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最古)의 중기구석기유적 마을, 부곡리
(이학박사, 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1.
유래와 자연환경 부곡리는 국도 23번를 따라 고창읍에서 고수면소재지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
을이다. 부곡리는 동쪽으로 와촌리, 서쪽으로 장두리와 남산리, 남쪽으로 평지리, 북쪽 으로 황산리와 접하고 있다. 부곡리는 1895년(고종 32년) 이후, 수곡면(水谷面)의 연동 (連洞)·신평리(新平里)·부곡리(夫谷里)·증산리(曾山里)로 분화되어 있었다. 그 후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곡면(水谷面)의 장암리(場岩里)․부 곡리(芙谷里)․연동(連洞)․신평리(新平里)․증산리(曾山里)와 고사면(古沙面)의 신 곡리(新谷里) 및 산내면(山內面) 점촌(店村)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부곡리가 되었 고, 고수면에 편입되었다. 부곡리는 고수면 남부에 있다. 2010년 3월 현재 면적은 3.37 ㎢이다. 경지 면적은 1.40㎢로 밭 0.39㎢, 논 1.01㎢, 임야 1.32㎢ 등으로 되어 있다. 부곡리는 법정리이고, 연동리·부곡리·증산리 등은 행정리이며, 자연촌락으로는 가마골 [부곡(釜谷․芙谷)]·갱변촌[강촌(江村)]·연골[연동(蓮洞․連洞)·마당바우[장암(場巖)]· 징새이[증산(甑山)]·묵점(墨店) 등이 있다.
1)
(蓮洞)
연동마을은 법정리로는 부곡리에 속한 행정리이며, 고수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있다. 연동마을은 옛날 수곡면에 속해 있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의 설기연대는 알 수 없으니 문헌상 1400년 연안이씨가 입향하여 설기한 마을로 그때는 고련(古連)이라 불렀다. 1500년대에는 죽산안씨가 입향하여 그 후손이 번창하고 장수하 는 사람이 많아 장년동(長年洞)으로 개칭하였으며, 1800년경부터 연동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고령(高齡)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광복 후까지도 속칭 ‘고랭이’로 불러오다가 행정리 단위로 분리되면서 연동마을로 본격적으로 불리게 되었 다. 연동마을은 옛 수곡면의 면소재지로 지금도 수곡면장이 집무하던 가옥도 보전되어 있다. 마을의 풍수형국은 연화도수(蓮花到水, 물에 이른 연꽃)형국이라 알려져 있다. 그 래서 마을의 북쪽의 연동제에 연을 가득 심었다. 연동마을은 동남쪽에서 발달한 산계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발달하였다. 이 북쪽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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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발달한 산계가 증산을 이루었다. 이 산계는 다시 증산에서 갈라져 나와 서쪽으 로 발달하여 부곡잔등을 서쪽으로 발달하였다. 연동마을은 증산의 서쪽 아래의 골 에 마을이 입지해 있다. 연동마을의 뒷산인 증산은 해발고도가 179.2m로 이 주변 에서는 매우 높은 산이다. 연동은 마을의 향이 서향이나 북쪽으로 증산의 산계가 뻗어 북서계절풍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서쪽은 부곡잔등의 나지막한 산계가 안산 역할을 하면서 마을을 보호해주고 있는 형국이다. 또한 내청룡(內靑龍)과 내백호(內 白虎)가 각각 남과 북으로 뻗어 있어 마을을 감싸주고 있다. 증산과 부곡잔등에서 발달한 마을의 수계는 북에서 남으로 연동마을 앞을 지나다가 내창과 월계 경계에 서 평지천과 합류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마을의 수구(水口)는 부곡잔등에서 남쪽으로 발달한 산계와 연동마을의 외청룡이 만나는 곳이다. 연동마을 앞의 연동 들은 깊지 않으면서도 남향으로 발달하여 여름철은 시원하고 겨울철은 온화한 마을 이라 할 수 있다. 연동마을의 가옥배치는 우백호의 산계에 있는 가옥은 남향을, 증 산을 뒤로 한 가옥은 서향이며 대체로 마을의 향인서향으로 가옥이 배치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3년 현재 연동은 45호가 거주하는데, 농가가 21호이고 비농가가 24호이다.
2) 먹점(墨店) 연동마을 관내에는 조선 초기 먹점(墨店)이라는 200여 호의 큰 마을이 있었다고 전한 다. 먹점은 마을 사람들이 먹을 만들어 팔아 생활하였는데 돈을 벌면 집에 두지를 못 하고 앞 내창마을의 창고에 보관해오고 있었다. 그 이유는 먹점마을은 배의 형국이여서 배에 짐을 많이 실렸을 때 가라앉기 때문이라는 풍수적 속설로 내려온 듯하다. 마을의 풍수형국이 행주형(行舟形)이기 때문에 마을에는 샘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 샘을 파 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풍수적 사고 때문이었다. 1970년대까지도 돛대가 달린 배 모양과 긴 장대를 제작하여 마을 양쪽에 세워 놓았다 고 한다. 먹점마을은 본래 신평(莘平)이라 불렀는데, 그 마을에는 ‘들독’이 유명했다고 전한다. 마을 앞에는 수령이 500년 이상 된 당산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면, 마을의 역 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부곡(芙谷) 부곡마을은 고수면소재지인 황산리의 남서쪽으로 약 200m거리에 있다. 부곡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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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마을이 형성되어 마당바우(場岩)이라 불렀고, 1950년대 부곡(芙谷)으로 개칭
되었다. 부곡마을이 형성되기 오래 전부터 마당 크기 정도의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어 서 마당바우라 불렸다. 여름철 논농사에서 김을 매며 농악을 칠 때도, 명절에 농악을 울리며 즐겁게 놀 때도 오직 마당바위에서에서 놀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고창읍내에 금융조합을 신축(현 동리국악당)하면서 마당바우의 바위를 깨어다가 신축했다. 이런 관 계로 지금은 그 터만 남고 돌은 사라지고 말았다. 부곡리의 자연취락은 원부곡과 강촌 마을이 있다. 이곳에 고수경노당이 있고, 조선 말기에 세운 ‘순찰사 이호준 영세불망비’ 가 있다. 부곡은 국도23호가 마을 중앙을 통과함에 따라 둘로 갈라졌고, 또 마을 앞으 로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 건설로 집단취락지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상태라 볼 수 있 다. 부곡마을은 증산에서 갈라져 나와 서쪽으로 발달한 산계가 부곡잔등을 이루었 다. 부곡잔등에서 큰 줄기는 계속 서쪽으로 발달하였으나, 남쪽으로 두 개의 산줄 기가 발달하였는데 한 줄기는 월계교에 이르렀고, 다른 한 줄기는 월계마을의 서쪽 에서 평지천을 만나 멈추었다. 부곡잔등과 회룡골 중간의 능선에서 발달한 한 산계 가 부곡마을 뒤로 북북서로 발달하다가 고수천에서 멈추었다. 부곡마을은 부곡잔등 의 동북쪽에 마을이 입지해 있다. 부곡마을의 주산인 부곡잔등은 해발고도가 75.4m의 구릉성 산지이다. 부곡은 마을의 향이 동북향이나 산계가 북북서로 발달 하여 북서계절풍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마을의 안산은 원래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 상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고속도로가 지나감에 따라 안산의 의미는 없어졌다. 부곡마을은 서에서 동으로 조 금 뻗은 내청룡(內靑龍)과 남에서 서로 작게 발달한 내백호(內白虎)가 마을을 감싸 주고 있다. 마을의 수계는 남에서 북으로 부곡마을 앞을 지나다가 부곡들에서 고수 천과 합류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마을의 수구(水口)는 현재 고속도로이다. 부곡마을의 가옥배치는 주변의 산세가 낮은 구릉성 산지로 일정한 형태는 띠지 않 으나, 좌청룡 상의 가옥은 남향이며, 우백호 상의 가옥은 서향으로 배치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4)
(甑山)
증산마을은 원래 수곡마을에 속해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하음봉씨 일가가 마을회관 앞 평지에 집을 지어 살다가 절에 농사지을 땅을 짚어 달라고 하자, 절에서 말뚝 박은 곳에 도랑을 내어 농사를 지으라고 했다고 한다. 선자동은 방죽이 있는 곳부터 송정 앞까지 도랑을 내 농사를 짓고 살다가 봉씨 일가는 망해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1600년대 말기 연안이씨가 입향해 살기 시작했으며, 이후 이천서씨도 입거하여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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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게 된 마을이다. 마을은 뒷산의 이름이 증산봉(甑山峰)으로 마을이름도 뒷산의 증산 으로 불리고 있다. 증산봉 중턱에는 농바위(籠岩)라는 4층으로 된 바위가 있는데, 가로 4m 정도에 그 높이가 약 10m 정도의 큰 바위가 있다. 또 부근에는 백제절터도 있었 는데, 이곳에는 10m 정도 되는 좌상의 석불이 있었다 한다. 그러데 구한말 전남 영광 불갑사로 옮겼다고 한다. 절터 아래쪽에는 선자동(禪子洞)이라 부르는 큰 방죽이 있다. 현재 마을 뒤로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으며, 마을에는 고창향교가 있었 다고 한다. 증산마을은 시루봉인 증산의 북쪽 아래에 입지한 마을이다. 시루봉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는 북쪽으로 발달하다가 신평 앞들의 고수천에서 멈추었다. 이 산줄기의 동 쪽에 증산마을이 입지해 있다. 즉, 증산마을은 증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가 고 수천에서 멈추기 직전 작은 동산(해발고도 77m)을 이루었는데, 이 산 아래의 동쪽 에 마을이 있다. 증산마을의 좌청룡는 고수천으로 뻗은 능선이고, 우백호는 증산에 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북쪽으로 발달한 능선이다. 마을은 동쪽이 열려 있어 마 을 입구에는 당산이 발달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의 수계는 남에서 북으로 증산마을 앞을 지나다가 신평마을 앞에서 고수천과 합류하여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증산마을의 가옥배치는 좌청룡의 산계 가운데 에 있기 때문에 증산의 안동네 가옥은 동향과 남향이 많고, 바깥 동네는 남동향이 많다.
