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지역 수성군의 조직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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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지역 수성군( 1.

守城軍 의 조직과 활동 )

전주화약 이후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정부의 대응

갑오년(1894)

5월 8일

동학군은 전주 화약이후 전주성에서 철수

한 뒤, 일부는 무기를 반납하고 고향에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일부는 무기를 소지한 채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다니며 관이나 민가를 침범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고창지역에서도 동학농민군에 의해 위와 같은 상황이 자주 발생 하였음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다음과 같다.

․동년

5월 8일

무장으로 간 동학농민군들이 민가를 토색하고,

전주 구미동의 부잣집도 습격하였다(수록 총서

․월

22일

5

5, 223쪽).

초토사의 보고에 따르면 무장에서는 동학농민군

들이 무덤을 파고, 사는 집을 헐면서 행패를 부렸다(양초전 기, 총서

․월

6, 153-154쪽).

말경 전봉준이 사적인 보복과 설분을 엄금하라고 지시

5

掘人塚 ․ 징사채 徵私債 ․ 겁 부민 劫富民 ․ 욕사족 辱士族 ․ 조매관장 嘲罵官長 ․ 박속이교 縛束吏校 하는 설분적 행동이 잇따랐다 … 황현 하였으나 곳곳에서 굴인총( (

)

(

(

은)

5월

)

(

)

)

(

)

)

.

(

이후에 봉준은 각 지방을 순시하면서 방종하지 않도

록 기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명령은 오히려 행해지지 않았 고, 각각 ‘접(

)’이라

하면서 오직 힘센 자가 서로 우두머리

로 행세하려 하였다.“고 하였다(오하기문, 총서

․월 6

23-23,

․ ․

흥덕 영광 부안 등지에서 동학농민군들이 성내

~ 백명씩 모여 있었다 동학당 시찰일기

1

6. 29.

1, 107-110쪽).

2

(

무장 동학농민군

5~6백명은

,

총서

일본병이 장차 이를 것이

라 하면서 성중 난입, 무기를 탈취하였다(고문서 도서관,

1987, 412쪽).

- 1 -

25, 74쪽).

2,

서울대


대체로 당시의 정부는 고창지역에서 보는 바와 같은 동학농민군 의 활동에 대해서 강력히 대처할 여력이 없었기에, 선무사를 파견 하여 한편으로는 선유하며, 한편으로는 탄압하는 양면정책을 사용 하였으나,

6월까지는

탄압보다는 선무에 더욱 비중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7월

초(6,7,8일) 전봉준이 전라감사 김학진과 만나 나라

官民相和 를 이끌어

의 어려움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하는 관민상화( 내었고(오하기문, 총서

1, 179-180쪽),

전주에서 회담을 갖고(7월

6일)

)

또 감사의 협의 요청에 따라

집강소를 인정받아 전라도 일대의

행정권을 이양 받게 되었다. 이때 전봉준은 감사와의 약속을 이행 하기 위해 각 읍 집강 앞으로 평민침학을 금지하고 치안을 유지 하며 무기와 공물을 반납하라는 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오하기 문, 총서

1, 182~183쪽).

․민 양자간의 화해 협력의 노력은 오래 지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청․일간 전쟁이 일어

그러나 위와 같은 관 속될 수 없었다.

났고, 성환전투(6.27)에서의 승전이후 점차 노골화하는 일제의 침 략정책은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에 동학농민 군은 이제 왜구를 토벌하자는 기치 아래 재기포의 명분을 찾게 되었다. 따라서 동학군은 종전에는 국정개혁을 요구하며 봉기하였 으나 이제는 친일 갑오정권과 일제를 타도하자는 보다 더 강력한 동기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후,

8월에

9월에는

접어들어서는 김개남의 남원 재기포 결의(19일)

각지에서 재기포의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대원군의

기병권유를 받은 전봉준이 재기포를 결심하여 삼례에 대도소(

所 를 설치하고 )

(9월 10일),

大都

드디어 북상의 진군이 시작되었다(10월

12일).

