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물굿으로 이름났던 마을 -
무림리 임리 대강마을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林里)와 대강리(大江里)는 한 마을처럼 형성되어 있어 실제로 오래전부터 합 쳐서 임리로 불러 왔는데, 현재 군도가 마을을 동서로 가로질러 개설되어 있으며, 이 에 따라 도로의 북쪽이 임리가 되고, 도로 남쪽이 대강리가 된다. 신림면 면 소재지의 마을이며 지방도 708호선(송촌)에서는 약 1.6㎞, 일반 국도 23호선(신림초등학교)에서는 약 1.4㎞쯤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법정리인 무림리(茂林里)에 속한다. 무림리는 행정리 3개 마 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곧 만화리(万化里)와 임리와 대강리인데, 이 중 만화리만은 별도로 떨어져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으므로 임리나 대강리와는 동질감이 희박하 다고 볼 수 있다.
<
1> 임리(도로 좌측)와 대강리(도로 우측)
임리는 처음엔 ‘숲마을’이라 불렀으며 후대에 오면서 한자어인 임리(林里)로 부르 게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또 그 내력이 전해오고 있다.
의하면, 이 마을은 1700년대 초에 파평윤씨(坡平尹氏)인 윤치중(尹致中)이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는데, 마을 형국이 화형(火形)으로서 불이 나면 지신(地神) 이 승천(昇天)하는 지형이라고 한다. 마을이 형성된 이래 두 번이나 불이 났으므로, 이를 수기(水気)로써 막고자, 마을 이름을 임리(林里, 숲마을)로 부르게 되었으며, 이에 당산(堂山)을 만들고 액막이로 솟대를 세워 오리를 만들어 올려놓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1).
<
2>마을 입구에 세운 솟대
마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임리는 조선시대 흥덕현의 일남면(一南面)에 속한 마을이었으며, 대강리는 이남면(二南面)에 속한 마을이었다. 실제로는 한 마을 처럼 이웃해 있고 주민들조차 동성의 성씨들이 서로 섞여 살고 있으며, 마을행사와 풍속들이 함께 행하여지고, 또 마을이름조차 ‘임리’로 대표되어 불려지고 있는데도 오래전부터 행정구역상 2개 마을로 구분되어 온 점이 의아스럽다. 이에 대하여 분명한 이유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마을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분 할할 필요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어느 때쯤에 1)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참조
다시 통합된 마을 형태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현재 생존하 는 주민들에 의하여 확인된다. 곧 이 마을의 연로한 주민들에 의하면, 근래까지 임리로 통합되어 내려왔는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각 마을마다 100만 원씩의 생활개선자금이 배분 되자, 마을을 나누어 대강리의 몫을 따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마을이 다시 임리와 대강리로서 각각 행정리가 되었고 이장도 따로 두게 되었다고 한다.
<
3>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조언하신 분들.
고일규 옹(81), 채연식 옹(73,법지리), 유춘영 옹(76,이장), 유종철 옹(83), 허인환 씨(조사위원), 이영노 옹(81)
2.
현황
임리와 대강리는 면 소재지 마을이면서, 마을이 형성된 시기(1700년대)도 비교적 오래된 점 등에서 타 마을과 비교되는데, 주거세대수와 주민 수 등에서 비교적 규모 가 큰 마을로 인정된다. 마을의 이장은 70년대 중반 행정리로 나뉘면서 임리와 대강리 각각 이장을 두었는 데, 초기의 명단은 파악되지 않고 1980년대 초부터는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1)
역대 이장 명단
순위
성
명
기
간
순위
성
명
기
간
1
이 문 식
1983.1.1~
8
유 춘 영
1997.1.10~
2
김 현 수
1984.1.1~
9
김 현 수
2002.1.1~
3
구 자 복
1987.1.1~
10
유 춘 영
2004.1.1~
4
김 덕 수
1989.1.1~
11
이 일 섭
2006.1.1~
5
김 용 관
1991.1.3~
12
김 양 중
2008.1.1~
6
오 현 상
1992.2.19~
13
유 춘 영
2009.3.14~현재
7
김 현 수
1996.1.1~
순위
성
2)
역대 이장 명단 순위
성
명
기
간
명
기
간
1
오 재 필
1983.1.1~
5
이 태 섭
2002.1.1~
2
윤 한 권
1989.1.1~
6
이 현 대
2004.1.1~
3
구 자 술
1991.1.3~
7
구 자 인
2006.1.1~현재
4
이 현 대
1997.1.1~
3) 마을별 호구(戶口) 현황(2009. 9월 현재) 인구(명) 반수 세대수
계 남 여
연 령 별(명) 10
비고
20세 30세 40세 50세 60세 60세
미만 미만 미만 미만 미만 미만 이상
임 리
3
41
72 29 43
.
