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취를 간직한 전원마을 -
궁산리 궁산마을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1)
개관 서쪽으로 국가지원 지방도 15호선을 따라 아산면 소재지(다른 도로,
고창 나들목 교차로 4차선 좌측 방향으로 아산면 중앙선을 이용 해리면 팔형치 경 유)에서 선운사 쪽 국도 22호선으로 심원 면사무소를 지나 법성포 방향으로 6㎞ 정 도 가게 되면, 궁산 저수지를 앞마당으로 둔 심원면 궁산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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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도 22호선에 위치한 궁산마을 표지석
고창읍에서 약 29㎞ 거리이고 선(禅)바위산이 병풍처럼 마을 전체를 품고 있다. 이 산봉우리에서 전라남도 영광군 흥농읍의 높고 낮은 산과, 전북 부안군에 소재한 곰소만과 위도까지 보이는 변산반도, 그리고 고창군 관내 상하면・해리면・대산면 등 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 도립공원 선운산의 배맨바위, 서해 칠산바다를 앞에 둔 동호 해수욕장과 고창 컨트리클럽, 천일염을 생산하는 삼양염업사의 소금밭도 바라다보이 는 그림 같은 농산촌(農山村)으로, 마을 뒤쪽과 동쪽・남쪽의 3면이 산으로 둘러싸 여 있으며, 서쪽만이 광활한 들녘이다.
국도 22호선에서 궁산마을 입구에 세워진 마을 표지석에서 100여m 정도 안쪽 에 위치하고 있다. 심원 면사무소쪽에서 법성포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으나, 반대편인 해리면 팔형치(八兄峙)마을에서는 궁산 저수지 너머로 마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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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리면 팔형치에서 바라본 마을
지금도 60년대 이전의 전형적인 농산촌(農山村) 마을같이, 인심 좋고 평화로운 느 낌으로 옛날 향수(郷愁)를 느낄 수 있는 전원(田園)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정취(情趣)는 오리와 닭, 소 등을 집 울타리 안에서 기르는 가정이 있고, 그 규모 또한 오리와 닭은 2~9마리, 소는 1마리에서 20마리까지 사육하고 있어 어 렵게 지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사진 3> 외양간 모습
가축 분뇨로 생활의 불편을 느낄 수도 있으련만, 서로 이해하면서 옹기종기 사는 모습이 옛날 옛적 농산촌을 보는 것 같고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이웃간의 정은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이 마을에서 살고 싶은 충동(衝動)이 생 기기도 한다.
2)
(法定里)와 행정리(行政里)
심원면의 10개 법정리 중 네 번째로, 중간 크기의 마을(심원면 면적 40.067㎢, 궁산리는 2.669㎢)이고 행정리 또한 궁산마을 1개 분리(分里)뿐이고, 자 연부락은 궁산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인 1930년대에는 내궁(内弓), 외궁(外弓), 개매 기[狗項], 궁산(弓山) 등으로 조성되었다. 지금은 내궁마을과 외궁마을은 저수지 축 조로 수몰되어 사라졌고 개매기[狗項]마을은 6・25 동란시 밤에는 괴뢰군이 출현하 여 선량한 주민들을 괴롭히고 약탈하자, 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일부 는 현재의 궁산마을로 옮겨와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궁산마을은 법정리와 행정분리상 또는 자연부락으로도 1개 마을뿐인 흔치 않은 특이한 지역이 되었다.
