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토성(土城)아래의 마을, 성남리(城南里) - 대산면 성남리 백 원 철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법정리인 대산면 성남리는 행정리인 성남리와 성동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성남리는 또 자연부 락인 성남리, 관동으로 나뉜다. 예전에는 무장현에 속하였고, 근대에는 무장군 대제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동리를 병합하여 고창군 대산면에 편입되었다. 1) 성남리 오래된 토성이 있는 바, 이곳이 솟아 있어 산처럼 보이므로 오래전부터 토성산(土城山)이라 부르고 있 다. 그리하여 토성산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다 하여 성남리(城南里)라 부르게 된 마을이다. 대산면 소재 지에서 북쪽으로 지방도 734호인 무장선을 따라 5Km거리에 있다. 옛날 소속되었던 무장현의 현치인 성내리에서는 남쪽으로 10리의 거리에 위치한다. 원래 성남리는 조선 명종때 함양 오씨가 거주하기 시 작하였으나, 명자 호란 후 광산김씨 군자감정 김첩(金谍)공이 처가인 이곳에 낙향하여 거주하면서부터 광산 김씨가의 집성촌이 된 곳이다. 대산면 소재지에서는 역시 북쪽으로
4.5km 거리에 있고 서쪽으로 공음면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전하
는 말에 의하면 관례(冠禮)를 으뜸으로 준수한다 하여 관동(冠洞)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고창의 마을 유래>, 고창문화원, 2008, 참조) 2) 성동리 토성산 동쪽에 마을이 있다 하여 성동리(城東里)라 부르게 되었다. 대산면 소재지에서 734호 지방도 로를 따라 북쪽으로 6km쯤의 거리에 있으며, 북쪽과 동쪽으로 무장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사진(1) 멀리서 찍은 태봉산(95.3m), 정상부에 산성(토성)이 있어 ‘토성산’이라고도 부른다 - 1 -
2. 마을의 입향조(入鄕祖)와 내력 1) 성남리와 광산 김씨(光山 金氏) 성남리의 민가 46호 가구중 35가구가 광산 김씨임을 감안하면, 현재도 집성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 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광산 김씨는 언제부터 성남리에 자리잡게 되었을까? 족보(光山金氏棲竹軒公派譜, 念修齊, 2009)및 문헌(永翠世蹟, 1998) 등에 의하면, 25世 김첩(金谍, 1591 ~ 1656)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곧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재직하던 김첩이 병자호란(인조 14년, 1636)에 왕을 호가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항쟁하고 있던 중,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 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무장으로 낙향하여 이곳 성남리에 은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광산 김씨가 이곳 무장에 거주하게 된 시기와 그 내력은 어떠한가? 본래 광산(현 광주시)을 본관으로 한 광산 김씨 중 고려 왕조에 벼슬하던 가문은 수도인 개성(송도)부 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18世 김인우(金仁雨, 1329 ~ ?)는 고려 공민왕때 전리판서(典理判書)와 밀직부 사(密直副司)를 지내고 홍건적 난에 왕을 호종하여 일등공신훈을 받았던 인물인데, 아우(甲雨)의 무고사 에 연루되어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이때 아들 승길(承吉)이 부친을 따라 이곳 장사(무장의 옛 지역)에 내려옴으로써, 이때부터 그 후손들 이 고창에 자리잡게 되었는바, 그 계통을 알기 쉽게 파악하면 다음과 같다(19世인 승길은 함종현령<평 안남도 강서군>을 지낸 바 있으며, 부친을 따라 이곳 무장에 내려 온 이후, 이어서 고려 왕조가 무너지 자 절의를 지켜 두문불출하였으며, 그 아들 오행(五行)까지도 충절을 지키며 역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 다.)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仁雨
承吉
五行
錫元
億年
<전리판서> <장사감무>
<함종현령> 무장입향≫
<군기시정>
暘元
鵬
命元
<
22세
23세
鵬
漢瑚
24세
>
漢璉 <통례원상례>
聲振 <
, 정유란 순절>
聲遠
25세
26세
滌
晉輝
汲
聲徹
渫
<참봉>
<군자감정> <
입향>
貞老 貞說 貞澗 貞彦
聲鎰
- 2 -
夢弼
億成
사진(2) 성남마을과 광산김씨에 대하여 조언하는 분들 (좌로부터 김성환 교수, 필자, 김영균님) 위의 계통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광산 김씨가 고창에 거주하게 된 것은 19世인 김승길(金承吉)이 고 려 말(1360년대 ~ 1370년대)에 장사 지역에 거주함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성남리에서 세거하게 된 것은 25世인 김첩(金谍)이 1636년 명자호란 이후 낙향하여 성남리에 거주하게 되면서 비롯되었다.(일설에 조 선 명종때 함양 오씨가 성남리에 먼저 거주하고 있었으며, 뒤에 서죽헌공(김첩)이 낙향하여 처가인 이곳 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고창문화원 [마을의 유래]) 2) 성동리와 김해 김씨(金海 金氏) 성동리의 현재 가구 수는 모두 47호인데 이중 김해 김씨는 23호에 달한다 근래에 와서 타 성씨가 상 당수 유입되었으나 여전히 아직도 김해 김씨 집성촌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본래 김해 김씨와 고창과의 인연은 삼현파(三賢派) 한림공(翰林公) 金勇의 증손인 복원(福遠)공이 제주 목사를 지내고 뱃길로 귀향(충남 홍성)하던 중 운명하자 가까운 무장 청해면(현 해리면)에 장사지냈는 데,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후손 김정웅님의 조언). 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복원 공(일명 옥(鈺))은 1465년(세조 11)에 태어나 1543년(중종 28)에 졸하였으니 향년이 79세에 이르는데, 전해오는 말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매우 많은 나이에 제주목사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보다 분명한 기록이 확인 되는 바, 그것은 곧 임란공신 남계공(南溪公) 축(軸, 1514 ~ 1593)과 남 산정공(南山亭公) 헌(軒, 1517 ~ 1593) 형제가 충청도 홍주(홍성)에서 무장현 청해면 방축동으로 이주 하였다는 것이다.(三賢派 大同譜 翰林公上篇 및 壬亂功臣 金公 軸 義蹟碑 南山亭諱軒墓碣銘 참조) 그리고 다시 성동리에는 남산정공의 증손인 13세 철하(喆河, 1622 ~ 1689)공이 홍농(弘農)에서 이주 하였다고 한다.(위의 대동보 참조) 따라서 이들 세계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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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7세
8세
9세
勇
漢孫
大馨(應馨)
鈺(福遠)
<한림공>
<제주목사>
10세
軸 <임란공신>
軒 <임란공신>
輪 <무장입향>
10세
軒
11세
12세
斗南 <임란공신>
13세
德立 <
순절>
志南
昌立(孝立)
<임란공신>
<효자>
敬立 忠立 道立
敬河 喆河 <성동리 입향>
宗河 <金海金氏 三賢派 大同譜 卷甲 翰林公 上篇 참고>
사진(3) 성동마을과 입향조에 대하여 조언하는 천명기(고수면 부면장), 김조성(65세), 김범진(전 군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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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동리와 영양 천씨(穎陽千氏) 성동리에는 영양천씨 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영양천씨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끌고 온 천만리(千萬里) 장군(당시 직명은 조병영량사 겸 총독장 調兵領糧使 兼 摠督將)이 왜병을 섬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다시 정유재란에는 두 아들(祥과 禧)까지 대동 참전하여 역시 큰 공을 세웠으나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머물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공을 생각하여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현재 남원의 환봉서원(環蜂書院)에 향사되고 있는 바, 이로써 그 후손들이 대대로 우리나라에 거주하게 되었다. 위의 양영천씨가 고창지역 그 중에서도 이 곳 성동리에 이주한 것은 언제쯤일까? 이에 대한 분명한 기 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족보를 통해 추정해보면, 화산군의 증손인 동추공(同樞公) 경하(慶夏)와 현손 참의공 도(淘)를 비롯한 후대 10여 세대의 묘소가 대부분 성동리 부근 예컨대 무장 신월, 덕림, 칠거리 등에 소재하고 있음을 보면, 대체로 17세기 중반(1760년대) 전후로 무장현 지역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겠다. 한편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그 중에서도 성동리에 입향한 인물은 12세인 수갑(洙甲, 1875년 출생)을 비롯한 형제 수덕(洙悳), 수창(洙昌), 수천(洙天)등이라고 하는 바(후손 천양기님의 조 언), 그렇다면 입향시기는 20세기 초반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한편 다른 곳에서는 동추공(경하)이 병자호란에 남원에서 안거지를 찾아 대산면 선동리에 압향하여 후 손이 12대를 세거하고 있다고 하였다.(<고창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3. 마을의 인물과 행적 1) 김 첩(金 谍, 1591 ~ 1656) 광산 김씨로서 고려 공민왕때 밀직부사에 오르고 한때 좌천되어 장사감무를 지낸 김인우(金仁雨)의 후손이며 효능참봉(孝陵參奉)에 제수되었던 성철(聲徹)의 아들이다. 무진년(1628)에 무과에 급제하여 갑 술년(1634)에 훈련원 봉사, 주부에 이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올랐으며 병자호란에 왕을 호위하여 남한 산성에 들어가 항쟁하였다. 이어 청나라에 굴복하여 화의가 이루어지자 통곡하고 향리에 돌아와, 토성산 아래에 영취정(永翠亭)을 짓고 주위에 대나무를 심어서 끝까지 충절의 정신을 잇고자 하였다. 인조가 승 하하자 토성산에 단을 쌓고 북향하여 망곡(望哭)하였다. 광산김씨의 성남리 입향조가 된다.
