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과 쌍나발등의 마을, 상갑리 강 희 석, 이 병 렬 1. 상갑의 위치와 유래 고창의 주산인 방장산 서쪽으로 5개 읍, 면 냇물이 모여 인천강을 이루고 고성산(태봉, 고수면과 아 산면 경계) 한 자락이 서북으로 내려감아 멈춘 곳에 아늑한 터를 마련한 큰 마을이 있으니, 바로 갑
평(甲坪)이다. 예로부터 갑평은 고창 고을의 명지로 일도산(一道山), 이갑평(二甲坪), 삼독실(三篤室)이라 일컬어졌다. 갑평은 비산비야로, 전답이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하여 부 촌으로 이름이 났다. 마을 앞 석치산 산성터는 삼국시대 유적이고, 그 아래 있는 세계문화유산 고인 돌군은 선사시대의 유적일 터, 곧 이 마을이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진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갑평리는 1895년 이전에는 대아면(大雅面)에 속한 하나의 리(里)였고, 1914년 행정개편에 의해 상갑 리와 하갑리로 분리되었다. 상갑리(上甲里)는 고창군 대아면의 서당촌(書堂村), 사은재, 지리냉기의 각 일부를 합병하여 법정리인 상갑리가 되었다. 법정리인 상갑리에는 자연취락으로 상갑평(上甲坪)과 서 당촌(書堂村) 및 지리냉기(석치石峙) 등이 있다. 본래 고려시대의 갑향(甲鄕)1)이었는데 발음이 잘못 전 해져 갑평(甲坪)으로 불렸다가, 1910년 갑평 윗쪽 마을이라고 해서 상갑리로 바뀌었다.2) 갑평(甲: 첫 번째, 坪: 들판)이라는 이름은 ‘들판이 넓고 좋아 으뜸이 된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이름에서
이 마을이 고창에서 첫째가는 들판임을 알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강순(姜恂, 호 淸溪公)의 중시조 강계용[博士公, 고려 원종 국자박사]의 선영이 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甲山)에 있어 ‘甲’자를 따와 ‘甲 坪’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갑평은 발음이 어려워 갑평->개평->개패이로 흔히들 바꿔 부르고 있다. 갑평이 수백 년 이상의 유서 깊은 마을이라는 것은 마을 입구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장정 두 사람이 손을 잡아야 둘레를 안을 수 있을 만큼 크다. 또 갑평리 들판 앞에는 기원전 5세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의 수많은 유적들이 석치산 자락에 산재해 있 다. 또한 마을 앞 언덕 너머에는 마한시대와 백제시대의 작은 언덕과 같은 큰 묘[大墓]가 여러 개 자 리하고 있다. 이는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모여 풍요를 누리며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갑평은 삼한시대 고창의 모로비리국의 중요한 거점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며, 고려시대에는 갑향(甲鄕)이 있었는데 와음되어 갑평으로 불려왔다. 갑평리(상갑리, 하갑리, 서당리)는 아 산면의 중심을 이루는 소재지이고 아울러 고창군의 중심으로서 고창읍, 선운사, 무장, 영광을 잇는 교통의 중심이 되고 있다. 서당촌은 원래 갑평의 ‘작은 똠’이라고 불렸다. 1780년경 강근(姜槿, 만회당)은 이곳에 서당을 열어 훈학하였는데, 그의 높은 학식과 경륜이 인근에 알려지게 되어 그에게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문하생 중에는 이곳으로 이사 온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참의 정재룡, 참판 정성일3)도 1)
갑은 음독하여 갓[邊]과 통하는 것으로 보고 갓마을[邊城-변두리마을]이라 하기도 하고, 갑을 대(大)로 보고 ' 큰마을'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갑의 자전적 의미는 10간의 첫 글자로서 수(首)=시(始)=초(初)와 같고, 차례와 등급의 첫째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어의를 그대로 살린 '첫째 마을', '첫마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향·소·부곡의 사람들은 일반 적인 양민과 달리 그 신분이 노비(奴婢)·천민에 유사한 특수한 열등계급이었다. 그 발생은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정복전쟁(征服戰爭)에 패배하였거나 투항 또는 귀순한 집단지, 촌락 본래의 형태인 공동체의 보존과 사회계층의 분화 에 따른 예속관계와의 대립·모순, 또는 반역죄인의 집단적 유배지, 귀화인의 집단부락, 기타 특수한 생산노비의 집단 거주 등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회발전에 따른 공동체의 통합과 붕괴, 계급분화에서 야기된 것으로 이해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조선 전기에는 13개의 향·소·부곡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그 이전에 있던 것으로 파악된 것은 향 138, 소 241, 부곡 406 등 모두 785개가 있던 것으로 전한다. 향·부곡은 대체로 같은 것으로 보이며 농업생산에 치중하였으나, 소는 수공업 생산을 담당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2) http://m.grandculture.net/contents.aspx?use=&ct=B&ctid=B00005&contid=GC02800228&mod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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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문하생이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마을이름을 ‘서당촌’이라 부르게 되었고, 1990년에 상갑리에 서 분리되어 ‘서당리’라 불리게 되었다. 서당촌에는 자연취락으로 사은재라 불리는 마을이 있으나 서당촌과 분리하지는 않는다. 다만 서당촌에서 고창 읍내로 가는 고개인 사은재(士隱)의 이름을 따서 사은재 마을로 불린다. <사진 1> 상갑마을 표지석.
