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고창 11월 28일(일) 17:20 이기화 호남지역사령관이 신태영장군으로 계급은 중장이었다. 신태영 장군이 전북지역을 겸하고, 이영준사령관이 전남을 맡았다. 이영준사령관은 소장이었다. 고창의 학생조직으로는 우익의 전국학생연맹(학연) 고창지대가 있었고, 좌익으로 민주학생 동맹(민학)있었다. 당시 범민주학생연맹(민학)의 회장이 김병욱(고창고보 6학년)이였다. 지하조직으로 위원장이 노영환, 감찰부장 김철하, 총무부장 신택희 등이었고, 민주학생동맹 의 김병욱을 뒤에서 조종자하는 사람이 고창고보 졸업생인 신행복였다. 고창고보생 중 신행 복에게 맞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운사작전에 참여했을 때 이기화원장은 전투 중 신행복을 만났다. 그는 고창고보에서 퇴학 을 시키니까 자기 교실에 가서 의자를 메고 교무실에 가서 책상을 가지고 밖으로 갔다. 후 에 퇴학처리를 하지 안 해 복학해서 졸업은 하였다. 학연조직으로는 정보부장에 신연희(신택희와 사촌으로 신재효의 현손), 문화부장 염규윤, 동 원부장 강세원(영광에서 전학을 5학년 때 왔다)이 있었다. 강세원은 고창 학년조직의 멤버 들과는 달리 독종이였다. 강세원이 선운사작전에 후배를 몰고 가서 전부 죽였고, 학도의용 대 대장이 되었다. 51년 6학년이 된 강세원이 학도대 대장이 되어 학생들을 1주일간 집중 훈련시켜 전투에 참여시켰다. 신행복부대가 아산 매산 주막집에서 자고 있을 때 포위해서 빨치산들에게 손들어 하니, 민학의 신행복이 너희들이 선배를 쏘냐며 악써서 강세원의 학도 병들을 돌려보냈다. 그래서 학도대들이 총 쏠 의욕도 없이 도망쳤다. 당시 강세원은 신행복 에게
죽을 만큼 맞았다. 당시 선운사작전에 참여한 고창고보생이 5명이나 죽었다.
학연의 감찰차장이 이종옥(5학년), 정보부차장이 백한기(4학년)였는데, 백한기는 문제아로 시끄러웠고, 그는 전주북중에 다녔다. 그는 고창으로 와서 고창고보로 편입을 했다가 다시 전주로 갔다. 백한기도 학도대에서 활동하였다. 1950년 7월 13일 인민군 최강 제 6사단이 호남을 맡으면서 이들이 고창에 입성을 하였다. 전북이 미곡지대라 최강을 보내 금강하류로 도하해서 군산의 저지선을 뚫고 전북지역을 일 사철리로 점령하였다. 인민군은 군대로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군산-김제-부안-고창을 점 령하면서 내려오고, 다른 한 부대는 군산-익산-전주-남원방면으로 진출을 하였다. 고창고보는 7월 19일에 방학식을 했는데, 다음날인 20일 저녁에 인민군 전차가 고창에 입 성 후 군청 앞에서 자고 있었다. 고창고보생들 중 많은 사람들이 먼 곳의 고향집으로 갈수 가 없었다. 당시 버스가 사라져 못가 난리가 나서 도로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당시 고창중교장이 김용환, 교감 김순회(김경식 교수의 숙부, 일본유학), 고창여중교장 백남 영, 교감 오성탁, 방위군 배속장교가 박창현중위(고수자기), 방위군 대장 대위 이봉춘, 방위 군 이성옥소위와 조종철소위 등 4명만 무기가 지급되어 있었다. 방위군은 고창청년단원들이 었다. 이들은 후퇴하면서 무안경찰서에서 검문당해 무기류를 몰수당했다. 이기정씨는 소화철도학교를 나와 평양역의 조역을 하였고, 그의 아래 차석으로 김O근씨가 있었다. 이기정씨는 해방이 되자 고창경찰서 내무서장을 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창 은 인민군에게 점령을 당하였고, 고창경찰서의 내무서장으로 함께 평양역에서 조역으로 있
