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사건 중심의 고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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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사건 중심의 고창사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17:00 이기화 1950년 8월 15일경 느닷없이 영광에서 흑인부대가 무기를 가지고 고창에 들어왔다. 미군의 최신무기가 목포-영광-고창으로 들어와서 고창군청, 경찰서, 중학교 등을 점령하였 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흑인병사들은 무기를 배치하고, 고창에서 잠을 잤고, 군청 직원들이 환영을 하였다.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 대화도 하였다. 작전중이라며 많은 말은 못하고, 다음 날 오전에 무기를 놓고 갑자기 도망을 가버렸다. 군용차로 자기들만 타고 정읍으로 가버렸 다. 아마도 작전 미스였던 것 같았다. 중요한 야포나 무기들을 놓고 차타고 몸만 빠져나가 니 빨치산들이 차지하였다. 9월28일 수복이 한 달 남았는데, 군산으로 상륙작전하니, 인천, 원산으로 하니 말도 많더니 만 결국 인천으로 상륙하였다. 이때 시간이 많이 걸리니 몸만 빠지고 무기류들은 놓고 도망 갔다. 야포만 7,8 문이 빨치산 수중으로 들어갔다. 느닷없이 인민군이 있는데 들어온 것 같 다. 흑인부대가 들어와서 인민군도 도망갔는데, 다음날 공기가 이상해서 군청 앞의 흑인부 대가 빠져나갔다. 군청에서 환영했던 사람들은 빨치산들이 모조리 죽였다. (후퇴하던 9월) 최종록(최석금 인민위원장 아들) 이라는 사람이 이기정씨를 만나서 수지맞았다고 하였다. 흑인부대 200여명이 왔었다. 10월24일

UN

DAY

전투해서

11사단(화랑부대,

지리산

중심

토벌부대)이

영광에서

200~300명이 고창읍 덕산리의 잔등을 넘어왔다. 1열종대로 덕산 잔등을 군인들이 시꺼멓 게 오자 환영하러 나갔다. 김상규(이무엉 삼촌의 큰 사위)라는 트럭운전수는 고장 난 트럭 을 손봐 태극기를 들고 차에 걸치고 환영한다고 인척들 20명이 군청에 갔다. 일본에서 자동 차 정비공으로 있었다. 저녁에 태극기를 몽땅 만들었다. 사촌형들(기정이, 기일, 기동, 기만공주사대 출신)도 나왔다. 기정씨는 군복을 입고 나가서 11사단을 따라가고, 이원장님은 성 두까지 갔다가 권영달씨가 그 자리에서 화랑부대 장교가 총을 쏴 바로 길가에서 죽였다. 원 장님은 못 따라가고, 곡물검사소의 직원이었던 기일, 기만씨는 안 따라갔다. 그날 저녁 빨치 산이 기일씨를 학살하였다. 환영회를 했기 때문에 튀자고 했는데, 기일씨만 안 해 살해당하 였고, 원장님과 기만씨는 문수사로 도망가서 살았다. 고창중학교가 주둔지였다. 기정, 기동씨는 군복이 있어 따라갔다. 11월 초에 정읍과 줄포에 서 흥덕을 점령하려고 작전을 전개하였다. 흥덕 배풍산 빨치산이 야포로 공격하여서 5~6번 이나 실패하였다. 빨치산들은 박격포와 야포로 공격을 하였다. 최종열에게 물어보면 군인들 1개 사단이 와도 끄떡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고창의 수복이 15일 정도 늦어졌다. 11사단 20연대 대대본부가 장성이었다. 처음 고창에 입성한 부대들은 무서워서 정읍으로 빠져 장성으로 갔다. 빨치산들이 성두자동차학원 골짜기에서 기일씨를 죽였다. 이원장과 기 만씨는 기일씨를 가매장 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이원장님은 문수사에서 내려왔다가 집 에 와서 밥을 얻어먹고 옷을 가지고 동네 밖을 가다가 자위대에게 발견되어 서부리 빨치산 에 잡혔다. (음력 8월 열 나흘날) 빨치산들은 2~3일간 취조를 하였다. 빠치산들은 물감집 창고에 가두어 두고 매일 괴롭혔 다. 빨치산들는 기정씨을 찾았는데, 기일씨도 죽고, 기정씨도 이미 군인들을 따라 간 뒤에