3)
분포
마을의 최대 인구는 1966년경으로 82세대 400명이 넘게 살았는데 2009년 8월 현재 42세대 80명으로, 그 중 남자는 38명이고 여자는 42명으로 60년대에 비하여 4분의 1정도로 인구가 많이 줄었다. 이는 비록 궁산마을만의 현상이 아니고 7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산업화하면서 나 타난 일반적인 이농현상(離農現状)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겠으며, 전국적으로 수도 권과 공장이 밀집된 지역으로 인구(人口)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농산어촌(農山漁村) 의 인구가 감소했다고 할 수 있겠다. 궁산마을에 살고 있는 성씨(姓氏)는 금성라씨(錦城羅氏), 전주이씨(全州李氏), 김 해김씨(金海金氏), 여흥민씨(驪興閔氏), 함열남궁씨(咸悦南宮氏), 청주한씨(清州韓 氏), 언양김씨(彦陽金氏), 무안박씨(務安朴氏), 탐진최씨(耽津崔氏) 등으로 비교적 작은 마을이 각성바지인 편이다. 그 중 김해김씨(金海金氏)인 아무개는 5명의 식구로 3대가 한 집에 살고 있으며, 며느리로 인해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연령별로는 10세 이하가 김씨네 가족으로 1명이 있고, 60세 이하는 31명에 불과하며, 70세 이상의 노년층이 대부분 이다.
4) 연혁 및 지명유래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땅으로, 삼국시대에는 백제(百済), 고려 때에는 장사현(長 沙県)의 속지(属地)였다. 1417년에 무송현(茂松県)에 포함되었고, 1914년 3월 1일
(府郡統廃合令)에 의해 고창군(高敞郡)에 편입되어, 주민조직개편으로 10개 법정리(法定里) 중 하나로 궁산리(弓山里)라 칭(称)하게 되었다. 궁산마을은 심원면 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600여년 전 평강채씨(平康蔡氏) 한 분이 마을을 지나다가 산세와 지형이 좋아 정착한 후 평강채씨(平康蔡氏), 영성 정씨(靈城丁氏), 금성라씨(錦城羅氏), 전주이씨(全州李氏), 평산신씨(平山申氏), 여흥 민씨(驪興閔氏) 등이 입향(入郷)하여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형이 활 형국이라고 생각하여, 뒷산은 활대처럼 생겼다고 하고 마을 앞 도로가 활줄처럼 생겼다 하여 활 궁(弓) 뫼 산(山)자를 써서 궁산(弓山, 활뫼)이라 이름 붙 였다.
2.
자연환경
궁산마을 앞 저수지 중앙을 경계로 해리면 왕촌리와 안산리로 구분되고, 서쪽의 광활한 삼양사 간척지 들판의 중심 부분으로 해리면 금평리, 동호리, 그리고 심원면 주산리의 경계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1930년대 초반부터 5년여의 기간에 축조된 저수지가 있어, 선(禅)바 위산 밑에 위치한 마을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고, 마을 경치가 산자수명(山紫水明)하 며, 저수지의 규모는 80ha이상으로 비교적 큰 편이다. 저수지 중앙 부분에는 내궁산(内弓山), 외궁산(外弓山)으로 불리는 마을과 문전옥 답(門前沃畓)이 있었으나 수몰되었고, 마을에 살던 주민들 중 일부는 지금의 궁산마 을에, 나머지는 타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수몰된 마을에 살던 여흥민씨(驪興閔氏) 중 벼슬과 재력을 갖춘 사람이 살던 가옥을 추후 삼양염업사에서 매수, 지금의 염업사 사무실 뒤쪽으로 이축하였으나 2년 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어 집 규모나 구조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궁산 저수지는 농업용수로 활용되고 있으며, 만수기(満水期)에는 지금은 사라진 개매기 마을 언덕을 넘겨 인근 도천(道川) 저수지로 양수시켜 도천리, 연화리, 월산 리 등지의 농경지에 공급되기도 한다. 이러한 양수작업에 대하여 일부 동네 사람은 혹시나 본인들의 경작농지에 이용해야 하는 농업용수의 부족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며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만수기에 바다 쪽으로 흘러넘치는 물 을 양수하는 관계로 기우(杞憂)가 아닐까 한다. 이는 저수지 유역이 해리면, 상하면,
, 아산면 일부로써 비교적 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할 것이다. 저수지는 농업용수 이외에도 붕어, 잉어, 가물치 등 물고기 자원이 풍부하여 자망 (刺網) 또는 삼각망(三角網)으로 내수면 면허를 얻어 생업에 보태는 전업가정도 있 다. 매일매일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300여 명까지의 사람들이 낚시를 즐기러 대 도시에서 찾아오고 있고 이들이 주변에 있는 주요 관광지도 둘러보기도 하는 바, 우 리 고장의 관광지 소개에도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또한 낚시 꾼들의 편익을 위하여 마을 한복판에 구멍가게가 있어 담배와 물을 팔고 있으나 가 게 주인은 품삯도 나오지 않는다며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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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4> 해리면 복동마을에서 바라본 궁산 저수지
