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 연극 연예사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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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연극 연예사 연원 2010년 11월 22일 월요일 17:11분 고창의 연극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적자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고창의 연극의 시작은 김순 한이라는 서울에서 내려 온 부잣집 아들 때문이었다. 그가 나타나서 고창의 연극이 시작 된 것이다. 김순한씨가 처음 찾아온 것이 1930년대 중반으로 이원장님 댁에 그가 찾아왔다. 그가 찾아 온 이유는 육혈포 청년이라는 연극을 서울에서 하였는데, 그 내용이 일본에 대한 반일 의식 이었기 때문에 쫓기게 된 것이다. 김순한 씨가 연극계에 있을 때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여 먹고 살 것이 없어서 김순한씨 댁에서 먹고 살았다. 김순한씨가 30년대 후반 서울에서 갑자기 이원장님 댁으로 찾아왔다. 서울에서 연극하다가 총독부에서 몰려 그는 아무 목적지 없이 정읍역에 내려왔 다. 정읍역에서 들은 바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갈재로 귀향을 갈 때 고창으로 가야 산다고 하여 고창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는 고창읍내로 와서 의지할 곳을 찾았는데, 이 원장 아버님께서 고창읍의 6구 구장이었다. 구장을 찾아 와 큰절을 하고 자기를 살려달라고 애원 하였다. 그래서 방을 하나 내 주게 된 것이다. 그는 연극을 통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고창은 1구에서 7구까지 있었다. 영광쪽으로 빠지는 남정리가 6구이고, 1구에서 5구까지는 동산물방면으로 경찰서 부근이다. 그래서 그가 6구로 찾아왔던 것이다. 6구 구장인 이원장 아버지는 고창에서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김순한의의 부모는 서울에 서 금은방을 했는데, 대단한 연금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금은방을 집 앞에 차려주게 된 것이다.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조용히 집에서 지냈다. 김순한씨는 육혈포 청 년 이라는 공연을 원각사에서 하였는데, 그 내용은 왜놈을 암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육혈포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을 만들어 원각사에 출연하였다. 그 후 일본인들에게 쫓겨 고창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 원장님 댁에 방 두 칸을 얻어 몰래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김순한씨는 처를 이 원장님 댁에 맡겨놓고, 본인은 지금의 서 장관사 옆에 기와집을 마련하여 여러 여자들을 두고 살았다. 전국적으로 경찰서 옥상에 방공감시초소가 있었다. 이를 줄여 경방단이라 하였는데, 경방단 은 미군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방단에 들어가야 일제 때의 강제징용에서 벗어날 수 가 있었다. 그래서 서로들 들어가려고 하였다. 이 원장님의 매형이 박남호였다. 그는 고창의 남인수라 불렸으며, 전라도에서 노래대회가 있으면 늘 1등을 하여 이원장 누님댁에 시계가 16개나 있었다. 박남호도 경방단 소속이었고, 고창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고창의 경방단은 일본을 돕는 일본문화계몽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김순한 씨에게 연극에 대 해 많이 들었다. 박남호씨가 김순한씨에게 연극을 지도해 달라고 해서 그가 문화계몽단에 연극을 가르쳤다. 김순한이 시나리오를 써서 농총계몽단을 만들어 각 면을 순회하며 공연을 하였다. 이 때가 1940년대일이다. 일본을 위해 계몽단을 한다고 하자, 서장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1943년부터 1945년도 까지 활동하였다.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대원에 입대하고, 연예활동을 하였다. 경찰이 선무공작대라


