 있다. 유물이 수습된 곳은 현재 축사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개배 편, 경질토기편과 연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편액은 설주 송운회의 글씨로 고색창연하게 걸려 있어 운치를 더한다. 시문은 송사 기우 만(奇宇萬)과 직지사 이승욱(李承旭)이 썼고, 謹次雙槐亭韻은 인암 김훈석(金勳錫)이 썼다. 송운회(1874-1965)는 전남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이건창의 문하에서 형 명회와 함께 학문과 서예를 익혔고, 이때부터 중국과 우리나라 명인들 의 필법을 두루 익혔다. 특히 동기창의 필법에 심취하였다. 5체에 모두 능했으나 주
장두리 유물산포지4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83-5. 시대상으로는 원삼국시대의 유 물산포지로 월계마을의 북측 구릉이며, 하단부는 송림농원이 위치한다. 구릉은 동서로 뻗어 내린 해발 66m의 저평한 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정상부는 월계마을로 이
로 해서와 초서를 많이 썼다. 이 쌍괴정 편액도 행서로 썼지만 복잡한 구성에는 초 서를 접목하였다. <그림 5. 쌍괴정과 장두모정 전경>
어지는 소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주변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경질토기 편과 연질토기편 및 옹관편 등이 수습되었다.
장두리 고인돌군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578-2. 시대상으로는 청동기에서 삼국시 대의 유적이다. 장암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맞은편에 지석묘 8기가 위치한다. 이 주변은 현재 개간이 이루어져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개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희구정(喜懼亭)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장두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단기 4322년 壬申(1989)에 重建한 6각의 정자이다. 밀양인(密陽人) 양오(陽梧) 박서봉(朴 瑞鳳)이 조선 성종 때에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재직하다가 노친(老親)을 모시기 위하 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밀양으로 돌아갔다. 그 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생겨 화를 피하려고, 고창군 고수면 산양동(山陽洞)으로 들어와 살며 추산( 山) 아래에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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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정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퇴락하자, 후손이 1989년 3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
송당재(松堂齋) : 고수면 장두리 월계마을에 있는 재실로, 송당 박영태(朴永泰)를 기 념하기 위해 1987년에 건립되었다. 송당재기는 김동리선생이 썼다. <그림 10. 송당
겼다. <그림 6. 희구정 전경>
재 전경> (光山金氏旌閭) : 정려는 고수면 장두리 44-1(장두길 9)에 있으며, 조 선시대 광산인 김기두(金箕斗, 1828-1910)의 효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공의 자는
운월재(雲月齋) : 이천서씨의 재실로 1987년에 창건하였다.
경칠이며, 호는 장계이다. 공은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314에 태어났으며 향년 82세 에 졸하였다. 공은 고창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김경희의 후손으로 공의 효를 기리는
월계의 줄다리기와 당산제 : 줄다리기도 대부분이 대보름날 행사였다. 즉 첫 보름달
정려각이다. 공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학식
이 뜨는 밤에 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줄다리기는 대낮에 그러한 짓을 하는 자는 없
이 높았다. 부친이 병에 걸리자 눈 속에서 싱싱한 채소를 얻어 밥상에 올렸고, 부친
고 해가 져야 이루어진다고 하여, 마치 이것을 성행위처럼 여기는 것이 지방 노인들
의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부친 입에 넣는 등 열의를 다하여 간병하였다.
의 관념이었다. 특히 암줄(여자편)과 수줄(남자편)의 고리를 거는 일을 그렇게 여기
1894년(고종 31) 예조에서 고종에게 정려할 것을 주청하여 허락을 받아 전라관찰사
는데, 여기에서 암줄편인 여성편이 이겨야 대지에 풍년이 든다는 관념, 그것을 성행
에게 관문을 보내 정려하였다. 송사 기우만이 정려기를, 정규삼이 행장을 지었고, 김
위로 여긴다는 관념들은 특히 민간신앙에서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대보름날의
기두의 효행이 『호남삼강록』에 실렸다. 김기두 정려는 흙으로 만든 담장 안에 콘
뜻은 이와 같은 행사들의 요점에서 특히 잘 집약된다. 대보름의 뜻, 그것은 한마디로
크리트로 기단을 만들었고, 그 위에 둥근 기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보
말하여서 풍요의 원점이 된다. 고수면 월계리의 당산제에 줄다리가 있었다.
와 결구하고 있다. 공포는 익공 양식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에 네 벽이 홍살로 처 리되었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정려각 안에는 3면에 현판이 걸려 있다.
월계 당산나무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월계마을 505번지에 있는 수령 350년, 300
현판 정면에는 ‘효자 광산 김기두 지려 고종갑오삼월일명정’이라 쓰여 있다. 담장 밖
년 된 2그루의 왕버들이다. 왕버들은 낙엽 활엽 관목이며, 습지나 냇가에서 자생한
에 “忍菴居士金勳錫景仰碑”가 서 있다.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다. 개항기의 정려각으
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 분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충청도 이남에서 분포한
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그림 7. 고종황제 칙령>
다. 수피는 회갈색으로 깊게 갈라지며 피목이 있다. 버드나무속 가운데 가장 크게 자 라는 수종이며, 잎이 새로 돋아날 때 붉은 빛을 띠므로 쉽게 구별된다. 장두리 월계
인암거사김훈석경앙비(忍菴居士金勳錫景仰碑) : 김훈석의 경앙비는 고수면 장두리
마을의 왕버들은 수령은 350년이고 높이 15m, 가슴 높이 둘레 5.7m, 나무갓 너비
44-1번지 광산김씨 정려 앞에 있다. 글은 현곡(玄谷) 류영선(柳永善)이 짓고, 보정
20m이다. 왕버들은 마을을 수호해주던 나무이다. 왕버들은 당산나무로 외지인이 마
(普亭) 김정회(金珵會)가 썼으며, 1962년 3월에 세웠다.
을의 물건을 훔쳐 이곳을 지나면 경기가 나 물건을 가져 갈 수 없고 그냥 가면 경기 가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은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날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
<그림 8. 광산김씨정려와 인암거사김훈석경앙비>
다. 왕버들은 1999년 9월 15일에 보호수 제9-14-29호로 지정되었다. <그림 11. 열부청도김씨기적비(烈婦淸道金氏紀蹟碑) : 기적비는 고수면 장두리 287-1번지에
월계마을 왕버들>
있으며, 글은 광산김씨 김재남(金在南)이 짓고, 동화(東華) 정연숙(鄭燕淑)이 썼다. 열부 청도김씨는 1888년(戌子)에 태어나 1956년에 향년 68세에 졸하였다.
<그림
장두마을 당산나무 :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장두 283. 장두마을 회관 앞에 위치하며, 나무 옆에는 쌍괴정과 모정이 있다. 수종은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는 잎이 한꺼번에
9. 열부청도김씨기적비>
피면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으며, 느티나무에서 정월 대보름날에 당산굿을 지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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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고는 15m이며, 둘레는 4.2m이다. 수령은 약 240년 정도 되었다. 현재 2그
문을 배우고자 하는 주민들에게 1954년부터 1957년까지 3년간 가르쳤다. 송하선생
루이며 관리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지정번호는 9-14-2-5-1로 1982년 9월 20
은 추구, 천자문, 사자소학, 명심보감 등을 가르치고 지필묵으로 한문서예를 지도하
일 지정되었다. <그림 12. 장두마을 당산나무>
였다. 서당 유생들은 천자문 등 한문책을 읽을 수 있고 해독을 할 수 있으면 책거리라고
당산나무 : 오산마을 내 회관 앞 모정 옆에 노거수 1주가 있다. 수종은 왕
하여 떡 한 시루와 술 등을 자진해서 가져와 서당 유생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버들나무로 수고는 10m 정도이며 둘레는 2m이다. 수령은 300년 정도 되었으며, 마
또한 겨울철 눈이 오면 유생 모두 함께 강천들이나 읍내절 등 야산에서 토끼 사냥하
을에서는 당산나무로 불리면서 정월초 하루날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당산제를 올리
는 등 체력을 단련하기도 하였다. 당시 배운 주민들은 김유현, 이창연, 이경연, 박병
고 마을 주민들이 새끼줄을 꼬아서 나무에 감는다고 한다.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오
국, 박병기, 김영상, 김영일, 박인규, 박원규, 이제우, 김영달 등이고, 내창에서는 이
산 442-1의 왕버들은 2006년 12월 5일에 보호수 제9-14-52호로 지정되었다.
옥현 등이 수학하였다.
<그림 13. 오산마을 당산나무>
김창수고가(金昌洙古家) : 김창수고가는 고수면 장두리 장두길 22-3번지에 있다.
