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이 풍부하고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암치리 박채주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고창읍에서 국도 23호선을 따라 서남쪽 영광 방면으로 약 7㎞ 정도를 가면 ‘웅비성송 (雄飛星松)’이라 쓰인 웅장한 표지석이 세워진 삼거리에 도달한다. 오른쪽 4차선은 대 산 영광으로 가는 우회도로이고 왼쪽 2차선은 성송면 소재지를 지나는데, 면소재지에 서 직진하면 오른쪽에 성송체육회관(판정리 36-7)이 보이고 앞으로 가면 농협주유소 가 있다. 주유소 앞 삼거리에서 표지석의 ‘장성·고산성지’ 쪽으로 약 700m 가면 바로 우측에 성송면 암치리 백토마을이 있고 암치재를 향하여 전방 좌측에 암치마을이 있 다. 백토마을에는 성송초등학교가 있고 앞에는 석재를 채취하는 석산이 있는데, 마치 산 이 벽인 냥 깎아내린 듯 서 있다. 암치리는 성송면 11개 법정리 중 하나이고 행정분 리는 암치와 백토 두 개이다. 본래 무장군 성동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 합에 따라 대흥리, 덕암리, 무송리 일부와 원송면의 금사리 일부를 병합하여 암치리라 하여 고창군 성송면에 편입되었다. 암치마을 뒷산은 칠성산 고개를 넘어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으로 통하는데 그 고개 에 바위가 많이 깔려 있어 ‘암치(岩峙)’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 중엽 청주한씨가 터 를 잡아 약 400년간 자작일촌(自作一村)을 이루며 살다가 이조 중엽, 한씨들이 떠날 무렵에 영광에 살던 진주강씨들이 이주해 와서 벼슬길에 오른 사람도 많고 큰 부자도 나오면서 융성하자 각처에서 빈민들이 모여 크게 번창했다. 이러한 연유로 1950년대 에는 암치마을이 행정구역상 암치·운암 분리로 구분되어 이장을 따로 두기도 했다. 하 지만 지금은 농촌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두 개 행정리가 암치마을로 통폐합되어 한 명 의 이장을 두고 있다.
<사진1> 암치마을 전경
<사진2> 암치마을 표지석
한편 백토마을은 임진왜란 때 영광에서 진주강씨가 들어와 마을 터를 잡았으며 그 뒤 에 진주정씨, 전주이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앞산이 옥녀봉인데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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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가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형국이라 하여 베도트말(베를 짜기 위해 날실을 감아 놓 는 ‘도투마리’에서 온 말)에 빗대 “베토말”로 불리다가 “베토물-백토물-백토”로 바뀌었
다. 자연부락으로는 백토, 금사, 제부랑산이 있다. 백토마을 역시 백토·금사 분리로 이 장이 두 명이었으나 지금은 1개 행정리가 되었다. <사진3>백토마을 전경
<사진4> 백토마을 입구의 성송초등학교
2. 마을의 자연환경 암치리는 동쪽으로는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남쪽으로는 대산면과 경계를 이루는 성송면의 최서남단이다. 암치마을을 기준으로 뒤에는 구황산, 옆은 고산(해발 526m), 앞에는 옥녀봉이 있어 3면이 산으로 울타리를 하고 있고 서쪽 방면만 가까이 산이 없 다. 이런 골짜기 같은 지형 탓에 바람이 강해 다른 마을에 비해 비닐하우스 시설이 없다고 하고, 옛날 옛적 농촌처럼 특용작물 없이 논밭에서 얻어지는 소득으로 생활하 고 있다. 구황산은 노령산맥의 끝 줄기에 있으면서 이시메등까지 연결되어 법성포까지 뻗었다. 구황산이라는 이름은, 구황산 줄기에 명당이 있어 그 곳에 묘를 쓰면 아홉 분의 임금 [九皇]이 탄생한다 하여 지어진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 명당 터를 찾지 못하여 묘를 쓴 사람이 없었고 일제 강점기에 산의 정기를 꺾어야 한다며 쇠말뚝을 박았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옥녀봉은 고산 줄기로 옥녀봉귀봉(玉女峰貴峰)엔 옥녀의 거울인 곳에 나씨(羅氏) 선산이 있고 옥녀의 화장품인 분곽엔 강씨(姜氏) 선산이 있으며 옥녀의 음기(飮器)인 고씨골엔 북(鼓)을 상징하는 정씨(鄭氏) 선산 이 있다. 그리고 백토에서 송산으로 통하는 고개는, 옛날 어떤 도승이 산세를 극찬했다 하여 ‘도찬치(道讚峙)’라 했는데 지금은 ‘되챙재’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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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고산 등산로
<사진6> 고산성지(高山城址) 옥녀봉 전경
3. 마을의 인문환경과 산업 암치리는 고인돌군이 풍부한 지역이므로 청동기시대부터 마을 터가 좋고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을까 한다. 또한 진주강씨 문중에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점으로 봐도 “마을 터가 좋다”는 소문이 한갓 떠도는 소문만은 아닌 듯하다. 암치리에서 태 어나 크고 작은 벼슬을 한 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에 와서 면내에서 부자 마을로 평이 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사람의 인품이 겸손하고 검소할 뿐 아니라 청렴하여 백성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던 결과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암치리는 석산개발 사업체가 있는 것 외엔 어느 농촌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암치마을과 백토마을 앞은 지방하천 (암치리 232번지선과 163번지선)이 흐르고 있어 마을 운치를 한층 맑게 하고 있다. 