하여 서장인 구루쇠가 허가를 해 주었던 것이다. 계몽단은 김순한이 조종하여 활동하였다. 미당은 서울에서 내려와 월곡에 살았다. 미당 아버지는 월곡에 집을 지어주고, 그 곳에 팔 각정 정자인 초당도 지어주었다. 지금은 초당은 없어지고 대밭 속에 터만 남아있다. 미당이 살던 집은 남아있다. 미당이 1936년에 동아일보에 “벽”이라는 시로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고창 청년들이 미당을 줄줄이 따라 다녔다. 특히 김용환, 김방수, 김판순, 박영기 등이 주축 이 되었다. 이들은 고창 소학교 출신으로 건달이었다. 이들이 미당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집 으로 따라가 당시 최고의 시인에게 서울의 이야기며 문화담을 듣고 읍내에 퍼트렸다. 이들도 경방단원으로 미당에게 연극시나리오를 부탁하니, 미당이 시나리오를 작성해 주었 다. 시나리오는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배척하는 내용의 시나리오였다. 연극단은 고창과 고수에서 하고, 성송에서 공연 하려 하자, 고창 고등계 형사가 냄새를 맡고 급습하 여 이 네 사람이 붙잡혔다. 이들은 붙잡혀 죽도록 맞고, 경방단에서 쫓겨나 해방 될 때까지 군산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해방이 되어 출감하였으나 일찍 죽어 독립운동가가 되지 못하 였다. 미당은 도 경찰국의 일본인이 직접 조사하려 와서 본인이 조서를 꾸며 방면 해 주었 다. 해방이 되자 미당은 서울로 올라갔고, 문화계몽대는 일제 때 까지 있었다. 문화계몽대의 대장은 임창욱으로 경방단 출신으로 일본 동지사대를 졸업하였다. 그의 동생 임방욱은 나영균과 동서지간 이었다. 기획은 이권균이라는 사람이 하였는데, 그는 정읍으로 이사한 후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병현, 김판순, 오인탁(오희균의 장남) 등이 기획을 하였다. 동원부장으로 김방수와 김용환이 있었다. 김방수는 힘이 있었고, 김용환은 드럼을 잘 쳤다. 변주연(변씨연씨 집안 동생)은 말을 잘해 홍보담당을 하였다. 용기나팔로 불리는 슬라이드럼봉을 잘 불었던 정기식이 있었고, 그는 후에 고창의 연예단장 이 되었다. 주연은 늘 장삼봉이라는 트럭운전사가 하였으며, 그는 미남이었고, 잘생겼다. 오근탁은 기타를 잘 쳤다. 서선진도 기타를 잘 쳤고, 그의 아버지 서형남씨는 고창고보 6회 졸업생으로 의학박사로 고창에서 병원을 하였다. 은제패는 하와이언 기타를 잘 켰다. 하와이언 기타는 주로 여자가 켜는 것이다. 출연가수는 박남호였다. 출연과 해설은 오인탁으로 오희균씨의 장남이었는데. 이북으로 월 북한 사상가였다. 그는 시나리오를 해설해주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오인탁은 간첩으 로 갔다가 오희균씨가 붙잡아 자수를 시켜 이 대통령을 찾아 가 용서를 빌어 대통령이 용서 를 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월북하여 오희균씨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이 원장님이 이리농대를 다닐 때 학과장의 사택을 지키고 있었는데, 오희균씨가 찾아왔다. 사택에서 오희균씨와 함께 살며 그는 붓글씨를 썼다. 오희균씨가 이 박사의 친구라 하여 교 수들이 글씨를 사 갔다. 이 원장은 그에게 아침저녁으로 밥을 해 주었다. 오희균씨는 말년 에 장남 때문에 비참하였다. 가수로 이영자, 김춘홍이 있었는데, 이영자는 조양관의 기생이 었다. 이들이 계몽대의 조직이었다. 1945년 9월에 고창 청년동맹계몽대가 만들어 졌고, 1946년 2월 까지 있었다가 사라졌다. 당시 대장은 정석환씨였는데, 그는 박헌영의 건국준비위원회의 고창군인민위원장이었다. 감 찰부장에 곽종식이었는데, 이 사람은 표독한 깡패로 가죽장화를 신고 고창을 마음대로 다녔 다. 그는 우익청년 이었기 때문에 고창청년동맹계몽대를 탈퇴하였다.