5) 부곡리의 자연환경 부곡리의 지형은 대체적으로 시루봉 주변은 높은 산지가 발달해 있고, 시루봉 주변에는 구릉성 산들이 발달해 있다. 시루봉 주위로 남쪽에는 평지천이, 북쪽으로는 고수천이 부곡리를 감싸 안고 흐르고 있다. 부곡리로 발달한 산계(山系)는 호남정맥의 내장산에 서 갈라져 나온 영산기맥이다. 영산기맥은 입암산과 방장산을 이루고, 남남서로 발달하 다가 목포의 유달산에서 멈춘다. 부곡리의 산계는 영산기맥의 구황산(500m)에서 남쪽 으로 두평천의 왼쪽을 따라 발달하였다. 이 산계는 두평천을 따라 발달하다가 조산저수 지를 지나 부곡리 증산에서 멈추었다. 증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발달한 산계는 태봉 (110.9m)을 이루고 상갑리와 주진리에서 멈춘다. 이 산계의 시루봉의 서쪽방면의 산계 를 중심으로 남쪽에 연동과 부곡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북쪽으로 증산이 위치해 있다. 부곡리의 수계는 증산의 산계인 부곡잔등에서 갈라져 연동은 북에서 남으로 흘러 평지 천과 합류하고, 부곡의 수계는 부곡잔등에서 발원하여 남에서 북으로 흘러 고수천과 합 류한다. 증산마을의 수계는 시루봉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고수천과 합류하여 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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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산수계의 영향으로 부곡리는 임야가 약 39%를 차지하고 있으며, 밭은 약 11.6%, 논은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논의 대부분은 부곡과 증산 마을의 고수천 주 변이 차지하고 있으며, 연동마을은 상대적으로 논의 경작면적이 좁은 편이다. 부곡리의 하천으로는 연동천이 있는데, 연동천은 고수면 부곡리 1152번지 논에서 시작하여 부곡 리 601번지 논에서 끝나 주진천으로 합류하는 900m 길이의 하천이다.
6)
자연지명
(1) 연동마을 자연지명 장생이골(長栍峙) : 연동마을 입구 버스승강장 앞의 골로, 장생은 장승(長丞)과 같은 말 로 예부터 내려온 말에 의하면, 이곳에 장승이 있었기 때문에 장생이골로 불렀다고 함. 지금은 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으나 도로를 개설하면서 이곳을 4-5m나 깎아 내렸기 때문임. 서당메(書堂山) : 마을 앞 서쪽 부곡리 산 19번지 부근. 옛날에 서당이 있었다고 전해 옴. 칠성잔등(七星) : 마을 남쪽 야산의 등으로 부곡리 738번지 부근. 옛날 잔등에 바위가 7개가 한 줄로 놓여 있었다고 함. 재너머 : 마을 남쪽 잔등너머 부곡리 725-1번지 부근. 전답을 일구기 위해 야산 재를 넘어 왕래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 청정모랭이 : 마을 앞 서난간 696번지 밭 부근. 옛날에는 내창으로 가려면 이곳 길을 돌아서 왕래했다고 전함. 속물(衰村) : 마을의 남쪽에 있는 240번지 부근에 있었다는 마을. 큰 마을이 형성된 후 새로 생긴 마을. 속마을이 와전 된 것 같은데 예전 용어라 알 수 없음. 목와쟁이 : 마을 동쪽 산 39번지의 남쪽. 확실한 내력은 미상이고 목화정(木花亭)의 와 전인 것 같으나 알 수 없음. 흥덕에 목화정이 있었다고 함. 왕샘골 ; 마을 동쪽 산 228번지로 박승길 댁 뒷골. 지금도 전답 위에 작은 샘이 있음. 각금재 : 마을 동쪽 산 37번지. 속물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재로 정상에 고인돌 2기 가 남아 있음. 사점골 : 마을 남쪽에 있는 골. 솟대백이 : 마을 동쪽 산 41번지 남쪽에 있는 지명. 성균관 진사 안중섭이 진사시에 합격한 기념으로 솟대를 세웠던 곳. 쇠바탕 : 마을 북쪽 산 56번지 부근 일대. 소를 방목했던 곳이라 추측됨. 뒷골 : 마을 북쪽 2687번지 논 부근의 소류지의 골. 마을 뒤라 뒷골이라 부른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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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됨. 회룡골 : 마을 북쪽 뒷골재이며 229번지 논 부근. 부채백이 : 마을 동남쪽 산 105번지 서편. 약 60-70cm의 석불이 서 있는 곳. 소형동 자석 같은 불상인데 수십 년 전 초내마을 앞 추상봉 중턱 오재균이 지은 포상정 옆으 로 옮겨가 박혀 있음. 대문배미 : 마을 남쪽 672번지의 논으로 현재는 도로이며 모정에서 약 30m지점. 예전 에 부자가 기와집에서 살면서 지은 대문이 있었던 곳으로 논의 이름. 가재명당 : 마을 동쪽 산 93번지 내. 병절교위 안처중(安處中)의 묘지가 있는 곳. 가재 형국으로 지사 박주부의 소점이라 전함. 의충동(義忠洞) : 마을 동쪽 산 93번지 부근으로 가재명당이 있는 부근의 지명. 안처중 의 충의 정신을 기리는 이름이라 함. 대추나무골 : 마을 동남쪽 산 96번지 부근으로 산 부근에 대추나무가 많이 있어서 불 렀던 이름. 횟기재 : 마을 동남쪽 산 95번지 부근으로 생석회를 원석이 있었던 곳의 지명. 길 언 덕에 지금도 석회석이 남아 있음. 독정자등 : 마을 서쪽 620-3번지 논 부근으로 논 귀퉁이에 당산 독이 서 있음. 감나무골 : 마을 서북쪽 603번지 논 부근으로 내력은 알 수 없음. 묵점(墨店) : 연골 남쪽에 있는 마을. 먹을 만들던 점이 있었다고 함. 못시암 : 연골에 있는 우물. 옆에 못이 있었다고 함. 연동제(뒷골방죽) : 1943년 일제강점기에 소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마을주민들이 쓰고 있음. 2008년 연동제 앞에 원두막과 석상장승(石像長丞)과 나무장승을 세웠음. (2) 부곡마을 자연지명 가마골 : 지형이 가마처럼 생겼으므로 가마골 또는 부곡(芙谷)으로 불렀다. 갱변촌 : 강촌(江村)으로 연동 동북쪽 냇가에 있는 마을. 마당바우(場岩) : 부곡 북동쪽에 있는 마을. 마당바우 안에 있었던 큰 바위로 마당처럼 넓었다고 한다. 부곡잔등(75.4m) : 부곡잔등은 한마음주유소에서 장암방면 옛 국도23호구도로로 부곡 마을로 가는 낮은 고개로, 고개 주위에는 소나무 아카시아 등이 많아 인적이 없어 음 침함. (3) 증산마을 자연지명 증산(甑山, 179.2m) : 일명 시루봉, 시리매라 부르며, 시루증자와 뫼산자를 써서 증산 이라 부른다. 시루봉 아래에 고창향교가 있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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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甑山) :
동북쪽에 있는 마을.
안골 : 증산마을 뚝방길 1.5km정도 저수지 쪽에 있는 골. 승동절 : 승자동 방죽 위로 현재는 고속도로.
2.
역사
부곡리 역사는 증산유적발굴조사를 통해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삶의 공간이었음을 확 인되었다. 증산유적은 시루봉의 북쪽 서사면부에 위치하는 유적으로 유구는 해발 640~690m에 분포하고 있다. 시루봉의 능선을 따라서는 부곡리지석묘군이 분포하고 있 으며, 주변으로 삼한시대(원삼국)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주거유적을 비롯하여 분묘유 적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남고창IC 구간에서 확인된 유구 및 유물을 살펴보았을 때 구석기시대 문화층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이르는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통일신라시대의 수혈5기·기와 가마6기, 하단부에서 고려시대 건 물지가 확인되어 증산을 중심으로 한 부곡리는 고창의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중심지 였음을 확인되었다.