또한 군에서 마을하수도 사업을 시행하여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고 있는 ‘산 속의 아 름다운 마을’이라 할 수 있다. 1) 융성기의 암치리 8·15해방 이전 일제 강점기 때에 암치리는 성송면 행정의 중심지, 즉 면소재지였었 다. 면내 다른 마을보다 먼저 마을이 형성되었고 교통도 편리했기 때문에 면소재지가 되었다고 한다. 성송면사무소뿐만 아니라 지서와 초등학교도 모두 암치리에 있었다. 그 뒤 성송초등학교가 있는 백토마을로 이전, 6.25동란이 끝날 무렵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자 면사무소와 지서는 학천마을로 옮겼다. 당시 면사무소와 지서는 남양홍씨 제실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치가 좋지 않다 하여 강성욱의 부친 증원(甑遠) 이 부지를 희사하여 현재의 파출소(판정리55)로 이전하였고 면사무소는 판정리 축 동 마을로 옮겼다가 1980년 11월 26일, 지금의 성송면사무소 건물이 준공되었다. 이렇듯 면소재지가 옮겨지고 행정기관과 치안센터가 서너 차례 옮겨 다닌 예는 흔 한 사례는 아니다. 당시 이 두 기관이 위치한 암치마을과 백토마을 부지는 주민이 살고 있는 일반 주택지이다. 2) 마을의 인구와 성씨분포(2011년 6월 말 현재) 인구수 마을
연령
암 치
10세
20세
30세
40세
50세
60세
70세
80세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상
12
3
4
11
8
13
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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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76
백 토
6
5
3
3
5
13
21
청주
진주
밀양
광산
진주
전주
창원
한씨
강씨
박씨
김씨
정씨
이씨
황씨
암 치
12
12
5
4
2
2
백 토
1
25
2
6
2
32
88
기타
계
5
42
18
56
성씨별 가구수 마을
성씨
2
⚬ 직업별 가구수 마을
직업
비 고
농업
회사원
계
암 치
40
2
42
3
백 토
56
56
1
(다문화가정)
3) 암치리의 유적 고산성지(高山城址) : 성송면 상금리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와 경계를 이루는 고산(高 山·鼓山) 정상 부근에 위치한다. 『동국여지승람』 무장조에는 고산성 ‘石築周入千一百 尺中有三泉’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무장읍지』(1958년) 성곽조를 보면 ‘高山城在高山 石築周圍八千一百尺內有二泉’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문헌으로 볼 때 이곳이 옛 고산성 터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성지는 파괴가 심한 편으로 문지와 성벽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한편 고산성의 축조연대에 관하여는 문헌비고 성곽조에 ‘世傳三國時代’라 고 되어 있으나 이와 관련된 유물은 확인할 수 없다. <사진7> 고산성지 전경 암치리선각석불좌상(岩峙里線刻石佛坐像) : 암치제 서쪽 야산 중턱(해발 250m)에 위 치하고 있는 선각석불좌상이다(암치리 산 84번지).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평탄한 대지 가 형성되어 있는 이곳은 예전에는 ‘우림정(友林亭)’ 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불상은 타원형 판석에 윗부분은 보주형(宝珠形)으로 다듬어 신광 형태로 만들고 평평한 앞면에는 원형두광(圓形頭光)을 지닌 석불좌상을 얼굴에서부터 신체 아래 부 분에 이르기까지 선각으로만 처리하여 마치 그림을 그린 듯이 보인다. 머리에는 나발 과 육계가 남아 있으며 코와 입은 완전히 마멸되었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설 법인(說法印)을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왼손은 불분명하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몇 가닥의 단순한 수직 옷 주름을 새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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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 암치리선각석불좌상 암치리 유물 산포지 1 : 성송으로 가는 23번 국도 동쪽에 있는(성송면 암치리 564-4) 유적으로 현재 농경지이며 구릉의 북측 또한 농경지이다. 사면은 완만한 편으로 정상 부에 비하여 삭평이 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로 구릉의 남서 사면에서 경질토 기편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암치리 유물 산포지 2 : 장성으로 가는 893번 지방도로 남측에 위치한다(암치리 162-1). 유적은 저평한 구릉대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능선을 따라 진주강씨 민묘군이 조성되어 있다. 경작으로 인해 삭평 유실이 심한 편이다. 유물은 주로 남서측 중단부 와 하단부에서 개배 석검병부편 타날문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강대식(姜大湜) 고택 : 한말에 승지(조선조 승정원에 달려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는 정 3품 당상관)를 지냈던 강대식의 고가로 그의 아버지 만포(晩圃) 강연수(姜淵秀)가 건 축하였다. 