2. 상갑리의 진주강씨(晉州姜氏) 입향조와 내력 갑평리에는 원래 옥천조씨가 많이 살았는데, 1640년경 진주강씨가 정착하여 세거하면서 강씨 집 성촌이 되었다. 갑평리의 역사는 강순(姜恂)이 입향한 이후의 진주강씨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 니다. 강순은 참판공 강징(姜澂, 조선 중종 예조참판)의 현손으로 한양 장의동(莊義洞)에서 사대부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히자, 동지와
가동 100여 명
을 데리고 싸움터로 가던 중 청나라와 화친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통분함을 참지 못하 며 삶의 의욕을 잃고 지내다가 청나라가 지배하는 한양에서 살지 않겠다고 하여 정처 없이 남으 로 내려오다가 고창 고성산 아래 복죽리에 처음 정착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인근의 갑평리로 다 시 자리를 옮겼다(1637년). 강순은 갑평에 정착한 뒤, 주자를 섬기며 세상의 사치와 명리에는 뜻 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충효를 실천하며 은거하였다. 공은 “청나라 지배 하에서는 벼슬에 나가지 않겠다”며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면서 스스로 청계일인(淸溪逸人)이라 하였다. 그리고 후손들 에게도 벼슬에 나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풍수적으로는 당시 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 (金鷄抱卵) 형국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3. 상갑리의 자연환경과 지명 아산면 상갑리의 산계(山系)는 전북과 전남의 경계가 되는 호남정맥(湖南正脈, 노령산맥)의 구황산 (500m)에서 북쪽으로 두평천(조산저수지)을 따라 뻗어 내린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는 조산저수지 동쪽
으로 두고 고수면 부곡-장두를 지나 아산면 남산-우평을 지나 태봉(110.9m)을 이루며, 중복과 상복 을 지나 갑평리에서 멈춘다. 이 산계는 중월리 상복(상갑저수지)에서 북쪽으로 두 갈래로 나뉜다. 상갑저수지의 서쪽 산줄기는 북쪽으로 가다가 동서로 나뉘어 청계정사가 있는 상갑과 면소재지가 있는 하갑을 이룬다. 상갑소 류지의 동쪽 능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산줄기 서쪽 아래에서 서당촌을 이룬 후 멈춘다. 이 산줄기 의 동쪽에 서당제와 봉덕리 고분군이 있다. 상갑리의 수계(水系)는 산계와는 반대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다가 고창천과 합수한다. 상갑리는 고창 천이 주진천에 합수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고창의 대표적인 두 하천의 합수로 인해 상갑리는 늘 물이 넘치는 곳[汎濫原]이기도 하였지만, 물이 넉넉하고 물의 범람으로 토양은 늘 비옥해서 선 사시대부터 고창 고대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굄바우(支石, 고인돌) : 똘치산(석치산, 성틀봉) 밑에 있는 고인돌. 똘치산 자락에 세계문화유산인 고 인돌 군집지가 있음. 기매산(蟹山) : 상갑마을의 바로 앞의 남쪽에 있는 구릉. 똘치산[石峙] : 지리냉기에 있는 산. 사은재(士隱齊) : 상갑리에 있는 고개.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름. 3)
개암사 앞 보령원(保寧院) 안에는 김유신(金庾信) 장군 유적비(遺跡碑)가 있다. 이 비문은 1863년 참판(參判) 정 성일(鄭誠一)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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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갑저수지(上甲貯水池, 개팽이방죽) : 상갑과 서당촌의 남쪽 골짜기에 있는 저수지. 방죽밑들 : 상갑저수지 아래 상갑과 서당촌 사이의 들. 반월등 : 사은재마을 앞이 풍수적으로 실을 꿰는 구멍으로 명당이었다고 함. 하지만 도로가 나면 서 산이 잘려 명당이 죽어버렸다고 전함. 서당제(書堂堤) : 봉덕리 고분의 서쪽에 있는 저수지. 석치(石峙, 石峯) : 똘치산이라 부르는 산. 산 정상은 성틀봉이라 한다. 석치는 또한 지리냉기로 불리 는 고개를 뜻하기도 함. 쇠매등(뜽) : 상갑과 하갑의 경계가 되는 능선. 지리냉기[石峙] : 상갑리 앞 들판에서 하갑리 독골로 질러가는 고개. 쌍나발등[古墳] : 상갑리마을 앞 작은 언덕 너머에 있는, 작은 야산처럼 보이는 2개의 고분을 말 한다. 예부터 왕들의 무덤이라 전해왔으며, 2009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발굴하여 금동 신발 등 수십 점의 마한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마한시대 때 이 지방의 부족국가 모로비리국 부 족국가의 왕의 가족묘로 추정되고 있음. 청사들 : 상갑리 북쪽의 넓은 들이다. 청사들은 고창천이 주진천과 합수하여 만들어낸 범람원으로 토양이 비옥하고 물 걱정이 없는 들임.
4. 마을의 인물과 행적 1) 강순(姜恂, 1607~1674) : 호는 청계(淸溪) 또는 청계일인, 강징(姜澂, 중종조 예조참판)의 현손이다. 선비로서 서울 장의동에 살다가, 병자호란 당시 일족과 동지를 이끌고 참전했으나, 화친의 소식을 듣고 남으로 내려와 고창에 정착하였다. 강순은 고창군 아산면 갑평리 진주강씨의 입향조이다. 2) 강수중(姜守重, 1841~1919) : 공의 휘는 수중(守重), 자는 성지(成之), 봉암(鳳巖)은 자호다. 관향은 진주이고 아산면 갑평리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기는 절차와 어른 공경하는 도 리를 알아 행하기를 성인과 같이 했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거상(居喪) 삼년을 마쳤다.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데는 그 성경을 다했고, 종족과 인척에게는 은의가 두루 흡족하여 각기 그 도를 얻으니 향리 에서 모두 그 선행을 칭송했다. 지기가 헌활(軒豁)하고 소절에 구속되지 않으며 강개 호의했다. 공은 갑오년(1884)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호남의 부군현의 사림이 공을 추천하여 수성의 책임[高敞縣 守城將]을 맡게 되었다. 기해년(1899)에 영학당(英學党)이 난을 일으키자 고창고을 원님 정윤영과 의맹
을 만들고 다시 수성군의 책임을 맡았다. 공은 호남의 사림에서 여러 번 천거하여 을사년(1905) 후릉 참봉에 제수되고, 가선에 올랐다. 3) 강창영(姜昌永, 1889~1979) : 자는 성숙(成淑)이며 호는 위은(渭隱), 공은 대대로 전해오는 문한가에 서 태어났고 이웃 마을의 석학, 농와(農窩) 김상준(金相晙)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통탄하며 세상과 교섭을 끊고 오로지 시문에만 정진하였다. 을유년 광복을 맞아 면민의 추대로 독립 촉성회에 참여하여 면의 책임을 맡았고, 금융조합장과 면장에 임명되어 진실과 검소함으로 봉직하였 다. 재직 당시 한발이 심해 전곡이 고사하게 되자 면민과 목욕재계하고 기우제를 지내니, 그날 밤에 비가 내렸다고 하여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6·25동란이 끝나자 면민의 추천으로 구국연맹위원장이 되어 많은 인명을 구제했다. 만년에 그가 아산중학교를 세울 때 4,300평의 대지를 기증하는 등 후진 교육에도 진력하며 향민의 귀감이 되었다. 1979년 향제에서 고종하니 향년 91세이고, 유고가 『독곡 세적(篤谷世蹟)』에 합철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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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호영(姜浩永, 1890~1965) : 자는 직경(直卿), 호는 극재(克齋)로, 국운이 기울어 가던 때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절에 성장했다. 노사와 송사의 학통을 이은 부친 절암공(節庵公)과 백형 태영 (泰永) 밑에서 가학을 이어받아 경전과 사서에 능통했다. 그는 인근의 명유 석학들인 오암 조석일,