1) 선사시대의 부곡리 사람이 언제부터 부곡리에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부곡리 주변 화분분석 결과, 약 5,500년(홀로세 중기 기후최적기) 이전의 고창천 일대 는 저습지가 부분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당시 기후는 현재보다 다소 온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주기적인 하천범람으로 인해 퇴적물의 유입량이 많아지면서 배후습지는 점차 폐쇄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후 약 4,500년 전부터는 양치류 포자대가 발달하였 으며, 당시 기후는 현재보다 온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곡리는 대략 2,000년 전을 기점으로 인간에 의해서 경작지로 변하였으며 침엽수림으로 바뀌었다. 인위적 지층의 분포는 중립질 모래층과 사력층으로 홀로세 초기(약 9,000년)에 형성되었다. 홀로세 초 기 이후에는 기후 온난화에 따라 해수면이 상승하여 하천작용이 활발하게 되었으며, 이 로 인해 사력층이 넓게 분포하게 되었다. 부곡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시루봉(甑山)에서 발굴된 중기구석기 유적을 통해서 다. 부곡리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중기구석기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 적지는 그 시기가 최소한 기원전(B․C) 5만 년 전이다. 따라서 부곡리에는 이미 5만2천 년 전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부곡리에는 신석기 유적과 유물은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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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되지 않아 신석기시대의 부곡리는 추정할 수 없다. 다만 고창 인근의 부안이나 영광 의 해안가에서 신석기시대의 패총 등에서 유물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부곡리에도 신 석기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은 할 수 있다. 고창에 청동기 문화가 꽃을 피웠듯이 부곡리의 청동기시대도 다른 지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즉, 부곡리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곳곳에 남아 있어 부곡리 일대에 많은 사람 들이 거주하였을 것이다. 특히 연동마을의 북쪽에 있는 고인돌은 그 규모가 거대하여 당시 부곡리의 인구규모를 추정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청동기시대는 간빙기시 대로 해수면이 지금보다 더 높았다. 해수면의 상승은 하천의 범람과 배후습지가 발달하 여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은 지금의 수도경작지인 논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고인 돌의 입지가 대체로 구릉성 산지인 이유는 당시 해수면의 영향으로 하천의 범람원지역 이 아닌 곳에 고인돌을 세웠기 때문이다. 시루봉을 중심으로 많은 고인돌이 입지해 있 는 것도 약 1만전에 시작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까지의 기후대가 지금보다 더 온난하여 해수면이 상승한 결과이다. 이는 고창 고인돌의 축조시기가 중기신석기(B.C 3500년~2500년)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시루봉을 중심으로 하는 부곡리의 구릉성 산지 곳곳에 고인돌이 집단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부곡리의 중심인 연동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주변에 고인돌이 축조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청동기인들의 삶의 범위를 표시한 표시석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렇게 기록으 로 남아 있지 않은 시기를 한국사에서는 선사시대라 부른다. 선사시대의 부곡리는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그림 증산구석기유적>
2) 삼한(원삼국)시대의 부곡리 부곡리의 삼한시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삼한의 마한에는 54개국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고창에는 모로비 리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보통 이렇게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 부르고 있다. 역사시대의 시작인 삼한의 마한 땅에 있었던 고창의 모로비리국의 영역은 명확하게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역대 지리지나 사서를 통해 고창 땅에 있었다는 모로비리국의 강역을 추정해보면, 아마 주진천 유역으로 추정된다. 모로 비리국의 중심은 고창읍 도산마을로 추정된다. 그러나 도산이 처음부터 그 중심이었다 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부곡리에서 발굴․조사된 유적과 유물이 도산리 인근의 유적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즉 부곡리에는 삼한시대(또는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 분묘인 분구묘, 옹관묘, 석관묘 등의 유적과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이는 고수천 하류의 만동·예지·봉덕·남산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서고 규모는 작다. 분묘가 조성된 맞은편에는 원삼국시대의 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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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된 부곡리유적이 위치하고 있어 주거지와 분묘군이 공간분할이 이루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원래 중심지가 부곡리의 증산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시루봉이 라 불리는 말 자체가 신앙과 성지의 개념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즉 시루봉이 바로 이 근처의 성산(聖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신석기시대부터 인간이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석기인들은 인구가 적어 그 들이 필요로 하는 면적의 땅만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구가 늘 고, 청동기가 발달하면서 계급이 생기자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가능하였다. 그래서 청동 기인들은 더 넓은 곳을 개척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때 선사시대의 전통적인 중심지인 증산 주변보다는 고창천과 고수천이 만나는 도산 주변으로 이주하여 넓은 충적지를 개 간하였을 것이다. 넓은 땅을 개간한 이주민들은 이곳에 도산리고인돌을 세워 천제를 올 리고 주변에 많은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예지리에 토성을 쌓았을 것이다. 구석기시대부터 중심지였던 고수 부곡리는 점차 청동기시대로 갈수록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쇠퇴하였으며, 마한시대에는 완전히 모로비리국의 주변이 되었던 것 같다.
3)
부곡리
모로비리국의 강역이었던 부곡리는 369년 3월 근초고왕에 의해 백제의 영토로 편입되 었다. 당시 근초고왕에 의해 부곡리가 백제에 편입되었다 하더라도 마한의 모로비리국 의 수장은 100여 년간 권력을 유지하면서 백제에 경제와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구조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고창지역 삼한시대의 분묘로 추정되는 봉덕리의 분구묘는 구릉의 말단부를 장방형 형태로 다듬은 후 그 위에 성토하여 분구를 조성하였다. 봉덕리 분구의 상부에 는 석실분 5기와 옹관묘 2기를 안치하고 있는 방식으로 수혈식이라는 특징이 있다. 즉 마한의 무덤양식과 백제의 무덤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는 백제의 매장문 화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 절대적으로 마한의 옛 매장문화를 버린 것은 아니고 어느 정 도 마한의 고유문화를 유지 존속시켰다는 뜻이다. 당시 매장문화의 변화는 거의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모로비리국과 백제의 관계는 고구려의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크게 수정된다. 즉 백제가 고구려에 의해 한성(서울)에서 쫓겨나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는 5세기 에 호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무령왕은 호남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백제를 22담로로 나뉘어 왕족들을 파견하여 직할 통치하였다. 무령왕의 중앙집권 통치는 도산을 중심으로 한 모로비리국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 근거 가 되는 묘제가 부곡리 연동의 연동저수지 옆 광산김씨 선산에서 조사되었다. 연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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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 출토 확인하였는데, 이 석실분은 5세기 웅진도읍기 의 묘제 특징인 궁륭식(穹窿式, 천정이 둥근 모양의 돌방무덤)의 채용과 긴 연도 및 방 형의 매장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볼 때 연동의 횡혈식석실분은 고창지역에 처음 으로 나타난 백제의 고마나루(熊津으로 지금의 공주)도읍기의 분묘로 추정된다. 즉 웅 진도읍기의 대표적인 묘제인 횡혈식석실분이 마한지역에 출현한 시기는 웅진 천도 후 국가의 위기를 수습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가 이루어진 때이 다. 백제는 고창을 직접 중앙집권통치하면서 과거의 중심지인 도산세력을 배제하고, 새로운 세력이자 도산의 정치세력의 변두리인 고수일대의 제지 세력들을 규합하여 통치를 강 화하였을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유적이 바로 연동마을의 횡혈식석실분이다. 잠시 연 동이 중심지가 되었다가 다시 6~7세기 사비(지금의 부여)시대에 들어서면서는 고수 예 지리로 중심지를 옮긴 것 같다. 예지리에 사비시대의 묘제양식의 원형이 발굴되었기 때 문이다. 한편 부곡마을 동편의 부곡리 347번지에 삼국시대의 주거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지에 모두 26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연동마을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능선의 남쪽 아래와 연동마을의 들을 건너 서쪽의 앞 산 및 증산마을의 북쪽의 구릉에 삼한시 대부터 삼국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부곡리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 연동횡혈식 석실분>
4)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이후의 부곡리 백제의 도성인 사비가 660년 7월 함락당하고, 의자왕과 백제의 신료 및 백성들 1만 2 천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이후 백제군들은 흑치상지․복신․도침을 중심으로 부흥전 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왜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 이 복신을 죽임으로써 백제부흥군은 자체 분열로 망하고 말았다. 왜의 군세만 믿고 복 신을 죽였던 부여풍은 결국 663년 8월 26일과 27일 양일간의 나당연합군과 제․왜연합 군의 백강전쟁(지금의 부안 두포천과 계화도 내해 일대)에서 패하자 고구려로 도망가고 말았다. 백제와 왜 연합군은 663년 백강전쟁 후부터 9월 7일까지 십여 일에 걸친 처절 한 마지막 전투를 고비로 결국 주류성(지금의 부안 개암사의 위금암산성)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당시 이 백강전쟁은 고부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중방이 그 핵심전력이었다. 중방은 고 부를 중심으로 정읍, 부안, 김제, 고창 등지였다. 백제는 200개의 성이 있었고, 이 성 들은 군사와 행정 조직이었다. 고창에는 백제의 4개의 현이 있었다. 이는 고창의 인구 부양능력이 인근의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았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창은 군 수물품 보급뿐만 아니라 인력동원에도 유리하였다. 부흥백제국 수뇌부는 고창의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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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전쟁에 적극적으로 끌어 들였을 것이다. 패망한 백제인들은 부안에서 고창을 지나 함평으로 가다가 신라군들에게 짓밟혔다. 함평군 신광면 삼덕리 서군교(誓 軍橋)에는 썩은다리 전설이 남아 있다. 서군교 옆에는 ‘신라흥무왕서군교유허비(新羅興武王誓軍橋遺墟碑)’라는 비가 세워져 있 다. 신라의 흥무대왕은 김유신장군을 말한다. 패망한 당시 백제의 유민들은 부곡리 앞 을 지나 영광으로 해서 일본으로 피난하였을 것이다. 조선조 성종은 김해김씨에게 개암 사 입구의 넓은 땅을 사패지지로 주는데, 그 이유가 바로 김유신장군이 백제를 구원하 기 위해 온 4만 2천명의 왜를 몰아냈기 때문이었다. 백강전쟁 이후 한반도 남부를 점령한 당나라는 667년부터 신라와 매초성전투까지인 672년까지 고창을 무할(無割)로 개명하여 잠시나마 불렸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부 곡리는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에서 신라의 고창현(高敞縣)에 속한 마을이 되었 다. 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권36, 잡지 제5, 지리3의 지리지에서 볼 수 있다. “
원래 백제의 무시이군을 경덕왕 때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영광군이다. 이 군에 속한 것이
셋인데 장사현(長沙縣)은 원래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을 경덕왕 때 고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 다. 고창현(高敞縣)은 원래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을 경덕왕 때 고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르며, 무송현(茂松縣)은 원래 백제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을 경덕왕 때 고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라고 되어 있다.