었던 김O근씨가 와서 겨우 살게 된 것이다. 백한기는 용감무쌍하였고, 머리가 아주 비상하였다. 그는 전주북중에 임시로 와 있던 육군 보병학교장을 찾아가 자원입대신청을 하였다. 백한기는 고창의 친구들 세 명을 더 자원입대 하기 위해 익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장성의 사거리역에서 내려 솔재를 넘어 오다가 민학들에 게 붙잡혔다. 백한기는 민학들에게 죽도록 맞아 고창내무서로 보내졌다. 그때가 7월 25일이 었다. 고창에 사는 김광득, 김정희(무장사람) 등은 백한기의 선배로 진즉에 혈서를 썼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백한기는 고창 학년멤버들과 자주 만났고, 그의 어머니가 나주여관을 하 였고, 아버지는 한민당 장성군 북일면 위원장을 하였다. 반란군에 의해 문수사 주지와 백한 기 아버지 등을 우익이라 하여 죽였다. 전주에서 익산으로 장성 사거리 집을 들린 후 솔재에 민학에 걸려 죽도록 맞고 고창내무소 로 보내졌다. 고창에서 죽었다고 소문났다. 백한기가 하도 안 죽어서 단도로 머리를 찔러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가 기절하자 죽었다고 판단한 민학들이 그를 외딴집에 버렸다. 그 외 딴집에 살던 사람이 유희정씨로 그는 백한기를 응급처치한 후 나주여관에 연락하였다. 백한 기의 형인 백영기(전주북중 수학선생으로 후에 전북대 수학과 교수)가 백한기를 가마에 넣 고 자전거에 태워 전주로 가서 살려냈다. 고창에서 인공은 우익인사들에게 8월 20일까지 자수하도록 하였다.(당시 우익인사들이 20 여명이 자수를 하였다, 신연희씨와 오희균씨도 자수를 하였다. 자수한 이들을 분리하여 중 죄인들을 전주형무소로 보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창에 남게 하였으나 후에 고창에 남은 사람을 다 죽였다.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사람은 명령하달이 잘못되어 2시간만 형무소를 열 어주었다. 이때 나온 사람들은 다 살았으나, 옥에서 안 나온 사람들은 다 죽었다. 그래서 기 적적으로 오희균씨와 신연희씨가 살아남았고, 곽종식와 같이 고창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 인민군과 빨치산들은 50년 9월 18일 수복이 되자 우익사람들을 700~800명을 고 창에서 학살시켰다. 백한기는 고창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고창중 진학 후 전주북중으로 전학을 갔다. 그의 형 인 백영기라는 분이 동생을 전주북중으로 데려 간 것이다. 백영기와 백한기는 이복형제였 다. 백한기의 어머니가 나주여관을 1930년대부터 오랫동안 운영하고 있었다. 백한기는 대학을 서울대 석유공학과 3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고 고창에서 활동하였다. 곽종식의 청년단 맥이 백한기, 유동렬, 김문영, 이기화 등으로 연결되었다. 송영래 원장은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후에 전환하여 고창청년단에 참여하였다. 이기화원장은 1960년대 고 창청년회 공천으로 고창읍의회 내무분과위원장을 하였다. 고창청년단은 백한기를 중심으로 활동이 이루어졌고, 아침이면 청년본부에 모였다. 청년단 의 활동은 고창의 발전대책, 애향운동 등을 논의하는 등 고창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 봉춘씨가 만든 고창공회장을 오관탁씨가 임대하여 운영을 하였다. 오관탁씨는 롯뎀바리 공 연을 많이 하였다. 오관탁씨는 마차에 천막을 싣고 다니며 고창관내의 면을 순회하면서 돈 을 벌었다. 그는 광주에 필름을 보내고 새 필름을 가져와 고창군을 순행하며 돈을 벌었는 데, 한달에 두 번 정도 보여주었다.