.
1
3
6
9
53
대강리
2
34
69 30 39
.
7
6
3
2
12
39
표를 보면 60세 이상 노령자가 다수임을 알 수 있는데, 임리는 73%, 대강리는 57%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여성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데서는 여성이 남성 에 비해 더 장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4)
4> 면사무소 쪽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생업 현황(2009. 9월 현재) 주 소 득 원 <가구>
마을명
계
수도작
복분자
임 리
41
24
7
대강리
34
16
3
비 고
과 수
축 산
기 타
1
9 15
5) 마을별 성씨 분포 현황(2009. 9월 현재) 마 합 고 흥 을 류 명 계 씨
광 선 동 전 능 밀 파 강 김 금 함 산 산 복 주 주 양 평 릉 해 녕 평
기타성씨
김 김 오 이 구 박 윤 유 김 김 유
(각 1가구)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씨 장흥고씨, 부안김씨,
임 리
41 10
5
5
3
3
2
2
1
1
1
1
1
무안박씨, 행정성씨, 평산신씨, 전주정씨 각1 행주기씨, 의성김씨,
대 강 34 리
보성김씨, 경주김씨, 3
1
3
.
6
3
.
5
2
1
1
1
남궁씨, 나주라씨, 천안전씨, 전주최씨 각 1
<
5> 2002년에 건축된 모정, 반듯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사진 6> 마을 모정의 천장, 공량이 두 개인 독특한 구조로 정성스럽게 지어졌음이 느껴진다.
6)
위치한 관공서 대강리는 신림면 면 소재지의 마을이기에, 이곳에 면단위 관공서와 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다. 파출소・면사무소・복지회관・농촌상담소・중학교 등은 대강리에, 보건소・우체국 등은 임리에 위치하고 있다.
<
7> 신림면사무소
3.
깃든 전설과 풍속
1)
, 와우형(臥牛形)에 관련된 설화 예로부터 마을지형이 ‘누운 소’의 형태라고 전해온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이 한창일 때 임리에서도 마을 주민들에게 먹는 물을 편리하게 공급하고자 마을 뒤 천룡(당산나무) 부근의 모정 북편(현재 감나무 서 있는 곳)에 물탱크를 설치하였는 데, 그 해에 마을 소 9마리가 폐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모두가 놀라워하며 근심하 게 되었는데, 어느 날 지나가던 지사(地師)가 말하기를, 이 마을은 와우형인데 물탱 크가 놓인 곳이 소의 등에 해당되므로, 소들이 눌려 죽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마 을에서는 즉시 물탱크를 제거하였다고 한다(그 뒤 곧 상수도 시설이 되어서 현재까 지 불편이 없다고 함).
<
8> 임리 뒤편 모정. 1930년대 건축물이며 공량이 2개로 넉넉하고 반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뒤편 좌측 감나무 아래가 물탱크를 설치했던 곳이다.
2)
관련된 설화 서편 입구에는 솟대가 세워져 있다. 옛날 전통사회에서 흔히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 대상물의 하나인데, 대체로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임리의 경우, 솟대를 세우게 된 계기가 남달라서 흥미를 끈다. 임리는 마을 에 자주 불이 났었다고 한다. 이에 화재를 막기 위해서는 마을에 수기(水気)를 끌어 들여야 할 필요가 있어 마을 입구에 솟대를 높이 세우고 그 위에 오리를 조각하여 앉혔다는 것이다. 오리는 물 위에 떠 있는 존재이므로, 오리가 앉은 곳까지 물이 찬 다면 마을에 물이 가득 차 있는 형상이 되므로 자연히 화기(火気)를 차단할 수 있다 고 본 것이다. 어느 해인가는 당산제를 지내고서 동아줄을 솟대에 감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이 마을 명동양반의 꿈에 하얀 노인(신령)이 나타나, ‘옷이 없어서 춥다’고 현몽하므로 급히 짚을 엮어서 솟대를 감싼 일이 있었다고 김원덕 할머니(93세)는 증언한다2).