전통과 전해오는 이야기 양자, 민영채 이야기
600여 년 전 조성된 이 마을은 이조 말엽에 민영채(閔泳彩)가 나주목사(羅州牧使) 의 벼슬을 지냈고, 동생인 영직(泳直)이 승지(承旨)1) 벼슬도 했으며, 정좌랑(正左 郎)의 집은 12대문이었을 정도로, 천석꾼 부자였다. 이렇게 벼슬한 사람과 갑부가 태어난 마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동네 사 람들은, 스스로 양반 마을로 자처하는 의식이 점차 강해졌다고 한다. 이 무렵이 궁산 마을로서는 가장 번창한 시기라고 하는데, 천석꾼 집에는 머슴살이 하는 사람만도
1) 承旨 : 조선시대 때 승정원(承政院) 소속의 왕명을 출납하는 관리로 정3품, 왕의 비서관
100
명이 넘었다고 한다.
뒷날 나주목사가 된 민영채에 대한 일화(逸話)도 있다. 민영채는 글도 잘했고 글 씨도 잘 썼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하였으므로, 서울에 가서 과거라도 응시하고자 했 지만 노자(路資)가 없어 고심하던 중, 이웃 대실마을에 사는 이씨네 집에 가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한 후 서울 갈 여비를 보태 달라고 간청하자, 이씨는 마을 사람 누구 한테도 이러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한 후, 돌아가 집에 있으면 자정쯤에 여비를 갖다 주겠노라고 했다 한다. 이에 민씨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약속대로 서울에 다녀올 왕복(往复) 여비 를 후하게 주고 가자 다음날 서울에 올라간 후 이거리저거리를 방황하고 다닐 때, “여흥민씨 대동보소(驪興閔氏 大同譜所)”라 쓰인 간판을 보자 안으로 들어가 이곳까 지 오게 된 연유를 고백하자 안에 있던 사람이 글을 할 줄 아느냐고 물으니 자신있 게 할 줄 안다고 대답하고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하겠으니 먹고 재워만 달라고 통사 정했다 한다. 이렇게 되어 당분간 그 곳에서 지내게 되었던 바, 지내는 중 글도 잘하고 글씨도 잘 쓰는 것을 보소(譜所)2)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고종황제의 비(妃) 민비(閔妃)에게 양자(養子)로 들게 소개하여 주었다 한다. 민비왕후(閔妃王后)의 양자가 된 민영채가 비록 양모(養母)였지만 생모 이상으로 극진히 민비를 모시자, 기특하고 고맙게 여긴 궁중에서 나주목사3)로 봉직(奉織)하게 하였다 한다.
2)
있는 전설 - 팥 장군 이야기
이 마을의 묻혀진 전설로, 유명한 팥 장군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개매기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한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방 안에 재운 뒤, 부모가 들녘에 나가 농사일을 하 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중간중간에 집에 들르곤 하였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면 아이는 배가 고파 울고 있으리라는 조바심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부부의 근심과는 달리 방 안에는 울음소리 하나 없이 너무나 조용하였다. 웬 일일까하고 문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 보니, 아기가 천정에 붙었다, 벽에 붙었다 하면
2)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 만든 임시 사무소 3) 목사(牧使) : 조선시대 때 각 목(牧)의 으뜸 벼슬로 정3품의 외관직
혼자서 전쟁놀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놀란 부부가 인기척을 한 후 방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면 아이는 조용히 누워 잠자는 척 하고 있었다. 부부는 장차 아기가 크면 큰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훗날 분명 집안 에 화(禍)를 불러 올 것이라 판단하여, 부부간에 며칠간 숙의한 끝에 동네 사람들 몰래 아이를 키우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밭에서 거둔 팥 자루로 아이를 눌러 죽였다 하여 죽은 아이를 두고 팥 장군이라 하여 전해오고 있다.