흠재 조덕승, 미산 변종혁, 보정 김정회 등과 교류하며 경전을 강론하였다. 27세 때부터 한시를 지 었으며, 저서로 『극재유고(克齋遺稿)』 2권 1책이 있다. 그의 유고에 한시가 750여 수 문장이 70여 편 수록되어 있다. 5) 강계흠(姜桂欽, 1904~1989) : 자는 은초(隱招)이며 호는 근곡(槿谷)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향학에 탁 월하고 부모와 어른 모시기를 스스로 알아서 행하니 서당 선생이 장차 크게 될 사람이라 칭찬했다. 가정에서는 부모님 병환에 대소변을 받아내고 손수 수발하며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다. 문중에서는 규약을 제정하고 선산을 마련하고 재실을 건립하는 데 앞장서 문중 대소사를 주관하면서 문중의 튼 튼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공은 일찍이 신학문에도 뜻을 두고 1922년 도일하여, 일본에서 학비를 마련하여 수학할 생각이었 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년여 동안 문물의 발전 등 세상의 변화를 목격하고 귀국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전에 무사히 귀국하니 하늘의 도움이라 생각하였다. 1934년 아산면장에 취임하여 7년 을 봉직하고 광복 다음 해에는 면민의 추천으로 아산면 농회장 직을 맡아 근대 국가의 기초 기관인 면의 행정과 금융의 기초를 놓는 데 헌신하였다. 노년에는 고창향교 전교를 맡아 성현들을 모시는 절차와 주민들의 미풍양속을 유지시켜 나가는 데 혼신의 정성을 다하고 병오년에는 고창 유도회 지부장을 맡아 향민들의 화합을 다지는 데 힘썼다. 공은 “아무리 재산을 많이 불려 물려준다 해도 자손들에게 글 한 자라도 더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는 가훈을 남겨 후손들에게 항상 학행의 중요함을 당부했다. 6) 강동영(姜東永, 1904~1957) : 호는 눌포(訥圃)이다. 공은 가정이 궁하여 서당에 입학하진 못했지만,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곧 암송하여 문사가 일취월장 했다. 그 뒤 마을 뒷동산에 설립된 학 당에 입학하였으나 2년 되던 해에 학당이 문을 닫게 되자, 신학에 정진할 목적으로 여비를 마련하여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서점에서 일하며 법률서적을 탐독하여 법률상식을 넓혔다. 1935년 사 법서사시에 합격하여 대서를 하면서도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에겐 무료로 일해주니 칭송이 자자했다. 1939년 일제 말에 가문에 큰 송사가 있었는데, 문재를 조성하기 위해 선산 임야 79정의 임목을 법 에 어두운 유사가 매도계약을 모호하게 하여 종중재산이 파정나게 될 지경이었다. 공이 이를 알고 서둘러 종규를 제정하고 소송을 제기하고자 했으나, 소송의 상대가 도의 평의원에다가 부호이고 세도가여서 소를 진행하다가는 문중만 망한다고 하여 종인이 만류하였으나 공이 자수로 진술서를 작성하여 대구고법에까지 항소하여 마침내 승소하니 공의 강인한 의지에 일향이 모두 감탄했다. 광복 직후 독립촉성회 군지부장을 역임했고 1946년 초대 면장으로 추대되어 행정질서를 확립했으 며 6·25전쟁이 끝나고는 구국연맹에 참여하여 많은 인명을 구제했다. 눌포강공동영기공비(訥圃姜 公東永紀功碑)가 마을 입구에 있다.
<사진 2> 눌포강공동영기공비. 7) 강수원(姜壽元, 1916~2003) : 호는 늘샘, 1939년 3월 도일하여 고학으로 센슈(專修)대학을 1941년 12월에 졸업하였다. 1940년 11월 조선대학동아연맹에 가입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다가 다시 비밀그 룹인 ‘우리들’이라는 조직체를 구성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1943년 6월에 체포되어 1년 이상 미결 수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예심 끝에 1944년 10월 6일 야마구치(山口)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해방 이후 익산 남 성고등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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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였다. 8) 강인섭(姜仁燮, 1936~현재) : 시인이자 언론인(동아일보 기자), 정치가(대통령 정무수석, 14·16대 국회의 원)이다. 청년이었던, 1958년 22세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산록」이라는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
해 『녹슨 경의선』 등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주축으로 하는 4권의 작품집을 냈다. 23세에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하여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등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동아일보 논설주간으로 언론인 생활을 마감했다. 언론계에서 은퇴 후 정계에 진출, 1997년 대통령 정무수석을 역임하고, 14·16대 국회의원으로서 8년간 국가에 봉직했다.
5. 마을의 문화유적과 유산 1) 상갑리 유물산포지 : 아산면 상갑리 565-5번지. 상갑마을의 남측이며 아산농공단지의 동남측에 있다. 구릉은 해발 52m로 정상부에 도로가 지나가고, 대체로 평탄한 편이지만 삭평이 심하게 이루 어졌다. 정상부는 일부 송림과 진주강씨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수습된 유물은 개배편, 경질토기편,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이다. 이 지역의 출토유물은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2) 상갑리 고인돌군 : 아산면 상갑리 산 1-1번지. 상갑리의 지석은 1994년 12월 21일 사적 제391 호로 지정이 되었다. 또한 200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유적은 석치동마을 뒤편 에 위치하여 지석묘군 앞으로는 고창천이 흐른다. 성틀봉 남쪽 사면의 등고선 방향을 따라 해발 20~52m 사이에 총 181기의 지석묘가 분포해 있다. 상석의 규모는 155~481cm, 단축길이는 120~348cm, 두께 43~208cm 내외이다. 상석의 평면 형태는 방형, 장방형, 제형, 삼각형, 타원형 등 이다. 장축은 등고선 방향과 직교하거나 일치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사진 3> 서산산성과 상갑리 고인돌군. 3) 상갑리 고인돌군(1지구) : 상갑리 고인돌군은 석치마을 바로 뒤에 위치하며 고인돌군 앞으로 고창 천이 흐르고 있다. 성틀봉의 남쪽 사면에 등고선 방향을 따라 해발고도 20∼52m 사이에서 분포하 고 있다. 상갑리 고인돌군(1지구)은 기존 조사에서 4개 군으로 나누어 총 181기의 고인돌이 보고되 었다. 남방식과 함께 3∼4기의 북방식 고인돌이 섞여 있는데, 이들은 남쪽에 위치한 북방식으로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4) 상갑리 고인돌 1군 : 1군은 석치동마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죽림리 고인돌군 중 가장 서 쪽에 있다. 