진작 도망갔다고 둘러댔다. 빨치산인 채정병(이원장댁 식모의 남편으로 매형이라 불렀음)씨 가 이원장에게 다가와 “너 죽일지 모르니 네가 너를 살릴 터이니 빵 하면 죽는 시늉을 하 라”고 알려주었다. 강호상고자리인 백토 구덩이에는 사람들 시신으로 가득 찼다. 이원장은 빨치산들에게 사흘간 맞고 고문당했다. 정신이 멍했다. 채정병 매형이 너를 내개 쏠 터이니 죽은 채 하라고 하였다. 군인, 방위대, 경찰은 도망가라고 하고는 뒤에서 총을 쏴 죽였다. 우익 진영의 가족들은 피해를 많이 받았다. 고창에서 좌익이나 빨치산 관련된 내용 은 증거를 댈 수만 있는 것만 말해야 다른 말이 없다. 그래서 가족사 중심으로 말을 한다. 백한기씨는 본인이 넣어 달라고 하였다. 하여간 당시 이원장님을 포함한 사람들을 공동묘지 앞의 묘 앞에 죽여 버리자고 하여 강호상고 앞에서 5명씩 묘위에 앉혀 놓고 쏴 죽였다. 그 때만 해도 실탄이 많았다. 후에 실탄이 모자라 곡괭이와 농기구로 죽였다. 채정병씨가 다른 빨치산들에게 이원장님을 가리키며 “저 꼬맹이가 나에게 눈칫밥을 많이 주 었다”고 하여 매형이 죽인다고 해서 총을 쐈다. 그리고 이원장은 죽은채 하여 딩굴었고, 채 정병씨는 목의 울대에 총구를 대고 죽은 것을 확인했다. 이원장님은 끝판에 걸려 겨우 살아 문수사로 도망갔다. 화산 친구집(박창수)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문수사로 들어가 살아남았 다. 기일씨가 돌아가신 날이 10월달이었다. 기정씨와 청룡동 잔등에서 약속했다. 기정씨는 “기화야! 너는 이 차 못타니까 11월19일 수 복 후 나를 찾아라”라고 하였다. 11월초 경찰부대가 온다는 말에 매일 흥덕 쪽으로 갔다. 최종록(학교선생)씨가 정보를 알려 주었다. 이 분은 형님과 매우 친해서 정보를 많이 주었 다. 중무장 했던 내용도 최종록씨가 알려주었다. 11월 19일 오후 3시에 화랑부대가 고창에 입성하였다. 화랑사단이 군 작전을 하니 빨치산이 도망갔다. 11월 17일 흥덕을 점령하면서 군부대도 빨치산들에게 많이 당했다. 흥덕전투를 하면서 놀 란 군부대가 그 다음 18일 부안면으로 해서 아산 반암의 탑정마을까지 도착했다. 삼거리 옆 에 탑정양조장(사변 전에도 아산지서 반암지소가 있었다.)이 있었다. 18일 빨치산들이 도망 가자 김재환 경사(동백연때 감사장 드림, 일본 해군 출신. 일찍 경사를 달았다.)를 반암출장 소 서장으로 임명하였다. 반암에서 숙영을 하고, 19일 아침에 일부는 선운사 쪽으로 보내고 주력부대는 아산으로 해서 3시에 월계에 나타났다. 원장과 탁영진은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월계로 갔다. 탁영진은 서울대 정외과를 전쟁 후 졸 업을 하였으며, 인공 때는 자위대 소년단을 구성할 때 이원장님이 추천하여 소년단장을 억 지로 맡았다. 그래서 탁영진이 남정리 소년단장이 되었다. 탁영진은 수복이 되려하자 벌벌 떨었다. 월계잔등에 척후병 군인들이 들어오자 둘이 태극기를 들고 나가 환영했다. 척후병들이 누구냐고 하자 학생이라 하였다. 척후병들은 둘을 잡아 닦달하여 위협하자, 원 장이 설명했다. 탁영진은 뭣도 모르고 따라 다녔다. 경찰가족 신분을 밝히고 경과 이야기 하자 척후병이 중대장(대위)에게 데리고 갔다. 당시 이용배 중대장은 제주도 출신이었다. 당시 척후병과 이원장님 및 탁영진씨는 함께 고창중학교에 입성하였다. 중학교 숙직실과 교 무실, 교장실 등을 안내해 주었다. 검사 후 이상이 없어서 부대가 들어왔다. 이용배대위는 누나가 있냐고 묻자 누나는 여경이고 결혼했다고 해서 다른 예쁜 누나를 소개 해 줘 화랑부대 장교들과 많이 결혼했다. 그래서 처가가 고창이 되었다. 이용배 부인의 이름도 있다. (부인은 누나 친구인 정태숙씨) 누님이 동창생인 정태숙씨를 이용배 대위에게 소개해 주었다. 당시 고창군수를 넣어 고창에서 결혼식을 했다. 이들은 2달간 이곳에 있었다. 이들은 51년 1월에 결혼을 하였다. 당시 6중대장 이용배, 6중