성송면 암치리 317번지(사진) 내에 있고, 집은 일곱 칸 모퇴겹집으로 중앙 의 네 개 기둥은 두리기둥이고 주초는 덤벙주초이며 팔작지붕의 홑처마 건물로 규모 는 30평 정도이다. 대문은 솟을대문이며 고택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에는 기와가 얹혀 있다. 구조면에서 다양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 한 직손 강성욱이 고택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진9> 강대식 고택 수사공 강응환 가전유물(水使公 姜膺煥 家傳遺物) : 성송면 암치리 319번지 내 위치 한 건물은 수사공 강응환의 각종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강응환은 영조 11년(1735년) 이 마을에서 태어나 36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한동안 말직에 있다가 정조 2년, 44세 때 내직으로 들어가서 그 이듬해에는 경상도 칠원 현감으로 부임하였고 이후 대구영 장을 거쳐 함경도 고령진병마검절제사(高嶺鎭兵馬僉節制使), 평안도 창성도호부사(昌 城都護府使), 동래수사(東萊水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를 수사공이라 부르는 까닭은 말년에 경상좌도 수군절제사(정3품)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우국충군의 일념 으로 주어진 업무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평안도창성부사 재직 때 압록강 연변 일대의 세밀한 군략지도를 만들었으며 동래부사 재직 시에는 영남 해안 일대의 군략지도를 만들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그는 이 지도를 각각 3부씩 작성하여 1부는 국왕 에게 올리고 1부는 관아에 비치하게 하였는데 그 일부인 ‘고려중요처도(高麗重要處 圖)’, ‘청북변성도(清北邊城圖)’가 현재 문화재로 (지방유형문화재 제130호, 1989년 1 월 9일 지정)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해 내려오는 그의 상반신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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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는 정조 19년(1795년) 그가 궁중에 들어가 국왕을 뵈었을 때 우국충군의 인물임 을 알고 정조가 친히 궁중의 화공을 불러 그리게 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가전 유물 은 보관 관리상 어렵고 도난 위험도 있어 국립 전주 박물관과 고창 판소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10> 수사공 강응환 가전유물 암치리 지석묘군 1 : 암치리에서 장성으로 가는 지방도 893번 도로변 암치제 동쪽에 있다. 이들 지석묘의 원래 위치는 암치제 제방 하단부였으나 발굴조사된 후 이곳으로 이전·복원하였다. 상석이 가장 큰 1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훼손된 상태이다. 상석 의 평면형태는 판석형, 반원형, 부정형 등이 있으며 지석은 주형지석이 보인다. 상석 의 무게는 113톤이나 되는 1기를 제외한 기타는 2.6~12톤 정도이며 출토된 유물은 무문토기, 홍도마제식부 등으로 알려져 있다(암치리 204). <사진11>암치리 지석묘군 1 암치리 지석묘군 2 : 암치리 남쪽 바닥에서 5기가 확인되었다. 상석은 모두 위치가 이동된 것으로 보이며 지석 등은 보이지 않는다. 상석은 대부분 괴석형과 부정형으로 골짜기를 따라 분포되어 있다. 지변에 이와 동일한 석재들이 산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더 많은 지석묘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알 수 없다.(암치리 227) 암치리 지석묘군 3 : 암치제 북쪽 제방 바깥쪽 논에 지석묘 2기가 약간의 간격을 두 고 분포하고 있다. 1호 지석묘는 상석 형태가 판석형으로 크기는 545×360×130㎝이 며 2개의 주형지석이 확인된다. 2호 지석묘의 경우 상석 형태는 판석형으로 크기는 430×360×130㎝이며 지석은 3개가 확인된다(암치리 204-1). 암치리 지석묘군 4 : 장성으로 가는 893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암치마을을 지나 200m 정도 가면 북동쪽으로 유적이 위치하며 청주한씨 재실 1동이 있다. 현재 지석 묘는 10여기로 상석의 형태가 훼손되지 않은 것은 3~4기이며 대부분은 위치가 이동 된 것이다. 상석의 형태는 괴석형이 많으며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단면형태는 장방형 과 방형이 주를 이룬다. 현재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어 이후에도 파괴될 가능성이 있 다(암치리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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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2> 암치리 지석묘군 4 암치리 지석묘군 5 : 장성으로 가는 지방도 893번을 따라가면 운암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뒤편에 유적(암치리 64-7)이 있다. 현재 유적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있으며 지석묘가 위치한 지역은 밭이다. 지석묘는 산 능선을 따라 일렬로 분포하고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 방형, 괴석형 등이며 지석은 2기를 제외하면 보이지 않는데 주로 지 형지석이다. 밭과 논, 민묘의 조성에 의해 대부분이 훼손되어 보호조치가 필요하다.
