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천장어의 어원과 선운사의 풍수 2010년 9월 19일(일) 15:00 - 17:00 요즘의 언론기사를 보면 풍천장어라는 개념이 특정지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일 반명사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풍천은 바다와 민물의 강이 만나는 지 점을 풍천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창 선운사로 주지로 있었던 배화수 스님이 있었다. 그에게 앞 냇가의 이름이 뭔지 물었 다. 그는 豊川이라 불렀다. 다른 이름으로는 한자가 다른 風川이라 부른다 한다. 그리고 이 하천은 역수(逆水)의 하천이라고 말했다. 배화수 스님은 미당의 스승이기도 한 박한영선사 의 제자로 일제말기 인물이다. 오래 전에부터 절에서는 이강을 豊川이라 불렀다. 이 하천은 西出東流해서 북류하는 하천이다. 그리고 인천강에서 합류하여 서해로 흐르는 강이다. 선운 사에서는 백제시대 이후부터 풍천이라 불렀다. 풍수학에서는 바람風자를 써서 풍천이라 불 렀다. 절에서는 풍요로울 풍자를 넣어 풍천이라 한 것이다. 즉 풍천은 고창 선운사의 계곡 을 따라 부른 고유명사이다. 광주에 임도사라는 분이 계셨다. 이기화원장이 이분을 광주에서 만났다. 임도사가 고창에 역수가 있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인도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인도에서 들었다고 한다. 역 수는 도솔암에서 부터 선운사 입구까지를 말한다. 이 구간을 풍천이라 부른다. 픙천은 인도 까지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철학을 할 때도 알고 있었다. 서해안에 제일가는 역수지지의 땅이다. 임도사가 이 내용을 알려주었다. 허연이라는 분이 전라남도 도지사를 할 때이다. 허연은 두 분이 있다. 시인과 도지사인데, 여기에서는 도지사 허연을 말한다. 허연지사와 광주상무대 지구의 사령관이 함께 고창문화 원을 찾아왔다. 물론 그때 임도사가 함께 오셨다. 임도사가 문화원에 와서 함께 선운사를 가자고 하였다. 이유는 선운사에 있는 김정희의 탁본을 뜨고 싶어서였다. 임도사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본명은 알려주지 않는다. 서울서 임도사를 부를 때는 비행기 왕복표를 사주지 않으면 안 간다. 나이는 이기화원장보다 약 10살은 더 먹었던 것 같다. 그 를 찾으려면 광주의 Y다실로 연락을 해야 한다. 그 다방의 마담이 알고 있다. 마담에게 연 락을 하면 그를 찾을 수 있다. 왜 문패가 없냐는 질문에 그가 말했다. 자신의 조부가 10만 석 걸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을 하였다. 할아버지 주위에 많 은 사람들이 오가며 임도사를 보면서 한 마디씩 했다. 임도사의 상이 닭발이라 했다. 닭발 이란 모아 놓은 것을 흐트러뜨리기 때문에 재산을 모두 날릴 거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재산 을 물려주지 말라고 하였다. 대신에 머리에 담아주라고 하였다. 그래서 유학을 중국의 북경대학교로 갔다. 그러나 잘 맞지 않아 인도로 갔다. 인도에 가서 인도철학을 공부하였다. 인도에서 공부하면서 선운사 풍천의 역수지지에 대해 나온다. 철학 과의 교수가 강의를 하면서 한국의 서해안의 풍천을 강의하였다. 일부러 인도에서 더 공부 를 하였다. 인도에 고창과 관련되어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인도에서 불상을 돌로 만들어 한국 고창의 검당포로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석상을 맞이한 분이 바로 검단선사다.