사진(4) 성남마을 입구에 세운 서죽헌(김첩)선생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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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덕명(金德明, 1710 ~ 1781) 서죽헌공(김첩)의 5대손이며 호는 인피재(忍避齊)이다. 효성이 남달라 부친이 위독하자 단지하여 이틀 을 연명케 하였으며 홀어머니를 정성으로 봉양하고 돌아가시자 여묘를 지키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선산이 침식되자 평생 혼자의 힘으로 수축하고 수목을 심어서 본래의 모습을 회복시켰다. 자신을 돌아 보고 아울러 자손을 경계하는 회궁 · 훈자록(悔躬, 訓自錄) 3편의 글을 남겼다. 당시에 공의 덕행을 표 창해주기를 건의하여 사림들이 연명하여 올린 천장(薦狀)과 소지(所志)가 남아 있다. 3) 김기풍(金箕豊, 1835~ 1907) 서죽헌 공의 9대손이며 호는 죽강(竹岡)이다. 어린 나이에 주경야독하여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인근 에 효성으로 이름이 났고, 장성하여 로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며 경학을 강론하 고 절의를 숭상하니 선생이 특별히 중히 여겼고, 동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석음(石陰) 박로술 (朴魯述)등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영취정을 중건하였고, 서당을 열어 종족과 향리의 자제들이 학문을 닦 도록 주선하였다. 초고본 유고집이 전한다. 4) 김재헌(金在憲, 1869 ~ 1940) 서죽한 공의 10대 손이며 죽강공의 아들이다.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병신년(1896) 스승 을 따라 의병 거사계획에 참여하였고, 이어 병오(1906), 정미(1907)년간의 의병 거사에 격서를 초하여 이웃 고을에 배포하였다. 젊어서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는 나라 잃음에 분개하여 최면암의 대마도의 순적과 안중군 의사의 쾌거에 대하여 소회를 시로써 토로하였다. 문집 호석유고(湖石遺稿)가 간행되어 전한다.
사진(5) 김재현 공의 문집 『호석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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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영송(金永松, 1924 ~ 2005) 서죽헌 공의 12대 손이며, 호는 후담(厚潭)이다. 어려서 가학을 전수받고 성장하여서는 현곡(玄谷) 유 영선(柳永善)과 효당(曉堂) 김문옥(金文鈺)문하에서 한학을 수업하였다. 전주 명륜학원(明倫學院)에 입학 하여 수하하였고 함평 소재 학다리고등학교에서 고문(古文)과 역사 과목을 담당하여 30여년간 교직에 종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한문과 국한문체로서 금석, 시문을 저술하였으며 선대의 문헌을 취합, 정리 하여 1998년에 [영취세적(永翠世蹟)]을 편찬, 간행하였다.
사진(6) 서죽헌공계 후대의 문헌집『永翠世蹟』(김영송 편찬)
6) 정균태(鄭均泰, 1910 ~ 1983) 진주 정씨 무장현 입향조인 수군절제사 정종순(鄭宗舜)의 14대손으로서 세거해 오던 성송 괴치에서 태어났으나, 결혼 후 20세 쯤에 외가인 이곳 성남에 이주하였다. 5.16 군사 혁명후, 재건국민운동 대산 면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60년 고창군 교육위원회 부위원장직을 맡은 바 있고, 정씨 문중 도유사 를 지내며 종중의 대소사를 원만히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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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 1950년 고창군 교육청 교육위원(우측 아랫줄 2번째가 정균태 공이다.)
4. 마을의 문화유적과 유물 1) 영취정(永翠亭) (1)영취정의 건립 배경 성남리 마을 뒤 언덕에 세워진 영취정은 서죽헌 김첩(金谍)공이 낙향하여 세운 8각 정자이다. 인조왕 병자년(1636) 호란에 왕을 호가하여 남한산성에 들었던 서죽헌 공은, 굴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지자 “삼 백년간 예의를 지켜온 나라가 하루아침에 간교한 자들에 의하여 팔린 바가 되어 폐백을 바치고 신(臣) 을 칭하게 되니 이는 신하로서는 참을 수 없다.” 하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이곳 토성산 아래에 은거 하여 영취정을 짓고 그 주위에 대나무를 심었다. 대나무는 절개를 상징하며, 영취정(永翠亭)이라는 이름 도 “길이 길이 푸르러 변함이 없다.”는 뜻을 취한것이 곧 공 스스로도 충절의 정신과 삶을 이어가겠다 는 뜻을 밝힌 것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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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 최근의 영취정 전경
(2) 영취정이 걸어온 길 영취정은 처음 세워진 뒤로부터 약 150여년이 지난 갑인년(1794, 정조 18)에 노후되어 무너졌다. 그 후 70여년이 지난 병인년(1866, 고종 3)에 후손 김기풍(서숙헌공 9대손)에 의하여 초가 두칸의 규모로 재건하고, 대나무도 다시 심어서 옛모습을 일부나마 되살리고자 하였다. 갑오년(1894, 고종31)에는 동학(東學)이 일어나 동학군들이 깃대와 창대로 쓰기 위하여 거의 배어가 대 나무 밭이 황폐해졌다. 이듬해 을미년(1895)에 대나무를 다시 심어 몇 년 만에 전날의 모습을 회복하였 다. 영취정은 수 십년이 지나 다시 지붕이 세고 벽이 무너질 형편이 되었는데, 10대손 재헌(在憲, 1869 ~1940)이 중심이 되어 신축년(1901)에 기존의 초가지붕을 기와로 이으면서 팔각이 뚜렷해지고 ‘永翠 亭’의 글씨로 현판에 걸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또 세월이 지나면서 다시 퇴락하게 되 었는바, 이는 기현(箕現, 1871 ~ 1948), 용현(龍鉉, 1895 ~ 1973)에 의해 일제 말기, 광복 직전에 다 시 중수되었다. 주위의 대밭은 인근의 경찰지서등에서 당시 공비들과 대치할 때 방어용 울타리로 쓰기 위하여 남벌하 며 황폐해졌었는데, 다행히도 근래에 후손 김성환(金聖桓, 1942 ~ , 서죽헌 공의 13대 종손, 전 전주대 학교 교수)의 노력에 의해 울창한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한편 영취정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차례 중수를 거듭하였으나, 마지막 중수로부터 또 70여년 이 흐른 현재 역시 사진이 보여 주듯이 퇴락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지방 문화재나 사 적지로 지정되어서 계속 보존,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행하게도 최근<2011.9월>에 비지 정 문화재를 보수하는 단체 ‘전라북도 문화재 Outreach’<단장 정경미교수>에 의하여 건물은 보수되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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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 여러차례 수난을 겪은 대밭(영취정을 서북편으로 두르고 있다.) (3) 영취정에 관한 기문과 차운시 영취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개괄적으로나마 알려주는 글은 기문인데, 이에는 ‘영취정사실기’, ‘영취정 기’, ‘영취정중수기’ , ‘영취정상량문’등이 남아 전해온다. 현재 영취정을 세웠던 서죽헌 공의 글은 남아 있지 않으며, 따라서 위의 기문들은 모두 서죽헌 공의 10 대 쯤 뒤의 후손들에 의해서 기록된 글들이다. 그 중 ‘영취정 중수기’를 들면 다음과 같다.