모두 42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었다. 1101호 : 개석식이며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46cm, 너비 190cm, 두께 165cm의 긴 네모꼴이다. 1109호 : 바둑판식이며 일부가 노출된 묘실의 규모는 길이 172cm, 너비 90cm, 노출된 깊이는 32cm이다. 굄돌이나 뚜껑돌은 없고 벽석 위에 바로 덮개돌이 놓여 있다. 동벽은 일부 작은 할석이 보이고 길이 44cm, 너비 42cm 정도의 찬석형의 석재가 놓여 있으나 덮개돌을 지탱하고 있지는 않다. 서벽은 길이 34cm, 너 비 30cm 정도의 석재 1매로 구성되어 있다. 북벽은 동쪽 부분만 노출되어 있는데 길이 34cm, 너 비 18cm 정도의 석재 1매를 세우고 20cm 규모의 할석을 3∼4단 쌓았다. 남벽은 동쪽 부분이 유실 되어 없고 길이 84cm, 너비 32cm 판석 1매를 사용하였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84cm, 너비 144cm, 두께 118cm인 긴 네모꼴이며 바닥은 완전히 노출되지 않아 알 수 없었다. 덮개돌의 윗면이 평평하며 남쪽을 바라보고 있도록 한 것이 의도적으로 한 행위인지 좀 더 다른 자료들과 비교 분석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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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호 : 개석식이며 일부가 노출된 묘실의 규모는 길이 122cm, 너비 58cm, 깊이 40cm이다. 굄 돌이나 뚜껑돌은 없고 벽석 위에 바로 덮개돌이 놓여 있다. 동벽은 길이 44cm, 너비 34cm의 판석 1매를 사용하였고 서벽은 길이 38cm, 너비 32cm 판석 1매가 노출되어 있으며 북벽은 판석과 할석 이 놓여 있다. 남벽은 판석 1매가 남아 있고 유실되었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06cm, 너비 162cm, 두께 174cm의 긴 네모꼴이다. 이 고인돌 역시 덮개돌에 평평한 면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 다. 5) 상갑리 고인돌 2군 : 2군은 1군에서 동쪽으로 17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총 43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었다. 1217호 : 바둑판식이며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450cm, 너비 404cm, 두께 278cm의 사다리꼴이다. 덮개돌의 긴 길이 측면은 비교적 정연하게 다듬어져 있으나 너비 측면은 정연하지 못하다. 5개의 굄 돌이 덮개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굄돌은 1m 정도 규모를 가진 대형이다. 2군에서 가장 큰 덮개돌을 갖고 있다. 1231호 : 바둑판식이며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87cm, 너비 224cm, 두께 144cm의 부정형으로 굄 돌은 1개가 보이고 덮개돌에 다듬어진 흔적이 보인다. 1234호 : 개석식이며 묘실 위에 덮개돌이 올려져 있다. 남벽은 유실되었고 동·서·북벽은 판석 1매씩 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출된 묘실의 규모는 길이 53cm, 너비는 단벽석으로 60cm로 추정된다. 굄돌은 2매가 노출되어 있고 형태는 기둥 모양이다.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184cm, 너비 224cm, 두께 64cm의 사 다리꼴이다. 덮개돌의 평평한 면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6) 상갑리 고인돌 3군 : 3군은 2군에서 동쪽으로 13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총 49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었 다. 1340호 : 개석식으로 덮개돌의 규모는 길이 246cm, 너비 87cm, 두께 42cm인 사다리꼴이다. 길이 가 너비보다 현저히 긴 형태로 보아 선돌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넘어지면서 현재의 상태로 된 것이 아닌가 해석된다. 7) 상갑리 고인돌 4군 : 4군은 1347호에서 동쪽으로 18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47기의 고인돌이 보고되었다. 고인돌의 배치는 덮개돌의 길이 방향을 따라 2열로 놓여 있으며 주변 의 고인돌 일부는 산만하게 되어 있다. 상갑리 고인돌은 산허리의 등고선을 따라 몇 개의 열로 배치 되어 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배열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배치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앞으로 고인돌 연구에 한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덮개돌은 너비에 비해 두께가 두꺼운 것이 많고, 정교하게 손질한 돌을 사용하기보다는 바윗덩어리 같은 느낌의 덮개돌을 그대로 올려놓은 것이 많았으며, 암질 또한 좋은 암질이 아니다. 이는 이 주변에서 이미 조사된 23곳의 채석장과 덮개돌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관계를 밝혀내어야 할 과제이다. 8) 상갑리 고인돌 채석장(採石場) : 고인돌유적의 덮개돌 원산지 연구는 당시 사회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 서를 제공해 주는데, 상갑리 고인돌군과 죽림리 고인돌군이 있는 성틀봉과 중봉의 채석장을 전주대학교 박 물관팀의 조사연구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총 23개소를 가군(성틀봉쪽)과 나군(중봉쪽)으로 구분한 뒤 각각 15개소, 8개소로 나누고 계곡이나 능선을 경계로 하여 6개 군락으로 나누어 조사하였다. 채석장이 있는 지점의 해발고도는 가군의 경우 해발고도 60∼115m 사이이고 나군은 70∼130m 사이이다. 채석장의 면적은 가군 50∼2,500㎡ 사이, 나군 150∼1,200㎡ 사이이다. 채석지는 채석이 용이한 지역을 선택하여 산의 능선 방향을 따라 이동되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채석장의 암질은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화산암에 대비되는 안산암질응회암, 데사이트질응회암, 안 산반암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창 고인돌유적은 산기슭에 위치하면서 산의 능선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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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주로 성틀봉과 중봉의 남쪽 사면부에 있으며, 등고선 방향으로 2∼3열 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유적의 주변에 위치한 고창천의 방향과 같다고 할 수 있지 만, 하천의 방향과 직교하는 것도 있어 이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하천의 고인돌 은 해발고도 20∼65m 사이에 분포하며, 해발고도 25m 정도에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다. 9) 서산산성(西山山城) : 1990년에 서산성(西山城)의 실측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 백제시대 기 와, 토기 파편이 출토되었고,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상단 건물 터는 길이 120m, 최대 폭 12m, 하 단의 건물 터는 길이 75m, 최대 폭 12m에 이르렀다. 