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군의 진격로 상에 있는 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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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군 수 만 명 굴치(窟峙)을 넘어

동학군 수만 명이 굴치를 넘어”라는 기록을 통해 이곳 부안면 굴치를 넘었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군의 진격로 상에 있는 용산리에는 연 기(煙起), 용산(龍山), 용흥(龍興) 3개의 자연부락 및 행정리가 있고, 용산리 서쪽에 연기마을, 중앙에 용산마을, 동쪽에 용흥마을이 있다. 이 중 용산마을 은 부안면 소재지로부터 22번 국도를 따라 서쪽(약간 남서쪽) 방향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 산들의 형국이 용(龍) 모양과 닮았다고 용산이라 하였다고 하며, 용뫼 골, 용골, 용산동(龍山洞) 등으로도 불려왔다. 하지만 1960~70년대에 도로 건설, 저수지 조성 등의 개발사업으로 인해 이전 용 모양의 형국은 거의 남 아 있지 않다. 특히 2000년대 초반 국도 22호선(흥덕-선운사)을 새롭게 조 성하는 과정에서, 용산 용산마을 남쪽 계명산(아산면 경계)에 굴을 뚫을 때, 용산마을의 상징인 용두암이 있는 용머리 부분을 자르고 지나가게 되자, 마 을 주민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부안면 용산리의 절반 서쪽은 선운산 도립공원 지역이며, 용산마을은 도립공 원 바깥 동쪽에 인접해 있다. 마을 터는 북쪽으로 수월산, 동쪽으로 건기봉, 서쪽으로 뒷산이 에워싸고 있고, 남쪽으로 들을 건너 계명산과 채일봉이 둘 러싸고 있다. 북쪽 수월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합쳐져 마을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관통하는 천(용산천)이 있고, 이 천은 용산마을 동남쪽 먹방제에서 시작한 먹방천이 용산마을 남쪽 들판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질러 합류하면서부 터는 용산천이라 부르고, 인천강으로 나아간다. 지도상에 대굴치라고 하는 고개를 넘으면 내리막길 끝에 복분자주 공장이 나오고, 이 공장을 오른편으 로 끼고돌아 직선으로 들어가면 용산리 용흥마을이다. 길 따라 오르면 야트 막한 재가 하나 있는데 이 재가 굴치재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바로 아래 알 미장터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사포, 후포와 줄포, 그리고 멀리 고부 두승산 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굴치에서 이곳에 올라서면 고부 두승산이 바로 눈앞 에 있고, 그 아래 어딘가에 안핵사 이용태를 잡아 징치하고, 나아가 전주영 을 함락하면 새 세상이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가슴 벅차올라 동학농민 군은 발길을 재촉했을 것이다. 이때의 광경을 일본인이 쓴 『전라도 고부민 요일기』에 “東學軍數萬茂長屈峙踰”(동학군수만무장굴치유), 장꾼들이 돌아 와 하는 말이 ‘동학군 수만 명이 무장의 굴치를 넘어’ 왔다는 것이다. 때는


같은 달 20일이라 기록하고 있다.

굴치재를 넘으면 경사진 내리막길로 고

창북중학교 뒤로하여 부안초등학교 앞에서 국도 22호선과 마주친다. 한참을 내려가 상오마을 끝에서 좌로 꺾어 들어가다 오른편으로 쭉 내려가면 난산 과 덕흥마을 앞 농로를 가로질러 맹경교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콘크리트 2 차선 다리로 갈곡1교라 불리고 있었지만, 예전엔 나무다리로서 일명 맹감다 리라고도 하였다.

용머리 : 용산마을 서남쪽에 있는 산 끝자락으로, 용산마을 남쪽에 연속된 산들의 모습을 용의 형국이라 했을 때, 용머리[龍頭]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용머리 끝에 용두암(龍頭岩)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붙어 있다. 국도 22호(흥 덕-선운사)선을 조성할 때, 용산마을의 상징이라 마을주민들이 강력하게 반 대했으나, 용머리 부분은 잘려나가고 터널이 생기고 말았다. 굴재 : 용산마을 동쪽에 위치(지금의 용흥마을 동쪽)한 고개로, 왼쪽(북동쪽 방향)은 검산리 방향으로 넘어가는 큰재, 오른쪽(남동쪽)은 상등 방향으로 넘 어가는 작은재가 있다. 부안면 소재지의 초・중등학교를 다녔던