永翠亭重修記 茂松山水鄕也 其氣鍾靈 忠孝節義之士輩出 光山金公 棲竹軒諱渫 其一也 公生於宣廟辛卯 而幼岐嶷顔 如白玉 聲若洪鐘 才學語 便能讀書 (중략) 戊午登武科秉節校尉 甲戌移主簿 志軍資監正 仁廟丙子 滿 寇迫郊外 扈駕入南漢 及江都陷 而大駕下城 罔爲陪臣 解組歸土城山下 栽竹數畝 起亭一區 額之以永翠 盖竹有切磋琢磨 君子之道學 自修也 未嘗摧折 義士之守士死 善道也 遂與子姪及群英 復理舊業 四方雲 集 庠舍至不容 棟樑高大 堂室明潔 固一時之勝也 幾世之後 上雨而傍風 土落而壁頹 勢不能支 行路爲 之咨歎 況其賢裔乎 箕現龍鉉 後承中賢勞者也 鳩財募工 補頹葺毁 而一新之 鳴乎休哉 役已畢 謁余記 顚末 遂書之如右 (하략) -嘉善大夫 吏曹參判 驪興 閔丙承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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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0)
영취정 중수기 현판 영취정중수기
茂松은 산수향이다. 그 기운이 두드러지게 빼어나서 충성하고 효도하며 절의의 선비가 계속 나오 니 光山 金公 諱 渫도 그 중 한분이다. 公이 선묘 辛卯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영리하고 얼굴은 白玉과 같으며 소리는 큰 종소리 같고 겨우 말을 배우자 능히 글을 읽었다.(중략) 戊午에 武科에 올라 秉節校尉였다가 甲戌에 訓練院奉事로 軍資監正에 이르렀는데 仁廟 丙子에 만주 되놈이 성문 밖까지 핍박할새 公이 大駕를 호종하고 남한에 들어갔다가 江都가 함락되고 大駕가 下 城함에 陪臣을 그만두고 인끈을 풀고 土城山 아래로 돌아와서 대밭 두어 이랑을 일구고 한 구간에 정자를 세워 永翠로써 편액하니, 아마도 대나무는 切磋琢磨하여 군자의 道學을 스스로 닦고 義士의 지조와 착한 도를 꺾지 아니하는 盛德과 至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子姪 및 여러 英才 들과 더불어 다시 옛날의 학업을 다스리니 사방의 英才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서당집에 다 용납하 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棟梁이 高大하고 室堂이 明潔하여 진실로 한때의 勝地가 되었다. 몇 대 후 에는 위에서는 비가 세고 곁으로는 바람이 쳐서 흙이 떨어지고 벽이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는 형편 이 되니 길가는 사람도 탄식하거늘 하물며 어진 자손이야 말할 수 있겠는가. 箕現과 龍鉉은 후손중 에서 현철하고 노고한 사람들이다. 재물을 모으고 장인을 모집하여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헐어진 곳을 수선하여 환경을 一新하게 하였으니 아! 아름답도다. 役事를 이미 마치고 나에게 전말을 기록 해 주기를 청하여 마침내 위와 같이 쓴다.(후략)
-가선대부 이조참판 여흥 민병승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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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취정을 읊은 시로서는 재헌(在憲)에 의해 중수된 후 읊은 원운(原韻)이 있고, 그에 따라 차운(次韻) 된 시들이 여러 편 새겨져 정자에 걸려 있는 바,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永翠亭重修韻 琅玕數疊翠成林
옥 같은 대나무 두어겹 푸른 숲을 이루었으니,
先澤維新永至今
선세의 여운이 지금까지 새롭게 전해오도다.
凄雨痛含南漢淚
처절한 빗소리는 南漢의 눈물 목메이고,
寒年猶帶北窓陰
추운 절서 아직도 北窓의 그늘 띠우고 있도다.
掃石秋階塵不起
쓸어낸 가을 돌층계에 먼지 일지 아니하고,
橫琴竹檻月相尋
거문고 놓인 난간 대자리에 달이 찾아오도다.
後來子姓倍懷想
후세 자손들 추모하는 회포 배나 간절하니,
聊把長春賦一吟
애오라지 長春을 잡아 詩 한 수 읊는도다. - 十代孫 在憲(10대손 재헌, 1869~1940) -
謹次 永翠亭重修韻 歸來手植此成林
돌아와 손수 대나무숲 이루고,
堂構相傳却到今
얽은 永翠亭 지금까지 전해오네.
凜凜寒莖誇晩節
늠름한 찬 줄기는 늦은 절개 뽐내고,
猗猗新葉拂淸陰
의의한 새잎사귀 맑은 그늘 드리우네.
當年應切風泉痛
당년에는 응당 風泉의 서러움 간절했으련만,
衰世誰能古道尋
쇠퇴한 세상에 누가 고도의 아름다움 찾을까.
休說時人功利事
세상 사람들아 공리를 따지지 마소,
何如竹裡臥長吟
대나무 숲속에서 길게 읊조림 어떠한가. - 高興 柳永善(고흥 유영선, 1893~1961) -
次韻 栽松種竹翠成林
소나무 대나무 심은 푸른 숲에,
一笠孤亭保至今
한 선비의 외로운 정자 지금까지 보전되었네.
彷彿墨胎雷首下
뇌수산 남쪽 묵태씨의 은거 생활과 방불하고,
逍遙孔氏北山陰
북제의 북산 공씨의 移文 읊으며 소요하네.
全忠投紱心應苦
충성 온전히 하려 인끈 던지니 마음이야 외로웠겠지만,
望哭爲壇跡可尋
단을 쌓고 망곡하였으니 자취를 찾을 수 있도다.
