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동면의 행정중심지, 월산리
1. 월산리의 역사와 위치 월산리는 언제부터 누가 마을의 터를 잡았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월산리 곳곳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최소한 청동기시대부터는 인간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월산리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나타나지는 않으나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무문 토기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인들의 거주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 대의 고인돌은 묘제로서의 기능도 있지만 청동기인들의 삶의 경계선이자 영역을 표시하고 있 음을 볼 때 월산리는 그 삶의 중심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왜냐하면 당시 는 기후학적으로 지금보다 해수면이 높은 시기이기 때문에 내퇴까지 고부천을 따라 조수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 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성내의 저습지들은 조수의 영향으로 염해피해를 입기 때문에 고부 천의 상류이면서 구릉성 산지가 많은 월산리는 청동기인들의 삶의 터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시대의 유적이나 유물들도 구릉성산지를 중심으로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 해수면이 청동기시대보다 조금 낮아지면서 월산리의 저습지를 개간하여 농경하면서 살았 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로 접어들어서도
월산리의 삶은 큰 변화가 없는 듯하다. 발견
되는 유물들이 삼한시대의 거주지와 많이 겹치기 때문이다. 특히 월산리가 속했던 이동면은 흥덕과 경계지역으로 삼한시대 흥덕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소도국의 속지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백제시대이후부터 성내 전 지역은 고창의 삼군(흥덕·무장·고창)이 통합하기 이전 까지 흥덕의 속지로 있었다. 월산리(月山里)는 본래 흥덕군 이동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同)면 의 동군 입산리(笠山里) 죽림리(竹林里) 송림리(松林里) 편월리(片月里) 토등리(兎嶝里) 내안촌(內安 村) 한정리(漢井里) 안유리(安由里)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편월과 입산의 이름을 따서 원산리 라 하여 고창군 성내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월산리는 법정리이며, 행정리로는 한정(漢井), 죽 림(竹林), 내안(內安) 등이 있다. 자연취락으로는 한정리의 한정, 편월, 입산이 있고, 죽림리의 죽림(대사물), 내안리의 내안촌, 안유, 토동 등이 있다. 월산리는 편월(片月)의 ‘월’자와 입산 (笠山)의 ‘산’자를 따서 월산(月山)이라 하였다. 한정리는 1916년 이전까지 일동면의 면소재지 였다. 월산리는 동쪽으로 양계리와 산림리, 서쪽으로 옥제리, 남쪽으로 신대리, 북쪽으로 동사리와 접하고 있다. 월산리의 북쪽으로 정읍-고창 간의 국도22호가 지나가고 있으며, 월산리를 군도 208호가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다.
2. 자연지명과 전래지명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는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와 목포 유달산으로 뻗는 영산기맥이 용교리 (347.3m)에서 갈라져 나와 성내면과 신림면의 경계를 이루어 발달하다가 월산리를 지나 동산 리에서 멈추는 지맥 상에 위치해 있다. 이 지맥은 대부분 구릉성 산지를 이루어 이를 개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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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농사가 발달했다. 감남골(시목동) : 안유와 내안촌 사이에 있는 골로 예전에는 마을이 있었으며, 감나무가 많았 다고 함. 계등재(산, 46m) : 내안촌 뒤, 죽림 앞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46m이고, 모양이 게의 등과 같 이 되었다고 함. 여시바우 : 내안마을 뒤에 있었다는 고인돌. 현재는 산을 개간하면서 묻어버렸다고 함. 꽃밭골(꽃바우등) : 내안과 옥제리 경계의 골로 진달래가 많이 있었다고 하는 평강채씨 문중의 야산. 오목내 : 내안마을 전면의 내. 허긋재 : 오목내의 위쪽 능선. 신앙리 : 내안마을 능선 넘어 있었다는 마을이나 언제부터인가 폐허가 되어 지명만 남아 있 음. 국지재 : 정유재란 당시 평강채씨, 함평노씨, 함평이씨 등의 세 성씨가 피난했던 곳이라 함. 편월마을 남쪽의 안유마을 부근. 국수논 : 편월의 함평이씨가 같은 마을의 한 노인이 너무 배고파하자 국수 한 그릇을 대접해 드리자 그 노인이 죽으면 그 논을 가져가라고 하여 불렸다는 논의 이름으로 편월의 남쪽 들판 에 있음. 토끼골(툇깃골) : 편월에 마을에 있는 골. 방죽밑(사창골) : 편월 들판의 남쪽 방죽아래. 괴다리 : 입산과 죽림 사이에 있는 논. 외얏골 : 죽림 마을 앞의 골. 귀덕골 : 편월과 내안촌 사이에 있는 골짜기. 대샆물(죽림, 대숲물) : 월산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 삿갓재(笠山峙) : 월산리와 내동산의 경계로 내동산마을 뒷산 주봉에서 북쪽으로 내려간 고개. 한정앞골 : 한정마을 앞의 골.
3. 월산리의 자연취락
1) 한정(漢井) 성내면 월산리 한정마을이다. 한정은 성내면소재지에서 서남간으로 약 700m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은 산수가 좋고 우물이 석간수로 은하와 같다하여 한정(漢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설과 중국에 있는 한정마을처럼 물이 좋아서 한나라 한(漢)자를 써서 한정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한정 마을은 함평이씨 19세인 욱(旭)이 편월에서 이거해와 그 후손들이 자작일촌하고 있다. 마을의 북쪽 으로는 국도 22호선이, 마을 뒤로는 군도 208호가 지나가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한정은 죽 림 서쪽에 있는 마을로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아도 마을이 보이지 않으므로 물속에 든 샘과 같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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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붙인 이름이다. 마을의 앞으로는 강정천이 흘러 동림저수지와 만나고, 뒤쪽으로는 용교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의 산 계는 북서쪽으로 발달하다가 한정마을에서 두 갈래의 산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마을의 좌청룡과 우 백호를 이루고 있다. 한정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내백호가 짧고, 청룡이 발달한 형국이나 22번 국도 상의 외백호가 발달하여 마을을 안정적으로 감싸고 있다. 마을의 주산(主山, 37m)은 나지막한 구릉 성 산지이나 한정 마을 주변이 대체로 구릉성 산지이기 때문에 대체로 안정적인 지형지세를 이루고 있다. 단지 마을의 외백호와 좌청룡이 서쪽으로 발달하여 겨울철에는 찬바람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 이 크나 좌청룡이 안산의 역할을 하면서 지형적 결함을 상쇄하고 있다. 이러한 마을의 입구에는 당 산과 같은 풍수적 결함을 비보하기 위한 시설물이 들어서게 된다. 한정마을은 북서향이고, 당산은 마을의 허한 곳인 북서쪽에 있어 마을의 비보경관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가옥의 향은 대체로 북서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림> 한정마을 표지석
2) 편월(片月) 편월마을은 성내면소재지에서 서북간으로 약 800m거리에 있다. 이 마을의 형태가 조각달 같 은 형태이고, 마을 아래는 조각달이 된 후에도 달이 끝까지 보인다하여 편월이라 불렀다고 한 다. 마을은 평강채씨 12세인 언상(彦祥)이 마을을 설기한 이후 1584년 함평노씨 15세인 사맹 (師孟)이 입거한 후 자손들이 대흥리 신월(新月)과 주항(酒缸)마을로 이거하였다. 이후 편월은 함평이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현재는 마을 전 가구인 8가구의 함평이씨가 거주하고 있다.