대 소대장 권경동의 처 정금진, 소대장 신태희씨의 부인이 조정자(중거리 당산 바로 앞에 살았고 조창수씨의 딸) 등이 고창에서 결혼을 하였다. 중거리 당산부근에는 작은 쪽박샘이 있었다. 지금은 덮어 놓았다. 조정자씨 어머니가 일제 시대 때 요정을 하였다. 신태희씨에게 조정자를 소개해 줬는데, 키가 작고 통통하다고 싫어했는데, 만나더니만 결혼 을 했다. 주둔이 끝나고 모두 따라 갔다. 2월 말 까지 6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3월 1일자로 8중대와 교대를 하였다. 이들은 횡재를 하였다. 고창은 인물도 있고, 학력도 있어서 서로 해 달라고 하였다. 이원장은 권소위 가방을 메고 다니기도 하고, 이사람 저사 람들이 데리고 다녔다. 누나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용배씨가 군수에게 말해 중매를 하 였다. 탁영진과 원장님이 따라 다녔다. 고창수복 후 4시경 이용배 중대장이 오라고 하더니 어디 못 가게 하였다. 중대장이 밥을 먹 게끔 하게 해서 취사반장을 하라하여 주방일을 할 사람들을 모집하는데 서로 지원하였다. 쌀은 군에서 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공급을 해주었고, 위원회에는 주로 유가족들로 구 성 되었다. 반찬이 없어서 시장에서 반찬을 가지고 오라 하여 사거리에서 건어물상에서 간 고등어가 들어 있는 큰 항아리를 열어 3~4가마를 끌고 왔다. 그리고 소금과 새우젓 등도 가지고 갔다. 건어물상이 당시 좌익에 협조했던 것이 있어 얼른 내놓았던 것 같다. 이것을 가지고 밥을 먹었다. 원장은 취사반장이고, 탁영진은 취사차장으로 묶어 주었다. 이곳에서 밥을 해주는 아주머니들은 서로 깐밥을 숨겨 두었다가 주었다. 군인들은 작전에 데리고 다녔다. 탁영진은 M1 소총부대에 넣어 주었다. 탁영진은 좋아서 군복입고 총을 받 았다. 고창관내의 읍면을 진주하면서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빨치산은 잔존부대만 남았다. 밤에는 인공이고 낮에는 대한민국이었다. 8중대 이후로 3월 복귀해야 하니 2월까지 마쳤다. 그 후 학교에 들어왔다. 제일 잔인한 보복 사건 김광득(光得) 학년 멤버로 백한기의 2년 선배로 50년 6월 26일 다음날 지원병을 모집하자 1호로 자원입대 하였다. 아버지가 김용수였다. 김광득이 자원입대하자 군에서 그를 장교로 입대시켰였다. 후에 대령으로 제대했다. 김용수씨는 무장면 부면장이였다. 가족이 7명이었 다. 무장에 자원입대하였다는 소문이 나자 좌익계열이 광득씨 가족 7명을 인공 때 학살을 하였다. 인민군은 점령만하고 후방은 빨치산의 남노당 부대원들이 1호로 김용수씨를 죽였 다. 이규(李奎, 성내면 사람, 이왕종씨의 아버지)는 왕종씨(가스공사 감사) 하나 낳고 죽었다. 인 공 때 이규씨는 환영집회를 비밀리에 준비하다 들통 나서 잡혔다. 그를 신고한 사람은 다리 골에 사는 고모씨였으며, 이뀨씨는 신대리 뒷산에서 칼로 난도질당하여 죽임을 당했다. 백남영씨(백운기씨 아버지, 고창여학교장) 8월 14일 우익진영을 잡아들일 때 한민당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는 바로 죽이고, 큰아들 백운기씨는 강목으로 때렸는데 귀만 찢어져서 백토골 에 버렸다. 다행히 살아서 그는 얼마나 잤는지 냄새가 심해서 일어나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 다. 이원장은 강호상고 옆의 논으로 친구들과 새보러 갔다가 친구들이 백운기씨가 자꾸 가 만히 불렀다. 오라고하니 고창중 선배였다. 당시 고창의원 원장인 곽영집씨가 고수에 피난