이때 조정에서는 고종의 교서를 통해

“처음

봉기는 봉건적 탐학

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일어났던 점을 인정하였으나 이제는 양민 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비도들이 일으킨 난, 패역”이라고 규정

- 2 -


하고, 이들이 다시 귀화하지 않고 왕명을 거역한다면 모두 주멸 (

誅滅 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일성록 )

2.

(

).

동학농민군의 봉기명분과 전봉준 대장의 통제 노력

동학농민군의 무장기포시(갑오년

(

3월

20일)

내걸었던 사대명의

四大名義 는 농민군 봉기의 목표와 행동강령을 제시한 것이었다 불살인 불살물 不殺人 不殺物 충효쌍전 제세안민 忠孝雙全 濟世安民 축멸왜이 징청성도 逐滅倭夷 澄淸聖道 구병입경 驅兵入京 진멸권귀 盡滅權貴 대진기강 大振紀綱 입정명분 立定名分 이종성훈 以從聖訓 )

.

1.

(

)

2.

(

)

3.

(

)

4.

(

(

)

(

)

)

(

)

위의 내용은 무장기포시의 포고문이나 격문, 그리고

(

)

12개조

기율

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포함되고 있으며, 백산대회 시 대장기폭 (

大將旗幅 에 )

쓰여 졌던

報國安民 으로 집약된다고 볼 개조 기율 十二個條紀律 은 구체적

“보국안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2

)”

(

인 행동지침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항복하는 자는 대접한다.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4.

순종하는 자는 경복한다.

5.

도주하는 자는 쫓지 않는다.

6.

굶주린 자는 먹인다.

7.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

8.

빈한한 자는 진휼한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11.

병든자에게는 약을 준다.

- 3 -

)


12.

불효자는 죽인다.

위에서 보면,

① 어려운 처지의 백성을 구제하는 내용

(2,6,8,11조)

탐관오리를

(1,3,4,5,7,9,10,12조)

포함한

포악한

계층을

징치하는

내용

등으로 개관할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온

건하고 자애로운 표현으로 되어 있음이 주목을 끈다. 아마도 사인 (

士人 의

意中 이

신분이었던 전봉준 대장의 의중(

)

)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와 같은 동학농민군의 행동지침(다른 말로 표현하면 군율<

>)은

봉기의 초기단계에서는 그런데로 준수되었다고 볼 수 있

다. 그러나, 봉기의 성격상 약간의 마찰과 대립의 발생은 불가피 한 측면도 있었다. 예컨대, 무장지역의 경우, 봉기 초기단계인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사방에서 몰려와

1,000여

3월 18일에는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가운데 수백명이 법성포 진량면 용현리 대나무 밭에서 죽창을 만 들고, 민가에서 조총, 호미, 낫, 삽 등을 탈취해 갔다. 이어 이들은 그동안 동학에 반대하고 탄압하였던 자들을 잡아다가 구타하였고, 군량으로 삼기 위해 인근 석교촌의 미곡상 덕필이 사서 보관해 둔 백미

60석을

빼앗고, 그 집을 파괴하였다. 또 이들은 무장현감

에게 글을 보내 일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수록,

총서

5, 159-161쪽).”는

기록이 있는바, 여기에서 발견되는

농민군의 불법행위는 비교적 미세한 편이다. 그러나 황토현 접전 이후 귀향하던 농민군이 다시 무장에 들어와서의 행동은 전과는 달랐음을 보여준다. “(4월 9일)

의 수는 학농민군

오후

1만여 40여

4시경

무장으로 들어갔다. 이 때 동학농민군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들은 체포되어 있던 동

公廨 를 파괴하였

명을 풀어주었고, 동헌과 공해(

)

으며 군기로를 파괴하여 화약 등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또 성 내외의 인가를 불태웠다. 이어 도망간 이서배들을 수배하는 한 편, 아전과 군교

10여명을

죽였다(오하기문, 총서

- 4 -

1, 66쪽,

수록,


총서

5, 193-194쪽).”