경덕왕 16년 부곡리가 속한 고창현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고창현에 속하였다가 1914년 부군통합령으로 고창군에 속하게 되었다.
5)
이후의 부곡리
고려시대 부곡리가 속한 고창은 고부군(古阜郡)에 붙였다가 뒤에 상질 감무(尙 質監務)가 와서 겸임하도록 하였다. 조선 태종 원년(1401년)에 고창현과 흥덕 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준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부곡리의 고려 시대와 조선시대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부곡리의 남고창IC 발굴조사결과 이 주 변에서 절터가 발견되었다. 주변의 건물지에서는 기단석열과 건물지 1동, 집수정 등이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중기까지의 것으로 추 정되었다. 지금도 이 유적은 남고창IC에 남아 있다. 2009년 호남문화재연구원의 발굴 조사 결과, ‘聖山寺址’가 위치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석조불상편이 발견 되었다. 또한 남고창IC구간에서‘ 大寺’명의 명문와가 수습되는 등 구전에서 전해지던 ‘聖山寺址’로 추정되는 건물터도 확인되었다. 이러한 출토유물을 통 하여 건물의 연대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 중기가 그 중심인 것으로 판단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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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한다. 부곡리의 고려시대는 성산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고, 이 절의 이름을 통해 최소한 고려시대까지 증산이 이 일대의 성스 러운 성산이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지명학적으로도 시루라는 명칭을 가진 산 은 신앙 유적지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6) 대량평부곡으로 추정되는 부곡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고창현 고적조(古跡條)에 "대량평부곡(大良坪 部曲)은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大良坪部曲在縣南十五里)"고 기록되어 있다. 부곡(部 曲)이란 특수 행정구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주목(驪州牧) 고적 등신장조(登神莊) 에 “이제 살펴보건대 신라가 주군현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이 될 수 없는 것은 향 또는 부곡으로 두어 그 소재하는 읍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한 기 록으로 미루어 부곡이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사실과 인구나 토지가 군이나 현의 규 모에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향과 부곡은 신라가 만들었고 소, 장, 처는 고려가 설치했는데, 신라는 통일전쟁의 승리로 많은 노예를 확보하게 되자 고 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신라의 노예로 삼을 목적으로 이들을 자국 영토로 끌고 와 격리 하여 천민 집단인 향과 부곡을 만들었다. 다음으로 향과 부곡은 전라도에도 25% 있다. 죄수 등 다른 천민도 살았겠으나 신라의 정복전쟁 과정에서 패배한 백제 유민 등의 집 단 거주지가 바로 향, 부곡이었다는 설이 있다. 부곡의 수는 조선시대 들어 점차 줄어들어 1454년(단종 2)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가 편찬되었을 당시 부곡은 68개소, 1530년(중종 25)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을 당시에는 향소부곡을 통틀어 14개소로 줄어, 여말 선초의 사회 변동 과정 을 거치면서 점차 소멸되었다. 고창의 대량평부곡은 고창현에서 남쪽으로 15리(약 6㎞)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창현 읍지』 고적조에는 “대량평부곡은 현의 남쪽 15리에 있다. 지금 살펴보건대 고사동에 폐현의 옛 터가 있는데 이곳이 옛날의 대량평이지 않을까 한다.”라고 기록하여 이곳을 고사동으로 추정하였는데, 고사동은 지금의 고창읍 내동리 고사마을로 고창읍성에서 직 선거리로 약 3㎞ 떨어져 있어 15리라는 거리와는 차이가 많이 난다. 대량과 발음이 비 슷한 곳으로 고창읍 노동리 대양마을이 있는데 이곳도 거리상으로 맞지 않는다. 한편, 고수면 부곡리(芙谷里) 부곡마을은 명칭이나 거리상으로 대량평부곡이 있던 곳이 라 하기에 적절한 지역이다. 부곡리는 조선 말기 고창군 수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지 형이 가마처럼 생겼으므로 가마골 또는 부곡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변천 과정은 『고창현읍지』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아 현재로서는 대량평부곡이 정확히 어느 곳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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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대량평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오씨(吳氏)·박 씨(朴氏)·김씨(金氏)·윤씨(尹氏)·송씨(宋氏)로 기록되어 있으며, 『증보문헌비고』에는 박씨 만 보인다.
3.
입향조(入鄕祖)와 내력
1)
죽산안씨(竹山安氏) 입향
연동마을의 죽산안씨는 1530년대 고수 예지에 살던 소(沼)의 손 성(惺)이 부곡리 연동 으로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연동마을의 죽산안씨 시조는 방준(邦俊)이며, 파조는 자 전(子詮)이다. 19世
20世
惺
方俊
21世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暾
弘建
夢弼
國憲
㠎
守宅
1530대 입향
27世
28世
29世
30世
31世
32世
33世
34世
邦宇
時유
基燮
蒙壽
允善
道淵
相喆
成燻
2) 연동마을과 금녕김씨(金寧金氏) 입향 연동의 금녕김씨는 1860년대 용숙(溶淑, 1836~)이 본래 전남 광산군 하남면 수남리에 서 은거지를 찾아 고수면 평지리 수곡으로 옮겨 왔다가 죽산안씨가의 사가록(査家綠)으 로 연동에 이어오고 있다. 연동마을의 금녕김씨 시조는 시흥(時興)이며, 파조는 문기(文 起)이다.
世
世
世
世
世
世
世
1836
鳳權
炯哲
東圭
鎭洙
長淵
楨雨
-
3) 연동마을과 이천서씨(利川徐氏) 입향 연동의 이천서씨는 1780년대 종상(宗相, 1746~)이 본래 전남 장성군 서삼면 용흥리 연 산에서 부곡리 연동으로 입향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연동마을의 이천서씨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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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신일(神逸)이며, 파조는 능(稜)이다. 19世 宗相
20世 致玉
21世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在逕
相連
宗煥
基俊
寬泳
寅齊
4) 증산마을과 경주이씨(慶州李氏) 입향 증산의 경주이씨는 1800년대 중반 래순(來淳, 1815~1854)이 본래 전남 영광군 묘량면 이문리에서 고수면 부곡리 증산으로 입향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증산마을의 경 주이씨 시조는 익비(益庇)이며, 파조는 양중(養中)이다. 19世
20世
惺
方俊
1530대
21世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暾
弘建
夢弼
國憲
㠎
守宅
입향
5) 증산마을과 연안이씨(延安李氏) 입향 증산의 연안이씨는 승석(承奭)의 부인(여상과 여표의 모친)이 11 자제를 데리고 난세를 피해 외척이 있는 고수면 평지리 무실골을 찾았다가 연동에 정착하였다. 그 후 1670년 경 여표(汝標, 1583~1664)가 다시 이웃마을인 증산으로 입향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증산마을의 연안이씨 시조는 무(茂)이며, 파조는 공승(公升)이다.
