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의 간척사업 11월 14일 16:30-17:20 이기화 일제강점기 전라북도의 간척사업은1920년대에 시작을 하였다. 1910년 일제는 경술합방으 로 한국을 통치하게 되자 군산항을 통해 쌀을 실어 나르기가 좋았다. 군산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곳이 김제와 만경의 전북들이었다. 일제의 산미증산 정책에 따라 일본으로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 황해도, 경기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의 간석지를 간척하였다. 특히 전라남도 가 가장 많이 간척되었다. 전라북도는 군산 때문에 1920년이 지나 계획이 실행되었다.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국고 보조금도 지원이 되었다. 서해안의 넓은 간석지를 간척사업 하는데 저리로 돈을 지원하였 다. 고창은 군산과 거리가 가까워 간척사업을 하기에 좋았다. 당시 전라북도의 간척사업의 비율은 전국적으로 매우 낮았다. 일제강점기 토지개량사업 일환으로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 었다. 전라북도 고창의 경우는 간척사업을 하기가 좋았다. 즉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용이 적게 들어갔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소작인들을 모을 수가 있었 다. 일본의 6분의 1의 인건비로 일을 할 수가 있었다. 1929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실시하여 간석지 20만ha가 개간이 되었다. 특히 전라남도, 경 기도, 황해도가 전체의 60%를 차지하였다. 전북은 5,849ha가 개간되어 약 3%에 해당하였 다. 일제의 각종 지원을 받아 전라북도도 옥구, 김제, 부안, 고창에서 간척사업을 하였다. 부 안은 계화주변을 빼고는 간척사업을 할 곳이 그리 많지 않았다. 1940년대에 들어와 고창지역에서 간척사업이 시작되었다. 삼양사를 김연수씨가 합작회사로 설립하여 시작을 하였다. 김연수는 경도제대출신으로 인맥이 좋았다. 그래서 김연수씨가 처 음 시작한 일이 간척사업이었다. 그는 간석지를 막아 넓은 간척지로 간척답을 얻을 수 있었 다. 그리고 지금의 해리면 궁산에 궁산저수지를 축조하여 성공리에 사업을 마칠 수가 있었 다. 그는 1939년 9월 4일자로 간척답을 준공하였다. 면적은 삼양사에서 알고 있다. 삼양사에서 궁산리에 저수지를 막아 간척답이 준공할 무렵에 수원지를 만들어 성공하였다. 이 사업이 성공하니 욕심이 나서 눈앞의 심원하고 연결하여 제방을 축조 하였다. 현재 동호 리 1번지부터 1.5km의 제방을 축조하는 사업이다. 먼저 한 간척사업으로 들이 생겨 좋아 총독부에 염전을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동호 1번지부터 1.5km 가서 부등도(불뜸)에 임야 가 약 1km가 뻗어 있다. 불뜸의 1km가 골프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제방이 필요 없었다. 불뜸에서 1.4km만 제방 을 축조하여 연결하면 대 염전이 생길 것 같았다. 김연수씨가 총독부에 허가를 신청하여 심 원면 만돌리 계명산까지 연결하면 커다란 염전이 생긴다. 총독부에 인맥을 통해 염전 간척 사업을 허가받아 시작하였다. 이 사업으로 김연수씨는 안쪽의 8km에 해당하는 큰 염전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는 골프장만 팔고 나머지는 어마어마한 땅을 삼양사가 소유하고 있다. 이 사업은 소작인을 동원하여 사업을 하였다. 1940년대 본격적으로 간척사업을 실시하였으며,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대동아전쟁을 하