2) 한편 마을이장은 꿈을 꾼 사람이 명동양반이 아니라 부동양반(유만규, 30여 년 전쯤 작 고)이었다고 증언한다.
<
3)
9> 높이 세운 솟대 위에 오리를 앉혔다.
굿과 당산제 예로부터 풍물 굿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흔히 ‘임리 굿’이라 불려질 정도
로 이름이 났었는데, 주변 마을들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크고 성대하게 베풀어졌기 때 문이었다. 이 굿은 이 마을의 당산제와 연관이 있는데, 곧 당산제가 성대한 만큼 풍 물 굿도 그에 따라 성대하게 행해졌고, 다른 고장으로 초청되어 가기도 하였다. 대체로 1970년대까지는 그 규모가 유지되었으며, 당시에는 인근 부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임리 굿’을 보기 위하여 모였으므로 마을 전체가 흥겨운 분위기에 휩싸였으 며, 이 틈에 도둑들이 마을 전체를 돌며 물품을 훔쳐가는 불상사도 일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농촌마을이 고령화되는 추세에 따라 인구도 줄고 젊은 세대가 없으므로 풍 물의 규모를 제대로 갖출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당산제에 굿이 필수적이므로 그 저 명맥을 이어 가는 수준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대개 꽹과리 2~3인, 장구 2 인, 징 2인, 북 1인으로서 모두 10인 정도의 규모에 불과한 형편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서 오랜 전통으로 지켜오는 당산제는 그 절차와 대상에서 매우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 절차는 ①솟대 세우기→②천룡제→③앞 당산제(할아버지 당산제)→④할머니 당산제→⑤우물 굿→⑥줄다리기→⑦솟대에 줄감기의 순서이다. 당산제의 시작은 매년 1개씩 새로 세우는 솟대를 만들기 위해서 높이 자란 소나무
베어 오는 데서부터이다. 정월 13일 나무를 베어 와서 앞 당산(솟대) 앞에 놓아 두었다가 14일 공동작업으로 우물을 청소하면서 동시에 깎아 세운다. 당일(14일) 밤에 마을 뒤 천룡(당산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제수는 쇠고기(생고 기), 떡, 술(지금은 정종 1병), 밥과 국, 과일, 포 등이다. 예전에는 걸궁굿을 치며 동네를 돌아 집집에서 거둔 곡식으로 제수를 마련하였으나, 지금은 전답 5마지기의 소출로 제수 일체의 경비를 마련하고 있다. 제관 1인을 선발하는데, 예전에는 궤를 짚어 선정하였으며, 요즘도 지난 한 해 동안 궂은 일이 없었던 사람으로서 정한다. 축관 역시 궂은 일이 없고 생기 복덕한 사람을 택하는데, 이들은 제를 지낸 뒤 1년 간을 상가 등 궂은 곳은 갈 수 없으므로, 지금은 서로 맡지 않으려 한다고 한다. 천 룡제 등 당산제는 남자만이 참석하고, 줄다리기는 남녀 모두 참여하는 점이 다르다.
<
10> 임리천룡(林里天龍). 소나무 4주의 당산나무
천룡(소나무)은 원래 5그루였으나, 어느 해 보리 짚을 주위에 쌓아 둔 것 때문에 1그루가 고사하여 현재 4그루가 남아 있으며, 서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1그루처럼 보 이는 것이 특이하다. 고창군 보호수로 지정(번호 9-14-39)되었으며 2006년 기준 207년 수령으로 기록되어 있다(사진 10). 천룡제를 지낸 뒤에는 남은 제수를 준비하여 솟대 밑에 있는 앞 당산(할아버지 당 산)에서 축문을 읽고 재배하며 음복한다. 이때 소지(焼紙)는 올리지 않고 음복 시에 도 제주(祭酒)와 실과만을 먹는다고 한다.
<
11> 앞 당산(일명 할아버지 당산). 우측에 솟대에 감은 짚줄이 보인다.