당시 학생

들의 주요 통행길이었다고 한다.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에는, “굴치(窟峙), 구을치(九乙峙), 구을현(九乙峴)이라고도 불리며, 상등리 상굴로 가는 고개” 로 기록되어 있다. 굴치 : 용산마을 남동쪽에 위치하고, 아산면 용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당 시 십리 가량 민가(民家)가 전혀 없었고, 해리장과 부안장으로 소를 팔러 넘 나들던 이들이 간혹 산적질도 당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 주변을 굴치골, 십리골, 무선길(무서운 길) 등으로도 불렀다 술냉기(수레넹기) : 오산저수지에서 용산마을로 넘어오는(현재 ‘고창군 추모 의 집’ 인근까지) 고갯길로 술냉기, 수레넹기라고 불렀다. 마을 분들에 의하 면, 옛날 수레가 지나다닐 곳이라는 예언이 있었고, 그것이 실현되어 현재 차가 다니는 국도 22호선 도로가 생겼다고 한다.

굴치를 넘어 오산, 그리고 알뫼장(卵山) 부안면의 동남부에 위치한 오산리는 고창군 부안면에 속하는 14개 법정리 가운데 하나이다. 자라형국인 까닭에 오산(鰲山)이라 하였다. 전근대의 부안 (富安)은 고부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문헌이나 고지도에 부안은 대체로 ‘고


부지(高阜地)’로 표기돼 있다. 1906년에는 고부군의 부내면(富內面)과 부외 면(富外面)을 합하여 부안면이라 칭하고 흥덕군에 편입되었다. 오산이라는 지명은 전주이씨 양도공파 일족이 일명 자라명당에 터를 잡고 이거한 배경 에서 찾을 수 있다. 전주이씨 일족이 이거한 뒤의 마을 이름이 ‘오산(鰲山)’ 이었기 때문이다. 뒤에 ‘오산(吾山)’으로 표기되기도 했으나 ‘오산(鰲山)’이 정확한 표현이다. 오산은 자라형국이라는 데서 오산이다. 자라형국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요 소가 있으니 바로 물이다. 오산에서의 물은 오룡천이다. 자라는 쇠 즉 금(金) 으로, 자라가 물에 들어가는 형상을 금생수(金生水)라 한다. 쇠와 물이 만나 니 상생(相生)이다. 예부터 오산은 상생을 중시해 ‘나’보다는 ‘우리’를 중시했 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오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바로 이 상생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자라형국은 풍수지리 물형론에서 오항혈(鰲亢穴)이다. 그 혈은 자라등짝과 자라목이다. 또한 명당의 여러 유형 가운데 오산은 돌혈(突穴)에 해당한다. 즉 평탄면에 돌출형이라는 것인데, 돌출된 부분이 바로 자라등짝이다. 그렇 다면 오산에서의 혈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이철환은 금구영감댁(현재 이 철환이 사는 집)이 자라등짝에 해당한다고 한다. 자라등짝인 까닭에 금구영 감댁은 근래에까지 초가를 고집하였다는 것이다. 자라목은 금구영감댁과 오 룡천 사이가 아닌가 한다. 자라등짝과 자라목이라는 혈 앞에는 반드시 물과 문전옥답이 있어야 하는데, 물은 오룡천이요 문전옥답은 상등들이다. 초등학교와 맞닿은 오룡천변이 ‘자래등’이다. 그곳 바닥에는 바위가 깔려 있 는데 이를 ‘자래바우’라 한다. 오산의 북쪽 들을 ‘장구시암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금의 상오다. 장구시암들 한 가운데 있는 샘을 ‘장구시암’이라고 한 다. 모양이 장구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구시암은 사라지고 없다. 지방도와 오산정미소 앞 인근을 ‘저잣거리’라고 하는데, 이곳에도 우물이 하 나 있었다. 이름하여 ‘저잣거리시암’ 또는 ‘저잣걸시암’인데, 하오에 있다. 1970년대에만 하여도 마을사람들이 사용한 샘이었다고 한다. ‘구정동(九井洞)’은 오산의 서쪽 끝에 있는 마을로, 상오에 속한다. 지방도를 따라 용산 방향의 모퉁이에 현재 한 가구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구정동이다. 구정동에 집을 지으면 정승 아홉이 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렇 다면 구정동의 정은 정(井)이 아닌 정(政)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구정동의 기 운을 끊기 위해서 창내골에서 구정동 쪽으로 넘어오는 ‘구룡목’이라는 고개 를 일제가 절단했다고도 한다. 오산리의 자연 환경은 풍수지리와 관련이 깊 다. 평탄면과 오룡천을 자라형국으로 해석해 오산이라 하였던 점이 잘 말해