“무장의

吏校

동학농민군이 관아에 난입하여 이교(

포 되어 피살된 자가

10여

)

가운데 체

명에 이르고, 각 촌락과 도로변에도

什物

체포되어 피살된 자가 수십 명이었다. 또한 군기와 집물(

)

화약 등을 남김없이 탈취해갔으며, 각종 문부와 문적들을 불태웠 다(수록, 총서

5, 196쪽).”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농민군의 행위가 점차 심해지자, 전봉준 대장 등 지휘부에서는 이를 통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니 다음 에서 확인된다. “동학농민군은

일반 민인에 대한 이전의 원한도 있어서 폭력

을 휘두르고 몰래 부호를 납치, 협박하여 재화를 빼앗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전봉준의 본의가 아니었다. 전봉준은 힘을 다하여 질서유지를 위해 노력하였기 때문에 다 행히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전주출신의 동학 접주

徐永斗 는 동학농민군의 폭력을 막고 민간인과 동학농민

서영두(

)

군 사이를 중재하는 등 폭력과 약탈행위를 억제하고 질서를 유 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전주부사,

114쪽).”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봉준 대장은 항상 농민군들이 봉기 의 명분(4대명의)을 욕되게 하거나, 기율을 어기는 행동으로 인하

士族 들의 민심에서 멀어지

여 일반 민인들은 물론 양심적인 사족(

)

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평민침학’을 금하고(오하기 문, 총서

1, 182-183쪽), ‘떼

키지 말라’(수록, 총서

지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소동을 일으

5, 278-279쪽)는

통문을 매우 간곡하게 수차

례 각 접주에게 통문을 보냈던 것이다. 당시 훈련되지 않은 동학농민군의 기율을 바로 잡고자 하는 노 력은 전봉준 대장 외에 다른 수령들에 의해서도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개남이

임실에서 남원으로 들어왔다. 부사 윤병관은 이미

도망간 지 한 달 정도가 되었다. 오는 도중 오수에 이르렀을 때

- 5 -


동학농민군 가운데 한명이 찰방의 사무실에 들어가 은가락지를 빼앗았는데, 이때 김개남은 동학농민군의 목을 베어 막대기에 매달아 행렬 앞에 세워, 동학농민군을 경계하였다(오하기문, 총 서

1, 210쪽).”

한편 이 때의 남원은

“부민이나

유생들은 모두 도망가고 남원

읍내는 동학농민군으로 가득 찼으며 부중과 교룡산성 두 곳에 나 누어 주둔하였다.”고 하였다(영상일기, 총서

2, 287쪽).

위에서 보면, 기율을 어긴 농민군을 목을 베어 경계시킬 정도로 엄격하게 단속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런데도 ‘부민과 유생들 이 모두 도망갔다’는 부분에서는 민심이 동학농민군을 떠나고 있 음을 또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전봉준 대장이 우려한 바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 러한 우려할 만한 상황에서는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전봉준 대장은 김개남 대접주가 재봉기를 위하여

7만의

농민군을

남원에 소집하였을 때, 먼저 달려가서 “지금

시세를 보건대 일본과 청이 전쟁 중인데, 어느 쪽이 이기

든지 반드시 군사를 우리들에게 돌릴 것이다. 우리들은 비록 무리 는 많지만 오합지졸이어서 쉽게 무너진다. 이 무리로서는 끝내 뜻

歸化 에 탁 托 하여 각 고을에 동학농민

을 이룰 수가 없다. 귀화(

)

(

)

군 역량을 보존하면서 시세의 변이를 지켜보자.”(오하기문, 총서 1,

210-211쪽)고

하면서 봉기의 계획을 보류할 것을 권고하였고,

손화중 대접주도 달려와서

“우리들이

봉기한지 반년이 되었으며

士族 이

전라도가 모두 호응하고 있지만, 성망 있는 사족(

)

지지하

지 않고, 부민이 지지하지 않으며, 지식인이 지지하지 않는다. 더 불어 접장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모두 어리석고 천해서 화( 즐기며 표절(

剽竊 을 일삼는 자들뿐이다 )

.