3)
농악을 하지 않는 양반 마을
지금 살고 있는 주민들은 자기 마을에서 여흥민씨(驪興閔氏) 가문에서 나주목사와 승지(承旨), 정좌랑(正左郎) 등의 벼슬을 한 사람과 천석꾼 부자가 있게 된 것을 본 인들의 영예인 듯 매우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여긴다 한다. 마을이 최고로 융성(隆盛)하던 이조 말엽에는 주변 마을 사람들 중 혼례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가마 또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궁산마을 앞을 지나갈 때면 반드시 가마나 말위에서 내려 걸어가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이런 모습만 봐도 다른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을 양반마을로 인정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또한 마을 주민 스스로도 양반마을에 산다고 자부하면서 명절 때나, 농사지을 때 에 농악놀이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면, 양반 마을에서 어찌 손수 굿놀이를 할 수 있느냐면서 인근 마을에서 농악단을 초청하여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마을에는 농악놀이가 없다고 한다.
4) 숨겨진 이야기 - 여흥민씨 이야기 선(禅)바위산 중턱에 아주 가난하면서도 인품이 평범해 보이는 부부가, 2칸 오두 막집에서 농토도 없이 겨우 끼니를 연명하면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풀을 베어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중간에서 잠시 쉬고 있었 는데 자기 집안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급히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불을 먼저 발견한 동네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하여 집 마당에 몰려왔지만 그 누구도 앞장서 나서지 않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집주인이 헐레벌떡 뛰어와 위험을 무릅쓰고 집안 살림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모여든 동네 사람들이 생명이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 것을 권
.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내가 보관해야 할 귀중한 자료가 있다”면서 안으 로 뛰어들어 갔다 한다. 방 안에 들어간 민씨는 모든 것이 화염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궤짝같은 상자를 가슴에 안고 나왔다. 이때 주민들이 그 상자를 열어본 즉 여흥민씨 족보인 것을 보고, 상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추후 결혼 상대의 집안으로 정했다 한다. 이것을 계기로 여흥민씨 가문을 더욱 양반으로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4.
자랑거리
1)
새긴 친목비
국도 22호선에서 궁산 저수지의 제방이 시작되는 지점에 궁산마을 표지석을 우측 으로 마을 안쪽으로 20여m 들어오게 되면 좌측 바위 중턱에 병오생(丙午生, 1906년 생) 동갑계(同甲契) 기념비(記念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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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병오생 동갑계 기념비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이지만 동갑내기끼리의 우정을 기리고자 세워진 비로, 비석 전면에는 ‘병오생 갑계 기념비(丙午生 甲契 紀念碑)’라 새겨져 있고, 좌측면과 후면 에 12명의 계원 생일순으로 호(号)와 성함(姓銜), 본관(本貫), 아들(子)의 이름이 세로로 새겨져 있으며, 단기 4303년(서기 1970년) 경술(庚戌) 4월에 건립하였음을
수 있다.
2)
간직되어 온 족보(族譜)와 교지(敎旨)
금성라씨(錦城羅氏) 후손인 라기옥(羅基玉) 옹은 국내에서 매우 보기 드문 족보 (族譜) 3질을 고이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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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족보와 교지를 펼쳐 보이면서 설명하는 라기옥 옹
340년에서 400여 년 전으로 추정되는 족보로, 3권, 5권 7권이 각각 한 질로 정교 히 인쇄된 소중한 자료로, 소장자는 아주 귀중한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으며 족보를 보관하게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 중 임자보(壬子譜)는 서문 에 340년 전(戊戌 2月 崇貞 165年 壬子十月)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족보를 발행한 집안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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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잘 보존 관리되어 온 금성라씨 족보
교지(教旨) 1점(点)은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 벼슬을 하사(下賜)받은 것 으로, 이조판서는 조선조 때 6조(曹)의 하나로 인사(人事)나 훈봉(勳封)에 관한 사 무를 집행하는 기관으로, 지금의 행정자치부에 해당된다 하겠다.