마
을의 뒤쪽인 동쪽으로 군도 208호가 지나가고 있다. 마을은 한정마을의 좌청룡의 줄기가 편월마을 뒤에서 갈라져 좌청룡과 우백호를 형성하고 있다. 마 을의 우백호가 좌청룡에 비해 길게 발달해 있고, 우백호는 북서쪽으로 뻗어 있고, 좌청룡은 남서쪽 으로 뻗어 있어 마을의 전면인 서쪽은 크게 노출된 형국이다. 마을의 수계는 마을 앞으로는 강정천 이 흐르고 있어 물이 풍부한 곳이다. 특히 편월마을은 강정천이 만든 범람원이 발달하여 논농사가 발달했다. 마을 뒤로는 구릉성 산지가 발달해 밭농사에도 유리한 지형이다. 마을의 가옥배치는 산계 의 발달방향과 같이 서향이 대부분이다.
3) 입산(笠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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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산은 성내면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500m 거리에 있으며, 삿갓재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농부가 술에 취해 삿갓을 옆에 놓고 잠을 자고 있다하여 입 선(笠仙) 또는 입산(笠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입산 아래에는 신령한 샘(靈泉)이 있어 병이 든 환자가 치료하기 위해 물을 마시면 완쾌되어 이 샘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의 퇴등에서 삼국시대의 유물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인간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에는 현재 의성김씨와 광산김씨가 세 거하고 있다. 마을은 북쪽으로 국도 22호와 접하고 있고, 마을 뒤쪽인 서쪽으로 군도 208호가 한정마을과 경계를 이루며 통과하고 있다. 마을은 한정마을과 경계를 동남쪽에서 발달한 산계의 한 줄기가 퇴등에서 갈라져 나와 북동쪽으로 발달하였다. 이 산계의 동쪽으로 마을이 입지해 있다. 마을의 형국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동쪽으로 뻗어 있어 북서쪽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그러나 마을의 좌청룡과 우백호가 평행을 달리듯이 발 달하여 마을의 전면이 동쪽으로 노출되어 있다. 마을의 수계는 마을 앞으로는 용교천이 흐르고 있어 물이 풍부한 곳이다. 이 마을은 용교천의 범람이 만들어 놓은 충적지가 발달하여 드넓은 농토를 이 루어 놓았다. 마을 뒤의 주산인 퇴등도 구릉성 산지를 개간한 밭농사에 유리한 지형이다. 마을의 가 옥배치는 산계의 발달방향과 같이 동향과 남향이 대부분이다.
4) 죽림(竹林) 죽림은 성내면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500m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을 뒷산 에 무성한 대나무 숲이 있어 죽림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함양이씨가 설기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장흥고씨, 의령남씨, 함평이씨, 평강채씨, 해주오씨, 경주이씨, 황주변씨 등 이 거주하고 있다. 의령남씨의 경우는 18세손인 이훈(二勳)이 중조인 문하시중공의 묘소(장성 학성 소재)에 내왕하던 중 산자수명하고 광활하고 비옥한 이곳이 눈에 들어 정착하여 그 후손 들이 10대를 이어오고 있다. 기록상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마을 대나무 숲 부근에 서 삼국시대의 유물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인간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은 서쪽으로 군도 208호가 한정리와 경계를 이루며 통과하고 있다. 마을은 한정리과 경계를 동남쪽에서 발달한 산계의 한 줄기가 내안의 게등재(46m)에서 갈라져 나 와 북동쪽으로 발달하였다. 이 줄기의 끝자락의 북서쪽에 마을이 입지해 있다. 마을의 형국은 좌청 룡과 우백호가 동쪽으로 뻗어 있어 북서쪽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그러나 마을의 좌청룡과 우백 호가 평행을 달리듯이 발달하여 마을의 전면이 동쪽으로 노출되어 있다. 마을의 수계는 마을 앞으로 용교천이 흐르고 있어 물이 풍부한 곳이다. 이 마을은 용교천의 범람이 만들어 놓은 충적지가 발달 하여 드넓은 농토를 이루어 놓았다. 마을 뒤의 주산인 퇴등도 구릉성 산지를 개간한 밭농사에 유리 한 지형이다. 마을의 가옥배치는 산계의 발달방향과 같이 동향과 남향이 대부분이다. <그림> 죽림마을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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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안(內安) 내안은 성내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600m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산수가 수려하 고 주산(풍수용어로 마을의 뒷산에 해당)과 안산(마을의 앞산을 말하는 풍수용어)이 조화를 이 루어 마을이 풍수적으로 편안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편안한 지형지세 속에 사람들은 서로 화목하고 단결하여 편안한 삶을 누린다하여 내안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는 김해김씨, 광산김씨, 평강채씨, 함양박씨, 언양김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주산으로 군 도 208호가 안유마을과 경계를 이루며 통과하고 있다. 마을은 동남쪽에서 발달한 산계의 한 줄기가 내안 게등재(46m)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쪽으로 발 달하였다. 이 동쪽으로 갈라진 두 갈래의 골에 마을이 입지해 있다. 내안마을의 뒷산은 해발고도가 46m로 북서쪽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있어 월산리의 다른 마을에 비해 겨울이 따뜻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마을의 형국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동동남으로 뻗어 있다. 그러나 마을의 좌청룡과 우백호 가 평행을 달리듯이 발달하여 마을의 전면인 동쪽이 노출되어 있다. 마을의 수계는 죽림과 마찬가지 로 마을 앞으로 용교천이 흐르고 있어 물이 풍부한 곳이다. 이 마을은 용교천의 범람이 만들어 놓은 충적지가 발달하였다. 마을 뒤의 주산은 타 마을에 비해 해발고도가 조금 높은 편이다. 마을의 가옥 배치는 산계의 발달방향과 같이 동향이 있고, 대부분의 가옥은 남향이다.
