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에서 동학기포까지(개갑에서 구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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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갑의 신유박해는 동학농민혁명의 밑거름 무장현 개갑장의 위치와 역사 개갑장이 소속된 茂長縣은 조선 말 한반도 서남부 해변에 위치하 는 변방에 속하여 행정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궁벽한 고을이었 다. 이러한 사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시행된 행정구역 개편 작업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1894년 甲午改革에 따른 행정구역 개정 당시 茂長郡은 전라남도 소속의 제 2등군이었던 반면에 전라 북도로 편입된 고창군과 흥덕군은 제 4등군으로 분류되어 무장보다 格이 낮았다. 당시 무장군은 15개 면에 3,347호가 분포한 반면 고 창군은 8개 면 852호에 그쳐 郡勢도 무장에 비해 열등하였다. 그러 나 1914년 日帝가 시행한 행정구역 개편시 무장군은 흥덕군과 함께 고창군에 흡수되었다. 과거의 冬音峙面 石橋浦는 영광군 홍농면과 법성면 사이에 위치한 수로를 거치고 海門을 통해 外海(황해)로 진 출할 수 있는 무장현의 關門이었다. 해문으로부터 석교포에 이르는 수로는 만조시 수심이 2丈(약 6m)에 달하고 간조시에는 8尺(약 2.4m)이었다. 물론 석교포의 상부는 간조시 갯벌이 드러나 이보다 더 얕았을 것으로 사료되나 갯골을 이용하면 흘수선이 얕은 조선시 대의 선박들은 능히 석교포나 공음면 남쪽의 回龍浦까지 출입이 가 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石橋里에는 大同倉과 社倉을 건설하였 고 창고의 좌측에 漕運船의 정박지를 마련하였다. 해안선의 드나듦 이 복잡한 서·남해안에는 이와 같은 浦灣이 발달하여 깊숙한 만내 에 포구취락들이 많이 입지하였는데,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물길을 潮河라고 불렀다. 석교포 조하는 해문으로부터 종점에 이르는 수로 의 길이가 약 15km에 달했다. 그런데 이러한 천혜의 물길은 간척사 업에 의해 점진적으로 축소 또는 단축되기 시작하였으며, 1924년에 이르러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 수로의 폐쇄는 곧 석교창의 폐쇄와 개갑장의 몰락을 초래한 주요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편 공 음면 회룡리와 석교리 사이, 신대리 전면의 갯벌 위에는 자염지(煮


鹽地)가 조성되어 있다. 석교포 해안의 소금은 무장, 고창, 정읍, 장성, 영광 등 내륙 지방의 식염으로 공급되는 동시에 인근 도서 지방의 어류 염장용으로 판매되었을 것이다. 석교리는 船商 및 염 업자의 근거지였고 개갑장터는 객주와 보부상의 근거지로서 두 취 락은 각기 어염공급기지와 곡물 등 생필품 공급기지로 공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조화는 20세기 초 간척을 하면서 무 너지기 시작하였다. 간척을 통해 석교포 일대는 드넓은 평야지대로 바뀌었다. 고창지역의 천주교의 평등사상의 확산과 신유박해 순교자 최여겸(마티아, 1763~1801)이 생존했던 조선 후기 사회는 강한 사회 변동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당파간 의 갈등과 정쟁(政爭)의 여진(餘震)이 남아 있었으며, 집권세력의 고착화는 필연적으로 정치문란과 탐관오리의 횡행을 불러왔다. 여 기에 반복되는 기근과 전염병의 유행이 겹쳐지자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더 피폐해져 갔으며 따라서 현세를 고해(苦海)로 여기는 인식 이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일부 양식 있는 사대부계층 에서는 완고하고도 교조적인 성리학 중심의 사상체제였던 당시의 조선사회에 대하여 그 한계를 절감한 나머지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눈을 돌리게 되었다. 천주교(그리스도교)는 천주애(天主愛)+인간애(人間愛)가 기본구 조이며, 신분과 문벌과 나아가 군신간의 차별까지도 초월한 평등· 박애사상이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상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엄격한 신분차별과 상하수직구조로 유 지되는 봉건사회질서 체제 아래에서는 용납 될 수 없는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집권세력과 봉건질서 수호자들은 신자들을 폐제 사(廢祭社)→무부무군(無父無君)→기륜(棄倫)→금수지도(禽獸之徒) 로 몰아 참혹한 살육과 혹독한 박해를 가하였다. 최초 전국적인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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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자행된 박해가 곧 신유박해(1801년)이며, 이때에 이 고장의 최초의 신앙인이었던 최여겸이 그 희생자가 되었으며, 병인박해 (1866~1873)에도 잔혹하게 살육 당하였다. 이후 1895년 신앙의 자 유가 허용된 뒤로도 탄압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신앙인들은 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최여겸은 참혹한 고문을 당했지만 결코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여겸은 양반벼슬아치들의 수탈행위와 호 색(好色)에 빠진 축첩행위를 거침없이 비판했다. 최여겸은 무장현 동음치면 개갑장날 장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형으로 순교하였 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면 처참하게 죽는다는 것 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 효과를 노려 장날을 선택한 것이다. 