6. 마을의 전설과 풍속
이 고가는 광산김씨의 장두 입향조인 김상대가 성동면 사내에서 이거한 1835년 전 후에 건립한 건축물로 장두마을의 광산김씨 큰집이다. 본래 이 가옥의 구조는 ㄷ자
방장산에 얽힌 양고살재의 일화 : 양고살재는 병자호란 때 고창 출신 박의 장군이
형으로 방 4칸, 우사 1칸, 부엌 1칸이었다. 그런데 1974년 새마을사업을 할 때, 一
누루하치의 사위인 적장 양고리(陽古利)를 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박의(朴
자형의 6칸 집으로 개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고가는 팔짝지붕이며, 고가의
義)는 1599년(선조 32년) 고창군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서 고창 입향조인 관찰사
정원에는 예전에 디딜방아가 있었고, 현재도 디딜방아를 찧던 학독이 지금도 남아
양오공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용기가 대단하고 말을 잘 타며 총을 잘 쏘아 박포수라
있다. 특히 이 고가의 기둥 건축양식이 독특하다. 이 고가의 기둥은 본래 휨이 심한
불렀다. 1642년(인조 2년) 무과에 급제, 부장(部將)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병
나무였으나, 이를 곧게 펴기 위하여 굽은 곳의 안쪽 부분을 잘라 그곳에 나무를 박
자호란이 발발하여 한양이 함락당하고 임금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수모를
고, 밖에는 잘라내어 일직선이 되도록 나무기둥을 만들어 세웠다. 이런 기둥이 현재
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근위병을 거느리고
이 고가에 4개나 남아 있다. <그림 14. 김창수고가>
수원 근교 광교산에서 적을 만나 싸워 여러 번 이기기는 하였으나 갑자기 내린 폭설 을 만나 양군이 격전을 벌인 끝에 아군이 패하게 되었다. 박의는 적군의 이동로인
장두 들독 : 장두마을의 풍락정(豊樂亭, 장두 모정) 앞에는 둥그스런 돌이 남아 있
방장산 입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자 적의 대장을 총탄에 명중시켜 쓰러지
다. 마을 사람들은 이 돌을 들독이라 부른다. 마을의 고로들에 의하면, 이 돌의 중량
게 했다. 죽은 적의 상장인 양고리는 만주 정황기인으로 누루하치의 사위이며 창평
은 약 150근(90kg)이라하나 그 근거는 없다. 이 들독은 광산김씨 양간공파 34세 김
전투에서 58회나 승리하여 청태종에 총애를 받던 명장이었으나 예친왕 다락을 따라
기풍(金箕豊, 1847-1889년)이 산에서 퇴비용 풀 짐을 해올 때 한 쪽이 기울어지자
왔다가 박의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청나라 사기에서 보듯 청태종은 그의 죽음을
짐의 균형을 잡기 위하여 한 쪽에 올려 마을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듣고 크게 통곡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무훈왕에 봉하였다 한다. 양고리가 죽은 뒤 에 산으로 조급히 몸을 피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고 청군이 저 사람이 양부마를 쓴
오연양반 한문서당터 : 고수면 장두리 133번지에 있었던 1950년대 장두리 유일의
사람이라 하니 활을 잘 쏘는 애륵을 시켜 박의를 잡아 목을 베었다고 한다. 박의의
한문서당이다. 이곳에서 송하 김종현선생은 기역자형 초가집 자택의 사랑채에서 한
묘소는 고수면 예지리 양정에 있으며, 후손은 고수면 장두리와 아산면 중월리 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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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심지어는 시아버지의 눈을 눈깔치라는 비어로 쓰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시집 온 여성의 새 가족, 즉 시집 내에서 불평등한 언어사
어치씨를 입으시고이다. 이 지역에서는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옛날이얘기
용 규범(이것이 당연히 야기하는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상상을 뛰어넘는 극
(옛날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여기서 소개할 옛날이얘기(옛날이야기)는 이야기의
히 냉소적인 비꼼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개평리에서는 이것을 슬픈 자조의 속담
구술자는 심재순(양동댁, 여)이다. 심재순은 어려서부터 고창 지역에서 컸지만, 원래
으로 표현했다. 이 지역에서는 웃음 또는 비꼼이 가득한 말장난의 이야기로 장르를
는 장성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던 사람이다.
바꾸어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이 속에는 사람들이
『긍게 인자 메누리(며느리)가 헌단 말이, 밥을 허믄서 헌단 소리가 소안치(송아
일상생활을 하면서 겪는 감정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왕한석)
지)가 어치씨(어치는 소에게 입히는 짚 옷)를 입으시고 뛰시고 개님도 뛰시고., 인 자 소안치허구 개허구 같이 장난 마냥으로 뛰지라잉. 시아버지가뭔소리냐, 뭔소리
고창 장두 사숙소식(동아일보 1921년 12월 30일) : 전북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야
가 후닥닥 후닥후닥 그러냐?헌게.아버지 눈깔치로 보시지오., 아버님이라고도
소교회(耶蘇敎會) 신도 중 이병묵(李炳黙)․정일도(鄭一도)․김성관(金成琯) 제씨는 금
않고,아버지 눈깔치로 보시지오.그래 버렸어. 지지리 존대말 허다 시아버지게다
춘본예배당 내에 사숙(私塾)을 설립하고 생도 23명을 모집교수 하든바 일익 증가하
아버지 눈깔치로 보시지오.했으니 망신이지라잉. 긍게 징허게 까시럽제.야야,
는 학생은 현하 칠십 여명에 달하여 교실이 협착곤란이더니 동면 유지 이관녕(李琯
너 어째 그렇게 말을 허느냐?헝게 인자 무색해서 말도 못허제 메누리가. 긍게로
寧)․김낙술(金洛術)․박사진(朴士進)․박용필(朴容弼)․백남철(白南哲) 제씨의 동정 의연
메누리가 헌단 말이내가 아부이(아버님)게다 너무 다 실수했고 죄송헝게 용서해
금 백여원으로 본 교실을 증축하고 강사 정일도(鄭一도)․이철환(李鐵煥) 양씨는 한
주시시오., 용서해도라고.』
서(寒暑)를 불고(不顧)하여 근성교수(勤誠敎授)하야 양호한 성적을 거(擧)한다더랴.
이 이야기는 단순한 웃음의 이야기를 넘어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야기 의 직접적인 배경은 시집 온 여성이 시집 식구들과의 언어적 상호작용에서 채택해야
7. 마을의 현황과 생활상
하는 존댓말 사용의 이상적 규범이다. 즉 한국사회에서 혼입(婚入)한 여성은 규범적 으로는 시집 식구 모두에게 말을 높이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새 며느리가 시집의 모
1) 전국 최우수 새마을사업 월계마을
든 식구들에게 말을 높여서 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상적 규범이다. 위에서 언급
월계 새마을사업이 최초로 시작된 동기는 고수면 내창 마을이 1972년 최초로 새마
한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출발한다. 위의 이야기 주인공인 며느리는 개평리에서의
을사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춘성 전북지사가 내창 마을을 순시하고 고창방면으로
자조적인 비꼼의 속담을 실제 담화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어깃장을 시아버지 앞에서
가던 중 월계다리에서 박병권(당시 새마을지도자)씨가 도지사의 차량을 멈추게 하였
놓게 된다. 그래서 어치에다 -씨를 붙이고, 주체 존대의 선어말어미 -으시-를 집
다. 그리고 그는 월계마을도 새마을사업을 제대로 할 터이니 도지사에게 지원해달라
안의 짐승들에게 모두 바친다. 따라서 소안치는 어치씨를 입으시고 뛰신다. 개에도
고 직접 요청했다. 그러자 도지사는 지원할 것을 확약하고 바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님을 붙여 개님도 뛰신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시아버지는 이것이 결코 인간 세상
월계의 새마을사업은 1972년 하천에 제방을 쌓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월계 마을은
에서 보이는 말씨 사용이 아님을 판단한다. 그래서 이 말을 아무 의미 업슨 단순한
조금만 비가와도 냇물이 도로에 넘쳐 주민들이 다닐 수가 없었고, 마을의 공동우물
의성어, 즉 후닥닥 후닥후닥이라는 소리로 인지한다. 그러자 며느리는 여기서 한 단
은 흙탕물로 변하여 식수로 이용하기가 힘들었다. 특히 큰 비가 월계마을에 오면 냇
계 더 나아가서 짐승에게도 쓴 존칭 표현을 사아버지(존칭 표현을 써야 할 대상)에
가에 사는 덕으멀댁(덕정댁, 김영노씨) 집이 가장 먼저 위험에 처했다. 그래서 덕으
게는 쓰지 않고 거두어들여 버린다. 그리고 시아버지를(시아버지에게 쓰는) 존칭인
멀댁은 재난의 위험표시로 큰소리로 외치며 징을 울리며 위험을 동네 주민들에게 알
아부이 대신(친정 아버지에게 쓰는) 평칭인 아부지(고창 말은 아부지임)로 부른다.
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월계 앞 하천의 홍수로 도로가 물에 잠기어 아랫마을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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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 뒷동산으로 돌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주민들이 새마을사업으로 가장 먼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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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이 제방의 둑을 쌓는 일이었다. 이 사업에 마을주민들이 총동원되었으며, 마을
을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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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안길의 확․포장, 담장개량, 지붕개량, 농촌주택개량, 부엌개량, 하수구정비, 지붕도색, 담장도색, 마을회관과 새마을공동창고의 신축, 메탄가스 등을 설치하여 주거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이장과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개발위원장 등이 새마을사 업의 구심체가 되어 남녀노소 가구당 1명이상 작업장에 매일 나와 제방을 쌓았다.
계 장 두 오 산
82 163
81
82 158
39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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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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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43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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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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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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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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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8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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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39 43
작업도구는 지게나 리어카, 소쿠리, 세수대야 등으로 골재를 날랐다. 마을의 온 주민
로 나타났다. 장두의 인구감소는 군단위의 농촌마을에서도 비교적 많은 인구가 감소
들은 새마을노래를 부르며, 마을의 공동 작업을 한 것이다. 마을주민들의 노력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행정리인 월계는 20%, 오산은 11% 감소하였는데, 오산의
하천에 제방이 만들어져 월계는 홍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경우 다른 농촌마을에 비하며 인구감소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초가집 60여 채는 물론 부속건물까지 한집도 빠짐없이 슬레이트로 지붕을 개량하였 다. 농가주택개량사업도 5가구가 정부의 융자금을 받아 깨끗한 집으로 신축되었다. 마을안길은 리어카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여 농작물 운반도 어려웠다. 그리
3) 장두리의 산업과 생활상
고 집들의 울타리들도 흙 담장이나 대나무, 볏단 울타리로 만들어져 너무 지저분하
장두리는 평지천을 사이에 두고, 평지천의 남쪽에 장두마을이 있고, 북쪽에는 월계와
였다. 마을의 안길은 하천에 제방을 쌓은 덕으로 반듯해 졌고, 진흙의 길도 포장했
오산 마을이 있다. 이 지역은 평지천의 범람원지대에 있기 때문에 비옥한 농토 위에
다. 지저분한 담장들도 블록으로 쌓았으며 대로변에는 페인트칠까지 하여 깨끗한 마
농업이 발달해 있다. 장두리의 대부분은 논농사가 발달했으며, 특히 오산마을은 평지
을로 조성하였다. 월계마을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3년여 동안의 새마을사업으로
천의 범람이 만들어 놓은 충적지에 하우스단지가 있어 수박, 복분자, 과수원, 벼 등
동네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다양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오산마을은 농업기술센터에서 지정하여 농기계와
그래서 1974년 월계마을이 전라북도 최우수 마을로 선정되었다. 그 후 이춘성 전북
편의 장비를 구입하여 주민들이 농업에 전력할 수 있도록 지원되고 있다.
