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高敞)의 지명어원은? 우리 고장 고창(高敞)의 어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자의 뜻과 석 독 및 이두를 종합해 이해해야 가능할 듯하다. 먼저 고창의 변천된 한자를 마한과 백제 및 남 북국시대순으로 대응하면, 牟伊 = 牟盧 = 毛良 = 高와 部曲 = 卑離 = 夫里 = 敞이다. 고창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단종 2년, 1454년), 동국여지지(현종조, 연대미상), 신증동국여지 승람(성종 12년 1481년), 여지도서(영조 36년, 1760년), 나주진관고창현읍지(1793년 계축지와 동일), 호남읍지(고종 8년, 1871년) 등등이다. 그 중 나주진관고창현읍지의 건치연혁을 보면, 本馬韓牟伊部曲百濟改爲毛良夫里縣新羅改令名武靈郡領縣....., 동국여지지에는 本百濟毛良夫 里縣新羅景德王時改高敞爲武靈郡領縣으로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을 보면, 마한 때의 고창은 牟伊部曲(牟盧卑離國)이었고, 백제 때 모양부리현(毛良夫 里縣)으로 개명되었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경덕왕 때 고창현으로 개명하고 무령군(지금 의 영광)의 속현이 되었다. 고창이라는 지명이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신라가 당나라를 등에 업고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인 신라 경덕왕 16년(757년)때이다. 지명을 개명할 당시 「삼국사기」신라본기 경덕왕조에 “15년(서기 756) 봄 2월 상대등 김사인은 괴이한 재해가 번번이 일어나므로 상소하여 시정의 득실을 논하자 왕은 기쁘게 받아들였다”라 는 기록이다. 경덕왕이 전국의 지명을 개명하기 이듬해 김사인(金思仁)은 상대등에서 물러났 다. 대신 왕의 측근인 이찬 신충(信忠)이 상대등에 임명되어 친정체제를 구축하였다. 그간 시 중으로 김사인의 비판을 받던 김기(金耆)는 757년부터 적극적으로 한화(漢化)정책을 추진하였 다. 김기와 경덕왕은 757년 겨울 지방 9주 5소경 117군 293현에 대한 명칭을 대대적으로 명 칭을 개명하였다.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개명하였던 것이다. 牟伊 = 牟盧 = 毛良 = 高 고창지명의 어원에 대해 이기화선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고창의 해안선에는 갈대가 많 고, 내륙은 구릉성산지로 이루어졌다. 고창이라는 고을은 보릿고개의 동산이라는 뜻의 모양현 이라 하였다. 즉, 보리가 평야를 뒤덮인 보릿고을의 고창으로 바뀌었다. 또한 모양은 모랑이, 몰랭이, 말랭이 등과 같이 모두 능선을 말한다고 한다. 따라서 고창은 높고 넓은 들에 보릿고 개라는 뜻이라 하였다. 백제까지는 모양(毛良)이라 하였고, 남북국시대는 모양의 뜻을 죽이고 높고 넓은 들로 바꾸어 고창으로 하여 뜻만 살렸고, 부리는 들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도수희선생은 모양(毛良)[muraŋ(무랑)~təraŋ(터랑)<təra(터라)]은 고(高)의 대응을 보여주어 백 제어에서 ‘高’의 의미로 ‘毛良’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毛良’이 전적으로 음독(音讀)할 것인지 아니면 부분적으로 석독(釋讀)을 할 것인지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석독에 의해 ‘毛良’ 을 해석하면 tər(터)라고 한다. 중세국어의 ‘털’(터럭모 : 毛)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毛’ 의 해석이 tər(터)일 가능성은 철원군의 철(鐵=毛乙)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철의 고음이 t'iet(董), 동국정음 뎛, 즉 (쇠)텰이기 때문에 毛의 해석을 tyər~tər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毛良=təraŋ(터랑)<təra(터라)로 해독할 수 있고, 이는 고구려어인 tar(達)=高에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반면 muraŋ(무랑, 毛良)은 중세국어의 와 거의 일치하며, 이는 신라어에서도 발견된다. 部曲 = 卑離 = 夫里 = 敞 夫里 유래는 우리 민족의 태양숭배사상이 담겨있는 말이다. 즉 밝(神明), 벌(伐, 弗, 火, 夫里),
明, 昭, 朴, 泊, 百, 白, 貊, 角(뿔) 등의 한자로 나타난다. 이는 다양한 언어로 파생되어 우리 민족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즉 고창의 옛 접미어인 部曲・卑離・夫里는 우리민족 의 태양숭배사상의 흔적으로 마한도 결국 북쪽에서 흘러들어온 북방계이기 때문에 북방언어로 추정된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우리 조선에서는 불을 사랑하여 사람 의 이름을 ‘불’이라 지은 경우도 많은데 부루(夫婁), 품리(稟離) 등이 다 ‘불’의 음역이다. ‘불’ 이라 지은 지명인 부여(扶餘), 부리(夫里), 불내(不耐), 불이(不而), 국내(國內), 불(弗), 벌(伐), 발(發) 등이 다 ‘불’의 음역이다”라고 주장했다. 부여(夫餘)는 사슴을 뜻하는 만주족말 'puhu', 몽골말 'pobgo'로, 이는 평원, 강 이름, 산 이 름 등에서 비롯한다는 자연지리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는 말이다. 부리(夫里)라는 말도 부여와 같이 태양숭배의 언어로, 부리(夫里)는 그 이전 마한의 비리(卑離)라는 형식과 대응되는 말이 다. 백제는 비리(卑離)를 부리(夫里)로, 신라는 부리의 ‘벌’을 ‘원(原)’으로 한역(漢譯)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모양부리의 부리는 ‘원(原)’의 한역을 따르지 않았다. 고창(高敞)은 태봉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명 그 이유는 당시의 중심지인 예지리토성(태봉)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지명에 원(原)을 쓴 경우는 주로 하천중상류의 산간내륙분지지역을 이르는 곳과 군사행정상의 중요 거점인 경우가 많다. 고창의 경우 분지이기는 하지만 산간지방에서 보는 것과 같이 높거나 험한 산이 아니고, 또한 군사행정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 아닌 변방이었기 때문에 ‘벌’을 뜻하는 원(原)을 붙이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이 지역의 자연적인 지역특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양부리현은 다른 곳에 비해 결코 높은 지대에 펼쳐진 지역은 아니었지만, 태봉(110.8m)
주변은 낮은 구릉성 산지와 고창천과 주진천이 만들어 놓은 넓은 충적지
가 발달해 있었다. 즉, 태봉은 구릉성 산으로 낮지만 주변에 비해 높게 보이고 모양의 어원이 높다는데 착안하여 고(高)자로 개명하고, 창(敞)자는 이곳에 오르면 모양부리의 넓은 들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 에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창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은 백제의 색을 완전히 지우고 중국식의 두 자 지명으로 개명한 한국사의 어두운 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