던 시기다. 김연수씨는 고창의 간척사업 비용을 총독부에서 받아 만주로 가서 남만주 섬유 공업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이 공장은 봉천심양에 건설되었다. 봉천역 조역으로 이기화 원장 님의 큰 형님인 이기정씨가 계셨다. 이기정씨 때문에 이기화원장님도 만주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남만주 섬유공업주식회사는 사방 4km의 공장으로 주변에 망루를 세우고 기관총까 지 두고 지켰다. 망원경을 설치하여 공장을 지켰다. 당시 이기화전원장 아버지를 통해 고창의 아가씨 7,000~8,000명을 데리고 갔다. 당시 친 부모도 그 남만주 방직주식회사에 취직하였고, 고창의 아가씨들이 서로 다투어 취직하려고 하였다. 간척사업은 전번을 주어 끝내야 돈을 주었다. 김연수씨는 간척사업을 직원에 맡기 고 자신은 만주에서 방적공장을 만들었다. 당시 공장에서 일한 사람들에게 밥을 해 주던 솥이 사람 4~5명이 들어가 삽으로 떠서 밥을 넘겼다. 8.15 해방이 되자, 방적공장에서 일하던 고창의 아가씨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이기 정 씨는 심영에서 로스키 장교들에게 음식점을 팔며 돈을 벌어 배를 사서 고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돈을 부친사람들은 살았고, 저금을 한 사람들은 망했다. 왜냐하면, 일본이 망하자 일본의 엔화가 아무 쓸모없게 되버린 것이다. 이기정씨는 고창으로 돌아와 고창경찰서에서 일했다. 김연수씨는 만주국은행에서 15만엔을 융자받았다. 융자를 받아 그곳에 공장을 짓고, 해방이 되자 방직공장은 중국인들 손에 넘어 갔다. 김연수씨는 소자본인 동호간척사업 자금을 가지고 만주에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고 몸만 내려왔다. 김연수씨는 그 곳에서 돈을 벌긴 했다. 그리고 만주국 명예 총 영사를 지냈 다. 김연수씨가 고창에서 사업을 안 하고, 돈을 만주에서 썻다. 해방이 되자, 군정청에 형님 인 김성수를 통해 미군의 중장비를 싸게 불하받았다. 특혜를 받은 것이다. 이 중장비를 가 지고 김연수씨는 염전사업을 1954년 5월 10일에 마무리 지었다. 시공 책임자가 삼양사 이희준이었다. 삼양사는 궁산저수지를 통해 간척지 답을 옥답으로 만 들고, 제방을 쌓아 염전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황화수라는 사람이 도자운전 특혜를 받아 이 사람이 1946년도까지 제방을 쌓아 일을 끝낸 것이다. 1980년대에 종로4가 삼양사 본점 에 해리 심원의 소작인들이 운동권의 정보를 받아 삼양사에 땅을 내놓으라고 싸웠다. 해방 후 농지개혁으로 땅을 소작인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삼양사는 분배를 해 주지 않았었 다. 삼양사는 매년 소작료만 받아갔다. 그래서 1985년에서 1987년까지 3년간 서울 본사 앞 에 난리를 냈다. 이들을 중앙일보에서 밀었다. 심원과 해리 면민들이 매일 데모를 하였다. 그리고 본사에 똥물 세례를 하였고, 삼양사는 손들고 원금만 받고 불하를 해 주었다. 계약한 소작료 원금만 받고 주었다. 1년치 소작료를 내면 불하를 해 주었다. 그래서 삼양사놈들이 나쁜놈들이라고 욕을 얻어먹고 있는 것이다. 인촌과 수당이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되었는데, 고창에 10원짜리 하나 안 내놓았다. 그리고 그들이 사업하는 곳에 고창 사람은 쓰지 않았다. 삼양사는 끝내 소작료 1년치를 다 받고, 불하를 해 주었다. 김연수가 끝까지 못된 짓을 한 것이다. 그래서 형제간에 친일파 누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인촌이 50년대에 죽자 80년대까지 수당이 소작료의 절반을 받아먹었다. 이를 386세대들이 조종하여 삼양사와 3년간 싸움을 하게 한 것이다. 토지주들이 농지개혁 으로 소작인들에게 농지를 다 내어놓았는데, 삼양사만 80년대까지 받아먹었다.