何用春秋披異曆
어찌 세월 가는 데 다른 책력 펴볼까,
杜門抱膝費長吟
문 닫고 무릎 끼고 긴 신음만 하누나. - 長興 魏啓道(장흥 위계도 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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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1) 영취정 원운(10대손 재헌 글씨)
사진(12) 근차 영취정 중수운(고흥 유영선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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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서죽헌 김선생 유적비 성남리 마을 입구에 세운 서죽헌 김첩(金渫, 1591~1656)선생의 유적비로서 1972년에 세웠다. 비문 은 은진 송재성(宋在晟)이 짓고 글씨는 12대손 영송(永松)이 썼다. 棲竹軒金先生遺蹟碑文 竊以維忠維孝 天之經地之義 而人之行 莫切於此也 光山金氏 展居于茂松山水之鄕 而靈秀鍾毓 忠孝節 義之士 間世輩出 軍資監正 金公亦其一也 謹按公諱渫 字汝淸 號棲竹 (중략) 高祖諱暘元 四學訓導 曾 祖諱鵬判官 祖諱漢璉宣陵叅奉 考諱聲徹 孝陵叅奉 妣蔚山金氏 公生于宣廟辛卯 自幼膽略絶人 志操超 倫 孝於事親 溫凊之節 定省之勤 滌瀡之供 志體之養 靡不庸極 而前後喪 啜粥居廬 寢苫枕塊 柴毁骨立 晝習弓馬 夜閱兵書 鄕坊推重 戊午登武科 秉節校尉 甲戌以訓練院奉事 移主簿至軍資監正 當仁廟丙子 胡兵逼京城 大駕播遷 公扈駕入南漢 及江都城陷 國事蒼黃 慘不忍言 而聞講和之說 籲天痛哭 曰寧爲社 稷而殉 安得屈膝而生乎 以小中華三百年 禮義之邦 一朝奉幣 稱臣於胡虜之庭 此臣子 所不忍爲也 遂解 組 旋歸于土城山下 龍田舊居 栽竹數畝 自號棲竹 而因築永翠享於其前 將爲棲息之所 盖彌勵其晩節也 己丑五月 仁祖昇遐 築壇于土城之上 北向望哭 每値諱辰 登壇拜哭 終身如一 卒于丙申 葬于茂長 大山 面中山艮坐 配咸陽吳氏 工曹正郞 大浩之女 有婦德 墓同郡白石面 脈墓下未坐 (중략) 嗚呼 若公儘可 謂忠孝兼備 而至今三百餘年 風韻彌彰 滿鄕士林 爭慕其義 將竪貞珉 而讚揚其偉蹟 使儒林金奎煥 朴鍾 洙 本孫在斗 謁余而書其碑陰 余雖不文 可尙其鄕章甫 崇賢之誠力 遂不辭 而叙其㮣要 如右云爾 後學 恩津 宋在晟 撰 가만히 생각하면, 오직 忠과 孝는 天地의 經과 義로서 사람의 行이 이보다 간절함이 없다. 光山 金 氏가 茂長 山水鄕에서 여기저기 살면서 뛰어나고 빼어나고 두드러지게 양성된 忠孝節義의 선비가 세대를 거르면서 계속 나오니 軍資監正 金公도 또한 그 한 분이시다. 삼가 살펴보니, 公의 휘는 渫 이요 자는 汝淸이며 호는 棲竹軒이다. (중략) 고조의 휘 暘元은 四學訓導요, 증조의 휘 鵬은 판관이 며 할아버지 휘 漢璉은 宣陵參奉이요 아버지 휘 聲徹은 효릉참봉이요 어머니는 蔚山 金氏다. 公은 선조 辛卯에 生하여 어려서부터 膽略이 남보다 뛰어나고 지조가 월등하였으며 어버이에게 효도하여 溫凊의 절차와 定省의 부지런함과 맛있는 음식과 志禮의 봉양이 극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리고 前後 喪에도 죽을 마시고 시묘 살며 거적자리를 깔고 흙덩이를 베개로 삼아 슬퍼하여 몸이 앙상하 게 야위었다. 낮에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며 밤에는 兵書를 열람하니 鄕坊에서 추앙하여 존중히 여기더니 戊午년 武科로 병절교위에 오르고 甲戌에 훈련원 봉사로써 주부에 옮겨 軍資監正에 이르 렀다. 仁祖 丙子년에 胡兵이 京城을 핍박하여 大駕가 播遷하매 공이 大駕를 호종하여 南漢에 들어 갔다가 江都의 성이 함락되고 국사가 황급하여 참혹한 정상을 차마 말할 수 없는데 강화의 소식을 듣고 하늘에 호소하면서 통곡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사직을 위하여 죽을지언정 어찌 오랑캐에게 무릎을 굽히고 살 것인가. 삼백년 禮儀의 나라로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뜰에 폐백을 바치고 臣을 칭 하는 것은 臣子로서 차마 못할 일이다.” 하고 마침내 인끈을 풀고 토성산 밑 龍田 옛집에 돌아와서 대나무 두어 이랑을 심고 스스로 棲竹軒이라 號하고 永翠亭을 그 앞에 세워서 棲息하는 곳으로 삼 으니 아마도 그 늦은 절개를 더욱 힘쓰기 위함이다. 己丑 五月에 仁祖께서 승하하자 토성산 위에 壇을 쌓아서 北向하여 望哭하고 매양 그 諱辰을 당하면 단에 올라 拜哭하기를 종신토록 한결같이 하였다. 丙申에 졸하니 茂長 大山面 중산 良坐에 葬하였다. 配는 咸陽吳氏니 공조정랑 大浩의 딸로 婦德이 있으며 墓는 同郡 백석면 脈墓 아래 未坐이다. (중략) 아! 公같은 분은 충과 효를 겸비하였다 말할 수 있어서 지금 三百餘年이 지났으되 아직도 風韻이 더욱 빛나니, 고을의 많은 士林들이 그 義를 다투어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그 위대한 遺蹟을 찬양 하려고 할새 유림 金奎煥·朴鍾洙 본손 在斗로 하여금 나에게 비문을 청하니 내가 비록 글을 잘하지 못하지만 그 고을 선비들의 賢人을 숭모하는 성의와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마침내 사양하지 아니하 - 14 -
고 그 개요를 위와 같이 서술하노라. (후학 은진 송재성 지음)
사진(13) 서죽헌 김선생 유적비 3) 만취당 김공 유허비(晩翠堂 金公 遺虛碑) 만취당 김공 정열(貞說, 1617~1673)은 서죽헌 공의 차남이다. 비문은 족후손 영표(永杓)가 짓고 신유 년(1981)에 세웠으며, 마을 입구에 위치한다. 通德郞晩翠堂公 貞說 遺墟碑文 棲竹軒先生 金公渫 國朝人祖朝人也 當丙子之歲 聞北虜犯順境 扈從大駕 直赴南漢 期以殉國 而途聞媾 和 痛哭而歸 自是不復問人間事 卜居茂松南 土城山下 築亭藏修 手栽松竹于庭 以見已志 公旣沒 其胤 晚翠堂貞說 遵父志 守遺亭 講明尊周大義 不屑屑於世間 得喪榮辱 毁譽休戚 採樵資活 餘力究經 以爲 安身立命 地又植桑麻數頃 以爲子孫計 昆季四人 同垣而居 食同卓 寢同被 湛翕有塤箎之樂 時人擬之 以張公家 自後光山氏 承守靑氈 于茲數百年餘矣 賢仍繼世 寔繁孫支蔚然 爲鄕中之罕比 噫 直氣之報 如是哉 今公之後孫 箕天在卜 念其遺躅 不可使之埋沒也 方將伐石 圖壽厥傳 而來問辭於不佞 不佞以同 族 誼不能辭也 爲之叙次如右 仍念余時過公遺庄 見其遺仍 皆興於禮義 法度可觀 而山川秀美 原野曠夷 其一草一木 遺澤尙存 吁 其懿哉 賢祖之庇庥子孫 乃如是也 公户曹參議 聲徹孫 先世湖南之光山人也 良簡公璉后 梅隱先生五行 爲六世祖 銘曰 “倡之非易 嗣守更難 嗟 光山人 忠孝不殫 遺躅攸存 不忍廢荒 鑱竪勒辭 遺風其長” 族後孫 永杓 謹撰
棲竹軒先生 金公 渫은 조선조 仁祖때 사람이다. 병자(1636)년을 당하여 북쪽 오랑캐가 도성을 침범했 다는 소식을 듣고 大駕를 호종하고 곧바로 南漢으로 달려가서 殉國을 기하였다가 중도에서 和盟이 맺어 졌다는 소식을 듣고 痛哭하며 돌아와 이로부터 다시는 人間事를 묻지 않고 茂松 남쪽 土城山 밑에 亭子 - 15 -
를 짓고 손수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그 굳은 志節을 나타냈다. 일생을 마치니 그의 아들 晩翠堂 貞說 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遺亭을 지키며 尊周의 大義를 講明하고 세상의 得失과 榮辱 그리고 毁譽와 休戚 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採樵로 생활을 의지하고 남은 餘力으로 經書를 연구하여 몸을 편히 하고 천명을 세우는 터전으로 삼고 또한 뽕나무와 삼을 몇 이랑 심어 자손의 생계로 마련하고 同氣 四兄弟가 같은 담안에 살명서 같은 밥상에서 먹고 한 이불에서 자니 湛樂함이 壎과 箎가 서로 화답하는 듯 하여 당시 의 사람들이 張公藝의 집과 같다고 칭하였다. 그 후로 광산 김씨가 世業을 지켜온 지 지금까지 수백년 에 자손들이 대를 이어 번성하여 향중에서 어깨를 견줄 이 드물었으니 아! 正氣의 보답이 이러하도다. 이제 공의 후손 箕天 在卜이 그 옛 자취를 理沒시킬
수 없다 하여 돌을 세워 오래 전하려고 나에게 글
을 부탁하니 나또한 同族의 誼로 사양하지 못하고 위와 같이 기록한다. 내가 평소에 공의 遺庄을 지내 면서 공의 후손들을 보면 예의 법도가 본받을 만하며 또 山川이 아름답고 들이 넓어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아직도 유택이 남아있는 듯 하니 아! 아름다워라, 賢祖의 자손을 돌보아 주는 음덕이 이러하 도다. 공은 호조참의 聲徹의 孫이요 先世는 호남 광산인이며 良簡公 璉의 후요 梅隱先生 五行의 六世孫 이다. 이에 銘한다. 앞서기도 쉽지 않고 이어서 지키기도 또한 어렵도다. 아! 광산 김씨는 忠孝가 그치지 아니하였는도다. 남은 발자취 차마 묵힐 수 없어 돌을 깎아 사실을 새기니 그 遺風이 영원하리로다.