<사진13> 암치리 지석묘군 5 암치리 지석묘군 6 : 성송초등학교를 지나 도로 동쪽에 위치(암치리 341)해 있는 송 림농원에 6기의 지석묘가 동서방향으로 약간 간격을 두고 열을 지어 있다. 상석의 형 태는 장방형, 부정형 등이며 6기의 지석묘 중 1기만이 3개의 주형지석이 모서리에 받 쳐져있다. 기타 지석묘의 경우 대부분 송림 조성 때 본래의 위치에서 옮겨지면서 훼 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암치리 지석묘군 7 : 성송으로 가는 국도 23번을 따라가다 우회도로와 만나는 지점 (암치리 산 9-18)에 위치한다. 지금은 소나무 숲이 되었고 남동쪽은 밭이다. 지석묘는 2기로 아래에 민묘가 있다. 지석묘의 상석 형태는 부정형으로 지석이 1기에서만 보이 며 단면형태는 방형에 가깝다. 민묘를 만들 때 위치가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암치리 지석묘군 8 : 백토마을 뒤편으로 들어가는 소로 남측에 인접(암치리 산50-4) 하여 지석묘 5기가 있다. 지금은 이곳에 민묘군이 조성되어 있으며 조금 떨어져 성암 교회가 있다. 상석의 형태는 판석형, 장방형, 방형 등이며 지석은 2기에서 확인되며 판석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지석은 훼손되고 후에 받쳐 놓은 것으로 보이며 2 기는 민묘 조성 당시 상석이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4) 전설 황소바위와 메기북 : 수사공 강응환이 평소 기르던 소를 암치제 밑 황소바위 부근에 풀을 뜯어 먹으라고 매어놓고 석양이면 소를 데리러 가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소를 데리러 갔는데 소의 몸통은 온데간데없고 머리만 남아 있어 이상한 일이라고 고 민하면서 소가 없어진 까닭을 궁금해했다. 다음날 아침 같은 곳에 소를 매어놓고 지 켜보니 큰 메기(물고기)가 소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활 16발 을 쏘아 메기를 잡았다. 어찌나 메기가 크던지 메기의 가죽(껍데기)으로 북을 만들 었다고 한다. 그 북은 직경이 47㎝ 정도 되는 것으로 수사공 가전유물 전시관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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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되어 있으며 북의 가죽은 관람객들이 조금씩 찢어가서 현재는 약간의 가죽과 몸 통만 보존되어 있다. <사진14> 메기북
<사진15> 황소바위
5) 당산제 암치마을 당산제는 정월 대보름날에 지낸다. 정월 열나흘 새벽이 되면 마을 입구와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대나무 사이에 왼 새끼를 연결하여 금줄을 치고 황토도 띄 엄띄엄 뿌려 놓는다. 제관으로 선정된 자는 제사일 사흘 전부터 일체의 바깥출입이 금지되며 외부인과 접촉도 단절되었다. 제삿날(祭日)에 제관은 목욕재계를 하였으 나 현재는 이러한 복잡한 의례 절차는 거의 생략되고 500년 정도 된 당산나무에 옷을 입히기 위하여 풍물 굿을 울리며 줄 감기를 하였으나 이마저 5년 전부터 생략 하게 되었다. 이는 농촌 인구가 줄고 노령화되면서 젊은 층이 줄었기 때문이라 한 다. 이장이나 개발위원장이 제관 역할을 하며 당산나무에 제물을 바치고 참여자 모 두 재배하는 것으로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사진16> 당산나무 6) 효열비 백토마을 앞 광장 지방 하천 쪽에 밀양박씨의 효열비가 세워져 있다. 효열부 밀양 박씨는 규정공의 후손 가선대부 동식(東植)의 딸로 17세에 진주인(晉州人) 통정대 부 사헌부 감찰인 영인(永仁)의 무매독자(無妹獨子)인 덕암 강익수(姜益秀)와 결혼 하였으나 계묘년 10월 7일에 부군이 세상을 떠나자 부군 나이 22세, 박씨 부인은 21세였다. 그 후 하나뿐인 아들을 잘 가르치며 키우고 있던 중 시모가 중풍으로 쓰 러져 전혀 거동을 못하게 되자 3년 동안 시봉하였다. 시부 또한 노구풍질로 방안에 드러눕게 되자 6년 동안을 수족이 되어 식사를 수저로 떠먹임은 물론 대소변도 받 아내는 등 청상과부(靑孀寡婦)로 살면서 지극정성으로 모시다 61세로 계미년 11월 23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비문은 한산인(韓山人) 이정규(李正圭)가 찬하였고 비는 손자인 사원(士遠), 수원(洙遠) 형제가 세웠다.
<사진17> 효열비 전경 4. 암치리의 걸출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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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적 인물 강필주(姜弼周, 1621∼1682) : 자는 대로(大老), 호는 송암(松菴)이다. 본관은 진주이 니 문량공 희맹(希孟)의 후손으로 호란창의(胡亂倡儀) 시언(詩彦)의 아들이다. 광해13 년(1621년) 출생하여 7세에 글을 짓고 29세에 진사를 하고 3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시강원필선 공조좌랑을 거쳐 보령군수로 나가 치적을 올려 현종으로부터 표리(表裏,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거나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던 옷의 겉감과 안감) 를 하사받았는데 권간(權奸)의 작용으로 벼슬을 그만두자 성송면 암치로 옮겨와 살 았고 동호에 정자를 지어 유지(遺趾)가 전한다. 뒤에 조정에서 함양군수로 불렀으 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사부(詞賦)와 시율(詩律)로 세상에 알려졌다. 심석 송병순(宋秉珣)이
서(序)하여
『송암집』이
간행되고
농암
김창협(金昌協)이
묘지
를 지었다. 강민저(姜敏著, 1651∼1705) : 자는 내숙(來叔), 호는 모산(茅山), 본관은 진주이 니 문량공 희맹의 후손으로 군수 필주의 아들이다. 효정 5년(1651년) 암치에서 출 생했다. 문곡 김수항(金壽恒)의 문인으로 숙종 20년(1694년) 인현왕후의 복위를 상소하고 이듬해 다시 영신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면서 언사가 몹시 강경하여 진도 로 유배되었다. 3년 뒤 죄가 풀려 돌아와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삼연 김창흡(金 昌翕)등과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 사복사정(司僕寺正)에 추증되고 『모산문 집』이 전하며 포암 윤봉조(尹鳳朝)가 묘지를 지었다. 강만저(姜萬著, 1655∼1730) : 자는 개숙(皆叔)이고 호는 치재(癡齋)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송암 필주의 아들이자 모산 민저의 아우이다. 효종 6년(1655년)에 출생 하여 숙종 7년(1681년), 27세 때 「제외구최공문 祭外舅崔公文」을 지었다. 숙종 27년(1701년), 47세 때에는 「치옹자서 癡翁自序」를, 숙종 31년(1705년) 12월에 백씨
