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사신원을 지나 인천강을 넘다.
『임하유고』(林下遺稿) 갑오 9월조에 “東學輩五六千名自茂長人(仁필자주)川 出來”, 즉‘동학의 무리 5~6천명이 무장으로부터 인천강으로 나와’라는 기록 과 旗幟上大書輔國安民倡義“(기치상대서보국안민창의)라는 기록이 있으며, 『甲午史記』(갑오사기)중“孫和仲喚起東徒數千自仁川江會于”‘손화중이
동도
수천 명을 불러 일으켜 인천강으로 모여’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통해 볼 때, 동학농민군이 바로 이곳 사신원과 계산을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 신원은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에 있다. 계산리는 법정리인데 편의상 1구와 2 구로 나뉜다. 1구는 부정(부정ㆍ지산ㆍ새터ㆍ병암)이고, 2구는 사신원ㆍ계산 ㆍ비석촌이다. 사신원은 고창읍에서부터 서편으로 직선거리 약 9.25km의 지점에 위치하 고 있다. 사신원은 북편과 남편에 작은 산이 자리 잡고 있어서, 동서로 골이 형성되어 있는 듯한 형상이다. 사신원 서쪽에 있는 산이 배바우이고, 북쪽은 뒷산(조씨 선산)이고, 남쪽은 앞산이라 부른다. 따라서 이 마을은 사철 골바 람이 세게 부는 곳이다. 특히 계산제(최근에 조성된 저수지)가 있는 곳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이 강하였다.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매우 춥게 느껴진다. 최근 마을 앞에 시정(정자)을 만들어 놓았는데 항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잠 깐만 앉아 있어도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이 시정에서 여름이라도 밤에는 오 래 누워 있지를 못한다. 그만큼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분다는 것이다. 다만 계 산제가 들어선 뒤로 바람이 약간 약해졌다. 계산제 둑이 골바람을 일정 부분 차단하기 때문이다. 마을의 서쪽에서 내려오는 물과 북서쪽 계산제에서 내려 오는 물이 만나서 형성되는 사신원천은, 동쪽으로 더 내려가서 인천강(仁川 江)으로 흘러간다. 사신원마을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부근에 있는 고인돌이 말해준다. 고인돌은 대개 가까이에 물이 넉넉하고 농경지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신원마을 주변에 있는 고인돌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이곳은 앞뒤로 산이 자리잡고 있어서 마치 동서로 긴 회랑 같 은 자연지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지형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왕래하기 쉬운 교통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이 드나들던 교통의 흐름과 같이하며 이곳에 누군가에 의해서 정착이 시작되었 던 모양이다. 이는 이곳의 자연지형과 고인돌의 존재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 다. 고인돌의 존재로 인하여 적어도 이곳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것이다.
고인돌을 만든 사신원의 먼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살던 곳의 자연지형을 의 식하며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고인돌을 사신원마을 사람들은 그냥 ‘바우’(바위)라고 불렀다. 문자로 기록되어진 사신원의 흔적은 신증동국여지 승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신원(四信院)은 무장현의 북쪽 18리 지점에 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중종 25년인 1530년 에 편찬되었다. 따라서 사신원마을은 이 책이 편찬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 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사신원의 행정상 주소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 사신원’이지만 조선 전기에는 전라도 무장현 관할이었다. 원(院)은 국가 교통로의 주요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그 원이 있던 자리가 어느 곳인지 궁금하다. 토박이들은 김영임의 집과 옛 시정 사이가 ‘원터’ 또는 가마가 자 고 가던 ‘원집’이라고 말한다. 일제 말기에 누가 묘를 쓰기 위해 명당이라고 하던 곳을 팠더니 집터가 나왔다. 바로 그 집터가 원터라는 것이다. 또한 방 재춘의 집 바로 동편을 ‘몰방죽’이라고 부르고 있다. 몰방죽은 원터에 드나들 던 말이 물을 마시던 방죽이라고 한다. 이 방죽의 크기는 현재 새 시정의 절 반 크기였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가 않았다. 현재는 메워져 사라지고 없다. 사신원 본래 터가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지만 토박이들의 구술이 참고 된다. 