사진(14) 만취당 김공 (貞說, 1617~1673)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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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농은 김공 효행비(農隱金公孝行碑) 농은김공재석(在碩, 1887~1960)은 서죽헌공의 10대손이다. 비문은 안동김정회(金正會, 1903~1970) 가 짓고 글씨는 후손 영송(永松, 1924~2005)이 썼으며 戊申年(1968)에 마을 입구에 세웠다. 農隱公 在碩 孝行碑 公之孝 固職分所當 爲奚以爲碑 碑焉者 爲來世勸也 公光山世家 考曰箕燦 壽嘉善 高宗丁亥十月十八日 生公 天性至孝 家貧躬耕 漁樵以供甘 冬夏以溫凊養致之樂 有如此者 親癠夜不解帶 醫藥救護 嘗糞露禱 靡不用極 病致之憂 有如此者 遭艱柴毁骨立 不脫絰帶 不御酒肉 日必展墓 淚迸草枯 當膝成坎 喪致之 哀 有如此者 遠近先墓 廣置祭田 累修石儀 不以親疎有間 追遠之誠 有如此者 與伯氏退隱公 湛和以翕 食同卓 寢同被 暫不相舍 友于之篤 有如此者 此婦孺樵牧之所爭誦 而鄕道多士之所交薦也 終于庚子五 月二十四日 墓古水之隱士後嶝卯原 配密陽朴氏 全州李氏 幷無育 取伯氏弟二子 敏鍚子之 敏鍚擩染家 訓 克趾厥美 治貞珉 樹于宅里 以圖不朽 噫 此可以風勵百世 以振頹流矣 詩曰孝子不匱 永鍚爾類 其斯 之謂也歟 安東 金正會 撰 공의 효행은 진실로 아들로서 당연히 행하여야 할 직분인데 어찌하여 비를 세우는고? 비석에 행적 을 새겨 세우는 것은 후래들이 그 아름다운 행동에 따르도록 권장함이다. 공은 광산의 세가로 그 아버지는 箕燦이니 수직이 가선대부다. 공은 고종 丁亥(一八八七)年 十月 十八日에 생하여 타고난 효성이 있어 가세가 심히 가난함에 몸소 밭을 갈며 고기잡고 나무하여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공 양하였으며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여 편안하게 하였으니 그 봉양함에 있어 마음을 기쁘게 함이 이와 같았다. 부모가 병환이 있을 때는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고 의원을 맞이하고 약을 구하여 정성껏 구료하며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증험하고 하늘에 기도하는 등 모든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부모의 병환에 근심함이 이와 같았다. 상을 당하여는 슬픔이 지나쳐 몸이 쇠 약해져 뼈만 남을 정도였으며 수질과 요질을 풀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날마다 묘소에 가서 슬피 울며 절하니 눈물이 흘러 풀이 마르고 무릎을 꿇은 곳에 구덩이가 생길 정도였으니 그가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이와 같았다. 여러 대 선산에 위토를 마련하고 석물을 갖추었으되 代數의 멀 고 가까움을 구분하지 않았으니 그 위선하는 성의가 이와 같았다. 백형 退隱公과 우애과 지극하여 한상에서 밥먹고 한이불 밑에서 잠을 자며 잠시라도 서로 떨어져 살지 않았으니 그 우애가 독실함 이 이와 같았다. 이러한 일이 있기에 부녀자들이나 초동 목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칭송한 바 되고 鄕中이나 도내 선비들이 다투어 표창한 바 되었다. 庚子 五月 二十四日에 卒하니 墓는 古水隱士峰 뒷등 卯坐이다. 부인은 密陽朴氏와 全州李氏이니 모두 혈육이 없어서 백형의 둘째아들 敏鍚을 취하 여 아들로 삼았다. 민석이 또한 가훈을 받들어 능히 조업을 이어가며 비석을 마련하여 마을 앞에 세워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니 슬프다. 이런 일은 가히 후세를 깨우치고 시대의 폐습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로다. 詩經에 이르되 효자가 행한 美德은 그치지 아니하고 영원히 후손에게까지 미쳐 후 손 또한 효도하리라 하였으니 이런 일을 두고 이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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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5) 농은 김공(在碩, 1887~1960) 효행비 5) 망곡단(望哭壇) 광산김씨 성남마을 입향조인 서죽헌(金渫) 공이 병자호란에서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하여 은거하던 중 인조가 승하하자(1649년) 마을 뒤 토성산에 올라 단을 쌓고 북향하여 통곡하기를 계속하였는데, 후손들 이 그 곳을 정비하고 2007년에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은 고흥 유재영(柳在泳, 전 원광대학교 교수)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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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5) 서죽헌공의 망곡단
사진(16) 서죽헌공 기념비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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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송 윤씨(尹氏)의 시조 묘소와 재실 성남리에는 무송윤씨(茂松尹氏)의 시조인 양비(良庇)공과 두 아들 해(諧), 의(誼)의 묘소가 있으며 재 실인 송양사(松陽祠)가 있다. 읍지에 의하면 무송 윤씨는 토성(土姓)으로서 고려때 대대로 호장(戶長)을 지낸 가문이라고 하는 바, 이로써 본다면 삼한시대부터 거주하여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조 양비공은 보승랑장(保勝郞將)의 품직을 받았고, 장자 해(諧)는 출사하여 충렬왕때 국학 대사성 문 한사학(國學 大司成 文翰司學)에 올랐다.