모산공이
세상을
떠나자
「제백씨모산제문
祭白氏茅山祭文」을,
영조
6년
(1730년), 76세 12월에 시 「경술세제일 庚戌歲除日」을 지었다. 저서로 『치재집 (癡齋集)』 2권 1책이 있다. 치재가 세상을 떠난 뒤 문집을 발간할 때 송병순의 서 문이나 강천수의 발문을 보면 “치재는 정훈과 사우의 지도로 덕과 학문이 조숙하였 고 세속 사람들과는 달리 출세나 공명을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항상 신병 때문에 시골집에서 은거하며 경전에 잠심하고 고결한 성품을 기르면서 자칭 어리석은 사람 이란 뜻으로 호를 ‘치재(癡齋)’라 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문예의 재주 가 넉넉하고 뛰어나 누구도 미칠 수 없는 능력이 있었으니 스스로 어리석다고 한 것은 겸손한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시의 내용으로 보면 성당 때 의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의 시를 차운한 것이 많고 우리나라의 포은 정몽주, 도 은 이승인, 사암 유숙들의 시를 차운하고 있어 그의 시적 수준이 높음을 알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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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강응환(姜膺煥, 1735∼1795) : 자는 명서(名瑞), 호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물기재(勿欺齋)이다. 본관은 진주로 문량공 희맹의 11대손으로 숙종 때 함 양군수를 지낸 필주의 증손되는 주부(柱復)의 둘째 아들로서 영조 11년(1735년) 암치 리에서 출생했고 천품이 비범하고 재예가 절인(絶人)하여 경국제세의 포부를 안고 병 술, 천문, 지리, 음양, 산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일찍이 「무호가(武豪歌)」를 지어 “大丈夫 生天地間하여 大丈事를 하랴 하고 人間萬事를 歷歷히 헤어보니 글읽기 글쓰 기는 腐儒의 할 일이요 밭갈기 논매기는 農夫의 할 일이라 우리의 하올 일은 聖賢師 의 말을 따라 禮, 樂, 射, 御, 書, 數 중에 셋째를 따르리라” 즉, 글을 읽고 쓰는 것 은 쓸모없는 선비들이나 할 일이요, 밭을 갈고 논을 매는 일은 농부들이 할 일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성현들의 가르침에 따라 육예(六藝) 중에서 세 번째인 활쏘기 [射]를 익혀 무인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대장부의 포부를 피력하고는 무과에 급제하 였으나 때는 평시라 무인의 기개를 펼 기회가 없었다. 내직으로 통례원인의(通禮院 引儀) 將),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외직으로
칠원현감(漆原縣監),
고령진병마첨절제사(高嶺鎭兵馬僉節制使),
대구영장(大丘營
창성도호부사(昌城都護府使),
동래
수사(東萊水使) 등을 지냈는데 대구영장으로 있을 때는 육지요승(六指妖僧)을 붙잡 아 정조의 칭찬을 받고 창성부사로 있을 때는 강변 7읍(邑)의 형세를 그려 조정에 올려 요새지를 수비할 것을 말하고 연노궁(連弩弓)을 만들어 연읍(沿邑)에 비치하 였으며 동래수사로 있을 때는 영남해안일대의 군략지도를 만들어 만약의 사태에 대 비케
하였다.
적(箂營政蹟)』이
저서로 있다.
『물기재집
(勿欺齋集)』,
『내영정적(箂營政蹟)』은
『칠원정적(漆原政蹟)』, 강응환이
경상좌수사
『내영정 재임시에
엮어놓은 280면에 달하는 책으로 부임 때부터 임기 만료시까지 국왕에게 올리는 글을 비롯 각종의 공문서와 공적 성격을 띤 글을 모아놓은 것이다(1997, 부산광역 시사편찬위원회 국역). 정조가 하사한 영정(사진)과 함께 ‘청북변성도(清北邊城圖)’, ‘고려중요처도(高麗重要處圖)’라 제(題)한 2폭의 대형지도가 전주 박물관과 고창 판 소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강응환 가전유물 전시관 입구에 신도비1) 묘비가 건 립되어 있다. 신도비문은 2000여자의 한자로 되어 있으나 전라북도 금석문화대계 3권(2009. 12)에 한글 번역되었다. 신도비 바로 좌측에 한글로 쓴 또 다른 신도비 를 후손들이 2011년 7월에 건립하였다. <사진18> 강응환 초상화
<사진19> 강응환 신도비
강인회(姜寅會, 1807∼1880) : 자는 태화(太和)이고 호는 춘파(春坡)이며 본관은 진주 이다. 사평(司評) 학손(鶴孫)의 후손이고 재형(在衡)의 아들이다. 순조 7년(1807년)에 암치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한번 배우면 잊지 않았고 15세에 1) 신도비(神道碑)는 죽은 이의 평생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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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두루 읽었다. 노사 기정진(奇正鎭)이 학덕으로 이름나자 18 세에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고 26세 때 스승 곁으로 이사하여 30여 년을 조석으로 스 승을 모시고 학문에 정진하여 대유(大儒)가 되었다. 철종 13년(1862년) 삼남지방에 민 란이 일어나 왕이 좋은 의견을 구하자 삼정책문(三政策問)을 지어 올렸으니 전부(田 賦), 군적(軍籍), 환곡(還穀)이다. 이밖에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인재를 등용하여 언로 (言路)를 열고 예의염치를 장려해야 한다는 것을 구구절절 토로했다. 효가 지극하여 3 년을 시묘하고 계모는 친모처럼 섬겨 계모인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평생 동안 벼슬이나 명리를 구하지 아니하고 산림처사로 지내면서 많은 후진을 길러냈으니 박용 태(朴容泰), 기용연(奇容衍)이 대표적인 문제자이다. 1880년에 졸하고 동몽교관에 추 증되었으며 『춘파유고(春坡遺稿)』가 간행되었다. -『춘파유고』 목록序(崔允煥) 詩 : 오언절구 등 90수 記 : 5편