<그림> 내안마을전경 6) 안유(安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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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마을은 성내면소재지에서 서남간으로 약 600m거리에 있다. 이 마을은 동남북으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서쪽만 개방되어 보인다하여 안유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마을은 평강채씨 15 세인 시현(時現)이 편월에서 이주한 이후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현재는 함평이씨와 죽산안 씨 등도 세거하고 있다. 마을의 뒤쪽인 동쪽으로 군도 208호가 지나가고 있다. 외유마을의 구 릉지에서 삼한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일찍이 사람이 거주하였 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은 내안마을의 게등재를 주산으로 하고 있다. 게등재의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좌청룡과 우백 호를 형성하고 있다. 마을의 우백호는 북쪽의 능선으로 동산리로 뻗어가는 능선에서 곁가지가 나와 남쪽으로 발달하였다. 좌청룡은 게등재에서 남서쪽으로 발달하다가 다시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발달한 줄기이다. 마을의 전면인 서쪽이 노출되어 있으나 우백호가 마을을 감싸고 있어 북서계절풍 을 막아주는 형국이다. 마을의 가옥은 대부분 우백호 능선 아래에 배치가 되어 있고, 일부는 좌청룡 아래에 있다. 마을의 수계는 마을 앞으로는 강정천이 흐르고 있고, 저수지가 있어 물이 풍부한 곳이 다. 마을의 가옥배치는 우백호 능선 아래는 남향이고, 게등재 부근은 서향과 남서향, 좌청룡 능선 아래 가옥은 북향의 구조이다.
<그림> 안유마을전경
4. 성씨들의 월산입향 1) 함평이씨(咸平李氏)의 월산 입향 함평이씨는 1598년 홍의(弘誼, 1577~1638)가 본래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에서 살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부친이 순절하고 생모의 가산마저 소실되어 형제들이 유리하다가 성내면 월산리에 입향하여 지 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월산의 함평이씨 시조는 언(彦)이며, 파조는 장영(長榮)이다. 함평이씨의 월산 입 향 조모가 시집을 올 때, 자라 6마리를 주어서 가져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후 입향 조모는 아들 여섯을 낳았고, 그 자녀들이 월산리와 옥제리 등으로 넓게 퍼졌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성내의 함평이 씨들은 자라를 잡으면 먹지 않고 살려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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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世
弘 誼
19世
20世
21世
益
時
蕃
栽
22世
23世
24世
師
台
得
善
圭
鎭
25世
26世
27世
28世
29世
30世
澈勉
星模
敬煥
翰範
載錫
俊行
2) 파평윤씨(坡平尹氏)의 내안 입향 파평윤씨는 1790년 광두(光斗, 1779~1840)가 본래 전남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에서 부유한 가정 을 이루고 살다가 괴질과 가옥 燒失로 인하여 성내면 월산리 내안으로 입향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 다. 내안의 파평윤씨 시조는 신달(莘達)이며, 파조는 규(珪)이다. 30世
31世
32世
33世
34世
35世
光斗
萬洙
相龍
炳宜
圭煥
宇鍾
3)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죽림 입향 죽림의 의령남씨는 1820년대 이훈(二勳, 1756~1828)이 본래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에서 산자수명하 고 비옥한 성내면 월산리 죽림으로 가거지로 정해 입향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죽림의 의령남씨 시조는 군보(君甫)이며, 파조는 실(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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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世
世
世
世
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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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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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德
極
啓
景
廷
萬
相
光
勳
燁
和
永
元
學
熙
銖
祐
4) 함평이씨(咸平李氏)의 편월 입향 편월의 함평이씨는 1598년 홍원(弘謜, 1585~1631)가 본래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에서 살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부친이 순절하고 생모의 가산마저 소실되어 형제들이 유리하다가 성내면 월산리 편월에 입향하 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월산의 함평이씨 시조는 언(彦)이며, 파조는 장영(長榮)이다. 18世
弘 謜
19世
旭
20世
益 齡
21世
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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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世
23世
24世
師
復
一
悌
圭
鎭
25世
26世
27世
28世
29世
30世
31世
澈新
龍模
東煥
鶴範
載萬
鏡行
榮根
5) 평강채씨(平康蔡氏)의 안유 입향 평강채씨는 1562년 언상(彦祥, 1562~1616)이 삼종숙 홍국(弘國)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성내 면 월산리 편월에 들어올 때 따라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피하고, 그 후 증손인 시현이 안유마을에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안유의 평강채씨 시조는 송연(松年)이며, 파조는 충경(忠敬)이다. 12世
13世
14世
15世
16世
17世
18世
19세
彦
日
文
時
弘
膺
櫶
泓
祥
昇
龜
現
胤
濬
恭
萬
20世
21世
22世
23世
24世
25世
26世
敦
東
商
圭
珍
洙
秉
永
淵
默
千
錫
澤
哲