신유 박해 때 전국에서 500명이 희생되었고, 호남지방에서는 200여명이 희생되었는데 전라감사는 137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 조선민중 들 사이로 평등사상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천주교 평등사상의 확산은 동학농민혁명의 불씨 1801년 崔汝謙(마티아)이 순교한 개갑장터는 조선 땅에서 무명의 장소였다. 하나의 제도화된 종교가 전교사업을 수행하는 목적은 활 동공간을 확대하는 일이다. 이는 곧 새로운 종교영토의 확보와 그 간 안에 거주하는 주민의 의식구조를 개조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그 종교가 가지는 사상과 철학도 공간적으로 함께 확산하기 때문이다. 이 당시 천주교의 확산은 고창 민중들에게 평등사상의 확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왜 무장의 석교포 인근에서 천주교와 동학농민혁명이 확산되었는가를 자연적, 심리적, 정치ㆍ사회적, 인 적 구성요인 등으로 살펴보자. 첫째는 자연적 요인으로, 천주교는 해안과 하천수로를 따라 宣敎 據點을 확보하는 전략을 썼다. 그들이 수로변 거점을 선호한 이유 는 적대감을 가진 원주민들로부터 성직자와 신도들을 보호할 비상 탈출로를 확보하기 용이하고 동시에 내륙으로 선교루트를 개척하기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해로부터 15km 내


륙으로 열린 석교포 수로는 천주교와 동학의 확산 초기에 유리하였 을 것이다. 둘째는 심리적 요인으로, 호남 해안은 고려 말~조선 초의 倭寇 침입으로 약 200년간 무인지경화한 적이 있으며, 조선 후기부터는 異洋船의 출몰이 잦아 관의 단속이 심하여 주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다. 또한 해일이 잦아 농경지 침수, 어선과 어구의 파괴를 당 했다.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무장, 고창, 법성진 등 많은 邑城과 關防이 설치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海防이 더욱 강화되었다. 해일 은 16세기, 18세기 말, 그리고 19세기 초에 수차 발생하였다. 전란 과 잦은 자연재해, 그리고 지배층의 수탈에 시달린 평민들은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는 지배층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鄭鑑錄, 東學 등이 유행하였고 西學 역시 이 물결에 합세하게 되었 다. 그 중에서도 신분과 성차별을 배격하는 평등사상으로 무장한 천주교는 조직력이 돋보였으므로 전란과 자연재해의 공포에서 벗어 나려는 주민들에게 빠르게 확산되었다. 셋째는 정치ㆍ사회적 요인으로, 傳敎 초부터 천주교는 唯一神인 天主를 만인의 아버지로 모시는 점이 王權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 어 조정은 물론 지방 사대부층의 거부감을 유발하였다. 내세관을 중요시하는 천주교의 이념 또한 현세를 중요시하는 유교적 이념과 상충되었다. 천주교는 또한 禮敎의 질서를 부인함으로써 辛酉迫害 를 겪게 되었다. 여성ㆍ서민, 심지어 천민 중에도 신앙심이 깊은 자는 종교지도자로 인정받았던 예가 적지 않았던 바, 이는 유교사 회의 신분별ㆍ성별 질서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농본주의 국 가인 조선 조정은 무절제한 인구이동을 방지함으로써 백성을 농토 에 묶어두는 정책을 펴 왔는데, 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거주지와 농토를 이탈하는 예가 많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석 교리 일대는 鹽汗, 漁夫, 船夫, 행상 등 천주교의 영향을 받기 쉬 운 대상이 적지 않았다. 포구나 장시의 장소들에는 평민이나 천민 의 촌락이 성립되었으며, 이러한 촌락의 주민들은 기동력과 진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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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발휘하여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새로운 정보와 사상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주요 상업취락의 세력자들 중에는 비록 신분은 사대부에 미치지 못하나 재력을 가졌으며 어느 정도 문자해독까지 가능한 이가 상당수 있었고, 그들의 자손 중 학문의 경지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사업상 또는 개인 용무로 수로를 이용하여 타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국내외의 신지식과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넷째는 인적 구성요인으로, 천주교는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교세 를 확장하고 교리를 확산시킬 의무를 하부 조직에 부여한다. 문명 수준이 높은 아시아 지역에서는 엘리트 집단을 우선적 선교대상으 로 삼으면서 토착 문화에 적응하는 전략을 구사하였으나 한국의 사 대부 층은 門中구성원을 강력하게 단속하였기 때문에 수백 년 간 지속된 전통을 와해시키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회는 강 한 知的 호기심을 가진, 새로운 사상과 지식에 대하여 개방적 성향 을 지닌 良人 출신 지식인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천주교가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 이 평등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불어 조선 후기 사회질서가 문란해지면서 기존의 위계적 질서체계를 불신하고 새로운 평등사상 이 빠르게 확산됨에 따라 소외 계층들의 혁명의 불씨는 점점 커져 가게 되었다. 개갑장터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정보와 물자의 보급처 개갑장의 옛 터는 현재는 공음면 석교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에 는 갑촌에 속해 있었기에‘개갑장’이라 불렸다. 