사진(17) 무송 윤씨의 시조 양비(良庇)공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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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8) 무송 윤씨의 재실 송양사 7) 김해 김씨가의 호적단자 성동리 김해김씨가에는 조선후기 호적단자가 보존되고 있다. 곧 김해김씨 중시조 판도판서공(名 管)의 18대손 성렬(聖烈)과 아들 병환(秉桓), 손자 준렬(俊烈)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48년간에 걸쳐 발급된 것으로서 모두 14장이다.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어서 조선후기 사회사 연구의 사료가 될만한데, 여기 에서는 호주(성렬)와 손자(준렬)의 해당 단자 2장을 예로 들어 검토하므로써 그 가족사항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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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9) 병오년(1846, 현종12)의 호적단자
大梯面 城東里 丙午式 戶籍單子 第二統三戶 幼學鰥 金聖烈 年三十八 己已本盆城 父 學生 元興 祖 學生 已龍 曾祖 學生 世泰 外祖 學生 吳性眞 本海州 率子 基煥年 十三 甲午 賤之秩 奴 千金 年三十三 甲戌 奴 貴介 年二十六 辛巳 行縣監 위 단자에서 보면 호주 김성렬은 병오년(1846) 현재 대제면(현 대산면) 성동리에 거주하며, 홀아비로 서 나이는 38세, 기사년 출생자이며 본관은 분성(김해)이다. 신분을 유학(儒學)이라 하였는 바, 벼슬하지 않은 유생(儒生)을 칭하는 말이므로 사족(士族)의 신분임을 밝히고 있다. 가족관계로는 고인이 된 부·조·증조까지 직계 선조의 이름을 쓰고 신분은 학생이라 하였는 바, 이는 생전에 벼슬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외조의 경우는 역시 본관을 해주라고 밝혔다. 아들 은 기환인데 나이는 13세 갑오년 생이다. 노비는 2명인데 천금은 나이 33세 갑술생이며, 귀개는 26세 로 신사생이라 하였다. 한편 위의 단자와 근래 간행한 족보(김해김씨 3현파 대동보)와 비교하여 확인해보면, 호주 김성렬(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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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烈)은 족보에는 김조우(金照愚. 초명은 照源, 뒤에 平源으로 개명)로 되어 있고, 부는 진풍(鎭豊, 자는 元命), 조는 선길(善吉, 자는 乙龍), 증조는 태오(泰五, 초명은 仁泰)로 되어 있는 바, 이를 보면 후대에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름자 기록이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외조의 이름도 吳性眞, 본관은 금성(錦城, 현 나주)으로 되어 있어, 역시 이름자와 본관도 단자와는 다 르게 되어 있다. 위에 소개한 병오년(1846)단자에 이어 약 50여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손자(金俊烈)에게 발급된 단자는 다음과 같다.
사진(20) 갑오년(1894, 고종 31)의 호적 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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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梯面 城東理 甲午式 戶籍單子 第一統二戶 幼學金俊烈 年三十二癸亥 本金海 父 學生 秉桓 祖 學生 平源 曾祖 學生 元興 外祖 學生 金夏鼎 本金山 妻孫氏 世二十七 成辰 籍密陽 賤口 奴莫禮 年五十九 丙申 行縣監
지난번 호적단자로부터 48년이 경과한 갑오년 (1844)에 손자 金俊烈에게 발급된 위의 단자를 보면 거주자의 통호가 제 2통 3호에서 제 1통 2호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호주의 처는 밀양손씨 27세 무진년생이고, 노비는 막례라는 이름으로 나이는 59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현존 족보와 비교해보면 호주 김준렬이 용현(容鉉)으로 기재되었고(字는 鉉炳), 생몰연대는 계해(癸亥, 1863) ~ 임오(壬午, 1942)로 확인된다.
8) 고대유적과 출토유물 (1) 성남리 Ⅰ유적 : 원삼국 시대 고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 연구소는 1999년 서해안고속도로 구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번 발굴을 통해서 수혈유구 3기, 구상유구 1기, 주공 53기, 토광문 2기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무문토기 편, 두형토기, 점토대토기편, 지석 등이다. (2) 성남리 Ⅲ 유적 : 원삼국 시대 고분(성남리 671~2) 발굴 조사 결과 주구묘 15기, 옹관문 3기, 수혈유구 17기, 구상유구 3기, 미상유구 5기, 민묘 32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이중구연호, 단경호, 옹관, 파수부토기, 철제품 등이다. (3) 성남리 Ⅳ 유적 : 원삼국 시대 고분(성남리 672-11) 주구묘 2기, 주거지 1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대형옹관편완, 회청색토기편 등이다. (4) 성남리 Ⅴ 유적 : 원삼국 시대 주거유적(성남리 1193-3) 요지 3기, 폐기장 1기, 주거지 7기, 굴립주건물지 5기, 수혈유구 4기, 성격미상 유구 1기 등이 조사되 었다. 출토 유물은 발형토기, 장란형토기, 적갈색 연질토기, 시루, 이중구연호, 그릇받침, 방추차, 양이부 호, 석기 등이다. (5) 성남리 Ⅵ 유적 : 원삼국 시대 주거 유적(성남리 673-6) 주거지 3기, 구상유구 1기가 조사되었다. 출토유물은 발형토기, 적갈색 연질토기편, 석촉 등이다. (6) 성남리 지석묘군 : 청동기시대 지석묘(성남리산 53) 성동마을 북측 야산 ․ 김해 김씨 묘 뒤편 대나무숲에 지석묘 5기가 있다. 마을에도 수기의 지석묘가 있었으나 개간에 의해 파괴되었다. 가장 큰 지석묘는 350 × 280 ×
60cm이다.
(7) 성남리 유물산포지 1 : 원삼국 시대 유물산포지(성남리 1198-13) 미동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맞은편에 해당된다. 현재 무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유물은 구릉하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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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옹관편, 연질타본문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8) 성남리 유물산포지 2: 삼국시대 유물산포지(성남리산 7~5) 성동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인접하여 서측에 위치한다. 현재 무밭으로 경작되고 유물은 연질토기 편, 경질타날문토기편이 수습되었다. (9) 성남리 유물산포지 3: 원삼국~삼국 유물산포지(성남리 633-2) 성남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북동측에 위치한다. 유물은 연질토기편, 경질토기편, 타날문토기편 등이 다. (10) 성남리 산성 : 시대미상 성곽(성남리산 55) 성동마을 서측의 태봉산(95.3m)에 위치한다. 정상부는 나지막한 대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토성으로 알 려져있다. 이전에 정상부에는 기와편이 산재해 있었다고 전한다.
사진(21) 성남리 유물산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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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2) 성남리 출토유물
5. 마을의 지명과 유래 1) 성남마을의 지명과 유래 ◦ 용대밭 : 영취정 주위의 대나무밭 ◦ 윳솔발 : 망곡단과 재실(염수재)주위와 뒷산 ◦ 부산등 : 마을 앞 남서쪽 언덕(백호등) ◦ 당산등 : 백호등의 할메당산(소나무) 있는 곳 ◦ 상전들 : 방죽 건너 윗편, 홍역으로 죽은 아이 묻던 곳 ◦ 가마수랑 : 덕골 밑 습지, 옛적 가마가 빠진 곳 ◦ 송침재 : 마을 서쪽 소나무 우거진 곳 ◦ 우왕샘 : 마을 뒤 윗솔밭 언덕 밑의 샘, 전에 우씨와 왕씨 등이 거주하여 마셨다는 샘 ◦ 숫당산 : 마을 왼쪽 솔밭에 있는 팽나무(수령 약 300년) ◦ 산정뫼 : 마을 서북쪽의 작은 산, 윤씨 선산 ◦ 아홉 바위등 : 상정뫼―군유리 사이 경로에 바위 9개가 있는데, 성남리 구역에 2개가 놓 여있음 ◦ 큰벌안 : 마을 북동쪽 넓은 곳. 전에 마을 청소년들이 모여 공차고 씨름하던 곳 ◦ 돌바위 : 성남 ․ 성동리 간의 경계, 동북간에 있는 바위. 전하는 말에 ‘김일성’이 갓쓰고 지나갔다고 한다. ◦ 뒷방죽 : 산전뫼 서북쪽에 있는 방죽 ◦ 칠거리 : 덕점 ․ 괴치 ․ 양사 ․ 대산 ․ 오월농장 ․ 성남 ․ 무장 가던 길이 교차되는 곳 ◦ 점촌 : 마을 대밭 넘어 위치한 곳, 전에 대장간이 있어서 모든 농기구를 제작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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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육철솥은 이름이 있었다. 지금도 부근에서 쇠를 다룬 쇠똥이 출토된다. 2) 성동마을의 지명과 유래 ◦ 성재 : 토성산 옆으로 하여 산정뫼 가는 길 ◦ 솔안너며 : 토성산 아랫편 지역 ◦ 바람둑 : 마을아래 남풍받이 언덕 ◦ 궁산 : 동네 북쪽의 지역 ◦ 뒷묘등 : 동네 서쪽의 김해 김씨 묘역 ◦ 죽향골 : 성남마을로 가는 길쪽의 골 ◦ 낡은터 : 동네의 남쪽 지역 ◦ 둔쟁이 : 동네의 동쪽 지역 ◦ 거문고등 : 동네의 옆 동쪽 지역 ◦ 새터골 : 동쪽의 임야 지역 ◦ 꿩바탕 : 꿩이 많았던 남쪽 지역 ◦ 범바위등 : 고인돌 바위가 있는 지역 ◦ 모랫골 : 산정뫼 가는 길
6. 마을의 전설과 풍속 1) 토성산의 맥을 자른 일제 침략자 일제 침략자들이 조선에 인물이 배출되지 못하도록 산맥을 자르거나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는 매우 흔하게 들을 수 있거니와, 이곳 성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곧 토성산의 맥이 성남으로 뻗어 오는 부분, 중턱을 자른 흔적을 지금도 확연히 볼 수 있으니, 전언에 의하면 일제시대 그 맥을 자른 부분 돌 사이에서 몇 년간이나 붉은 물 이 흘렀다고 한다. 또 토성산에는 민보터가 있는데 그곳으로부터 성남으로 맥이 뻗어 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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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5) 우측 상단 능선(맥)을 자른 곳이 보인다.