5. 월산리의 인물 1) 고제만 (高濟萬 1860~1942) : 그의 자는 치범, 호는 죽계로 1860년(철종11년) 8월 20일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을사능약 직후인 1906년(광무 10년) 최면암이 호남 지방의 유림들을 주축으로 한 의병대를 창의할 때 그의 휘하에 들어가면서부터 항일전선에 나 섰다. 최제학이 펴낸 「습제실기」는 최면암이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봉기를 일으켜 항일 독립전을 감행하는 의병들의 활동상을 자세히 기록한 귀중한 사료이다. 이 문헌에 따르면 고제만은 그 해 4월 16일 임실에서 면암 최익현과 처음 만났다. 영·호남 지역을 순방하며 지사들을 규합하던 최면암은 태인을 거쳐 임실에서 하룻밤을 묵고 있을 때 임병찬이 아들 응철, 손자 진 및 동지들과 함께 면암을 영접하여 일행은 다시 종성리 에 이르렀다. 그때 고제만, 고석진 등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면암 일행을 맞아 대열에 합류했던 것이다. 최익현이 8도민에게 창의포고문을 배포, 봉기의 취지를 알리며 분발을 촉구했던 바 이 포고문 을 고제만이 작성한 것으로 전해졌다. 포고문의 내용은 비장한 것이다.「익현은 재주가 미약하 고 힘도 모자라며 나이는 늙고 병은 짙으니 한 치의 공을 못 이루고 비록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할지라도 한 가닥 목숨이 붙어있는 한 어찌 보복의 의를 잊을쏘냐. 군사를 일으켜서 서쪽으 로 쳐들어가면 어느 누가 저 한나라 적의를 반격하며......」 그 해 윤 4월 작성되어 배포된 격 문을 보고 동맹에 가입하기를 자원한 의혈투사들은 줄을 이었었다. 최익현은 지사들의 명단을 동맹록에 기재 그들의 이름을 길이 청사에 남겼다. 영·호남의 이름 있던 명장과 유림들이 동맹록에 올랐다. 고제만도 동맹록에 기재해 있다. 이렇게 해서 면암의 의병대에 편입된 고제만은 의병을 이끌고 순창 등지에서 수십 차례에 걸쳐 항전을 치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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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의병들의 국내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았고 병력과 무기 또한 일제의 것과는 비교될 바 못 되었다. 전국의 의병대는 날이 갈수록 세력이 약화되어 해산의 비운을 맞았다. 단신으로 잠행하며 수 모를 겪던 면암은 끝내 왜병에게 잡혀 대마도로 압송되어 순국했다. 휘하 부졸과 제자들은 사 선을 뚫고 대마도로 건너가 면암을 간호했고 그 유해를 조국으로 옮겼다. 피신을 해야 했던 지사들은 서신을 보내 면암을 위로하고 또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고제만도 한 편의 시를 지어 면암의 별세를 애도했다. 국내의 의병항쟁이 1914년을 기해 종 말을 고하자 만주, 북간도, 노령 등지를 근거지로 항일투쟁은 독립전쟁의 양상을 띠게 됐다. 살아남은 의병장들은 잔류병을 이끌고 한만국경을 넘어 이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던 것이 다. 이와 반대로 일부의 의병장들은 그대로 머물면서 새로운 형태의 독립단체를 조직했다. 그 중 하나가 1913년 9월 임병찬 등이 조직한 독립의군부였다. 임병찬과 이인순, 전용규 등의 주장에 따라 설립된 의군부는 중앙에 중앙순무총장, 각도에 도 순무총장을 두고 군에는 군수, 면에는 향장을 배치했다. 의군부는 총독부에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고 외국에도 여론을 환기시켜 한국의 국권회복을 만방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전국에 확대 일로를 거듭해 온 독립의군부의 비밀결사도 1914년 5월 23일 북선 지방의 지하조직 확대에 나섰던 동지가 체포됨으로써 전 조직이 발각되어 그 활동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뿐만 아니 라 각급 조직책임자들의 대부분이 검속, 투옥되었다. 고제만은 면암 최익현의 막료로 항일투쟁에 나선 뒤 의병의 후 신인 독립의군부의 총무국종사 관으로 칙명 되어 그 동안의 못 다한 통한의 절치부심을 달래고자 하였으나 한낱 꿈으로 장식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고 1919년 그때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 원칙의 정치풍조가 새로이 등장하게 되어 전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적극 호응하게 됨으로써 국 면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을 때, 족숙 고석진, 고예진과 함께 다시 일어나 불란서파리에 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강제합방의 부당성과 한국의 실정을 호소하여 대 한독립을 절규하고자 전국유림단 대표 137인이 연맹서명으로 전개한 이른바 한국 유림단 파 리장서 사건에 앞장섰다가 그는 또한 은신하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독립운동의 정 치적 누범으로 지목되어 끝내 일제의 철통같은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1941년에 체포되 어 군산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끝내 항거불굴로 지절을 굽히지 아니하다가 혹독한 고문과 옥 중생활의 여독이 겹쳐 중병을 앓게 되어 억울하게도 1942년에 향년 82세로 순절 조국광복을 눈앞에 두고 망국의 통분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마쳤다. 저서로 문집 1권이 남아있다. 1968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자로추대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받 아 독립유공자로 봉안되었다. <그림> 죽계고공제만의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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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종주(李鍾株, 1901.3.20 ~ 1921.7.13) : 그의 본관은 함평(咸平)이며, 이명(異名)은 이종 규(李鍾奎)이다. 1901년 3월 20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351번지에서 태어 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여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는 성장기에 들어 나라가 없음을 통분히 여기고 항상 마음에 무기를 가졌다. 그는 흥덕 심상소학 교에 입학하여 공부시간 외에는 뜻이 같은 동지와 함께 말하기를 우리들은 커서 나라를 찾아 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고 광주 학생 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1920년 3 월 10일 밤에 동지 이종철(李鍾喆), 이대성(李大成), 유판술(劉判述) 등과 더불어 성내 면사무 소에 숨어 들어가 인쇄기를 훔쳐다가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고 그의 집에서 태극기 13본을 그 려 만세운동을 전개 하려다가 흥덕주재소 일경에게 발각되어 체포됐다. 전주지방법원으로 압 송되어 온갖 고문 끝에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졌다. 소위 대정(大正) 8년 제령 제7호 제 1조 제1항에 적용되어 조선 총독부검사 촌삼사랑(村三四 廊)으로부터 1921년 1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구
형 받았고 조선총독부 판사 시도우태랑(矢島友太廊)․ 판사 가전승사(加前昇史)는 원심대로 선 고하니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옥중에서도 그의 뜻은 굴하지 않고 계속 옥수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니 그 옥중에서 온갖 고문과 혹형에 이기지 못하여 21세의 어린 나이로 숨 을 거두게 되었다.