선운사는 원래 대참사(후에 창담암)이다. 그곳에 부처상으 놓았다. 선운사에서 대참사가 제 일 먼저 지어진 것이다. 약사여래상의 석불이 인도에서 보낸 석불 중 하나다. 석불의 좌대 도 돌로 만들었고, 연꽃의 불심도 돌이다. 절을 개조하면서 선운사로 바꾸었다. 백제 때는 대참사라 하였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배웠 다. 한국에 이런 역수지지의 대명당이 있다는 사실과 그 강이 풍천이라는 것을 알았다. 허연지사와 사령관의 차 2대가 65년 쯤 고창에 왔다. 그분들이 문화원에 오니 문화원이 훤 해졌다. 임도사는 이원장이 함께 가야 탁본을 뜰 수가 있다고 하여 함께 간 것이다. 점심은 고창 선운사의 동백호텔(여관 인가)의 황사장에게 부탁을 했다. 황사장은 호텔의 야외에 식 사 준비를 해주었다. 식사를 하기 전 임도사는 호텔 뒤의 5칸 정도의 창고처를 가리키면서, 뒤에서 꺼림칙한 것을 다루고 있으니 무조건 멈추라고 말을 하였다. 황사장이 창고에서 나 왔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귀한 분이 왔으니 구렁이탕을 해주겠다고 하여 뱀의 창자와 똥을 빼고 있었다. 그것을 임도사가 보지도 않고 아는 것이었다. 도사는 도사였다. 임도사는 칙칙 한 뱀을 보면 산을 올라가지 않는다. 점심으로 뱀보다는 장어가 좋을 것 같아서 장어 정식을 내놓았다. 점심을 잘 먹고 임도사가 기지개를 펴다가 선운사 입구의 낮은 산을 보게 되었다. 낮은 산인데 한일자 모양의 산이었 다. 깎아 놓은 듯한 일문성(一門峸)이 있었다. 일문성이 있으면 반드시 대명당이 있다. 일문 성을 따라 일직선으로 가면 대명당이 있다. 그래서 있다고 하였다. 그곳이 바로 인촌의 할 아버지의 묘터다. 여성의 음부터라 한다. 좋은 음부터는 도시락보지다. 도시락보지터인데 인 조로 만들었다. 보통사람은 이런 터가 있다고 해도 묘를 쓸 수가 없는 곳이다. 인조로 만들 려면 엄청난 돈이 든다. 도시락터를 만들면 엄청난 양의 흙이 필요하다. 돈을 많이 주니까 선운사에서 터를 판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허락을 하지 않는다. 명당을 보려고 연말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온다. 한반도 전체에 3대 명당이다. 그래서 고창에 대통령을 빼고 모든 인 물이 나왔다. 인촌의 할아버지의 명당을 임도사가 맞혔다. 일문성은 아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도의 수미봉에 들어가는 입구에 일문성이 있다. 하여간 임도사와 도지사 및 사령관 등은 선운사 주지에게 함께 갔다. 그곳에서 주지를 만나 탁본을 부탁했다. 주지는 몇 장이나 필요하냐고 하니 다섯 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탁본은 반드시 먹으로 해야 한다. 먹 잉크를 사용하면 비문이 마멸된다. 비가 화학작용으로 버려진다. 선운사의 젊은 스님이 탁본을 해주었다. 몰 래 잉크로 된 탁본을 하면서 비문이 많이 상했다. 그래서 하지 못하도록 한다. 용산리는 100호가 넘는다. 면소재지가 아닌 곳 중 이렇게 큰 곳은 많이 없다. 이곳을 지나 선운사 입구에 흥덕강정에 장어집이 많은 곳이다. 선운사 고개(아산의 반암방면에서 선운사 방면)의 다리를 건너 왼쪽이 무장강정이다. 흥덕강정은 흥덕현 땅이라서 그렇고, 무장강정은 무장현 땅이라서 그렇다. 무장강정 앞에 차를 세워 잠시 쉬었다. 이기화원장은 그곳에서 잠 시 서서 그의 증조부의 묘소를 봐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어디에 있는가? 이기화원장은 선운 사 방면의 준령을 가리키며 저 산에 있습니다. 그랬더니 “묘는 아주 척박하지만 증조부가 도사이구만, 좋아 절대로 옮기지 말라고 하였다. 박토지만 좋은 데 썻구만 대단한 사람이