하고 있었다. 친구가 백운기씨 집에 연락해줘서 운기어머니가 머슴을 데리고 바작에 가마니 를 쳐서 고수로 피난하고 있던 원장이 치료하여 살았다. 수복작전 해리면 동호리 구동호 1950년 12월 22일 오전 11시경 일본인들이 파놓은 굴들이 많다. 구동호 해안일대 소탕작 전을 전재하였다.(탁영진에게 들었다.) 11사단 20연대 2대대 6중대 병력과 향토대, 경찰, 학 도병 등 150명이 참여를 하였다. 해안가에 피난해 온 사람들을 경찰부대가 전부 쏴 죽여 버렸다. 동호 부둣가에서 10여명을 죽이고, 방어용굴(포사굴)을 본격 수색을 하여 나오라고 하였으나 안나오니 수류탄을 던진다고 하니 다 나왔다. 이렇게 해서 나온 사람들을 부둣가 에 세운 뒤 모두 학살했다. 학살된 사람이 약 40여명이나 되었다. 11월말 고수와 성송을 수 북하였다. 대산은 성송과 약 8km가 떨어져 멀어 위험스러워 6중대가 진주작전을 해야 입성 한다고 했다. 심원면 만돌리 고전리 계명산 일대 작전 12월 22일 오후 이동하여(제보가 들어와서) 바닷가로 몰았고, 일부는 바다 한 가운데의 바 위에 올라갔다. 바다 한가운데의 암초에 올라간 사람들은 바닷물이 들어와 모두 죽었다. 결 국 죄가 무거운 사람들은 암초로 갔다가 모두 죽었다. 만돌과 고전 및 계명산으로 간 사람 들은 모두 학살당했다. 고창의 현지사람, 영광, 함평 등 인공에 부역한 사람들을 모두 죽였 다. 피난을 안가고 집에 있었던 사람들은 살았다. 대산면 지서 진주작전 12월 25일 대산사람들이 그날이 크리스마스였다고 하였다. 그날 6중대원들이 아침을 먹고 성송지서까 지 차를 타고 가고 도보하여 2열종대로 1m간격으로 대산까지 진주하였다. 대산 네거리의 우체국자리가 그때 지서로 썼고 금융조합자리였다. 수복 후 지서를 만들었다. 금융조합자리 에 바리케이트를 둘러싸게 하였고, 그날 밥을 먹는데 반찬은 없었다. 주민들이 소를 끌어다 잡아 주었다. 소고기국은 기름만 둥둥 떴다. 장과 소금으로만 밥을 먹었다. 그때 처음으로 소고기를 먹었다.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6중대는 철수했다. 시국 대책위원회에서 원장님댁의 사랑채를 징발했다. 이원장님 어머니가 하숙을 했는데, 대산지서에 21명이 미리 발령받아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들이 이원장님댁에서 한 달간을 하숙하였다. 식량은 군에서 주었는데 반찬은 알아서 해먹 어야 했다. 당시 구덕수라는 경사(대산지서장)가 있었고, 차석이 나순경(강원도 삼척출신)있 었다. 차석인 나순경은 그를 부르면 나~순경요하였다. 그래서 나순경으로 밖에 기억을 못한 다. 지서직원이 원장님의 책을 낮에 읽었다. 대산지서장은 화랑부대의 6중대가 철수하니 여 기서 몇 일 쉬라고 하여 자게 되었다. 밤 10시경이 되자 고성산에서 총소리가 2발 나면서 네거리 길 건너 기후섭(대산양조장 주 인, 유가족 회장)집까지 빨치산이 들어와 있었다. 빨치산들은 기후섭씨의 양조장에 불을 질 렀다. 빨치산들이 농악을 치면서 혼란스럽게 하였다. 대산지서에는 60여명의 병력밖에 없었 다. 구덕수 경사가 맥없이 이원장을 남게 했나보다며 미안해했다. 이원장은 군복만 입고 있 었고, 모자는 학생모자만 쓰고 있었다. 빨치산들이 수류탄(깡통)을 던졌다. 이원장은 실탄보 급을 맡았다. 새벽 2~3시까지 버텼으나 드디어 실탄이 떨어졌다. 구덕수경사는 이원장을 수체구멍으로 밀어 빠져나가게 하였다. 수체구명으로 나가니 배가 젖어서 매우 추웠다.