그런데 한편으로 는 지금까지도‘개가리’또는‘개가리장’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부군통폐합령(府郡統廢合令, 1914)에 의해 와공면(瓦孔 面)과 동음치면(冬音峙面)을 합병하여 공음면(孔音面)을 설치할 때, 12개 법정리가 만들어졌는데 칠암리(七岩里)속에 동음치면의 갑촌리를 소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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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리 장이 한일 합방 후, 구한말 의병활동을 위한 보급소와 연 락처로 낙인이 찍혀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다고 한다.1) 일제에 항 거한 활동으로서는 의병활동보다 앞서 동학농민혁명 전쟁이 1894년 갑오년에 있었고, 이어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일어난 1895년의 을미의병,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외치며 봉기 한 1905년의 을사의병, 1907년의 정미의병에 이어 1910, 1911년까 지 일어난 격렬한 의병항쟁이 있었다. 이때 가장 격렬한 곳이 호남 지역이었고, 또한 고창 출신 인물들이 그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갑오동학농민혁명과 의병항쟁이 이곳 개갑장터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던 배경은 개갑장이 쇠전(우시장)이 있는 큰 시장으로서 규모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며, 개갑장이 큰 시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에는 가까운 거리에 석교포(石橋浦)와 해창(海倉)이 있었기 때 문이다. 개갑장의 開市日은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1770년경에는 4 일과 9일이었으며, 1910년까지 개시일은 변동이 없었다. 지형이 비 교적 평탄하였으므로 고창-무장-법성포 일대의 시장 간에는 곡물, 담배, 소물, 해산물을 운반하는 우마차들이 통행하였다. 이렇게 개 갑시가 번창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 다. 첫째, 호남해안 및 인근 도서의 소금과 어물, 그리고 내륙지방의 농산물 집산. 염장어물, 건어물 및 소금은 내륙으로 이동하고 소금 의 일부는 도서지방 어장으로 판매되었다. 또한 많은 농산물이 도 서지방으로 운송되었다. 개갑시에는 우시장도 열렸다고 하는데 아 마도 주변의 해안ㆍ도서 목장과 주변 농촌에서 사육된 소들이 거래 되었을 것이다. 둘째, 석교창은 본래 정부의 세곡운송이 주임무였으나, 조선시대 조운선(漕運船)들이 관곡(官穀) 외에 재경지주(在京地主)의 화물도 운송하였으므로 석교창 길목의 개갑장시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

고창군지』20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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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지형의 기복이 적고 비교적 완만하며 네 방향의 도로가 수 렴되었으므로 우마차 수송에 유리하였다. 이와 같은 개갑시의 번창은 당시 최고의 정보를 가진 상선들과 상인들이 수시로 드나들게 되어 이곳에서는 일찍이 다양한 국내외 의 정세들을 듣거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통로가 되었다. 이러 한 개갑장터의 성시로 인해 무장의 민중들은 호남의 어떠한 지역보 다도 이른 시기에 천주교의 평등사상을 받아들여 고창지역 최초의 순교지가 되기도 한다. 나아가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천도교의 인내 천사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개갑장 의 많은 정보들은 고창은 물론 인근의 전라도 내륙지방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던 것이다. 신유박해(1801년)와 병인박해(1866~1873) 기간에 자행되었던 잔 혹한 살육 이후 1895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뒤로도 탄압이 계속 되는 상황에서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민중들 사이로 지속적으로 확 산해 가고 있었다. 신유박해(1801년)와 병인박해 후 동학농민혁명 군들이 다시 이 부근의 구수내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기포를 한 것도 바로 이곳 무장주민들이 일찍이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천주교의 평등사상을 경험했다는 것과 개갑장의 풍부한 정보와 물자가 있었 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불을 지펴라! 기포지 공음 구수 구암리는 마을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구암(龜岩)’이라 하였다. 1600년대에 경주최씨(慶州崔氏)가 말을 타고 지나다, 주점 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꿈에 선몽을 받고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 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동음치면(冬 音峙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덕음리(德音里)·구수리(九水里)·장동리(壯洞里)·성재리(聖才 里)·다옥리(多玉里)의 각 일부와 하리면(下里面)의 택동리(宅洞 里)와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면(弘農面) 덕림리(德林里) 일부가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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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되어 구암리가 되었고, 공음면에 편입되었다. 