도지사가 월계를 방문한 바도 있고, 당시 권승주 군수와 김영수 면장은 수시로 방문
한편 한국인들의 조상숭배사상과 직결된 토장묘제도도 그 시대적 변천으로 빠르게
하였다. 고수면사무소의 안재식 담당직원은 매일 상주하며 박병권 새마을지도자와
변화를 하고 있다. 이러한 묘제는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묘 관리의 문제점들이 드
하옥순 부녀회장, 그리고 김영중․이수성 이장 등과 함께 새마을사업을 지도하였다.
러나면서 관리가 편하고 묘의 면적을 많이 차지하지 않은 납골당을 설치하는 경향이
월계마을은 새마을사업의 선두주자로 전국에서 최우수 마을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많아지고 있다. 장두리에는 광산김씨가의 납골당이 두 곳이 있다. <그림 17. 장두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로 전국 각지에서 견학하러 오는 사람도 많았으며, 이로 인하
광산김씨 납골당>
여 월계마을은 우수 마을 시상금을 받았다. 아울러 당시 새마을 공로자로 박병권 새 마을지도자는 대통령훈장(근면장 16호)까지 받은바 있다. <그림 15. 새마을사업 전
4) 성씨별 거주 현황(2012. 8월 현재)
의 월계마을> <그림 16. 새마을사업 후의 월계마을> (1) 월계(47가구) 2)
인구 변화(앞은 전체, 위는 남성, 아래는 여성, 단위 : 명)
장두리의 인구변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장두마을의 2012년 12월 현재의 인구는 2003년 12월 10년 전보다 32%가 감소하여 매년 3% 이상 인구가 줄고 있는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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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광산김씨 20가구 전주이씨 3가구 김해김씨 1가구 한산이씨 2가구 해주오씨 1가구 김해김씨 1가구 장씨 2가구
◦ ◦ ◦ ◦ ◦ ◦
밀양박씨 풍천임씨 경주이씨 부안김씨 울산김씨 연안이씨
10가구 2가구 2가구 1가구 1가구 1가구
의 경지정리 환지위원인 김영구씨가 모정 부지를 확보하였고, 정부지원 없이 박병곤 씨(당시 이장)가 출향인과 마을 주민들에게 찬조금 800만원의 사업비를 마련하여 건립하였다. 풍락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이다. 풍락정(豊樂亭)의 현 판과 상량문은 송하 김종현이 썼다. <그림 19. 풍락정> 월계마을의 입구에는 농협공동창고로 국도 23호변에 있다. 월계 공동우물은 가운데 뜸(박석규씨 앞)과 아랫뜸(김영필씨 앞)에 2개소가 있었다. 이 우물은 정확하게 언
(2) ◦ ◦ ◦ ◦
(22가구)
광산김씨 경주김씨 금녕김씨 영성정씨
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마을이 조성되면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가구 2가구 1가구 1가구
◦ 여주이씨 1가구 ◦ 전주이씨 1가구 ◦ 밀양박씨 1가구
50~60년대의 우물의 형태는 밑에는 돌로 쌓았고 지면 위로는 콘크리트 원형관이었 다. 우물의 깊이는 2미터 내외로 물이차면 1미터정도로 온 동네주민들이 식수로 이 용하였다. 물을 퍼 올릴 때 양철로 만든 바가지 또는 고무로 만든 두룹박이라 불리 는 바가지를 사용하였다. 가운데 뜸 우물은 큰비가 오면 흙탕물이 나와 사용하지 못
(3) 오산(42가구) ◦ ◦ ◦ ◦ ◦
금년김씨 제주양씨 진주정씨 경주이씨 고흥유씨
하는 때도 있었다. 1972년 새마을사업이 시작되면서 우물은 폐쇄하고, 싱국 높은 곳
16가구 7가구 2가구 2가구 2가구
◦ ◦ ◦ ◦ ◦
광산김씨 4가구 이천서씨 4가구 김해김씨 2가구 임씨 2가구 부안김씨 1가구
에 간이 상수도 물탱크를 설치하여 물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각자 집에 작두 샘을 파서 식수로 이용하였다. 운월마을모정은 단기 4320(1987)년에 건립되었 다. 이 모정은 다른 마을의 모정에 비해 초라하지만 80년대 한국 농촌의 전형적인 모정형태를 볼 수 있다. <그림 20. 운월모정> 장두마을모정도 일명 풍락정(豊樂亭)이라 부르며, 고수면 장두리 283에 있다. 장두
5) 장두리 주요 기관과 시설
모정은 1886년(丙戌) 6월 6일 마을에서 건립하였고, 상량문은 인암 김훈석이 짖고
마을마다 회관과 정자가 있어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월계마 을회관은 월계1길 1번지에 있다. 회관은 1973년 새마을사업 이후 당시 박병권 새마 을지도자가 회관 부지를 마련하여 블록과 시멘트 및 스레트로 건축하였다. 그 후 건 물이 노후화 되어 2007년 4천만원(정부지원 3천만원, 출향인과 주민 찬조금 1천만 원)의 사업비로 시멘트 스라브(29평)로 재건축하였다. 재건축 당시 회관부지 소유권 이전과 자부담 확보에 노력한 추진위원장 박생규, 이장 김영달, 새마을지도자 김영 후, 부녀회장 김순자의 공이 컸다. 동년 월계경로당으로 고창군에 등록을 마쳤다. 완 공 후 경로당 현판과 월계마을 유래비를 세우고, 유래비 뒤편에는 찬조금 헌성록을 썼다. 마을회관의 현판과 유래비는 송하 김종현이 쓰고 지었다. 2011년 정부지원금 6백만원으로 옥상에 강판을 설치하였다.
썼다. 그 후 모정이 노후하여 2010년 5월 1일 군비의 지원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 의 팔작지붕으로 건립되었다. <그림 21. 장두마을회관> 장두마을회관은 장두리 장 두길 18번지에 있으며, 근래 신축된 2층의 벽돌건물이다. 오산마을회관은 고수면 장두리 오산 443-1번지에 대지 200평 위에 건립된 마을회 관이다. 땅은 마을주민인 김영탁씨가 104평을 기탁하여 정부지원금과 마을주민들의 부담으로 2005년 6월에 착공하여 8월 말에 완공하였다. <그림 22. 오산마을회관> 오산마을모정은 2001년 7월 26일에 건립된 오산마을의 모정으로, 정면 2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이다. <그림 23. 오산마을 모정> 또한 마을 회관 앞에는 또 다른 6각 형의 모정이 있다. 이 모정은 농촌진흥청과 전라북도농업기술센터 및 고창군농업기 술센터가 지원한 농작업안전모델 시범사업(2010~2012년)으로 선정되어 건립된 모 정이다. 오산마을 우물은 오산마을회관 뒤에 있으며,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 오산마을
<사진 18> 월계 마을회관
주민들이 함께 이용하던 공동우물이다.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림 24. 오산
월계마을의 모정인 풍락정(豊樂亭)은 단기 4326년(1993) 4월 3일에 월계마을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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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재직 중이다.
한편 고수면 장두리 299번지에는 고성교회(563-3663)라는 기독교 교회가 있으며, 담임목사는 강병인목사이다. 장두리의 주요한 식당으로는 고수면 장두리 21-4에 있
(3) 장두리의 행정공무원들
는 장두가든(561-3357)이 있다. 그리고 장두리 547번지에는 김길남이 운영하는 광
김영대(金永大, 33년생)는 고창군청 계장과 공음과 고수의 부면장을 역임하였고, 김
산계란(563-9910)의 양계장이 있다.
정수(61년생)는 고수부면장으로 있다가 현재 흥덕부면장으로 재직 중이다. 월계 김 유현(35년생)은 대산 산업계장을 역임하였고, 김영조(35년생)는 고창군청에 근무하
6)
사람들
였다. 현재 장두의 김정수(63년생)는 고창군청 계장으로, 오산의 양제범(66년생)․김
장두리 사람들은 현재 전국 각지에 살면서 다양한 직종의 직업을 가지고 살았고, 살
기철(77년생)․김동명(84년생), 월계 이재열(71년생) 등은 군청에, 운월 김은중(86년
아가고 있다. 많은 장두리 사람들을 지면에 싣고자 하였으나 일일이 확인할 수가 없
생)은 공음면사무소에서 재직 중이다.
어 확인된 사람들만 이곳에 올렸다. (4) 장두리의 경찰공무원들 (1) 장두리의 선생님들
월계 출신으로 김영창(42년생)은 완도경찰서(경위) 경무계장을 거쳐 정읍 산외파출
월계 출신으로 박병권(朴炳權 1930년생)는 고창남중학교장, 박병중(35년생)은 전남
소장을 역임하였다. 박이규(40년생)는 고창경찰서(경사)에 근무하다가 무장파출소장
여고에, 박수철(朴洙哲1948년생)는 경기도 안산시 양지초등교장을 역임하였다. 김영
를 지냈다. 그 외 경장 이의근(53년생), 경사 이정환(62년생)은 서울경찰청에 근무
상(金永相 1949년생)은 남원여고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순창여중교장으로 재직 중
했었고, 경위 이동환(63년생) 등은 현재 서울경찰청에 재직 중이다. 장두 김강만(55
이고, 박성규(朴成圭 1953년생)는 정읍 칠보고등학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이리공고
년생)은 서울 서초동 중앙법원에, 김주연(69년생)은 검찰사무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선생님들은 김영일(51년생)은 서울 한양공고에 근무하였고, 박한구(56년생)은 고창남중학교에 재직 중이다. 김영범(56년생)은 전남 여수 화양고
(5) 월계의 한전 근무자들
등학교에, 장두출신의 박정기(61년생)는 수원 면무초등학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월
박일규(37년생)는 한전 고창지점장과 전북도본부 영업과장, 김영원(42년생)은 한전
계 박진(59년생)과 장두 정관수(59년생)는 장성고등학교에, 정용수(68년생)는 전주
광주전력관리처 변전부 과장, 김영중(49년생)은 한전 광주 노조위원장과 전력관리처
영상미디어고등학교, 정갑수(70년생)는 광주 정광고등학교에, 오산 태생으로 양국현
송전부 정비실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박병휘(50년생)는 한전 신광주전력소에서 근무
(68년생)은 한양공고에 재직 중이다.