할머니 당산제인데, 형식은 천룡제 및 앞 당산제와 같다. 할머니 당산은 임 리 서쪽 우체국 건물 옆에 있는 작은 선돌(입석)인데 높이는 1m가 채 못된다. 또 큰 나무 밑에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사진 12> 뒤에 세워져 있는 선돌에 금줄(새끼줄)이 둘러쳐져 있다.
다음으로는 우물에 와서 굿을 하는데 제물(祭物)은 없이 풍물만 치는 형식이다. 당산제에는 모두 4곳에 촛불로 등불을 만들어 거는데, 곧 천룡・앞 당산・할머니 당 산・우물에 걸어 놓는다. 특히 동네 복판에 있는 우물은 예로부터 매우 소중한 존재 로 인식하여 왔으며, 매년 정월 14일에 마을주민 공동작업으로 청소한다. 이 우물에 는 또 특별히 금하는 것이 있으니, 곧 청소 뒤에 제일 먼저 물을 길러 천룡제의 제 물을 만든 다음이라야 주민도 물을 길러 갈 수 있다고 한다.
<
4)
13> 우물, 임리 여성 경로당 앞에 있다.
솟대에 옷 입히기 (대강리 포함)에서 가장 흥겹고 신명나는 민속놀이 중에 줄다리기가 있다. 이곳
줄다리기의 전통은 퍽 오래전부터 행해져 온 것이라고 한다. 대체로 줄다리기는 한 해 의 길흉을 점치고 풍년・풍어 등을 기원하는 뜻에서 행해지는 마을행사이다. 주로 명 절에 행해졌으며,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장정들만 또는 남녀노소가 함께 줄을 잡아당 겨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대개 정월 대보름날 행하며 2월 초하루에 행하기도 한다. 흔히 당산 굿에서도 줄다리기가 행해지며, 이를 ‘줄다리기 굿’이라고 하는데, 승부 가 나면 당목에 줄을 감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빈다. 줄 만드는 것부터 놀이까지, 전 과정이 완전한 협동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주민들은 이를 통해 마을의 화합과 단결 력, 그리고 향토애를 키워왔다. 이렇게 임리의 줄다리기 역시 우리나라 중남부에서 행해지는 줄다리기와 크게 다 르지 않으나 약간 다른 점이 있어 흥미롭다. 이 마을에서는 대개 정월 보름날 다음인 16일 아침부터 주민들이 합심하여 줄을 메기기(꼬기) 시작한다. 점심에는 간단한 음식(국수 등)을 만들어 함께 먹고 다시 꼬는 작업을 하여 마치면, 남녀가 모두 줄을 어깨에 메고 동네 고샅을 한 바퀴 돈다. 옛적에는 동네 외곽으로 돌았으나 지금은 주민 수가 많이 줄어 힘이 들므로 그 거리 를 단축하기 위해서 마을 안 고샅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간소화한 것이다. 이때 10 여명의 농악대가 앞을 인도하게 된다. 마을을 돈 다음 이 줄을 지금의 여성회관(여성 경로당) 뒤편 옛길에 동서로 하여 길게 늘어놓은 다음 오후 3시쯤 되면 이 길을 기준으로 동・서편 거주 주민들이 편 을 갈라 줄다리기를 한다. 본래는 서편에 여자, 동편에 남자로 하여 왔으나 근래에는 남녀가 모두 섞여서 당기되, 혹 한쪽이 수가 너무 차이가 나면 결혼・미혼자를 구분 하여 한 쪽에 보태어 준다. 행정리인 임리와 대강리의 구분이 아니라 옛길을 중심으
나누기 때문에 두 마을이 서로 섞이게 되어, 예로부터 한 마을처럼 지내오는 전 통을 지켜가며 우의를 다져가려는 아름다운 뜻을 엿볼 수 있다.