동학농민혁명기포지는 지금의 공음면 구암리 구수(九水)마을이다. 구수는 9방향에서 물이 흘러 이 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원래 는 구시내로 부르다가 후에 구수로 개칭하였다. 구수의 해발고도는 10m 이하로 갯골이 충분히 발달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 농민혁명지도부가 1894년 3월 20일(음력)에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을 든 곳이 바로 이곳 구수이다. 동학혁명의 발상지인 무장기포지에서 4,000여명의 농민군이 모여 무장창의 포고문을 선포하고 조직적인 항쟁에 들어간 것도 이러한 포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무장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봉화를 올 릴 수 있었던 동기는 바로 무장사람들 마음 속 깊이 자리했던 평등 의 개념이었다. 동학이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원인은 1801년 천 주교인 최여겸의 순교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입으로 입으로 내 려온 1801년 개갑장터의 사건은 무장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일로 기 억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양반과 상민이 차별이 없는 평 등세상을 천주교를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다. “어찌 인간 이 하늘 아래 태어나 높낮이가 있단 말이냐”며 한탄했던 힘없고 서러운 조선의 무장사람들은 다시금 찾아올 미륵을 기다리며 세월 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로 천주교는 물론이고 사상적 으로는 같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서학을 받아들이지 못한 많은 백성 들은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평등사상인 인내천을 급 속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미 무장현은 어느 지역보다도 빠르게 동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사상적 토대가 있었으며, 이는 영광, 고창, 흥덕, 함평, 정읍 등 전라도 서남부권에 널리 다져져 있었던 것이다. 자연․환경적으로도 구수내 마을은 구적산 아홉 골에서 흘러내리는 많은 물이 마을 앞에 모래를 운반하여 쌓아 놓음으로써 넓은 충적 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넓은 충적지는 석교마을 근처까지 뻗 어 있어 동학농민군들이 모이는데 적합하였을 것이다. 한편 이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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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에서 오래도록 세거해온 송문수는 전봉준 손화중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모의를 할 만큼 적극적이었으며 동학군들을 장사꾼처럼 변복시켜서 몰래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또한 위에서 큰 분 (전봉 준과 손화중을 지칭한 듯)이 오면 일부러 난장을 터서 드러나지 않 게 하는 등 당산지역 훈련 총대장을 맡기도 했다. 송문수는 무장에 서 재봉기 이후 영광으로 내려와 활동하다가 이현숙이 이끄는 민병 에게 1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18894년 12월5일 영광에서 효수 되었 다. 구수내 앞 장동마을 대나무밭 근처에 머리는 잘려 서울에 있고 몸체만 묻힌 묘지에 장성으로 시집간 딸이 몰래와 벌초를 하곤 했 다. 이후 송총(宋塚)이라 불렸던 묘 자리는 모두가 개간되어 아무 런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서남해의 뱃길을 장악한 동학농민혁명군 구수의 앞 갯골은 1918년 지형도 상으로 일부는 논경지로 활용되고 있었으나 뚜렷하게 갯골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구수의 포구로서 의 기능은 점점 상실되어 가는 시점이었으나 포구로서의 기능은 유 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당시 구수마을의 동학농민혁명군 의 지도자인 송문수가 홍농의 접주 김낙선과 더불어 전라도 서남해 의 뱃길을 장악한 것으로 보아 구수 최소한 20세기 초까지 갯골을 따라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공음 구수에서 기포 한 동학농민군들이 부안면 알뫼장(난산장)과 흥덕의 사포와 후포를 거쳐 줄포로 진격을 했다는 것은 서해의 뱃길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의 진격로 상의 포구들은 지금은 그 기능을 상실했지만 당시에는 호남지방에서도 손꼽히는 큰 포구 로 상선이 출입하던 곳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곳 중 구수포 앞의 석교포와 사진포에는 조창이 있어 이들 지역의 빠른 점령은 동학농 민군들의 군수품보급과 연결된 시급한 문제였을 것이다. 즉 동학농 민군의 군량미나 군수품의 조달은 바로 서남해안의 뱃길을 장악한 뱃사람들과 상인들에게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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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동학농민군들과 협력하여 이들의 진격로를 따라 군량미와 보급품을 획득하였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군들은 줄포에서 하루 숙영하고 고부 관아를 점령한 후 부안 백산에 진을 쳤다. 부안 백산은 동진강 하류부근에 있는 곳으로 지금도 밀물이 들어가는 곳으로 뱃길이 닿는다. 