준다. 오산은 대체로 평탄지로, 군데군데 작은 민둥산이 있다. 지방도 북쪽 홍해농장에는 ‘동산’이라 불리는 민둥산이 있고 우수골 서북쪽으로 ‘챗등’이 라는 수강산 자락이 자리하고 있다. 지방도 남쪽 평탄면은 우측 평탄면보다 약간 낮은 지대로, 이 지역은 대체로 하오에 속한다. 하오의 남쪽 개울을 오룡천이라고 한다. 오산저수지에서 발원한 오룡천은 서출동류로, 갈곡천으로 합수된다. 오룡천 건너는 상등리 상굴인데, 이를 ‘상 등들’, ‘상등평’, ‘탑들’ 등으로 불린다. 상등들은 행정구역상 상등리에 속하지 만 오산과 밀접한 곳이다. 즉 오산의 문전옥답이 상등들이요, 오산의 천석지 기들이 오룡천 건너의 상등들을 문전옥답으로 삼았던 것이다. 상등들에는 둥글고 작은 산인 똥뫼가 있다. ‘큰똥뫼’와 ‘작은똥뫼’가 있는데, 최근에 작은똥뫼 하나가 개간으로 사라져버렸다. 똥뫼는 자라똥을 의미하며 이는 부를 상징한다고 한다. 오룡천은 한국전쟁 전에는 상굴 쪽 20여 미터 쯤에 위치했었다고 한다. 전 쟁 당시에 오산저수지 둑이 무너져 수몰되는 바람에 하천 지형이 바뀌게 되 었다는 것이다.(이철환 구술)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다. 왜냐하면 수몰될 당 시의 희생자들이 살았던 곳이 오산천변이었다는 증언(김인봉 구술)은 하천의 폭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금구영감댁이 자라등짝이라면 자라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은 ‘오미동’이다. 오미동의 옛 지역은 지금의 지방도 즈음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장구시암들은 오산 사람들의 또 다른 문전옥답이었다. 현재 상오길 16번지 옆이 장구시암 이 있던 곳이며, 상오와 홍해농장이 장구시암들인 것이다. 장구시암은 그 모 양이 장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외에도 지방도 근처에 하오의 우물을 ‘저잣걸시암’이라고 하였다. 말 그대로 저잣거리에 있는 샘이다. 부안 초등학교와 맞닿는 오룡천에는 ‘자래바우’가 있는데, 이름 하여 ‘자랫등’이라 불렀다. 구정동 북쪽의 산등성이를 ‘챗등’이라고 한다. 수강산 자락으로, 챗 등 근처에는 채씨(蔡氏)의 선대 무덤이 있다. ‘탑들’ 또는 ‘탑돌’로도 불리는 상등들에 석탑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상등들에는 옛날 절터가 있었음을 짐 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외, 하오의 마을회관 앞에는 당산나무인 팽나무가 있 다. 수령이 약 300년쯤은 돼 보인다. 오산을 지나 부안면 중흥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부안면의 면소재지이자 동학 농민군이 지났고, 후에 영학당 사건으로 동학농민군의 후예들이 일본군에 학 살당한 알뫼장이 나온다. 예전 흥덕장은 아전이 억세어 장이 잘 안되었다. 흥덕장도 동부와 서부 시장이 있었다. 동부시장은 성내면 와석(소성과 경계) 에 있었다. 서부는 석교마을로 현재 부안면과 경계지점이다. 원래는 오호리


마을에 서부시장이 있었다. 지금의 흥덕면 소재지에는 시장이 없었다. 아전 들 때문에 안 되었다. 이들은 물건을 시켜놓고 떼먹기 일쑤여서 유명하였다. 첫 기록이 고창읍장과 같이 1793년 계축읍지에 나온다. 흥덕장은 1793년부 터 시작된다. 호남읍지 흥성읍지에 나온다. 석교장은 2일과 7일로 석교촌의 앞에 있었다. 민찬의 흥성읍지에 1786년 정조 10년에 기록되어 있다. 와석 장은 4.9장으로 일동면 외동촌 뒤에 있었다. 지금의 와석마을이며, 외동은 정읍에 들어간다. 1914년 이후 삼군이 합군이 되면서 생긴 것이 알뫼(알미) 장이다. 5일과 10일장으로 부안면 난산등(알뫼골)에 있었다. 1919년 흥덕읍 지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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