한바 있다. 김춘수(58년생)는 고창한전에 근무하고 있고, 김미향(72년생)은 고창한 전에서 근무하였다.
(2) 장두리의 장교와 직업군인들 월계에서 태어난 김옥현(金沃鉉, 32년생)은 예비역 육군대위로 예비군창설시(68년)
(6) CEO와 공공기관근무자들
초대 고수중대장을 역임하였고, 박병상(31년생)은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였
월계 김영철(55년생)은 서울에서 두성칼라출판이라는 인쇄업을 하고 있으며, 김창수
다. 박원규(47년생)는 예비역대위(사무관)로 서울시 중대장을 역임하였다. 오산에서
(37년생)는 고창산림조합에 근무하였다. 김영주(56년생)는 고창건강보험공단 과장
태어난 김준근(1954년생)는 예비역 대위로 고수면 면대장을 역임하였고, 장두 김영
에, 박흥규(57년생)는 서울지하철공사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월계 김영화(49년생)
옥(48년생) 또한 고수중대장을 역임하였다. 장두 김진수(78년생)는 현역 대위로 재
는 광주은행, 월계 김용달(47년생)과 장두 김영열(45년생)․김영관(47년생)․김영봉
직 중이고, 월계 이삼성(50년생)은 예비역 상사로, 박종관(70년생)은 현역 상사로
(49년생)․김영성(59년생 재직 중) 등은 고창교육청과 초등학교에 근무하였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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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60년생)은 대산초등학교 행정실에, 월계 김덕수(64년생)는 고창교육청 에, 박수성(70년생)은 서울소방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 월계의 이동순(54년생)․이동
8) 장두리 역대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 장두리의 역대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월계
님(57년생)․이동숙(60년생)은 고수단위농협에 근무하였다.
7)
지도자
부녀회장
지도자
부녀회장
지도자
부녀회장
1981
김영구
하옥순
양재해
김경례
김인술
권영녀
1982
김영구
하옥순
양재해
김경례
김인술
권영녀
1983
김영구
하옥순
양재해
김경례
김영만
권영녀
1984
김영래
하옥순
양재해
김경례
김영만
권영녀
1985
김영래
하옥순
양재해
김경례
김영만
권영녀
1987
김영후
박영희
양재해
김경례
김영만
권영녀
1988
김영후
박영희
양재해
조영숙
김영만
권영녀
장두
1989
김영후
박영희
양재해
이영순
김영만
권영녀
51.1.18. 양동석 52.10.13. 김영학 60.03.01. 김영만 61.08.09. 김택석 63.08.01. 김영덕 64.07.03. 김유현 65.04.05. (참사)서성수 65.07.01. (참사)김영후 66.03.01. (참사)김유현 67.04.01. (참사)김영후 68.04.01. (참사)김유현 69.04.01. 김유현 71.04.10. 박원휴 72.01.01. 김영만 73.07.01. 김인술 77.03.01. 김흥석 80.01.01. 김영렬 84.01.01. 김인술 90.01.01. 김춘경 94.01.01. 김점동 07.01.01. 김원경 08.01.01. 김영일 10.01.01. 김춘경 12.01.01. 김영관
1990
박생규
박영희
양재해
이영순
김인술
이효숙
1991
박생규
박영희
양재해
이영순
김인술
이효숙
1992
이상일
박영희
양재해
정두례
김인술
이효숙
1994
이상일
김순자
김홍재
정두례
김인술
이효숙
1996
이상일
김순자
김홍재
정두례
김인술
이효숙
1998
이상일
김순자
김홍재
정두례
김인술
이효숙
2002
이상일
김순자
김홍재
정두례
김인술
이효숙
2003
이상일
김순자
김홍재
정두례
김인술
이효숙
2004
이상일
김순자
류광석
정두례
김인술
김재숙
2006
이홍규
김순자
류광석
이현님
김인술
김재숙
2008
박수용
김순자
류광석
이현님
김인술
김재숙
2009
박수용
김순자
류광석
이현님
김인술
김재숙
2010
이규봉
최남순
서치호
이현님
김인술
김재숙
2011
이규봉
최남순
서치호
이현님
김인술
김재숙
2012
박광수
최남순
서치호
이현님
김영봉
이현례
역대 이장
참사제도는 행정리별로 두었던 이장을 법정리에 한 명의 이장을 두었던 제도이다. 참사제도는 각 행정리의 이장 수를 줄이고 대신 법정리에 한 명의 참사라는 이장을 두어 월급을 조금 더 올리고 법정리의 마을 업무를 모두 처리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1965년 처음 시행하였고, 1969년에 폐지되었다. 장두리의 각 행정리의 연도별 이장단 명단은 다음과 같다. 월계 51.01.18. 51.06.30. 52.10.13. 53.11.10. 54.11.30. 60.05.25. 61.08.09. 63.07.01. 65.04.03. 67.12.09. 72.01.01. 73.01.01. 74.01.01. 75.01.01. 76.01.04. 86.01.01. 88.01.01. 90.01.01. 94.01.01. 96.01.01. 06.01.01. 12.01.01.
오산 박병엽 박석규 박원휴 박병규 박병엽 박병호 박원휴 박종휴 박병호 박원휴 김유현 이수성 김영중 이화영 박병곤 박태규 이수성 김영곤 강원주 박병곤 김영달 박생규
72.01.01. 74.01.01. 74.09.01. 76.02.01. 78.03.01. 79.01.01. 82.01.01. 84.01.01. 89.01.01. 90.01.01. 99.01.01. 06.01.01. 10.01.01.
양재해 김홍재 양재해 오은기 양재해 양중현 정일남 김재남 정일묵 김재남 김재훈 박성무 김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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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 34 -
밤중에 비가 많이 오면 누구인지 모르지만 징을 치며 잠자는 주민들을 깨워 뒷동산 으로 대피시켰고, 큰물이 지나가 훼손된 마을 안길 등은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울력으로 복구하곤 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서로 협동을 잘해서 첨단 통신시설과 복구장비가 갖춰져 있는 지금 못지않게 자연재해에 대한 대처를 잘 했던 것 같다. 많은 추억들 중에서도 잊혀 지지 않는 추억으로 ‘도깨비불’, ‘한문공부’, ‘열여덟살 중 학생’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적어본다.
< 도깨비불 > 1960년경 월계 앞들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안 되어 논두렁이 구불구불한 재래식 논들뿐이었고 수리시설도 잘 안된 상태여서 가뭄이 들면 논에 물대는 일이 여간 어 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집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내가 단 둘이 살 고향 월계마을
고 있던 터라 그 어려움이 더욱 컸다. 이경연
그 해도 가뭄이 들어 비가 올 것 같으면서도 오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 다. 월계 앞들에 있는 우리 논은 물을 대지 못해서 모내기를 못하고 있었는데, 어머
병술년, 나는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 157번지 월계마을 아랫동 제일 끝집
니와 나는 어두운 한밤중을 택하여 논에 물을 댈 수밖에 없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
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월계에서 살았다. 그 후에는
1946
호롱등불 하나에만 의지하여 논으로 가고 있는데 저만치 장두마을 앞에서 시퍼런 도
직장관계로 여수, 광주, 광양과 목포에서 살다가 직장퇴직 후 현재는 광주에서 살고
깨비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와 나는 무서움에 떨면서도 논에 물을
있다. 꿈 많고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 죽마고우 김영달, 김용숙 등과 뛰놀았던 그때의
대겠다는 일념으로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논 입구에 있었고, 내가 물을 끌어오기
일들이 그립기만 하다.
위해서 월계 앞 신작로를 따라 먹거리 근방에 갔을 때였다.
지금은 간이상수도 시설이 설치되어 각 가정에서 수돗물을 사용할 수 있지만,
어머니가 큰소리로 나를 불러서 뒤를 돌아보니까 장두마을 앞에 있던 도깨비불이 어
그때는 마을 앞 하천에서 새벽이면 맑은 물을 길어와 물 항아리에 담아놓고 식수로
느새 어머니 홀로 계시는 우리 논까지 다가와 있는 것이었다. 놀란 내가 큰소리를
사용하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마을마다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아 밤이 되면
지르면서 어머니 있는 곳으로 달려가니까 도깨비불은 다시 장두마을 앞으로 가더니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하고 밖에 나갈 때는 호롱등불을 들고 다녔다. 칠흑 같은 어
학천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어머니와 나는 무서움을 이겨내고 기어이 논에 물을 가
둠이 지배하던 그 밤들은 얼마나 무섭고 불편했던지!
득 채우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설날에는 친구들과 함께 동네어르신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세배를 드리고
그 후로 도깨비불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어머니와 내가 한밤중에 물대기를 하면
덕담을 들었다. 정월대보름에는 논둑에 불을 지르고, 불씨를 넣은 깡통을 빙빙 돌리
서 실제로 보았던 시퍼런 도깨비불과 도깨비는 사람이 큰소리를 지르면 달아난다는
며 쥐불놀이를 하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하여 잠을 안 자려고 애썼지만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도 장두마을 앞에는 도깨비불이 있는지 퍽 궁금하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던 일들이 생각난다.
다.
마을하천이 지금은 개수가 다 되어 비가와도 홍수피해의 위험이 없지만, 그때 는 하천제방도 없어서 비가 조금만 와도 마을 안길까지 물이 넘쳐흘렀다. 여름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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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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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4년간 어머니와
없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나는 뜻밖의 말씀에 어리둥절하였지만, 어머니는 나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나는 농한기인 겨울철을 이용하여 한문공부를 하였다.