특히 백산 은 고부로 들어가는 하상포구로 동진강을 따라 연안과 내륙을 연결 해주는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다. 또한 이곳은 김제와 더불어 호남 평야의 중심지로서 쌀 생산이 많은 곳으로 동학농민군에게 군량미 를 조달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당시 서해연안의 뱃길은 동학농민군들에게 보급품을 공급해 주는 주요한 통로였을 것이다. 이는 석교포의 천주교 확산과정에서 설명되었듯이 당시 천민으로 낮은 사회계층이었던 어부, 선부, 행 상, 염부들은 평등사상을 말하는 천주교나 동학 등을 쉽게 받아들 일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새로운 세상을 꿈을 꾸었고, 앞장섰다. 특히 옛 무장현 지역은 서해안에 인접해 있어 많은 포구들과 자염업이 발달해 있어 경제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윤택했지만 사회적으로는 하층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 고 이들은 외부의 상인들과의 상거래를 통해 당시의 국내외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전라도의 뱃사람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전투에 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동학농민혁명군의 배후에서 군수물자의 보 급을 도맡았다 할 수 있다. 차후 동학농민군과 뱃사람들과의 관계 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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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포고지 구수와 동학혁명에 참여한 인물 지금까지 우리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농민혁명을 이끌 었던 사람들만을 기억해왔다. 하지만 이들 세 명에 의해 주도가 되 었다고 할지라도 이들과 함께 했던 다수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동학 농민혁명은 가능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전봉준과 함께했던 이름 없는 농민군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답은“우리가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를 뿐 아주 많은 사 람이 농민군으로 참여하였다. 먼저 구수마을에서는 송총의 주인이 었던 송문수와 더불어 농민군 고창주가 있었다. 고창주(高昶柱, 1858~1895. 3. 27)는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현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출신으로 1894년 당시 열다섯 살이던 어 린 아들 고광철(高光喆)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아들과 함께 황토현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 전주성 전투 등에 참 전하였다. 또한 2차 농민 봉기에도 참여했다가 농민군 지도급 인물 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전봉준ㆍ손화중ㆍ최경선 등과 함께 몇 차례 심문을 받은 후 1895년 3월 3일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그는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 데, 아들 고광철도 나이가 어려 무사히 풀려 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창주는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정읍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지방의 유림들과 유지들의 압력으로 다시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리 하여 그는 1895년 3월 27일 지방 관원에 의해 처형되었고,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다. 이후 1994년 5월, 그의 행적 을 기록한 비석을 동학 농민혁명 무장기포지에 있는 모정 옆에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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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졌다. 더불어 구수마을에는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던 인물이 한 사람 더 있다. 그가 바로 최경칠이다. 최경칠은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했다 가 창에 찔려 부상을 입고 구수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결혼 한 누나의 집 광에 굴을 파고 숨어 지냈다가, 부상이 낫고 세월이 지나자 구수마을에 정착하였다. 최경칠이 동학농민혁명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동학 교단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그의 손자 최진옥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서 최경칠의 존재는 전해질 뿐이다.(디지털 고창문화대전) 동학 농민 운동의 밑불을 놓은 송문수 공음면 구암리 장동마을 안길로 들어가면 하얀 조립식 주택과 흙벽 으로 만들어진 창고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왼편에 대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이 대나무밭 뒤편에 개간 된 밭이 옛 ‘송총’이다. 지금은 흔적마저 사라져 버린 ‘송총’ 의 주인은 누구일까? 송총의 주인은 바로 송문수이다. 송문수(宋文洙, 미상 ~ 1894. 12. 