수체구멍을 통해 뒷집으로 갈 때 너무 추웠다. 뒷집의 뒷간(변소)이 있어서 다급하게 들어 갔는데, 다행히 재가 따스하여 그 속으로 들어갔다. 추워 그 잿 속에서 목만 내놓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집의 할머니가 뒷간에 왔다가 목만 내놓고 있는 이원장을 보고 놀라 기절 하여 소리를 지르자 안채의 할아버지가 나왔다. 할아버지도 놀랐다. 할아버지가 누구냐고 묻자 학생이라고 말하고, 바깥상황은 어떠냐고 물었다. 새벽의 지서는 조용하다고 했다. 성 송 쪽에서 지원부대가 대산으로 왔다. 이들이 오자 빨치산이 후퇴를 하였다. 빨치산들이 후 퇴하여 대산지서로 가니 구덕수지서장이 살아있었다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대산에서 아침 을 먹고 무서워 고창으로 달려와 버렸다. 성송지서까지만 가면 안전하여 도착하자 바로 6중 대에 연락하여 돌아갔다. 공음면 선산리 작전 51년 1월 5일 11시(11일후)로 대산에서 경찰들과 함께 있다가 봉변을 당한 후 군인들만 따 라갔다. 6중대는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차를 직접 무장으로 안가고 대산으로 갔다. 왜냐고 그러니 작전이라 그렇다고 한다. 경찰은 무장으로 가고, 군인은 대산으로 갔다. 대산 덕천까지 갔다. 덕천은 대산과 공음의 경계지역이다. 군인들은 공음면 군유리까지 2열종대 로 걸어서 갔다. 덕천을 지나 중요와 상요 사이에서 무장의 경찰들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군인들이 중요에서 상요로 넘어가는 선동리 길가의 대밭에서 빨치산들이 따발총을 쏘자 2 명의 군인들이 죽었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용배대위는 부하의 피를 보자 소대장을 불러 작전명령을 취소하고, 중요를 기점으로 해서 선동, 용주, 예전, 건동 이 부근을 포위하라고 했다. 무장의 경찰부대에게 빨리 오라고 하여 군부대가 원형으로 선산의 작은 저수지 둑으 로 몰아 집결시키도록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피난민들을 싹 몰아 저수지 둑 밑으로 몰아넣 으니 500명이 되었다. 총을 쏜 빨치산은 이미 도망가고 잡은 이들을 싹 수색을 해보니 총 을 든 놈은 하나도 없었다. 이용배중대장은 이들을 둑을 등지하게 세우고는 수냉식경기관총 (500발의 2통)을 쏘아 모두 죽였다. 황석영이라는 사람이 위증을 하였다. 무구한 양민을 죽였다고 왜곡하였다. 빨치산들이 군유 리 뒷산에서 인공기를 세우고 인민군들이 욕을 하고 있었다. 황석영씨에게 이원장이 현장에 있었냐고 물었더니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는 그곳에 없었다. 그는 들은 소리만 가지 고 위증하였다. 선산사람들은 현장에 있을 수 없었다. 500여명은 누구인가? 공음선산은 몇 안 되고, 인공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전라남도 사람들이 피난민을 많이 왔다. 황석영이 살아있는 사람이 손들면 살려준다고 했다는 것도 위증이었다. 사살 후 확인사살 하였다. 말없이 다 죽였다. 부인과 아이들은 많았다. 피난민 대열에 낀 사람들을 모두 죽였 다.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들이 많이 죽었다. 500여명 가까이 죽었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상하면 하장리 오룡촌작전 1951년 1월 6일 6중대가 처리하였다. 오룡천에 피난 행렬 중 17명을 색출하여 사살하였다. 상하면 자룡리 고리포작전(비둘기굴작전) 1951년 3월 3일 8중대와 경찰 200명이 작전에 참여를 하였다. 상하면 자룡리 고리포 비둘 기굴에 빨치산들이 숨어있다는 첩보가 있어 군인들이 나갔다. 그리고 바닷가 절벽에 굴이 있다. 구시포해수욕장 옆 돌산으로 일제 때 파놓은 작전굴이 있어서 50~60명이 들아 갈 공 간의 굴이었다. 빨치산들이 그곳에 있다는 첩보를 받고 그곳에서 빨치산들을 색출하여 죽였