광복 후에 지주들은 지가증권만 받고 소작농에게 주었다. 수당이 못된 짓을 하여 인촌까지 욕을 얻어먹고 있는 것이다. 수당의 일대기가 문화원에 있는데, 자기 실력에 의한 것이 아 니다. 고창에 돈을 가지고 남만주 사업을 하였다. 농지개혁을 할 때인 1948년도 까지 해야 하는데 그 뒤로 30년을 더 착취해 먹었다. 그래서 고창의 산업이 늦어진 것이다. 수당은 만 주에서 망하고, 고창의 소작농의 돈으로 삼양사를 재건하였다. 추가분 수당은 함평군 손불면에 농지가 약 30정보 있었다. 그는 30정보의 땅을 살리기 위해 간척 사업을 진행한 것이다. 만주사변 직후 물가는 오르고 노임비도 비쌌으며 인부를 구하는 것 도 어려웠다. 수당은 1933년까지 간척사업을 함평에서 진행하였는데, 1차로 제방공사를 마 치고, 2차 마무리공사를 하였다. 1931부터 33년까지 3년간 40여 정보를 개간하였다. 1939 년에 간척답 준공식을 완료하였다. 총독부에서 목포의 유달산이 풍수지리적으로 일본에 좋지 않다하여 이 산을 헐어버리고 낮 추었다. 수당은 이 돌들을 처리하겠다고 하여 동호간척사업지역으로 실어 날라 제방을 쌓은 것이다. 유달산을 해체한 돌들을 특혜 받아 싸게 불하받아 동호제방을 쌓은 것이다. 동호부 터 금평, 목동, 파랑채 밑까지 늘리게 된 것이다. 이를 마무리 해 놓고 보니 욕심이 생겨 총 독부에 특혜를 달라고 하여 입주금 및 수반되는 소작료을 총독부에서 받았다. 그가 받은 액 수는 소작인에 대해 입주하는 비용의 30-40%에 해당하는 금액을 책정해줘 받게 된 것이 다. 그는 이 돈으로 만주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수당은 일본 간척사업의 기준대로 일본인과 같은 특혜를 받은 것이다. 소작기간도 10년에서 20년으로 연장해주어 80년대 똥물사건이 터지게 된 원인이었다. 간척에 대한 소작료는 보 통 1~2년만 허가를 주었다. 1922년 인촌으로부터 경성방직과 경성직유를 받아 경영을 하였다. 그리고 더불어 간척사업 도 진행하였다. 수당이 방직경영사업을 인수했지만, 그는 엉뚱하게도 간척사업으로 10년만 에 기업인으로 성공하게 된 것이다. 경성직유는 농촌에서 뽑아 온 실로 고무신을 생산하였 다. 인촌은 고려대 중앙고보 동아일보 등만 관여하였다. 1935년도 40세에 경성방직의 주인이 되었다. 수당은 우리나라 경제계에 수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36년대 만주로 진출하여 봉천(심양)의 주재사무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남만주 방직공장 이었다. 수당은 일본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우리나라 농민들에게 반석(봉천과 길림의 경계)이라는 곳과 요동 반도 끝 영부에 200호와 220호를 입주할 수 있는 가옥을 지었다. 우리 동포들이 수당을 칭 송하였다. 이들 집도 만주국에서 특혜를 받아 만들어 진 것이다. 1939년 12월 달에 남만주 방직공장을 설립하게 되었다. 봉천에 설립한 농장은 약 17만평으로 소가동이라 불렸으며, 사방 4km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방직공장을 만들어 내었다. 17만평의 대지에 직유기가 4만대가 놓여졌다. 즉 실 뽑는 사 람만 4만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만주국 은행에서 150만원의 특혜 융자를 받게 되었다.
수당은 동호에서 번 돈 120만원과 특혜자금 150만원을 들여 남만주방적주식회사를 만들었 다. 1922년 수당이 인촌에게 인계 받을 때는 회사명이 삼수사(三水社)였다. 삼수는 성수, 연 수, 재수 세 명을 말한다. 인촌의 백부가 인촌을 양자로 받아 집안을 이어갔는데, 백부의 작 은 부인으로부터 재수라는 서자를 낳았다. 1931년도에 문관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작명의 대가였다. 문관산이 수당을 찾아 와 삼수의 뜻이 안 좋다 라는 말을 하였다. 이름도 물이고 회사 이름도 물이니 차라리 삼양 (三養)으로 바꾸라고 하였다. 그래서 삼양사가 된 것이다. 삼양의 양(養) 자는 기를 양으로, 온 천하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이름이라 하여 지어 주었다고 한다. 염전 간척사업은 1939년 9월 4일 간척답을 끝내고, 그 해 총독부에서 해리면과 심원면을 연결하는 염전 제방을 막고 자 허가를 받았다. 전라북도의 간척사업은 일본인이 3명, 한국인이 1명만이 하고 있었다. 특히 간척사업의 한 국인은 수당이 유일하였다. 그가 가능했던 것은 경도제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인맥이 좋았 다. 1939년 10월에 허가를 받아 해리면 1번지에서 심원면 고전리 1943번지까지 연결하였 다. 이 방조제를 쌓는데 일본인 업주들이 달려들어 제방을 쌓은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 자, 공사를 하던 일본인들이 각종 중기를 남겨놓고 도망 가 이를 수당이 받아 1.4km의 제 방을 완공하게 된 것이다. 1947년도 까지 제방을 마무리 짓고 군정청의 특혜를 받아 소유 권을 인정받았다. 1950년대 삼양호가 날렸다. 유달산의 돌을 실어 나르기 위해 큰 배를 투 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