書 : 5편
祝文 : 2편
祭文 : 6편
雜著 : 6편
序文 : 6편
附錄 : 노사선생기고 32편
강천수(姜天秀, 1863∼1951) : 자는 중민(仲民), 호는 거산(巨山), 본관은 진주이니 문 량공 희맹의 후손으로 춘파 강인회의 손자이다. 철종 14년(1863년) 출생하여 송사 기 우만 문하에서 경전을 습득하고 백가서(百家書)를 섭렵하여 학문이 깊고 문장이 유려 했다. 35세 때 종숙 백천(柏川) 해영(海永)이 공을 맞이하여 암치리에 서숙(書塾)을 개 설하여 제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는 산에 올라 통곡하기 여러 날에 마침내 세상사에 뜻을 끊고 오로지 후진양성에 전념하니 배우는 사람들로 언제 나 서숙은 가득했고 만년에는 문제자들이 공의 학덕을 사모하여 암치 서쪽 계곡 위에 정자를 지어 거산정사(巨山精舍)라 편액(扁額)하고 노년유휴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인 품이 괴걸하여 학처럼 우뚝했고 붓을 들면 물 흐르듯 하여 윤색하는 법이 없었다. 평 소에 말하기를 노사선생(蘆沙先生)의 외필(猥筆)과 납양사의(納凉私議)는 학술의 대가 다 더할 말이 없다 하였고 『송사문집(松沙文集)』을 비롯 강문(姜門)의 『은휴집(恩休 集)』, 『치재집(癡齋集)』, 『모산집(茅山集)』, 『물기재집(勿欺齋集)』등을 교감(校勘) 간행 하였다. 유고 4권이 발간되었으며 손자 강경(姜境)이 살고 있다. -『거산유고』 목록<券之一> 詩 429수 <券之三> 記 38편 <券之四> 碑 4편 추록 2편
<券之二> 詩 68편 序 29편 跋 11편 墓碣銘 23편
上樑文 11편 墓表 16편
부록: 行狀(배성수)
祭文 8편 行狀 10편
告祝 2편 傳 3편
墓碣銘 尹丁鍑
강대식(姜大湜, 1878∼?) : 자는 영진(營振)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며 본관은 진주이 다. 고종 15년(1878년) 암치리에서 태어나 거산 강천수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경기전 참봉 비서감승을 역임하였다. 강대식은 소문난 부자로서 성송면 암치리 주변 농경지 는 물론 전남 영광군 홍농읍, 장성군 삼계면에까지 농토를 갖고 있는 3천석 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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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다. 그런데 타고난 성품이 온유할 뿐 아니라 후덕하여 빚을 내러오는 사람에게 는 직접 호주머니를 털면서까지 굶주린 자들에게 기근을 해결해 주었으며 대흉년이 든 무자 갑자년에는 소작료를 받지 않는 등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도 했다. 그 후에도 소작인들에게 많은 보살핌을 베풀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소작인들이 거짓으로 토지 매매증서 또는 자기 소유가 될 만한 서류를 갖고 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여도 아무 런 확인 절차 없이 모두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인심 좋은 사람이었다. 그가 현 재의 암치저수지를 사재로 축조하였으며 당시 면장이던 강장수가 공적비를 세웠으나 증축 공사시 훼손되어 주민들의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한편 성송암치학교를 건 립하기도 했으며 고창고보 설립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거산 강천수는 이러한 공적 을 후손에게 길이 전하고자 공덕비문을 썼다. 그 비문은 ‘성송학교주대식기념비 星 松學校主大湜記念碑’로 다음과 같다. 임신년(1932년) 봄에 성송면에 학교를 크게 수리하여 새롭게 하였으니 대체로 사립학 교를 공립학교로 전환한 것이다. 공립학교는 구비할 수 있지만 사립학교는 제한되 기 때문이다. 이전의 생도 수십 명이 기약 없이 모여 서로 함께 술잔을 들고 말하 기를 “덕은 작아도 나타나지 않을 수 없고 선생은 작아도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작지 않고 커진 것이 있겠는가. 지난 모년에 승선 강대식 씨가 수만 원의 금 전을 출연하여 이 학교를 처음 세웠고 해마다 훌륭한 선생 5,6명을 초빙하여 월급을 많이 주어 고무하였다. 그리고 침랑 강대직 씨가 교장으로 재임하니 이때 가까운 곳 의 사람은 힘을 기울이고 먼 곳에서는 달려와서 배우니 그 재목에 따라 취직하여 세 상에 쓰인 사람이 손꼽을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고창읍에 사립중고등학교를 세움에 온 군내 사람이 힘을 모아도 오히려 어려움이 많으니 승선이 두 곳에 힘을 썼으나 성 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듣자하니 그가 사립학교를 공립으로 옮기고 오로지 고등학교 에 힘을 썼지만 진심은 끝이 없으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 이 학교를 공립으로 바꾸는 날에 이 사실을 기술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몇 대 후에는 흩어지고 없어 질 것이니 이 학교의 이루어진 내력의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승선의 사람에 게 미친 선한 아름다움도 또한 묻혀버리고 전함이 없지 않겠는가. 서둘러 비석에 나 타내어 그 타고난 좋은 덕을 온전히 하는데 게으름이 없어야 할 것이니 어찌 오늘에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모두가 “그렇다” 하고 마을의 강대승(姜大 承)에게 맡기고 그 문답의 시말을 생각하여 거산 늙은이에게 알려왔으니 이해 여름 상순이다. -『거산유고』 제4권 비(碑)편강대직(姜大直, 1889∼1933) : 자는 응현(應賢), 호는 이온재(而溫齋), 본관은 진주로 문량공 희맹의 후손으로 물기재 응환의 5대손이다. 고종 26년(1889년) 암치에서 태어 났다. 인품이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으며 기국(器局)이 커서 소절(小節)에 얽매이지 않 았고 일의 주선에는 아무도 따르지 못하는 역량을 지녔다. 