禍를 )

인심의 향배를 알 수 있

다. 반드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사방에 우리 역량을

苟全 을

보존하여 구전(

)

도모하는 것이 좋다.”(위와 같은 곳)고 하

며 역시 만류한 바 있었다.

- 6 -


갑오년 각지의 수성군 조직과 농민군과의 대립

3.

갑오년

3월

報國安民倡義 의 깃발을 들고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

>

초기에는 대부분의 고을에서는 농민군의 절대적으로 우세한 기세 앞에 대적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에 큰 저항이 없었으며, 있다 하더라도 대단히 미미한 정도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함평의 경우,

),

노령(

奴令

)

4월 16일

및 수성군 등

동학농민군은 함평의 이교(

150여명이

을 파괴하고 들어가, 동헌을 지키고 있던 “우리는

관문에서 방어하자 관문 1백여

명의 사민들에게

한편으로는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또 한편으로는 읍폐민

邑幣民瘼 을 교정 矯正 함으로써

막(

)

(

)

보국안민하기 위하여 각 읍을

두루 돌아다니는 길에 이 고을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이유를 밝 혔다고 한다(오하기문, 총서

1, 68쪽).

여기에서는 서로 간 큰 살상이 없이 비교적 온건하게 사태를 해 결한 것인데, 수성군이라고 하는 각 면에서 동원된 사민들 역시 관아의 요청에 의례적으로 협조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달리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철저히 부정하며 대적하는 고 을은 나주였다. 농민군은 초토사 홍계훈은 물론 나주목사 민종렬 (

閔種烈 에게도 봉기의 목적과 명분을 간곡하게 설명하는 글을 올 )

렸으나, 나주목사는

“명분이

없는 거사는 마땅히 도륙하도록 법에

정해져 있다.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는 답변을 보냈다(오하기문, 총서

1, 70쪽).

이리하여 나주는 전라도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농민군과 대적하 는 고을이었으며 농민군의 대규모 공세에도 성을 온전하게 지켜 나갔다. 이것은 나주를 지키는 수성군이 그만큼 완강하였음을 말 해주는 것이다. 이후로 시간이 흐르면서는 동학농민군과 일반 사

士民 들과의 반목과 적대감이 형성되면서 점차 각 고을에서 수

민(

)

성군이 조직되기에 이른다. 예컨대, 충청도에서도

“충청감사

조병

호가 조정에 보고하기를 ‘충청도의 동학농민군이 해산했으나 봉변

- 7 -


을 당한 양반들 집에서 가동(

家憧

수백 명을 모은 다음 동학농민

)

군의 집만 골라 불을 질러서 수일 안에 다시 동학농민군들이 모 여 소란을 일으킬 것이다.’ 고 보고 하였다(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 33쪽)”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어떤 연유일망정 서로 간 반목이 조성되는 것은, 결과적 으로 동학농민군에게는 매우 우려할만한 일이며, 그 때문에 전봉 준 대장은 앞글에서 본바와 같이 동학농민군에게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누차 경계하였던 것이니 다음에서도 확인된다. 갑오년

7월 5일

최경선과 오권선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1만여

이 나주를 공격하였으나, 목사 민종렬과 나주 수성군의 저항을 받 아 실패하자, 전봉준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전봉준은

“저들은

각기 그 자신의 직분을 다할 뿐인데 무슨 이유로 먼저 공격하는 가, 접장은 내말을 듣지 않아 패하였으니 나의 도움을 바라지 마 시오.” 하고 거절하였다(오하기문, 총서

1, 156쪽)

한다.