16世
17世
18世
19世
20世
21世
22世
23世
汝標
晩弼
翼晟
世爗
光朝
墉
遇觀
英九
24世
25世
26世
27世
28世
29世
30世
炳祖
甲寧
成台
宗範
庸達
德新
聖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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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물과 행적 안중섭(蓮上 安重燮 1812~1883) :
순화(舜華)이고 호는 연상(蓮上)이며 본관
은 죽산(竹山)이니 참판공 초(迢)의 후손이고 만재 주욱(晩齋 周郁)의 아들이다. 순조 12년(1812)에 고수면 연동리(蓮洞里)에서 출생하여 가학으로 글을 배우고 순조 21년 (1821) 묵재 이가백(黙齋 李可白)의 문하에서 수업했으며 뒤에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 鎭)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경사자집을 모두 손수 필사하여 읽었다. 그는 특히 성리학에 잠심하여 스승 노사와 학문적인 논의를 하여 터득하였다. 당시 노사의 문하에는 덕행과 학문이 뛰어난 인재가 많았으나 스승 노사는 항상 연상의 독실한 덕행과 간오(簡奧)한 문장을 보고 참으로 당세의 통유라 칭찬했다. 그리고 참판 이윤수(李潤壽)가 노사에게 저술을 부탁하니 연상을 추천하여 짓게 하였다. 그는 집에 수천 권의 책을 모아 주야 로 학문연구와 저술을 하였고 모여드는 문도들에게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단정히 앉아 논어와 맹자와 서경 등을 읽었고 글을 지을 때는 뜻만 통달하 면 되지 미사여구를 즐기지 않았다. 그는 용강정사(龍岡精舍)를 수리하여 친구나 문인 들과 예학을 강론하고 문장을 익혔으며 평생 쌓은 학문으로 많은 문도를 배출하였으며 덕행으로 향풍을 진작시켰다. 고종 17년(1880) 69세 3월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고종 20년(1883) 6월에 졸하니 향년 72이다. 저서로 연상집(蓮上集) 6권 2책이 있고 문인 에 유준철(柳浚喆), 김기풍(金箕豊), 정만원(鄭晩源), 안정수(安鼎壽), 이병학(李炳學), 유구현(庾九鉉) 등 수십 명이 있다.
5. 마을의 문화유적과 유물 부곡리 증산유적 : 고수면 부곡리 산75번지와 301번지 일대의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 통과지역의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에는 지석묘 20기와 함께 둘레로 2중의 구가 부가 되어 있어 지석묘군의 묘역을 표시한 의도적인 구획으로 고창지역의 지석묘 연구에 중 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사결과 구릉의 사면을 따라 상부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수 혈5기·기와 가마6기, 구릉하단부에서는 고려시대 건물지가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 이 번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이전 복원만을 위한 지역으로 면적1,416㎡ 내외의 비교적 협소한 구간에 해당한다. 유구는 조사지역 외부로도 이어지고 있으며 구릉 하단부 쪽으 로는 남고창IC구간에서 조사된 유적이 바로 인접해 있다. 이 유적에서도 동일한 시기의 수혈 가마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조사구역 과 함께 구릉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건물지가 이어지는 것으로 여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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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조사구역의 중앙부에서 등고선을 따라 확인된 5기의 수혈은 크기와 형태에 있어 차이를 보이며 이중 2기‘L’자형 수혈로 유구의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으나 기존에 확 인되던 수혈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기와 가마는 6기가 조사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남쪽 조사구역의 외곽으로 이어지고 있 으며 남고창IC구간에서도 유구가 확인되고 있어 가마의수는 더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 진다. 가마는 지하식과 반지하식의 등요로 내부에서 기와들이 확인되며, 일부 남고창IC 구간에서는 기와 가마를 비롯하여 토기 가마도 확인되고 있어 건물지와 관련하여 건물 지의 기와수급을 위하여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건물지는 조사구역의 구릉하단부인 서쪽에서 확인되었는데, 구릉 하단부 쪽으로 연장되 며 이번에 확인된 부분은 전체건물의 가장 동쪽끝부분으로 추정된다. 계단식 밭으로 경 작되던 구간으로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규모 및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분포범위가 남고 창IC구간까지 확장되며 내부에서 출토된 기와 및 청자편 치미편 등으로 보았을 때 비 교적 대규모의 건물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은 지표조사를 통하여 ‘聖山寺址’가 위치하 는 곳으로 추정되던 지역이며 인접하여 석조불상편이 위치하고 있고, 남고창IC구간에서 ‘△大寺’명의 명문와가 수습되는 등이 건물지는 구전에서 전해지던 ‘聖山寺址’로 추정 된다. 또한 출토유물을 통하여 건물의 연대는 통일신라 고려시대 중기가 그 중심인 것 으로 판단된다. 이상으로 부곡리 지석묘군 이전 복원부지 내에서 확인된 증산유적을 통 하여 이지역의 청동기시대부터 확인되던 고대문화의 흐름을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이르 는 단계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고창 부곡리 증산 유적Ⅰ, 2009) 성산사지(聖山寺址) : 성산사지는 고수면 부곡리 288번지로 추정된다. 이 터는 증산마 을 뒤편 야산의 서측 하단부로 현재는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사찰은 이미 소실되 어 창건연대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제때부터 성산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조 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곳 주변에는 많은 석재와 유구들이 흩어져 있어 고수초등학교에 이곳에서 수습된 암수의 막새들과 와편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 막새는 그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뿐인 성산사(聖山寺) : 고수면 부곡리에 성산사의 옛 터가 쓸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절터의 뒷마을 이름이 증산(甑山)인데 승려들이 붐벼서 증산이라고 부르게 되었 다고 하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아주 오랜 옛날 증산마을에 봉씨(奉氏) 한 사람이 높 은 벼슬을 지내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성산사의 승려들이 문안을 올리지 않는다고 하 나둘씩 절을 버리고 멀리 떠났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높은 벼슬을 했다는 봉씨는 조선시대의 세도가로서 당시 숭유척불사상으로 승려들을 괴롭힌 것으로 추측된 다. 절터 주변의 들판을 성산이라고 하며 절터에 있는 연못을 성산지라고 부르는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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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어 사찰 이름이 성산사로 생각되며, 이 절은 이름 높은 사찰이어서 고승들의 수도처였다고 한다. 예부터 고승들이 있는 곳에는 돌로 만든 말을 세워 절의 입구를 밝힌다고 하는데, 약 40여 년 전 일본 사람이 이 석마를 가져가고 말고삐를 매는 돌로 만든 말뚝만 남아 있 다. 이 절터에는 상반신이 없는 석불이 있는데 상반신은 증산마을에서 학독을 만들었으 며 이 학독을 만든 이는 눈이 멀었다고 한다. 이 절을 처음 세운 분은 고구려의 고승으로서 고구려 장수왕의 오해를 사서 남으로 피 신해 왔다고 전하는데 그때 비둘기 한 마리가 이 고승을 안내하여 이 성산에 오게 되 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터만 남은 이곳은 우리 전통적인 불교유적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도 많은 기와 조각이 나오고 있다. 이 기와는 신라시대 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상반신이 없는 석불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분군 : 고수면 부곡리 산 63번지에 있는 삼국시대의 분묘이다. 연동마을의 맞 은편 광산김씨 묘역과 연동마을 뒤편 야산에 6기의 고분이 분포한다. 광산김씨 선산 내의 고분은 황혈식 석실분으로 분묘의 조성시 연도 일부와 장벽이 파괴되었다. 현재는 1매의 개석과 벽석 일부만이 남아 있다. 고분의 장벽은 하단부를 1매의 판석으로 세워 쌓고 위에 2줄의 장대석을 눕혀쌓아 천정석과 연결되고 있다 단벽은 1매의 판석을 세 워 놓았으며 약간의 분구가 남아 있다. 연동마을 뒤편의 고분은 장단벽의 석재 1매씩 만 남아 있는데,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하며 대표적인 고분의 크기는 277 ×94×40cm이다. 부곡리 유적 : 고수면 부곡리 347번지에 있는 유적으로 삼국시대의 주거유적지이다. 이 유적지는 동서로 길게 뻗은 능선상에 자리하며 북사면과 서사면 하단에서 모두 26 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조사된 주거지는 방형계로 내부시설로는 주공, 벽구, 화덕 시설 등이 확인되며, 장란형토기, 시루, 호형토기, 고베, 뚜껑, 파수, 옥 등이 출토되었 다. 부곡리 유물산포지 1 : 고수면 부곡리 1177번지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 가지의 유물산포지이다. 이 유물지는 연동마을 뒤편에 까끔재라 불리는 재에서 서측으 로 뻗어 내린 해발 66m 야산의 하단부로 7개의 바위가 있어 칠암산이라 불린다. 현재 는 전사면이 개간되었으며, 구릉의 중단부는 연동마을에서 평지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개 설로 일부가 전단된 상태이다. 유물은 전사면에 걸쳐 무문토기, 경질토기편, 연질타날 문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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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곡리 유물산포지 2 : 고수면 부곡리 905-3번지에서 수습된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 의 유물산포지이다. 내천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인접하여 남측에 위치한다. 남-북으 로 흐르는 구릉성 산지로 남측에는 평지천이 흐르고 있다. 구릉은 현재 밭으로 경작되 고 있으며, 철탑이 세워져 있다. 