<
14> 줄다리기 하는 옛길(여성회관 뒤편)
줄다리기를 마친 줄은 앞 당산 옆에 있는 솟대의 몸에 감는데, 이를 입힌다고 말 하기도 한다. 솟대에 칭칭 감긴 줄은 마치 용이 몸을 두른 모습으로 보이는데, 용은 비를 가져오는 신령한 존재이고 또 물에 잠겨 있다 승천하는 존재이므로 솟대를 세 워 수기(水気)를 막으려는 이 마을의 염원과 잘 부합되는 상징적인 대상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사진 15> 솟대를 감은 줄다리기 줄(아래쪽에 앞 당산이 있다)
예전에는 줄다리기 줄의 굵기가 지금보다 훨씬 굵고 길이도 길었다고 하는데, 대
직경은 30㎝, 길이는 80m가 넘어, 4톤 트럭 1대에 가득 찼다고 한다. 현재는 굵 기나 길이가 예전의 10분의 1에 불과하나, 동네의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단결과 협동을 다지는 흥겨운 축제의 모습을 이어가고 있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솟대는 생목을 심을 생각에서 여러 차례 미루나무를 심기도 하였는데 나무가 곧 고사하여 버리므로, 그대로 소나무를 깎아 세우고 있다고 한다.
5)
(天龍祝文)과 당산축문(堂山祝文)
이 마을에는 천룡제와 당산제를 지낼 때 읽는 축문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천룡축문 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維歳次( )正月( )朔十五日( )幼学( ) 敢昭告于 天竜至霊之下 天地之間 神為最霊 人物之内 村為最重 村頼於神 神依於村 水患疾疫 一無所傷
3)荒虫食
亦無所害 終世太平 雖有人過 勿愆勿咎
謹以清酌 庶羞酒果 祇薦于神 尚饗
이 내용은 곧 “유세차( )정월( )삭15일 유학(모인)은 천룡으로서 지극히 신령하신 분께 감히 밝게 아룁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신이 가장 신령스러우며, 인간 안에서는 마을이 가장 귀중하나이다. 마을은 신에게서 힘입으며 신은 마을에게 의지합니다. 수 해나 질병에서 한 가지라도 손상받지 않으며, 가뭄과 병충해로도 해(害) 받지 않고 해[年]를 마치도록 태평하게 하소서. 비록 사람들이 허물이 있더라도 나무라지 마소 서. 삼가 제주와 제수와 과실로써 신령님께 공경스럽게 올리오니 흠향하소서.”로 풀 이할 수 있다.
다음 당산축문은 앞 당산(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모두 읽는 축문인데, 이를 옮기고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維歳次( )正月( )朔十五日( ) 幼学( )敢昭告于 堂山至霊之下 人神雖殊 礼軆猶同 神之所依 惟在於村 村之所頼 惟在於神 3)
는 旱의 오자로 보인다.
随処安保 或有天禍 呵襟不祥 或有疾病 特降霊威 使此民人 終世太平 謹以清酌庶羞 祇薦于神 尚饗
“유세차( )정월( )삭15일( ) 유학(모인)은 당산으로서 지극히 신령하신 분께 감히 밝게 고합니다. 인간과 신은 비록 다르지만 예를 갖추어야 할 대상으로서 보면 오히 려 같습니다. 신이 의지할 곳은 오직 마을에 있고 마을이 힘입을 곳은 오직 신에게 있으니,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도우셔서 곳에 따라 편안하게 보호하여 주소서. 혹 하 늘의 재앙이 있게 되면 상서롭지 못한 것을 막아 주시고, 혹 질병이 있게 되면 특별 히 영험한 위엄을 내려 주시어 이 백성들로 하여금 해를 마치도록 태평케 하소서. 삼가 제주와 제수로써 공경스럽게 신에게 올리오니 흠향하소서.” 두 축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신과 인간이 서로 의지해야 할 존재임을 밝히고 있는 점이다. 한편 은연중 신이 평안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평안해야 함을 신에게 각 인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4.
민요(노랫가락)
임리의 민요로는 일찍이 1992년 발간된 고창군지에 채록된 것이 있어 다행히도 그 내용이 전해온다. 당시에 이 마을 주민 3인(조석권, 최길례, 신준례)에게서 채록 한 것인데, 다음과 같다.