갑오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수성군에 대한 기록이 더 많이 발 견되는 바, 이때에는 ‘수성군’ 외에 ‘민보군’, ‘민병’, ‘민포군’ 등 다양한 어휘가 쓰여 졌다.

․월 7

26일,

운봉에서 박봉양 주도로 민보군을 결성하였다(박

봉양 경력서, 총서

․예천 읍내․외에서

7, 539쪽). 1천 5백여

명의 민보군을 모집해서 관아

의 무기로 무장시켰다(갑오 척사록, 총서

․월 7

30일,

11, 10-24쪽).

하동의 민병이 광양 도소를 설치하고 있던 광양의

동학농민군을 강너머로 축출하였다(오하기문, 총서

․진안․장수․무주․용담․금산

켜 적을 막았다(오하기문, 총서

5개

1, 185쪽).

民砲 를

읍을 민포(

)

일으

1, 187쪽)

․김개남이 장수로 들어가려다 민포군의 저항에 부딪치자…임 실 상여암으로 갔다(위의 책,

․월 9

1일,

191쪽).

하동의 민포가 주축이 되어 관아의 뒷산 안봉에서

진을 치고 대비하였다(위의 책,

- 8 -

217-218쪽).


․월

7일,

9

강릉부를 점령한 동학농민군이 강릉부 대소민인 수

천 명의 기습을 받았다(동비토록, 총서

10월 1일,

강진병영에서 동학농민군 도소를 철파하고 수성소

日史

를 세웠다(

12, 124-125쪽).

12월 5일,

,

총서

7, 486쪽).

영광 홍농 사는 이현숙이 민포군을 이끌고 접주

송문수를 잡아 처형하였다(순무선봉진등록, 총서 4.

14, 97쪽).

흥덕 고창의 수성군 조직과 활동

1)수성군(의병)

갑오년

9월

결성 결의

(9월

상순)

초 전봉준 대장 등 동학농민군의 지휘부가 농민군의

재기포를 준비하며 각 지역의 접주에게 통문을 돌리고, 삼례에 재 집결할 시점에 고창지역에서는 재지사족(

在地士族 층에서 )

수성군

을 일으키자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와서는 이들은 동학 도의 기병(봉기)을 난(

亂 으로 )

규정하고, 동학농민군을 반역의 무

리로 인식하였기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의병(

義兵 을 )

일으켜야 한다는 명분과 사명감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이와 같은 사족 층의 의식적 기반위에서, 이를 실천에 옮기 려는 시도는 흥덕의 사인 강영중(

姜泳重 이 주도하였다 )

.

곧 동학농민군의 봉기에 부정적이었고, 이 때문에 정국이 혼란스 럽고,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였다고 개탄하던 강영중은 흥덕의 현

尹錫禛 을 찾아가 유병 儒兵 을 일으키자는 데에 합의하 였다 그리하여 평소에 뜻을 같이하며 창의 倡義 를 모의하여 왔 던 고창․흥덕의 선비들과 힘을 모아 단기간에 백여 명의 동조자 감 윤석진(

)

(

)

.

(

)

를 확보하게 되었는바, 이때 강영중과 함께 주도한 인물은 아래와 같다. 모양 사인(

士人

)

姜守重 柳光熙 李錫九

강수중

(

)

유광희

(

)

이석구

(

- 9 -

)