필름배급을 해주는 사람이 이학용이라는 삼성병원장 아들이었는데, 그는 고창고보출신이어 서 자주 고창을 도와주었다. 소방대 간부들이 의회에 많이 들어와 있어 6:1로 대치를 하였 다. 만약 소방대에 임대업을 주면 이들은 분명 나누어 먹기를 한다. 그래서 이원장이 소방 대에 주면 나누어 먹어 고창이 발전 안 된다는 논리로서 대응하였다. 하여간 이틀 동안 별 의 별 이야기를 하여 발언을 하였고, 이틀 후 오관탁씨와 청년회 임원들이 소방대원들과 대 치를 하였다. 소방대원들도 옷을 다 벗고 스트라이크를 하였다. 고창읍성 앞의 고창천변의 당산나무에 신삼훈(신사훈의 형님)이라는 분이 자력으로 큰 스피 커를 달아 고창사람이면 누구나 말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야당골수로 선거에 나왔으나 떨 어졌다. 유동렬이 트럼펫을 잘 불었으며 재향군인회장을 하였다. 5.16 군산혁명 후 사회활 동을 금지시켰다. 고창국민학교에서 8칸을 빌려주어 활동을 하였다. 고창청년회 이름으로 야간중학교를 운영 했다. 후에 예총을 조직하여 예총 명의로 야간학교를 운영하였다. 국어와 영어는 이원장님 이, 수학은 형님이 지원하고, 고창관내의 많은 선생님들이 도와주었다. 고창여학교의 오성탁씨가 수업료 독촉을 못했다. 독촉하면 학생들이 야간중학교로 다니니 오성탁씨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민주당 정권 때는 고창청년회로, 박정희씨 이후로 예총을 만들어 활동을 하였다. 1962년도에 신상호 군수 때 전라북도 농촌재건위원회 상임위원이었다. 당시 지사가 김인 지사였다. 지사실에 찾아가서 행정은 못해도 일을 멋지게 하라고 조언하였다. 부지사의 소 개로 농촌재건위원회를 구성해 농촌을 재건하였다. 농촌재건 경영대회를 열어 농민들이 달 걀고르기, 사과고르기, 쟁기갈기 등등 활동영역을 넓혔다. 제 1회 전라북도 농촌재건 영농기 술 대회를 고수에서 한다고 열었다. 도지사가 식전에 와서 전주에서 방송국 멤버를 데리고 왔다. 수많은 농촌활동을 대화에 참가시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김인지사는 아침도 안하고 와 서 군수가 조양관에 조식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지사 고문들을 데리고 와서 고창을 보러 왔다. 도청에 방을 얻어 활동을 하였다. 그래서 향 토문화상을 받아 부상으로 많은 물품을 받았다. 김인지사가 하명하며 고창군수에게 시켜 김 인이 추천하여 1회상을 수상하였다. 제 1회 전국 향토문화상을 받은 것이다. 그 계기는 제1 회 전라북도농촌지도기술개선경연대회(1962년)였다. 고창에 모양문학회를 만들고, 국악, 음 악협회 등을 (3개 이상) 만들어야 예총이 된다. 지사가 저녁까지 안가 군수가 고생을 많이 하였다. 밭갈이, 물레잡이, 비료 품평회 등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엄민영 내무차관과 함께 하였다. 엄민영차관과 5.16후 재건국민회 촉진회 를 만들어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당시 고창에 도지사 상이 안 들어 간곳이 없었다. 고창만 도지사 상이 엄청나게 많았다. 50 개의 상이 나갔다. 엄민영 내무차관이 농촌문제연구소 청소년담당 이사를 시켰다. 엄민영이 한국농총문제연구소장과 내무장관을 겸임하였다. 이양호씨가 불러 청소년 담당 이사를 하게 하였다. 후에 김인 지사는 향토문화 공로상을 만들었고, 살아있는 상록수상을 재정하였다. 오재영씨가 공보부장관을 하던 시절, 장관이 소개하고, 박정희가 서울시청 앞에서 상을 주 었다. 부상으로 많은 선물을 받았다. 차로 한 차를 주었다. (삽, 농약, 농기구 등등) MBC의 “절망은 없다”에 주인공이 되었다. 개인의 절망이 아닌 지역사를 절망에서 구해내
는 것이 내용이었다. 박정희가 새마을 노래를 지었다. 박정희가 작곡을 하였고, 쉽고 좋다하였다. 1971년 김종필 총리가 박정희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청와대 신년하례에 참여하였다. 1963년도에 문화원장을 하였고, 1962년도에 고수면에 50~60장의 상장을 뿌렸다. 방송을 많이 출연하였다. 주례가 2천 쌍을 넘었다. 고창의 예총대표로 일본에 갔다 왔다. 문 부성장관이 둘째아들과 나이가 같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혼이 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