의 초등학교 졸업반 담임선생님이셨던 내창의 안행연 선생님을 찾아뵙고 나이가 먹
당시 김영중의 부친이시고, 한학을 많이 하시어 학식이 높으신 오현양반(김종현)께
어서도 중학교에 다닐 수 있는지 자문을 받았다. 그때 어머니는 나를 중학교에 보낼
서 후학을 위해서 한문을 가르치셨다. 한문수업은 천자문(千字文), 추구집(推句集),
결심을 하시고, 다음해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 중 추구집 첫
나는 그 해 여름부터 겨울까지 틈틈이 공부하여 고창중학교 시험을 본 결과 간신히
장에 ‘天高日月明 地厚草木生’은 ‘하늘이 높으니 날과 달이 밝고 땅이 두터우니 풀과
합격하였다. 내 나이 열여덟에 중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중학교에
나무가 잘 자란다’는 뜻과 명심보감에 ‘子曰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
입학하였을 때 초등학교 나의 동기동창생들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나이 많이 먹
報之以禍니라’ 는 ‘공자 말씀하시기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고 큰 키에 동생뻘 되는 후배들하고 중학교를 같이 다니는 것이 재미있기보다는 쑥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화를 준다’는 뜻이 기억에 남는다.
스럽기만 하였으나 혼자 고생하시는 어머니 생각에 마음을 잡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한문공부를 통해 자연의 순리와 이치를 배우고, 가정과 사회
다. 그 덕분에 고등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
생활에 지켜야 할 규범과 예의를 배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때 배웠던 한문은
내가 중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어머니는 내가 하던 일까지 혼자 하시게 되어 그
나중에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와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할 때 얼마나 유익했는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노고와 희생으로 아들이 학생복을 입
지 모른다. 중학교 때는 한문시간이 따로 있었다. 나에게 한문시간은 쉽고 즐거워서
고 모자를 쓰고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니는 것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고
시험을 보면 언제나 100점을 맞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특
한다.
히 1968년 12월 전라남도 여수시청 공무원으로 처음 임용되었을 때 한문을 배운 효
어머니의 그 뜨거운 자식사랑과 교육열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지금 고향에서
과를 톡톡히 봤다. 그 당시 공문서의 중요한 부분은 한자였고, 대부분의 문서에 한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고향을 떠나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하더
를 많이 혼용하였다. 공무원 초년생으로서 하는 일이란 주로 보고서 교정이나 정서
라도 짧은 학력 때문에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당신이 배우시지 못하
등이었다. 만약에 한자를 몰랐더라면 내용도 뜻도 모르고 쓰지도 못했을 것이니 얼
셨음에도 본능적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아시고 자식을 늦게라도 중학교에 다니게 하
마나 어려움이 많았겠는가? 다행히 나는 한문공부를 한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공무
여주신 내 어머니. 지금의 나의 모든 것이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이
원 초년생활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삶에 큰 도움이 되도록 한문을 잘 가르쳐
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께 은혜를 갚아드릴 길도 없다. 오직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주신 훈장선생님, 오현양반(김종현)께 삼가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감사드릴 뿐이다.
< 열여덟살 중학생 >
고향을 떠나 40여년이 지난 후에 아련한 기억 속에 떠오르는 고향과 고향 사
내가 어렸던 시절은 다들 먹고 살기도 어려워서 중학교에 다니는 것은 엄두도 못 냈
람들을 생각하니 그 시절의 삶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추억들
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농사를 짓고 나무를 하며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나
이 아름답고 그립기만 하다. 지금의 월계마을은 내가 지낸 어린 시절보다는 도로나
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간은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내가 중학교
주거환경 등이 많은 발전을 하였다. 자연환경조차도 많이 변하였다. 아름다운 고향산
를 가게 된 것은 어머니의 남다른 자식사랑과 교육열 때문이었다. 또한 중학교를 진
천을 누비며 같이 뛰놀았던 죽마고우들 중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모든
학하게 된 계기는 내창에 살고 있는 나의 이종형 김수일의 진학에서 비롯되었다. 수
것이 변해도 내가 태어나 탯줄을 묻고 꿈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내 고향 고창
일이 형은 나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인데 그 형도 3년이 지나서야 중학교에 진학했다.
군 고수면 월계마을이다.
그러자 어느 날 어머니께서 수일이 형이 중학교에 갔는데, 너는 중학교에 갈 생각이
그 곳에 나의 근본과 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결코 변할 수가 없으니,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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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곳에는 언제나 월계마을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아름 답고 자랑스러운 월계마을이 계속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지면을 통하여 아름다운 옛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씨름, 닭싸움 놀이 등을 시키시면서 선후배, 그리고 친구들과의 적응활동교육을 해주신 것이다. 일손이 딸리는 농번기에 가능하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날을 잡아 일을 할 때 모내 기 때는 모쟁이, 김을 맬 때는 모추기기, 그리고 어른들 일하시는 뒤에서 시키는 일 을 도와 줄 때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는 지혜, 그리고 일터에서 주고받는 대화 속에 서 농민들의 일체감을 엿볼 수 있었다. 일 하는 날은 지주네 집에 온가족이 일손을 모아 함께하는 공동체의식. 이것이 몸으로 실천하면서 행동으로 가르치는 교육이 아 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런 일도 있었다. 몇 몇 친구가 모여 복숭아서리를 하러갔다. 살금살금 몰래 울타 리를 넘어 복숭아를 서리해먹었다. 며칠 후 들려오는 말, 그때 서리하는 과정을 모두 알고 계시면서 충분히 내쫒거나 붙잡아서 혼 줄을 낼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런데 복
(首邱初心) 박수철
숭아 주인말씀 “오죽 복숭아가 먹고 싶었으면 그랬을까”하고 모르는 채 넘겨주신 사 랑과 아량, 그리고 용서로 가르쳐주시는 것이 참된 산교육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부귀영화를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은 청렴결백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가까이하고 도 이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청렴하다고 할 수 있다. 권모술수를 모르는 사람은 고상하다고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고상한
그때는 가난하고 농사일이 주된 생업이기에 소를 기르는 가정이 많았다. 매일 소 에게 풀을 뜯기기도, 꼴을 베기도 했다. 어느 날 소를 몰고 가 산에 소를 풀어주고 잔디에 누웠다가 잠이 들어 어두워진 줄도 몰랐다. 잠이 깊이 들어있었을 때 소가 와서 잠든 나를 혀로 핥아 깨워서 집으로 데려다 준일이 생각이 나기도 한다. 비록
인격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사람 그리고 한가정의 인간애가 사회를 훈훈하게 만들고 고결한 인품은 그윽한 향 기로 사회를 정화시킨다. 진흙탕 속에서 뿌리를 내렸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식
짐승이지만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지혜를 갖지 않았나. 애완견 한 마리를 기르면서 생각해 본다.
물이 연꽃이다. 꽃은 수면보다 높이 올라 피며, 연잎의 표면은 물이 스며들지 않고 그 위에 물방울을 맺혀 떨어뜨린다. 연꽃이 피면 시궁창의 냄새는 사라지고 연 향기 가 가득해 진다. 또한 우아하고 곱기는 다른 어느 꽃의 추종을 불허할 만하다. 부귀영화도 모르고 권모술수 더더구나 모르며 있을 수도 없는 맑고 깨끗한 고장, 그 야말로 순수한 농심의 마을 농자천하지대본을 실천하는 농촌마을에서 유아기와 초, 중등 과정을 겪으면서 배운 잠재적 교육과정이 바로 이것이었다. 훌륭한 배움도 없 고, 가진 것도 많지 않지만 생활 속에서 가르침을 실천한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
초, 중, 고를 마치고 객지에서만 40여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였다. 더구나 몸으로 실천하고 행동으로 보여준 잠재적인 교육내용을 몸에 익히고 실천해야하는 직업이었 다. 사회의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고, 고매한 인품과 덕망(仁 義 禮 智 信)을 갖 추고 건전한 인성을 함양시켜 주어야하는 人師로서, 우리 마을 어른들과 산천이 모 두 잠재적 교육과정이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대과없이 직장을 마무리할 수 있었 고, 모범적인 교육활동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제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한 지금 고향을 나올 때의 산천도 모두 변했지만 아랫동
우리 마을은 한낮의 뙤약볕을 피해 동네 앞을 지나는 냇가의 다리 밑 모래밭에서 한더위를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여서 낮잠도 자기도하고 농사이야기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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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냇가에 속이 텅 빈 마을의 수호신만은 마을의 희로애락을 알면서 굳건히 마을을 지키고는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농촌의 현실은 어쩔 수 없는 일, 동네에서 어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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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들리지 않고, 고등학교 2학년이 제일 막내둥이라는 말이 안타깝기만 하
후 학교에 가기 위하여 집을 나와 같이 갈 친구나 형들을 찾아보니 아무도 없다.
다. 하지만 이런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향을 가진 우리들이 고향을 찾아 더욱 살기
이거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겁이 덜컥 났다.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약 3km
좋고 발전된 고향마을이 되도록 노력해 화려한 꽃을 피우는 고향마을을 가꾸어 가는
나 되는 거리이다. 어린 나에게 이 거리는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오가기가 쉽지
게 우리들이 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싶다.
않았기 때문이다. 한 시간 정도는 걸어야 하며 야산 소로 곁에 있는 공동묘지며, 연
어린 시절의 생활을 다시 한 번 회상할 기회를 주신 김영춘 실장님께 감사드립니 다. 감사합니다
동 방죽 증산봉 등에 얽혀 있는 여러 이야기 즉 날이 궂은 날이면 도깨비가 나온다 거나 연동 방죽에 빠져 죽은 처녀 귀신이 나온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내 용의 이야기들은 나 혼자 이러한 날씨에 학교에 가기에는 극한 공포 수준 그 이상에
*수구초심 - 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굴로 머리를 향한다는 말로 “고향을 그리 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
속하는 것이다. 온 몸에 힘이 절로 빠질 수밖에 없다. 학교에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에 점심 식사를 준비하러 오셨는지 어머니가 계신다. 힘이 없이 걸어오는 나를 보시더니 “너 어찌 학교에 가지 않고 집으로 오는 거니?” 하고 물으신다. “다른 애들이나 형들이 모두 학교에 가버렸어. 나만 혼자 남 았어”라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씀을 드리니 어머니께서 화를 내시었다. 당연히 학 교를 가지 않았으니 나를 혼낼 것 뻔 한 일이었다. 한참동안 어머니에게 혼을 내시 다가 “너! 빨리 학교에 안가 학교에 늦겠다.”라고 말씀을 하시자, 나는 “학교에 다녀
1959
6월의 어느 하루
오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도망치듯 집을 나와서 학교를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김영일
어머니에게 혼이 나고 학교 시작 시간이 늦을 것 같아 나의 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요즈음 며칠 많은 비가 내린 위 끝이라 그런지 오늘 날씨도 가랑비라도 내릴 듯한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 길을 지나 산길 소로로 접어드니 바지와 고무신은 엉망이다.