2) 용대밭과 소금장수 성남리 마을 뒤에 용대밭이 있다. 옛날에 어느 소금장수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소금을 팔고 있었다. 날씨가 쾌청하여서 여러날 즐겁게 소금을 팔고 있었는데, 대밭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먹구름이 끼면서 억수같이 소낙비가 쏟아졌다. 이때 하늘을 쳐다보 니 용이 구름에 쌓여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소금 장수는 너무도 놀라서 자기도 모르 게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하고 외쳤다. 그러자 하늘로 오르던 용이 이 대밭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지금도 용대밭에 가보면 용굴이 있고, 전쟁 때 이 용굴에서 많은 사람이 피난했다고 한다.(『모양성의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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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4) 용대밭(성남마을 뒤편의 대숲) 실제로 이 대밭은 광산 김씨 성남마을 입향조인 서죽헌 공이 손수 심었다고 하며, 무성 하게 자라서 마을의 용머리가 되었다. 약 3,000여평이나 되어 죽제품 생활도구 제작에 유용하게 활용되었으나 여러차례 남벌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3) 청룡등 바위 전설 성남마을 북쪽 토성은 예로부터 난리가 나면 인근 주민들이 피난하는 곳으로 이름이 있 었다. 그 소문을 듣고 한양에서 칠보와 팔덕이가 말을 타고 피난을 오는데, 몇일을 달 려 성남마을 청룡등에 올라 토성으로 가고 있었다. 마침 날이 저물어가므로 말을 채찍질하여 달리다가 말이 쓰러져 타고가던 사람들도 떨 어졌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 칠보가 정신을 차려보니 팔덕이와 말이 죽어있었다. 그리 하여 말은 길가에 묻고, 팔덕이는 밭에 뉘워둔 채 숲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팔덕 이가 바위가 되어있었다. 칠보도 통곡을 하다 죽어서 큰 바위가 되었는데, 주민들은 팔 덕이 바위를 각시바위라 부르고, 숲 속에 가려있는 칠보바위를 총각 바위라고 부르며, 그 지역을 ‘바위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성남 김영균님의 조언) 4) 마을의 당골네 성남마을 우측(우백호등)에 거리를 두고 거주하던 당골 선득표(宣得表)는 3대째 내려오 고 있었다. 마을에 궂은 일이 있거나 산고가 들면 굿을 하고 무병장수를 축원하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매년 정원에는 꽹과리 ․ 징 ․ 장구 ․ 피리를 불며 걸립을 하는데, 집집마 다 쌀 한두말 또는 벼 1가마를 내주었다. 마을의 안녕을 빌고 악귀를 쫓아내는 역할을 하는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1950년경에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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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속놀이와 농악의 흥성 성남마을은 예로부터 민속놀이가 매우 풍성하고 흥겨웠다고 한다. 대개 정월 5일이 지 나면 농악을 점검하여 갖추고, 14일부터는 농악을 울리기 시작하여 밤이면 집집마다 지 신밟기를 하고 새벽 3시경에는 대나무를 태우며 소원을 빌었다. 날이 새면 마을민이 동원되어 짚을 모아서 줄을 아홉가닥으로 꼬아서 이를 모아 한 줄 로 만들어 남녀간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였다. 여자쪽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남자 쪽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전해오므로 보통 여자쪽이 이기도록 한다. 다시 모두 농악 에 맞추어 춤추며 즐기다가 숫당산(할아버지) 평나무(마을의 좌청룡 등에 서 있음)와 암 당산(할머니) 소나무(마을의 우백호 등에 서 있는)에 줄을 감으며 마을의 무사안일과 풍 년을 기원하였다. 보통 농악 놀이는 정월 그믐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기간에 남녀가 널뛰기며 강강수월래 를 즐겼으며, 또 5월 단오날에는 숫당산 평나무에 줄을 매고 남녀가 모여 그네타기 시 합을 하였다. 이와같은 민속놀이로 마을 단합을 이루었으며, 당산이 마을을 지켜주어 일제시대는 물 론 6․25사변때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도 마을이 모두 피해없이 무사하였다고 한다.
사진(25) 숫당산 평나무(청룡등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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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6) 암당산 소나무(백호 등에 위치) 성남마을은 민속놀이가 풍성했던 관계로 농악도 그 규모가 갖추어졌으며 그 솜씨도 상 당하였다. 예를 들면 1974년 모양성제에서는 14개면 농악경연대회에 성남리가 대산면 의 대표로 출전하여 당당히 최우상을 받았다. 이 때의 구성은 깡쇠 3명, 징 2명, 장구 2명, 통북 2명, 소고 6명, 양반광대 2명, 한량각시 3명, 창부 2명, 조리중 1명, 애기 업 은 사람 1명, 방울새 1명, 대포수 1명, 영기 2명, 농자천하지대본기 1명, 삽 1명, 괭이 1명, 납발 1명, 새납 1명 등 33명이 출전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아쉽게도 수년전(2005 년경)부터 민속놀이와 농악놀이 등이 모두 중단되었는데, 그 이유는 농촌인구의 고령화 때문이라고 한다 다만 이러한 전통이 있기에 근래까지 농악계의 명인으로 활약한 인물 들이 있는 바, 곧 농악단장이며 고수(북)인 김민현(金敏鉉), 도문화재 소고의 명인인 정 창환씨 등이 있었다고 한다(성남 김영균님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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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7) 농악경연대회 상장 4) 마을의 풍속설화와 인물 배출 성남리와 성동리 모두 태봉산(토성산)아래에 위치하며, 산맥이 남으로 뻗어와 다시 그 줄기가 동서로 갈라진 사이에 자리잡은 성남마을은 좌청룡 우백호가 분명하며, 산맥이 동으로 뻗다가 다시 북․동․서 3개로 나누어진 사이에 자리잡은 성동마을 역시 좌청룡 우 백호가 뚜렷하다. 특히 성동마을은 북․동․서의 줄기가 형성되어 있으므로해서 당겨진 활 의 몸체 형상을 이루고 마을 앞에 낮게 걸쳐진 구릉은 활줄을 이루고 있다. 궁산(弓山) 이란 지명도 이런 연유로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예로부터 인물이 날 것이란 말이 전해온 것이라 생각되는데, 또한 이로인해서 토성산맥이 일제에 의해 잘려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금도 이곳 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풍수형국과 인물배출에 대하여는 은연중 자긍심을 지 니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곧 근래의 생존인물들 중에서도 성남에서는 정길진 전 도 의회 의장(40년생), 김성환 전 전주대학교수(42년생)와 형제교수들을 거론하고, 성동에 서는 지자체의 군의원이 3인(김갑성, 정원환, 김범진)이나 된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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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을의 현황과 생활상 1) 세대주와 호구(인구) (1) 성남(관등포함) (