5)는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현 구암리 구수마을] 출신으로 고부 농민 봉기 이전부터 전봉준과 더 불어 동학 농민 봉기 모의를 함께했던 무장의 동학 접주이다. 그는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이 구암리 구수마을에 집결하여 본격적인 농 민 봉기를 준비할 당시, 이동해 온 농민군의 행적을 숨기기 위해 구수마을에 난장[정해진 장날 외에 특별히 며칠간 더 여는 장]을 여는가 하면, 농민군의 훈련을 담당하는 등 농민군의 무장기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구수마을은 일제강점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즉, 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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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송문수는 뱃길을 이용해 지금의 영광 홍농의 접주 김낙선과 함께 홍농에서 비금도, 하의도까지 되는 뱃 길을 장악하였다. 전라도 서남해안 인근의 뱃길이 모두 동학 농민 군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송문수는 무안 접주 배규인, 진도 접주 박중신과 힘을 합쳐 진도의 수영(水營)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렇게 서남해 안을 장악한 그는 관군과 일본군이 뱃길을 통해 동학 농민군이 장 악한 지역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으면서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 주력 부대의 움직임을 수월하게 해 주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에서도 7000명의 동학 농민군과 함께 무장에 남아서 관군과 일본군 의 침투를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전봉준을 적극적으 로 도운 송문수는 1894년 12월 5일 홍농에서 동학군을 상대로 하여 지방의 양반이 중심이 되어 결성됐던 민보군 대장 이현숙에게 체포 되었고, 이후 참수를 당하였다. 송문수의 시신은 참수되었기 때문에 머리가 없이, 구암리 장동마을 뒤편 대나무밭에 암장되었다고 전한다. 이 무덤은 장성으로 시집가 살아남은 딸에 의해 보살펴져 왔으나 현재는 이마저도 끊겨 버렸다 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이제는 개간된 밭으로 변해 버린 송총을 보며, 100년 조금 지난 역사 속의 인물이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항기 동학 농민 혁명 지도자. 김영달(1852년 ~ 1894년)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영심(永心)이다. 영달(永達)은 초명 으로 호적에 오른 이름이다. 족보에는 달병(達炳)으로 되어 있다. 1852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강남리에서 태어났다. 임진 왜란 때 진주성 대전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공신 2등으로 녹훈된 김지남(金志南)의 10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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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달은 어린 시절 원촌 사는 김흥섭(金興燮)[전봉준(全琫準)의 수행원]과 서당에서 동문수학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일 어나자 농민군 창의소와 영광 농민군 간의 문서 연락의 임무를 띠 고 황아장수[끈목, 담배쌈지, 바늘, 실, 그 밖의 온갖 잡살뱅이의 물건을 지고 집집이 찾아다니며 파는 사람]로 변장하고 문서 송달 과 정보 수집 업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2차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김영달은 무장 구수내[九水川] 출 신으로 영광 지역을 맡은 송문수(宋文洙)를 따라 영광, 무장 지역 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퇴한 후 송문수 와 함께 서부 퇴로를 따라 후퇴하여 영광에 이르렀다가 민보군에 붙잡혀 영광 관아 앞 네거리에서 그 해 12월 27일 참수되었다. 현 재 무장면 강남리 석수마을 후록에 부인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군신과 부자는 가장 큰 인륜으로 꼽는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비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도를 한 뒤에야 국가를 이루어 끝없는 복록을 불러오게 된다. 지금 우리 임금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애 로우며 지혜롭고 총명하시다. 현량하고 정직한 신하가 있어서 잘 보좌해 다스린다면 예전 훌륭한 임금들의 교화와 치적을 날을 꼽 아 기다려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신하가 된 자들은 나라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아니하고 한갓 작록과 지위를 도둑질하여 임금 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를 일삼아 충성스런 선비의 간언을 요사스 런 말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한다. 그리하여 안으 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바깥으로는 백성을 갈취하는 벼슬 아치만이 득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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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마음은 날로 더욱 비틀어져서 들어와서는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와서는 몸을 보존할 대책이 없도다. 