그런데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토박이들은 사신원의 한자 표기를 ‘使臣 院’이라 쓰고 있고, 옥천조씨(玉川 趙氏) 족보에도 ‘使臣院’이라 쓰여 있다. ‘四信院’이라는 한자 표기를 이구동성으로 처음 본다고 말한다. 아무튼 현재 거주하고 있는 이들의 조상들을 조사하면 이 마을의 역사에 대해서 좀더 많 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을은 원래 옥천조씨가 제일 먼저 터를 잡 고 살았다. 현재 확인 가능한 사신원마을의 첫 입주 성씨는 옥천조씨이다. 또한 옥천조씨로서 고창군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이가 처음 둥지를 튼 곳도 사신원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옥천조씨를 일명 사신원 조씨라고 부르기도 한 다. 사신원에 맨 처음 정착한 이는 조덕린(趙徳隣)이다. 조덕린이 1595년 임 진왜란 시에 사신원에 와서 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재 사신원에 거주하는 사 람들 중 조씨는 생존해 있지 않고 조씨들의 미망인들은 여러 명 생존해 있 다. 최근까지도 조씨들이 많이 살았다하므로 옥천조씨 덕린 이후에 계속해서 사신원에 사람들이 거주하였다고 단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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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신원마을 전경
사신원에는 당산나무가 동서에 각 한 그루씩 두 그루가 있었다. 둘 다 팽 나무인데 동쪽에 있는 것을 앞당산이라 했고, 서쪽에 있는 것을 뒷당산이라 했다. 정월 보름 저녁에 농악을 하면서 줄을 감아 놓는다. 만약 정월 보름날 이 좋지 않으면 2월 초하루에 했다. 짚으로 만든 줄의 굵기는 집 기둥 정도 되고, 길이는 50m 정도 되었다. 그 줄을 당산나무에다 감아 놓았던 것이다. 나무보다 더 컸던 앞 당산나무는 익산에 거주하는 조우철 소유의 논에 있 었으나 경지정리하면서 베어졌다. 뒷당산도 나중에 없어졌다. 조사자 생각에 양 당산나무 사이에 마을이 있으므로, 두 당산은 마을을 양쪽에서 보호하는 형세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앞 당산나무가 베어지고 난 뒤에 젊은 사람들이 아프기도 하고 또 는 죽기도 하는 등 안 좋은 일들이 생겨서 다시 당산을 모시기로 하였다. 그 래서 조씨 재실과 옛 시정 사이에 있는 현 위치에 팽나무 당산대신 돌 당산 을 세운 것이다. 아마 동학농민혁명군이 이 마을을 지나면서 이 당산과 인천 강 변에서 쉬었다 갔을 것이다. 앞 당산나무의 북쪽 가까운 곳이다. 높이는 어른 가슴팍 정도 된다. 아무튼 그 뒤로 질쌈제와 당산제를 올리게 됐다. 원 래는 당산제만 올리던 것을 질쌈제까지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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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신원마을 당산
뒷당산 남북에 산이 있는 사신원마을에서 서쪽으로 통하던 길은 앞에서 설 명한 무장장과 해리장으로 가던 길이다. 동쪽으로 통하던 길은 세 갈래가 있 었다. 세 갈래 중 맨 북쪽에 있는 길은 몰방죽 → 원터 → 조씨 재실 → 덕 철뫼 밑으로 통해서 부정마을로 가는 길인데 제일 오래되었다고 한다. 조사 자 생각에 이 길은 가장 빠르게 바다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이다. 주로 계산마 을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맨 남쪽에 있는 길도 계산마을과 연결되는 도로인 데 현재 주 통로로 사용하는 길과 비슷하지만 경지정리로 인하여 약간 변동 되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확장되었다. 사신원마을에는 주변 마을 사람들도 잘 아는 전설이 하나 있다. 가까운 인 천강에 보가 두 개가 있었다. 웃보와 아랫보가 그것이다. 아랫보(또는 웃보) 가 밤낮 터져서 애기를 사서 넣고 보를 막으면 튼튼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리했는데 그 뒤로 보가 터지지 않았다. 애기의 어머니가 사신원마을 서쪽 에 있는 바위 밑에서 애기를 팔아서 받은 돈을 세고 있는데 벼락이 쳤다. 벼 락이 바위를 치자 바위가 깨지면서 애기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 바위를 깨진 바위라고 한다. 위 전설은 구술하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다소 차이가 있다. 아무튼 깨진바 위는 전설처럼 깨진 채로 사신원마을의 서편에 있으며 예전에 해리장을 갈 때는 이 바위 앞을 지나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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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깨진바위