다”라고 하였다. 이기화원장의 증조부는 백마를 타고 다닌 선비였다. 그는 미리 그곳에 묘를 쓰도록 하였다. 증조부가 묘를 잡아 놓았다. 이제 이 주변에는 명당이 없다. 포화상태이다. 인촌의 할아버지가 써서 이제는 없다. 인촌의 할머니묘가 구왕봉 넘어 반곡호암마을에 있다. 이곳에 울산 김씨들을 살게 하였다. 인촌의 조부인 김묘협의 묘와 마주보게 쓴 것이다. 반암에 호남의 8대 명당 중 두 번째가 있다. 그 명당을 인촌의 할머니가 썼다. 묘의 김이 세지 않도록 울산 김씨들 20여 세대를 살게 한 것이다. 임도사 때문에 일문성에 대해 알게 되었고, 배화수 주지에게는 역수지지의 풍천에 대해 알게 되었고, 확인은 임도사가 해주었다. 흥덕면 녹사리(녹사벼슬을 한 사람이 은거를 하여 녹사라 불림) 마을에 속하는 한림동이라 는 마을이 있다. 고려 현종 때 한림학사 한 분이 이곳에 내려왔다. 한림학사는 조정에 두 분이 있었다. 그가 내려 온 것은 이곳이 서출동류의 역수지지의 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문정공 김인후(하서)가 이 내용을 알아서 그 후손들에게 고창에 가서 살려면 한림동을 찾아 가 살으라고 하였다. 한림동은 현재 면사무소가 들어서 마을이 없다. 그리고 냇물도 없다. 그러나 조선조까지는 냇물이 있었다고 한다. 정조 21년 김택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문 정공의 6대 손으로 장성에 살았는데, 장성 또한 물이 마른 곳이었다. 농토 중 상토를 찾으 려고 그가 6대조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고창 흥덕의 한림동의 남쪽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세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순환, 둘째가 상환, 셋째가 창환이었다. 아들들은 풍류를 좋 아해했다. 한림동이 물이 없어서 때가 지난 것이 아니냐며 금반옥호의 반암으로 들어갔다. 1790년대 그 뒤 울산김씨들이 반암에 살기 시작한 것이다. 한림동에는 김씨들이 떠났다. 예전에 녹사리에 가면 이동휘라는 공무원이 있었다. 그가 취하면 자기가 한림학사의 후손이 라고 하였다. 한때 한림학사도 역수지지의 명당을 찾아 흥덕으로 들어 온 것이다. 구한말까 지 한림동에는 상당히 많은 집들이 있었다. 풍천은 선운사를 지나 인천강을 만나 북으로 올라갔다가 서쪽으로 흐른다. 임도사는 긴 짐 승을 보면 산을 못 올라간다. 그는 수재형으로 이병철씨나 정주영씨도 그를 불렀다. 방장산 에도 이병철씨가 산을 사서 전주제지의 소나무를 수만평 심었다. 이것도 임도사가 잡았다. 재벌만을 상대한 사람이 임도사다. 선운사의 말사에 내장사와 내소사가 있다. 전라북도에 2개의 교구본부 있다. 김제 금산사와 고창 선운사다. 선운사 그림을 그릴 때는 먼저 풍천를 그려야 한다. 인촌이 집을 이사할 때 도깨비가 나타나 불을 질렀다거나 도깨비 때문에 고창을 떠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실제로는 의병들이 자꾸 찾아와 군자금을 달라고 하였다. 자주 그러니 귀찮았다. 의병들이 서운하면 헤꼬지를 하였다. 그래서 인촌이 헌병의 분견대 가 있는 줄포로 이사를 했다. 고부에 중대가 있었다. 인촌은 헌병대의 보호를 받기 위해 귀
신이나 도깨비가 출몰한다는 핑계를 대고 줄포로 떠난 것이다. 사실은 의병들이 도깨비로 둔갑된 것이다. 당시 동비들이 자주 출몰하니 피난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동비가 아니라 의병이었다. 풍천의 풍은 풍요로울 풍이지만 풍수가들은 바람풍이다. 풍천에서 잡힌 것이 풍천장어다. 땅이름학회에서 전국의 전통적인 고을이름이나 지명을 찾고 있다. 풍천의 고유이름을 찾아 야 한다. 추후 논의 풍천장어는 고창의 고유명사이다. 절대로 보통명사가 아니다. 지리표시제를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