<
>
(남, 작고)
얼널널 상사뒤요
가찬사람은 보기나 좋게
저그저그 잘도 찧는다
얼널널 상사뒤야
얼널널 상사뒤요
높은 디는 쾅쾅 놓고
들었다 놓았다
낮은 디는 가망가망 놓소
쾅쾅 찧소
얼널널 상사뒤야
얼널널 상사뒤요
높은 디는 힘 들어놓고
먼디 사람은 듣기나 좋게
낮은 디는 가만히 놓고
얼널널 상사뒤야
얼널널 상사뒤야
<베틀노래>
최길례(여, 작고)
옥난간이 베틀놓고
뒤돌아 나던 양은
가르쇠장 쇠 맞추고
오뉴월이 소내기냐 비내기냐
먼 산을 짜여 앉고
원산소리 나는 양은
앉을 노를 노딜이고
장성갈제 버석잃고
그 우그 앉었으니
버석잃어 속이 쓰려
한 꽃이 피었도다
끌을세라 잡아대리는 양은
주리주리 거닌게는
칠월 칠석 오작교를
삼형제고 독신이고
견우직녀 만났다가
늙을세라
헤어지고 건너는 듯
사냥개 두린 양은
도토마리라 허는 양은
북두칠성 둘렀는디
정절쿵 도토마리
<연정요> 할머니 저 할머니
부지땅 짚고 쑥 나서서
반달 같은 딸 있으면
기는 작아도 구녁을 뚫고
원달 같은 사우를 삼소
참새는 작어도 알을 낳는디
원달 같은 딸은 있거마는
내가 뭐 작으야고
나이가 어려 못 여우것네
어머니는 동갑으 손자보고
헌게 가시내는
야 다시 동갑으 아들낳소
<
> 송악의 백학이 울고
누떠올랐네 누떠올랐네
이월 매전의 꾀꼬리 울고
팔월 공산 달 떠올랐네
삼월 사구라 북치는 소리
구월 국진 국화주에
천지 백만이 다 날아드네
오동진 복판에 거문고는
사월 흑싸리 비둘기 울고
줄만 골라도 소리가 잘 나
오월 난초 또 만발했네
다 놀았네 다 놀았네
유월 목단에 나비를 청하여
240일 다 놀았네
칠월 홍싸리 멧다리 뚜들제
일백이십이 본이라네
<연정요>
신준례(여, 81세)
임도 나를 생각을 허면
너 그럴줄 내 몰랐네
나도 임을 생각하지
얼씨구나 좋네 정말로 좋네
임아 임아 무정한 임아
이런 재미가 어데 있어
<아리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노다가 가세
아라리가 났네 꼬리 울고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리랑 얼씨구 아라리가 났네
아라리가 났네
노다 가세 노다가 가세
아리랑 응 얼씨구
저달이 떳다 지도록
아라리가 났구나
<닐리리 타령> 닐리리야 닐리리야
닐리리야 닐리리야
니나노 날실로
청사초롱 불 밝혀라
내가 돌아간다
잊었던 낭군이
닐리리야 닐리리야
다시 돌아온다
왜 왔든고 왜 왔든고
닐리리야 닐리리야
울고나 갈길을 왜 왔든고
<
16> 노래 솜씨가 뛰어난 신준례(여, 81세) 할머니
민요를 불렀던 분들 중에 신준례 할머니는 아직 생존하여 있으며 다시 추가로 민요를 들을 수 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군밤타령> (1절) 뒷동산에 밤 까는 처녀
신준례(여, 81세) (2절) 임은 가고 봄이나 오는데
밤 한송이만 주라마세
꽃만 하나 피어도 임의 생각
외통베기를 드릴까요
강물만 푸르러도 임의 생각
뒷통베기를 드릴까요
누워 생각 앉아 생각
이밤 저밤 다 버리고
생각 생각이 임뿐이요
하룻밤만 유람하세
구시월 시단풍에
얼씨구나 좋네
낙엽만 날려도 임의 생각
정말로 좋네
누워 생각 앉아 생각
이런 경사가 어데 있오
생각 생각이 임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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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가>
오동추야
신고명산 만전에 풍에
달이 동동 밝은데
바람이 분들 쓰러지리
임의 동동 생각이 좋다
바람이 분들 쓰러지리
달이 동동 나노라
송죽같이 굳은 절개
임보고 싶으면 사진을 보고요
매맞는다고 허라하리
말하고 싶으면 전화를 하세요
몸은 비록 입생일망정
(2009)
절개조차 없을소냐 얼씨구나 좋네 정말로 좋아 이런 경사가 어디 있소
<오동추야>
김정조(여, 81세)
울타리 밑에서 깔비는 낭군아 옆눈질 사리살짝에 이내 간장 녹는구나
<사진 17> 임리 여성 경로당의 마을 할머니들
5.