선번부장은 최완상의 동생 최금상이었고, 그는 트럼펫을 잘 불었다. 기획과 각본은 김순한이 썼고, 고창에서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하였다. 그가 신극사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곽종식이 이 단체의 성격을 알고 단체를 해체하였다. 김순한이 주동해서 순수하게 연극활동을 위해 만든 것이 서광좌(사)로, 1946년 2월에서 1948년 7월까지 김순한씨가 만들어 공연을 한 것이다. 서광좌는 김순한, 오인탁, 변주연이 만들고, 단장을 오인탁이 하였다. 제정은 최금성 씨가 맡았는데, 그는 간판사, 이발사, 군청 직원을 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총무는 오상진씨가 하였으며, 무대연출은 최금상, 무대장치는 오인탁이 하였다. 각본은 김순한, 출연진은 박남후, 이병옥, 신옥주, 신향초, 이난향, 오순해, 정여인 등 이었 으며, 간부들도 출연 하였다. 악단은 줄포청년단원의 4인조 밴드가 고창으로 와서 이 단체 의 전속으로 활동하였다. 무장면 새치 청년회 연예부의 멤버들로 구성된 팀이 있었다. 이 팀은 1943년부터 1948년까지 존속되었다. 대표자가 정휴열(1918~2002년)이 기타를 쳤 고, 정동희(1916~1951년)와 정휴면(1913~1950년)은 아코디언을 하였다. 정동선(1922~2003년) 색소폰과 슬라이드럼봉을 하였고, 정휴두(1923~1971년)는 고다이코 라는 소북을 잘 쳤다. 새치 청년회에는 자체적으로 악극단을 창단하여 무장 쪽에서 활동하 였었다. 고창의 서광좌가 무장방면으로 공연을 갈 때 이 팀들이 공연을 나왔다. 김순한씨는 둘째부인이 셋이나 있었고, 첫 부인은 원장님 댁에 살았다. 김순한씨가 목욕하 러 가면 서울말 들으려고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그는 미남이라 여자가 많이 따랐다. 이 원 장님이 전북일보에 이치복기자를 불렀다. 1970년대 전북일보의 한 면에 인간 김순한씨의 이야기를 특집으로 내었다. 말년은 아주 비참하여 거지처럼 살았고, 딸들은 다 미인으로 시 집을 잘 갔으며, 아들은 못났다. 고창연극사는 김순한을 빼면 구심력이 없었다. 광복 후 1948년 10월에 고창문화예술협회를 만들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깨졌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창에서 연극가의 활동은 새롭게 전개되었는데, 회장은 클라리넷을 잘 부는 국승 섭씨가 하였다. 트럼펫 최금상, 바이올린 김재한, 슬라이드럼봉 무장의 정동희, 바이올린과 기타의 박형만, 고창병원장의 동생인 기타의 곽정효, 클라리넷을 잘 부는 초등학교 선생님 인 국재일, 소북의 이광태, 배우로는 허금파의 딸 송월향, 창에는 곽종식의 애인 이금화, 신 옥주, 이금화의 동생 이금선이 연기를 하였다. 이들은 정읍과 부안, 김제 일대에서 공연을 하였다. 읍내에 사는 사람들은 1951~1952년까지 고창관현악단을 창단하였다. 최금상의 트럼펫, 박영만, 곽정효, 아코디언의 신세종(신재효의 현손), 클라리넷의 국재휘, 이광태 다음의 소북의 양계환 등이 있었다. 한국전쟁 후 7사단이 고창에 와서 고창고보의 관현악을 하는 학생들 모두 데리고 군복을 입혀 입대시켜 버렸다. 그래서 고창의 맥이 끊겨 버린 것이다. 즉, 7사단 군악대로 들어가서 악대의 씨가 말랐다. 이들이 제대한 후 밤무대에서 유명해졌다. 당시 고창고보의 악대가 유명했는데, 고창의 다 양한 문화활동을 선배들에게 배웠던 것이다. 1951년부터 1953년 3년간 계몽공연단이 대공


선무공적활동으로 활동하였다. 수복 후 빨치산 귀순작전으로 고창경찰서 후원을 받아 구성 되었다. 이 조직은 대한청년단 고창계몽공연단 이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트럼펫 최금상, 바이올린 박형만, 기타의 곽정효, 클라리넷의 국재휘, 색소폰의 이준교, 트럼 펫과 소북의 양기환 등이 있었다. 출연진으로 남자인데 여자 행세를 한 신영희, 살풀이 춤의 대가 은방초, 고창여고 선생이자 클래식 명곡을 부르던 성악가 이동범, 가요의 진국현, 이리방송의 가수이자 신재효의 손인 신경철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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