<사진 8> 교지(敎旨) 좌측 상단 하얀 부분은 임금님의 옥새가 찍힌 곳으로 아무나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여 별도 종이로 덮어졌다.
이조판서를 지낸 분은 소장자의 17대조인 라세찬(羅世纉)이시고, 5대조(代祖)께서 도 지금의 면장에 해당하는 직장(直長)에 봉직하였으며, 당질되는 이도 1990년대에 심원면장을 역임하기도 하여 벼슬집안이 아닌가 싶다.
이 마을 출신으로 제3대 국회의원선거 때 고창을구(심원면, 부안면, 흥덕 면, 성내면, 신림면, 고창읍, 해리면)에서 후보로 나선 민정식(閔晶植, 동양맥주감사 역) 씨도 있다.
3)
정신을 계승한 농지양도운동
삼양사는 당시 국내에서 굴지의 기업으로 서해바다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지금의 해리면 금평리 동호리를 비롯 심원면, 궁산리, 주산리, 고전리, 만돌리 등에 위치한 간척지를 조성하였다. 공사기간은 1930년 초부터 1937년경까지로 어려운 역경을 이 겨내면서 간척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농지 296ha를 포함 염전조림지 등 총 600ha 이상의 광활한 국토를 넓혔으며, 그 중 농지에서는 소작료 를 징수하는 임대농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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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금은 옥토로 변한 삼양사 간척지, 농경지 끝 멀리 보이는 곳이 서해바다이다.
1980년대 이 마을에 거주하는 김재만(金在万) 씨가 주축이 되어 삼양사 소작농지 무상양도대책위원회(三養社 小作農地 無償譲渡対策委員会, 이하 대책위)를 구성하여, 오랜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오늘날처럼 농사기술이 발달하지 아니하 고 간척지인지라 척박한 토지였으므로 수확량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삼양염업사(삼양사의 자회사)에서는 매년 경작자에게 일정액의 소작료를 징수했다. 경작자 입장에서는 소작료 이외에 궁산 저수지의 농업용수를 이용한다 하
수세까지도 부담하고 있어서, 이러한 공공성 이용료를 제외하면 인건비조차도 건 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으로, 농사일을 열심히 했건만 소득이 거의 없다시피한 궁핍 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이에 김 위원장 등 대책위 임원들은, 전남 신안군 압해도에서 일제시대 때 일본인 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간척지를 조성하여, 일제강점기 때 소작료 명목으로 수탈하다 가 경작자에게 양도한 사실을 알게 되어, 의로운 투쟁을 외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대책위는 경작인(소작인)들의 어려운 실상을 담은 진정서와 탄원서를 청와대 와 정부 관련 부처에 수십 차례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삼양사 간척답은 농지개혁 당시 미완공된 간척지로 정부가 매수하는 대상에서 제외되어 매년 고율(高率)의 임 차료를 지불하고 있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작인들의 영농의 욕이 상실되어 실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므로 기숙화(既熟化, 이미 농지처 럼 되어버린)된 농지를 개인별로 분배하여 주심이 마땅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대책위는 무상양도를 주장하면서 소작인들이 모인 대중집회를 열기도 하고, 대책 위의 임원진이 삼양사 본사 임원진과의 끈질긴 대화를 하기도 하였다(수차례의 집회 와 12차례에 걸친 삼양사 임원진과의 대화를 실시). 마침내 1987년 9월 11일 삼양 사 본사에서 삼양사 측 고문변호사가 입회한 가운데, 지주(4인 공동명의)와 대책위 핵심 임원진간에 무상양도는 제반여건상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공시지가로 양도하는 조건으로 각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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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무상양도를 주장한 대책위 위원장 김재만 씨