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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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지 아니하고 광무8년 독립의군부 종사관에 서임되어 군자금을 모금하여 의군을 도왔고 뒤에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여러 차례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종형 대 식과 함께 암치학교를 설립하고 고창고보 설립에도 공이 많았으며 당시 고창을 대표 하는 인물이었는데 나랏일이 그릇되매 세상사를 멀리하고 ‘열운정(悅雲亭)’을 지어 지 기우(知己友)와 자연을 즐기다가 조졸하니 사림(士林)이 개탄했다. 유고가 있다. 강대극(姜大克, 1895∼1986) : 자가 자익(子益)이고, 호는 허당(虛堂)이며 본관은 진주 이니 춘파 강인회의 증손이고 거산 강천수의 아들이다. 춘파공은 노사 기성진의 고제 이고 거산은 가학을 계승했으니 허당도 노사의 연원이라 본다. 고종 32년(1895년)에 장성의 장산리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친을 따라 암치마을로 이사하였고 부친이 그 곳에서 서당을 열고 후진을 교도하자 허당도 가학으로 공부하였다. 허당은 어려서부 터 성품이 청백하고 지조가 견실하였으며 매일 배우는 문장을 모두 암송하고 생활에 실천하니 당시 족형인 승지 대식과 함께 참봉대직이 특별히 촉망하며 가문을 드러낼 후손이라 칭찬했다. 비록 집안이 빈한했으나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문객이 있 으면 성심껏 대접하였으며 자손의 교육도 엄격하였다. 그리고 위선사업에도 솔선하였 으니 1950년 6·25전란으로 문량공 선조의 재실인 ‘연성재(蓮城齋)’가 소실되자 종친들 과 전후 10여 년을 전념하여 중건하였고 문량공의 시문을 수집하여 『연성지(蓮城誌)』 를 편집하고 간행하였다. 1986년에 졸하니 향년 80이고 유고가 자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강택수(姜澤秀, 1906.6.19∼1970.12.19) : 암치리 백토마을 출신이다. 1960년 7월 29 일에 전국 233개의 선거구에서 총선거인의 84.3%가 참여한 가운데 제5대 민의원 선 거와 더불어 초대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고창군의 경우 강택수 후보가 민주당의 공천을 얻어 제1선거구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1위 당선되어 참의원 부의장으로 피선된 소선규 의원에 이어 차점자로 당선되었다. 강 의원은 일본 동양대를 졸업하고 전주사 범학교장을 역임하였으며 후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고 있다. 강장수(姜長秀, 1906.6.4∼1950.3.6) : 암치리 백토마을에서 출생하여 일제 강점기 말 에 성송면장을 역임(1935∼1938)하였으며 강대식이 암치저수지를 축조하도록 많은 행 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강대식의 공적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한학 에 조예가 깊었으며 한민당 고창군당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백토마을에 딸 강정희가 살고 있다. <사진20> 강장수 성송면장 임명장(任命)과 임면장(任免)
강대삼(姜大三,
1896.1.4∼1971.1.4)
:
암치리
백토마을에서
출생하여
성송면장
(1941~1945)을 역임한 강대삼은 성품이 온화하고 면민을 부모처럼 섬겼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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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재직 중 일화는 일제 강점기인지라 하루는 주재소(지금의 파출소) 일본인 소장 이 거산 강천수의 상투를 잘라 버려야 한다고 함께 그의 집을 방문하자고 하자 재 치 있게 먼저 마당에 도착, 방문을 열어보고 아무도 없다고 말해 위기를 모면했다 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후손은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강대형(姜大衡, 1916.3.12∼1969.12.20) : 백토마을 출신으로 성송면장으로 재직 (1961.7.1~1961.8.13)했다. 강성욱(姜聲昱, 1935.6.20∼현재) : 암치마을에서 출생한 강성욱은 제8대 대통령을 선 출하기 위한 선거인단으로서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1972년 12월 15일 실시된 선거에 입후보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기능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 지역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다. 고창군의 경우 15명 대의원 선 출에 36명이 경합하여 2.4대 1의 경쟁을 보였다. 제1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 (성송면선거구)에서 강성욱 의원이 당선되었다. 그는 수사공 강응환의 7대손이다. 5. 마을에 있는 기관과 시설 1) 성송초등학교 : 성송면 암치리 389-1번지에 있는(백토마을) 면 단위의 교육기 관이다. 성송초등학교는 1918년 4월 1일 사립 암치학교로 설립되었다. 1923년 5월 10일 성송공립보통학교로 인가받았다. 1981년 3월 1일에는 성송병설유치원이 설립 되었고, 1996년 3월 1일에는 성송초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99년 12월 25일에는 학천초등학교를 통폐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11년 2월 11일 현재 총 6,395명의 졸업생(84회의 졸업)을 배출하였다. 성송초등학교 옛날의 정문(지금도 아홉 계단에 올라서 학교운동장으로 진입 가능) 좌 측 담장 옆에 세워져 있는 암치학교기념비는 학교가 설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 운 것이다. 비수는 옥개형의 지붕형태를 하고 있으며 철봉으로 보호하고 있다.(사진) 비석 전면에는 ‘私立 岩峙學校 紀念碑’라 새겨져 있으며 건립년대는 일제 강점기인 ‘壬申春代(1932년)’라 되어 있으며 강천수의 유고집에 ‘성송학교주대식기념비’라 하여 소개하고 있다.
