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성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흥덕현감 이용제(李容濟)공 고창현감 문희개와 무장현감 이람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고창지역으로 들어오자 몸을 피 해 한 사람은 고향으로, 한 사람은 섬으로 도망쳤다.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적군이 오자 도망가는 상황이 고창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필자는 고창의 임진왜란사를 조사하면서 옛 고창지역의 위와 같은 수령들의 행동이 이해는 가면서도 매우 부끄러웠다. 그런데 얼마 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임진왜란의 치열한 격전장이었던 남원 성과 교룡산성 및 이 전투에서 사망한 분들을 모시고 있는 만인의 총을 찾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만인의 총에서 참배를 하고 난 후 기념관으로 향했다. 필자는 기념관 앞에는 팔충신 사적비가 있어 안내판을 읽고 있는데, 그곳에 흥덕현감 이용제라는 분이 눈앞에 보였다. 흥덕현감 이용제공은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나, 공의 사망연대는 정유재란의 남원성전투 시 기(8월 13일부터 16일)인 1597년이다. 공의 자는 여우(汝優),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공은 1591년(선조 2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순변사(巡邊使) 가 되었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역임하였다. 1597년 흥덕현감(興德縣監)으로 부임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공은 왜군이 재침하자 원균장군 휘하의 수군에 합류한 듯하다. 흥덕현은 고려시대 고부군의 임내였다가 뒤에 장덕현으로 바 꾸어 감무관을 두면서 고창현이 편입되었다. 1401년(태종 1) 고창현이 분리되고 왜구의 침 입이 잦았던 곳이라 진(鎭)을 설치하여 병마사가 판현사(判縣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1417 년 진이 부안현으로 옮겨지면서 현감을 두었다. 흥덕현의 사진포(沙津浦)에는 해창(海倉)이 있어 이곳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내보냈다. 아마도 공은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공하자 사진 포의 배들을 이끌고 전라좌수사군에 합류한 것은 아닐까 사료된다. 이용제공은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의 통제사인 원균의 휘하에서 공을 세운다. 공의 기록은 선조 30년 정유(1597) 3월 19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있다. “----임치 첨사(臨淄僉使) 홍견(洪堅), 흥덕 현감(興德縣監) 이용제(李容濟)로 하여금 당화전(唐火箭)과 송거(松炬) 등으로 적선에 불을 지르도록 하여 왜적들이 모두 배에서 뛰어내려 육지를 향해 헤엄칠 때 사살하고서 그 시체를 건져 목을 벤 것이 도합 18급(級)이었다.-----”라는 기록 이다. 이후 원균의 조선수군이 1597년 7월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하자 공은 육군 으로 간 것 같다. 공은 수군이 무너지자 바로 조선를 침공한 왜군을 피하지 않고 육군에 배 속되어 왜군과 끝까지 항전하였다. 남원성전투는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에서 벌어진 조․명연 합군과 왜군의 전투이다. 남원성은 지리적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충 청도와 경기도로 들어가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왜군이 구례를 점령하고 남원으로 북상하고 있을 때, 남원에는 명(明)의 부총병 양원(楊元)이 3,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다. 양원은 왜군이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에게 조선 군의 증원을 요청하여 관군 1,000명을 받아 4,000여 명의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에 일본군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린 5만 6,000여 명의 대병력이었다. 조명 연합군과 왜군은 1597년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치열하게 전투를 전투하였다. 조명연합군 은 왜군과 치열하게 싸움을 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남원성의 함락 소식을 들은 명군은 전 주성을 버리고 달아나 일본군은 남원을 거쳐 전주를 무혈로 점령하였다. 남원성 전투의 패 배로 인해 호남과 충청 지방의 일부는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흥덕현감 이용제공의 기록이 1872년(고종9)에 세운 팔충신 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선조 30년인 정유재란(1597)이 끝나고 15년 후인 1612년(광해4)에 남원부 인사들이 당시 충렬 을 추모하기 위하여 성안 동쪽에 사우를 세웠다. 사우에는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남원부사 임현(任鉉), 전라방어사 김경로(金敬老),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 판관 이덕회(李德恢),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 등 7충신과 따로 손공생(孫貢生)의 위폐를 모시고 춘추로 제사 지내왔었다. 이후 사현부지평 오흥업(吳興業)을 추배하니 8충신이 되었 다. 1840년(현종6)에 따로 집을 세워 손공생과 함께 의사 박기화를 배양하였다, 팔충신 외 에 흥덕현감 이용제(李容濟), 순천부사 오응정(吳應鼎), 도총부도사 정민득(鄭敏得), 의사 오 윤업(吳胤業) 전라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의사 형련(邢璉), 진안현감 마응방(馬應房), 정능참 봉 황대중(黃大中)의 사적이 함께 실려 있다. 흥덕현감 이용제공은 나주의 정열사에 김천일 (金千鎰)의병장과 그의 아들 상건(象乾), 양산숙(梁山璹), 임회(林檜) 등과 함께 위패가 봉안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