학정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은 줄을 이었다.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구분이 드디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다. 관자가 말하길 “사유(四維; 예 의염치)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예전보다 더욱 심하다. 위로는 공경대부 (公卿大夫) 이하, 아래로는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 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거의 자기 몸을 살찌우고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을 몰두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문을 재물 모 으는 길로 만들고 과거보는 장소를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허다한 재물이나 뇌물이 국고에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사 사로운 창고를 채운다. 나라에는 부채가 쌓여 있는데도 갚으려는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탕과 안일로 나날을 지새워 두 려움과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는 어육이 되고 만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진실로 수령들의 탐학 때문이다. 어찌 백성이 곤궁치 않 으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지는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을 화려하게 지어 제 살길에만 골몰하면서 녹위만을 도둑질하니 어찌 옳게 되겠는가? 우리 무리는 비록 초야 의 유민이나 임금의 토지를 갈아먹고 임금이 주는 옷을 입으면서 망해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이 마음을 함께하고 억조창생이 의논을 모아 지금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을 생 사의 맹세로 삼노라. 오늘의 광경이 비록 놀랄 일이겠으나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면서 함께 태평세월을 축수하고 모두 임금의 교화를 누리면 천만다행이겠노라. 1894년 3월 20일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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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포기념탑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은 조선 후기 봉건 사회의 모순 에 대한 저항과 외세의 침탈 행위에 대항하여 보국안민과 척양·척 왜 등을 주창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일어난 농민 항쟁이다. 이는 독일의 농민 전쟁, 중국의 태평천국, 인도의 세포이의 항쟁과 함께 근대 이행기에 전개된 민중 항쟁으로, 동아시아는 물론 더 나 아가 세계사적 의의가 있는 사건이다. 1894년 1월 고부 민란 이후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에서 농민군 가 담자를 잔혹하게 다루자 전봉준은 일단의 무리들을 규합하여 3월 13일 부하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무장으로 내려온다. 당시 호남의 최대 세력을 떨치던 무장의 손화중 등과 힘을 합하여 세상을 바로 잡고 왜놈을 물리친다는 것을 요체로 1894년 3월 20일 무장현 동음 치면[현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당산에서 포고문을 발포하고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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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지침을 포괄하는 4대 명의를 발표하였다. 무장 기포는 지역 봉기인 민란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봉기로 출발 한 시발점으로서 동학 농민 운동사에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무장 기포지는 1994년 동학 농민 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 로 공음면 주민들이 1백여만 원을 모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89-3번지 2필지 478㎡와 고창군에서 매입한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90번지 일대를 포함하여 9천여㎡에 1억 2천만 원으로 2002년 조형 물을 설치하고 주차장과 화장실을 신축하고, 조경 사업 등에 5억 원을 투자하여 환경 개선 사업을 추진하였다. 2009년 4월 25일에는 동학 농민 운동 무장 기포 115주년을 맞아 소나무 3그루를 식재하였다. 소나무는 고창군의 군목(郡木)으로 변 함없이 늘 푸른 모습을 간직하며 꿋꿋한 절개의 의미를 나타내며 미래 지향적인 군민임을 상징한다. 또한 소나무 3그루는 1894년 3 월 동학 농민 운동 당시 고창, 무장, 흥덕의 동학 농민 운동군을 이끈 총대장 전봉준[중앙], 총관령 김개남[좌], 총관령 손화중[우] 을 상징한다. 기념식수는 지역적 갈등을 해소하고 세계적으로 어려운 경제 난 국 해소를 기원하는 매듭풀기로서, 고창 당촌, 부안 백산, 정읍 황 토현, 전주 전라감영 터, 김제 원평 구미란, 전라남도 장성의 황룡 전적지, 충청남도 태안의 백화산과 예산, 경상북도 상주동학교당, 경주의 최시형 교주 출생지, 경상남도 하동의 고성산성, 충청북도 보은의 북실 전투지, 충청남도 공주의 우금치, 강원도 홍천의 서 석, 서울의 경복궁 등 동학 농민 운동 유적지와 대전 유성의 월드 컵경기장, 대구 팔공산, 울산 무룡산, 부산 동래구, 광주 전 도청 터 등 20여 개소의 흙을 합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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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음치면 당촌 출신의 동학 가담자 고순택 (高舜澤 1858~1895)(자 舜澤(順宅). 