<사진21> 성송초등학교 전경
<사진22> 사립암치학교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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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항일학생운동에 고창암치보교도 참여했다” 일제하 조선학생들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 속에서 함양된 애국심과 책임 있는 지 성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비운에 빠진 민족과 국가를 구하여야 되겠다는 결심 하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각 방면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동맹휴학, 비밀결사 학생단체의 조직 문화 계몽운동과 가두시위를 통하여 민족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으로 발전시키기도 하였는데 고창암치보교(高敞岩峙普校)도 참여하였다. 성송면 백토마을에 위치한 사립암치보통학교 학생 5,6학년 80여 명은 1923년 9월 5일부터 동맹휴학을 하였다. 그 이유는 이 학교 주무교원 상원독신(桑原篤信)이 과음하여 수업 중 반주정 으로 학습할 뿐 아니라 교육자로서 부정한 행위가 많기 때문에 이 같은 무자격한 선 생에게 수업을 받음은 막대한 손실일 뿐 아니라 모교를 위하여 통탄할 바라고 분개하 여 교원을 바꿔달라는 진정서를 교장에게 제출하고 상원독신의 밑에서는 절대로 수업 을 받지 않겠다며 수업을 거부하였다. -「동아일보」 1923. 9. 28 2) 성암교회 : 1994. 5. 31. 설립된 대한기독교 장로회 소속으로 성송면 암치리 16-2 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은 26평이고 신자들은 30여 명이다. 담임목사는 신언창 님이시다. <사진23> 성암교회 전경 3) 마을회관과 모정 암치마을과 백토마을에는 각각 마을회관과 노인당, 모정 등이 있다. 이러한 시설들 은 거의 마을 중심부에 있어서 주민들이 이용하기에 매우 편리하다. 특히 백토마을의 모정은 주위의 노거수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어 여름철엔 주민의 아름다운 피서처 이자 휴식처가 되고 있다. <사진24> 암치마을 노인회관
<사진25> 백토마을 모정과 노인회관
6. 마을조직과 행사 1) 마을의 구심체 마을
구분
이 장
새마을
개발
지도자
위원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암 치
박종연
강맹열
강동화
정허자
전금순
백 토
강종원
강성환
황선대
오화숙
강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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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대의원 홍순애 강동화 강복남 정재원
2) 미풍양속(효도관광 및 단합관광) 암치마을은 해마다 어버이날이 되면 주민들이 노인들을 모시고 효도잔치를 열고 있 다. 격년제로 한 해는 관광버스를 대절해 효도관광을 다녀오고, 한 해는 마을회관에 전 주민이 모여 마을회 주관으로 노인 위안 잔치를 하고 있다. 소요경비는 출향인사 들의 도움과 마을기금을 활용하고 있으나 예전에는 청년회에서 추석 때 주민 노래 자랑을 개최해 이때 생기는 금액으로 실시하였다. 또 백중(음력 7월 보름)과 복날 (초복·중복·말복)을 마을의 쉬는 날로 지정 효도잔치처럼 개최하고 있다. 백토마을 또한 봄(3~4월)에 1박2일로 주민 화합을 위해 관광을 다녀오는데, 남자 와 여자를 구분하여 실시하고 소요경비는 마을기금과 가구별로 약간씩 각출하기도 하며 희사자가 있을 땐 합하여 충당하고 있다.
<사진26> 마을유래를 설명하고 계시는 박종연, 강경, 강동화 님 <사진27> 마을유래를 설명하고 계시는 강학수, 황선대 님 ⚬ 도움 주신 분(무순) 박종연(암치 이장, 45) 강종원(백토 이장, 58) 강경(암치, 향토사학자, 80) 강성욱(암치, 전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77) 강동화(암치, 개발위원장, 69) 강학수(백토, 향토사학자, 82) 황선대(백토, 개발위원장, 64) 홍성의(성송초등학교 교무주임) 최지은(성송면사무소 근무) ⚬ 참고문헌 『모양성의 얼』, 고창학술문화연구회, 2009. 『민선4기 군정백서』, 고창군, 2010.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회, 2009. 『전라도 무장현 지역 학술 연구』, 전북역사문화학회, 2009. 『이기화의 고창이야기』, 고창문화연구회, 2011. 『래영정적』, 부산광역시사 편찬위원회, 1997. 『국역 거산유고』, 강성창, 2008. 『고창의 유학』, 고창군, 1996.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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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전라북도 금석문화대계 3권』, 전북역사문화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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