柳志普 진사 進士 김영철 金濚喆 정언 正言 정규삼 鄭奎三 흥성 진사 김상환 金商煥 사인 최영섭 催榮涉 박윤화 朴胤和 임경호 任燝鎬 박추화 朴錘和 그리하여 이들은 곧 취의통문 聚議通文 을 작성하여 비밀리에 흥 덕․고창의 선비들에게 회람을 시켰는바 이 통문에서는 동학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비난하였다 곧 동학은 학 學 이 아니며 난 亂 이다 고 하면서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유지보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첫째, 동학은 금년 봄부터 일어나 서로 모여서 도적질하고 전주 부를 침범하였으니, 얼마나 무거운 죄인가? 그러므로 학이 아니요 난이다. 둘째, 조정에서 너그러이 은혜를 베풀어 귀화토록 하였으나, 버 티면서 흩어지지 않고 벼슬아치의 후손과 양민들까지도 협박하여 끌어들이며, 성읍을 공격하거나 향리에 노략질하니, 학이 아니요 난이다. 셋째, 사람의 무덤을 파헤치고 사람들의 집을 부수어 원한을 맺 으니, 학이 아니요 난이다. 넷째, 부녀자와 재물을 금수처럼 겁탈하고, 사대부를 망신시키며 명분을 문란케 하고 사람의 도리를 쓸어 없애니, 학이 아니요 난 이다. 다섯째, 도적들이 함부로 병권을 휘두르고 창고의 곡식을 빼앗으

學 이 아니요 난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난을 일으킨 동학도 농민군 는 난신적자 亂臣賊 子 에 다름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토벌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강영중 姜守重 박윤화 朴胤和 최영섭 催榮涉 이회백 며 관리를 능욕하고 관군을 막고 있으니 ,학( (

)

)

.

)

(

,

(

.

),

(

- 10 -

),

(

),


( (

李會百 박추화 朴錘和 李吉儀 등이 연명하였다 ),

(

),

)

2)

守城軍將

9월

金鳳燮

김봉섭(

),

),

이길의

.

수성군장(

지난

催奎涉

최규섭(

)

임명과 농민군 토벌 건의(11월 상순)

흥덕 사인 강영중과 흥덕현감 과의 합의하에 흥덕

고창의 선비들로서 수성군이 결성되었다고는 하나, 지휘계통의 조 직이나 부서가 정해지지 않고 그저 참여인사 있는 형태로

11월까지는

100여명이

망라되어

수면 아래에서 유지되어 온 것으로 판단

된다. 이렇게 된 사유는, 당시 동학농민군을 재기포하여 일부는 북상

列邑 을

중이었지만, 또 한편은 여전히 열읍(

)

순행하며 맹위를 떨

치고 있었으므로, 세가 약한 수성군으로서는 드러내놓고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1월 11~12일

공주 우금치 공방전에서 농민군이 패배

하자 전세가 역전되었으므로, 이후에야 수성군 (민보군)등이 활동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흥덕 고창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곧

11월에

접어들어 흥

덕 고창의 선비들은 흥덕현감에게 의병장을 임명해줄 것과 활동 명령 하달을 청원하는 글을 올린 것에서 알 수 있다. 고창유생 진사 김영철 등(유학 유광희, 이석구, 흥덕유생 진사 김 상환, 전감찰 신종관, 유학 최영섭)이 목욕재계하고 흥덕성주에게 올린 글에서는, 첫째 흥성의 사인(

士人

)

강영중 박윤화, 모양의

사인 강수중은 의병의 장수가 될 만한 재목이 되는 바, 이들을 장 수로 차출한다면 인근의 여러 읍에서 의병들을 더 모을 수 있다 고 하였다. 둘째로는 이와 같이 모아진 군사로써 적도들을 토벌할 수 있으니 속히 명령을 하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특히 흥성의 차치구(

車致九 는 관아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고 윤리 )

를 무너뜨리고 있으니 급히 병사를 내어 처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위의 청원서(상서)는 ‘갑오