공시지가는 평당 1,881원으로 농지 한 필지당(600평) 130여만원으로, 소작 자끼리 경작권을 사고팔고 하던 가격이, 벼 50~60석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가격 혜택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대책위 관계자는 “당시 어려운 투쟁이었다”라며, 동학농민혁명운동의 봉기 사유와 비교해 본다면서 지금도 그 투쟁과정을 생각하면 눈물겹다고 말한다. 본 양도농지는 해리면과 심원면의 17개 마을 600여 농가에서 수혜받게 되었다. 오늘날도 수혜농가들은 대책위 김재만(金在万) 위원장의 노고에 대하여, 우리 농 민사에 길이 남겨져야 할 사적(史蹟)이라며 그 분에 대한 공덕비나 공적비를 세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 입을 모은다. 이와 같은 김 위원장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는 흔적은 국도 22호선 길 옆에 궁산마을 표지석 [궁산(활뫼)]에 새겨진(사진 맨 앞장) 밑 부분에 ‘삼양간척답 양도 일 1987년 9월 11일 양도 위원장 김재만’이라 새겨져 있으며, 옆면에는 ‘서울 향우 회 증’이라고 쓰여진 것을 봐도 김 위원장에 대한 노고를 위로・격려하는 주민들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 사랑방 같은 궁산교회
궁산교회는 여느 교회와는 다른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전통 건축물인 기와건축물에 친환경적 자재를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서양의 실용적인 공간을 최대로 도입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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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사랑방 같은 궁산교회
인근 왕촌교회를 세운 고(故) 김설하 전도사가 궁산에 와서 지금의 노 인당 자리에 터를 잡고 간판을 걸었다. 그 후 1993년도에 현재의 궁산교회 자리인 빈 집을 구매하는 조건으로 후임자를 구하던 중, 대산이 고향인 박종훈(朴種焄) 전 도사가 성남에서 이사와서 새롭게 교회를 시작하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렀다. 그 후 4년이 지난 1996년도에 참서관4)이 살았던 옛 가옥을 철거하고 교회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건축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손수 주위의 흙과 통나무, 잡석을 이 용하여 시작과 중단을 반복하며 1999년도에 입주하였지만 조금씩 보강하며 건축하 여 지금까지도 진행 중에 있다.내부는 오래된 건축목재를 재활용한 모습이 인상적이 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관공서를 허물면서 나온 자재를 다듬고 손질하여 은은한 나 무 무늬를 드러낸 모습으로 다락방을 만들고 강단을 장식하도록 했다. 강단의 강대상(講台床)5)은 태풍에 쓰러진 적송(赤松)을 구입하여 통강대상6)과 의 자를 수작업으로 제작하여 자연미와 시골의 투박한 정서를 담은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성구(聖具)가 되었다. 시골의 노인들이 많은 관계로 심야온돌보일러를 설치했고 마을 주민들을 위해 작 은 도서관을 이층에 설치하여 2000여권의 도서를 비치했다. 특히 성탄절에는 마을 주민들이 스스럼없이 와서 점심을 들며, 같이 축하하고 때 로는 작은 음악회와 한방침술을 비롯하여 이・미용 봉사팀이 와서 봉사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한다. 교회정원에는 기존의 여러 블록 건물과 담을 철거한 뒤, 상록수를 심고 꽃을 심어 생울타리를 만들었고, 옆 골목길은 전통 돌과 흙으로 쌓은 담이 잘 보존되어 그 옛 멋을 그대로 살렸다. 교회당 외부에 흙과 돌을 적당히 섞어 벽돌처럼 쌓을 수 있겠 다는 생각도 기존의 흙돌담에서 구상(構想)을 얻은 것이다. 마당에는 천연 잔디를 깔아 오는 이에게 전원의 풍성한 맛을 누리게 했고, 이 영향을 받아 주위의 집들도 마당에다 잔디를 입히고 있다.