사신원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계산이다. 본래 고창군 산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산리, 부정리, 비석리, 사신리, 병암리, 내독리 일부를 병합하여 계산리라 해서 아산면에 편입되었다. 계산 마을의 동쪽에는 비석촌이 있다. 남북으로는 산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 마을 도 역시 사신원처럼 동서 방향으로만 통행이 가능한 곳이다. 이 마을은 남쪽 에 있는 산을 뒷산이라고 부르는데 그 산이 바로 계산(鶏山)이다. 계산은 닭 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계산마을의 이름은 바로 이 산 이름에 서 비롯된 것이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곳은 명당으로 꼽는다. 계산마을은 겨울에 북풍이 심하게 분다. 바다의 영향인 듯 겨울바람 은 사신원보다 강하다. 계산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사신원마을의 역사를 미루어 볼 때 역시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신원마을 이 바로 이웃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추정이 허락된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그것은 아래에서 설명할 청자 유물 산포지가 이 마을에 있기 때문이다. 계산마을은 사신원마을과 같이 계산리에 속해 있지만 문상이나 다니지 별 로 교류가 없다. 그 이유는 사신원 조씨들은 학전리에 사는 같은 조씨들과 교류하고, 계산마을 광산김씨들은 원평의 같은 김씨들과 교류하기 때문이다. 계산마을의 시정에서 동쪽의 비석촌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꺾이는 오르막
시멘트길이 있다. 바로 뒷산(계산)에 오르는 길인데 약 200m쯤 걸으면 시멘 트길이 끝난다. 바로 그 시멘트길이 끝나는 지점에 청자편들이 다수 보인다. 용계리 청자요지는 계산마을에서 인천강을 건너 부안 쪽으로 걸어가던 길목 에 있다. 초기 청자 생산지였던 용계리 청자요지와 말기 청자편들이 보이는 계산마을의 청자 유물산포지는 인천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인천강을 빠져나 가면 곰소만에서 부안군의 유천리ㆍ진서리 청자요지와 뱃길로 연결된다. 이러한 뱃길은 동학농민군들의 진격로와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마 동학농민군을 지원하기 위한 부대들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인천강 또는 주진천 : 인천강은 노령산맥 서사면인 전북 고창군 고수면 은사 리 칠성마을 맹매기샘에서 발원하여 31km에 걸쳐 흘러 서해안 곰소만으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방등산, 벽오봉, 문수산, 구황봉, 고산, 삼태봉, 산운산, 소요산, 화시산 등 명산을 따라 흐르며, 맑은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고창읍 을 관통한 후 줄포만으로 흘러든다. 명종 때 이퇴계 선생의 문하에 있던 변 성진이 이 강의 경치에 매료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일품이다. 유로는 발원 지 일대에서 북쪽으로 흐르다 향산리 · 괴치리를 지나 낙양리 소보 마을 앞 에서 평지천을 합류한다. 아산면 주진리의 주진 마을 앞에서 강남천을 합해 잠시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흐르다 하갑리의 아산교(하갑교) 아래에서 고 창천과 합류한다. 계산리의 비석 마을 앞에서 두월천을, 반암리의 영모정 마 을 앞에서 용산천을, 삼인리의 삼인교 인근에서 선운천을 각각 합류한다. 이 렇게 흐르는 강물은 부안면 선운리의 구룡동 마을 앞에서 서해의 곰소만으 로 들어간다. '주진' 지명은 하천을 이루는 여러 물길의 합류처가 주진(舟津, 배날)이기 때문에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무장천(茂長川)이라고도 부르는데, 하천의 발원지나 그 유역이 대체로 조선 시대 무장현 지역에 속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향토지에 의하면 판교천(板橋川), 이진천(梨津川)으 로도 불린다고 하는데, 고창천을 합류한 이후의 구간은 특히 인천강(仁川江) 또는 태천(苔川)으로 그리고 두월천, 용산천, 선운천 등을 합류한 하류 구간 은 장숙강 또는 장연(長淵)으로 구간마다 다른 이름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 다. 『한국지명총람』에 소개된 인천강 또는 장수강(長水江)은 곧 현재의 주 진천을 말하는 것이다. 인천강 하구지역은 갯벌과 염생식물 군락이 잘 발달 해 있어 하류지역에서 황새, 검은목두루미 등 멸종위기 야생동물 10종이 서 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다양한 멸종위기조류가 도래하는 것을 비 롯해 저서성무척추동물상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나타나며, 자연성이 잘 유지 되고 있어 학술적 보존가치가 높은 곳으로 야생의 보고’라고 알려져 있다.
위와 같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인천강은 특히 풍천장어로 유명하다. 예 로부터 고창 지역에서 잡히는 장어를 가리켜 '풍천장어(風川長魚)'라 했다. 풍천은 고창의 젖줄 인천강 민물이 짠물과 섞이는 하구를 가리키는 말로 곰 소만과 만나는 인천강은 바다와 민물이 섞이는 구간이 무려 10km가 넘기 때문에 산란기의 장어가 짠물에 적응하는데 매우 훌륭한 환경을 갖추고 있 다. 이곳은 바닷물의 염도가 높아 장어의 맛이 더욱 좋으며, 풍부한 갯벌의 영양과 담수의 교차로 장어 서식지로 최적이다. 이곳 풍천에서 잡히는 장어 는 약재로 쓰일 만큼 영양가가 높고 맛도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