1982년 8월 15일에 대통령 표창을 받아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 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림> 의사함평이공종주기적비
3) 유판술(劉判述: 1905.10.1~미상) : 유판술은 1905년 10월 1일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한정 길 14번에서 태어났다. 흥덕보통학교 재학 중인 1920년 3월 10일 밤, 유판술은 3·1운동 1주 년을 맞아 이종철(李鍾哲)·이대성(李大成) 등과 함께 이종주(李鍾株)의 집에 모여 태극기 12매 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만들고, 깃발 뒷면에는 “이를 파기하는 자는 참살하겠다”는 경 고문을 붙였다. 이어 태극기를 성내면사무소 구내 공터에 세우는 등, 주요 지역에 태극기를 붙이며 민중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흥덕면 주재소에 알려져 일본 경찰에게 체 포되었고, 1921년 1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 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미 국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4) 천운(天雲, 이정인: 1932.1.1~2010.7.14) : 천운대종사는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343-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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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 출신으로 본관은 함평이씨이다. 스님은 1946년 정읍 내장사로 출가하여, 지암스님을 계 사로 1947년 평창 월정사에서 사미계를, 1958년 고창 선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선운사 에서 다시 지암 스님을 만나 사교과 및 대교과를 마치면서 은사로서 연을 맺었다. 이후 순천 송광사 자장선원을 비롯 화순 용암사 선원, 영암 도갑사 선원 등 전국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 으며 1990년에 서옹 스님으로부터 전계전법을 받았다. 또 구례 화엄사와 해남 대흥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비상종회의원, 광주사암연합회장 등을 역 임했으며 2001년 원로의원으로 선출된 후 2004년 대종사 법계를 받았다. 1983년 향림유치원 을 시작으로 향림어린이집, 향림사신용협동조합, 향림출판사, 광주불교대학, 사회복지법인 향 림원 등을 설립했으며, 정신지체장애인 및 노인, 아동보호 전문 생활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총무원장 공로패와 포교대상, 법무부장관 표창장과 국민포장 등 종단 내외에서 포교 및 사회 통합에 기여한 공로로 받은 포상 및 감사패 등이 50여건에 이른다. 스님은 제22교구본사 대 흥사와 광주 향림사 조실로서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이사장, 종립 광주 정광중.고등학교 이사 장, 화엄사 주지 등을 맡았다. 스님은 호남 포교의 대부인 스님에게는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알고 가는 길' 이란 포교지를 만들어 신도들에게 나누어준 것도 처음이고 찬불가를 보급시킨 것, 어린이 중· 고등학생법회, 수련회를 만든 것도 호남에서는 선두주자에 속한다. 천운 대종사는 입적하기 전 문도들에게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악한 일 행하지 말고 선행을 받들어 실천하라 그리고 마음을 늘 청정하게 수행하면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는 유훈을 남겼다.
<그림> 천운스님
5) 남대희(南大熙 : 1932.1.1~2010.7.14) : 선생의 호는 죽강(竹岡), 본관은 의령이다. 선생은 성내면 월산리 죽림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958년 흥덕 향교를 위해 교궁보수와 흙을 다지고 18명의 전교와 8명의 유도회장과 함께 향교와 관내동자 9곳에 중앙의 지부금을 지원받아 창 건과 보수를 하였다. 또한 관내 독립유공자 16명의 사적을 발취하여 상을 받게 한 공이 인정 되었다. 죽강 선생은 성균관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부인과 사이에 3남5녀를 두고 있다. 일 찍이 간제 선생의 연원으로 석정 문제중 선생, 오제 이창환 선생, 송청 고예진 선생에게 칠서 를 두루 수학하였고, 1958년 무술 해에 흥덕향교에 투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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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종철(李鍾哲)과 이대성(李大成) : 이종철과 이대성도 위의 유판술과 이종주 등과 함께 고 창군 성내면 월산리에서 태어났으며, 흥덕보통학교 재학 중인 1920년 3월 10일 밤, 이들은 3·1운동 1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이종주와 유판술은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 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이들은 독립유공자로 지정이 되지 않았다. 이대성은 편월 출신이고, 이후 그는 입암면으로 이사하였다. 7) 안봉술(1966년 ~ 현재) : 안봉술은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96-2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뉴캐슬대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금속노련 국제 부장과 한국노총 국제부장을 거쳐, 2002년 9월부터 국제노동기구(ILO) 서남아시아 담당 노동 전문위원으로 일하였다. 그는 2009년 4월부터 동아시아 11개국을 담당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인도의 부상과 노동운동의 변화(노사발전재단, 2011년 11월)’가 있다. 8) 이수경(李守京, 1923년 ~ 현재) : 이수경은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한정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내면의 학교 육성회장을 비롯하여 흥덕향교전교 및 전라북도 유도회이사, 성균관 임원 등을 지냈다. 그는 이연택 전 장관의 도움으로 흥덕향교 대성전을 해체한 후 중건하였다. 그 의 이러한 노력은 고창군수상과 성균관상을 비롯한 많은 상훈을 받았다.
6. 마을현황 1) 월산리의 기관과 시설 한정마을회관 : 한정마을회관은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회관은 군 의 지원으로 건축되었다.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354-1에 있다.
<그림> 한정마을회관
한정마을우물 : 한정마을의 공동우물은 한정모정 바로 위쪽에 있다. 이 우물은 석간수로 물 이 좋기로 소문나 마을이름도 한정으로 지을 정도로 좋은 샘이라고 한다. 현재는 마을 공동 행사가 있을 때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우물터에는 함석지붕으로 만든 덮개가 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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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있다.
<그림> 한정마을우물 한정마을모정 : 한정마을 모정은 단기 4322(1989)년 10월 11일 건립되었으며, 한정마을 입구에 있다. 성내면 월산리 355-2에 있다.
<그림> 한정마을모정
편월마을회관 : 편월회관은 2006년 3월 8일에 준공하여 지금도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회관은 군의 지원으로 건축되었다.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480-1(편월길 64)에 있다.
<그림> 편월마을회관 편월마을우물 : 편월마을의 공동우물은 편월마을 앞 월산리 562번지의 답의 북서쪽 가장자 리에 있다. 현재는 농업농수로 가끔 사용되고 있을 뿐으로 우물터에는 함석지붕으로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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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개가 덮여있다. 죽림마을회관 : 죽림마을회관은 2002년 6월 5일 준공하여 지금도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으 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회관은 군의 지원으로 건축되었다. 성내면 월산리 168-1번지(월산죽 림길 52-2)에 있다.
<그림> 죽림마을회관 죽림마을우물 : 죽림마을의 공동우물은 죽림 마을 앞의 모정 옆에 있다. 현재는 농업농수로 가끔 사용되고 있다. 죽림마을모정 : 죽림마을 모정은 단기 4325년 3월 20일 건립되었으며, 죽림마을 입구에 있 다. 성내면 월산리 217-3 답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그림> 죽림마을모정 내안마을회관 : 내안마을회관은 2003년 7월 6일에 준공하여 지금도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 으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회관과 모정은 고창군의 지원과 김희동씨의 형님이 땅을 희사하여 건축되었다.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내안길 3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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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내안마을회관 내안마을우물 : 내안마을의 공동우물은 성내면 월산리 62-1번지 답에 있으며, 우물은 내안 마을 앞 들판의 한 가운데 있다. 현재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우물터는 남아 있다. 내안마을모정 : 내안마을 모정은 4335년 2월 28일 건립되었으며, 내안마을 입구에 있다. 성내면 월산리 87-1(내안길 3번지)에 있다.