구릉은 도로에 의해 일부가 절개된 상태이며, 유물은 전산면에서 옹관편을 비롯한 연질토기편, 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부곡리 유물산포지 3 : 고수면 부곡리 산76-2번지에서 수습된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 대의 유물산포지이다. 증산마을 뒤편 구릉으로 부곡리 지석묘군 유적의 하단부에 위치 한다. 현재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정상부와 북사면은 공동묘지로 이용되고 있다. 유물은 북사면의 단애면에서 옹관편이 상당수 수습되었으며, 민묘 이장으로 파헤쳐진 부분에 옹관편과 연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부곡리 지석묘군 상석채굴지 : 고수면 부곡리 산72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 상 석채굴지이다. 부곡리 지석묘군 유적의 뒤편 시루봉 중턱에 화강암으로 된 암벽이 나타 난다. 연동에서는 범바위, 농바우, 장군바우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암벽은 채석된 흔적이 군데군데 확인되는데 쇄기흔과 벌어진 틈으로 돌을 막아 넣은 흔적이 확인된다. 부곡리 지석묘군 : 고수면 부곡리 산72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다. 부곡리 지석묘 유적은 시루봉 말단부의 능선상에 위치한다. 이곳의 지석묘는 상석이 남아 있는 것이 3기와 지석묘 주위와 능선을 따라 조성된 묘제 17기가 확인된다. 지석묘는 석관 형이며, 지석은 주형지석이 확인된다. 이 유적 주변에는 석관, 석곽, 토광 등 다양한 내부구조를 가진 묘제가 확인된다. 부곡리 지석묘군1 : 고수면 부곡리 738-11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다. 부곡 리 지석묘1 유적은 칠암산 정상부에 5기의 지석묘가 분포한다. 지석묘는 동-서 방향으 로 구릉 정상부를 따라 열 지어 있다. 그 중 가장 큰 지석묘의 크기는 265×175×91cm 로 상석의 형면형태는 타원형에 가까우며 단면형태는 장방형이다. 지석은 보이지 않는 다. 부곡리 지석묘군2 : 고수면 부곡리 산37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다. 부곡리 지석묘2 유적은 연동마을 뒤편 까끔재 정상부에 4기가 분포한다. 그 중 대표적인 지석 묘의 크기는 280×209×53cm로 상석의 평면형태는 원추형이며, 단면은 장타원형이다. 장축은 대체로 동~서 방향을 이루며 지석은 묻혀 확인되지 않는다. 상석의 상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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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이 확인되나 정형성은 파악할 수 없다. 지석묘군3 : 고수면 부곡리 산63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다. 부곡리 지석묘3 유적은 연동마을 북측과 뒤편 야산으로 12기의 지석묘가 분포한다. 3기는 연 동마을 뒤편 야산의 대나무 숲에 있으며, 남~북 방향으로 열지어 있다. 4기는 30m정 도 떨어진 시루봉의 사면을 따라 분포하며 맞은 편 광산김씨 분묘가 위치한 구릉 정상 부에 5기의 지석묘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지석묘의 크기는 448×223×120cm로 상석의 평면형태는 원추형이며, 단면은 장타원형이다. 이곳에는 지석 3기가 확인되며 지석의 높이는 68cm이다. 연동 마을의 북쪽 모정 옆에도 과거 지석묘의 상석은 비석 등을 만들면서 사라지고 지금은 석곽만 남아 있다. 부곡리 지석묘군4 : 고수면 부곡리 902-3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군이다. 부곡 리 지석묘4 유적지는 연동마을 서쪽의 구릉성 산지에 12기가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개간되어 밭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곳에 5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다. 또한 바로 인근에 3기가 군집으로 분포하고 있다. 그 중 규모가 큰 것은 240×140×71cm로 상석 의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단면은 장타원형이다.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부곡리 지석묘군5 : 고수면 부곡리 429번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이다. 부곡리 지 석묘5 유적지는 평촌마을 서쪽 고수천 건너편 논둑 위에 1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 지 석묘의 크기는 257×220×70cm로 상석의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단면은 장방형을 띤다. 장축은 남서~북동 방향이며 지석 2개가 확인된다. 부곡리 중기구석기 유적 : 고창 부곡리 증산유적은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 한 유구가 조성되었다. 지금까지 조사된 유구와 출토유물을 통해 발굴조사 성과는 다음 과 같다. 유적에서 검출된 석기제작소의 존재가 여러 층에 걸쳐 확인되고 있다는 점으 로 미루어 여러 시기에 걸쳐 석기 제작행위가 이루어졌다. 출토된 석기들은 주먹도끼나 양날찍게, 긁개와 흠날석기 등이 있는데, 이는 호남지역의 구석기시대를 복원하는데 중 요한 유적이다.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 분묘는 분구묘, 옹관묘, 석관묘 등 다양한데, 이는 고수천 하류의 만동·예지·봉덕·남산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서고 규모는 작다. 분묘 가 조성된 맞은편에는 원삼국시대의 주거지 26기가 조사된 부곡리유적이 위치하고 있 어 주거지와 분묘군이 공간분할이 이루어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주변의 건물지에서는 기단석열과 건물지 1동, 집수정 등 남북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중기까지의 것으로 추정 하였다. 중기 구석기 유구가 확인된 것은 “호남지역에서 처음이며, 호남지역에서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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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시기에 형성된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조선대 이길수 교수는 밝혔다. 또한 “중 기구석기시대의 대표적 출토유물인 원초형 주먹도끼가 출토된 것은 매우 의미가 높은 것”이며 “예리한 날의 깎개가 늘고 홈날칼과 톱니날칼을 만들었던 석기제작소가 확인 된 것은 호남고고학계의 경사”라고 정리하고 있다. 증산유적은 시기적으로 BC 5만 년 전에서 BC 12만년까지 추정되고 있다. 김빈길(金贇吉) 묘 : 고수면 부곡리 567-2번지에 있는 김빈길장군의 묘역이다, 김빈길 장군(미상∼1405년)의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죽강(竹岡)이다. 태조(太祖) 때의 무인으 로 낙안(落雁) 출신이다. 성품이 충직(忠直)하고 근검(勤儉)하였다. 1394년(태조3) 전라 수군첨절제사(全羅水軍僉節制使)로 있을 때 만호(萬戶) 김윤검(金允劍) 김문발(金文發) 등과 함께 왜적의 배 3척을 섬멸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같은 해 투항해 온 왜인이 도망간 일로 인하여 최운해(崔雲海)‧이구철(李龜鐵)‧김영렬(金英烈) 등과 함께 국 문(鞫問)을 당하였는데 이때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그 죄를 감해 주기를 청하여 얼마 후 유배되고, 모두 수군(水軍)에 다시 편입되었다. 1405년(태종 5)에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되었을 때에는 도내(道內)의 요해처(要害處)에 다 만호(萬戶)를 두고, 병선(兵船)을 나누어 정박시켰고 또한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군비를 비축하게 하여 주는 것만을 바라는 폐단을 없애고. 평소 아랫사람을 대함에도 한 치도 소홀함이 없었다. 예로 그가 수군절제사로 있을 때에도 항상 사졸(士 卒)들과 더불어 감고(甘苦)를 같이하였고, 또한 도적을 쫓아 행선(行船)할 때에도 분연 (奮然)히 몸을 돌보지 않아 군사들이 모두 사력(死力)을 다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승 리하였다. 상을 받으면 항상 군사(軍士)의 공(功)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비 록 외진 백성들이라도 그의 은혜을 입었다. 후에 양혜(襄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이 하나 있으니 김원량(金原亮)이다. 백인당(百忍堂) : 용강정사 옆에 있는 정자로 안중섭(安重燮)의 아들 후석(後錫), 현석 (玄錫), 태석(台錫), 길석(吉錫)의 4형제가 정자를 짓고 선비들과 더불어 시를 읊고 놀 았다고 한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생기터(鄕校터) : 증산 아래 서순성씨 댁이 옛 고창향교터였다고 전한다. 수남정(水南亭) : 연동 뒤에 있는 정자로 본래 광주 어등산(魚登山) 아래 수남촌에 있 던 것인데 백은선(白隱善)이 이곳으로 옮겨지었다으나 현재는 파손되어 터만 남아 있 다. 이석덕 묘비(李錫德 墓碑) : 고수면 부곡리 산27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비이다.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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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측에 있는 시루봉에서 뻗어 내린 나지막한 야산의 말단부에 이석덕의 묘와 묘비 및 문인석이 있다. 비는 지붕형태의 옥개형 비수를 가지며 비신은 화강암제로 남 들었다. 전면에는 “통정대부경주이공휘석덕지묘 숙부인경주김씨 부좌(通政大夫慶州李公 諱錫德之墓 淑夫人慶州金氏 祔左)”라 각자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오이년팔 월(崇禎紀元後五二年八月)”이라 쓰여 있다. 비의 크기는 187×46×22cm이다. 수곡면사무소 터 : 연동마을은 고수면으로 통합하기 이전 수곡면의 면소재지였으나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곡면(水谷面)이 고사면과 통합하 여 고수면이 되면서 지금의 황산리로 고수면소재지가 이전되었다. 옛 수곡면사 무소터는 부곡리 연동 ??번지이다. 연동마을 당산 : 연동마을은 오랜 역사만큼 마을의 안녕과 수호를 위한 자연석 당산이 4곳이 있다. 4개의 당산은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산을 건드리거나 훼손하 면 천벌이나 재앙을 받는다는 믿음이 전해오고 있어 지금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선돌 인 당산은 연동 모정 옆, 연동교회 앞 부곡리 655번지 김영철씨댁 담장 지상 75cm의 자연석이다. 또한 마을 서쪽 부곡리 620-1번지 답에 있는데, 원래는 부곡리 613-2의 논가 길옆 느티나무 밑에 있었다가 경지정리사업으로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그곳을 독정자등이라 불러왔다. 1기는 마을 앞 서남쪽 부곡리 667번지의 논 둑에 있으며, 1기는 마을 어귀 626번지 주택 뒤 대밭에 서 있다.