이러한 규모는 지금 보더라도 대단한 규모이 고, 당시로 보아서는 매우 큰 성이었음을 말해 준다. 10) 마한시대 고분유적(봉덕리 고분군) : 아산면 상갑리 산 8번지에 있는 마한의 고분이다. 예로부터 갑평리 앞 언덕 너머에 “쌍나발등”이라 불리는 언덕 네 개가 연이어 있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옛 날 왕족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왔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일부는 상갑리에, 일부는 봉덕리 에 속해 있다. 이 고분에서 국내에서 출토된 것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한 금동신발과 칠기로 만든 화살통, 그리고 중국제 청자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됐다. 고분은 한성 백제기의 마한문화 전통을 가진 분구라 한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봉덕리 1호분은 방 대형(方臺形)으로 길이 72m, 너비 50m, 높이 7m 정도로 그 규모가 커서 작은 야산으로 보일 정도 이다. 이 분구묘는 구릉의 말단부를 장방형 형태로 다듬은 후 그 위에 성토하여 분구를 조성하고, 상부에는 석실분 5기와 옹관묘 2기를 안치하고 있다. 이번에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석실분은 1호분으로 다른 석실분이 횡혈식인 것과는 달리 수혈식 으로 분구의 동남편에 치우쳐 자리하고 있다. 1호 석실 내부 유물의 배치상태를 보면 시신이 안 치되었을 중앙에는 머리 부분에서 청동제 대나무 잎 모양의 장식[竹葉形頭飾]이, 머리와 가슴 부분 에서 귀걸이[耳飾] 두 쌍과 곡옥 두 점을 비롯한 다량의 옥이 발견되어 합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팔 부분에서는 칠기로 만든 화살통, 대도(大刀) 2점과 손칼[刀子]이 놓여 있었는데, 대도 1점은 칼자루와 칼집이, 손칼은 손잡이가 완전한 상태로 발견됐다. 한편 금동제 신발은 발치 쪽에 서 약간 비스듬히 뉘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우측 신발 내부에는 뼈가 남아 있었고, 좌측에서는 직물류 흔적이 발견됐다. 중국제 청자와 호는 동남 모서리에 나란히 놓여 있었고, 남벽 중앙에는 국내 최초로 발견된 소호장식유공광구호(小壺裝飾有孔廣口壺)가 그릇받침[器臺]에 올려진 채 발견되 었다. 그 밑에서는 은제 탁잔이 출토됐다. 그리고 북벽에는 성시구와 등자를 비롯한 마구류와 철제 무기류가 놓여 있었다. 발치의 서쪽 단벽 에서는 개배(蓋杯) 18점이 발견됐다. 금동제 신발은 목 부분과 측판 2매, 바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각 작은 못으로 결합하였고 측판과 바닥에는 빈틈없이 투조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에는 18개의 스파 이크 모양의 징을 부착했는데 부착 지점에는 6엽의 화판이 장식되어 있다. 특히 바닥 중앙에는 1마 리의 용을 배치하였고, 발뒤꿈치 부분에는 고구려(장천 1호분) 고분벽화나 무령왕릉 과대 장식에 보이 는 역사상(力士像)이 투조되어 있다. 또한 여백의 공간에도 봉황이나 그 밖의 길상조(吉祥鳥)가 투조 로 장식되어 있다. 소호장식유공광구호는 일본 고분시대의 토기인 스에끼(須惠器)에서는 장식호[子持 壺]라 불리는데 봉덕에서 출토된 것은 이들 토기의 원류로서 한일 고대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고분의 구조나 1호에서 출토된 남조대의 청자연대를 참고하면 5세기 초엽 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봉덕리 1호분 주변에는 마한 분구묘 계통의 분묘가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마한의 중심지로 볼 수 있다. 또한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백제 영역화된 이후에도 이 지역 을 중심으로 상당한 정치세력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봉덕리 고분은 고창지역 에서 고인돌 문화 이후 마한문화의 단면을 새롭게 규명할 수 있는 것이자 백제 중앙과 지방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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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조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로들에 의하면, 쌍나발등의 나무를 베기 만 하면 싸움이 일었다고 한다. <사진 4> 봉덕리 고분 전경. 11) 청계정사(淸溪精舍) : 참판공 강징의 4대손으로 한양에서 사대부로 살아 온 청계공 강순(姜恂)이 청나라에 대항, 의병한 후 성공하지 못하자 통분함을 참을 수 없어 “청나라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살지 않겠다” 하고 정처 없이 남하하여 고창 땅에 정착하니 이곳이 갑평이다. 공은 인근 운곡(雲 谷) 산수를 사랑하였는데 운곡이 우연히 주자 사는 곳[雲谷精舍]과 지명이 같아 이곳에 정자를 짓
고 주자 유상(遺像)을 받들어 삭망으로 참배하며 경모하고 후진 계도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흔적이 묘연해져 버렸는데, 후손들이 공의 은거하던 곳을 기리고자 운곡에 있던 이 정자를 갑평리에 다시 지었으니 그 이름 청계정사다(1935년). 운곡에다 짓지 않고 갑평에다 지은 것은 자 손이 오래 세거하기 위해서다. 마침내 웅장한 기와집이 완공되니 학자는 “고성봉 높아 있고 인천 강 출렁거렸네.” 라고 노래하며 주자가 머물던 “무이산 한류의 맑음이 여기에 있음이다.”라고 영탄 하였다. <사진 5> 청계정사 전경. 12) 상갑리 보호수(保護樹) : 상갑리마을 입구에 있는 400년 이상 된 늙은 느티나무 두 그루로, 장정 두 사람이 손을 잡아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오랜 세월에 여러 곳이 부러지고 가지가 죽으니 흙을 바르는 등 다시 살리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다. 군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수고는 20m, 둘레는 4.5m이다. 아산면 상갑리 177-3번지에 있다. 상갑리의 지형지세는 북쪽이 뻥 뚫린 형국으로 북쪽의 찬 계절풍이 마을에 직접 들이닥친다. 이러한 지형을 풍수적으로 허(虛)하다고 말하는데, 허 한 곳을 보강해주는 것을 비보(裨補)라고 한다. 보호수는 풍수적으로 허한 상갑의 북쪽 마을 입구에 자리하여 허한 풍수를 비보해주는 비보풍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진 6> 상갑리 보호수 전경. 13) 강수흠 사시(姜隨欽 私諡, 慎齋公, 1859∼1885) :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의 병환에 수년간 친 히 약을 달이고 매일 속옷과 변기를 몸소 깨끗이 하였으며 대변이 불통함에 대롱으로 3삭을 하루같 이 빨았다. 모친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9일간 목숨을 연장시켰으며 상을 당해서는 너무 슬퍼하다가 뼈만 남았다. 지극한 효성으로 몸이 쇠하여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효행이 군지와 도지 삼강록에 기록되고 향교 서원에서 천거하여 ‘효안(孝安)’ 이란 사시를 받았다. 기산서원에 배향하였다.
<사진8-1. 2함께> 姜孝安先生私謚狀.