<그림> 내안마을모정 안유마을우물 : 안유마을의 공동우물은 성내면 월산리 안유마을 26번지 집 앞 길가에 있으 며, 현재 우물은 콘크리트로 덮여 있다.
2) 월산리의 인구변화 월산리의 2002년 이후 인구변화는 대체로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이다. 2000년대 초기 월산리 의 인구변화는 다음의 그래프와 같다. 한정마을은 2005년 89명을 최고 정점으로 인구가 매년 감소하고 있으며, 죽림마을은 2002년 58명을 정점으로 매년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내안마을 은 2003년 92명을 정점으로 매년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2012년 들어 내안과 죽림은 인구가 소폭 증가하였다. 마을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37 40 42 45 40 39 39 36 35 40 38 한정 32 32 38 38 35 36 37 37 35 36 37 36 43 44 44 41 36 37 33 30 3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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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 28 내안 37
23 23 20 17 18 19 19 19 17 19 22 27 28 26 28 25 24 24 23 25 26 35 34 32 32 30 25 24 25 24 23 23 43 44
37
45 47
36
40 42
38
38 42
38
35 43
41
34 44
40
29 41
42
29 41
41
32 41
40
27 38
39
30 41
아래 그래프는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월산리의 각 행정리 인구변화이다.
100 90 80 70 60 한정
50
죽림
40
내안
30 20 10 0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3) 월산리의 성씨별 거주 현황 성씨는 문중의 성을 따라 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 된 독거여성노인인 경우는 사망한 남편 의 성씨나 자녀들의 성씨를 중심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조사는 2013년 성내면 월산리의 행정리의 이 장들이 진행하였다. 따라서 성내면사무소의 인구현황과 실제 거주자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 한정마을의 2013년 6월 현재 거주자·가족 수·호주·성씨분포는 다음 표와 같다. 성씨별 분포는 함평이 씨 24가구, 전주이씨 5가구, 의성김씨와 광산김씨 2가구, 금성 나씨·신안주씨·경주김씨가 각각 1가구이 다. 한정마을은 전형적인 함평이씨의 집성촌임을 알 수 있다. 연 번 1 2 3 4 5
성명
나이
가족수
호주
본관
성명
나이
義城 全州 咸平 咸平 咸平
연 번 19 20 21 22 23
김복순 이윤표 이종석 이종규 이선례
92 21 88 87 85
1 1 2 1 1
김봉규 이한종 이종석 이종규 이중행
6
임혜순
84
1
이정행
황남순 나국주 주금석 이계행 이영철
咸平
24
김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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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본관
68 68 68 65 61
가족 수 1 2 1 1 2
이행근 나국주 주금석 이계행 이영철
咸平 錦城 新安 咸平 咸平
60
3
김석봉
光山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고삼순 변의순 남막래 이관수 이재복 이종인 이판호 김경식 이경행 이상기 이재근 이택행
83 80 78 77 74 72 72 71 70 69 69 69
5 1 1 2 3 3 2 3 2 1 1 2
김낙현 이기근 이동현 이관수 이재복 이종인 이판호 김경식 이경행 이상기 이재근 이택행
義城 咸平 咸平 咸平 全州 咸平 全州 光山 咸平 咸平 咸平 咸平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이건백 이문행 이건숙 이명수 이봉수 이경수 이엄룡 이동민 이원근 이양행 이재완 이수경
59 56 54 52 49 48 42 35 34 28 24 90
2 1 1 5 1 1 1 1 1 1 2 2
이건백 이문행 김배경 이종규 이봉수 이경수 이엄룡 이선행 이원근 이영철 이종복 이수경
咸平 咸平 慶州 咸平 咸平 咸平 全州 咸平 咸平 咸平 全州 咸平
(2) 2013년 6월 현재 거주자·가족수·호주·성씨분포는 다음 표와 같다. 성씨별 분포는 장택(장 흥)고씨 6가구, 함평이씨 6가구, 평강채씨 3가구 등이 있으며, 의령남씨·김해김씨·김제김씨·황주변씨·달성 서씨·단양우씨·밀양박씨·광주이씨·한양조씨·영산신씨·영광정씨 등이 각각 1가구씩 거주하고 있다. 연 번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성명
나이
남대복 채미란 정복진 김소남 이창열 김일정 김일례 변갑섭 이만순 임동임 이수범 이정순 이묘순
84 32 80 80 80 80 79 76 75 75 74 72 71
가족 수 3 1 1 1 1 1 1 2 1 1 1 1 1
호주
본관
남대복 채미란 이정수 고광인 이창열 김일정 고석규 변갑섭 서종원 우종길 이수범 채수진 이광수
宜寧 平康 咸平 長澤 咸平 金海 長澤 黃州 達城 丹陽 咸平 平康 咸平
연 번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성명
나이
가족수
호주
본관
고종규 정순례 김형대 채창석 손주남 이남주 노동희 이준수 고광서 조명옥 신장진 이경희 고광진
70 70 69 69 68 63 61 59 56 55 49 35 84
1 1 1 2 2 2 1 3 3 2 6 3 2
고종규 고의석 김형대 채창석 손주남 이남주 노동희 이준수 고광서 조명옥 신장진 정종천 고광진
長澤 長澤 金堤 平康 密陽 廣州 咸平 咸平 長澤 漢陽 영산 靈光 長澤
(3) 내안마을 내안마을의 2013년 6월 현재 거주자·가족수·호주·성씨분포는 다음 표와 같다. 성씨별 분포는 평강채씨 15가구, 광산김씨 4가구, 함평이씨 5가구, 김해김씨 5가구, 파평윤씨 2가구 등이 있으며, 연안이씨·연일 정씨·죽산안씨·함양박씨·평양조씨·흥덕장씨·언양김씨·고흥유씨 등이 각각 1가구씩 거주하고 있다. 내안마 을은 각성받이 마을이긴 하나 전 가구의 40%가 평강채씨가 차지하고 있어 집성촌이다. 연 번 1 2 3 4 5 6
성명
나이
호주
본관
92 22 87 85 85 84
가족 수 1 2 1 1 1 1
김금례 채슬기 윤민식 김양례 이오순 박삼례
7
이근녀
성명
나이
가족수
호주
본관
平康 平康 坡平 平康 光山 延安
연 번 21 22 23 24 25 26
채청석 채수흔 윤민식 채형석 김정수 이영수
채관수 김희동 신동희 채양석 이금옥 김재철