을씨년스런 날씨다. 비가 조금만 와도 질퍽질퍽한 마을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보
바지 아래 부분은 온통 진흙이 달라붙어 있었고, 고무신에는 진흙이 들어와 걷기가
편적으로 익숙해져 있다.
쉽지가 않았다. 요리 저리 덜 질퍽거리는 곳을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야 하니
면소재지에 있는 고수국민학교까지의 거리는 마을에서 그리 가깝지가 않았으며 학
걷기가 여간 사납고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연동 방죽에 물을 공급하기 위
교까지 가는 길의 여정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마을에서 벗어나면 버스가 다니는 신
하여 만들어 놓은 현장 똘길, 이 길도 상당히 반듯하게 긴 일자로 뻗은 길이어서 한
작로 길, 야산의 숲길 소로, 연동 앞길, 연동 방죽을 따라 걷는 길, 현장똘 길, 진생
참을 걸어야 한다. 땅이 질퍽거리기에는 산길 소로 황토길과 별반 차이는 없다. 그러
(증산)이 마을 앞길 그리고 조산저수지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개천을 건너 학교 정문
나 이곳에 오면 시야가 시원하게 트인다. 고수국민학교, 황산, 예지터, 신평마을이 시
으로 향하는 길의 야산 숲 사이로 난 황토길과 기타 진흙길 등은 비가 왔거나 비가
야에 들어온다. 진생이 마을 앞길과 개천을 지나고 학교 정문과 운동장을 지나 교실
오는 궂은 날이면 걷기가 여간 사납지가 않았다.
이 있는 건물로 가면 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논에 일하러 나가시고, 나는 나의 방에서 산수 숙제도 하고 국어 책을 읽는 등 공부도 하며 놀다보니 어느새 정오 무렵이 된
현장 똘길을 거의 다 지나왔을 무렵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학교며 마을들을 쳐다보고
것 같았다. 오늘은 오후반 이라 오후 1시까지 학교에 가면 된다. 책보를 펼친 다음
있다가 무심코 내가 지나왔던 연동 방죽 쪽을 바라보니 연동 방죽에서 현장 똘길로
책을 책보 위에 놓고 두리마리처럼 두루룩 말은 다음 등에서 가슴 쪽으로 책보를 맨
접어드는 곳에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니 않는가? 어머니는 나에게 학교에 빨리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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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짓을 하신다. 나는 다시 학교를 향하여 걷기 시작하여 진생이(증산) 마을 앞길
밥상이었지만 오순도순 둘러앉아 행복한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사시던 분
과 개천을 지나고 운동장을 지나 교실로 들어가니 교실에는 아직 선생님이 들어와
들 모두는 저의 마음속 깊은 곳에 겹겹이 추억을 쌓아주시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
계시지 않았다.
야기 거리를 갖도록 해 주셨던 분들입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인 어느 땐가 어머니께서는 가족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와
어린 시절, 마을의 어떤 어르신들은 소중한 제 불알을 여러 번이나 까련다고 놀려대
서 말씀을 하시다가 내가 이때의 일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때 현장 똘길
어 좁다란 길에서 만나면 질겁하여 수숫대 울타리 개구멍으로 무엇이 빠져라 도망
입구에서 나에게 학교에 가라고 손짓으로 말씀하신 후에도 내가 학교 운동장으로 들
다니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인이 된 그 무섭던 어른들이 이젠 그리움 되어 많이
어가는 것과 그때 내가 질퍽거리는 길을 잘도 가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어린 이 당
보고 싶어집니다.
시의 시절이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지금도 그 기억이 너무 생생이 남아있다.
잘 산다고 하여도 고만고만하여 다 가난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허름한 담장
어린 시절 아름답고도 그리운 추억으로 나의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있다.
너머로 작은 것이지만 서로 주고받으며 돌보는 인정 많은 마을이었습니다. 그 집의
이제는 뵙고 싶어도 뵐 수 없고 목 놓아 불러도 대답이 없으신 어머니!
숟가락 숫자까지도 알 정도로 남의 집 사정을 훤히 꿰면서 정을 나누며 사시던 그
그립고도 보고픈 어머니 고맙습니다.
분들은 오래도록 우리 마을을 지켜내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마을이 남향이어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였습니다. 마을 앞에는 시냇 물이 흘러 언제든지 빨래하고 목욕할 수 있어 아이들이 다른 마을 아이들보다 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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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고향을 그리며-
뽀얗고 개운하였습니다. 마을 앞과 동서에 있는 넓은 들은 살림에 윤기가 나도록 해 주었습니다. 박성규
배산임수인 월계마을은 마을 뒤로 아담한 뒷동산이 있어 보기에도 참으로 명당에 자 리하였습니다. 우리 월계 마을은 교통까지도 편리하여 다른 마을 사람들이 부러워하
눈을 감고 고향을 그려봅니다.
여 어린 시절 우리 친구들 사이에선 월계에 산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다른
그곳은 저의 어린 시절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고 지금도 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마을 친구들에게 폼 잡으며 마음껏 우리 마을을 자랑하여도 되는 그런 마을이었습니
주면서 아련함과 그리움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다.
여름에도 어름장처럼 찬 생수가 솟아나 땀띠를 죽이던 싱국의 참새암처럼, 고향을
놀이가 변변하지 않던 시절, 마을 구석구석과 뒷동산은 우리의 놀이터였습니다. 그곳
떠나 40여년이 더 지난 지금도 지쳐있을 때 고향에서 보내오는 격려의 힘은 희망의
은 미끄럼틀도 되었고 가이생과 진또리, 숨박꼭질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또 대나무
샘물이 됩니다.
딱총을 만들 수 있는 공장도 되어 주었습니다. 놀다가 배고프면 삐비를 뽑아 먹거나
더듬어보니 정답던 작은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구불구불한 좁은 고샅길들
소나무를 꺾어 껍질을 벗겨 먹었고, 심심하면 풀피리를 만들어 불었습니다.
이 서로의 집들을 연결하여 주던 고향 마을의 옛 모습이 기억 속에 또렷이 되살아납
겨울이면 버선 양말 다 젖고 입은 옷이 두텁지 않아 매우 추웠어도 노는 재미에 푹
니다. 70년대 초반의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집들이었던 옛 마을의 모습은 기억 저편에
빠졌습니다. 어린 시절 즐겁게 놀이하던 그 많던 놀이 이름도 세월과 함께 잊어버렸
물러앉았고 반듯한 포장길로 단장되어 언제나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줍니다.
듯 저의 어린 시절 친구들도 뿔뿔이 헤어져 쉽게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집들에는 택호(동촌댁, 흥덕댁, 각동댁, 생말댁, 팽기댁, 중리댁 등등)를 가지고
눈 내리는 동지섣달 긴긴밤, 어릴 적 고향의 한 분 한 분의 이름들과 얼굴을 그리면
있었지요. 그리고 그 집에서는 택호를 가지신 어른과 함께 아이들이 풍족하지 않은
너무도 그립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서럽도록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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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바글바글 했었고,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그곳에 는
아련해지네요)은 월계사람들만이 아는 고유지명으로 이런 지명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추억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월계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을이 만들어진 후 기나긴 역사의 삶 속에
부지런히 농사일을 하시던 어르신들, 고무줄 놀이하던 여자 친구들과 씩씩하던 마을
서 우리 월계인들이 하나하나 스스로 이름 지어 자자손손 이어 정겹게 불러주던 그
의 형들, 혼수품에 쓰려고 예쁜 수를 놓던 아리따운 누나들, 귀엽던 코흘리개 동생들
곳들에는 우리 월계사람들 마음속에 전설과 추억과 역사가 서려있는 소중한 지명들
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기에 만날 수도 없고, 소식도 알 수가 없네요. 그러니 이렇
입니다. 그래서 더욱 오랫동안 불러주고 싶은 우리만 아는 우리만의 지명입니다. 이
게 마음만 애가 타 그립기만 한 것일까요?
곳은 우리 모두의 부모님들께서 한평생 땀 흘려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입히고, 가르
저녁이면 당수기압소리를 울리던 이규 형, 고기가 손안으로 저절로 들어오는 재주를
치던 삶의 터전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하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되어
갖고 있어 물고기 잡기 귀신 상철이, 원숭이처럼 나무 잘 타던 상일이 형, 공 잘 차
계승될 자리인 것입니다.
던 영중이 형, 썰매 잘 타던 봉기 형, 초등학교 때 통학반장이었던 수철이 형, 저녁 늦게까지 영어를 외우고 다니시던 원규 형, 상중이 빡빡 머리빡에 돌 던져 피 흘리
김영춘 친구의 수고로 여기에서 살았던 분과 지금도 살고 있는 월계인들의 역사와
게 했다고 혼내던 고모님, 동네 동생들 싸움 붙이게 하여 울게 했다고 무척 혼내던
추억을 한데 모아 내 고향 이야기를 담은 책이 발간된다니 반가운 마음입니다.
무서운 어르신들 등등
고향의 역사와 추억을 알려주는 이 소중한 책이 앞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기억 저편을 되살려 보면 제 추억속의 이야기는 종일토록 하여도 끝이 없을 것입니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북돋아 주리라 믿습니다. 끊어졌던 인연의 끈이 다시
다. 그분들 한분 한분은 저의 추억 속에서 모두 아름다운 분들이셨고, 지금도 그때의
연결되는 기회가 될 것이며, 모두는 이 책과 함께 영원히 월계인으로 남아있을 것입
그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니다. 이 시간을 통해 다시 한 번 월계라는 마을에 인연을 두었던 한 분 한 분을 그
아! 저의 어린 시절 추억을 그렇게도 풍요롭게 만들어 주시었던 당신들은 지금 다
리워해보는 시간이 되었음을 고백하며 옛 추억을 저 혼자 마음껏 헤아려 보는 기쁨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요!