6.
전설과 풍속
부곡잔등과 양민학살 :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된 지역으로 70년대 초까지도 인골이 다량으로 널 부러져 있었고, 옹기항아리로 된 일반 초분도 많이 있었 던 곳이다. 즉 영광경찰서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정읍을 거쳐 고창관내로 진입한 다는 소식을 듣고 영광군의 좌익의 사람들과 부역을 한 영광군민을 약 40~50명을 두 대의 트럭에 싣고 이곳에서 학살하였다. 그 후 부곡잔등을 저녁 늦게 지나 올 때는 귀 신이 나올 것 같아 사람들이 무서워하던 곳이라 한다. 일제강점기 퇴비증산 장려책과 가마니 짜기 : 1929년 일제강점기 연동마을은 퇴비장려 책 우수마을로 선정이 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모정 앞에서 모여 퇴비증산경진대회를 실 시하였다고 한다. 청장년들이 산에서 풀을 지게에 한 짐씩 베어 와서 무게를 잰 후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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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고 풀을 많이 베어 온 사람에게 1등상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고창군 배석린군수와 일본인 도지사가 나와 경진대회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고 한다. 퇴비증산정책으로 마을 의 쌀 생산량은 급격하게 늘었다고 한다. 다음해 봄부터는 가마니짜기 경진대회를 마을 앞 논에서 개최하여 동일 시간에 가장 많은 가마니를 짠 팀에게 1등상을 주어 가마니 자기를 적극 권장하였다. 이러한 연동마을의 사업은 이웃마을로 보급되어 농가소득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이 가마니는 양곡출하용으로 근래까지 사용하다가 마대가 나오면서 가마니사용이 폐지되어 농가소득이 많이 감소하였다. 무성영화(활동사진)상영 : 연동마을은 가마니짜기 경진대회와 퇴비증산 경진대회가 끝 나면 밤에 활동사진(무성영화)을 상영하여 주민들이 모여 함께 보기도 하였다. 일제강 점기에 연동마을이 고수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인구감소와 농토 가 좁아 가장 가난한 마을이었다. 마당바우와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 노령산맥의 줄기인 고수면 부곡리(芙谷里) 증산봉 (甑山峰)에서 서쪽으로 이어져 내린 곳을 마당바위라고 한다. 이곳에는 먼 옛날부터 높 이 3m, 넓이 20m 가량의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모습이 마당과도 같이 넓어 마당바위라고 불렀다. 안씨(安氏) 선대 선산의 좌청룡 가닥으로 마당바위가 있었는데 1920년도에 안씨 종중 의 한 사람이 그 바위를 팔아 넘겨 고창고교, 고창우체국 및 금융조합의 주춧돌이 되 었고, 고수 예지보(禮智洑) 장자보(長者洑) 구레보 등을 쌓았다. 그런데 그 바위가 없어 진 뒤 풍수지리에 밝은 한 도인(道人)이 지나가다가 청룡자락이 허물어져 요사(夭死)가 일어나겠다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그 예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안씨 종중에서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일이 많이 생겼는데 마당바위를 깨뜨리지 않았으면 요절하지 않고 수 (壽)를 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위 밑에는 도내기샘이라고 불리는 옹달샘이 있었으며 물이 차고 시원하여 널리 그 이름을 떨쳤는데, 심지어는 평양기생들의 소원이 마당바위에 앉아 놀면서 도내기 샘물 을 마셔보는 것이라고 하였다니 가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또한 호랑이 점쟁이라는 무녀는 도내기 샘을 신령이 깃든 것으로 여기어 약수로 이용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내기 샘이 묻혀져 있지만 바위가 있던 자리를 찾아 샘을 파 면 샘물이 솟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바위는 없어지고 그곳에 마을이 생겨 마을 이름 을 마당바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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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현황과 생활상
1)
인구 변화(
전체, 위는 남성, 아래는 여성, 단위 : 명)
부곡리의 인구변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부곡마을의 2012년 12월 현재의 인구는 97 명으로 2003년 12월 122명보다 25명이 감소하였다. 이는 10년 전보다 약 8%가 감소 하여 연평균 0.8% 이상 인구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곡의 인구감소는 군단위 의 농촌마을에서도 인구감소율이 거의 없는 것이다. 연동마을의 2012년 12월 현재의 인구는 88명으로 2003년 12월 97명보다 9명이 감소 하여 연평균 인구감소율이 0.9%이다. 증산마을의 2012년 12월 현재의 인구는 58명으 로 10년 전인 2003년 12월 55명보다 3명이 증가하여 10년 전에 비해 인구가 5.45%가 증가하였다. 이는 농촌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부곡리는 전체적 으로 2012년 12월 현재 10년 전에 비해 약 12%의 인구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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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12 58 12 57 14 59 11 51 12 55 12 55 10 48 13 62 11 54
곡 연 동 증 산
2 97 55
64 42 55 30 25
1 97 60
64
0
81
6
65
66
2
1
66
9
61
42 11 55 11 56 10 54 11 57 10 50 55 32 28
1 51
56 29 22
6 56
60 32 24
50
4 53
30 23
0 55
53 32 23
2 56
52 32 24
4 87 59
72 48 39 33 26
8 89 61
64 48 41 37 24
2012. 12.31 97 88 58
47 54 49 39 34 24
2) 부곡리의 산업과 생활상 부곡리는 평지천과 고수천 사이에 두고, 부곡리의 대부분은 시루봉이 차지하고 있다. 마을들은 시루봉 바로 아래 능선의 서쪽에 연동마을이 있고, 부곡은 시루봉의 능선인 부곡잔등 아래 동쪽에 있으며, 증산은 시루봉 바로 아래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 지 역은 평지천과 고수천의 범람원지대에 있기 때문에 비옥한 농토 위에 농업이 발달해 있다. 부곡리의 대부분은 논농사가 발달했다.
3) 성씨별 거주 현황(2013. 8월 현재) 성씨별 인구현황은 각 마을의 이장들이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정리하였기 때문에 면사 무소의 통계와 다를 경우가 있다. 부곡리의 각 마을별 성씨 분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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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동 (36가구) ◦ ◦ ◦ ◦ ◦ ◦ ◦
죽산안씨 6가구 금녕김씨 4가구 광산김씨 7가구 창녕조씨 1가구 평산신씨 1가구 행주기씨 1가구 도강(강진)김씨 3가구
◦ ◦ ◦ ◦ ◦ ◦ ◦
이천서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진주정씨 수원백씨 전주이씨 양성이씨
6가구 1가구 1가구 2가구 1가구 1가구 1가구
(2) 부곡 ( 가구) ◦ ◦ ◦ ◦
광산김씨 경주김씨 금녕김씨 영성정씨
15가구 2가구 1가구 1가구
◦ 여주이씨 1가구 ◦ 전주이씨 1가구 ◦ 밀양박씨 1가구
(3) 증산 (21가구) ◦ ◦ ◦ ◦
연안이씨 이천서씨 강릉유씨 광주이씨
9가구 3가구 1가구 3가구
◦ ◦ ◦ ◦
밀양박씨 2가구 고령서씨 1가구 전주이씨 1가구 정씨 1가구
4) 부곡리 주요 기관과 시설 고추종합처리장 : 고창군 고수면에 고창군 고추가공시설이 있다. 고추종합처리장은 농 림수산식품부의 후원을 받아 국ㆍ도비 40억을 포함해 165억원을 들여 2010년 10월까 지 7천564㎡규모에 고추 건조기와 분쇄설비, 가공시설 등을 갖추었다. 고추종합처리장 은 고창산 고추를 건조ㆍ가공해 '올랜드(Alland)' 브랜드로 출시하고 있다. 고수면 게이트볼장 : 고수면 부곡리에 사계절 게이트볼장이 2011년 11월 9일 완공되 었다. 게이트볼장은 부지 1,243㎡에 건물 447㎡의 규모로 총사업비 1억 4,400만원을 투입하였다. 남고창 IC : 고수면 부곡리 984번지에 있는 고창-담양 간 고속도로에 있는 톨게이트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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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수면 부곡리 654번지에 있는 기독교 예수교 장로회 소속의 교회
로 신영철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연동마을회관 : 연동마을회관은 1938년 마을 중심지에 있는 김기만씨의 주택 지를 매입하여 초가 4칸 집을 지어 연동회관이라 이름하여 이용하였다. 이곳 에서 이동영선생을 모셔 서당을 개설하여 자녀들의 교육사업에 노력하다가 1948년 마을 기금이 고갈되자 회관을 매각하여 폐지하였다. 1966년 마을 어귀 에 4H클럽 회원들이 황토벽돌을 만들어 슬레이트 3칸의 집을 지어 회관으로 사용하다가 1981년 회관을 매각하고, 지금의 회관자리에 마을기금으로 30평의 건물을 지어 회관으로 이용하였다. 다시 2007년 9월 군비 2,000만원과 115명 의 헌성금 2,745만원을 합하여 24평의 벽돌 조적으로 신축하여 마을회관과 경 로당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11월말 모정 옆에 회관중건사적비를 세웠다. 연동경로당은 1985년 4월 12일 연동노인회 규약을 제정하고 노인회를 창설하 여 노인들의 휴식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 회원수는 남성 21명이고 여성이 31명으로 운영하고 있다. 2003년 4월 주민과 출향인사들 108명이 헌성금 1280만원을 마련하여 모정 앞 에 부지를 매입하여 주차장을 조성하고, 주차장조성방명비를 건립했다. 마을회 관은 군의 지원과 출향민들의 후원으로 건축되었다.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653-4 번지에 있다. 연동마을우물 : 연동마을의 공동우물은