72 72 71 67 64 64
3 2 1 4 2 2
채관수 김희동 조득상 채양석 이춘근 김재철
平康 光山 平壤 平康 咸平 光山
83
3
이영근
咸平
27
이한수
62
1
이한수
咸平
- 17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김완수 김후갑 채춘석 김화순 채정석 김대철 김순남 이점순 송기영 이경수 이양순 정금자 김원종
83 82 81 79 79 79 79 78 76 76 73 73 73
1 2 2 1 2 2 1 2 1 1 1 1 2
정태수 김후갑 채춘석 안영운 채정석 김대철 채병선 김정수 박주석 이경수 이영근 채환준 김원종
廷日 光山 平康 竹山 平康 金海 平康 金海 咸陽 咸平 咸平 平康 金海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유정임 채판석 채규환 채형석 윤말례 채기순 장윤선 김중영 김상재 윤정식 채회순 유대현
62 60 58 58 53 54 43 41 38 38 34 87
1 2 3 1 1 5 3 1 1 5 1 3
김정근 채판석 채규환 채형석 채천수 채기순 장복만 김중영 김상재 윤정식 채규환 유대현
金海 平康 平康 平康 平康 平康 興德 彦陽 金海 坡平 平康 高興
4) 월산리의 문화유산 (1) 월산리 유물산포지 1 : 성내면 월산리 436-1번지 지역으로 삼한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출 토되었다. 이 유적지는 외유마을 남측에 해당되는 구릉으로 , 동-서로 뻗은 해발 38m의 저평 한 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능선의 말단부는 국형제가 위치하며, 구가재밀곡과 간난맹이골의 사잇구릉이다. 구릉의 동사면은 삭평이 심한 편으로 대부분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수습된 유 물은 옹관편, 연질토기편 등이다. (2) 월산리 유물산포지 2 : 성내면 월산리 619번지 지역으로 삼국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출토 되었다. 이 유적지는 죽림마을 서측의 곡간평야에 위치해 있다. 이 일대는 대체로 북서에서 남동으로 구릉들이 이어져 있으며, 그 말단부로는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남측 구릉 정상부는 삭평이 이루어졌다. 수습된 유물은 옹관편, 연질토기 등 이다. (3) 월산리 유물산포지 3 : 성내면 월산리 산44-8번지 지역으로 삼국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출 토되었다. 이 유적지는 내동산마을의 서측에 위치한다. 이 구릉은 해발 33m로 정상부가 저평 한 대지를 이루고 있고, 민묘군이 조성되어 있으며, 도로의 개설에 따라 일부가 절개된 상태 이다. 구릉의 사면은 개간이 이루어져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수습된 유물은 경질토기편, 고배 편, 타날문토기편 등이다. (4) 월산리 유물산포지 4 : 성내면 월산리 산24-1번지 지역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의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지는 내동산마을의 서측에 위치한다. 이 구릉은 해발 35m의 저평한 능선으로 북쪽으로 동림저수지가 위치해 있으며, 서측은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구릉의 정상부는 공동묘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사면의 하단부는 개간되어 밭으로 경작 되고 있다. 수습된 유물은 무문토기저부편, 동체편, 석기, 옹관저부, 기대편 등 다양한 유물이 산포하고 있다. (5) 유인안동김씨효열비(孺人安東金氏孝烈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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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내안촌의 정미소 옆에 있는 효열비이다. 유인안동김씨는 김병인(金炳寅) 의 따님으로 15세에 파평 윤병룡(尹炳龍)에게 혼인하였다. 비는 단기 4289(1956)년 병신(丙 申)년에 장흥 고예진(高禮鎭)이 찬(撰)하였다. 비의 높이는 136cm, 넓이 42cm, 두께 18cm이 다.
<그림> 유인안동김씨효열비
(6) 유인수성최씨효열비(孺人隋城崔氏孝烈碑)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죽림의 뒷산에 있는 효열비이다. 유인수성최씨는 최윤풍(崔潤豊)의 따님 으로 장흥 고달진(高達鎭)과 탐진안씨(耽津安氏)의 아들 제광(濟廣)에게 혼인하였다. 세(歲) 을 유 광복 후(后) 을사(1965년) 중추상완(仲秋上浣, 팔월상순) 창산(昌山) 성구용(成九庸) 근기(謹 記), 장흥 고광은(高光殷) 근서(謹書).
<그림> 죽림마을 입구의 비석들 (7) 열부강릉유씨기적비(烈婦江陵劉氏紀蹟碑)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죽림 앞에 있는 열부비이다. 열부강릉유씨는 창(敞)의 후손 봉조(鳳祚) 의 따님으로 18세에 장흥 고봉환(高鳳煥)의 둘째부인으로 혼인하였다. 비는 단기 4330(1997) 년 정축 모춘절(暮春節) 의령 남대희(南大熙) 찬서(撰書)하였다. 비의 높이는 161cm, 넓이 58cm, 두께 26cm이다. (8) 농은고공제일효행비(農隱高公濟馹孝行碑)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죽림 앞에 있는 효행비이다. 비는 단기 4330(1997)년 정축 모춘절(暮春 節) 의령 남대희(南大熙) 찬서(撰書)하였다. 비의 높이는 161cm, 넓이 56cm, 두께 26cm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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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9) 학생장흥고공진상배유인김해김씨효열비(學生長興高公辰相配孺人金海金氏孝烈碑)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죽림 앞에 있는 효열비이다. 비는 단기 4330(1997)년 정축 모춘절(暮春 節) 의령 남대희(南大熙) 찬서(撰書)하였다. 비의 높이는 144cm, 넓이 54cm, 두께 24cm이 다. (10) 안유당산나무 안유마을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산 두 주가 있다. 마을 안쪽에 있는 당산이 할머니 당산이 고, 월산리 438번지 답의 남쪽에 있는 것이 할아버지 당산이다. 원래 있었던 당산은 태풍으로 쓰러져 죽고 그 자리에 어린 싹이 나 현재의 크기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할머니 당산의 수령 은 70년 이상이며, 수고 12m, 흉고둘레는 150cm이다.