14) 강헌배열부진주소씨정려각(姜櫶配烈婦晉州蘇氏旌閭閣) : 옛날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가 장 중요한 것으로 충(忠)과 효(孝)와 열(烈)을 꼽았다. 그래서 이러한 생활이 뚜렷하여 풍속과 교화에 도움이 될 만하면 고을에서 천거(薦擧)하고 나라에서 정표(旌表)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드는 열부 소 씨(蘇氏)는 그런 사람이다. 소씨는 조선왕조 영조 42년(1766) 5월 11일 무장에서 출생하여 18세 때 인 1783년에 고창 갑평 강헌(姜櫶)의 계배(繼配)로 건질을 받드니 구고(舅姑) 다 세상 떠나고 자녀 없 는 아당(雅堂) 29세 때였다. 그 뒤 3년 되던 병오년(1786) 동짓달에 남편이 병석에 누우니 숙증(宿症) 이라 회소(回蘇)의 길이 막연하여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어 자신의 몸으로 대신하기를 울면서 호소 했고 음식을 폐하고 부호(扶護)에 전념하니 인육(人肉)을 써야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몰래 허벅지 살을 베어 그 피를 닭고기에 섞어 끓여 드리니 효험이 있기에 두 번 세 번을 거듭해도 몰랐다가 신 음하는 소리, 피 흘린 흔적 때문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때 수많은 까막까치들이 집 주위에 와 지저 귀니 처음에는 불길한 징조인 줄 알았더니 병세가 호전되자 열행(烈行)에 감동하여 그리한 것을 알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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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소씨의 열행을 천거하고 찬양한 글에 ‘하늘도 감응하고 미물도 상서 드리었네’라고 했고, ‘옛적엔 충신 개자추(介子推)가 그 임금을 위해 허벅지 살을 베었고 지금엔 소(蘇)열부가 그 남편을 위해 베 었네.’ 한 것은 바로 소씨의 열행을 두고 말한 것이다. 동천 향천에 이어 여러 고을에서 연합천거하 고, 그 다음에 정미년(丁未年, 1787) 6월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는 급복의 특전을 받았으며 그 뒤 무 오년(戊午年, 1798) 11월 1일에 33세로 세상을 떠나니 10여 년이 지나 순조 신미년(辛未年, 1811) 정 려가 내려졌다. 소생은 3남인데 승환(承煥), 위환(渭煥), 윤환(倫煥)이고, 묘는 서당촌 곤좌(坤坐, 서남쪽 을 등지고 앉은 자리) 부묘(夫墓)에 부좌(祔左, 부부를 합장할 때 아내를 남편의 왼쪽에 묻음)되었다. 열부의
관향은 진주이고 향정연(香亭沿)의 현손 희철(希轍)의 칠세손 정상(廷相)의 딸인데 조(祖)는 덕웅(德雄), 증조(曾祖)는 민천(敏天)이다. 외조(外祖)는 광산(光山) 김상추(金尙秋)다. 이는 강씨 족보 및 고창읍지 향교지(鄕校誌) 열부조(烈夫條)에 전해 온다. 아당(雅堂)은 진주강씨 청 계(淸溪)의 5세손으로 영조 31년, 을해년(乙亥年, 1755)에 출생하여 정조 21년 정묘년(丁巳年, 1797)에 4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자는 사장(士章)이고, 호가 아당(雅堂)이다. 글 잘하여 많은 후진을 길러 내고 형수의 정려에도 힘쓴 만회당(晩悔堂) 근(槿)의 백씨(伯氏, 맏형)다. 고(考)는 탄원(園)염이오, 비(妣)는 행주 기봉상(奇鳳相)의 딸이며 조(祖)는 묵헌(黙軒) 복일(復一), 증조(曾祖)는 성일재(省一 齋) 재문(再文)이다. 초배(初配)는 영광에 살았다. 고흥유씨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낸 구산(龜山)
의 후손 석구(錫龜)의 딸이요 조(祖)는 동기(東起), 증조(曾祖)는 공익(公翼), 외조(外祖)는 무송(茂 松) 윤유개(尹惟稭)다. 부부 동갑인데 자녀 없이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7> 천거장
족(族) 증손(曾孫) 경흠(冏欽)이 지은 묘표(墓表)가 있다. 지난번 『진산세적』을 증보(增補)할 때 열부 소씨를 수록한 일이 인연이 되었던지 열부 5세손 순원, 주원 종형제가 관계문건을 가지고 와 비문을 청하니 막연하다. 사양할 수 없기에 여러 족보를 더 듬어 이를 밝혀 적어 읊어 본다. 여기 드는 소열부는 여훈(내훈)이며 열녀전을 대강 배워 알고 나서 갑평강씨 문중 종부되어 들어와서 봉제사와 접빈객에 정성을 들였고, 상봉하솔 내외 친척 화목으로 감싸 주네. 시집 온 지 3년 만에 사내아이 얻었으나 남편 병석 눕게 되니 눈앞 하늘 캄캄했네. 목욕재계 축천기도 눈물 흘려 호소하 고 인육 써야 낫는다는 말 듣고 난 뒤 어떠했나. 허벅지 살을 칼로 베어 흐른 피를 받아 내어 닭과 함께 끓여 냈네. 이 약 들고 효험 보자 두 번 세 번이었네. 이 무렵 까막까치 떼를 지어 모여 들어 알리었네. 남모르게 하였어도 신음소리 핏자국이 알려지게 되었다네. 동천(洞薦) 향천(鄕薦) 이어지며 여러 고을 호응하고 연합하여 천양(薦揚)하니 순영(巡營)에도 알려지고 급복(給復) 은전(恩典) 내려지며 세상 떠난 십여 년 뒤 정려지전(旌閭之典) 내려졌네. 남포(藍浦) 오석(烏石) 곱게 갈아 이를 새겨 유전(遺傳)하리. <사진 9> 강헌배열부진주소씨정려각. 15) 병마절의 청계 강선생 남하비(兵馬節義淸溪姜先生南下碑) : 청계 강순의 후손들이 공을 기념하 기 위해 마을 입구에 헌·성금을 모아 단기 4308년에 큰 비를 세웠다. 이 비가 『兵馬節義淸溪姜 先生南下碑』이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옛적 인조 때에 오랑캐 우리 땅을 짓밟았네. 행궁이 에워싸이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네. 공은 어떻 게 강개했던가. 포의(벼슬하지 않은 사람)로 창을 들었네. 늠연한 의기는 수많은 오랑캐를 두려워하지 않았네. 도중에 화의가 성립했다는 말을 들으니 저 하늘도 무너지는 것 같았네. 통분한 마음 참지 못하여 속마음은 미쳐 버렸네. 어버이를 모시고 남하하여 이 고을에 머물렀네. 