)는 가족 수
세대주 한상옥(2) 이봉임(1) 김일현(2) 정기순(1) 오필현(2) 오정자(1) 김성환(2) 김관임(1)
2011. 8월 현재
세대주 김정석(2) 김재현(2) 김광주(2) 정홍석(2) 김영해(2) 박장례(1) 신세원(3) 성병선(2)
세대주 김형석(3) 김백선(2) 김병수(2) 김안수(1) 김경애(1) 정정임(1) 김해규(1) 최석내(1)
세대주 김영하(2) 김명현(2) 김성일(2) 이정숙(2) 김영례(2) 최칠성(1) 신화심(1) 오분남(1)
세대주 라봉주(1) 김백수(2) 이면임(1) 장본례(1) 유집순(1) 김백선(2) 김영상(1)
세대주 김영길(2) 정정임(1) 김일수(2) 김명균(2) 김승현(2) 모일례(1) 성덕규(1) 계 46가구, 73명
(2) 성동 (
)는 가족 수
세대주 김인성(2) 이장예(3) 김순덕(5) 손주화(3) 김민성(3) 청봉은(3) 최정자(2) 손상옥(4)
2011. 8월 현재
세대주 김용섭(2) 김익성(1) 천병철(1) 김범구(1) 김양님(1) 고재은(5) 이재면(3) 천병선(2)
세대주 정류방(2) 박기순(1) 이양순(1) 김길성(2) 정류자(2) 김영춘(2) 정병환(2) 라봉남(1)
세대주 찬성기(2) 김범수(1) 최정순(1) 천아순(1) 천정자(1) 김춘성(2) 김순성(6) 박동복(2)
세대주 세대주 유차순(1) 최막내(1) 김도성(2) 김윤성(2) 정갑순(1) 김옥순(3) 김춘성(2) 이현금(1) 김조성(1) 정경진(!) 최화원(3) 천상철(2) 김범자(4) 박경호(11) 문귀례(2) 계 47가구, 108명
2) 성씨별 거주 현황(2011. 8월 현재) (1) 성남(관동포함) ◦ ◦ ◦ ◦ ◦
광산김씨 청주한씨 창녕성씨 영월신씨 여흥민씨
34가구 1가구 3가구 1가구 1가구
◦ ◦ ◦ ◦ ◦
나주나씨 1가구 풍천 임씨 1가구 진주정씨 1가구 화순오씨 1가구 기타 2가구
23가구 8가구 3가구 3가구 2가구 1가구
◦ ◦ ◦ ◦ ◦ ◦
장흥고씨 1가구 성주이씨 1가구 함풍이씨 1가구 밀양박씨 2가구 신안주씨 1가구 진주강씨 1가구 <천양기님(고수면 부면장) 자료제공>
(2) 성동 ◦ ◦ ◦ ◦ ◦ ◦
김해김씨 영방천씨 전주최씨 진주정씨 영성정씨 광산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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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을 환경과 주민생활 (1) 생활환경의 변화 예전에 성남마을은 논이 많았고, 성동마을은 야산과 밭이 많았다. 때문에 성남마을이 상대적으로 생활 형편이 나은 반면 성동마을은 매우 빈궁함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성동마을 주민은 가마니를 짜서 생계를 보태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이후 야산과 구릉이 집중 개발되면서부터는 수박과 무 등 밭 작물을 재배하여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어서 이제는 오히려 다른 마을보다도 부유한 농촌마을이 되었음을 자부하고 있으며, 유명한 고창수박(대산수박)도 바로 성동마을이 그 중심이라고 말한다. (2) 한일목장 이 마을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축산농장이다. 성남마을의 입구에는 유기축산물 생산목장인 <한 일목장>이 있다. 한상옥(韓相玉 39년생), 김성자(金成子 44년생) 부부가 운영하는 이 농장은 1978년에 이들 부부가 순천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시작하였으며 곧 고창 낙농업의 1세대라고 한다. 당시에 고창 에서는 최초로 3가구가 낙농을 시작하였는데, 그 중 2가구는 이미 2세가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으며, 오 직 이곳만은 창업주가 계속하고 있는 바, 이제 나이도 있으니 적임자가 있으면 바로 물려주고 싶다고 한다.
사진(28) 상하치즈(매일유업)의 협력사이기에 <한일목장>의 이름 앞에 <상하>를 붙이고 있다. 본 목장에서는 인증기관에서 인증된 유기농사료만을 공급하고 있으며, 목초의 경우에도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퇴비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현재 암소 110두 숫소 15두를 사육하며 매일 1t 가량을 집유하여 전량 상하 치즈에 납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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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관리가 잘된 청결한 축사와 대표 한상옥님
한편 성동마을 길 건너에는 규모가 큰 축산장 <대산양돈>이 있다. 이 농장대표는 성동 리 태생의 정원환(57년생)전 군의원이다. 농장은 1986년에 설립되었으며 현재 사육두 수는 1만 천 오백두라고 한다. 고창군 내에서는 두 번째의 큰 규모인데, 무엇보다 돈사 의 시설이 자랑할 만하다고 한다. 그것은 무창돈사(無窓豚舍) 곧 창문이 없는 돈사로서 환기와 실내온도 등이 센서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조절되므로 매우 청결한 환경을 유지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매우 위생적이어서 구제역 같은 질병에도 피해를 보지 않는다 고 한다.
▲창문이 없는 대산양돈과 정원환 대표 (3) 성동보건소 농촌이 고령화 되면서 주민생활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는 곳의 하나가 보건소이다. - 35 -
이곳 성동마을
에 <성동보건소>가 자리잡고 있는 바, 1985년 설립되었다. 현재는 제 3대 유숙희 소장(간호사)이 1990 년 이래 계속 근무하고 있다. 20년이 넘는 장기간 한 곳에 근무하는 이유는 주민들을 철저히 파악하여 각각의 처지에 적합한 맞춤형 서비스를 하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맞춤형 방문 보건사업>이 바로 이러한 취지를 살린 것이다. 관할 구역은 대산면 중산리(중산 ․ 곡촌 ․ 미동)와 성남리(성남 ․ 성동) 로서, 약 250세대 524명을 대상으로 진료(오전)와 방문활동(오후)을 한다. 대체로 연간상반기와 하반 기에 전세대를 1회씩 방문하며, 만성질환자의 경우는 매주 또는 1달 ․ 2달마다 방문하는 경우도 있으 며 농한기에는 운동지도를 병행하고 있다.
사진(31) 성동마을 뒤에 있는 성동보건소
▣ 자료조사에 도움주신 분 김민성(55년생)성동리 이장 김범진(59년생)전 군의원 김성환(42년생)전 전주대교수 김영균(35년생)성남리 김조성(47년생)성동리 이기화 전 고창문화원장
유숙희 성동보건소장 윤길상(35년생)무송윤씨 총무 정길진(40년생)전 전북도의회의장 정원환(57년생)전 군의원, 대산양돈대표 천양기 고수면 부면장 한상옥(39년생)한일농장대표 (가나다순)
▣ 참고문헌 茂長邑誌一(1904) 松沙誌一(1915) 茂長輿地新覽(1921) 朝鮮寰輿勝覽(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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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沙文獻績(2007) 群豹一斑錄(2011) 湖石遺稿(1989) 永翠世蹟(1998) 渊渊堂文稿 高敞郡誌(2009) 高敞郡文化遺蹟分布圖(원광대학교, 2005) 牟陽城의 얼(2009) 고창의 마을유래(고창문화원, 2003) 고창성씨의 입향유래(고창문화원, 2007) 穎陽千氏大同世譜 金海金氏 三賢派 大同譜 光山金氏 棲竹軒公派譜 晋州鄭氏 節制公派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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