<그림> 안유당산나무 (11) 한정노거수 성내면 월산리 373-10번지의 한정마을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수령은 100년 이상이고 2주가 있다. 수고는 28m이고, 흉고둘레는 160cm이다. (12) 한정당산나무 성내면 월산리 한정길 23-15번지 앞에 있는 한정마을의 당산나무이다. 수종은 주염나무이며, 한국전쟁 당시까지 당산제를 지내다가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이 당산나무는 태풍으로 쓰 러졌다가 쓰러진 밑 둥에서 싹이 나 현재의 크기로 자랐다.
<그림> 한정당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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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엣이동면사무소터 성내면 월산리 334-1번지(한정) 입구에 있었던 흥덕군 이동면사무소터이다. 현재는 밭으로 이 용되고 있으며, 1916년 일동면과 이동면이 통합되면서 한정리의 이동면사무소는 폐쇄가 되었 다. 이후 이곳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5) 월산리의 산업 월산리는 인근 마을에 비해 논이 넓다. 마을의 대표적인 농업은 비닐하우스 수박이다. 죽림의 마을 주민들은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수박농사를 짓고 있으며, 대부분의 월산리 농가는 논농사 를 짓고 있으며, 밭농사로 복분자나 고추농사 등을 짓고 있다.
6) 내안마을의 주민생활과 이야기들 내안과 안유는 같은 행정리로 내안이며 이 마을의 현 유정임(63세, 여)이장을 중심으로 웃어른을 공 경하고, 마을 주민 간 화합과 단합이 잘 이루어지는 마을로 유명하다. 마을의 주민들은 환갑이 되 면, 환갑을 맞이한 사람이 돈을 내어 마을주민들을 관광시켜주는 아름다운 풍습이 남아 있는 곳이 다. 마을 주민들은 매년 쌀 한 가마씩을 내어 회관에 보관하고 있다가 매일 점심과 저녁을 마을 주 민들 간에 함께 하고 있는 곳이다. 출향민들도 매년 마을에 후원금을 보내줘 마을회관의 운영에 많 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마을은 마을을 지나가는 누구나 마을회관에서 식사를 제공해주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다. 한편, 내안마을의 광산김씨인 김희동씨(1941년 생)는 내안에서 출생한 후 서울에 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임해 이 마을에서 거주하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마을회관과 모정 주변을 청소하고 멀리 가시는 분들을 차로 모셔다 드리는 등의 많은 허드렛 일을 하여 마을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마을의 이야기들로는, 안유와 내안 마을 사이에는 노송(老松)이 한 주 있는데, 이 나무가 있어 마을에 교통사고 한 번 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옛 지명과 관련하여, “칠 푼재에서 칠푼을 주고 사서 오목내에서 오목오목 먹고 헛그재에서 허기져서 죽었데요”라는 노 래가 불러졌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화목하게 사는 마을이어서 그런지 이 마을에는 여러 명의 박사들이 배출되었다고 한 다. 내안마을은 안봉술(영국 뉴캐슬대 정치학박사), 김용호, 김용재(미국), 김수옥, 채병임, 채 길성(한의학박사) 등 여섯 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7) 월산리의 역대 이장 한정 이장명 이영행 이영행 이영행
재임 기간 1983. 1.1 ~ 1983. 12.31 1984. 1.4 ~ 1984. 12.31 1985. 1.5 ~ 1985.
죽림 이장명 안태윤 안태윤 안태윤
재임 기간 1983. 1.1 ~ 1983. 12.31 1984. 1.4 ~ 1984. 12.31 1985. 1.5 ~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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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 이장명
재임기간
이영행 이영행 이종인 이경행 이경행 이경행 이경행 이경행 이경행 이종인 나국주 나국주 이경행 이경행
12.31 1986. 1.7 ~ 1987. 12.31 1988. 1.4 ~ 1989. 12.30 1990. 1.4 ~ 1991. 12.31 1992. 1.1 ~ 1993. 12.31 1994. 1.3 ~ 1995. 12.31 1996. 1.3 ~ 1997. 12.31 1998. 1.3 ~ 1999. 12.31 2000. 1.3 ~ 2001. 12.31 2002. 1.1 ~ 2003. 12.31 2004. 1.2 ~ 2005. 12.31 2006. 1.2 ~ 2007. 12.31 2008. 1.1 ~ 2009. 12.31 2010. 1.1 ~ 2011. 12.31 2012. 1.1 ~ 현재
이수범 이수범 이수범 이수범 고광서 고광서 채경석 채창석 채창석 손주남 손주남 손주남 손주남 고종규 고종규 고종규
12.31 1986. 1.7 ~ 1986. 9.30 1986. 10.1 ~ 1987. 12.31 1988. 1.4 ~ 1989. 12.30 1990. 1.4 ~ 1990. 12.31 1991. 1.4 ~ 1991. 12.31 1992. 1.1 ~ 1993. 12.31 1994. 1.3 ~ 1995. 12.31 1996. 1.3 ~ 1997. 12.31 1998. 1.3 ~ 1999. 12.31 2000. 1.3 ~ 2001. 12.31 2002. 1.1 ~ 2003. 12.31 2004. 1.2 ~ 2005. 12.31 2006. 1.2 ~ 2007. 12.31 2008. 1.1 ~ 2009. 12.31 2010. 1.1 ~ 2011. 12.31 2012. 1.1 ~ 현재
도움 주신 분 김희동(1941, 내안) 이종규(1926, 한정) 이수경(1923, 한정)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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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윤 채형석 채형석 이기수 이기수 이기수 이기수 이기수 이기수 김원종 김원종 채영석 채영석 유정임 유정임
1986.
10.1
~
1987. 12.31 1988. 1.4 ~ 1989. 12.30 1990. 1.4 ~ 1990. 10.30 1990.
11.1
~
1991. 12.31 1992. 1.1 ~ 1993. 12.31 1994. 1.3 ~ 1995. 12.31 1996. 1.3 ~ 1997. 12.31 1998. 1.3 ~ 1999. 12.31 2000. 1.3 ~ 2001. 12.31 2002. 1.1 ~ 2003. 12.31 2004. 1.2 ~ 2005. 12.31 2006. 1.2 ~ 2007. 12.31 2008. 1.1 ~ 2009. 12.31 2010. 1.1 ~ 2011. 12.31 2012. 1.1 ~ 현재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전북의 여각․충효열비』전북향토문화연구회, 2000. 『한국의 자생풍수2』, 민음사, 최창조, 1997.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1491 http://www.namdotoday.com/detail.php?nu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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