11월

일’의 일자에 아래와 같은 인사

- 11 -


들이 연명하였다. 창의소

(

倡義所

金濚喆 柳光熙 李錫九 鄭奎三 姜奎重 柳志普 朴倧九 金相晙 柳浚喆 鄭仁哲 金箕殷 申燾均 李豊榮 柳相基 金相烈 柳衍翼 金鳳燮 朴錘和 崔奎涉 李吉義 朴運鍾 金冀弘 金商煥 愼宗寬 崔榮涉 李會白 任燝鎬 白樂鉉

고창 진사 김영철

(

)

유학 유광희

(

)

이석구

(

전정언 정규삼

(

유학 강규중

(

유지보

(

박종구

(

김상준

(

유준철

(

정인철

(

김기은

(

신도균

(

이풍영

(

유상기

(

김상열

(

유연익

(

김봉섭

(

박추화

(

최규섭

(

이길의

(

박운종

(

김기흥

(

흥덕 진사 김상환

(

전감찰 신종관

(

유학 최영섭

(

이회백

(

임경호

(

백낙현

(

)

- 12 -

) ) ) ) ) ) ) ) ) ) ) ) ) ) ) ) ) ) ) ) ) ) ) ) ) )


위의 글을 받은 흥덕현감은, 스스로는 이미 동의하고 있으나, 의

王師 가 경내에

병장의 임명은 자의대로 할 수 없는 일이며, 왕사(

)

도착하는 날 건의할 수 있으므로 기다려 달라고 하고 아울러 비 밀을 지키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준비하라는 내용으로 동월

15일

자로 회답하였다. 이때는 이미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여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된 동학농민군이 전봉준 대장의 지휘 하에 노성을 거쳐 논산으로 후퇴하고 있었으며, 관군과 일군이 계속 추격하며 남하하고 있었기에, 흥덕현감은 관군이 곧 가까이 당도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조정에서는 이보다 앞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겠다는 방

兩湖巡撫使 로 임명하고 월에는 별군 관 이규태 李圭泰 를 선봉장 先鋒將 으로 차출하였다 이에 이규태 는 통위영병 統衛營兵 을 인솔하여 공주 전투에 참가하였고 이어 침을 굳히고 양호순무사( (

)

)

(

(

,

)

10 .

)

,

패주하는 농민군의 뒤를 쫓아 추격하며 남하하고 있었다. 3)

·

흥덕 고창의 수성청 조직과 참여인물

지역사족의 의병장 임명 요청을 받은 흥덕현감은 지난번의 회답 이후 열흘만인 동월

25일

·

재차 흥덕의 강영중 박윤화, 고창의 강

수중 앞으로 밀령을 하달하였다. 그 내용은, 김개남이 패주하였으 나 손화중은 아직도 그 세력이 왕성하니 혹 흩어지면서 평민을 살상할 수도 있는 바, 그 때 명령을 내리면 대의를 위해 나서야 하며, 그때까지 기다려야함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또 이어서 동월

29일에

다시 사족들에게 전령(

傳令 을 )

보냈다.

그 내용은, 동학도들이 사방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나, 저들의

京軍 이

수에 비해 우리 쪽의 수가 적으니, 만일 경군(

)

가까이 오

면 그 때에 일제히 거병하여야 할 것이로되, 만일 경계를 넘어 멀 리 피하는 자가 있다면 군율로 엄히 다스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로부터 며칠을 지나

12월

초에 흥덕의 사인들은 직접 양호순

- 13 -


· ·

무영에 상서하여 흥덕 고창 무장의

3읍에

것을 간청하였다. 흥덕 유생 강영중 외

의병장의 직첩을 내려줄 12인이

연명하였는바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진사 김상환 감찰 신종관 진사 이병광, 진사 이가풍, 유학 백낙현, 백련수, 조형승, 전첨사 박래민, 오위장 진상규, 유학 고용진, 박윤화, 최영섭 등 이에 대해 당시 장성에 주둔하고 있던 순무영 선봉(이규태)은 흥 덕이 외롭게 성을 지켜나가고 있음을 알고 있으나, 장관의 임명은