바로 앞에 있다. 현재는 농업농수로
가끔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우물터에는 함석지붕과 콘크리트로 만든 덮개로 덮여있다. 연동마을모정 : 연동마을은 마을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모정도 세 곳이나 있 다. 1930년대 건립된 마을 앞 모정과 마을 뒷동산에 건립하였다. 1958년에는 부녀전용의 모정을 건립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으나 인구가 줄어 두 곳은 사용하지 않고 마을 앞의 큰 모정만 이용하고 있다. 이 모정은 일제강점기 말 기에 일본순사들이 주침금지(晝寢禁止)라고 쓴 표어를 기둥에 붙이고 마루판을 떼어 세워 놓고 비상시국에는 낮잠을 자면 안 된다고 모정을 폐지시켜버렸다. 큰 모정을 못 쓰니 삼복 전후에 더위를 피하여 마을 뒷동산에 있는 모정으로 모였다. 하루는 마을주민들이 모정 가득히 모여 잠을 자고 있는데, 김병구(귀 머거리였다고 함)라는 순사(巡査)가 모정에 나타나자 깜짝 놀라 일어나니 “괜 찮으니 자라”고 하여 잠을 잔일도 있었다고 한다. 큰 모정은 광복 후 다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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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다가 1971년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모정을 해체하여 재건축하려고 3년을 보관한 후에 다시 본 건축자재를 사용하여 건축하였다. 마을 앞 모정은 1990년 회갑이 되어 너무 낡아 재경연동증산봉향촌회와 출향 인사들이 주관이 되어 총 53명이 733만원의 헌성금을 마련하여 건립하였고, 이곳에 연화정(蓮華亭)이라는 현액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곡마을회관 : 내안을회관은 2009년에 준공하여 지금도 마을사람들의 공동공 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회관은 군의 지원과 출향민들의 후원으로 건축되었 다.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190-1에 있다. 부곡마을우물 : 내안마을의 공동우물은 외토길 70번지 집 바로 앞에 있다. 현 재는 농업농수로 가끔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우물터에는 함석지붕과 콘크리트로 만든 덮개로 덮여있다. 부곡마을모정 : 내안마을 모정은 2001년 11월 11일 건립되었으며, 점촌마을 입구에 있다. 성내면 월산리 284-7(항월길 73번지)에 있다. 증산마을회관 : 내안을회관은 2009년에 준공하여 지금도 마을사람들의 공동공 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회관은 군의 지원과 출향민들의 후원으로 건축되었 다.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190-1에 있다. 증산마을우물 : 내안마을의 공동우물은 외토길 70번지 집 바로 앞에 있다. 현 재는 농업농수로 가끔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우물터에는 함석지붕과 콘크리트로 만든 덮개로 덮여있다. 증산마을모정 : 내안마을 모정은 2001년 11월 11일 건립되었으며, 점촌마을 입구에 있다. 성내면 월산리 284-7(항월길 73번지)에 있다. 묵향정(墨香亭) : 먹점마을 모정터에 2001년 군비와 안동관이 사비를 투자하여 기와 8 각정의 정자를 신축하여 묵향정이라 현액하고, 마을주민들의 휴식처로 보존관리하고 있 다. 건축비는 일반벼 40-50석 값이 들었다고 한다. 우진농장 : 연동마을 앞 최경렬씨가 한우를 사육하는 농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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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람들 사람들은 현재 전국 각지에 살면서 다양한 직종의 직업을 가지고 살았고, 살아
가고 있다. 많은 부곡리 사람들을 지면에 싣고자 하였으나 일일이 확인할 수가 없어 마을에서 조사하여 자료를 주신 분들만 이곳에 올렸다. (1) 연동마을사람들 연동에는 많은 출향인사들이 있다. (2) 부곡사람들
(3) 중산사람들
6) 부곡리 역대 이장 부곡리에 기록상 처음인 1952년 부곡마을 이장을 맡은 이는 오성근이장이었으며, 연동 은 1961년 서기준 이장, 증산은 1972년 신대환이장이 처음으로 마을의 이장직을 수행 하였다. 부곡리의 각 행정리의 연도별 이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연동
부곡
증산
1952
오성근
53
유춘종
54
안병모
55
서덕중
56
정진암
59
서덕중
60
정진암
61
서기준
61
이막동
63
김환근
63
서대원
64
안도연
64
서대원
안도연
65
서덕중
안도연
67
서동곤
안도연
67
안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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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연
71
서길학
72
서기락
72
서대성
72
신대환
75
전재민
75
나종풍
75
이재범,신대환
77
김영균
77
안영환
77
신대환
78
김환길
78
서대성
78
서사곤
79
정재영
79
홍성래
서사곤
안상원
81
홍성래
서사곤
이병균
84
홍성래
서사곤
김진수
88
홍성래
서사곤
서기술
90
홍성래
서사곤
김영철
92
안재운
이용희
김영철
94
안재운
이용달
김영철
2003
안재운
이윤범
김진수
2004
기묘연
이윤범
김진수
2006
김동환
이윤범
서기술
2008
김동환
이윤범
김진수
2010
김동환
이윤범
서기술
2012
이경희
이강택
서기술
2013
이경희
이강택
7) 부곡리 역대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 부곡리의 역대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가장 오랜 기간동안 직 책을 유지한 지도자는 연동마을의 김춘석새마을지도자이다. 그는 1986년에 처음 맡은 이후 2006까지 19년 동안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부곡
연동
증산
지도자
부녀회장
지도자
부녀회장
지도자
부녀회장
1974
안재종
김연순
서기종
김옥혜
이재범
김점숙
1975
안재종
김연순
서기종
김옥혜
이재범
김점숙
1976
안재종
김연순
서기종
김옥혜
이재범
감회숙
1977
안재찬
김연순
안상문
안정님
이용달
김복순
1978
안재찬
김연순
안상문
안정님
이용달
김복순
1979
안재찬
남미대자
안상문
안정님
이용달
김복순
1981
안재종
남미대자
안상원
이순례
이용달
김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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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안재종
남미대자
안상원
이순례
이윤범
김복순
1985
안영환
정보순
안상원
이순례
이용달
김복순
1987
안영환
정보순
김춘석
이순례
이용달
김복순
1988
신수영
정보순
김춘석
이순례
이용달
김복순
1989
신수영
정보순
김춘석
이순례
이용달
김복순
1990
신수영
문현숙
김춘석
정일순
이용달
정분순
1991
신수영
문현숙
김춘석
정일순
이용달
정분순
1992
신수영
문현숙
김춘석
오수자
이윤범
김순님
1994
기모연
고이순
김춘석
오수자
이윤범
김순님
1996
기모연
최점숙
김춘석
오수자
이윤범
김순님
1998
기모연
정선님
김춘석
오수자
이의남
김순님
2002
기모연
정선님
김춘석
오수자
이용욱
김순님
2003
기모연
정선님
김춘석
오수자
이용욱
김순님
2004
안재운
안순자
김춘석
정일순
이용욱
이순이
2006
신수영
안순자
김춘석
오수자
이용욱
이순이
2008
신수영
안순자
김영철
정일순
이용욱
이순이
2009
신수영
안순자
김영철
전영순
이용욱
이순이
2010
안병회
김순임
김영철
오수자
서순성
이순이
2011
안병회
김순임
김영철
오수자
서순성
이순이
2012
안병회
김순임
김영기
정일순
서순성
이순이
2013
안병회
김순임
김영기
정일순
서순성
이순이
▣
도움주신 분
안도연(연동 토박이) 안상현(연동 토박이) 천양기(고수면 부면장)
▣ 참고문헌 『고창군의 지석묘』, 군산대학교, 2009.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군문화유적분포도』, 원광대학교, 2005. 『고창 부곡리 증산유적Ⅰ』, 호남문화재연구원, 2009. 『고창농악을 지켜온 사람들의 삶과 예술세계』, 고창농악보존회, 나무한그루, 2010.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牟陽城의 얼』, 고창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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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전래지명총람』유재영, 민음사, 1993.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한국인의 지역감정>; 고흥화,1989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 전라도(全羅道) 고창현(高敞縣)
http://gochang.grandculture.net/Contents http://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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