다.(즉결처분) 상하면 용대리 택동작전 1951년 3월 13일 8중대 병력과 경찰 병력 200여명이 출동하였다. 숨어있는 피난민들과 마을 사람 50명을 학살 하였다. 첩보가 들어와서 본부에 작전신청을 하면 허가 받아 진행하 였다. 무장면 월림리 죽림마을작전 1951년 4월 5일 숫자미상의 18전투단의 경찰부대가 자행한 사건이다. 월림에는 김해김씨 들이 살았고, 죽림에는 천씨(千)들이 살았다. 죽림의 천씨들이 좌익이 많았다. 월림리의 김 용식씨가 18전투대에 특채로 중대장이 되었다. 자기의 아버지가 사는 월림리의 가족들이 좌 익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것을 듣자, 흥분해서 개인적으로 죽림의 천씨들과 동내사람들을 잡 았다. 그리고 이들을 무장면 도곡리 시목동 계곡에서 이들을 학살하였다. 황용섭 아버지가 죽림으로 제사나 무엇인가를 지내러 죽림리로 갔다가 아침에 붙잡혀 죽음을 당했다. 당시 죽림리를 포위해서 붙잡혀 간 사람들 약 80여명이 학살당했다. 마을 사람들을 무조건 싹쓸 이해서 죽였다. 후에 김용식씨는 형무소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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