후원조직 일심계와 유희준 선생 침략시기 고창지역의 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1925년에 조직한 일심회(一心
)가 있었다. 일심계의 계장(契長)인 유희준 선생이 쓴 계의 서문에는 “마음이 같은 사람끼리 계를 맺고 일심계라 제목을 붙인 것은 곧 마음이 같은 사람끼리 서로 함께 하자는 뜻이다(合同心而契焉 目之以一心者 即同心相与之意也)”고 하였다. 또 “그러나 보편적으로 일심을 말로만 하는 데에 그치고, 중요한 할 일을 제안・실천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치수 없는 자와 같고, 눈금 없는 저울과 같아서 표준할 바가 없으니 어 떻게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然汎曰 一心而已 不以主要而提焉 則如無寸之尺 如無星 之称 不可準的 何能済事)”라고도 하였다. 언뜻 보아도 친목을 도모하자는 일반적인 계와는 달리 한 마음이 되어 뜻있는 일 을 해 보자는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비록 계 제 2조에서 “본 계는 계원 간에 형제 의 의를 맺어 애경상문(哀慶相問)하고 환난상구(患難相救)하며 과실상규(過失相規) 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으나 이때가 일제시기였음을 감안하면 역시 목적에 제시된 내용은 그저 상투적인 표현에 불과하며, 따라서 비중은 여전히 위의 서문에 실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심계 계책이 독항아리에 넣어져 땅 밑에 묻혀 있던 것이 조국광복 후에야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점도 위에서 말한 바 예사 계 조직이 아니었음을 반증해 준다고 하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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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일심계의 서문 (계장인 유희준 선생이 짓고 쓴 것으로 보인다)
전언에 의하면, 일심계는 독립지사인 일우(一愚) 김승옥(金承玉, 1889~ 1962년)선생의 독립운동을 후원하였으며, 대개 자금을 조성하여 일우 선생을 통해 임시정부로 보냈다고 한다. 또 일제가 수탈하여 쌓아둔 공출미(성송・상하면 야적) 를 불질러 태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때 일우 선생이 체포되어 일경에 의해 3일간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되었으나, 손톱을 잡아 빼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자백하지 않 고 끝까지 단독 행동이라고 주장하여 계원들이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우 김승옥 선생은 고창 출신이며 평생을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 주도인물로 체포되어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며, 그 후로도 고창청년회, 고창노동회, 고창고보 후원회 등의 대표를 맡으며 항일민족정 신을 고취시키고, 광복 후에는 신탁통치반대고창위원장과 고창군선거관리위원장 등 을 맡아 정부수립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조국이 분단된 상태에 머물자 이를 깊이 탄 식하고, 이후부터는 사회정치활동을 일체 중단하였으며, 오직 육영사업에 뜻을 두어 1945년 고창고등여학교(현 고창여자중・고등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1962년 선 생이 작고하자, 고창군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1991년에 대전국립묘지에 안장
. 한편 일심계는 계칙에 의해 최연장자인 남하(南霞) 유희준(柳煕駿)선생을 계장(契 長)으로 하고, 부계장 김창한(金昌翰), 총무 박용순(朴龍淳), 서무간사 오의균(呉毅 均), 재무간사 이횡욱(李宖郁)을 포함 모두 22인으로 구성되었다. 계장인 남하 유희준(1865~1948년)선생은 신림면 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젊은 시 절 과거를 준비하여 한 차례 응시하였으나 실패한 뒤로는 성현의 학문에 전념하였 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상경할 때에 충청도에서 한 선비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는데, 세월이 흐른 뒤 그 선비가 무장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이리하여 남하 선생은 무장현 의 책방(冊房)으로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는데, 아마도 구한말 1900년대 초쯤의 시기 로 추정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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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일심계원의 명단
(관향, 생년월일, 부모의 생존여부, 본적, 주소의 순으로 기록하였다)
4) 본 항목의 내용은 남하 선생의 손자인 유종원(柳宗元, 69세) 씨와 일우 선생의 삼남(三 男)인 김종학(金鍾學, 81세, 서울 거주) 씨의 증언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
6.