4) 벼슬의 이름 5)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대 6) 통나무로 만든 강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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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생울타리와 전통 흙돌담의 궁산교회
어느 사업가의 도움과 궁산교회 성도들의 십시일반(十匙一飯) 헌금으로 종탑 에 청동종을 당시 시가 600만 원으로 설치했다. 한때 새마을운동의 주제곡에 나오는 ‘새벽종이 울렸네……’ 그 종소리가 사라져 가던 중에 다시 옛 시골의 교회당에서 울 려 퍼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교회당 풍경으로 인해 도시의 신자는 물론 소문을 듣고 일반 사람 들도 찾아와서 견학하는 장소가 되었다. 별장 같기도 하고 카페 같기도 한 아담한 교회당의 전경은 한국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원에는 4.6m나 되는 보기 드문 무궁화나무가 심어져 있어 장마중에도 그 우아 한 꽃을 피우고 있다. 이 무궁화나무를 많이 심어 더 아름다운 마을을 가꾸고자 하 던 차에 행정안전부에서 추진한 마을가꾸기 사업에 응모하여 군지원과 자부담으로 여러 사업을 하게 되었다. 마을 중앙 뒷산에는 20여년 전 산불로 잡초만 뒤덮인 넓은 산에 무궁화나무 400 그루와 자생하는 꽃무릇을 심었고, 마을 입구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뒷산에 산책길을 내었다. 아울러 그 길에 산벗꽃 나무를 150그루 심어서 마을과 호수를 바라보며 산 책하는 명소가 되도록 했다. 궁산 호수 앞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활처럼 굽어진 형태에서 그 중앙에 나라꽃인 무궁화동산이 들어서, 한층 아름다운 마을이 기대되고 관광객들과 사진작가들의 관 심을 사기에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동네 들어오는 도로에는, 꽃패랭이를 심어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 를 머금게 꽃길을 조성했다. 카네이션의 원조격인 이 꽃은 겨울에도 푸르름을 간직
오월에 연분홍꽃을 수수하게 피우는 다년생의 식물이다. 궁산마을은 여느 마을과 달리 천연의 풍경 좋은 조건을 갖추어진 곳이기에, 마을 사람들이 단합하여 더 나은 환경과 살고 싶은 동네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궁산교회 가 앞장서서 실천하고 있다.
6.
민속과 마을 현황
1)
현황
새마을운동으로 의식개혁과 함께 주민소득도 크게 향상되었다. 마을회관과 모정, 경로당은 평소 주민들의 휴식장소와 환담을 나누는 장소로, 마을총회, 애경사가 있을 경우 공동의 협의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최근에 생긴 궁산교회는 개척교회로서 동네 사람들의 정신적 의지처가 되어가고 있다. 주변의 교육기관은 해리초등학교, 동호초등학교, 주산초등학교가 있었다. 지금 거 주하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주산초등학교(1965년 3월 2일 개교, 1994년 2월 28일 폐교)에 다닌 사람은 살고 있지 아니하고, 심원면에 속해 있으면 서도 이 마을 학구(学区)인 해리초등학교 출신이 대부분이다. 한편 주민들은 해리면에 있는 5일장을 이용하였고, 차편이 없던 옛날에는 5㎞, 십 리가 넘는 거리를 도보로 이용하였으나 새마을사업 이후 포장된 농로와 지방도를 이 용하고 있다. 또한 전통적 마을 풍습으로 정월 대보름 전야에 당산제(堂山祭)를 모시고 있다. 옛날 궁산 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에는 내궁산・외궁산마을에서 할머니 당산, 할아버지 당산, 마을 당산의 3대 수호신(守護神)을 모셔왔으나, 저수지속으로 수몰되었다. 이 후 지금 마을 뒷산 중턱에 330여년 된 둘레가 5.3m, 높이 13m인 팽나무에서 당산 제를 모셨으나, 태풍에 쓰러지게 되자 아기당산나무로 규목 나무를 심고 제를 지내 고 있으나 옛날에 비하여 마을 규모도 작아지고 거주하는 사람도 고령화되어 참여하 는 주민이 갈수록 적어지는 행사가 되었다. 이외에 잘 가꾸어진 동네 샘(우물)이 있다. 산업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마을 공동 우물인 샘이, 간이 상수도와 광역 상수도의 보급으로 인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 었다. 그러나 궁산마을은 지금도 샘(우물) 두 곳이 식수로 사용할 수도 있게끔 잘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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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기 당산나무인 규목, 나무
뒤편에 쓰러진 옛 당산나무의 자취가 있음.