興德守城

보고해서 처리할 일이라고 말하고, 이어서 흥덕 수성소(

)

앞으로 전령을 보냈다. 그 내용은 동학도들이 모두 흩어졌으

나, 접주들이 촌락에 숨어 있으므로 적발하여 잡아들이되, 행패가 심했던 자는 처단하고, 협박에 의해 따른 자들은 문초하여 보고하 라는 것이었다. 위의 전령 역시

12월

7일에

장성주둔 순무영

선봉이 발한 것인 바, 그렇다면 이때는 비록 장관의 직첩을 받지 못하였으나 이미 수성소(수성청)가 설치되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추정하건대 이 뒤로 그 일자는 알 수 없으나, 순무영의 재가를 얻어 각각의 직첩이 내려지고 그리하여 수성청의 조직이 완비된 것으로 판단되는데(12월

7일

이후가 될 것임), 이때는 동

학군 지휘부가 모두 잡히고 동학농민군도 모두 와해된 시점이다. (수성청

좌목 등은 별첨함)

․고창의

따라서 흥덕

수성청은 동학농민군의 패전 이후 결성되

었으므로, 수성군과 동학농민군간의 직접적인 접전은 없었다고 보

- 14 -


여 진다. 그러므로 수성청의 역할은 순무영의 경군과 일본군의 농 민군 색출 작전에서 일익을 담당하거나, 아니면 독자적인 힘으로 현감을 도와 고을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며 한편으로는 농민군 을 찾아내어 처단하거나 정부군 또는 일본군에게 인계하는 역할 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수성청의 결성을 계획하고 참여인원을 점검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갑오년

9월부터

였으나(흥덕과 고창

현 관내의 참여자 명단을 기록한 문서에 갑오년 현감의 서명 날인이 있으며, 취의통문도 직접적인 활동은 갑오년

12월

9월

9월 9일자로

중순부터 익년(1895년)

일자의 흥덕 되어 있음), 4월

상순 이

전으로 볼 수 있다. 수성청의 역할에 대하여 그 의미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쓰여 진 흥덕고창창의서(

白樂奎 에 의해 지어졌으며 공로에 대하여 ․ ․ 등으로

상순에 수원인 백낙규( 약하였던 인물들의

興德高敞倡義序 가

)

4월에

2

3

1895년 4월

수성청에서 활

,

1

서도 역시 을미년(1895)

)

평가한 기록문

흥덕현감의 날인을 받아 작성되었

음에서도 확인된다고 보겠다. 아울러 동학농민군 진압작전에 동원 되었던 일본군(후비보병 제19대대)이 작전을 종료하고 동년 28일

용산으로 귀진(

2월

歸陣 한 사실도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 )

다. 한편 이때의 수성청 조직은 일단 해산되었겠으나, 광무 1899)에

3년(기해,

일어난 고부영학계 농민군의 고창성 공격 때에 복원되어

활동을 재기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농민봉기를 이끌고 가담하였던 세력이 갑오동학농민군과 그 지지자들이 주류였음을 감안하면, 곧 이때의 봉기는 갑오동학 농민봉기의 후속거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고창성 공격에 실패하고, 알뫼장터의 접전에서 패전하게 됨으로써 종말을 맞게 되었는바, 이때의 싸움에서는 고창의 수성

「전라남도고 창군착득난당성명죄목병록성책 全羅南道 高敞郡 捉得亂黨姓名罪目 군이 주역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기록 (

- 15 -


幷綠成冊 」에는 상당수가

수성군에게 붙잡혔음을 기록하고 있는

)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때에도 갑오년에 수성장으로 활약하였던 갑평( 사인 강수중(

姜守重

, 1849 ~ 1919)이

甲坪 의 )

역시 수성장을 맡았으며, 이

때의 공이 있는데다 사림들의 천거가 있어 을사년(1905)에 후릉참

厚陵參奉 에 제수되었다

봉(

)

.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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