고성산 높이 있고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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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 출렁거렸네. 여기에 농막 짓고 여기서 뽕 가꾸었네. 평생의 학문은 주자학을 독신했네. 그 글 을 많이 읽고 부지런히 힘을 썼네. 영정을 받들려고 따로 산방 지었었네. 우리도 여기 있으니 창주 아닌 창주였네. 제 멋대로 행한 오랑캐 연호, 책력을 들여 감추지 않았네. 오래 갑자를 폐하고 질러 분망하지 않았네. 오직 문도와 더불어 경을 말하고 문장을 풀었네. 새벽이나 저녁으로 문밖 일 길이 잊었었네. 병자 정축 의리는 말하자면 길어지네. 공 같은 이는 당일에 천지가 부끄럽지 않았네. 나 는 금관을 빼어들고 처음으로 규장에 명하였네. 자손으로 하여금 갱장(更張)의 사모함을 더하고 지나 는 이로 하여금 법 받는 곳에 떳떳함이 있으리라. 하동 정홍채가 짓고, 유재영이 번역하였다. <사진 10> 병마절의청계 강선생 남하비. 16) 묵헌공 묘소(默軒公墓所) : 묵헌공은 청계공의 증손자로 이름은 복일(復一, 1701∼1726년)이다. 공 은 매우 총명하여 사서오경을 두루 읽고 소학과 대학은 암송할 정도이고 어려운 주역도 막힘없이 풀었다고 한다. 특히 젊은 나이에 주자와 우암의 사당을 짓자고 모금운동까지 벌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26년 26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갑평마을에는 여러 성씨가 살았지만 옥천조씨가 많이 살았고, 진주강씨는 많지 않았다. 그 때 민간신앙은 풍수도참설이 유행하여 그것을 믿기 때문 에 마을 가운데 묘를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의 묘소는 사망 당시 마을 가운데 쓴 것이 아니라 훨씬 뒤인 1810년대 강씨 세력이 조씨 세력을 능가할 때 묘소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 측된다. 왜냐하면 1821년 무장현감으로 부임한 강태중 공이 쓴 묘갈명에 재직 중 일가 집을 방문할 때 마을 가운데 묵헌공과 배위 고씨의 합분묘가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본 묘소는 큰 명당이라고 지사가 소개하므로 공을 모시기로 하고 강씨 일가가 모여 한 밤중에 묘를 쓰기로 모의하였다. 마침 조씨 집으로 시집 간 이 집의 딸이 부엌 에서 소죽을 쑤다가 이 말을 듣고 시댁에 가서 이를 고하였다. 이를 들은 조씨들은 묘 설치 작업 중 인분을 뿌리고 몽둥이를 들고 와 소란을 피웠으나 끝내 이를 저지하고 묘를 썼다. 묘를 쓴 후 강씨 들은 돌아와 이구동성으로 앞으로 딸을 낳으면 뒤집어엎어서 죽여야 한다고 푸념을 했다고 전한다. 이 묘소 설치로 갑평마을은 완전히 진주강씨의 터가 되었다고 한다. <사진 11> 묵헌공 묘소. 17) 농은강공효행기실비(農隱姜公孝行紀實碑) : 공의 휘는 인영(麟永)이고, 호는 농은(農隱)이며 진주인 참판 징(澂)의 후손으로 치흠(致欽)의 아들이다. 공이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계모 엄씨를 생 모와 같이 섬겨 계모 또한 공을 자기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공은 밤이면 반드시 시침하여 명이 있 으면 곧 좇았다. 계모가 병이 들어 친정에 누워 있으니 거리가 십 리가 되는데도 밤낮으로 왕래하여 약과 음식을 지성으로 갖다 드렸다. 공의 정성으로 계모는 완쾌하였고, 그 후 계모가 칠십 고령이 되어 병이 들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3일을 더 연명하게 하였다. 공은 밤엔 옷을 벗지 않고 하늘에 빌어 어머니 대신하기를 빌었고,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녔으나 여의치 않았다. 마침내 숨을 거두 시자 3년 간 아침저녁으로 묘에서 곡하였다. 비는 단기 4311년 3월에 세우고, 광산인 김영표(金永 杓)가 비문을 지었다.
18) 죽계처사강공효적비(竹溪處士姜公孝蹟碑) : 죽계 강공은 휘가 기흠(琪欽)이고, 진주강씨이다. 공은 어버이가 병이 들면 지극정성으로 구호하고, 지혈을 입에 쏟기까지 해서 명을 늘렸다. 어머니가 생 선을 즐기매 추운 한겨울에도 얼음을 깨서라도 물고기를 잡아 드렸다. 부모 상을 당하자 공은 술과 고기를 하지 않으며 조석으로 곡을 하며 시묘하였고, 눈과 비에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탈복을 한 뒤에도 예로써 부모를 그리워하고 슬퍼하였다. 비는 1994년에 세웠고, 박동수가 지었다. 12> 죽계처사강공효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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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 열부평강채씨기적비(烈婦平康蔡氏紀蹟碑) : 효부 평강채씨의 남편인 강대영(姜大永)은 관향이 진주 이고 기흠(琪欽)의 아들이다. 평강채씨는 남편이 중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구호하고 밤마다 하늘에 회 복하기를 빌었으며 자정에 물을 길어 들이고 영약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어디까지라도 가서 구해왔 다. 또한 몸소 부지런히 남편을 안마하고 미음을 드려 한시라도 편히 쉬지를 아니하였다. 평강채씨 는 남편의 병이 심해지자 “남편이 죽어 홀로 살 것인가?”라며 허벅지 살을 크게 도려내어 남편에게 주니 이로부터 완쾌하여 다시 15여 년을 함께 돈돈하게 살았다. 기적비는 단기 4314년에 세우고, 글은 당성 홍종호가 짓고, 전주 이학용이 썼다. <사진 13> 열부평강채씨기적비. 20) 영모재(永慕齋) : 영모재는 상갑마을 입구에 있는 진주강씨 죽계공 후손의 재실로 갑평 2길 8번 지에 있다. 1972년에 건립된 영모재는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원통형의 기둥을 세 웠다. 영모재는 甲雲 강천수(姜天秀)가 그의 조부를 위해 건축한 것이라고 하는데, 현판은 송아(松 雅) 고광은(高光殷)이 썼고, 영모재기는 을묘년 11월 하동 정홍채가 적었다.
<사진 14> 영모재 전경.