을 맛보았습니다. 우리 월계인 모든 분들, 소원하시는 일들이 다 이루어지시고 항상
당신들도 지금 저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밤잠을 설치시는지요?
건강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엎드려 큰절 올립니다.
당신들도 제가 당신들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그리워하시는지요? 아~당신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2013년 2월 1일
그래도 저는 청우회란 모임을 통해 지금도 고향의 깨북장구 친구들을 1년에 두 번은 만날 수 있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다 환갑이 넘거나 가까워져 머리는 희 끗희끗해졌어도 만나면 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코흘리개 적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모릅니다. 그 만남 속에는 모두가 천진난만해져서 친구 이름과 별명을 함부로 부르 면서 하는 짓이 모두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행복을 맛보곤 합니다. 친구들 모두가 다 건강하여 오랫동안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정겹기도 한 마을 곳곳과 마을주위의 땅 이름을 되뇌어 봅니다. 아름다운 그 이 름들은 누가 지은 것입니까? 마을의 지명(윗똠, 아랫똠, 먹거리, 너덜이, 신곡, 용호철, 방죽안 등등 기억이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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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선배들이 함께 절구재로 나무 땔감을 구하러 가서 해질 무렵 집으로 지게를 지고 왔다. 이러한 나무꾼 행렬이 줄 을 이었고, 어머님들은 먼 산에서 산나물을 캐어 봇짐을 머리에 이고 오던 행렬이 눈에 선하다
60년대 초등학교 시절, 겨울농한기 저녁이 되면 온 식구가 새끼를 꼬았다. 잠은 짚 한 타래 정도는 새끼를 꼬아야만 잣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사랑채에서 가마니를 저 녁 늦게까지 짰다. 다음날 가마니를 곱게 다듬어 고창 장날에 내다 팔아 우리들 옷 가지는 물론이고 없던 시절 반찬거리로 꽁치 한 마리라도 사가지고 오면 온 식구들 이 아주 맛있게 먹었다. 집에서 가마니를 짜가지고 동네 아저씨 구루마에 싣고 어머님 따라 고창장날에 간 다. 그러면 어머니는 장터에서 팥죽 한 그릇을 사주셨는데, 그 팥죽이 그렇게도 맛있 었다. 지금도 고창시장을 둘러볼 때마다 어머니가 사주시던 그 맛있는 팥죽이 가끔 생각이 난다 보낸 개구쟁이 어린 시절
초등졸업 후, 동네 친구들과 추산봉 외딴집에 깜깜한 저녁 늦게 가서 몽둥이로 시위 하며 서리 한 기름진 토끼와 닭을 월계에 가져와 삶아 먹었다. 고기를 먹고 난 뒤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였다. 아마도 당시 가난해서 고기를 먹지 못하다가 갑자기 기
나의 고향 월계는 무한한 어린 시절의 꿈을 키워오던 곳이다. 나의 탯줄을 끊고 나
름진 고기를 먹으니 배탈이 났던 것 같다.
온 곳으로 언젠가 또 탯줄을 묻어야 할 곳이다. 고향에 가면 엄마의 품에 안기듯 포
우리 월계 마을은 정월 대보름이면 불 깡통 돌리고 논두렁에 쥐불놀이 하며 마을 앞
근한 느낌이 든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온 곳으로 수많은 추억이 간직된 곳으로
들판에서 장두 청년들과 불 싸움을 하였다. 모든 것이 끝이 나면 집에 돌아와서 어
꿈속에서도 자주 나타나기도 한다. 지나온 어린 과거를 회상해보면.......
머니께서 차려준 나물과 찰밥이 너무 맛있었다. 지금 어딜 가도 어린 시절 어머니의 밥상 맛을 따르지 못하는 것 같다.
동네 앞 작은 보 냇가에서 인규 ․ 성규 ․ 상철 ․ 상준 ․ 규봉 ․ 주연 ․ 영국이 등과 물 장구치며 놀았다. 우리 친구들은 편 갈아 물싸움을 하다가 목욕 중에 옷을 감춰버려
초등학교 다니면서 국도변 나무 전신주 호롱 깔대기를 돌멩이로 맞췄다. 그러면 전
친구들을 골탕 먹이기도 하였다. 작은 시냇가에서 큰 비만 오면 봇물이 빠져 물고기
신주의 호롱 깔대기에서 쨍하며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그렇게 듣
를 손이나 쪽대로 잡아 물고기를 입에 물고 또 잡았다 하면서 소리치며 과시도 하였
고 싶었는지 많이도 던졌던 것 같다. 우리 마을 월계 뒷동산은 우리가 얼마나 놀았
다. 그리고 잡은 물고기를 맛있게 끓여서 나누어 먹었던 시절이다.
던지 잔디가 다 닳아 없어졌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흙이 나오도록 진또살이를 하고 놀았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가로막기, 못치기, 딱지치기, 자치치기 등을 하며 마음껏
더운 여름철 겁도 없이 목욕을 깊은 안골 방죽에서 하였다. 싱국 얼음속 샘에서 땀
놀았던 그 시절이다. 이렇게 놀다보면 어머니께서 손수 길쌈을 해주셔서 만든 무명
때기 죽인다고 목욕하였던 것도 생각이 난다.
솜옷을 손수 세탁하여 깨끗이 입혀 주시었다. 그러나 이것도 놀다보면 하루를 못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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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도리는 찢기고, 아랫도리의 무릎과 엉덩이는 다 닳아져 어머니께 야단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늘 손수 기워주시고 빨아주시던 어머님한테 미안 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6살쯤 되었을 때 인가보다. 우리 마을 가운데뜸 박석규씨 집 앞 마을 공동우물 속에 하늘이 비쳐 우물 아래를 내려 보다가 우물 속에 빠져버렸다. 6살 때의 기억이 라 다른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것만은 언제나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당시 동네의 어른 한 분이 밧줄을 건네줘서 나왔던 기억이 있다. 죽음의 고개를 넘나들었 지만 역시 내 고향은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곳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새마 을사업으로 완전히 천지개벽되어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당시 같이 뛰놀던 친구 ․ 선배 ․ 후배들은 고향을 떠나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마을은 평생 고향을 지키는 몇 사람만이 남아있다 요즘 점점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이젠 나도 예순이 다가오니 더욱 그런가보다. 다시는 그런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겠지만 마음만은 항상 어린 시절의 많은 사람들이 그립고 보고 싶다. 이런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어 고향이 좋다
추억이 새롭다!
이제 고향에 가면 옛날 어른들은 거의 돌아가시었고, 나의 고향 월계를 완전히 떠나
박경수
버린 가구도 21가구나 된다. 우리 옛 친구들과 사람들이 떠난 마을에는 타지에서 내 려와 터를 잡아 살아가는 가구도 12가구나 된다. 나도 나의 고향 월계를 떠나 살지 만 월계에 가까운 고창에 살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자주 부모님을 뵙 기 위해 마을에 가지만 역시나 사람이 바뀌고 줄어드니 옛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아마 나의 이러한 마음은 고향을 떠나 사는 동네주민들도 마찬가지일 것 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한다. 객지에서 살다가 고향이 생각나면
내가 근무하는 보건환경연구원이 임실로 옮겨진 뒤 멀리 출퇴근해야하는 불편함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내가 자란 고향마을과 비슷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왠지 모르게 편안함을 느낀다. 고향 마을 이야기를 만든다는 소식과 함께 글을 부탁받고 꼬불꼬불한 논두렁길과 하천제방 길을 걸어 보았다. 어언 50여년의 시간을 되돌리는 데는 일초도 걸리지 않았다. 임실의 꼬불꼬불 논두렁과 제방에 내 고향 월계마을을
한 번 들러 보면 좋을 것 같다.
겹쳐보니 어느새 어릴 적 추억이 깊이 배여 있는 나의 고향이 떠올라졌다. 내가 태어나고 살던 곳은 고수면 장두리 325번지다. 8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정을 나 누며 살던 곳으로 월계의 동생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우리 집 뒤에는 제대로 된 이름도 없는 나지막한 동산이 있었다. 이름 없는 뒷동산 을 넘으면 다랑이 논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논들을 지나면 작은 밭 사이에 감나무 가 몇 그루 서 있었다. 감꽃이 피고 열매 맺는 계절이면 떨어진 감꽃과 감을 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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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그곳까지 단숨에 뛰어가곤 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머리를 감싸 안고 슬그머니 눈을 떠보았다. 겨우 눈을 떠보니 술에 맞아 정신 줄을
감꽃과 떨어진 감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간식거리가 되기도 했다. 아직 익지 않아
놓은 아들을 근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눈이 들어왔다. 물 한 모금을 마
떫은맛이 나는 땡감은 된장을 풀은 물에 우려먹던 맛은 지금도 입속에 여운이 남아
시고 정신을 차려보니 상일이 형 집이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온 뒤 일
있다.
주일 동안 음식이 몸에서 받지 않아 먹지도 못하고 물만 먹는 신세가 되었다.
동생 마을인 운월에서 형 마을인 월계를 가기 위해서는 꾸불꾸불하고 울퉁불퉁한 농
나중에 들으니 형들과 술을 마시다가 먼저 자리를 떠 집으로 가다가 오리방죽에 빠
수로를 한참 지나야 한다. 농수로를 지나면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구릉진 마을
진 것이다. 오리방죽에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헤매다가 거의 탈진 상태에 빠지고 말
어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낼 때 상여를 받치는 받침
았다고 한다. 당시 조금만 더 늦게 구했다면 아마도 익사했을 것이다. 상일이 형이
틀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죽은 사람의 혼이 붙어 있어서 나를 기다릴 것 같은 무
얼큰하게 취해서 집으로 가다가 오리방죽을 헤집고 다니는 나를 발견하신 것이다.