본명 昶柱) : 무장 동 음치면 당뫼(堂山里•현九水川)에서 장흥고씨(長興高氏) 제량(濟良)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재골이면서 무예에 능하였다. 일찍이 송 문수 대장의 천거로 동학에 입도되어 문덕중(文德仲)과 함께 송문 수 휘하의 군장(軍長)으로 1894년 3월의 무장기포에 핵심요원으로 가담 9월 2차 봉기 이후 관군에 피체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문 중의 배경을 힘입어 1895년 3월에 무죄 방면되어 내려오는 길에 고 부(古阜)에서 다시 붙잡혀 무장에서 농민군 73명과 함께 처형되었 다. 김흥섭 ( 金興燮 1874~1965)(자 恩燮. 호 榮菴. 본명 興寬 ) : 김 해김씨 문경공파 20세손으로 동합접주 김성칠(金聲七)의 아들로 태 어났다. 선대가 광산군 용곡에서 무장현 장자산면 남당(南塘)으로 이거해와 아버지가 훈장으로 해리면 하련리(下蓮里)를 거쳐 무장 신촌(新村)으로 옮겨 훈장 노릇을 계속 하였다. 그는 21세에 동음 치면(冬音峙面) 당뫼(堂山)골의 송문수(宋文洙) 접주댁에서 손화중 (孫華仲) 대 접주의 천거로 녹두장군의 진중 수행원이 되어 경호의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 본래 기골이 장대하여 힘이 장사였던 그는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신촌의 그의 집은 1894. 3. 20의 무장 기포 가 이루어지기까지 농민혁명의 산실이었다. 그의 부친은 무장집강 소의 두령으로 많은 실적을 거두었으며 우금치 전투에 패하게 되자 전봉준 장군의 개별 행동의 지시에 따라 변산의 깊은 골짜기에 은 거지를 두고 서당 훈장으로 변신 불행을 극복해 냈다가 8.15 광복 이 되자 무장면 원촌리 송산(松山)으로 집을 옮겨 92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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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수 (宋景洙 ?~1894) : 무장 동음치면 당뫼골(堂山洞, 현 공음 면 구수내)에서 여산송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동학 농민군의 두 령이요 기포장으로 알려졌던 송문수 장군(속칭 大將)의 친제(親弟) 인 그는 당내지간인 송진호(宋珍浩)와 함께 송대장의 수행원으로서 1894년 3월 무장 봉기이래 영광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패전이후 그 해 12월 3일 송문수 대장이하 수행하였던 수십 명의 농민군과 함께 체포되어 영광 관아 앞마당에서 모조리 처형당하였다. 송경찬 ( 宋敬贊 1859~1894)(자 敬贊 . 본명 榮植) : 1859년(철종 10) 공음면에서 여산 송씨 아버지 의호(義浩) 어머니 전주이씨 사 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젊어서 돈독한 효행으로 향리의 수 범이 되었는데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강경중(姜敬重)과 함께 동합 접주가 되어 동학 농민군의 두령으로 무장지역의 중추적 역할을 다 하였다. 손화중 막하에서 핵심요원이었던 그는 1894. 9월 2차 봉기 이후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이후 관군에 체포되어 나주 군영으로 압송 12월 27일 처형되니 향년 36세였다. 송진호 (宋珍浩 ?~1894) : 무장현 동음치면 당뫼(堂山)에서 여산 송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속칭• 송대장(宋文洙)의 같은 문중 출 생으로서 송경수(宋景洙)와 함께 송문수 대장의 수행원으로서 1894 년 3월 무장기포이래 송대장을 따라 영광지역에서 활약하였는데 패 전 후 12월 3일 영광 관아에서 모조리 처형되고 말았다. 최경칠 (崔景七 1871~1956)(자 景七 . 호 月浦 . 본명

貴煥) :

무장 동음치면 당뫼(堂山) 마을에서 경주최씨의 후손으로 태어났 다. 그는 풍채가 장골이어서 9척 장신의 거구였는데 일촌의 송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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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文洙), 송경수(宋景洙) 형제와 고순택(高順澤)등과 나이 차이는 있었어도 마을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연유로 갑오년 3월 당뫼 1차 봉기 때에도 이들과 함께 동학군에 가담 호군장(犒軍將)으로 활약 하였는데 2차 9월 봉기후 패전의 고배를 마신 뒤 다행히 숨어 지낼 수가 있어 85세까지 장수를 누렸다한다. 추윤문 (秋允文 ?~1894) : 무장현의 동음치면 두암리(斗岩里) 사 기점 골에서 추계추씨(秋溪秋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기록에 의 하면 그는 손화중(孫華仲) 대접주의 심복으로서 1894년 3월 봉기에 가담하였으며 9월 2차 봉기이후 패전이 됨에 12월 초에 흥덕에서 민보군(民保軍)에 피체되어 처형되었다. 황하성 (黃化性 1869~1894) : 무장현의 동음치면(冬音峙面) 다옥 동(多玉洞)에서 창원황씨(昌原黃氏)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1894년 3월 무장 봉기에 출전한 그는 영광, 함평, 장성, 정읍, 태인, 원 평, 금구를 거쳐 전주 용머리 고개 전투에서 처절한 육박전을 치룬 후 황학산의 관군을 몰아내기 위해 최후의 보루를 지키다가 폐정개 혁을 통한 광제창생(廣濟蒼生)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향년 25세로 젊음의 피를 쏟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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