6. 마을의 현황과 생활상 1) 세대주와 호구(인구) 마을명 상갑 서당
2003 245 74
125 120 38 36
2012년 3월말 현재 2004 200 80
106 94 38 42
2005 187 77
99 88 39 38
2006 189 69
100 89 37 32
2007 176 71
94 82 36 35
2008 159 69
86 73 39 30
2009 150 71
81 69 40 31
2010 165 57
87 78 33 24
2012 161 58
84 77 31 27
2) 성씨별 거주 현황(2012. 8월 현재) (1) 상갑마을 호구별 성씨 현황 ◦ 진주강씨 29가구
◦ 광산 김씨 4가구
◦ 부안김씨 1가구
◦ 옥천조씨 2가구
◦ 금성나씨 1가구
◦ 밀양박씨 1가구
◦ 강릉유씨 2가구
◦ 함풍이씨 1가구
◦ 인동장씨 1가구
◦ 진주정씨 2가구
◦ 함양오씨 1가구
◦ 기타(하씨와 황씨) 2가구
상갑마을의 조사대상 성씨는 아산면 전화번호부에 기재된 인명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본관은 남편 의 성씨를 따라 조사를 했다. 조사결과 총 47가구 중 진주강씨가 29가구, 광산김씨가 4가구, 옥천조 씨와 강릉유씨 및 진주정씨가 각각 2가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타 금성나씨, 부안김씨, 밀양박씨, 함풍이씨, 인동장씨, 함양오씨, 하씨, 황씨 등이 각각 1가구가 있다. 이로써 볼 때 상갑마을은 구성 원의 62%가 진주강씨로, 전형적인 집성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2) 서당촌의 호구별 성씨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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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강씨 8가구
◦ 강릉유씨 7가구
◦ 남양홍씨 1가구
◦ 도강김씨 1가구
◦ 광산김씨 1가구
◦ 진주하씨 1가구
◦ 평산신씨 2가구
◦ 동래정씨 1가구
◦ 신안주씨 1가구
◦ 창녕성씨 1가구
◦ 행주은씨 1가구
◦ 조양임씨 1가구
서당촌은 조사대상이 26가구였다. 본관별로 보면, 진주강씨가 8가구로 가장 많고, 강릉유씨 7가구, 평산신씨 2가구 등이며, 남양홍씨, 도강김씨, 광산김씨, 진주하씨, 동래정씨, 신안주씨, 창녕성씨, 조 양임씨, 행주은씨 등이 각각 1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3) 마을의 시설 아산치안센터 : 아산면 상갑리 355-2번지. 1914년 3월 5일 주재소 설치, 2004년 10월 28일 현 위 치에 개축. <사진 15> 아산치안센터. 아산우체국 : 아산면 상갑리 336번지. 전화는 562-5002이며, 우편번호는 585-930. 1962년 7월 31일 개국. <사진 16> 아산우체국. 아산보건지소 : 아산면 상갑리 186번지. 인천강지킴이 : 아산면 상갑리 340-13번지. 아산면의 사회단체로 인천강을 지키는 단체. 아산소방서 : 아산면 상갑리 194-1. 아산면의 소방서. <사진 17> 아산소방서 선운산농협 아산지소 : 아산면 상갑리 329-11. <사진 18> 선운산농협 아산지소. :
상갑리 336-2(
).
063-563-1765.
상갑 경로당 : 아산면 상갑리 상갑에 있는 마을회관으로 2003년 2월 15일 건립. <사진 19> 상갑 경로당. 4) 마을의 모임 청계공남하기념식 : 청계공남하기념식은 청계공이 고창 갑평으로 남하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갑평 의 진주강씨들이 행사를 하는 날이다. 행사는 청계공이 남하한 날을 정확하게 몰라 한국이 해방된 날인 8월 15일로 정해 전국 각지에 거주하는 갑평 출신의 진주강씨들이 모이는 기념행사로 1975 년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다.
동네계 : 상갑 여성들의 모임으로 일 년에 한 번씩 돈을 갹출하여 여행을 다녀온다. 대보름날 : 마을의 어른들이 모여 한복을 입고 두 패로 나누어 윷놀이와 같은 민속놀이를 한다. 5) 마을의 역대 이장 면사무소에서 확인해 본 결과, 상갑리의 첫 이장은 1964년에 이장을 맡았던 강민원 이장이다. 서당 촌은 강완희 이장이 1990년 초대 이장직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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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갑
서당촌
1964. 2.29 ~ 1965.4.4
강완희 1990.1.1~1994.12.31
강형희 1965.4.5~1970.5.4 강원식
강명원 1995.1.3~1998.12.31
~1970.4.1
1999.1.4~2009.12.31
강필원 1970.5.10~1971.12.31
홍종남 2010.1.1 ~현재
강창수 1970.4.1~1971.12.31 강위영 1972.1.1~1979.3.1 강노원 1979.3.1~1980.2.29 강충희 1980.3.1~1981.12.31 강노원 1982.1.1~1982.12.31 강노원 1983.1.1~1984.1.1 강택희 1984.1.1~1984.12.31 강위영 1985.1.1~1996.12.31 강희안 1997.1.8~2002.12.31 강희운 2003.1.4~2006. 12.31 강택희 2007.1.4~ 현재
6) 상갑의 진주강씨들 2011년 현재 진주강씨 청계공파 종회의 세대별 지역 분포는 다음과 같다. 고창 170가구, 전주 20가구, 서울·경 기 280가구, 대전 15가구, 광주·목포 25가구, 강원 5가구, 부산·울산 20가구, 대구 5가구, 기타 20가구, 이민 5가구 등 총 575가구가 전국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갑평의 진주강씨 문중은 1973년부터 중․고등학 생과 대학생 신입생에게 장학금을 지금하여 왔다. 2011년부터는 장학금 대신 지급대상을 축소하고 대신 출산장려금을 신설하여 신생아에 대하여 출산장려금을 지원하고 있다. 7) 진주강씨 대종찬(大宗贊) 진산화위(晉山華胃) 진산 땅 밝은 정기 빛나는 씨족이요, 청천영원(菁川靈源) 청천물 맑은 줄기 거룩한 근원이라. 천파일본(千派一本) 천 갈래 갈렸어도 근원은 하나이며, 만지동근(萬枝同根) 만 가지 뻗었어도 뿌리는 한 가지라. 충효지가(忠孝之家) 충성과 효도로서 이름난 집안이오, 도의지문(道義之門) 도덕과 의리로서 번성한 문중이라. 세수돈목(世守敦睦) 대대로 돈독한 친목을 지켜오며, 영수후곤(永垂後昆) 영원히 후손에게 전하여 가리로다.
도움 주신 분 강주원 (1933년 무장 월평생, 전 진주강씨 청계공파종회장)
강형희 (1933년 상갑생, 전 진주강씨 청계공파종회장) 강위영 (1940년 상갑생, 진주강씨 청계공파 종회장) 강헌희 (1950년 상갑생, 전 대성중학교 교장) 강희석 (1950년 상갑생, 미당문학관 해설사 )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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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신증동국여지승람』, 민족문화추진회, 1971. 『전라북도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 사료집』, 고창문화원, 1998. 전북의 정려․충효열비』, 전라북도 전북향토문화연구회, 2000. 『진산세적(晉山世蹟)』, 고창 청계정사, 원광대학교 향토문화연구소편, 1996.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한국의 풍수』, 명문당, 村山智順 저, 정현우 역, 1996. 『한국의 자생풍수2』, 민음사, 최창조, 1997. http://www.dailian.co.kr/news http://100.naver.com/100.n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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