서움에 이곳을 지날 때는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어쩌다 어두운 밤 집에 가기위해
나를 급히 오리방죽에서 꺼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으로 이송할까도 생각했으
이곳을 지나가야 할 때면, 심장박동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렸던지 모른다. 조그만 소
나 우선 상일이 형 집으로 옮겨 예비군복으로 갈아입히고, 집에 연락을 취해 어머니
리라도 내면 근처에 있던 귀신들이 알아차리고 나를 데려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으
를 오시라고 한 것이었다. 당황스런 모습으로 나를 지켜보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
로 숨 쉬는 것도 참고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다. 그리고 주변의 소리
각이 난다. 자식 하나 잃을까봐 노심초사하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한
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에 도착하면 온 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마음이 든다.
지금 보면, 손에 닿을 듯 이렇게 가까울 수가 없는데 기억 속의 형 마을은 멀기도
다음날 고수초등학교에서 열리는 추석맞이 里대항축구시합이 있는 날로
했다. 그때 마을은 참 자연스러운 형태였다. 구불구불한 하천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
보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 대신 상준이가 골키퍼를 보았다. 그런데
어 있었다. 그리고 월계천에 제방이 높게 쌓여 있지 않아서 비가 조금만 많이 오거
경기도중 황산팀 선수들에게 우리 팀의 골키퍼인 상준이가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나 장마철이면 마당까지 물이 들어오곤 하였다. 우리집 마당 바로 앞이 냇가였고, 늘
내 대신 상준이가 골키퍼 보다가 다쳐서 나는 꼭 죄지은 심정이 되었었다.
물이 넘쳐 마당까지 들어왔다. 월계천의 물은 장두마을 앞까지 흘러넘치곤 하였다. 초가로 이은 지붕은 추수가 끝난 후 매년 새로운 볏짚으로 갈아 입혔다. 새로운 볏 짚으로 지붕을 단장하면 새 집으로 이사한 것 같았던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의 한 장
골키퍼를
시간은 두께가 무지 얇은 것 같다. 그 때의 일이 그저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글 을 통해 상일이 형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과 친구인 상준이에게 미안하다는 말 을 전하고 싶다.
면이 되었다. 사람은 저마다 조상으로부터 타고난 근본이 있다. 고향은 타고난 근본을 자라게 하 1970년대 초의 새마을운동은 우리 마을도 예외 없이 모습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23번 국도의 큰 도로에서 당산나무 앞 부근까지 넓고 곧게 뻗은 제방길이 생겨났다. 그 과정에서 현재의 상준이 집과 봉기형 집이 있는 곳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겨났 다. 그곳은 더러운 물이 고여 있었고, 마을사람들은 이를 오리방죽으로 불렀다. 나는 이 물 웅덩이인 오리방죽 때문에 죽을 뻔 하다 겨우 살아나서 두 번째의 생을 이어 가고 있다.
고 가꾸어주는 환경이 되며, 환경은 사람의 성품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내 고향 월 계는 나를 키워 세상에 내보낸 곳이다. 나는 그 고향에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이 큰 행복이다. 더욱 감사한 것은 96세의 연세에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나를 기다 리시는 어머니께서 계시니 더욱 정겹고 가고 싶은 곳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돌 아가신 아버지께서 여름날 땀을 식히던 모정이 나를 지켜보고 있어 발걸음이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추석이 지난 어느 날, 먹거리의 00댁 가게에서 형님과 상일이 형이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중에 누군가가 합석하여 대두병을 놓고 누가 더 많이 마시나 내기나 하
정겨운 추억이 있는 고향에 언제든 돌아갈 수 있도록 내 고향을 지켜주시고 고향에 갈 때마다 한 가족처럼 반겨주시는 어르신들과 친구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듯 먹었다. 얼마를 마셨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필름은 다 끊어지고 깨질 듯 아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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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님 대전시 대덕구 중리동 37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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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연 경기도 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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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인천시 부천시 중2동 1324-201
010-6848-5959
이춘연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 하늘마을 313동12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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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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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연 서울시 한상옥 월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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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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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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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만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223-6번지 1층 박수용 월계 박수환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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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원
직 업
음식점
한춘수
한아름 충남 홍성군 남장리 산29 청운대학교
소
김용학 월계 1길 78(운월)
010-6359-4250
한순덕 경기도 광명시 광명 7동 영화A101동 707호
주
서울시 중랑구 신내1동 487 미성아파트 B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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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서울시 강동구 마천동 533번지 삼익@7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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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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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370-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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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
이의룡 010-2018-9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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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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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석 경남 거제시
"
011-573-1596
이의동 울산광역시
현대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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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주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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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규 고수면 월계 1길 42 이상구
연락처 010-7274-3703
서울시 구로구 궁동 238 월드빌라 1단지 가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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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선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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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아 유로성형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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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구 고수면 월계1길 42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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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303호
김영달 고수면 월계1길 43
010-6238-9950
김순민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효게동121호 305호
010-5496-0927
김선미 전주시 덕진구 신루동 부영@604동503호
011-9641-9951
김선향 김정남
인천시 남구 구월동 2동 23 힐스테이 1506
010-3017-2162
동3604호 경기도 시흥시 정왕2동 영남3차 407동203
010-9035-8851
호
김정우 전주시 효자동 3가 1621-1성호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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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 월계
010-2673-6162
김천주 광주시
010-2356-1416
김상수 경기도 용인
010-5016-3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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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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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만 월계 박한구 고창읍 동백 가동 105호 박한중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4가 105호 박연옥 대산면 사거(대산양은)
고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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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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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님 무장면 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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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성 월계1길 44 063-562-0589 이정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 갈담401-2 018-215-9393 충북 청원군 방내면 탑현리 신성 미소짓는 이민애 010-5375-4954 104동 903호 광주 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부영 210동 707 이경훈 010-7942-5200 호 이민숙 강원도 속초시 교동 늘푸른 104동1208호 010-7330-1876 이재열 고창읍 휴먼시아 102동 1016호 공무원(군청) 010-7247-0587 이기성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3동 4281 010-3301-3473 이삼성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1가 97-1 010-2424-4627 임영빈 월계1길 063-562-0057 임정혁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영남 310동204호 010-9422-1929 임형역 인천시 서구 봉천동 010-3312-0057 임동혁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 010-7585-3485 임금순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010-3278-1405 임금숙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010-9374-7365 김범남 월계1길 010-8859-4057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 969-5 모아 102동707 김현숙 011-648-4625 호 인천광역시 계양구 효성동 225-1 풍림 102동 김인숙 010-3226-8726 1104호 김양범 고창읍 휴먼시아 109동 801호 010-6490-5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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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유왕종 이문제 이항범 장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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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2길 22(왕촌댁)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 대전광역시 유성구 월계2길 22 고창읍 상원 507호 월계 서울시 강북구 수유3동 171-3325 광주광역시 서구 평동 금호 101동102호 서울시 중랑구 면목동 175 지하 103호 서울시 성동구 성수2가 321-3 2층 202호 경기도 화성시 병점동 848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24 부산시 신평동 257 고창읍 읍내리 157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368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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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업 축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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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월계의 마을사를 간행하게 된 동기는 고창문화연구회에서 장두리가 2012년도 마
010-3467-2772
을사조사의 대상마을로 선정되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별도로 우리 월계마을
010-4461-4599
중심으로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010-3233-1893
양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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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 010-3329-9933 010-3395-9224 010-3325-8297 010-3325-7743
자료수집 과정에서 고증을 해 줄만한 어른들이 거의 고인이 되어 어려움이 많았습니
010-8885-2495
다. 그리고 고향에서 살다가 완전히 객지로 이주한 가구가 21호나 되어 주소를 파악
010-9903-2040 010-3681-4256 010-8594-5017 010-3679-1854 010-7646-0638 063-563-3905 010-3672-1875 019-354-4251 010-5335-4751 011-680-1809
하는데도 힘들었습니다. 또한 과거의 사진들을 수집하고 게재하는데도 한계가 있었
연락처 011-627-2186 011-9745-1244 043-843-8175 010-4244-9812 010-5684-1029 032-268-8769 010-3888-4945 02-388-0670 010-3593-2509 010-6332-6113 010-4038-2538 010-3672-0985 010-9768-2709 010-3194-8634 010-9424-2299 010-3308-4136 010-6351-9635
습니다.
이 책의 발간 목적은 잊혀져가는 우리 고향의 역사를 재조명해보고 기록으로 남김으 로서 고향사람은 물론 출향민이 우리 고향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엿 볼 수가 있다 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나 고향을 사랑하는 출향인들은 이 책을 보시고 고향의 정을 흠뻑 느끼시 기 바라며, 보고 싶은 형님․누나․동생․친구들에게 서로 연락하며 안부나 전하며 살아 가는 것도 좋은 일 이라 생각 할 것입니다. 혹 자료가 부실하고 연락처가 누락되었 어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발간에 협조해주신 박생기 이장님과 기고문을 써주신 이경연, 박수철, 김영일 형님과 박성규, 박경수 친구에게 감사드리고, 아울러 도움을 주신 고창문화연구회 이 병열박사에게도 감사드립니다. 특히 책자 인쇄에 적극적으로 협조 해준 서울 두성칼 라 영철이 동생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표합니다.
2013년 3월
김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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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주신 분
김창수(장두 토박이) 김종현(월계 토박이) 천양기(고수면 부면장)
▣ 참고문헌 『고창군의 지석묘』, 군산대학교, 2009. 『광산김씨 고창세거와 문헌․유적』, 고창문화연구회, 2012.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군문화유적분포도』, 원광대학교, 2005.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 고창농악보존회, 나무한그루, 2010.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광산김씨전리판서공파보』, 회상사, 1993. 『牟陽城의 얼』, 고창군, 2009. 『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 민음사, 1993. 『한국의 언어 민속지 전라남북도 편』, 왕한석,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동아일보, 1921년 12월 30일 연합뉴스, 2011.08.27. 경인일보, 2011,08.02. http://gochang.grandculture.net/Contents http://www.sjbnews.com/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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