효자정려와 비석 대강리에는 효자와 효부의 정려와 비석 등이 세워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나라에서 표창한 3효자가 있어서 마을 입구에「3효자 정려(三孝子 旌 閭)」가 서 있다. 원래는 건너편 면사무소 부근에 위치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 락한 나머지, 근래(2003년)에 마을 가까이 현 위치에 옮기면서 새롭게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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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3효자 정려각(건물 안에 3효자의 정려 현판이 안치되어 있다)
3효자 중 고종 24년에 정려된 분은 유덕휴(柳徳庥) 공과 유빈현(柳彬賢) 공이며, 31년에 정려된 분은 유병욱(柳秉郁) 공이다. 마침 정려각 좌측에 고흥유씨 정려이건 사적비(高興柳氏 旌閭移建事蹟碑)가 세워져 있는데, 후면과 측면에 3효자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어 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5).
5) 동 비문은 일가 후손이며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던 유풍연 선생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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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삼애 유덕휴 공의 정려
(1667~1739년) 공은 신림면 환산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삼애(三涯)이다. 백부 일평공[柳必愿, 1625~1684년]과 중부(仲父) 허재공[柳恵愿, 1632~1695년] 의 효행을 본받아 양친을 지성으로 봉양했다. 친병(親病)이 위태롭자 손가락을 베어 주혈하여 80장수를 누리게 하였으며, 친상(親喪)에 6년간 죽만 마시며 시묘하였다. 향리 사림의 천거로 경종 2년(1722년)에 급복(級复)6)되고, 일평공, 허재공과 함께 ‘일문 3효(一門 三孝)’라고 일컬어졌다. 고종 24년(1887년)에 정려되고, 1922년 용 강사(龍岡祠)에 배향되었다.
<사진 22> 일사 유빈현 공의 정려
유빈현(1762~1835년) 공은 신림면 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일사(一沙)이다. 삼애공의 증손으로서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주혈하였으며 모친의 병에는 북두성에 쾌유를 빌었다. 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하였으며, 가정이 빈곤한 처지였으 나 강학에 힘썼다. 고종 24년에 효행으로 정려받았다. 6)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해 주는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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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경봉 유병욱 공의 정려
(1817~1874년) 공은 일사공의 혈손이며, 임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경봉 이다. 모친 병환에 백방으로 구약 시탕하였으며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주혈하였다. 상을 당하여 6년간 시묘하였으며, 고종 20년에 효행으로 정려 받고 이 어 조봉대부동몽교관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다시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을 가자 받았다7). 또한 임리, 대강리에는 근래에 세워진 공적비와 훈열비 등이 있는데, 대강리 마을 뒤에 조성된 영모원(永慕苑)에는 일심계(一心契)를 이끌었던 유희준(柳煕駿)선생의 공적비와 일심계 계안(契安)의 문안 전체를 새겨 세운 비석이 있고, 마을 안 큰 길 의 좌우에는 효열부 평택임씨 기적비(孝烈婦 平沢林氏 紀績碑)등이 세워져 있다. 이 는 이 마을이 예로부터 인륜도덕을 숭상하여 효행을 실천하여 왔음을 말해 주거니와, 이에서 비롯된 기풍과 정신이 곧 오늘날에도 이 마을과 주민들로 하여금 서로 화합하 고 협동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나가게 하는 근본적인 배경임을 말해 준다.
7) 정려 현판에는 고종 31년에 정려받은 것으로 새겨져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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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일심계의 계칙 전문을 새긴 비(우측)와 남하 유희준 선생의 공적을 새긴 비(좌측)가 세워진 영모원(대강리 뒤편)
○ 도움 주신 분 •
(조사위원 : 임리・대강리 마을 현황 자료 조사)
• 고일규(81, 만화리) • 구좌인(대강리 이장) • 김종원(조사위원, 사진촬영) • 김종학(81, 서울, 김승옥 선생의 3남) • 봉필광(신림면장) • 신준례(여, 81) • 유종원(69, 유희준 선생의 손자) • 유종철(83) • 유춘영(76, 임리이장) • 유풍연(79, 전 전주대학교 교수) • 이기화(전 고창문화원장) • 이영노(81, 신림 복지회관 노인회장) • 조용구(자문위원) • 채연식(73, 법지리)
○ 참고문헌 •
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2009
•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 고창의 교육 김경식, 1995 • 고창의 유학 고창군, 1996 • 허제집 원광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