<사진 14> 두레박이 있는 동네 샘
우물에 빗물이나 오・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지붕을 설치하였음은 물론 지붕 중
매어 놓은 두레박이 남아 있어, 보기 드물게 옛 시골마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 고 있다. 궁산 저수지를 찾는 낚시꾼들에게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되고 있고, 이렇게 잘 보존되고 있는 샘(우물)은 뒷산 선(禅)바위산의 중턱에 산책로를 만들 때, 마을 주민이 총동원되어 공동작업으로 보수하였다 한다.
2)
발달과정
1960대와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 농촌의 경제상황은 보잘것없는 소득으로 궁핍(窮乏)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마을도 70년대 중반까지, 소위 통일벼라는 신품종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쌀밥이라곤 구경하기 힘들었으나, 새마을사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수리시설도 개선되어 논과 밭에 재배하는 각종 농작물의 새로운 품종이 개 발됨에 따라서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생활도 개선되었다. 따라서 수확하는 벼, 보리, 콩, 고구마 등의 농작물도 자급자족(自給自足)하게 되 었고 소, 돼지, 닭, 오리, 토끼, 염소 등의 가축도 길러 조금은 윤택해졌다. 이후 최 근에 와서는 복분자 같은 새로운 소득 작물 재배와 더불어 유실수, 오가피 등의 건 강식품 재배로 소득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때 면내에서 가장 잘사는 마을이라고 자타가 인정했지만, 지금은 산간오지 마을로 전락하여 가난을 면치 못하는 마을이 되었다는 자조 섞인 말도 오가고 있다.
3) 구심점이 되는 마을조직 어느 마을이나 이장과 남・여 지도자, 청년회, 부녀회가 조직되어 마을의 구심이 되고, 동네에서 일어나는 애경사(哀慶事)나 큰 사업(事業)이 있을 때 회관에 모여 서로서로 머리를 마주하고 돕는 방법을 찾기도 하고 정담(情談)을 나누기도 한다. 이 마을도 1년 중 설날과 대보름, 칠석, 추석 등 3~4차례 전체 동네 사람들이 마 을회관에 모여 공동작업으로 마을 대청소도 하고, 칠석날에는 전 주민이 일손을 놓 고 쉬는 날로 지정하여, 관광버스를 빌려 당일 관광을 즐기거나 가까운 동호 해수욕 장, 선운사 계곡 등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주민화합과 단합을 다지고, 우의(友誼)를 돈독히 하고 있다. 이때마다 마을 공동기금으로 돼지도 잡고 술도 마시면서 한 해의 쌓인 피로(疲労)를 씻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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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궁산마을 경로당
수시로 모정이나 회관, 경로당에 모여 윷놀이나 장기, 바둑놀이 등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화투놀이는 금지되었다 한다. 이와 같이 주민들이 모여 단 합을 과시하는 날이면, 으레 재경(在京) 궁산마을회에서 협찬도 해 주고, 마을의 크 고 작은 일이 있을 때에도 직접 참여하여 한 마을 주민으로 뭉쳐 여흥(余興)을 즐기 기도 하면서, 서로가 한 가족처럼 사랑을 쌓는 주민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한다.
○ 도움 주신 분 • 심제 라기옥(心斉 羅基玉, 1934년생. 향토사학자, 무장향교 장의(掌議), 심원면 유도회장, 이장 역임) • 명헌 라량호(明軒 羅亮浩, 1941년생. 심원면장 역임) • 김재만(金在万, 삼양사 토지 무상양도대책위 위원장 역임) • 전종열(全鍾列, 1946년생. 고창군의회의원 초대・2대 역임, 현 고창군 산림조합 장, 고창문화원 부원장) • 김인주(金仁柱, 1946년생. 현 이장) • 박종훈(朴種焄, 1949년생. 궁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